촛불 정권, 일본과 숙명적 갈등에 빠져들다
등록 :2020-11-03 17:21수정 :2020-11-04 02:38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09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3년8개월 만에 승소 판결을 얻어낸 2018년 10월3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피해자 이춘식(오른쪽)씨가 소감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일본의 우려를 받아들여 대법 판단에 개입한다는 것은 촛불의 염원을 받아안은 문재인 정부가 사법 적폐에 가담한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 판결은 매우 복잡미묘한 ‘내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법 판결의 결론은 2005년 이후 한국 정부가 지켜온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2018년 9월18~20일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는 약속을 받아낸 문재인 대통령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한-미 정상회담과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평양공동선언의 성과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문 대통령은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진전된 합의가 있었다” “이제 북한의 핵 포기는 북한 내부에서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식화됐다”고 말했다. 트럼프 역시 “2차 미-북 정상회담을 머지않은 미래에 하게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문 대통령의 26일 유엔 총회 연설은 한국인들이 오매불망 염원해왔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향한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 찬 감동적인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은 오랜 고립에서 스스로 벗어나 다시 세계 앞에 섰”다며 “북한이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이끌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판을 벌여줬으니 이제 북이 세계 앞에서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할 차례였다.
초미의 관심 속에 이뤄진 리용호 외무상의 29일 유엔 총회 연설은 한국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리 외무상은 “(6·12) 조-미 공동선언이 원만히 이행되려면 수십년 동안 쌓아온 불신의 장벽을 허물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조·미 두 나라가 신뢰 조성에 품을 들여야” 하는데도 “미국의 상응하는 화답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에 대한 북의 결론은 “그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을 해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에 요구할 ‘상응조처’의 내용을 밝혔다. 리 외무상은 2017년 말 이후 북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멈추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며, 그에 비해 “(유엔) 제재 결의는 해제되거나 완화되기는커녕 토 하나 변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북한이 원한 것은 ‘종전선언’이란 정치적 선언이 아닌 향후 경제개발을 위해 꼭 필요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의 해제’였다. 영변 핵시설과 유엔 제재를 맞바꾸려는 북한의 시도는 다섯달 뒤 ‘하노이 노 딜’이란 파국을 불러오게 된다.
리 외무상의 연설이 이뤄지기 나흘 전인 25일 뉴욕에서 한·일 정상이 만났다. 이 무렵 일본은 한국에 말 못 할 불만을 쌓아두고 있었다. 첫째 이유는 한국이 한·미·일 3각 공조를 통해 북한이 진심으로 핵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대신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역사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2·28 합의를 무력화했을 뿐 아니라, 곧 나오게 될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우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일본 총리관저 자료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징용공 문제에 대해 우리 나라의 기본적 입장에 기초해 다시 한번 문제 제기를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만, 청와대 자료에는 12·28 합의의 결과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소개돼 있을 뿐이다. 이튿날인 26일 이뤄진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한국은 대법 판결에 대한 우려를 전하는 고노 다로 외무상의 발언을 생략한 채 “2주 뒤로 다가온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발표 20주년을 맞아 실질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확인했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이는 정부가 대법 판결에 대한 일본의 깊은 우려를 의도적으로 무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은 일단 불만을 눌러 참았다. 남북이 주도하는 ‘대화의 흐름’이 70여년간 이어진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를 단숨에 허무는 상황이었다. 이 움직임이 이어지는 한 일본은 국익에 치명적인 해가 될 ‘재팬 패싱’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화 흐름에 동참해야 했다. 아베 총리는 26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의) 납치, 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한 다음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한다는 (2002년 9월 평양선언에서 밝힌) 일본의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이 가진 잠재성을 풀어내기 위한 조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한국의 ‘의도적 무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는 2016년 말 ‘촛불 집회’란 거대한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의 숙명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의 공백’을 통해 아이들의 죽음의 절규에 대응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스스로 입증한 무능한 이들이었고, 12·28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망각하겠다는 아베 정권의 손을 들어준 불의한 이들이었다.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 양승태의 대법원은 ‘상고법원 설치’란 대법원의 숙원 사업과 강제동원 피해배상 판결을 교환하려 한 ‘사법 적폐’의 소굴이었다. 대법원 기획조정실이 2015년 3월26일 작성한 ‘상고법원 관련 BH(청와대) 대응전략’이란 문건을 보면, 청와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 대해 청구기각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기대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묘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언급대로 대법원은 이춘식(96) 할아버지 등 원고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재판에 대한 2012년 5월 원고 승소 취지 파기환송 판결의 최종 결론을 무려 6년 넘게 미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일본의 우려를 받아들여 대법 판단에 개입한다는 것은 촛불의 염원을 받아안은 문재인 정부가 사법 적폐에 가담한다는 것과 같았다.
마침내, 10월30일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이춘식씨 등 4명이 일본제철(판결 당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일본 기업이 원고들에게 1억원씩을 배상해야 한다는 원심을 확정했다. 이 판결의 핵심은 1965년 한·일이 맺은 청구권 협정은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위안부 문제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까지 포괄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부부가 이혼해 재산분할(청구권 협정)을 끝냈다 해도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실이 있다면 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은 남아 있다는 논리였다. <한겨레>는 이튿날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을 ‘‘재판거래’로 지체된 정의…징용피해자, 하늘서 웃을까’로 달았다.
그러나 이 판결은 매우 복잡미묘한 ‘내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법원의 결론이 2005년 이후 정부가 유지해온 입장과 배치됐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만들어진 민관 공동위원회는 2005년 8월26일 한·일이 아직 해결하지 않은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범위를 △위안부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 △원폭 피해 등 사실상 3개 문제로 한정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권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보상 문제는 한국 정부가 자체 예산으로 해결하고 남은 3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일본 정부와 외교 교섭을 벌인다는 방침을 유지해왔다. 대법 판결의 핵심은 이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범위를 강제동원 문제 전반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이로써 모든 강제동원 문제가 ‘미해결의 과제’가 되고 말았다. 물론, 2005년 정부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강제동원은 일제의 불법적 한반도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물질적 총체적 피해”라는 논리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을 뿐(<「국무총리실 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 활동」 백서>, 42~43쪽), 원고들이 한국 법원에서 ‘최종 승소’한다는 것까진 예상치 못했다.
일본은 이 판결이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쌓아온 양국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사안이라 판단했다. 대법 판결이 나온 직후인 30일 오후 4시21분 아베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강제동원 문제는 “1965년 일-한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 이번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봐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고노 외무상도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법의 지배가 관철되는 국제사회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판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뒤, 잇따른 담화에서 “극히 유감이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난제’인 만큼 정부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는 판결 당일 “판결과 관련된 사항들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며 “제반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부의 대응 방안을 마련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틀 뒤인 11월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두번째 북-미 정상회담이 눈앞에 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조만간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일본이 눈을 빼고 기다리던 대법 판결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연내 답방은 끝내 무산됐고, ‘면밀히 검토’한다던 정부의 대응 방안도 해를 넘기도록 나오지 않았다.
※ 10회에선 한-일 간 신뢰의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린 ‘해상자위대의 위협비행 및 한국 해군의 레이더 조준’ 사태를 다룹니다.
길윤형 ㅣ 통일외교팀 팀장.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8381.html#csidx374470b939bed72bbe86f124795c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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