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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은 사기 횡령 배임 등 8개 혐의로 기소됐고, 박유하는 고발당해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윤미향 페이스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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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기자
오는 28일은 2015년 12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어렵사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한·일 정부 간 합의’를 타결했던 날이다. 하지만 2017년 5월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합의문을 문제 삼는 바람에 지금은 사실상 휴짓조각이 된 상태다. 전 정부의 성과를 적폐 취급하고도 실질적 해결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아 위안부 문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5년 전 47명이던 생존 할머니는 이제 16명으로 줄었고 한·일 관계는 더 꼬였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양국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실제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그 후신인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그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사실 위안부 관련 민간 활동은 윤정옥·이효재·신혜수·정진성 등 초기 정대협을 이끈 여성학자들이 주도했다. 하지만 정대협이 막강한 권력집단이 되는 과정에서 윤미향(56) 전 정대협 상임대표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그는 위안부 운동을 배경으로 21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 배지도 달았다.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제는 또 한 사람의 여성을 빼놓을 수 없다. 『제국의 위안부』로 논쟁을 일으킨 박유하(63)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다. 정대협과 나눔의집 등 국내 위안부 운동과 기존 학계의 연구에 비판적 잣대를 들이댄 진보 학자다. 어떤 인연이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윤미향과 박유하는 비록 경로는 달라도 일제 강점기에 짓밟힌 여성 인권을 상징하는 위안부 문제를 1990년대 초부터 주목한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두 여성의 위안부 해결 방법론은 달랐다. 윤미향은 일본의 법적 책임과 배상을 우선했고, 박유하는 정확한 사실관계 규명과 화해를 위한 폭넓은 과거 이해에 방점을 찍었다. 이처럼 상이했던 두 여성은 공교롭게도 30년이 지난 지금 위안부 문제가 실타래처럼 꼬인 것처럼 위안부 문제에 얽혀들면서 한국사회에서 '두 마녀'로 낙인찍혔다. 일부 좌파는 박유하가 일본 편에서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깎아내려 명예를 훼손했다고 비난한다. 우파는 윤미향을 사리사욕에 눈멀어 위안부 할머니를 속였다고 손가락질한다. 이런 비판을 부인하는 '두 마녀'의 행로를 역추적해봤다.
윤미향 전 정대협 상임대표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수요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윤미향은 1964년 10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를 취득했다. 윤미향은 "1991년 8월 14일 국내에서 처음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김학순(1922~1997) 할머니 인터뷰를 보고 정신대 여성(이후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1992년 정대협 간사로 들어가 궂은일을 도맡아 했고 성실함과 추진력을 평가받아 2008년부터 정대협 상임대표를, 2018년엔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맡았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1997년 일본 측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아시아 여성기금을 보내자 접대협 측이 할머니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돈을 받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정대협이 주장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사죄·배상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2011년 8월 헌법재판소가 한국 정부의 위안부 해결 노력에 대해 위헌 결정을 하고 그해 12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처음 세우면서 윤미향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급격히 더 커졌다. 지방에서 위안부 운동을 해온 한 여성 원로는 "윤정옥 선생 등이 시작한 정대협 활동은 윤미향이 주도하면서 이상해졌다"며 "정부도 헌재 결정 이후 정대협과 윤미향에 끌려다녔다"고 전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자 윤미향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가 지난 5월 대구에서 윤미향 전 정대협 상임대표(민주당 비례 의원)와 정의기억연대의 비리 의혹 등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미향 민주당 의원(비례)이 당선인 신분이던 지난 5월 29일 국회에서 정대협과 정의기억연대 활동 관련 회계 부정과 비리 의혹 등을 해명하는 중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의원직 사퇴를 거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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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 5월 이용수(92) 할머니가 윤미향과 정대협의 치부와 비리를 폭로하면서 급반전됐다.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고 개원 하루 전날 기자회견을 열어 식은땀을 흘리며 해명했지만, 지난 9월 사기·횡령·배임 등 8개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지면서 마녀 낙인이 찍혔다. 특히 중증 치매를 앓던 길원옥(92) 할머니를 속여 7920만원을 정의연에 기부를 유도해 준사기가 적용됐다. 최근엔 코로나19 확산 와중에 와인 파티를 즐겨놓고 길원옥 할머니 생일을 언급해 할머니를 또 이용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박유하는 1957년 3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고향은 전남 여수다. 고교를 졸업한 뒤 1976년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 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1991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위안부 행사에서 무료 통역 봉사를 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다. 박유하는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반전 진보 지식인으로 높이 평가받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박사 논문을 발표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2013년 11월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을 방문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대화하고 있다. 박 교수는 기존 위안부 활동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을 낸 뒤 고발당해 재판을 받고 있다.[박유하 제공]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 세워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흉상 앞에 선 박유하 세종대 교수. 장세정 기자 박유하가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깊이 파고든 것은 2003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을 처음 방문한 것이 게기였다. 2005년 출간한『화해를 위해서』에서 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등 민감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이 책을 내자 재일교포 지식인 일부가 박유하에 대해 "일본 우파에 친화적"이라거나 "타협을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을 거론하며 비판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일본 비판을 많이 담았고 진보적인 일본 아사히신문의 상도 받았다.
2013년 7월『제국의 위안부』 출간 초기 국내 주류 언론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호평했다. 내친김에 그해 11월 박유하는 사죄와 보상에 대한 할머니들의 생각을 직접 듣기 위해 나눔의집을 다시 찾아갔다. 거기서 배춘희(1924~2014) 할머니를 만났고 6개월간 수십 차례 나눈 대화를 2014년 4월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라는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는 배춘희 할머니의 주장을 가감 없이 공개해 파문을 일으켰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 납골당을 찾아 배춘희 할머니 등을 추모했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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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6월 8일 배춘희 할머니가 갑자기 별세하자 나눔의집은 위안부 할머니 9명을 원고로 같은 달 16일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와 출판사 대표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책을 낸 지 10개월 만이었다.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기술했다는 등의 이유를 댔다. 혐의를 부인했지만, 마녀 낙인이 찍혔고 『제국의 위안부』는 검열하듯 34곳이 삭제된 뒤에야 2015년 6월 제2판을 찍을 수 있었다.
당시 소송은 표면적으로 나눔의집이 주도했지만, 암묵적으로는 정대협이 개입했다는 말이 파다했다. 실제로 고발장에 "정대협이 이룬 성과를 무시하면서 정대협 활동 전체를 폄훼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 소송을 통해 윤미향과 박유하의 위안부 문제 인식과 해결 방법론이 간접 충돌한 셈이었다. 박유하는 2015년 11월 불구속기소 돼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2심에서 패소했다. 2017년 10월 상고했는데 대법원은 3년이 지나도록 결과를 내놓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다.
위안부 관련 운동을 주도해온 윤미향도, 그의 방법론에 문제를 제기한 박유하조차 끝내 '마녀'로 몰려 법정에 선 것은 아이러니다. 두 여성 모두 억울해한다. 윤미향은 11월 30일 첫 재판에서 변호인을 통해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한다"고 했다. 박유하는 "정대협 등 운동가들에게 논리를 제공한 상당수 학자의 연구에 사실 왜곡과 기만이 있었다. 내 책은 정대협으로 대표되는 기존 운동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생각을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 남산의 옛 통감부 자리에 조성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 윤미향이 상임대표였던 정대협 활동에 반대한 심미자 박복순 할머니의 이름이 배제됐는데 시민들이 이름을 추가해 붙여 놓은 모습.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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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의 아픔에 공감하고 묵은 숙제를 풀어보려던 두 여성의 초심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상처에 공감하고 치유를 위해 동분서주한 두 여성이 마녀로 내몰린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일차적 원인 제공은 당사자들의 언행과 관련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책임도 크다. 반일이라면 진위도 따지지 않고 열광하는 한국사회는 윤미향의 독단과 전횡을 견제하지 못했다. 박유하에 대해서는 거꾸로 맹목적 반일 정서가 작용한 측면이 있다. 윤미향과 정대협에 끌려다닌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적 판결을 양산한 사법부의 책임도 크다.
사실 윤미향과 박유하는 지금껏 공개된 장소에서 대략 네 번 스치듯 조우했을 뿐이다. 2005년 12월 '한·일 연대 21' 주최 양국 지식인 심포지엄에서 윤미향과 박유하는 나란히 토론자로 나섰지만, 당시 두 사람의 1대1 토론이나 논쟁은 없었다. 박유하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등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일본 지식인의 발언을 (윤미향이) 흘려듣는 듯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윤미향과 박유하는 2012년 11월 외교부 주최 위안부 문제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당시 윤미향은 자기 발언을 마치자 먼저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 봄 정대협 심포지엄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005년 첫 만남 이후 지난 15년간 두 여성은 진지한 대화도 생산적인 논쟁 기회도 갖지 못했다. 위안부 문제가 전혀 풀리지 않은 지금 돌이켜 보면 못내 안타까운 대목이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 위안부 피해자 납골당 자리에 세워진 상징 조형물 '단절된 시간'. 윤미향과 박유하는 2005년 이후 15년간 심층 대화와 토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법정에 선 상태다. 장세정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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