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성군 논란을 통해 본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확산과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문제
정다함역사비평135,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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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th가 아니라 Truthfulness라는 용어를 강조함으로써, 나는 역사적 사실 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지루한 주장들로부터, 현재의 사람들이 과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두고 싶다.”―테사 모 리스 스즈키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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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경험해왔던일들을 돌이켜볼 때, 그러한 학문적 조류가 한국 역사학 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이었다. 이 시기, 동아 시아 여러 나라들의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동아시아 고대사가 어떻게 동아시아 각국의 자국 중심적 역사 연구와 서술에서 불가결 한 전통의 일부로 창출되는가를 다룬 이성시의 연구가 번역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002 이보다 조금 앞서, 한국 역사학계 내에서 임지현은 한국사학계의 민족 이해에 대한 본격적 비판을 제기하였다.003 곧이어 윤해동의 『식민지의 회 색지대』도 출간되었다.004
중요한 것은,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비판했던 이러한 선구 적 저작들이 공통적으로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post-colonial studies)의 문제의식 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도 이성시와 임지현의 문제의식에 큰 영향 을 받아 이를 공유하면서, 이 점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후 로 얼마 전까지 오랫동안 궁금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그 일은, 2004년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근대 한국 역사학 비판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던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를 읽다가, 거기 수록된 이영훈의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글을 보고서005 적잖이 의아스러웠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이영훈이 쓴 그 글의 내용 과 관점은 그동안 한국사 분과학문의 연구가 취했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 한다면서, “서구적 근대성”과 “유럽 중심주의”에 경도되고 식민주의적이고 국 가주의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초 이 책을 기획했던 임지현과 이성시의 문제의식과는 상충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간 한국사 연구자들이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관점을 식민주의를 옹 호하는 것으로 오해했던 데는,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러 나 공개 대토론회를거쳐 그 결과물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라는 책으로 출 간된 이 학술기획에006 이영훈이 참여했던 것을가지고, 이 기획의 바탕이 된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이 식민주의를 옹호한다고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참여한 여러 학자들이 공개 대토론회에서의 논평을 통해 이영훈 의 글이 노정하는 식민주의적 또는 국가주의적 관점을 비판했고,007 그 논평들 도 책에 함께 실렸기 때문이다.
그의 논문이 이 기획에 포함된 것은, 이 기획이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을 위주로 하지만 이런 기회가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본 격적으로 비판하는 중요한 계기였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제기되던 다 른 입장의 민족주의 비판까지 포함하여,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 에 대한 비판에도 여러 입장이 있을 수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논쟁을 지향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필자는 이성시와 임지현의 문 제의식에 영향을 받아 연구하기 시작한 그 다음 세대에서, 이영훈의 역사인식 과의 사이에 학문적인 선을 분명히 그었더라면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생각 은 갖고 있다.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이 이영훈이 노정하는 식민 주의적 관점과 같다는 혐의는, 학문적으로도 정확하지 않고 ‘탈식민’이라는 한 국사 분과학문과 한국 사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기 때 문에, 지금이라도 이 논문을 통해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관점과 이영훈의 관점 사이에 중요한 인식론적 차이가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이제, 이영훈이 기존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해온 입장에 대해 필자가 품게 된 오랜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근래에 그의 『세종은 과연 성 군인가』가 출간되어008 그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정한 학문적 위치에 있는 필자가 스스로 이영훈의 역사관 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 역사관의 지향점을 확실히 확인하게 된 경험을 담아 이 논문을 쓰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와 같은경험이 단순히 필자한 사람의 개 인적경험이 아니라한국사학계와 한국사회 안팎의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일어난 일로서, 역사학계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야 할 문 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의 출간과 그 책의 주장들은, 한국사 연구 와 그중에서도 특히 ‘전근대사’로 규정되어왔던 조선시대사 연구라는 분과학 문의 영역―지금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이 한국 사회에서 직면한 학문 적 현실과 미래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징후적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게다가 2019년 이영훈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저자들이 『반일종족주의』를 출간하 며 노골적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을 표방하여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벌어진 바 있는데,009 사실 이영훈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는 『반일종족주의』보다 먼저 출간된 책이다. 책으로 출간되기 이전 이미 인터넷 강의로 상당한 대중적 인기 를 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 책도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은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특히 세종과 그의 치세에 대한 그의 해석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반일종족주의』의 역사인식과 연결되는가를 비판적으로 파악하 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세종대를 포함하여 조선시대를 전공하는 한국사 연구자들로부터는 아직 별다른 비판이 제시된 바도 없다. 이 논문은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최근 이영훈이 제기한 세종 관련 주 장들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러한 주장들이 제기된 것과 관련하 여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논점들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세종과 그의 치적에 대해 현재 한국사학계에 필요한 논쟁을 생산적 방향에서 시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논문에서는, 세 종과 그의 치적에 대한 기존 한국사 연구를 ‘환상’과 ‘거짓’으로 폄하하며 자신 이 진실이라 강조하는 이영훈의 주장에 대해,010 또다시 ‘실증’을 통해 ‘진실/거 짓’ 여부를 확증하고‘왜곡’으로 정의하는차원에서 비판하는방식은 취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 논문은 이영훈의 세종비판을비판하지만, 그 비판은 “세종 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와 같은 논점도 애당초 취하지 않는다.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으로 역사학이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학문이라는 오랜 신화가 상대화되면서, 거꾸로 랑케 이래 근대 국민국가의 역 사학이 왜 ‘실증주의’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강 조해왔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지점까지 어렵사리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다 시 또 그 논쟁의 지점이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데 치중하는 ‘실증’에 사로잡 히는 구도 안으로 끌려들어간다면―그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에 대한 사유는 없는 채로―그것은 생산적인 논쟁이 될 수 없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기존의 통설은 ‘환상’과 ‘거짓’이고 자신의 주장이 진실이라며 제 기한 이영훈의 구체적 주장들에 대한 비판은, 다시 이영훈의 주장이 거짓이라 고 정의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주장이 기반한 역사인식론과 사료 활용이 얼마 나 맥락적으로 타당한지를, 그리고 그런 주장이 한국사 연구라는 분과학문과 한국 사회의 현실에 얼마나 바람직한 공헌을 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차원에서 진행될 것이다.
2. 이영훈의 “학술서”에 없는 것
이영훈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지금의 이 책은 제1강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강의 노트를 학술서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분량과 형식으로 확장한 것이다”라고 썼다.011 이 구절은 이 책의 지향을 보여준다. 최소한 그가 이 책이 학술서로 평가받기를 바라고 쓴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조선왕조실록』과같은 연대기 자료를중심으로 광 범한사료를 살피며해당시기와 관련된구체적주제들에 대한 사례들을주로 다루어온 한국사학계의 세종 관련 연구들과 같은 수준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책은 해당 특정 시기의 역사를 폭넓고 깊게 연구해왔다고 보기 어려운 연구자 가, 해당 시기와 특정 주제에 대한 특정한 몇몇 사료들을 살펴본 내용을 중심 으로 쓰였다. 그런 차원에서, 그런 내용으로 인터넷 대중 강의를 위해 작성한 강의 노트를 기반으로 쓴 책을 저자의 말처럼 “학술서”로 볼 수 있는가도, 검토 해볼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을 배려해 일단 차치한다고 해도, “학술서”로서 세종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통설 비판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이 책은, 그런 책이 반드시 갖추어야 했을 더 중요한 부분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본인이 ‘환상’이 라고, “심지어 거짓말로 판명된다”고 표현했던 바, 세종을 중심으로 한 역사상 을 만들어낸 기존 한국사 연구의 통설에 대한 충실한 분석과 비판이다. 그는 세종을 오늘날에도 성군으로 받드는 현실을 비판하려 기존 통념을 재검토한다면서, 그 통념에 회의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세 종에 의해 조선의 노비제와 기생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세종 에 의해 사대주의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다는 사실”이라고 한다.012 그가 “사실” 이라 제시한 이 두 가지가 책 전체의 핵심 구조이며 구체적 내용들은 사실상 이 두 “사실”과 관련된 사례들일 뿐이다.013 그러면 최소한 노비제와 기생제에 대한 기존 통설과 세종대의 소위 “사대” 문제에 대한 통설을 충실하게 분석하 고서 비판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014
세종에 대한 기존 한국사 연구가 매우 민족주의적이었다는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학술서”가, 세종에 대한 기존 한국사학의 광범위한 연구들―최근 새 로운 관점과 해석을 표방한 연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에 대해 거의 분석적 접 근을 하지 않는것을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모습은기존 통설을 아예 ‘환 상’이나 ‘거짓’으로 인식하는 관점에서 기인하는것으로 보인다. 이 관점의문 제란, 『상상의 공동체』나 『만들어진 전통』이나 『만들어진 고대』와 같은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주요 저작들이 사용하는 ‘상상’이나 ‘발명’과 같은 개념어 를 메타포어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문제의식까지 ‘실증적’ 관점으로 실체화시 켜 이해하려는 데서 생기는 문제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영훈이 이런 문제점을 노정하게 된 것은, 그 역시 역사인식론 차원에서―그가 비판해 마지않는―기존 한국사학이 중시했던(지금도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지녀야 할 “객 관성”과 “실증주의”에 대한 굳은 믿음―나아가 이를 포함하여 소위 “근대성”에 대한 “보편”적 믿음 전체―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비판하고 자 하는 주된 대상으로 삼은 세종에 대한 한국사학의 연구들에 대해 최소한의 기본적 언급과 분석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이 연구의 결과물들을 그 자신도 밝힌 바와 같이 ‘환상’과 ‘거짓’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지녀야 할 ‘객관성’과 ‘실증주의’를 그 자신 역시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준거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이 책에서 그는 세종과 관련된 기존 한국사학의 연구들이 근대 국 민국가의 학제로서 어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학문적 지형을 이루게 되 었는가를 전혀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못했다. 그 문제는 결국 이렇게 통설에 대 한 최소한의 종합적 분석을 통째로 결여한 모습으로 노정될 수밖에 없다. 그가 이 책에서 그동안의 “한국사” 연구와 “한국사학의 주류”를 그토록 비판하면서 도, 해방 이후 수십 년간 축적되어온 세종 관련 대표적 논저들을 모두 건너뛰 어서 지목한 비판의 대상이015 그가 비판하는 기존 한국사학 연구를 대표하는 의미를 전혀 지니지 못한 것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게다가 비판 받을 지점은 많을지언정, 해방 이후 축적된 해당 주제의한국 사학연구들은 짧은시간안에 섭렵하여 그 학설들의 출현을 역사적 맥락속에 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기에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노비제 연구만 해 도, 단순히 노비(奴婢) 연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인층 전체를 어떻게 보아 야 하는가와 관련된 문제의식에서 진행되었다. 천인층에 대한 연구들 역시 천 인층과 양인층까지 포함하는 조선시대 신분제의 전체적 성격을 고려시대와 비교해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포괄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신분제 사회지만 천인도 군역이나 군공을 통해 양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 고 강조된 부분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주장처럼 그동 안의 연구들이 노비를 포함한 광범위한 천인층의 존재와 노비제의 강고함을 그냥 무시해왔던 것은 아니다. 기생(妓生)에 대한 그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기생을 노비제와의 관련성 안에서 살펴본다고 했지만, 세종대로부터 조선사회에서 기생제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그동안 한국 사학 연구에서 여성사 분야의 기존 연구성과가 어떤 방향에서 진행되었고, 기 생에 대해 어떤 구체적 영역이 규명되지 못했다는 정도의 분석은 제시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비판이 어떤 학문적 위치와 방향에서 제시된 것인지가 구 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동안 한국사 연구 내의 여성사 연구들 이 비판받을 점이 많긴 하지만, 이영훈은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까지 진행되 었던 조선시대 혼인제나 성차별과 관련된 전통적 시각의 연구들도,016 그 이후 여성학과 페미니즘의 일정한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진행된 연구들 도 분석하지 않았다. 소위 사대(事大)와 관련해서는 더욱 방대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왔다. 세 종이야말로 “사대주의 국가 체제”를 정비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려면, 그동 안 한국사학의연구들이 세종의 업적을 ‘한국인스스로자기정체성을자각하 고 실현하면서 이루어낸자주적인 것’으로 재정의하려는 학문적 기획이었음 을 분석적으로 밝혀내고, 그 과정의 문제점들을 짚어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 다. 기존 연구들은 여말선초 고려/조선이 그 이웃들과 맺었던 관계와 그 성격 을 보다 포괄적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진행된 매우 중요한 학문적 작업들 의 일부였는데도, 역시 이영훈은 통설의 대표적 연구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세종과 그 치적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연구에 여전히 비판받을 문제들이 많다 하더라도, 한국사학계 내부에서 이미 2000년대 후반 이후 중요한 비판과 그와 연결된 새로운 문제의식들이 제시되어 있는 상태이다. 우선 기존 통설에서 민족주의적 관점에 의해 각광받던 세종의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보 다 구체적으로 연구해온 과학사 분야에서, 문중양은 기존 통설이 세종대 과학 기술의 “자주성”을 강조했던 관점을 비판하고 그런 관점 때문에 이해되지 못 했던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재조명하여 이후의 새로운 연구들에 큰 영향을 주 었다.017 이 연구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세종과 관련된 연구들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중시되던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대해서는, 필자가 기존 국어국문학과 한국사 분야의 연구들이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라는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고유한 한국적 정체성의 창출 에 복무하는 분과학문으로 훈민정음을 연구해왔던 역사적 맥락을 비판하고, 그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흔히 고유한 민족의 언어와 글의 중요성을 자각한 자주성의 발로로 해석되고 강조되어왔던 훈민정음의 일면이, 당대 조선 지배 층에 의해 ‘보편’으로 받아들여지던 중화의 언어와 문자를 번역하는 데 쓰이 던 다른 일면과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번역적 관계) 속에서 한 쌍으로 기 능했던 것임을 밝혔다. 특히 이 연구들은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중요한 문 제의식과황단경계적(transnational) 관점을 바탕으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것이 었다.018 그런데 이영훈은이러한 문제의식을 “난해”하다고 언급하여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함을 드러내면서도, 마치 이들 연구가 세종이 훈민정음을 한자를 잘 익히기 위한 발음기호로 만든 것이므로 결국 “사대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인 양 탈맥락화시켜 인용했다.019 이는 그 의 주장이 어떤 차원에서 제기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른바 세종의 “사대주의 국가 체제” 정비와 관련해 그가 강조했던 세종대 의 전쟁 관련 내용도 큰 문제다. 그는 세종대에 통치권력의 천자국 지위를 상 징하는 제천례가 폐지되는 가운데, 세종조 군례의 정비 과정에서 천자가 친정 (親征)하는 출정의가 배제되고 천자를 상징하는 부월(斧鉞) 관련 의례가 삭제되 면서 “군국의 의지는 세종조를 거치면서 뿌리가 뽑히고 있었다”고 강조한다.020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 최근의 연구성과들이, 아니 이미 1990 년대 후반에 진행된 연구도 그가 주장하는 차원을 넘어서 매우 중요한 논점들 과 사례들을 제시해놓았는데, 그가 이러한 연구들을 아예 살피지 않았기 때문 이다. 이영훈은 “1443년 천제가 최종 폐지됨”으로써 “그렇게 조선왕조의 국가 체제가 제후국의 그것으로 충실히 정비되었다”고 강조한다.021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1990년대 후반 한형주의 연구를 통해, 세종대 중지 된 제천례가 세조에 의해 복설되는 것이, 세조의 집권과 명이 몽고에게 토목보 의 변을 당하는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날카롭게 분석된 바 있기 때문이 다.022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세종 대 3번에 걸친 큰 전쟁을 조선왕실이 공세 적으로 일으켰는데도 통설이 이 부분을 간과했던 이유가, 그간의 한국사 연구(조선시대사 연구)에 작동해온 민족주의의 세습적 희생자의식(hereditary victimhood)과 유교적전통에대한 특정한 관점 때문이었다는비판이제시되었다.023 나아가 유교적 통치권력이 어떻게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예외적”으로 정의하며 활용 했는가를 살펴야 선초 조선왕실이 주도했던 전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새로운 문제의식도 제기되었다.024 이후 세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이 공세적으 로 대마도와 여진족들에 소위 ‘정벌(征伐)’이라는 전쟁을 벌이며 그 전쟁과 관 련된 의례와 제사를 정비하고 시행했던 일들을 왕권이라는 통치권력을 물리 적으로 관철시키는 한편 의례적/정치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연구들도 진행되었다.025
동시에 선초 조선왕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벌였던 전쟁들을 조선의 왕권 이 중화 중심주의의 질서와 연동되어 있던 당대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의 다자 간 관계 속에서 재조명하는 연구들도 진행되었다.026 명과의 관계에도 불구하 고 조선이 자기중심적 질서를 여진족(女眞族)에게 관철시키는 부분을 규명하는 연구들도 진행되었다.027 선초 군례 정비에서 천자가 직접 출정하는 것을 표상 하는 친정의는 명에 “사대”하는 입장과 관련되어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 상 이를 대체하는 “대열의(大閱儀)”가 정비되는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구체적으 로 조명한 연구도 제시되었다.028
이처럼 90년대 후반에 진행된 연구부터 최근의 연구까지, 이미 그의 주장 과 논점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 문제의식과 구체적인 경험(사례) 연구들이 축적 되어 있는데도, 이영훈은 이 연구 중 어느 하나도 그의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 다. 결국 그의 주장은, 스스로 강조했던 기존 한국사학 연구의 민족주의적 통 설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는 “학술서” 차원에 미치지도 못하고, 그가 세종에 게 가하는 비판이라는 것들도 바람직한 시의적절함을 잃은 것일 수밖에 없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를 통해 세종과 세종에 대한 기존 한국사학의 연구에 비판을 제기한다는 이영훈은, 이미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한국사학 연구의 현 실과 연구지형 안팎의 그 어디쯤에서 그런 주장을하고 있는 것일까.
3. ‘탈식민’의 현실 앞에서 “재식민화”로 수렴한 세종 성군 논란
이렇게 세종에 대한 한국사학의 연구성과들에 대해 면밀한 분석이 결여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가 비판해 마지않는 기존 한국사학의 연구들―최근의 연구들도 포함하여―이, 최 소한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조선사/한국사 해석을 극복하겠다는 ‘탈식민’의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소거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기존 한국사학이 세종 연구를 통해 만들어낸 역사상을 전혀 분석하지 않고 ‘허상’과 ‘거짓’이라고만 정의하는 것은, 결국 세종과 그 시대의 역사상을 만들어낸 해 방 이후(길게 보면 19세기 말 이후) 기존 한국사학의 연구성과가 대한민국이라는 근 대 국민국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최소한 ‘탈식민’을 표방하면서 세종을 표 상해낸 결과물이라는 역사적 맥락까지 아예 무시해버리는 셈이 된다. 그는 조선시대를 “근세”로 정의해온 기존 한국사학의 시기구분과 그에 입 각한 조선시대상을 면밀한 사학사적 분석과 비판도 없이 ‘기존 한국사학 연구 의 민족주의적 관점이 날조’해 낸 ‘환상’과 ‘거짓’이라고 폄하한다.029 그런데 그 런 그가 조선시대와는 달랐다고 유독 후하게 언급한 고려시대의 역사상도, 한 국의 역사가 유럽이나 일본과 같이 중세라는 보편적 역사발전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일본 식민주의의 봉건제 결여론/중세 부재론에 맞서 1930년대 마르 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 한국사에서 중세 봉건제사회의 문제를 활발히 논의 하고, 이어 해방 이후 역사학자들도 고려시대를 중세로 정의하려 노력했던 과 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때문에 거기엔 적어도 ‘탈식민’의 사학사적 의미는 담겨 있다. 조선시대를 “근세”로 시기구분하고 그에 맞게 역사상을 정 의했던기존의연구들은 고려시대를 “중세”로 시기구분하는 문제와 연동되어 진행되었기에, 마찬가지로 식민주의 역사학이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에 기 반해 만들어낸 조선시대 역사상을 극복해보려는 ‘탈식민’의 사학사적 의미는 지니고 있다.
노비를 포함하는 천인 신분과 신분제 전체에 대한 기존 한국사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조선은 노비를 포함하여 최소한의 인격적 존재로 대우받지 못하 는 광범위한 피지배 신분층 위에서 소수 귀족인 양반이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 하는 강고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적 차별을 철폐시키는 방향으로 스 스로 발전할 수 없었다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래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해석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 신분제에 대한 “양천제”설과 “사신 분제”설 사이의 논쟁도 그렇다. 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적어도 양자 모두 일 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해석에서 벗어나 조선시대 신분제를 다시 정의해야 한 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진행되었던 것이다.030
기생제와 관련된 여성사 연구도 다르지 않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사 학 내의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가 일부일처제만을 가장 이상적이고 근대 지향 적인 혼인제로 전제하며 당대 혼인제 내의 성차별을 지적하는 데 그쳤다는 비 판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여성의 관점에서 남성 중심의 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낸 좌우 이데올로기의 경계와 식민주의/민족주의의 경계 를 횡단하며 ‘탈식민’이라는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연구들이 진행된 바 있다.031 이렇게 젠더 스터디의 관점이 수용되면서, 유교적 통치권력과 사대부 중심의 사회가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여성을 표상하였는가를 살피는 연 구가 제시되었다.032 나아가 젠더의 관점에서 본 ‘탈식민’이라는 문제의식하에 서 유교적 관점으로 표상된 여성상과 “현모양처” 담론이 근대 이후의 식민통 치 체제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군사독재 체제에 의해 공히 다시 호출되는 역 사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들까지033 나와 있다.
“사대”에 대한 기존 한국사학의 연구와 최근 연구성과들도 마찬가지다. 이 영훈의 입장에서 보면, 이기백은 민족주의적 관점을 지닌 전통적 한국사학 연 구자로 정의될 수 있겠다. 그 이기백이 조선이 중국에 했다는 “사대”와 “사대주 의”는 다른 것이라 정의한 것 역시,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이 정체성론과 타율 성론의 언설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의존”의 역사로 해석 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 적어도 ‘탈식민’의 문제의식에 입각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것이었다.034
이렇게 해방 이후 조선의 사대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재해석이 시도되기 이전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대해, 근래 안드레 슈미드는 식민주의 와 민족주의가 교차하던 조선에서의 “사대” 해석 문제를 분석했다. 그는 일본 식민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사대주의”와 “의존”이라는 용어와 개념 구사를 통 해 조선의 “사대”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에 깊이 뿌리박힌 이데올로기와 소위 “국민성”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되는 역사적 맥락을 분석했다. 동시에 그 역사 적 맥락 속에서 식민주의와 근대성이라는 “보편”가치를 공유하게 된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식민주의의 사대주의론을 비판하기 어려워졌던 당대 ‘탈식민’의 현실을 살핀 바 있다.035
최근의 한 연구는 이러한 현실이 해방 이후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주도하는 냉전 체제로 수렴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식민지 시기의 해석과는 반대 방향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를 통해 조선의 “사대”가 소위 “사대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분리되어 파악되면서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실용적/근대지향적 “외 교” 관계 또는 “외교 정책”으로 다시 재정의되었다고 분석하였다. 동시에 이 연 구는, 이렇게 조선의 “사대”에 대해 각각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에 입각해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재해석의 사례들을 비교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재해석(“전통의 발명”이라는 은유로 표현할 수 있는)들이 매우 글로 벌한 광역적 통치질서가 새롭게 재구성되는 역사적 맥락(그것이 일본이 주도하려 던 것이건 미국이 주도하려던 것이건) 속에 조선(한국)이 연동되면서 발생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036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 성립 이후의 자국사 연구에 있어서도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과 제로 나타나는 ‘탈식민’ 문제의 현실을 환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이영훈이 언급조차 하지 않은 오래된 연구들도
적어도 “식민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겠다는 ‘탈식민’의 문제의식에 입각한 것 들이었다. 특히 최근의 연구들은 이 ‘탈식민’의 문제를 식민주의에서 독립한 여러 나라들이 민족주의에 입각해 근대국민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역시 “식민주의”와 공유하고 있는 소위 “근대성” 차원의 문제로 더욱 심화시켜서 살 펴보고 있다. 결국 이영훈이 기존 한국사학 연구와 최근 새로운 관점의 연구들 모두를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은 채로, 기존 한국사학 연구가 민족주의적 관점 에서 세종과 그 시대의 역사상을 ‘환상’으로 만들어냈다는 비판을 제기할 때, 그렇게 ‘탈식민’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소거하여 탈맥락화시킨 비판의 지향점은 결국 ‘재식민화’ 또는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세종에 대한 이영훈의 주장이 ‘재식민화’를 향해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과 정을 비판하면서 또 하나 함께 비판할 문제가 있다. 그가 포스트 콜로니얼 스 터디와 횡단경계적(transnational) 관점에 기반한 최근 연구성과들을 매우 자의적 으로 탈맥락화시켜 가져다 쓴다는 점이다. 당초에 이런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없는 이영훈이, ‘탈식민’에 대해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가 제시한 보다 근원 적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이 이영훈 자신의 논리까지 비판하는 바로 그 부분 은 소거해버리고,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는 연구인 양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영훈은 그의 저서와 인터넷 강의에서 필자의 연구를 완전히 탈 맥락화시켜 인용했다. 필자의 연구는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과 횡단경계적(transnational) 관점을 토대로 하여, 세종대 훈민정음의 제정을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전반에 걸쳐 동아시아의 광역적 통치질서가 재구성되던 역사 적 맥락과 연동시켜 재해석한 것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연 구들은 이전에 이미 일부 국어학자들이 지적했던 바, 훈민정음이 한자를 표기 하는 발음기호였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 금까지 기존 통설에서 고유한 민족의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의 중요성을 자각 한 자주성의 발로로 강조되었던 훈민정음의 일면이, 당대 조선 지배층에 의해 “보편”으로 받아들여지던 중화의 언어와 문자를 번역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는 또 다른 일면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양 자가 서로를 구성하는 불가분의 번역적 관계라는 한 쌍으로 기능했던 것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037
그런데 이영훈은 이러한 연구들을 당시 세종이 “사대주의”를 철저히 실천 하는 가운데 훈민정음을 ‘중국’의 언어와 문자 표기를 위한 발음기호로 만들었 음을 증명하는 연구들인 것처럼 완전히 탈맥락화시켜 인용했다. 이런 식의 인 용은 필자의 문제의식과 이영훈의 관점 사이에 놓인 중요한 역사인식론의 차 이를 은폐한다. 자신의 정체성이 결국 ‘타자’와의 관계없이는 구성될 수 없다 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경계 짓기를 통한 정체성의 재구성이 특정한 역사적 맥 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성찰적으로 살피려는 관점이 전자라면, “문명” 이라는 이름의 더욱더 “보편”적인 타자에 용해되기를 갈망하여 자신과 타자 사이의 모든 경계를 몰주체적으로 허물어버리려는 관점이 후자일 것이다.
그의 “군 위안부” 논의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 일제에 의한 “종군위안부” 문 제에 개별 민족 또는 국가의 책임을 묻는 차원을 넘어, 이 문제를 전쟁 시 국가 권력에 의해 남성이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것으로 파악(한국군 “위안부”도 포함하 여)하려 했던 연구들은, 민족/국가가 만들어놓은 이분법적 가해자/피해자 인식 의 틀 너머에서 젠더의 관점으로 이 문제에 대한 성찰의 차원을 보다 확장/심 화시키기 위해 진행된 것이었다. 그런데 “종군위안부” 문제를 더욱 확장되고 심화된 차원에서 성찰하기 위해 해당 문제에 작용해온 민족주의적 ‘탈식민’의 문제점까지 함께 성찰하겠다는 그 문제의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소거시키 고, 그간 피해자임을 주장해온 한국 사회도 똑같은 가해자였다고 탈맥락화시 켜 “종군위안부”는 자신들만 저질렀던 잘못이 아니라며 그 책임을 부정하려는 일본 극우 역사수정주의의 주장을 “진실”이라 내세우는 데 쓰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조선의 노비제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인격적 처우도 결여하 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는 다른 “문명”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고유하게 한국 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해석은 조선 노비들이 최소한의 인격적 처우도 받지 못한다며 그 노예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20세기 초 조선 사회가 유럽이 나 일본의 중세 봉건제 사회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한 후진적·폐쇄적 사회였다 고 파악했던 100여 년 전 후쿠다 도쿠죠의 식민주의적 조선사 해석과038 다르 지 않다. 그토록 조선 노비제의 반인권적 측면을 비판하는 이영훈은 왜 15세기 조정의 경제적·군사적 수요를 충족시켜 천인신분을 벗어나려 했던 노비들의 의지나, 명화적이나 초적을 통해 나타났던 양반 중심 신분제사회에 대한 기층 민의 저항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일까. 그의 조선 기생제에 대한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종을 비롯한 조선 지배층의 여성차별을 지적하고, “관리의 기생 간음이 비난을 받은 것은 기생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생에게 인권 따위는 없었다”라며, 조선 기생제 가 “인권”에 반하고 “도덕”에 반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비판 역시 결국 이 러한 기생제를 “조선 고유의 풍속”으로 예시하여 당시 조선 사회의 “후진성”을 보여주기 위한 주장이다.039
그러니 아무리 기생제를 비판한다고해도 거기엔 젠더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문제의식 같은 것은 없다.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에서“위안”이라는 용어가 해당 여성들의 관점을 소거시켜버린다는 문제제기가 나온 지 오래인데, 그는 왜 기생들과 남성 양반 지배층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면서 굳이 “성적 위안”이 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을까? 세종과 지배층 남성들이 천한 신분 여성 의 성적 문란함을 전제했던 것을 그토록 비판한다면서, 죽은 남편인 노 야찰의 제사를 곡진히 챙기는 비 돌금의 사례를 인용하는 데 그치는 것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그러니 이영훈이 돌금에 대해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예를 다하 는 비의 모습이다. 비도 여성인 이상 정조는 그 본성이다”라고 평가함으로써040 자신의 기생제 비판이 결국 “정조 관념”을 신분에 관계 없이 모든 여성에게 적 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질화하는 수준의 가부장적/몰젠더적 관점에 입각한 자가당착으로 귀결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도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그가 세종의 “사대주의 국가 체제”를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기자 조선을 잇는 취지의 국호를 명에 자청한 것”을 강조하며, “이후 한국사는 중국 사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라고까지 단정한다. “중국과의 사대관계는 정치군 사적 명분을 넘어 인간, 사회, 국가, 세계를 포괄하는 형이상학적 질서로 내면 화”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조선이 명에 행했던 “사대”를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 이 뿌리내린 “이데올로기”이자 외세에 “의존”하는 “국민성” 그 자체로 재정의 했던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해석과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을까? 그는 “고려 왕조는 군사국가”였는데, 세종이 “천자국” 지향을 포기하며 조선 여성들을 황 제에게 공녀로 바칠 정도로 “지성사대”하고, 부월을 내리는 것을 중심으로 하 는 천자국 수준의 출정의도 결국 배제되었기 때문에, “군국의 의지는 세종조를 거치면서 뿌리가 뽑히고 있었다라”고 확언하며 “제후가 천자를 성심으로 섬길 진대 무슨 독자 의지의 군국이 필요하단 말인가”라고 강조한다.041 그의 해석은 조선의 유교화가 “문약”을 초래해 외세에 좌우되게되었다고 본 식민주의 역 사학과 과연 어떻게 다른 걸까?
4. 세종 대까지 확산된 뉴라이트 역사인식
이렇게 이영훈의 주장이 탈식민이라는 문제의식을 망각한 채 ‘재식민화’ 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흐름이 종국에 귀결되는 지점이 어 디인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가 경제사 연구자로서 세종과 직접 관련된 구체 적 연구들을 별로 하지도 않고 세종 관련 기존 연구들을 분석하는 사학사 연구 도 없이, 왜 그런 관점에서 굳이 세종을 다루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세종은 과 연 성군인가』가 『반일종족주의』의 출간 및 논란과 곧바로 이어진다는 점을 염 두에 두면,042 그의 이러한 행보가 해당 시기/주제를 전공한 학자들과의 생산적 토론을 교묘히 회피하며, 자신의 주장을 학계 안팎의 일반 독자들에게 알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살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까지 고려한다면, 그가 왜 굳이―본격적으로 비판하기에 부담스 러울 수도 있는,―기존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세종과 그 시대의 역사상을 ‘허 상’과 ‘거짓’이라는 선정적 용어로 강하게 비난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그가 왜 새로운 관점들에서 제시된 세종과 그 치적에 대한 비판적 연구들을 아 예 건너뛰어버리거나 탈맥락화시켜 인용함으로써 더욱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왔는지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행보 를 통해 19세기 말부터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 전후까지의 좁은 시간적 범위 안을 주로 가늠하던 뉴라이트적 역사인식의 시야를 순식간에 수백 년 거슬러 세종 대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고 여겼을것이기 때문이다.
이영훈의 의도는 분명하다. 뉴라이트 역사관의적용범위를 15세기 초 세 종 대까지 확장시켜, 조선시대와 관련된 더 많은 주제와 시간의 영역을 사정거 리 안에 두겠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극우 뉴라이트 역사학의 식민주의적 주장 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그 주장의 근거들을 아예 세종대까지 소급시킴으로 써 세종과 그의 치적을 뉴라이트 역사관이 만들어낸 한국사상의 고유한 기원 으로 다시 창출하려는 것이다.
일견 노비의 인권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보이는 그의 비판은, 결국 자신의 동류로 노비를 삼는 조선 노비제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고 강조하면서 그 “반인권적”인 노비제의 책임을 세종에게 돌린다. 이는 결국 세 계화라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시대에도 편협하기 짝이 없는 ‘종족주의’ 수준 의 논리로 이런 저런 차별의 경계를 만들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이미 오 래 전부터 스스로 그 내부에서 차별할 대상의 범주적 경계를 오랫동안 만들어 왔던 한국 사회 “고유”의 전통에 기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동 시에 이는 조선사회에 그렇게도 “반인권적” 제도가 정착하도록 만든 그 책임 이, 기존 한국사학 연구가 유교 “민본” 이념 실현의 화신으로 그려온 세종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생제에 대한 그의 비판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에서 “관기”들로 하여금 부 방하는 군사들을 성적으로 “위안”하는 것이 세종에 의해 제도화되었다고 강조 한 것은,043 결국 한국인들이 일본이라는 특정한 민족/국가의 범죄로 그렇게 비 판해 마지않는 “군 위안부”의 기원이 한국 사회의 “고유”하고 오랜 기생제의 전통 속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이며, 동시에 그 반인권적 제도의 책 임을 세종에게 돌리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반일종족주의』에서 조 선후기 무관 박취문의 일기에 나오는 박취문과 방직 기생의 관계를 언급하며 “아, 여기에 또 한범주의 군 위안부가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쓰면서, “이렇 게 조선의기생제는 당초 군 위안부 제도로 만들어진것입니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044
그가 세종을 “사대주의 국가 체제”를 정비한 장본인으로 강조하는 것 역시마찬가지이다. 이는 가장 “보편적”으로 통하는 역사적 발전단계를 거치기 위 해서는 반드시 조선 또는 한국이라는 개별적인 민족과 국가 단위를 초월하는 보다 “보편적”인 “문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는 식민주 의적 언설의 기원을 세종대로 소급시키며 실체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간 한국 사학 연구는 일본 식민주의가 조선의 “사대”를 조선인들의 심성 속에 이데올 로기와 민족성으로 뿌리내린 “외세”에 대한 “의존”이라 “왜곡”했다고 비판해 왔지만, 알고 보면 오히려 그런 “의존”은 한국인들이 조선의 고유한 정체성과 자주성을 지킨 민족의 영웅으로 믿고 있는 세종의 “지성사대”에 실체적으로 기원하고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이영훈이 내놓은 세종과 그 치세에 대한 이런 해석들이 그가 그토록 믿고 있는 바처럼 역사적 사실이며 “진실”일 수 있다고 가정해본다 하자.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가 주장하는 그 진실이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식민주의로의 회귀를 종용하는 것이라면, 도 대체 그 진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식민주의에 대한 성찰을 거부하는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수정주의와 공모한 뉴라이트 역사학이 한국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현실의 맥락 속에서,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을 더 확대하 고 강화하도록 종용하는 데 쓰이는 그 “진실”로부터, 도대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세종과 그 치세에 대한 이영훈의 주장은 어렵사리 진행되고 있는 해당 주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과 식민주의적 관점 사이의 중요한 인식론적 차이를 은폐하고, 동시에 그런 새로운 연구들이제시한 생산적 논쟁의 지점들을 소모 적이고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후퇴시킨다. 그간의한국사연구가 근대 국민국 가의 형성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학제로서 성립하며 어떤 입장에 서 해당 분과학문의 지식생산과 유통에 구체적으로 간여해왔는가에 대한 면 밀한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탈식민’ 문제에 대한 성찰적/비판적 논쟁을 불 가능하게 만드는 이런 주장이 유통되며 소비될수록, 조선시대사 연구를 포함 하는 한국사 연구 전반과 한국 사회에 더욱 퇴행적 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 는 학문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큰 손실이다. 세종대의 역사와 그에 대한 해방 이후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해석 문 제는, 앞으로의 한국사 연구에서 비판적/성찰적 관점으로 새로운 의제들을 설 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연구 주제이다. 그러므로 세종과 그 치적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비판적 재해석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영 훈의 주장을 분석한 것은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해석과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세종과 그의 치세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 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지양해야 할 것과 지향해야 할 것을 더 잘 구별할 수 있 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과 그 치적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을 제기할 때 더 중요한 것은, 그 해석이 왜 하필 지금 여기의 현실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충분히 생산적이고 바람직하게 반영한 연구여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에게 지금 여기의 현실이란, 1990년대 이전 기존 한국사학이 민족주의적/실증주의적 관 점에 입각해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사 해석을 극복하겠다는 입장에서 추구 했던 ‘탈식민’과, 2000년대 이후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와 만나며 그간 한국사 학이 표방해온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를 통한 탈식민에 식민주의와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까지 성찰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있어야 한다는 ‘탈식민’을, 모두 경험하면서우리가 지금 마주 대하고 있는 현실이어야 한다. 그러니세종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 지금의 현실에 발을 딛고 “왜지금 하 필 세종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보다 성찰적/생산적 논의를 제공할 수 있 는 것이 되려면, 세종과 그의 치적을 ‘근대성’이 서구와 일본에서 들어오기 이 전에 이미 한국의 고유한 전통(유교적 전통까지 포함시켜) 속에서 ‘근대성’의 맹아 가 자라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체적 증거로 강조함으로써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조선사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기존 한국사 연구의 민 족주의적 해석을045 또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이영훈의 관점 은, 근대화/문명화를 지향했다면 민족주의에 입각해 자신의 고유한 전통만 고 집하지 말고 “서구적 근대성”을 더욱 “보편” 가치로 체화했어야 했는데, 그러 지 못해 스스로의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보는 식민주의적 해석과 닮아 있다. 세 종과 그의 치세를 그런 관점에 입각한 한국사(조선시대사)상의 기원으로 만드는 이영훈의 해석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 성찰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를 제공해줄 수 있는 세종 비판이 더더욱 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발을 딛고 “왜 지금 하필 세종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논의를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일은, 현재 한국사학계의 조선 시대사 연구자들 모두의 몫이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의 관점으로 현재 한국사 학계 조선시대사 연구의 주류적 흐름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바람직하다고 만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구적 근대성’을 ‘보편’으로 삼아 이를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그 근대성이 외부로부터 들어오기 이전 에 한국적인 것으로 정착된 유교적 전통 속에서 “근대성”의 맹아가 이미 자라 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체적 증거로 세종과 그의 업적들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주의 역사학의 조선시대사 “왜곡”을 극복하려 했던 1990년대 이전 연구들 과 비교할 때, 최근 연구들이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 문이다.
이런기존 연구들의 조선시대사 해석은 1960년대 말 이후 여말선초를 다룬 연구들로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최근의 조선후기사 연구는 “global history”의 영 향을 받으며 이런 기존 연구의 관점을 다시 소환하는데, 더 높은 강도로 ‘유교 적 근대(성)’ 또는 ‘동아시아적 근대(성)’를 주장하며 그것이 서구보다 근대성을 선취했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046 여말부터 조선 전기를 다룬 최근 연구 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선이 유교국가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거나, 세종대야말로 대외관계에서 실리를 추구하며 매우 안정적 관계를 이루었다고 보는 연구는 여전히 나오고 있다.
필자처럼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에 입각해 횡단경계적 (transnational)인 시각에서 조선시대사와 근대 국민국가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조선 시대사 연구를 다루는 입장에서도, 지금 여기의 현실에 발을 딛고 세종과 그 치세에 대한 보다 성찰적이고 생산적인 재해석을 제시할 수 있으려면 많은 노 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를 모두 거치 며 오랫동안 ‘보편’으로 설정되어왔던 가치가 바로 ‘근대성’이라는 문제의식에 기반해야 한다. 그렇게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모두에서 공히 역사학이 근대성 의 특정한 모델(유럽이나 일본)을 ‘보편’으로 삼아 이를 실현하는 데 복무하는 동 안 발생한 여러 문제점들을, 더욱 통찰력 있는 언어와 서사로 더 많은 독자들 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근대성’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반복적 으로 전유되며 재구성되어왔는가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통해 새롭게 ‘탈식민’ 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연구여야 한다. 또한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가 공유해온 근대 역사학의 주요 인식론적 근거가 결국 ‘실증주의’와 ‘객관성’에 입각한 (사회)진화론적 역사인식론이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런 역사인식론이 현실에서 초래한 문제점들을 살펴봄으 로써, 앞으로 우리사회 현실과 미래에 중요하게 공유해야 할 의제 또는 가치 를 논의할때 ‘실증주의’에 입각한 역사인식론에서 초래된 문제점들을되풀이 하지 않는 방향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화시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간 의 역사 연구에서 ‘근대성’을 ‘보편화’해왔던 역사인식론의 문제점으로부터 배 운 교훈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중요하게 공유해야 할 의 제 또는 가치를 재구성하고, 동시에 그런 의제와 가치를 보다 바람직한 방식으 로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구 주제들과 영역들을 세종과 그 시대를 담고 있는 사료들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만들어내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뉴라이트 미디어의 ‘콘텐츠’가 된 역사학
마지막으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출간을 통한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확산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환경의 도래라는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 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국사 연구라는 분과학문의 성격과 역할이 급격히 재정 의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을 논하려 한다. 이 문제와 관 련된 몇 가지 주요한 논점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이 책이 간행되 기 전 단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 자신이 밝힌 바처럼, 그는 “2016년 5월부터 3개월간 ‘정규재TV’라는 인터넷 매체에서 ‘환상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바 있다.047 그리고 이 책은 모두 12개 주제 중에서 시청자들 반응이 컸던 주제 들 중 하나인 제1강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강의 노트를 “학술서로 평가받 을 수 있는 분량과 형식으로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048 그가 강의했다는 ‘정규 재TV’는 유튜브 채널 ‘펜앤드마이크TV’로 잘 알려진 뉴라이트 성향의 인터넷 매체이다.
결국 저자 자신이 역사학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의 분과학문 체제의 가장 정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연구해왔고,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를 “학술서”라 고 강조하고 있다 해도, 당초부터 이 책은 뉴라이트 성향의 한 인터넷(유튜브) 미디어와의 기획에 의해 역사 “콘텐츠”물로 만들어지고 유통된 인터넷 강의로 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한 것은, 이런 일 이 기존의 한국사 연구라는 분과학문이 마주한 지금의 현실 속에 일어나고 있 는 여러 차원의 급격한 변화와 맞물려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 유튜브 미디어의 “콘텐츠”에서 출발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이 출간 된 일은, 결국 21세기 초반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과 산업이 급변하고 새로 운 미디어와 IT테크놀로지의 시대가 도래하는 가운데 기존 분과학문인 한국 사 연구의 결과물들이 소위 “콘텐츠”로 상품화되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대 중적으로 “소비”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049 극우 성향 뉴라이트 미디어의 기 획 “콘텐츠”가 된 역사학 연구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에 중요하 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몇몇 주요한 논점을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다. 우선 뉴라이트 역사관을 세종대까지 확장하려는 이런 시도는, 이미 일반 독자들에 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정규재TV라는 매체가 잘 알려진 뉴라이트 성향의 인터넷 매체이기도 했지만, 이영훈의 강의가 이를 통 해 방송되자 상당한 조회수를 기록하며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 다.050 미디어라는 영역 자체가 거의 모든 지식의 영역을 빨아들이고 있는 유튜 브에 의해 재정의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세종에 대한 이영훈의 뉴라이트적 역 사 해석은 유튜브를 통해 이미 대중들에게 상당히 알려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대중적 파급력과 더불어 세종에 대한 뉴라이트적 해석의대중적 파급의 경로가 주로 인터넷이라는 점도, 그 매체적 특성과 관련하여 꼭 살펴야 할 부분이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극우의 역사수정주의가 인터넷 미디어에서 취하는 전략을 통찰력 있게 다룬 바 있다. 그녀는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 웹사이트들을 살펴 보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역사적 문맥이나 원인, 의미와 같은 폭넓은 문제 를 숙고하기보다는 논의를 의도적으로 좁”혀서 “하나의 특정한 쟁점에만 초점 을 맞춘다”고 지적하고, 이를 통해 “종군위안부는 정말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 왔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데 신경을 모”으게 하고, 그런 후에 다시 “매우 특정 한 사료나 증언을 택해서는 신빙성이 없다는 데 집중 공격을 퍼붓”는 방식으 로, 해당 문제에 대한 기존 논의 모두를 의심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한다.051 필자 가 앞서 분석하여 제시했던 것처럼, 이영훈 역시 그의 책에서 세종에 대한 기 존 논의와 최근의 논의들이 어떤 복잡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진행되어왔는지를 아예 분석 대상으로 살피지 않고, 오로지 그 논의 들이 제시한 결론이나 특정 증거들만을 택해 공격함으로써 기존 논의 전체를 ‘거짓’과 ‘환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게다가 디지털 매체는 역사를 포함하는 여러 지식을 만든 자가 결정한 논 리적 순서에 따라 선형적 구조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텍스 트’라는 형식으로 전달하는데, 그런 인터넷 공간이란 과거에 대한 지식이 문자 그대로 ‘파편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역이다. 인터넷이 개별적으로 접근 하기 어려운 1차 자료나 증언 등을 접할 기회를 주고 그 자료에 대한 여러 논쟁 을 폭넓게 진열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그러한 지식의 파편들을 일관성 있는 해 석의 서술로 정리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유익하지 못하다.052 이런 미디어에서 라면 이영훈이 제시한 세종에 대한 뉴라이트 역사수정주의적해석이 일반 독 자들 사이에서 더 쉽게 유통될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근본적인 문 제는, 일반 대중들이 역사 지식을 배우는 매체로 유튜브와 같은 인터넷 미디어 가 보편화될수록, 일반 독자들의 역사에 대한 사유도 매우 자의적으로 탈맥락 화되고 파편화되며 단순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특히 이상에서 살펴본 현실의 새로운 양상들은, 기존 한국사 연구의 분과 학문 체계를 중심으로 연구된 역사 지식이 학회 발표와 논문 게재를 거쳐 단행 본 책에 담겨 독자에게 전달되던 과거와 비교할 때 역사 관련 지식이 만들어 지고 공유되는 데 쓰이는 매체와 방식과 장 자체가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이 점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영훈이 제기한 세종 성군 논란은, 학계의 통설이 전과 같은 공고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 민족주의적 통설과 다른 새로운 비판을 표방하는―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할 수 있는―주장들이 역사학계가 그 학술적 장점을 살려 비중 있게 개입할 수 있는 경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과는 크게 달라진 지식 생산의 새로 운 경로들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또는 “힐링”이라는 쓰임새를 갖는 소위 “콘 텐츠”로서 광범위하게 대중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는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사 지식의 생산에서 대학과 학계를 중심으로 하 는 기존 한국사 연구의 분과학문과 여기 소속된 역사학자들은 전부터 해왔던 역할을 급격히 잃고 있다. 이영훈의 사례와 유사하게, 미디어와 자본이 기획한 “역사콘텐츠”가 큰 흥 행수익을 올리고, 책이나 다른 형태로 재미디어화되며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 게 되는 일은 안타깝지만 앞으로 더 자주 나타날 듯하다. 한국사라는 분과학문 은 과연 이 큰 변화에 거시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또한 이런 큰 변화 속 에서, 오히려 그 변화에 편승해 세종과 그 치세에까지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뉴라이트 역사인식에 대해 한국사학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어떤 구체적인 연 구들로 대응해야 할까.
6. 맺음말
마지막으로 이영훈이 제기한 세종 논란과, 그 논란과 함께 노정된 한국사 학계의 현실 안팎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대응에 관해,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 하는 바를 결론을 대신해 제시하고 싶다. 이 글은 뉴라이트 역사관에 기반해 제기된 이영훈의 세종 성군 논란을 비판한 글이지만, 그 비판 대상과의 논쟁을 기대하며 쓴 것은 아니다. 토론과 논쟁도 혐오의 날을 세우지 않는 것일 때라 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의 논조와 학계의 현실을 볼 때 그런 생산적 토론과 논 쟁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세종 성군 논란을 통해 노정된바, 한국사학계의 현실 및 한국 사회 전체의 현실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문 제점들에 대해, 한국사 연구라는 분과학문이 최소한 그동안의 역할에 맞는 적 절한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여러 차례 세종과 그의 치적에 대한 기존 한국사 연구의 해석에 날선 비판을 제기했음에도 불구 하고, 필자 역시 거세지는 지구화의 조류 속에서 급변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려운 사정을 맞고 있는 조선시대사 연구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최소한의 적절한 대응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아마 한국사 연구 라는 분과학문 체제는 앞으로 더 힘든 상황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먼저 이영훈의 세종 성군 논란과 그로 인해 노정된 분과학문의
현실 문제에 비판적 대응을 해야 할 당사자들은 당연히 세종대를 연구해온 역 사학자들일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 그런 반응이 거의 보이지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이 글에서 살펴본 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관점과구체적 주장 들이 『반일종족주의』의 뉴라이트적 역사인식과 연결되는 점을 고려하고, 또한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경우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논문들을 내고 이런 연구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문제는 짚어보아 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문제점은 그간 한국사 연구에서 랑케 역사학의 “실증주의”가 전유되 어 강하게 작동될수록 과거에 대한 연구가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을 인식론적 으로 확인하기 어려워지고, 따라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유지에 복무하는 한국사 연구의 역할을 성찰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현재와 수 백 년 이상 시간적 거리가 있는 시대를 연구할 때, 그만큼 더 그동안 한국사 연 구에서 작동해온 “실증주의”의 관점을 충분히 상대화시키지 못하기 쉽다. 때 문에 이는 비단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전근대사 전체 영역에서 빈번하게 보이 는 현상이다.
어쨌든 이런 문제점을 넘어서려면,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분과학문 영역이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 속에서 어떻게 제도로서의 학문으로 만들어지고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수밖에 없다. 근대 역사학이 시작된 이래,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전개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 서 한국에서의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보 다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근대 국민국가의 기반이 되는 집단적 정체성의 기원과 전통이 해당 분야·시기 역사학 연구를 통해 어떻게 창출되는 가를 살필 수 있다면, ‘실증주의’를 벗어나 현실에서 왜 세종에 대한 이영훈 류 의 해석이 나오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리고 그런 해석에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보다 통찰력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의 세종 논란에 대해 조선시대사 연구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이유로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증주의’와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절대시되 면 역사학은 탈정치적이어야만 한다고 여기게 된다는 점이다. ‘실증주의’의 역 사인식론을 상대화시키지 못할 때, 결국 과거에 과연 그것이 어떠했는가를 밝 힌다는 언설 자체가 이미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치적인 것이었음을 인 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역사학이 철저하게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학문이어야 한다고 믿는 방향에서 ‘실증주의’가 본질화되면, 결국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 제기 되는 역사 관련 논란에 대해서도, 고작 그 “사실관계”가 잘못되었다는 대응밖 에는 할 수 없게 된다. 동시에 해당 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 으로 설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도움이 되는 역사학의 구체적 역할과 방 향도 설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사 연구가 ‘탈정치화라는 정치’ 너머의 지평을 바라볼 수 있는 날 은 언제쯤 올까? 조선 중심의 관점으로 여진족을 비하했던 “야인”이라는 용어 가 당대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용어로서 지금 21세기 조선시대사 연구자의 논 문에서도 따옴표 없이 사용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궤변이 사라지는 날 은, 언제쯤 올까? 현실의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는 관점으로 세종과 그 시대를 다시 해석하려는 연구들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되어 “실증”을 게을리 하는 것이라는 반지성주의적 비난이 멈추는 날은, 언제쯤이 될까?
그런 날에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질수록, 분과학문의 역할과 성격이 급격히 재구성되고 있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 연구가 한국 사회 현실과 미래의 좌표를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모두 가본 적 없는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설정하는 데 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계속 키워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관점이 다르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영훈의 세종 성군 논란과 그 로 인해 노정된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에 비판적으로 대응하는방향은 함께 바 라보면서, 조금 느슨하더라도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역사인식이아직 해보지 못한 방식을 함께 고민함으로써, 세종과 그 시대 그리고 이를 다루었던 근대 한국 역사학 연구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을 시도해보자는 학문적 기획을 어렵 사리 제안해보는 것이다.
정다함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과 횡단경계적
(transnational) 관점을 바탕으로 조선시대사와 해방 이후의 조선시대 사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여 말선초의 동아시아 질서와 조선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 「‘사대’와 ‘교린’과 ‘소중화’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조선 태조대 요동 공격 시도에 대한 재해석」, 「역사학은 어떻게 “예능”이 되었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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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진철, 「일제 관학자가 본 한국사의 「정체성」과 그 이론」, 『한국사학』 7, 1986. 김헌주, 「‘반일 종족주의 사태’와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과제」, 『백산학보』 116, 2020.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소순규, 「조선 초 대열의의 의례 구조와 정치적 의미」, 『사총』 75, 2012. 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 74, 2009.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백년동안, 2018. 이영훈 외,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임지현·이성시 엮음,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2004.
정다함, 「麗末鮮初의 동아시아 질서와 朝鮮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 『한국사학보』36, 2009.
정다함, 「“中國(듕귁)”과 “國之語音(나랏말)”의 사이」, 『비교문학』 60, 2013. 정다함, 「역사학은 어떻게 “예능”이 되었나」, 『한국사연구』 183, 2018.
테사 모리스-스즈키 지음, 김경원 옮김, 『우리 안의 과거―media, memory, history』, 휴머니스 트, 2006.
Tessa Morris-Suzuki, The Past within Us: media, memory, history, London: Verso,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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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사 모리스-스즈키 지음, 김경원 옮김, 『우리 안의 과거―media, memory, history』, 휴머니스 트, 2006.
Tessa Morris-Suzuki, The Past within Us: media, memory, history, London: Verso,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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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01 Tessa Morris-Suzuki, The Past within Us: media, memory, history, London: Verso, 2005, p. 27.
002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003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004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2003.
005 임지현·이성시 엮음,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2004, 휴머니스트, 37~99쪽.
006 「엮은이의 말」, 위의 책.
007 이영훈이 국사의 대안으로 제시한 소위 “문명사”의 기준인 “문명소(文明素)”라는 것 들도, 자립적 개인, 가족, 사유재산, 시장, 분업화, 사회의 자율적 편성 등, 일반적인 서구 적 근대성의 기준이라고 오랫동안 인식되던 것들이다. 박지향은 “이영훈 교수가 서구 의 근대 개념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편”이라고 지적했고, 근대성을 그대로 긍정하는 발표들이 있었음을 언급하며, subaltern과 post-colonialism 논의가 제기한 근대성 자체에 대한 비판이 더욱 필요하다고 했다(박지향, 「역사에서 벗겨내야 할 ‘신화’들」,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398~400쪽). 이영호는 이영훈의 글이 “개발독재 체제하의 민중 억압 은 기억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실현을 상찬하면서 그 배경은 식민지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국가주의적 냄새를 물씬 풍긴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영훈이 한국사의 근대화 과정을 살핀 것을 두고, “도덕사회가 근대사회로 전환된 과정을 유럽 중심주의적·일국사적 관점에서 본 것”이라고 분석했다(이영호, 「한국에서 ‘국사’ 형성의 과정과 그 대안」, 『국사의 신화 를 넘어서』, 460~461쪽).
008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백년동안, 2018.
009 김헌주는 최근 『반일종족주의』 간행으로 불거진 사태와 그 영향, 그리고 이를 통해 드 러난 한국사학 내에서 이루어져온 ‘탈식민’의 한계 등을 예리하게 분석한 바 있다(김 헌주, 「‘반일 종족주의 사태’와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과제」, 『백산학보』 116, 2020 참
조). 그 밖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제시한 『반일종족주의』 비판을 한데 묶은 학술서로는, 이철우·박한용·전재호·홍종욱·황상익 외 13명 지음,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뉴라 이트 역사학의 반일종족주의론’ 비판』, 푸른역사, 2020 참조.
010 이영훈, 앞의 책, 4쪽.
011 위의 책, 6~7쪽.
012 위의 책, 20~21쪽.
013 이러한 이 책의 특성상, 본고에서는 우선 핵심이 되는 지점들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 책 의 구체적 내용들에 대해서는차후에연재될 논문들에서도 자세히다루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014 책의 말미에서 이기백과 한영우의 개설서를 아주 간략히 언급한 것이, 그가 통설을 비 판하기 위해 그 통설의 대표적 논저들을 살펴본 것의 거의 전부다. 이영훈, 앞의 책, 190 쪽.
015 조남욱, 『성군 세종대왕』, 새문사, 2015.
016 장병인, 『조선 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1997 참조.
017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189, 2006 참조.
018 이상과 같은 필자의 훈민정음 해석은, 스스로 두 논문에서 밝힌 바처럼 가나가 출현하 게 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 사카이 나오키의 쌍형상화 도식, 그 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김철과 황호덕 등의 식민지 문학 연구자들의 연구에 서 많은 시사를 받은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문제의식과 횡단경계 적 관점을 바탕으로, 이 해석은 기존 연구들의 관점으로는 조선의 언어를 표기하는 훈 민정음의 기능과 중화의 언어 문자를 표기하는 훈민정음의 또 다른 기능을 서로 상충 하는 것으로 분리시켜서 볼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한 것이며, 그러 한 기존 연구의 역사인식론적 한계로 인해 은폐되어왔던 바, 조선의 언어를 표기하는 훈민정음의 기능과 중화의 언어 문자를 표기하는 훈민정음의 또 다른 기능은, 당대의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번역적 관계) 속에 서 한 쌍으로 기능했던 것이라는 점을 재조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당대의 역사적 맥 락을 재조명하여 밝힌 것은, 그 지점을 재발견하는 것이 지구화라는 현실의 역사적 맥 락을 비판적으로 읽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해석은, 훈민정음을 한자 표기를 위한 발음부호라고 파악하며 그 한자 표기 기능을 강조하지만 그 기능이 훈민 정음의 조선어음 표기 기능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불가분의 관계 속에 기능하게 되는 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50년대 이래 국어국문학 연구들(이숭녕, 강길운, 정광 등)과도, 정광의 최근 저작인 『한글의 발명』과도, 이영훈의 주장과도, 다른 차원의 인 식론에 입각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동시에, 최근 한 국어학자가 필자의 해석 을 정광과 이영훈과 함께 묶어 발음기호설이라 잘못 정의한 것(김슬옹, 「훈민정음 한 자음 발음기호 창체설은 허구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우문에 대한 현답』, 보고사, 2020, 160~184쪽) 역시도, 이러한 필자의 문제의식과 그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 서 민족주의의 전통적 관점에서 통설을 재확인하는 데만 치중한 결과라는 것을 함께 밝혀둔다. 이상 필자의 훈민정음 연구에 대해서는 아래의 두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정다함, 「여말선초의 동아시아 질서와 조선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 『한국사 학보』 36, 2009; 정다함, 「“中國(듕귁)”과 “國之語音(나랏말)”의 사이」, 『비교문학』 60,
2013.
019 이영훈, 앞의 책, 171~181쪽. 이책에서그는 『비교문학』 60집에 실린논문 「“中國(듕
귁)”과 “國之語音(나랏말)”의 사이」의 전거도 “『비교문화』 60”이라 계속 잘못 표기 하고 있다.
020 이영훈, 앞의 책, 151~163쪽.
021 위의 책, 155~156쪽.
022 한형주, 「조선 세조대의 제천례에 대한 연구」, 『진단학보』 81, 1996 참조.
023 정다함, 「조선 초기 야인과 대마도에 대한 번리·번병 인식의 형성과 경차관의 파견」,
『동방학지』 141, 2008, 237쪽 및 264쪽.
024 정다함, 「조선 초기의 ‘정벌’―천명, 시계, 달력, 그리고 화약무기」, 『역사와 문화』 21, 2011 참조.
025 정다함, 「정벌이라는 전쟁/정벌이라는 제사―세종대 기해년 “동정”과 파저강 “야인정 벌”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52호, 2013 참조.
026 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 74, 2009 참조.
027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참조.
028 소순규, 「조선 초 대열의의 의례 구조와 정치적 의미」, 『사총』 75, 2012, 63쪽 및 77쪽.
029 이영훈, 앞의 책, 190~194쪽.
030 학계의 기존 논의는, 조선의 신분제에 대해 법제적 신분은 양천 둘밖에 없다고 주장하 는 양천제설(한영우 등)과 양천제 안에서도 관습적 차원에서 양반 지배층과 중인과 일 반 양인과의 사이에 강고한 신분적 층위가 있었다고 보는 사신분제설(이성무 등)로 크 게 대별될 수 있는데,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중세 혈연 위주의 귀족제 사회는 고려시대로 막을 내리고 조선시대는 양인이라면 원칙적으로 누구나 과거를 통해 양 반 지배층이 될 수 있는 관료제 사회였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정다함, 「‘한국사’상 의 조선시대상」, 『사이間SAI』 8호, 2010, 27~32쪽). 이 논쟁을 대표했던 연구자라 할 수 있는 이성무와 한영우의 주요 논저로 다음의 논문들을 참고할 수 있다. 이성무, 「조선 초기 기술관과 그 지위」, 『혜암유홍렬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1; 이성무, 「조선 초 기 중인층의 성립문제」, 『동양학』 8, 1978; 이성무, 「조선 초기 신분사 연구의 재검토」, 『역사학보』 102, 1984; 이성무, 『조선초기양반연구』, 일조각, 1980; 한영우, 「조선 전기의 사회계층과 사회이동에 관한 시론」, 『동양학』 8, 1978; 한영우, 「조선 초기 신분계층 연 구의 현황과 문제점」, 『사회과학평론』 1, 1982; 한영우, 「조선 초기 사회계층 연구에 대 한 재론」, 『한국사론』 12, 1985; 한영우, 「조선 후기 『중인』에 대하여―철종조 중인 통청 운동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학보』 45, 1986.
031 임지현·염운옥 엮음, 『대중독재와 여성』, 휴머니스트, 2010 참조.
032 이숙인, 「아들 율곡과 함께 역사의 길을―18세기 문헌으로 살핀 신사임당의 이미지」,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다산기획, 2016, 122~163쪽.
033 홍양희, 「신사임당, 현모양처의상징의되다」,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변명』, 다산기획,
2016, 166~213쪽; 김수진, 「현모양처, 신여성, 초여인의 얼굴을 가진 사임당」,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다산기획, 2016, 216~252쪽.
034 이기백, 『민족과 역사』, 일조각, 1971, 178~194쪽. 그러나 이기백이 식민주의의 사대 해 석을 “사실” 또는 “진실”의 “왜곡”으로 파악하고 그의 사대 해석을 그 대척점에 위치시 킨 관점이, 그런 해석들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 문제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035 안드레 슈미드 지음, 정여울 옮김, 『제국 그 사이의 한국』, 휴머니스트, 2007, 307~323쪽.
036 정다함, 「‘사대’와 ‘교린’과 ‘소중화’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한국사학보』 42, 2011 참조.
037 필자의 두 논문의 문제의식과 관점 그리고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본고의 주석 18의 내용 참조.
038 강진철은 후쿠다 도쿠죠(福田德三)가 조선의 노비와 대다수 하층민에 대해 인격을 못 갖춘 존재로 평가한 것을 비판하였는데(강진철, 「일제 관학자가 본 한국사의 「정체성」 과 그 이론」, 『한국사학』 7, 1986, 175쪽), 이영훈은 그런 후쿠다 도쿠죠를 한국 전통사 회에 최초로 “문명사적 관점”에서 접근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다. 임지현·이성시 엮음,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2004, 43~44쪽.
039 이영훈, 앞의 책, 113쪽.
040 위의 책, 88~89쪽.
041 위의 책, 160~163쪽.
042 『반일종족주의』의 출간과 그로 인한 논란에 대해서는 김헌주, 앞의 논문, 234~238쪽.
043 이영훈, 앞의 책, 107~124쪽.
044 이영훈 외,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274~275쪽.
045 해방 이후 조선시대사 연구의 이러한 성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연구로는 정다함,
「‘한국사’상의 조선시대상」, 『사이間SAI』 8호, 2010 참조.
046 근래 안드레 군더 프랑크나 미야지마 히로시는 복수의 근대성만을 강조하는 게 아니 라 아예 동아시아가 근대성을 선취한 것이라는 주장을 공공연히 펴고 있으며, 최근 한국의 조선 후기사 및 개항기 연구자들이 이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점에 서 이렇게 본 것이다. 최근 조선 후기사 연구의 이러한 흐름을 비판한 연구로는 정다 함, 「1945년 이후의 조선시대사 연구와 유교근대론/동아시아론에 대한 post-colonial/ trans-national한 관점에서의 비판적 분석과 제언」, 『코기토』 83, 2017 참조.
047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백년동안, 2018, 6쪽.
048 위의 책, 6~7쪽.
049 현재 기존의 한국사 연구라는 분과학문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 서 분석한 연구에 대해서는 정다함, 「역사학은 어떻게 “예능”이 되었나」, 『한국사연구』
183, 2018 참조.
050 2016년 9월 24일자 한 인터넷 언론은 “조선시대와 근현대시대의 불편한 진실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한 동영상 역사 강의가 네티즌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평가하 며, “최근 ‘정규재TV 극강’은 유투브를 통해서 3개월에 걸쳐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환상의 나라’ 역사 강의 시리즈를 내보냈”는데, 이 시점에 이미 “편당 조회수는 최소 1만 회 이상으로 시리즈 전체로는 24만 회를 돌파했다”고 보도했다(https://www. 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0551).
051 테사 모리스 스즈키 지음, 김경원 옮김, 『우리 안의 과거―media, memory, history』, 휴머 니스트, 2006, 308~311쪽.
052 위의 책, 292~311쪽.
The Rise of South Korean New-Right Revisionist
Historiography on King Sejong and the Issues of Post-
Coloniality in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Daham Chong
South Korean economic historian Yi Yŏng-hun’s arguments on King Sejong in a youtube media lecture in 2016 and its publication into a book called Sejong ŭn kwayŏn sŏnggun in’ga in 2018, has triggered controversial disputes, across the popular internet media space, over King Sejong and his rule which have enjoyed its most iconic status as the all time favorite national hero or saint king within the context of South Korean nationalism. Based on a post colonial and a transnational approach, this paper first examines the perspective and the logic of Yi’s main arguments on King Sejong and his rule. Then, this paper will continue to provide critical analysis that Yi’s argument is not only to debunk Sejong myth built by the main streams of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in South Korea, but also to expand the narrow horizon of South Korean New-Right revisionist historiography that only include hundred years of history from late 19th to late 20th century into wide open several hundred years of Choson dynasty history all the way up to King Sejong’s reign in early 15th century. Then, this paper will ultimately aim to show how Yi’s reinterpretation will end up only supporting Japanese far right historical revisionism’s arguments on perennial controversial issues between Korea and Japan, including “comfort women” that originate back from Japanese colonialism in early 20th century. And Finally I will talk about some crucial points on the issues of postcoloniality exposed by the controversies of Yi’s arguments in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here in South Korean academia, and I will also talk about what the Korean historians studying Chosŏn history should critically examine to cope with far-right historical revisionism in this age of new media.
Keywords: Sejong; Hunmin chŏng’ŭm; Historical revisionism; Comfort Women; Postcoloniality; Yi Yŏng-hun; public history; post-colonial studies.
투고 2021-04-30 수정 2021-05-18 게재확정 2021-05-21
[1] . 머리말
이 논문은 근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를 통해 이영훈이 세종과 그 치세 에 대해 제기한 주장을 비판하고, 이를 통해 분과학문으로서의 한국사 연구(조 선시대사 연구를 포함해)가 처한 현실과 미래도 전망해보려는 글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간의 한국사 연구가 매우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행해졌다는 점을 비판 하는 학문적 작업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이영훈의 주장을 비판적 으로 분석하려면, 그간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서사에 대한 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살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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