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明淑
31 m ·
페친 중에 독서 연말결산으로 10권을 뽑아 올리신 분이 계셨다. 흉내내고 싶지만 엔진이 안 걸린다. 그래도 올해에 나를 뒤흔든 책 중에 "붉은 기와집"이란 책이 있다. 독서 메모를 올려본다.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이 될지 몰라서다. 다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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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瓦の家 -川田文子-1987.2
또 하나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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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서 위안부로 갔던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키나와에 남아 인가와 떨어진 사탕수수밭에서 생활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잡지기자였다가 프리라이터가 된 가와다씨가 배봉기 할머니를 취재후 정리한 르포루타주.
배봉기 할머니의 평탄하지 않은 인생의 배경에는 1930년대 농촌의 빈곤이 크게 작용했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가에서 거주하며 머슴살이를 하고 6살 3살의 남매는 집을 나갔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엄마도 없이 아이들만 살았다. 이후 친척집에 맡겨지다 8살에 민며느리로 남자없는 집에 식모처럼 여기저기 보내지며 남의집살이. 춘궁기로 반이상이 굶으며 지내던 시절. 결혼도 하지만 책임감있이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스스로 집을 나와 여기저기 떠돌며 20대를 보내고 29에 흥남에서 여자소개인의 일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이끌려 흥남 서울 부산 오키나와로 이동.
-1938 성병예방관리 등을 목적으로 군이 직접 관리하는 육군오락소를 설립. 내외로 평가가 좋지 않아 경영을 민간 업자 위탁. 군이 감독. 민간에는 성병환자가 많고 중국인은 첩보활동이 걱정되어 군전용 위안소를 둔 이유.
-경성일보 소화19년 1월 18일
접객업자가 여자 정신대를 결성( 위안부를 정신대로 명명한 것과의 관련?)
-피복공장 직공, 종군간호사 보조, 군대 세탁 취사 등의 사기로 모집되었다. 일부 는 정신대로 피복공장 군수공장에서 일한 사람도 있지만 그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정신대로 모집되어 보내졌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일본 정신대는 종군위안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 정신대모집이 점점 곤란해져 각면 각읍장 경찰에 협력시켜 인원을 할당시켜 강행.
-전쟁말기에는 공적기관이 직접 대량으로 폭력적으로 모집 . 元山口県労務報国会下関支部動員部長 吉田清春-私の戦争犯罪 朝鮮人強制連行- 에서 제주도에서 젊은 여성 205명을 일주일만에 모음. 어장 목장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을 군대와 경찰의 협력을 받아 그자리에서 트럭에 싣고 연행. 이처럼 조선에서 모은 위안부가 8만이라고도 10만이라고도 함.(책이 나온 이후에 요시다는 1996년에 주장을 섞은 창작물임을 인정..아사히신문이 진실로 보도하여 문제가 됨--요시다 증언을 엎을 자료가 없어 정부군경이 가담했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짐--요시다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출판 된 후에 제주신문기자가 조사하여 의문제기..이후 일본인 역사가가 조사하여 날조라고 판단 )
-배봉기할머니등 7명은 흥남을 출발 1년 정도 걸쳐 오키나와 渡嘉敷섬의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 이 때 도카시키 여자청년단의 강한 항의를 받는다. 그 논리는 도가시키는 강한 정조관념으로 병사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오키나와나 이웃섬들과 달리 가난해도 오이랑이 된 사럼들도 없었다는 것..위안소 설치가 섬의 풍기문란을 가져온다. 군의 대장이 청년단장을 찾아 오히려 당신들을 지키려고 한다고 설득하여 반대운동을 접음..(위안부 설치 운동의 반대운동이 성매매반대라는 근본적인 것이었다면 군에 탄압되더라도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 풍기문란이라는 자신들의 정조가 범해진다는 논리여서 오히려 위안소가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기반을 잃음)
-미군의 도카시키 폭격으로 위안부도 일부 죽고 배봉기할머니들은 군의 취사담당을하며 패전을 맞는다. 섬사람들은 포로가 되면 잔혹행위를 당한다는 군의 쇠뇌로 산골짜기에 모여 자결한다.
-패전을 맞아 오키나와 본섬으로 나와 수용소에 살며 스스로의 운명에대한 터트릴 곳 없는 분노로 매일매일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수년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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