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4

Park Yuha 김영도 서경식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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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피해자였던 우리지만, 우리 역시 ‘가해자의 폭력의 구조’가 내재화되어 있다. 그것을 되돌아보지 않고는 가해자의 폭력을 제대로 비판하기 어렵다.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선 내 안에 든 폭력마저 비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많은 피해자와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화해를 위해서>를 있는 그대로 읽어 주시는 분이 나타나서 기쁘다. 하긴 15년 전엔 그런 분이 더 많았다. 그랬으니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해 주신 분들이 있었던 거겠지. 양국 젊은이들이 함께, 평화의 외피를 쓴 폭력적 담론을 알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었다. <제국의 위안부>역시 컨셉은 다르지 않았다.
이미 여러사람이 언급했지만, 정경심재판에서, “진술한 사람들이 정치적 목적 또는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허위진술을 하였다는 등의 주장을 함으로써,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정에서 증언한 사람을 비난하는 계기를 제공하여 진실을 이야기한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였”다는 부분에는 나 역시 잠시 가슴이 아릿했다. “ 법정에서 증언한 사람”을 “박유하”로 바꾸면 내 얘기이기도 하니까. 심지어 진중권교수까지 가세했었으니까.
2008년에 시작된 서경식 교수의 나에 대한 비난은 그대로 고발장에도 살려져 있었다. 그 고발장을 받아들고서야 나는 서경식이며 윤건차, 그리고 김부자등 재일교포 ‘지식인’들이 시작한 나에 대한 억측과 비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었다.
고발 이후 나를 교활한 인용이나 하는 사기꾼 학자 취급을 했던 정영환을 만들어 낸 건 사실 이들이다. 이후 더 많은 이들이 나에게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둥 일본 돈을 받았다는 둥 하며 이들이 시키는대로 나를 조롱/비난했다.
나눔의집 소장이나 정대협 학자들조차, 생각하면 이들의 손바닥 안에서 논 셈이다. 물론 그들에겐 지켜야 할 것이 각각 있었으니, 기쁘게 그 손바닥 위에 올라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고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나를 “쓰레기”라는 둥 일본학술재단의 돈을 받았다는 둥 음해하는 이가 여전히 페친의 페친으로 존재한다.
Image may contain: text that says "언어의 감옥에서 화해를 路 위해서 어느재일조선인의초상 재일조선 어느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徐 京 植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박유하 주 이파리"
한동안 나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한국에서 발간되는 서경식 선생의 책을 대부분 따라 읽어왔다. 서경식 선생을 통해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되었고, 미전향 장기수로 복역했던 그의 형들 - 서승과 서준식의 책들을 감명 깊게 읽기도 했다. 미려한 글과 재일조선인으로서의 모국어를 잃은 디아스포라의 입장에 공감하며 그의 책들을 읽어왔다.
오늘 서경식 선생의 <언어의 감옥에서>의 3부에 나오는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글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이 2011도에 발간되었으니, 나는 아마도 책 발간 무렵인 2011년이나 2012년에 이 책을 읽었을 텐데, 지금 이 책 속의 글을 다시 찾아 본 이유는 내가 박유하 선생의 <화해를 위해서>을 읽었기 때문이다. 서경식 선생의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은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이다.
나는 박유하 선생의 <화해를 위해서>을 공감하며 읽었다. 식민지 피해국인 한국에서 오해받기 쉬울 ‘우리 안의 책임’을 용기 있게 말하는 박유하 선생의 학자적 양심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유하 선생은 전후민주주의 일본 사회에서 자라난 양심적 시민과 지식인에 대한 신뢰을 가지고 있고, 서경식 선생은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 이런 차이가 서경식 선생의 박유하 선생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나온 것 같다. 서경식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겪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로 인해 일본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자’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것 같고, 박유하 선생은 젊은 시절 일본에 유학해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것 같다. 박유하 선생은 가해자의 죄나 책임을 과장해서 부풀리는 것을 경계한다. 과장은 가해자의 역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유하 선생은 피해 사실을 가감 없이 보려하며 ‘피해자’ 자체를 ‘정의’로 만들지도 않는다. 이 부분이 위안부 문제에서 박유하 선생이 오해 받기 쉬운 지점인데, 이 지점이야말로 위안부를 구조의 폭력성 속에서 피해자가 된 약자로 바라보게 한다. 내가 읽은 서경식 선생은 국가주의를 반대하는 경계인이지만, 식민주의에 관해서는 식민 종주국에 대한 피식민 피해국의 저항으로서의 민족주의에 강고히 서있는 것 같다.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가해자의 사죄와 배상을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이런 ‘원리주의적 모럴’에 경직될 수 있다. 서경식 선생이 이런 원리주의적 모럴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재일교포에 대한 지문날인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난 그때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선 모든 사람이 주민등록증에 지문을 새기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지문날인 하는 것에 대해서 왜 이리도 한국 사람들이 비분강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일본의 군사주의를 우려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한국은 중동 전쟁에 세계적으로 순위에 들만큼 많은 군인을 파병한다.
역사적으로 피해자였던 우리지만, 우리 역시 ‘가해자의 폭력의 구조’가 내재화되어 있다. 그것을 되돌아보지 않고는 가해자의 폭력을 제대로 비판하기 어렵다.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선 내 안에 든 폭력마저 비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많은 피해자들과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서경식 선생의 우려처럼, 피해자로서 내 안의 가해성을 인정한다고 가해자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해자의 책임을 더 정확하게 물을 수 있다고 본다.
Naran Jung, 李昇燁 and 6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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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뭉클해져서 감상적인 글을 썼지만 진중권선생이나 쓰레기 운운 사람한테 별 감정은 없다. 후자는 페친 담벼락에서 자꾸 보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차단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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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
    • Park Yuha
       생각난 김에 ”和解のために-教科書・慰安婦・靖国・独島 ” 몇 권 일본인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야겠네요. 그럼 미리 Merry Christmas 선생님. 良いお年をお迎え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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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m
  • 좋은 글 공유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주네요. 개인적으로 (사석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교수님의 ‘화해를 위해서’를 읽고 크게 감화를 받았었는데, 교수님을 공격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화해’의 시도, 혹은 언급 그 자체를 반대하고 심지어 하나의 혐의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 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영원한 갈등구조인가, 였습니다만, 그에 대한 대답은 현정권에서 이미 명백하게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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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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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치관
       갈등의 생산과 증폭을 통해 자체 내부의 모순을 감추고 외부의 적으로 투사함으로서 단결된 의지. 이렇게 쓰다보니 남한과 북한이 하나되는 꿈에 상당히 가까워져 왔음을 느낍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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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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