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Facebook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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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hctobhpoenr ati o15:5d0d ·
‘재한일본인처’ 관련 자료를 읽다가 김종필 전총리의 형수가 일본인이었다는 글을 봤다. 이건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실인가.
그리고 여운형의 핵심참모였고 후에 중앙대 철학과교수를 지낸 유병묵(1910-1988)역시 마찬가지로 부인이 일본인.
화가 이중섭도 그렇지만, 징용당한 사람들 뿐 아니라 유학생들과 연애해 함께 산 사람은 많았다. 그 중 많은 이들이 조선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거나 해서 호적상으로는 일본인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의 부인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럼에도 그 사이에서 아이들은 태어났고 당시엔 4,5명이 보통이었으니 상당수의 혼혈아들이 조선땅에 존재했다는 것. 그중엔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도 많았으니 일본땅 역시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한국과 패전이후 일본이 이런 사실을 모른 척 묻고 단일민족국가얼굴을 하고 조선 혹은 일본이라는 이름을 배척해왔을 뿐.
1960년대라는 빠른 시기에 한국에서 이들을 취재하고 찍었던 이는
桑原史成선생님. 1980년대에 <경주 나자레원>이라는 책이 일본에서 알려지면서 일본인들도 일본인처들에 대해 주목하지만,신문말고 잡지기사는 내가 본 바로는 이게 처음인 듯. 역시 대단하시다.
*한복을 곱게 입고 있는 건 이방자 여사인데, 그 옆 사진은 영친왕의 원래 약혼자였다는 민갑완. 결국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하니 역시 시대가 만든 비극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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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60년대엔 민갑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져 히트했다고. 이미자가 부른 주제곡이 남아 있는데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
Hyunjoon Shin'한국 록'의 대부라고 불리는 신중현 선생 어머니도 일본인이고 태어난 곳은 현재 중국 영토(당시 실질적 일본 영토)인 만주였습니다. 사적 대화에서 이 말을 숨기거나 꺼리지는 않는데 공적으로 나가는 것은 조심하시더군요. 반응이 뻔할 테니까요.
Chee-Kwan Kim신현준 찌찌뽕. 저도 같은 내용의 댓글을 방금 달려다 신(중현) 선생님 사생활인 것 같아 안달았어요. 그나저나 신중현의 주변인 정서에 이런 개인사가 한몫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도 해봅니다. 어찌됐든 한국(록)음악의 (작은) 거인인 분.
Hyunjoon Shin김치관 그나저나 1970년대 초 주간지 기사에 어머니가 일본인을 밝힌 기사가 있습니다. 많이 뒤져야 해서 보여드리지는 못하네요. 그리고 한겨레 신문 인터뷰에 '고가 마사오 노래를 좋아했다'는 발언도 나옵니다. 검색하면 바로 나올 겁니다. 그 인터뷰는 제가 한 건 아닌데 중간에 어레인지한 기자가 연락이 와서 "만주의 유년 시절에 대해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생색'을 내 봅니다. Park Yuha신현준 그 때 밝힐 수 있었다는 건 시대가 아직 그런 걸 허용했단 얘기겠군요. 하긴 일본인들 와서 지하철 만들고 하던 때니.
Hyunjoon Shin1938년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겠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일찍 병사하고 아버지도 한국전쟁 시기 전후하여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본인 말로 10대 때 '고아'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Hyunjoon Shin박유하 제가 강조하는 바로는 유신 이전과 유신 이후는 다른 시대입니다. 오히려 1972년부터 1987년이 하나의 시대에 가깝습니다. 올려 잡아도 삼선개헌.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의 문화적 분위기는 지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리버럴'했습니다. 후대에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베트남전쟁에서 벌어들인 돈이 돌기 시작하고 한일협정으로 받은 종자돈으로 경제개발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할 때니까요.
Park Yuha신현준 그러면 해방땐 7살.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 있겠네요. 귀국직후에 사망한 사람도 많은데 그 분도 그랬군요. ㅠ 언젠가 기회되면 이야기 들어보고 싶네요.
桑原史成懐かしい50年余前の雑誌『太陽』に掲載の記事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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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本文に書きましたが私の知る限り雑誌記事ではこれが最初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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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Hun Pyo셋째 형 김종락(1920~2013, 대한야구협회 상임고문 역임) 씨 아내가 나카도가와 사나에(1921). 한국명 김초묘. 알려져있습니다.
Park Yuha차윤영 네. 지금은 많지요. 일제시대를 산 사람들은 부인들은 물론이고 남편들도 아주 힘들게 살았거든요.
Sung Won Chung어릴 적 동네에도 일본인 할머니 한 분이 사셨어요. 키가 작고 눈이 파란 분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경상도 말씨로 말씀하셨는데 일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실 땐 일본어로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분 아드님은 70년대에도 일본으로 돈 벌러 다녔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손자가 저와 한 살 차이라 자주 놀러갔었죠. 당사자가 아니라 잘 모르는 거였겠지만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모두들 잘 지냈던 듯합니다.
Shuichi Kanno上記の話と関係が無いかも知れませんが、朝鮮王朝時代には複数の女性が王妃候補に選ばれますが、最終的には3人にしぼられ、そのうち一人が王妃となり、残りの2人は生涯独身を貫かね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王族の妻に擬せられるの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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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ただこの方は最後のひとりに選ばれてたようで、自分から独身を貫いたそ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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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구이중섭 부인 야마모토 여사는 생존해 계시더라구요. 98세.
Park Yuha이왕구 네, 도쿄에 사시죠. 어머니도 뵙고 싶었는데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서 아드님만 뵌 적이 있네요.
우영동안해가 방금 딸 마중을 나갔는데
늘 친구를 동행해서 내려주고 오죠.
친구는 성애원에 삽니다.
나자레원과 담을 공유하죠.
매년 이맘때 운동회를 하곤 했고
작지만 동네 축제였죠.
코로나로 끊긴지 오래고
할머니는 그새 돌아가셨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나자레원도 앚혀지겠죠.
어쩌면 두번에 걸친 시련이었을지도 모를 분들의 안부를 묻습니다.
첨엔 못난 한국남자
지금은 반일이 정권의 구호가 된 이 지긋지긋한 남한사회..
사랑은 국경이 없다하죠.
유독 이 정권에선
그 지지자들에겐 예외지만..
Park Yuha우영동 네. 옆에 성애원. 봤어요. 코로나 이후 면회 금지여서 다시 가볼 수가 없었네요. 그때 갔을 땐 대여섯 분 만났는데.
말씀대로 마지막 날들이 반일의 나날들이 되겠네요..
EiRyun Kim제가 굉장히 궁금해하는 역사 중 하나이네여 그 많던일본인들은 과연 다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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