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5

[한일관계][인물] 오무라 마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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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인물] 오무라 마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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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쉽게 위안부 할머니나 한국에 사과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과합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은 정치가들입니다. 혀로 사과한다고 하고, 사과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요. 사과한다고 말할 시간이 있다면 한국을 공부해야 합니다. 더욱 한국을 공부하고 공부하는 것이 사과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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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알려고 하는 것은 모든 관계에서 서로 모두가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 한일관계, 남북관계, 남녀관계, 부모자식관계, 종교 간, 민족 간 관계들.





Eung Gyo Kim
23 stDaSSepfcrolcmensmboeuocr S2ecg0rneer18d ·

【두 문장이면 충분하다】
** 페이스북 공유 외 다른 곳에 퍼가지 않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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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두 문장 이상은 필요없다. 그는 평생 거의 두 문장으로 말했을 것이다. 말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하기에 두 문장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말더듬이가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말이 느리고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다. 말을 줄이면 상대의 말을 더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수를 줄이면 힘을 비축해서, 그 힘으로 글을 읽거나 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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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때마다 눈높이에 맞는 스승을 만나는 사람은 복을 타고 난 사람이다. 진짜 스승은 가장 힘들 때 심장을 뛰게 하는 신선한 산소다. 진짜 스승은 가장 절망했을 때 다가온다. 그를 생각하면 초연하고 넉넉하게 견딜 수 있었다(https://bit.ly/2SiDN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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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십여 년의 일본 생활 후에도 그의 삶은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87년 이십대에 처음 뵈었으니까 삼십 년 이상을 뵈었다. 그간 있었던 일은 단편이 아니라 장편소설로 써야할만치 켜켜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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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칠 년만에 고향 같았던 도쿄를 다시 찾았다. 매년 일본에 한두 번은 갔지만 후쿠오카, 나가사키, 홋카이도, 오사카, 교토, 고베 등지였다. 부러 도쿄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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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노테선 전차를 타고 도는데, 모든 역에서 있었던 사연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도착한 다음날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가기 전에 십년 간 근무했던 와세다대학을 통과해서 와세다역에서 도자이센을 타고 이치가와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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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과 밭이 있었던 시골 동네에 새집들이 많이 세워졌다. 선생님 댁은 예전과 같았는데 다만 고양이 두 마리가 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오랜만에 선생님과 밀린 얘기를 했다. 특히 지난주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하셔서 기뻤다. 선생님을 따르며 함께 하는 귀한 학자들(https://bit.ly/2Q121dv)이 적지 않다. 그 자리에 꼭 계셨어야 할 분 이야기부터 꺼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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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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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김윤식 선생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
선생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이셨다.
"몸이 불편하셔서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대신 사모님이 말하셨다.
"힘드시긴요. 글쎄 김윤식 교수는 죽지 않았다며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내가 먼저 가야 하는데 왜 그가 먼저 갔냐고 ... 김윤식 교수가 왜 죽냐고 안 죽었다고 하셨어요."
가장 친했던 친구의 죽음을 선생은 끝까지 믿지 않으려 했다. 자신도 얼마 안 있으면 동행할 것이니 따로 배웅할 필요 없다는 자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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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도 건강이 좋지 않다. 뇌, 심장, 신장 세 기관은 이미 유효기간을 다했다고 한다. 뇌혈관이 막힌 그가 쓰러져 조형술을 하고 일어나셨을 무렵 나는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후 지금까지 내 통장에는 언제든 일본에 오갈 수 있는 비상금이 저축되어 있다. 만약 선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흔들리는 내 눈시울만 봐도 사모님은 알아차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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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자기 장례식 같은 건 절대 하지 말래요. 죽으면 절대로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말라 하셨어요. 그럼 나는 나쁜 아내, 자식들은 불효자가 되잖아요. 그래도 절대 연락하지 말라는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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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는 날 여러 사람, 특히 한국이나 중국에서 장례식으로 찾아갈 사람들이 염려되셨을 것이다. 조용히 듣기만 하시는 선생께 분위기도 띄울 겸 내가 재밌는 말씀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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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선생님께서 『풍경과 계시』(1995)라는 저서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오무라 마스오라고 쓰셨지요. 선생님께서 김윤식 선생님 책 번역하실 때 오자와 각주 틀린 내용들을 잔뜩 편지에 써보내서, 그때 김윤식 교수가 큰 충격을 받았다죠. 그때부터 오무라가 무서웠다고 쓰셨어요."
조용히 듣고 있다가 과거가 기억나는지 선생 얼굴에 잃어버린 장난감 찾은 소년 웃음이 슬그머니 번졌다.
"『한일문학의 관련양상』이라는 책이었어요."
"네, 그 책 일본어로 번역하실 때 얘기였죠. 김윤식 선생님께서 이렇게 쓰셨어요. 내가 발표할 때 오무라 선생이 질문도 안 하고 평가도 안 하고 뒤에 앉아 있으면 그 순간이 제일 무섭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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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사모님이 이제는 파안대소하셨다.
사실 그가 무서울 때는 정말 싸늘했다. 1999년이던가. 한국에서 한 노학자가 내 연구실에 찾아왔다. 연구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한국에서 꽤 많이 알려진 일본문학 학자였다. 여러 학회의 학회장을 역임했던 대표학자였다. 그가 올 때까지 유명한 방문객을 잘 모셨다. 그가 오셔서 한국에서 온 노학자를 선생님 방으로 모시고 갔는데 첫장면부터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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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어서 그만 실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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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장도 아닌 한 문장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노학자를 왜 그렇게 싸늘하게 대하셨냐고, 후에 물으니 그는 두 문장으로 답하셨다.
"표절해서 논문 쓴 사람입니다. 저런 사람과 만나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내 가슴에 얼음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모습은 아주 드물어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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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그가 드물게 내 말에 곧바로, 그것도 두 문장을 넘어 세 문장으로 말씀하셨다.
"김윤식 선생이 도쿄대학에 유학할 때, 택시 타고 홍고 도쿄대 정문에서 이렇게 말했대요. 고코데 고로시데 쿠다사이."
말이 끝나자마자 멈칫했다가 폭죽처럼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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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코데 고로시데 구다사이는 '여기서 죽여달라'는 뜻이다. 고코데 오로시데 구다사이 곧 '여기서 내려 주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오로수[降ろす, おろす]를 코로수[殺す, ころす]로 착각해서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얼마나 놀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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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처음 듣는 얘기도 말씀해주셨다. 아니 오래 전에 들었는데 잊었던 이야기다.
"김 선생님, 임화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는가』 아시죠?"
"예, 한국전쟁이 나고 1951년에 낸 시집이었죠."
"그거 김윤식 선생님께서 번역 발굴했다고 해서 1980년대 중반에 한국에 처음 공개된 시집이었죠."
"네, 선생님, 그때 김윤식 선생님 잡혀가지 않을까 모두 걱정했었어요."
"실은 그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이 시집 전문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와세다사회과학원에서 내는 학술지에 발표했었어요."
"네."
"김윤식 선생은 내가 번역한 일본어 시를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출처를 밝혔지요."
"네? 근데요?"
"그거 사실이 아니예요. 김윤식 선생님이 임화 시집 원본을 여기서 드렸는데, 위험하니까 내가 일본어로 쓴 걸 번역한 것처럼 했던 거예요."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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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황당했던 시대였던가. 김윤식 교수님이 그 시집을 소개했을 무렵, 나는 루카치 독일어 전집과 레닌 저서 몇 권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처음 경찰서에 끌려 갔다. 1986년 10월 건대 항쟁으로 체포된 후배들 집에 내가 빌려준 책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책을 어떻게 구했냐며 용산경찰서의 성실한 형사들은 친절하게 윽박질렀다. 시인 신동엽 연구에 몰두해 있는 나를 형사들은 학부 운동권의 배후조정자로 만들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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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조사실 저편에서 아버지가 흰 봉투를 형사에게 건네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불구속기소로 나오던 날 아버지는 경찰서 앞 함바집 같은 식당에서 추어탕을 사주셨다. 힘내, 사는 게 쉽지 않아, 라는 말도 없이 아버지는 부추를 한웅큼 추어탕 위에 올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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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오니 도쿄에서는 그 책들은 고서점에 뒹구는 싼 책이었다. 와세다대학 도서관 서고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책들이었다. 아무 꺼리낌없이 날 좀 봐달라며 바로 그 책들이 엄청 꽂혀 있었다. 저 책을 갖고 있다는 죄목으로 아버지께 불효를 했던 나는 서고 끝에 쪼그리고 앉아 입 틀어막고 소리없이 서럽게 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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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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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와서 요코하마 부두에 가서 쌀 나르는 일을 하려 했다. 조지 오웰 같은 위대한 생각이 아니라, 그냥 노동자들이 쓰는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다. 생활보증인이었던 그는 깜짝 놀라며 내가 도쿄대에서 1년을 지내자 곧바로 1998년 와세다대학에서 일할 것을 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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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리가로얄호텔에서 삼십여 명의 신임교수들과 임용식을 했다. 불란서 부페를 나누는 이런 자리에 내가 있어도 되나 싶었다. 총장은 신임교수들에게 '열려 있는 와세다 정신'을 강조했다. 깜냥도 안 되는 나를 그는 격려하며 임용시키셨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과 내가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을까. 놀란 것은 내가 소속된 연구소에 한국어 담당 교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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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키 노리코와 화가 이중섭의 아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신 NHK 아나운서 김유홍 선생님, 한국의 양반을 연구하신 고 김학현 선생님,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게이오 대학 출신으로 서울대에 유학 갔다가 십오 년 가까이 감옥에 있다가 탈출하다시피해서 일본에 온 김 아무개 선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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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유학 온 것은 일본 공부가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옥에서 나온 뒤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하여 도피 비슷한 유학이었다. 고작 몇 개월 있었던 내 감옥생활은 거기서 15년 형을 살았던 김 아무개 선생 앞에서는 포클레인 앞에 삽질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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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유학생 간첩단, 그 분 이름 생각나지 않으세요?"
"글쎄 말이죠. 이름이 김 .... 누구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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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은 "둘이서 치매가 여기까지 꽉 찼어요"라며 손으로 목까지 가르치셨다. 다시 스승이 말했다.
"당시 김우종, 임헌영 선생님 등 민주화운동 하는 분들을 만나면 얼마후 그 분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내가 한국 분들 만나면 자꾸 간첩 혐의를 받았어요. "
라디오 수신도 안 되는 소니 워크맨을 한국 교수들에게 선물로 사주면 그걸로 북한 단파 방송을 들었다며, 정보부는 교수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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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국 교수들을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일본에 계신 분들만 학교에서 같이 일했죠."
두 문장에서 멈칫 하더니,
"한국인 전임교수를 내가 와세다에 임용시킨 것은 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기대와 달리, 나는 삼류 학자이며 D급 시인이다. .
분수에 넘친 대접을 십년 간 받았다. 적지 않은 연봉에 거의 주치의처럼 치료해주는 의료시스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학마다 가족여행 보너스 혜택 등 분에 겨운 대접이었다. 그 긴 기간을 나는 그저 흥청망청 지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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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공부만 하셨던 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분 연구실이 내 연구실 바로 위였기에 하루에 두어 번은 선생님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당시 나를 딱 한번 차갑게 대하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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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천황이 참여한 음악회가 있었다. 한일우호 전통음악회라는 행사였는데 일본국립극장에서 행사가 있었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수들이 초대되었는데 그때 천황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황이 나가고 들어올 때 모두 기립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해괴했는지 거의 이십여 분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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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쉬는 시간에 천황이 화장실 가는지 어디 가는지 또 일어났다. 모두 기립해서 천황이 나가기까지 서 있는데 음산한 침묵의 공간이 무덤 곁처럼 으스스 했다. 나도 계속 서 있어야 할까. 그때 곁에 앉아있던 와세다대학 영문과 일본인 교수는 혼잣말로 씨부렁 거렸다. 일어서지 않고 일본어로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듯 했다. 저 늙은이 왜 여기 와서 이 많은 사람들 바보로 만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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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신기한 체험을 한 듯 그곳에 갔다왔다고 말했더니 그는 딱 한마디 하셨다. 한 문장의 의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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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도 그런 자리에 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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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릴듯 말듯 한 그 말, 얼마나 싸늘했는지.
그후로 한 달간 선생님 곁에 가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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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나는 선생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다. 연구할 기회를 주셨는데 노숙인 활동이나 유학생과 교포들을 모아 촛불집회를 하고, 나이지리아 불법체류자와 살다가 내가 보호소에 갇히는 일도 있었다. 그깟 논문이 역사에 무슨 도움이 될꼬, 연구는 거의 팽개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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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희귀한 자료를 나에게 주셨는데 빨리 논문을 쓰기는커녕, 공부에 회의를 품고 밀알학교 등을 만들고, 돈을 모아 하얼빈에 안중근 장학금을 보내고, 대사관 영사가 말하길 거의 간첩 수준이라는, 평양을 너무도 좋아하는 민족학교 출신 와세다 학생을 추천하여 고려대에 보내는 등(그 학생은 미국인과 결혼해서 지금 미국에서 잘 산다) 문제 될 일만 골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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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마다 야행버스 타고, 오사카, 고베, 히메지, 치바 등지를 다니며 성경공부 인도하는 나를 학교에서 누군가가 통일교도가 아니면 오옴진리교 같은 위험한 종교인이 아니냐고 했을 때, 김 선생은 건강한 기독교 신자라고 그가 학교에 변호해주셨다. 김 선생 뒤에는 늘 천사가 있다며, 그는 신자도 아니면서 격려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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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구에 전념하지 않고, 연구실이 아닌 거리에서 연구하는 공부를 그는 알고 계셨다. 노숙인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자리에 학생들과 가는 것도 알고 계셨다. 그것도 공부라고 이해하셨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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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승이 자랑할만한 제자가 아니다. 그의 한국어판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 소명출판 Somyong Publishing) 마지막 권을 사진집으로 만든다고 사진을 보내라고 연락이 왔었다. 도저히 사진을 보낼 수 없었다. 내 앨범 파일에는 그와 찍은 사진이 너무도 많았다.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지를 찾아다녔을 때 사진, 니가타, 가마쿠라 등 여행사진, 매달 한 번씩 진행했던 조선문학연구회 사진 등 그와 지냈던 온갖 풍경을 사진들이 소곤대고 있다. 스승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 왔던 나는 사진을 한 장도 보낼 수 없었는데, 그 사진집 여기저기에 못난 제자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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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동주와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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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가기 전 나는 모 계간지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었다. 선생님의 글을 싣고 싶어, 발표 안 하신 글이 혹시 있는지 물었다. 그는 윤동주 묘지를 찾아냈고(https://bit.ly/2CvxAsk), 한국의 연구자들이 우습게 생각하고 있던 윤동주를 평생 연구해온 학자다. 당연히 윤동주에 관해 쓴 글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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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에 관해 쓴 글이 있기는 있어요."
"선생님 제가 한번 볼 수 있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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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일본어 독서체험. 윤동주가 일본에서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쓰신 논문이었다. 당연히 한국에 빨리 소개해야 할 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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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 논문 제가 만드는 계간지에 넣겠습니다."
그의 답은 반대였다.
"아닙니다. 아직 발표하지 못해요."
".... 아, 네. "
더 좋은 잡지에 발표하고 싶으신 까닭일까.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했다.
"한국 사람 누군가가 먼저 발표해야 해서요. 일본인인 내가 먼저 발표하면 안 됩니다."
역시 두 문장으로 선생은 답하셨다.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반 년 정도 지나 선생께서 연락 주셨다.
"이제 발표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학자가 먼저 발표했어요."
선생은 윤동주에 관한 연구를 한국인이 먼저 발표하기를 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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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와세다대학 학생들과 매년 9월 첫주에 한국문화기행을 했다. 전국 각지 의미있는 곳을 열흘 정도 버스 한대를 빌려 학생들과 다니며 역사며 종교며 문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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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일본군 위안부가 살고 있는 <나눔의 집>에 갔을 때 일이다. 학생들은 <나눔의 집> 역사와 전시실을 보고 말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할머니들이 너무도 친절하게 옛 일본어로 학생들을 맞아주니 학생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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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어둑해지고 돌아가는 버스에 탔을 때 학생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누구도 어떤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그는 마이크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날 나는 두 문장을 넘어 가장 긴 문장으로 말하는 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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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위안부 할머니나 한국에 사과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과합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은 정치가들입니다. 혀로 사과한다고 하고, 사과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요. 사과한다고 말할 시간이 있다면 한국을 공부해야 합니다. 더욱 한국을 공부하고 공부하는 것이 사과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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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중국문학박사인 그는 『열자』 등 중국고전을 번역하기도 했다. 60년대에 처음 한국문학을 접하고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그는 철저하게 공부하는 삶으로 한국인에게 다가왔다. 권성우 교수의 글 제목처럼 그의 삶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학문적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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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문학)을 비롯해 남과 북의 문학에 대해 오랫동안 담담한 애정으로 응시해 온 일본인 오무라 교수의 삶과 글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온전히 되새겨야 할 문화적 자산이리라. " - 권성우 <오무라 마스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학문적 여정> https://bit.ly/2V8R0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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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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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내신 책 중에 『조선의 마음-시로 만나는 조선』라는 일본어 책이 있다. 한국 현대시인의 시를 대역한 책이다. 이 책 교정 볼 때 참여해서 우리말과 일본어를 대조했다. 그런데 목차에 서정주가 없었다.
"선생님, 서정주는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며 친일이나 친독재 문제는 각주로 넣으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나의 말에 선생님은 낮고 단호하게 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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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는 빼려 합니다."
"그래도 한국어를 가장 잘 다룬 시인인데요."
내가 다시 말하자, 말이 느린 그는 한국어로 더 천천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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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본, 인에게 ..... 서, 정, 주를 소개하고 싶지 ....않, 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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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수는 서정주의 친일시는 운동장의 잔디밭에 비하면 한 뼘도 안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 한뼘의, 그 몇 편의 시로 인해, 누군가 일본 군대에 가고, 마츠오 누구처럼 가미카제로 자결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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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작가들의 바로 한 뼘도 안 되는 권유로 돌아가신 내 아버님은 자진해서 일본군이 되셨었다. 살아계실 때 아버님은 소설가 이광수 얘기를 가끔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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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 와서 강연했는데 유창한 일본어로 '와레라노 소고쿠 니뽄노 타매 다타카오우!(우리의 조국 대일본을 위해 싸우자)'고 했어. 청년들이 모두 감동 받고 흥분했지. 칼이라도 있으면 칼을 들고 미군을 찔러 죽일 기세였어. 나도 그랬지만 일본군에 끌려 간 것이 아니라, 이광수 연설 듣고 자진해서 가겠다고 했던 청년들이 몇 명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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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이광수 연설을 듣고 자진해서 갔다고 하셨다. 서정주가 쓴 전두환 찬미시로 인하여, 누군가 광주 시민을 오랫동안 폭도로 규정하고 증오했다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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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연구실 바로 아래 내 연구실이 있었다. 한국에서 학자나 정치인 등이 오면 내 방에 먼저 왔었다. 찾아온 사람들 중에 선생에게 상을 주려는 사람들이 간혹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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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묘지를 찾아내고, 친필을 찾아내서 민음사에서 책을 내셨던 선생님께 윤동주 문학상을 수여하려는 일이 있었다. 선생은 윤동주 문학상을 거부하셨다. 그때 그 이유를 말씀 안 하셨지만, 십여 년이 지나자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윤동주를 연구하자 말씀해주셨다. 윤동주를 가장 사랑했던 자신이 왜 윤동주 문학상을 받지 않으셨는지 두 문장으로 말씀하셨다.
"그런 상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상을 만든 사람들에게서 윤동주와 다른 마음을 느꼈어요."
조금이라도 사특한 배경이 있는 상은 이미 상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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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나 백석이나 윤동주는 평생 문학상을 받은 적이 없다. 이들은 문학상 받지 않았지만 영원한 사랑을 받고 있다. 윤동주를 가장 사랑했던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은 윤동주 문학상을 받지 않으셨다. 임화나 백석이나 윤동주나 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문학상을 받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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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을 거부하셨던 그가 2018년 한국번역문학상만은 받으셨다. 묻지 않아도 나는 직감한다. 상을 준 주체가 독재세력이 아니고, 그가 나와 함께 번역했던 도종환 시인 이름이 상장에 써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번역 일이야말로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필생의 숙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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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김학철 일본어판 소설 내셔야죠?"
내가 한국문학 기획위원으로 있던 후지와라 서점 대표와 만나 소설가 김학철 소설집을 내자고 대화 나눴던 십여 년 전이 생각났다. 후지와라 서점에서 나는 고은 시선집(https://bit.ly/2EIenVF)을 내고, 송기숙 소설집, 황석영 소설집, 김명인 평론집 등을 소개해서 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추측했던 그대로 말씀하셨다.
"한국번역문학상으로 받은 천만원으로 '김학철' 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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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 그의 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자꾸 나오려 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을 그와 공역하다가 자고 간 적도 있다. 내 나이와 같은 그 분의 막내 아들 방에서 잤었다. 몇 번 그런 날이 있었는데 그것도 이십여 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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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는 나에게 그는 봉투에 잔뜩 뭔가 넣어주셨다. 한국에 없는 윤동주 희귀 자료였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시도때도 없이 내게 자료를 주셨다. 훅 눈물이 나오려 했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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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 만약 일 나면 임헌영 선생님, 저와 심원섭 교수, 박성모 대표, 곽형덕 (Hyoungduck Kwak) 교수에게는 꼭 연락하셔야 해요. 약속해주세요."
"그래야죠. 암, 그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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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돌아오는 시골길에 지난 삼십 년이 떠올랐다. 전철을 타고 도쿄로 돌아오는데 창가로 한 장 한 장 빠르게 흑백사진 같은 영상이 지나갔다. 1987년 무렵 고려대 교환교수로 계실 때 처음 만났던 그는 부여문학기행에서 중국 팔로군 군가를 불렀다. 총각이었던 내게 이 아가씨는 어떻냐며 어떤 교수님네 따님 사진을 건내기도 하셨다. 1990년대초 처음 북한에서 윤동주 평론이 나왔다며 기뻐하며 내게 건네시던 모습. 십년 동안 근무하던 와세다에서 떠나 귀국하겠다고 했을 때 실망하시던 모습, 다음날로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백지수표 같은 추천서와 인감을 주시며 한국 어느 대학이라도 내 인감을 찍어 내 추천서를 넣으라고 하셨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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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끼고 존경했지만 이제 하늘로 떠난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소설가, 김윤식 교수, 재일조선인 김학렬 조선대 교수 등 얼굴이 차창에 보였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인 학자 임헌영 Hunyoung Yim 선생님 얼굴도 차창에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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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은 고독하게 내면 투쟁하는 존재다.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철저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는 존재다. 그는 얼마나 고독을 사랑해야 하는지, 고독 속에서 역사를 얼마나 냉정하게 봐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날 때부터 그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고, 고전에서 봤던 군자(君子)였다. 그의 가르침은 늘 두 문장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논문이었고, 두 문장의 가르침이었다. 두 문장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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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李昇燁, 정혜경 and 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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