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4

서경식의 ‘식민주의 저항’ 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조관자 2008

02 조관자.pdf

1990년대 이후 한국에  소개된 재일조선인 지식인의 민족담론
서경식의 ‘식민주의 저항’ 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조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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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일조선인의 ‘저항서사’는 탄광의 카나리아? 

“옛날에 탄광의 갱부들은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 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 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사회에서 태어난 재일조 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1

1951년생인 서경식은 스무 살 무렵부터 1989년까지 비전향 장기수인 두 형(서승, 서준식)의 구호활동을 펼친 후, 폭력과 저항이라는 근현대의 세계 사적 문제에 천착해온 미술평론가이자 저술가다. 일본의 식민지배 원죄와 일본인의 국민적 책임을 추궁하는 그의 논리는 일관되고 견고하며, 민족해 방의 과제를 일깨우는 그의 문체는 유려하면서도 감성적이다. 그의 일본어 저서는 여러 번역자들에 의해 한국어로 소개되었다. 그는 학살의 기억을 갖 는 유대인은 물론, 유대인에게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과도 공감하며, 백인 제국주의에 저항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과 중국 대륙을 계몽했던 루쉰 (魯迅)을 탐독한 것으로 보인다. 그 모든 체험과 지식과 사유를 담아낸 그의 글은 독자를 압박하는 힘이 있다.2
2006년 번역 출판된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서경식은 자신을 ‘일본의 서사’와 ‘자본주의 근대라는 승자의 서사’와 싸우는 이야기꾼으로 소개한 다.3 자신의 저술에 대해서는 탄광의 붕괴 위기를 알리고 죽어가는 ‘카나리
1 서 경식, 임성모· 이규수 옮김, 『난민과 국민 사이』, 돌베개, 2006, 10쪽.
2 한 국에서 서경식에 대한 비판적 논고는 거의 없지만, 2014년에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가 출판된 이후, 서경식의 ‘저항 논리’가 내포한 윤리적 문제를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윤리적인 자기성찰과 비교하며 고찰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허병식의 논문 「재일조선인 자기서사의 정체성 정치와 윤리: 서경식의 ‘在日’ 인식 비판」(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39집, 2015, 49~74쪽)에서는 서경식의 경우에 프리모 레비에게서 발견되는 ‘회색지대’에 대한 문제의 식이 결핍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3 서 경식, 『난민과 국민 사이』, 7쪽.
아의 비명’으로 표상한다. 서경식 자신이 재일조선인4의 역사적 존재 의의 를 부여하고 재일조선인을 대표하는 선구적 위치에 우뚝 선 모습이다. 그의 서사 속에서 재일조선인은 식민지배의 종주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도 위기를 감지하고 저항하는 소명을 부여받는다. 일본이라는 태생적 지형 에서 저항의 필연성을 찾는 논리의 기저에는 단순히 마이너리티의 권리를 회복하는 차원이 아닌, 전후일본을 저항의 대상으로 규정하려는 반체제적 권력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카나리아의 비명’이라는 표상에서는 ‘일본의 폭력’에 저항하는 혁명적 선지자, ‘역사의 폐허’를 예견하는 메시아사상
(Messianism)의 선민의식조차 엿보인다.
종교적 초월성 또는 혁명적 이상론에서 바라보면, 역사적 시간은 늘 ‘종 말=붕괴’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 종교가와 혁명가들은 ‘내 말을 믿고 따르 라, 그러면 영생과 새 세상을 얻으리라’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압박한다. 유 토피아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경청하고 의지하며 실천하려 한다. 하지만 그 ‘예언=믿음’에 동화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험난한 세 상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그들의 믿음과 실천이 일체의 비 판을 허용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일본사회의 우경화, 재특회(재일조선인의 특혜를 용납하 지 않는 시민모임)의 배외주의 및 혐한 풍조가 우려되는 2015년 현재, 서경식 의 경고가 현실에 적중하지 않았나? ‘카나리아의 비명’은 앞으로 더욱 날 카롭게 증명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스럽다. 재일조선인은 늘 현실을 예시하는 자리에서 그 초월성의 증거인 ‘버림받은 백성’(기민)과 ‘고통받는 몸’(카나리아)으로 현신하여, 현실의 붕괴를 경고하는 역할만 하는 걸까? 일 본을 ‘식민주의 기민(棄民)국가’로 규탄하고, 한국을 ‘반(反)민족 기민국가’
4 참고로 이 글에서는 재일코리안과 재일조선인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냉전적 갈등을 겪은 재일동포사회에서는 재일조선인 호칭을 거부하는 한국국적 및 일본국적 소지자가 있다. 반면 조선적에서 한국국 적으로 바꾸었지만, 재일한국인 호칭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양자를 모두 포괄 하여 재일동포 일반을 가리킬 때 재일코리안으로 한다. 재일조선인 호칭은 국적과 무관하게 ‘재일조 선인’으로서의 역사적 정체성을 중시하고, ‘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민족담론을 생산하고 민족운동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로 원망하며, 재일조선인을 ‘반(半)난민=대지의 저주받은 수난자’로 인식 하는 서경식의 ‘비명’은 어떠한 울림으로 작용하는 걸까? 그 비명이 탄광 의 안팎에서 탄광을 뒤흔들고자 했다. ‘탄광의 안락’을 저주하는 집요한 목 소리가 ‘반일’과 ‘혐한’의 메아리를 불러들이고 있지는 않나? ‘반일’과 ‘혐 한’이 뒤엉키면서 카나리아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철옹성의 아우성’을 만들고 있지는 않나? 다른 재일코리안들은 서경식의 생각에 어디까지 동 의할까? 서경식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일본인은 얼 마나 될까? 
전후일본의 혁신운동에서 재일조선인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중요한 위 상을 가지며 사회운동과 연대의 중심에 있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일 본의 진보진영에서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며,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철폐를 주장했다. 미국의 일본 점령에 대한 일본의 집 단적 기억이 환기되고, 전후민주주의의 허구성과 미일동맹을 비판하는 반 미평화운동의 전선에 재일조선인도 함께했다. 그렇다고 2000년대 일본의 반미전선이 재일조선인과 리버럴 세력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보수진 영에서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비판하는 ‘반미보수’가 대두했다. 1970 년대 이후 부활한 일본의 반미정서를 타고, 반미저항조직 알카에다의 오사 마 빈 라덴에 공감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생산되었다.5 빈 라덴도 2001년 9.11테러에 앞선 인터뷰에서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거론하면서 자 신의 테러를 정당화한 적이 있다.6 이러한 전반적인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5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는 미국을 침략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대동아해방전쟁’을 긍정하고, 친미세력을 비판하는 만화 『전쟁론』(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戦争論) 시리즈 세 권을 출판했다. 2015년에는 미일동맹을 강화한 ‘집단적 자위권’ 제정에 반대하며 『신전쟁론1』(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新戦争論1)을 발표했다. 9.11테러 6년 전에 전쟁화 시리즈로 일본의 뉴욕공습(紐育空爆之図/戦争画RETURNS, 1996)을 그린 아이다 마코토(会田誠)는 「일본에 잠복 중인 빈 라덴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보낸 비디오」(日本に潜伏中のビン・ラディンと名乗る男からのビデオ, 2005)라는 영상작 품에 출연해 스스로 빈 라덴으로 분장하기도 했다.
6 빈 라덴은 “아메리카야말로 핵병기를 보유하고, 극동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인민을 공격했다. 이미 일본이 항복하고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어린이, 여자, 노인을 포함하여 인민 전체에 대 한 공격을 고집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池内恵, 『イスラーム世界の論じ方』, 中央公論新社, 2008, 제1장. 
http://blog.goo.ne.jp/mugi411/e/4572606b136692f62c0cb13b97961710(2015. 12. 11 검색)
 
두면서, ‘반전· 반차별· 반식민주의’의 3반 운동을 제시한 종합잡지 『계간 
전야』(季刊 前夜)의 활동을 보자. 
2004년 10월 창간되어 2007년 1월 제11호까지 발간된 『계간 전야』는, 
재일조선인 지식인과 일본인이 연대하여 ‘저항문화’ 운동을 전개하고자 만 들어진 것이었다(<그림 1>, <그림 2>). 그 대열에서는 서경식을 중심으로 이효 덕, 정영환, 고화정 등의 재일조선인과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를 중심으 로 오카모토 유카(岡本有佳), 나카니시 신타로(中西新太郎), 미야케 아키코(三宅晶子) 등 일본인 활동가와 지식인이 주축을 이루었다. 서경식의 글에서 아프 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중요 화두로 등장하듯이, 『계간 전야』 에는 아랍 사회의 평화, 난민 문제를 다룬 문학과 예술 평론이 다수 게재되 었다. 아랍민족주의 및 팔레스타인 평화운동 연구자인 오카 마리(岡真理), 우 카이 사토시(鵜飼哲) 등도 협력했다. 『계간 전야』의 편집진과 일본의 팔레스 타인 연구자들은 시오니즘과 미국의 중동정책을 식민지체제로 재해석하는 한편, 재일조선인 문제를 팔레스타인 문제와 연계시켰다.7 그리고 재일조선 인과 한국 지식인이 교류하는 공론장도 만들었다.8
발기인 40여 명과 지지자들이 기금을 모아 출발한 『전야』는 ‘특정비영 리 활동법인’(NPO) 방식을 취함으로써 활동자금과 독자층을 규합하고자 했 다. ‘NPO전야’의 발기인들은 1998년 일본의 ‘국기국가 법제화’에 반대하 여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죽는 날”이라는 주제로 토론 집회를 한 이후, 매 년 우경화와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학습과 토론 모임에 참가하거나 관계 했다. 2000년에 기획된 집회는 서경식과 다카하시 데쓰야의 공저 출판기념 회인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대화집회’였다. 2001년 ‘컴패션(compassion)–공감공고(共感共苦)는 가능한가?: 역사인식과 교과서문제’, 2002년 ‘‘반전’ 지금이야말로’라는 주제로 이어진 ‘대화집회’ 의 방식은 당대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실천적 대응이었다. 이러한 학습과 토론 모임은 ‘NPO전야’라는 이름으로 2006년까지 지속되었다.9 
그러나 2007년 이후 NPO전야의 ‘문화적 저항운동’은 완전히 중단된다.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대중 적 지지기반이 와해되어 운영자금이 고갈된 것으로 추측된다. 팔레스타인 에서도 2006년 무장단체인 하마스10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집권당이 되 면서, NPO전야의 ‘반전 문화운동’과 어긋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동아시 아 평화문제를 전망하며 『계간 전야』의 입장을 밝혀야 했다. 그러나 『전야』 의 편집진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저항의 대상은 줄
7 『계간 전야』는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2005」(山形国際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祭 2005)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ルート 181: パレスチナ-イスラエル 旅の断章』(Route 181: Fragments of a Journey in Palestine-Israel)의 가이드북을 별책(2005. 10)으로 출판하면서,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환 기하는 논리를 꾸준히 제기했다. 
8 2000년대에 일본어로 저서를 번역 출판했던 한홍구, 김동춘 등이 소개되고, 『黄海文化』 편집자인 정근 식, 김명인 등도 교류했다. 
9 전야의 활동은 2006년 10월까지 갱신된 홈페이지, 特定非営利活動法人 前夜를 참조. http://www. ccp14.ac.uk/ccp/web-mirrors/rietan/(2015. 11. 3 검색). 일본 유학 중이던 필자도 2000년 집회에 참 가하여 서경식 씨의 연설을 처음 듣게 되었다.
10 하마스는 아랍어 Harakat al-Muqaqama al-Islamiyya(이슬람저항운동단체)의 약자로, 아랍어 Hamas는 힘과 용기라는 뜻을 갖는다.
곧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과 미일동맹, 그리고 일본의 ‘북한 때리기’에 있었 기 때문이다. 아마도 NPO전야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비판도 옹호도 하 지 못하고, 내부의 균열도 드러내지 못한 채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008년부터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으로 영토분쟁이 불거지자, 팔레스 타인 문제는 일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반면, 2002년부터 시작된 ‘북 한 때리기’는 2005년 ‘혐한류’의 등장, 2007년 ‘재특회’의 활동으로 이어졌 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서경식은 일본의 보수나 우익보다 리버럴 세력을 문
제시했다. 그의 칼럼을 싣던 『한겨레신문』(2011. 4. 1)에도 「일본 ‘리버럴’에 속지 마라, 더 위험하다」라는 한승동 기자의 칼럼이 실린다. 
서경식은 일본과 한국 사회에 잘 알려진 지식인들을 과감하게 비판해왔 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주도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천 황제 국가주의와 타협한 국민주의자로 언급된다.11 ‘국가=남성’의 권력을 비판하고 ‘개인과 국가의 동일화’를 거부한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 니시 카와 나가오(西川長夫)와 같은 비국민주의자들은 ‘일본인의 국민적 특권’을 망각하고 ‘일본인의 전쟁책임’을 회피한 자로 취급된다.12 서경식에게서 역 사의 최종 심급자로 역할하려는 태도를 읽고서 소통불가능성의 문제를 제 기한 하나자키 고헤이(花崎皋平)는 타자를 자기 품에 가두려는 온정주의적 보호자로 고발한다.13 “있는 그대로의 후지산”을 바라보게 되었지만 요절한 작가 이양지에게는 “일본국가주의의 상징”인 “후지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재일조선인의 ‘있는 그대로’인 것”이라고 훈계한다.14 일본국가의 도의적 책임을 수용하여 화해의 길을 트자는 박유하에게는 식 민주의의 역사적 피해자를 외면하고 화해라는 이름의 보편주의 폭력을 강 요한다고 비판한다.15
11 서경식, 권혁태 옮김,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돌베개, 2011, 450~453쪽. 12  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287~296쪽.
13 하나자키는 아이누 문제와 베트남평화운동에 관여한 원로 철학자다. 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303~321쪽; 徐京植, 『秤にかけてはならない: 日朝問題を考える座標軸』, 陰書房, 2003, 96쪽.
14 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77~101쪽.
15 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322~364쪽. 다만,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朝日新聞出版, 2014, 
내 글을 읽은 사람들로부터 가끔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영락없이 나는 우에노 지즈코, 하나자키 고헤이, 이양지, 박유하, 와다 하루키, 그밖의 사람들에 대해 주제넘게도 ‘가혹하게’ 썼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나라 는 인간이 타인을 비난하고 규탄하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소 심한 평화주의자다. 내가 ‘가혹한’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 모든 조선민족
이 — 처해 있는 상황이 ‘가혹한’ 것이다.16
서경식과의 비판적· 비평적 대화를 시도했던 일본 지식인 대다수가 입 을 다물었다. 서경식 자신에 대한 비판을 ‘모욕’으로 치부하고 돌아서며, 식 민주의 폭력이라는 원죄· 원리주의의 꼬리표를 상대방에게 내던지는 그 앞 에서 아무도 소통하기를 원하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의 태도를 단호하 고 절박하게 만들었던 ‘모든 조선민족이 처한 가혹한 상황’이란 무엇인가? 일본국가의 법적 책임을 외면당한 위안부 할머니와 징용노동자, 2002년 북 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로 조선적 이탈의 급증, 2006년 북한의 핵실험으로 조세특혜를 상실하고 세무조사까지 당한 조선총련, 지방자치체의 교부금 지급과 중앙정부의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제외된 조선학교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정영환은 당시의 분위기를 ‘반동의 시대’로 서술한다.17 그렇지만 필 자는 그들의 난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서경식이 ‘가혹한 상황’ 으로 대변한 ‘모든 조선민족’의 범주에 스스로를 귀속시킬 수 없다. 무엇에 대한 ‘반동’이며, 왜 ‘역사적 필연’이 아닌 ‘반동의 시대’인지를 밝히지 않는 역사관에도 납득할 수 없다. 그 입론(立論)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필자는 오 히려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49~252쪽)에서 박유하는 일본의 현행법에는 국가사죄와 보상을 위한 ‘법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한일협정의 유효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보상할 수 있는 현실적 입법 조치를 강구할 것을 일본 측에 제기한다. 
16 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14쪽.
17 2002년 납치사건이 불거지고서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 실시된 후 조선총련과 관련단체 및 대북교류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재 조치가 가중되었다. 조선적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 되면서 조선적을 탈퇴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를 ‘반동의 시대’로 규정한 정영환, 「‘반동’ 의 시대: 2000년대 재일조선인 탄압의 역사적 위상」(『황해문화』, 2007 겨울) 참조.

2.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와 ‘전체 민족의 네이션’

1990년대부터 재일조선인 지식인의 민족담론이 한국사회에 적극 유입될 때, 그 선두에 윤건차와 서경식의 글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에서 확 대된 탈민족주의 조류를 비판적으로 견제하며, 일본과 한국사회에서 민족 주의를 재정립하고 통일운동을 촉구하는 글을 발표했다. 윤건차는 1987년 에 학술서 『한국근대교육의 사상과 운동』의 한국어판을 선보인 후, 1990년 부터 『사회와 사상』, 『역사비평』, 『월간 말』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18 그 내용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소개하고, ‘근대의 완성’을 향한 통일민족 국가의 수립 및 사회적 변혁을 위한 진보적 민족주의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2000년에 발표한 윤건차의 「통일 앞둔 한국은 민족주의 새 지평의 시험 대」라는 글을 보자. 윤건차에 따르면,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일=반외세이기 는 해도 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거나 혹은 민족을 주장하면서 남북통일 과제를 소홀히 하는” 문제가 있다.19 그는 동아시아 차원에서 반미평화운동 을 제기한다. “주한미군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적 대해온 존재”이며, “‘민족분쟁’의 장인 매향리 문제”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와 직결”되므로, “북한과 오키나와를 포함한 동아시아 민중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20 민족주의 담론에서도 주한미군의 철폐 와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핵심 의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건 차의 통일민족국가론 및 진보적 민족주의론은 2000년대 후반부터 더 이상 재론되지 않고 있다. 
18 윤건차, 「일본현대사· 재일한국인· 국가권력: 재일동포문제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규명」, 『사회와사 상』 통권 제21호, 1990. 5; 「재일동포 ‘귀화’문제와 일본의 민족· 국가정책」, 『사회와사상』 통권 제22 호, 1990. 6;  「일본땅의 조선인, 그 학대와 차별의 역사」, 『역사비평』 14, 1991. 8. 
19 윤건차, 「통일 앞둔 한국은 민족주의 새 지평의 시험대」, 『월간 말』, 2000. 10, 148쪽. 그는 민족주의 가 “사회 전체의 진보에 관련된 변혁 프로세스를 담당할 사상이고 이데올로기”이자 “민중의 관점에 서 말한다면 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투쟁 그 자체”라고 한다(150쪽). 20  윤건차, 「통일 앞둔 한국은 민족주의 새 지평의 시험대」, 151쪽.


서경식은 1992년에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발표한 후, 1996년부터 『창
작과 비평』, 『한겨레신문』 등에 미술평론과 민족담론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 글에는 전문가적 통찰보다 재일조선인 운동론을 주도하는 실천가의 면 모가 강하게 나타난다.21 처음 발표한 글은 1996년 『역사비평』에 실은 「‘재 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이다. 당시, ‘재일조선인의 위기’란 무엇일까? 어떤 기로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가 도출 한 해답은 1998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에서 좀 더 완결된 형태로 제시된다. 탈냉전 이후 변화하는 일본사회 속에서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지표와 실천 방침 을 알리는 글이다. 
서경식에 따르면, 재일동포는 국적과 무관하게 ‘재일조선인’으로 총칭 해야 하고, 국적을 넘어서 모든 해외동포까지 포함한 새로운 ‘네이션’을 구 성해야 한다.22 “조국에서의 민주화의 추진과 민족통일의 실현, 나아가 재 외동포까지 대등한 구성원으로 삼는 전민족적 ‘네이션’(nation)의 형성이라 는 정치적 과제들이, 재일조선인에게도 자기해방을 위한 불가결한 전제조 건”이다.23 그의 ‘전체 민족=조선인’론은 식민지 경험을 역사적 기점으로 삼는다. 모든 해외 이주민이 식민지배로 인해 조국으로부터 추방당했으므 로 모든 민족(=조선인)의 통일국가야말로 민족해방=자기해방의 도달점이라 는 것이다. ‘식민지 조국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기원 신화를 주조하고 ‘계 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원리를 내세움으로써, 분단의 극복과 탈식민 지의 지향점을 ‘전체 민족’을 연계하는 ‘새로운 네이션’의 형성으로 제안한 것이다. 탈냉전으로 구공산권의 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
21 서경식은 2000년부터 도쿄경제대학(東京経済大学) 교수로 재직 중이지만, 학술연구자가 아닌, 작가, 실천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참조하며,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가 아닌 행동 하는 지성, 아마추어리즘의 진정성을 옹호한다. 서경식, 『난민과 국민 사이』, 6~7쪽.
22 서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역사비평』, 1996 여름;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창작과비평』, 1998. 12. 
23 서경식,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354쪽.
운동의 모든 차원에서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 은 시대의 자연스러운 추세다. 그러나 모든 이주민의 역사를 식민지 기원에 묶어두고, ‘전체민족국가’의 건설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정치적 주권을 회 복하는 길이라는 주장은 재일조선인운동의 논리에서 유래한다. 재일조선인 의 조국지향적인 당위론을 전 민족의 정치적 과제로 일반화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이다. 
서경식은 “현재의 국민국가 시스템에서 주권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당 해온 구식민지인들이 스스로를 ‘주권자’로 형성하려는 것은 당연하고도 정 당한 요구”라고 말한다.24 이러한 주장은 옳다. 다만 다른 자유주의 및 사회 주의 국가로 이주한 구식민지인들은 거주국에서 국적(시민권)을 획득하고 ‘주권자’로 살아간다. 차별과 소외로 박탈된 권리를 거주국 사회의 문제로 제기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법이다. 1990년대 일본에서 도 ‘다문화공생’을 추구하는 재일코리안이 늘어났다. 그러나 서경식은 일본 내 다문화공생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팔레스타인의 최고의결기
관인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alestine National Council, 이하 PNC)와 같은 것이 세계에 흩어진 ‘조선인’들의 주권 기구로 탄생할 때 비로소 진정한 ‘다문화’ 공동체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25 ‘전체 조선인의 네이션’이란 구상은 전후일 본과 한반도의 정치적 구도를 미국과 일본의 ‘계속되는 식민주의’ 체제로 보 는 민족해방론에 기초하면서도, 팔레스타인의 민족운동을 참조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의심스럽다. 일본 내 ‘다문화 다민족 정치공동체’를 부정하면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정치적 결집과 ‘다문화 민족공동체’를 전망하는 태도 가 내셔널리즘을 극복한 새로운 정치운동일 수 있는가? 전 세계에 흩어진 민족의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추구하는 논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시오니 즘과도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했다”는 유대인 디아
24 서경식,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369쪽.
25 서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86쪽. PNC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국회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1964년에 발족했으며, 카이로에서 1년에 2회의 총회를 개최한다.
스포라의 기원 신화는 이스라엘을 정점에 놓고 국외 거주자를 그 밑에 포섭 하려는 ‘히에라르키(hierarchy)의 공동체’를 상상하고 있다는 비판적 견해가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젊은 유대인 일부는 디아스포라 신화의 종언을 선언 함으로써 시오니즘의 팽창적 위계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아이덴티티 의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을 회복하려는 아랍 민족운동은 어떠한가?
일찍이 1978년 겨울, 미국의 아랍 연구자 푸아드 아자미(Fouad Ajami)는 ‘범아랍주의의 종언’을 내다보았다.27 1950년대부터 아랍의 반미· 반이스라 엘 운동을 이끌었던 이집트가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아 랍 내셔널리즘은 실질적으로 붕괴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신, 같은 해에 일 어난 이란혁명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대두를 의미했다. 한편, 이집트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의장인 아라파트는 PNC를 통 해 1988년에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선포한 후, 1993 년 국제적으로도 자치국을 인정받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 러나 시오니즘과 이슬람 원리주의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1987년에 설립된 하마스가 2006년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과 의 무력충돌이 본격화한다. 현재까지 아랍 민족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 제에 공동 대응하거나 유효한 지원책을 내지 않고 있다. 아랍 각국이 ‘즉각 적이고도 완전한 해방’을 추구하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과 ‘공동의 이해’ 를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28 
이집트 연구자인 이노 다케지(伊能武次)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아랍의 현
실과 괴리된 채, 이집트의 나세르와 이라크의 후세인을 과대평가하는 등, 아랍 내셔널리즘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29 일본의 지식계에 서 냉전적 패권과 종파갈등에 복잡하게 연루되어 있는 아랍 민족주의의 실 상에 대해 재검토를 시도한 것은 걸프전쟁을 목격한 1990년대부터로 보인 다.30 일본의 신좌익 세대는 1970년대부터 아랍사회주의 및 민족적 저항운 동과의 연대를 추구했다. 1971년 PLO의 가장 급진적 단체인 팔레스타인해 방 인민전선(PFLP)과 연대한 일본적군파의 아랍지부가 발족하여 1972년부 터 국제테러를 벌였다.31 아랍의 일본적군파의 활동은 냉전 종식과 걸프전 의 종결로 무력해졌다. 하지만, 이슬람의 ‘완전한 해방’을 촉구하는 저항운 동은 급기야 세계의 젊은이들을 테러용병으로 고용하는 이슬람국가(IS)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중반에 PNC와 같은 ‘전체 민족’의 ‘주권기구’를 창출하자고 주장했던 서경식은 2002년 무렵부터 난민과 디아스포라 담론으로 옮겨갔 다. 재일조선인을 ‘민족해방· 주권국가 회복의 주체’에서 ‘난민· 반(半)난민’ 으로 재규정한 것이다. 그의 난민 담론에서 동시대 탈북 난민의 현재적 문 제는 제기된 적이 없다. 서경식의 입론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팔레스타인 의 현재적 난민 문제를 재일조선인론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PNC의 실 질적 무력화와 팔레스타인의 폭력적 사태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그 입론의 회로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현실적 분석이나 전망은 없으며, 미국 과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을 받는 팔레스타인의 수난만이 공감되고 재현 될 뿐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코리안의 삶을 미래 한반도의 통일국가, ‘전체 민족의 
네이션’에 귀속시키는 것만이 주권 회복의 길이라는 주장은 과거 재일조선
29 伊能武次 , 「第五章 アラブ諸国とパレスチナ問題」, 85쪽.
30 아랍민족주의와 지배권력 형태의 다양한 갈래와 갈등관계를 분석한 것으로 山内昌之, 『民族と国家: イスラム史の視角から』, 岩波書店, 1993 참조.
31 1 967년 공산주의자동맹 전국대회에서 당시 교토대 학생 시오미 다카야(鹽見孝也)가 해외 거점을 확 보하여 군사훈련을 거친 후 일본은 물론 세계 동시혁명을 겨냥한다는 「국제주의와 조직된 폭력」이라 는 글을 발표한다. 일본적군파 중 19명이 1972년에 레바논에 입성하여 테러활동에 가담한 것이다. 
「일본적군파2」, 『주간한국』, 2000. 11. 28. 
인운동의 민족해방· 통일론을 글로벌 사회로 확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반 도의 통일은 여전히 모든 코리안의 소원일 것이다. 그러나 통일이 현재적 삶을 부정하거나 구제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믿음은 정치 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특히, 통일의 가능성이 ‘반미’에 있다는 주장에 찬성하거나, ‘통일의 그날’을 위해 북한 주민들이 세습체제하에서 굶주린 삶을 견디며 국가동원에 시달리는 상황이 지속될 이유는 없다. 윤건차의 통 일민족국가 및 진보적 민족주의론, 서경식의 ‘전체로서의 민족’이 구성하는 ‘네이션’론에서 북한에 대한 구체적 요구 사항이 없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 렵다. ‘북한’을 보이지 않게 ‘전체 민족’으로 끌어들이면서, 북한 문제에 대 해 언급하지 않는 태도는 한국의 민주화 및 통일운동에 관여한 재일조선인 들에게서 일관되게 나타난다.32 이러한 태도는 재일조선인들이 남북한 국가 권력과의 충돌을 회피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및 통일운동에 관여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가 아닌, 북한 문제를 ‘봉인’하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전체로서의 민족과 통일의 과제 를 논하는 것 자체가 재일조선인 민족담론의 이념적·정치적 편향성을 노정 시킨다. 
그렇다면 ‘전체 민족의 네이션’론이 제기된 당대 일본과 재일코리안 사
회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3. 공생의 불가능성, ‘동화 대 이화’의 위기의식 

전후일본의 외국인 통계에서 ‘재일한국· 조선인’의 총수는 1991년에 69만 여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33 반면, 귀화자 수는 매해 
32 1975년 봄 창간호에서 「김지하」를 특집으로 꾸민 후 제50호까지 발행한 『계간 삼천리』에서도 북한 에 관한 기사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계간 삼천리』에 관해서는 조관자, 「“민족주체”를 호출하는 “재 일조선인”」, 『일본학』 32, 2011, 201~205쪽 참조.
33 감소 추세의 ‘재일한국· 조선인’은 2005년에 60만 명을 밑돌았다. 2015년 6월부터 50만 명 이하(49 만 7707명)로 내려갔고, 특별영주자는 약 35만 명이다. 법무성, 「在留外国人統計旧登録外国人統計)統
5천여 명이던 것이 1992년부터 2009년까지 매해 7천여 명에서 1만여 명 수 준으로 증가했다.34 1991년에 일본이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로 일본국적을 소유했던 외국인에게 특별영주권”을 부여하고, 귀화조건을 완화한 것이 전 환점이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나는 글로벌화에 대응하여 일본은 ‘다 문화공생’ 정책을 취하고, 동시에 일본과의 혼종성이나 일본 귀화를 긍정하 도록 유도했다. 
외국인 정책의 개방적 변화는 198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1979년에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한 일본이 1982년에 ‘난민의 지위에 관한 조약’에 비 준함으로써, 국민연금법, 아동수당법 등을 외국인에게도 평등하게 적용하 도록 법 개정을 실시한 것이다. 또한 ‘조국과 우리말’을 모르는 재일 3세들 도 1980년대부터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본 속의 공감과 공생 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동화를 비판하고 독자적 권리와 영역을 확보하려던 1세와 2세의 민족의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일본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 하려는 그들의 일본어 담론은 곧바로 일본사회의 지지를 얻었다. 
1980년대에는 ‘재일의 내면’ 바깥에서 ‘재일의 서사’를 분석하려는 시 도가 나타났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를 좋아해서 다케다 세이지라는 일본 식 필명을 쓴다는 강수차는 1983년 평론집 『‘재일’이라는 근거』에서 재일 의 민족의식과 ‘불우(不遇)의식’을 식민지 지배 및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시대 이념과 관련하여 분석했다.35 강수차에 따르면 1세와 2세는 식민지기 의 천황제 일본을 부정하기 위해 ‘민족=국가’ 또는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원리를 절대적인 심판자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2세들은 타자와의 사회적 관계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마땅한 논리를 상실한 채, ‘재일’이라는 특유한 관계의식 속에 갇혔다. ‘재일’의 내면 공간에서는 “왜 나는 일본인이 아니 고 조선인인가? 왜 우리집은 불행한가?”와 같은 어린 시절의 서글픈 물음
計表」 http://www.moj.go.jp/housei/toukei/toukei_ichiran_touroku.html(2015. 11. 30 검색) 34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민단 재일동포의 통계」. http://www.mindan.org/shokai/toukei.html#03(2015. 11. 30 검색)
35  상용하는 이름은 ‘姜修次’다. 竹田青嗣, 『〈在日〉という根拠: 李恢成 · 金石範 · 金鶴泳』, 国文社, 1983, 27~30쪽.
이 “어떤 일상적인 감정의 기복으로도 다 용해할 수 없는 불우성의 덩어리” 로 커져버렸다. 불우했던 기억과 결핍에 대한 질문들은 당대의 담론장에서 ‘재일’의 고유성에 집착하는 ‘내면’과 ‘서사’를 만들기도 한다. 신좌익 세대 일본인에게 ‘인간’과 ‘평등사회’가 주요한 문제의식이었다면, 재일조선인 담론장에서는 ‘민족’과 ‘조국통일’의 신화가 절대 원리로서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36 
재일한국인 3세 강신자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어 표음인 ‘교 노부코’로 부른다. “아무리 의미에서 벗어나려 해도, 역시나 의미에 사로잡히고 마는 ‘재일한국인’보다도, ‘일본어인’으로 부르는 편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라는 당사자의 솔직한 고백이다.37 그들은 해외여행 중에 한국여권 을 잃어버려도 일본대사관을 찾아가 일본어로 문제를 해결한다. 일본어 사 회의 일원이라는 자각 속에서 교 노부코는 일본과의 민족적 대립과 정치적 투쟁보다 ‘대화와 공감’을 추구한다는 내용의 에세이 『극히 보통의 재일한 국인』(1987)을 발표했다. 이것은 제2회 아사히논픽션저널상을 수상했다. 귀 화자인 부모 밑에서 ‘일본인’으로 성장했던 소설가 이양지도 1970년대에 ‘내 안의 일본’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조선인’ 아이덴티티를 추구했지만, 소 설 『유희』에서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수용한다. 1989년 제100회 아쿠타가 와상을 수상한 그녀의 고민은 더는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닌, 작가적 
“감성과 폭의 깊이”라는 문제로 자라나 있었다.38 재일코리안의 문학과 영화가 각광을 받는 흐름은 2000년대까지 한류의 확대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1998년 강상중 교수의 도쿄대학 부임도 일본 지식사회의 주류에서 ‘자이니치’를 영입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세기전환기의 글로벌리즘과 다문화 공생의 지향 속에서 ‘자이니치’가 일본 사회의 보편성을 확장시키는 지표로 환영받게 된 것이다. 다카하시 도시오
36 竹田青嗣, 『〈在日〉という根拠: 李恢成 · 金石範 · 金鶴泳』, 후기 참조. 다케다의 재일론에 대해서는 조관 자, 「이양지가 찾은 언어의 뿌리」, 『사이間SAI』 제3호, 2007, 231~232쪽.
37 姜信子, 『ごく普通の在日韓国人』, 朝日新聞社, 1987. 인용문의 저자의 책 소개에서 발췌. 38  조관자, 「이양지가 찾은 언어의 뿌리」.
는 ‘세계문학’으로 소비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양 석일 문학의 ‘아시아적 성격과 세계성’을 부각시키고, 폭력을 화두로 삼는 작가의식의 ‘보편성’을 평가한다.39 그 대표적 작품으로 김준평이라는 재일 조선인 1세의 가부장적 폭력을 제국일본의 차별적 폭력과 겹쳐놓은 『피와 뼈』(1988), 부모가 아이를 장기매매와 인신매매에 내놓는 타이의 뒷골목을 다룬 『어둠의 아이들』(2006),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뉴욕지하공화국』 (2006)이 있다. 이 작품들은 제국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야만적 구조에 연루 된 아시아의 약자와 피해자의 폭력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주목받았다. 반 면, 재일조선인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를 과도하게 부각시킨 양석일 문학의 상업적 성공에 불편함과 언짢음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40
‘자이니치’의 부상과 영입이 동화정책의 일환이라는 비판은 재일조선인 민족담론에서 줄곧 제기되었다. 자이니치 문화를 소비하는 일본사회가 결 국 ‘조선인’의 민족적 저항의식을 상실시키고 일본의 지배구조에 포섭하려 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윤건차와 서경식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재일 조선인의 ‘불우함’과 일본사회의 ‘식민주의’의 지속성, 보편주의의 폭력성 을 환기시켰다. 윤건차는 재일의 신세대 문학자와 일본의 저널리즘 및 일본 인의 감성이 차별, 원념, 반성, 보상과 같은 현실의 문제를 결락한 지점에서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고 비판한다.41 이러한 비판은 공생의 현실적 가능성 을 추구한다기보다, 민족적 또는 당파적 저항이 후퇴하게 된 시대 변화에 대해 위화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이민 연구자들도 일본의 다문화 공생정책이 다수자 사회로의 문
39 高僑敏夫, 곽형덕 옮김, 「‘세계문학’으로서의 아시아문학」,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던 일본현대문학: 전쟁· 호러· 투쟁』, 글누림, 2014, 301~307쪽. 양석일 문학에 대해서는 김응교, 「‘아시아적 신체’의 소설화: 양석일 평론집 『아시아적 신체』와 장편소설 『어둠의 아이들』의 경우」, 『한국어와 문화』 제11 집, 2012, 137~165쪽 참조.
40 김준평의 폭력성을 괴기스럽게 묘사하여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던 영화 <피와 뼈>(2004)가 식민지 차별의 역사성을 사상시켰다는 비판은 고화정, 「이질적 타자, 재일조선인의 초상」, 『황해문화』, 2007 겨울, 111쪽 참조.
41 尹健次, 「「在日」を生きるとは: 「不遇の意識」から出発する普遍性」, 『思想』 811, 1992. 1, 113~116쪽.
화적 통합에 머무는 허구적 현실을 비판한다.42 한편 글로벌리즘에 반대하 고 다문화 공생을 거부하는 국수주의와 배외주의 풍조도 존재한다. 자영업 자와 사회 주변부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외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배타적인 ‘재특회’도 구성되었다.43 2010년 이후 동아시아 차원에서 역사인식논쟁과 영토분쟁이 지속되면서 한류 문화의 유입을 배격하는 시위도 벌어졌다.44 국수적 배외주의자들은 공생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정부의 다문화 공생정 책에 반대한다. 외국인의 유입이 일본의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고 사회 범죄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2014년에는 ‘이민· 다문화 공생정책에 반대하는 일본국민회’(별칭 야에자 쿠라 모임 八重桜の会)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안 및 외국 인 노동자와 난민을 수용하는 정부정책에 반대하고, 국민여론을 계몽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사회를 동질적 집단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이질적 인 타자의 유입으로 일본이 낯설게 변해가고, 일본국민의 세금이 출혈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45 <그림 3>과 <그림 4>는 야에자쿠라 모 임의 홈페이지 게시판(2015. 12. 19)에 소개된 신간 만화 『그렇다 난민하자!』 에서 따온 것으로 ‘위장난민의 생활보호금 수령’을 야유하고, ‘재일조선인 의 일본이름(통명) 사용’을 풍자하고 있다.46 
공생정책이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추구 
과정에서도 권리와 재원의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과 조정이 끊임없이 수반 된다. 그렇지만 ‘저항과 투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공생은 희망적인 
42 일본계 브라질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문화주의 통합정책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정주화”로 비판한 논저로 梶田孝道 · 丹野清人 · 樋口直人, 『顔の見えない定住化』, 名古屋大学出版会, 2005 참조. 
43 야스다 고이치, 『거리로 나온 넷우익』(2013)은 넷우익을 워킹 푸어로 파악한다(일본어판은 『ネットと愛国 在特会の「闇」を追いかけて』, 2012). 반면, 히구치 나오토, 『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재특회, 왜 재일코리안을 배척하는가』(2015)는 자영업자와 고학력자들의 존재를 밝히고,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 및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갈등구조가 혐한과 혐중의 근거가 된다고 지적한다(일본어판은 『日本型排外主義: 在特会 · 外国人参政権.東アジア地政学』, 2014). 
44 반한류 데모에 대해서는 황성빈, 「넷우익과 반한류, 배외주의의 여론: 주요 언론의 담론 분석을 중심 으로」, 『일본비평』 10, 124~163쪽 참조.
45 http://www.sakuranokai.org/(2015. 12. 25 검색)
46 はすみとしこ, 『そうだ難民しよう! はすみとしこの世界』, 青林堂, 2015. 
 
<그림 3>(위) “일본은 싫지만,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 생활보호의 돈으로. 그렇다 위장난민하자!”
<그림 4>(아래) “뭐든 곤란해지면 통명을 바꾸어 인생 리셋(reset), 그렇다 재일조선인하자!” 
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가치와 방법임에 틀림없다. 과연 공생의 추구가 1990 년대의 새삼스러운 현상일까? 냉전적 경쟁구도에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며 전개한 좌파진영의 ‘일조우호운동’도 비록 한일 국가체제로의 동화를 거부 하는 것이었지만, 넓게는 공생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을까? 
협정영주권에서 소외된 조선적 소지자들도 외국인 등록자로 거주하면 서, 일본 정부의 반공주의적 통제에 굴하지 않고 ‘한일협정체제’를 신식민 지 지배로 비판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철폐를 당당하게 주장했다. ‘사 회주의 혁명’에서 후퇴한 일본의 신좌익 세대는 1970년대부터 혁신지자 체에 적극 참여했고, 재일조선인의 권익 확보를 제도적으로 지원했다.47 조선총련과 조선학교는 일본의 지자체로부터 세제혜택과 학비보조금 등 을 받았다. 공해와 복지, 마이너리티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담론공간 에서 재일조선인 지식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졌고, 취직 차별과 지문날인 철폐 운동도 일정한 성과를 올렸다. 따라서 1990년대 ‘공생’의 흐름은 냉 전시대의 차별 반대 및 연대운동의 연속 및 변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필 요가 있다.
1990년대의 공생은 단순히 글로벌 자본주의의 요구만이 아니었다. 지 역사회에서 연대했던 재일조선인과 일본시민이 더 많은 외국인을 포용하며 새로운 ‘공생’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다만, 탈냉전과 글로벌리즘의 새로 운 지형에서 그동안 좌파진영이 주도했던 ‘재일조선인’과 ‘저항’이라는 ‘완 전체’의 모습이 어느덧 사라졌던 것이다. 조선이란 민족명이 빠진 ‘재일’(자 이니치) 호칭이 굳어지고, 각종 출판물에서 한국과 조선을 병기한 ‘재일한 국· 조선인’ 표기가 늘어났다. 서경식의 ‘재일조선인’ 총칭론은 이러한 ‘재 일’의 문화적 소비에 따른 저항운동의 쇠퇴, 그리고 조선적의 감소 추세에 비례하여 한국국적과 귀화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는 북한과 조선총련을 비판하는 책도 다수 출판되었다.48 1994년, 북한의 핵개발을 위한 물자공급과 자금지원 창구로 조선총련이 지 목되면서 일본의 제재도 시작되었다. 2003년 와다 하루키 등이 펴낸 『북한 관련 책을 어떻게 읽을까』는 1990년부터 출판된 북한 관련 책 500여 권 대
47 1970년대에는 학자인 가지무라 히테키, 와다 하루키, 후지다 쇼조, 이와나미서점의 저널리스트인 야 스에 요스케(安江良介), 평론가 아오치 신(靑地晨) 등이 재일조선인 운동만이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도 연대했다.
48 張明秀, 『裏切られた楽土』(배반당한 낙토, 講談社, 1991) 등. 조선총련 활동가에서 1988년 탈퇴한 장 명수는 『徐勝 「英雄」にされた北朝鮮のスパイ』(서승, 『‘영웅’이 된 북한 스파이』, 宝島社, 1994)의 저자 이기도 하다.
부분이 북한을 비판, 비난, 공격하고 있다고 밝힌다.49 논픽션 작가 김찬정 은 러시아와 중국, 미국 등 다른 해외지역에 정착한 동포들을 방문한 뒤, 1994년에 펴낸 『재일이라는 감동』에서 ‘관념적인 조국지향’을 넘어서 ‘나 아갈 길은 공생’이라고 선언한다.50 조선총련의 잡지 『통일평론사』의 편집 부 차장을 역임했던 김찬정은 1992년에 김일성의 빨치산투쟁 신화를 공공 연하게 비판함으로써 일본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1994년 김일성의 사후, 북한의 지도적 위상과 총련의 대중적 기반이 지 속적으로 약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조선총련과 조선학교의 입장에서도 ‘공 생’의 실질적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실제로 탈냉전, 탈분단, 탈경계 의 시대정신 속에서 공생의 가능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되었다. 1998년 부터 2007년까지 한국 진보정권의 유연한 대북정책에 힘입어 조선총련계 와 민단계의 ‘원코리아 운동’이 활발해졌다. 한국사회의 조선학교 및 우토 로 마을 지원, 한국 정부의 재일한국인 참정권 부여와 같은 일도 넓게는 이 념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생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진행된 남북한의 탈경계 민족운
동은 여전히 좌우의 이념적 분단 및 한일의 역사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정권의 리더십과 대중심리에 좌우되는 한계를 드러냈다. 남북한과 조선 적을 포함한 ‘코리안 네트워크’나 ‘민족공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동화정책과 민족차별이 거듭 환기되었고 한일의 민족 경계가 더욱 강고해 졌다. 반일의 민족감정에 호소하고 일본의 정부정책에 공분할 때, 재일조선 인에 대한 한국인의 마음과 지갑이 쉽게 열렸다. 유독 조선학교만이 일본의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배제되기까지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적 이유 등에 관 한 진지한 검토와 논의는 없었다.51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면서 서경식과 윤
49 和田春樹 · 高崎宗司, 『北朝鮮本をどう読むか』, 明石書店, 2003.
50 金賛汀, 『パルチザン挽歌 金日成神話の崩壊』(빨치산 만가, 김일성 신화의 붕괴), 御茶の水書房, 1992; 『在日という感動: 針路は「共生」』, 三五館, 1994. 
51 전후 직후부터 조선학교는 일본좌익과 재일조선인의 정치운동을 전개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오늘날 의 문제가 불거지기까지 역사적 과정과 동화비판론의 한계에 대해서는 JO Gwan-ja, “Beyond the criticism of assimilation: rethinking the politics of ethno-national education in postwar Japan,” 
건차는 일본의 공생정책이 일본사회가 강요하는 ‘동화’의 다른 이름이라고 비판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재일 3세, 4세에게 민족정체성(에스닉 아이덴티티)의 정립과 일본 사회로의 동화는 여전히 대립적인 것일까? 그들에게 이제 ‘동화’는 국가정 책에 의한 ‘강요’나 정치적 ‘선택’이 아닌, 일상의 ‘호흡’이자 적자생존의 ‘생태 환경’이 아닐까? 거꾸로 동화 비판을 통해 조국과의 연계를 강조하는 논리가 남북한에 대한 정치적 동화를 합리화하고 귀속을 강제하는 효과는 없는가? 바야흐로 일본 내 마이너리티를 대표했던 재일코리안의 위상도 재 일중국인에게 내주어야 하는 글로벌리즘의 조류가 밀려오고 있다. 이제 재 일조선인의 민족사적 갈등과 투쟁의 경험을 딛고서, 다양한 국적의 마이너 리티와 연대하고 공생하려는 전략적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공생 을 일본의 동화정책으로 비판하는 재일조선인의 목소리와, 공생을 공동체 의 파괴정책으로 이단시하는 일본인의 목소리가 치열하게 충돌했다. 공생을 반대하는 대립전선에서 두 세력 모두가 결국 ‘이화’(異化, 異和)를 
두려워한다. 두 세력 모두 배타적인 민족공동체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서 자신들의 집단적 동일성을 구축하는 정치적 구도에 동화(同化, 同和)하기 를 원한다. 이질적인 타자와의 공생을 거부하는 이들의 갈등 속에서 외국인 의 지방참정권 문제가 봉인되는 등, 일본의 다문화 공생정책도 더는 혁신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4. ‘다국적·다민족 시민사회’론과 서경식의 비판론 재고

일본사회와의 관계에서 ‘공생’의 과제는 1995년,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한국경제 연구자 정장연과 한국현대사 연 구자 문경수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이라는 에스닉 아이덴티티를 중시하여 
Inter-Asia Cultural Studies 16(2), 2015.
귀화에 신중하면서도 조국지향성을 품지 않는다. “‘민족’을 대신할 재일사 회의 새로운 통합이념으로서 ‘시민’에 착목하여, 시민사회의 일원이라는 공 통의 입장에서 일본인과의 ‘공생’을 모색한다. 공생관계를 구축할 거점을 ‘지역사회’에서 모색한 것이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이다.52 이들은 지역사 회에서 생활하는 시민 아이덴티티를 중시하면서, 일본이 ‘다국적· 다민족 시민사회’로 거듭나기를 촉구하며 마이너리티 연대운동에도 적극적이다. 한편, 1974년에 민단 및 총련과 별도로 ‘민족차별과 투쟁하는 연락협의회’
(민투련)를 결성하여 권익향상운동을 펼쳐온 독자적 운동세력도 시민적 아 이덴티티를 중시한다.53
1970년대에 안보투쟁이 잠잠해진 일본에서는 ‘즉각적인 일본 혁명’을 포기한 신좌익 세대의 정념이 재일조선인, 공해, 베트남전쟁 등의 문제영역 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지역사회의 생활 속에서 합법적· 평화적 방법으로 도시문명과 사회문제를 극복할 대안을 추구했다. ‘베헤렌’(베트남에 평화를! 시 민연합)이 상징하는 70년대 시민운동은 50년대 좌익과 60년대 신좌익의 폭 력적 혁명노선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도쿄와 오사카의 지자체에서 혁신세 력의 수장이 선출되었다. 전후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
男)의 제자 마쓰시타 게이치(松下圭一)는 ‘국가통치’가 아닌 ‘시민자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고, 시민참가와 공공정책의 입법화 등을 유도한 것으 로 평가된다.54 그러나 1980년대부터 지자체의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버블 경기가 꺼진 1990년대에는 지역사회의 복지행정이 난관에 봉착했다. 1999 년부터 2012년까지 도쿄도지사로 보수적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가 4회 연이어 선출되고, 오사카에서도 2008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보수적
52 鄭章淵, 「‘パックス エコノミか’時代の到来と在日社会」, 『季刊青丘』 第24号, 1995, 65쪽.
53 山脇啓造, 「在日コリアンのアイデンティティ分類枠組に関する試論」, 明治大学社会科学研究所紀要, 第38 巻 第2号, 2000. 3, 134~135쪽.
54 1 950년대 말부터 시민의 정치참여, 대중사회를 연구했던 마쓰시타는 1970년대에 지방자치체에서 시 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사회자본, 사회보장을 제안하여 혁신자치체를 위한 이론을 제공했다. 松下圭一, 『シビル · ミニマムの思想』(東京大学出版会, 1971), 松下圭一, 『市民自治の憲法理論』(岩波書店, 
1975) 등이 있다. 『아사히신문』 기사 「松下圭一さん死去 市民自治による政治の確立目指す」, 朝日新聞デジタル, 2015. 5. 11.(2015. 11. 30 검색)
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가 지자체를 이끌고 있다. 서경식은 김찬정의 공생론과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에 모두 비판적이었 다. 먼저, 김찬정의 공생론에 대한 비판의 논지를 보자. 서경식에 따르면, 공 생론은 외국인 노동자와의 문화적 마찰에 대처하려는 일본자본주의의 요청 에서 나온 것으로, 다문화 사회는 차별을 받아온 재일조선인도 희망하는 바 다. 그러나 김찬정의 생각은 틀렸다고 한다. 즉 “현실을 무시하고 생활감각 으로부터 떨어진 ‘관념적인 조국지향’”이 일본사회와의 공생을 방해하고 재일조선인사회의 미래상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는 견해는 현실을 왜곡했 다는 주장이다. 서경식은 조선인 다수는 강제연행을 당한 채 구종주국에 거 주하므로, “재일조선인 해방의 문제는 다른 이문화집단 사이의 ‘공생’의 문 제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의 극복이라는 문제” 라고 주장한다.55 일본은 “과거를 극복하기는커녕 정확히 인정하려고도 하 지 않”고서, ‘달콤한 공생론’으로 현실의 모순을 덮어버리려 한다.56 ‘공생’ 을 방해해온 일본사회에서 ‘공생’은 오히려 ‘다민족제국일본’의 환생을 의 미하므로, 공생의 모색보다 ‘민족해방’ 운동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공생론자들이 민족문제를 간과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김찬정은 민
족문제의 성격을 더 이상 일본제국주의의 문제로 보지 않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신화로 재일과 북한동포들의 삶 전체를 ‘민 족운동’에 종속시키려는 ‘저항민족주의’의 정치적 의도로부터 해방을 추구 하는 것으로 읽힌다. 필자의 과문함 탓인지, 서경석의 숱한 민족담론에서는 김찬정과 같은 문제의식이나 그러한 문제에 대한 독해력이 아직까지 발견 되지 않는다. 일본을 식민주의 국가로 비판하는 서경식의 입론은 일본의 다 양한 정치세력의 문제를 ‘일본 국가와 국민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고, 일본 국민의 ‘역사적 원죄’를 추궁하는 갇힌 논리의 성격을 갖는다.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에서 서경식은 일본의 기민정책을 증언했다. 
55 서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77~78쪽.
56 서경식,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362~363쪽.
패전 이후 일본국가가 “조선인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들의 ‘일본 국적’을 부정”하고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보장 조치조차 없었”다고 고발 한 것이다.57 냉전시대 재일조선인 담론에서 수없이 반복된 이러한 증언은 ‘재일동포 수난사’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위의 증언 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서경식의 기민과 난민 담론에서는 재일조선인 스스로가 정치적· 경제적 
권익을 추구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2005년 1월 이와나미 에서 발행한 『재일조선인 역사와 현재』는 재일조선인의 유력한 정치단체가 점령당국의 세금 부과를 회피하기 위해 일본국민에서 해제되기를 요청한 사실과, 빈궁한 재일조선인을 위한 생활보호정책이 실시되었던 사실을 서 술하고 있다.58 일본의 패전 직후에 재일조선인의 활동가들은 ‘승전국민’과 ‘해방인민’으로 자처하며 일본의 혁명운동에 관여했고, 한반도의 사회주의 적 통일을 이루고자 한일회담 당시에도 반대운동을 펼쳤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에는 과거 재일조선인의 정치담론에 대한 기억은 봉인한 채, ‘버 려진 백성’이라는 기민의식, 난민의식만이 부각된다. 그러자 일본의 혐한론 자들은 재일조선인의 변주된 기억을 역공격하면서, 재일조선인의 ‘특권’과 ‘반일’을 고발한 것이다.
‘공생론’에 이어서 서경식은 문경수의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을 비판하 고, 그 실패를 단정적으로 예견한다. 문경수의 논문 「재일조선인에 있어서 ‘국민국가’」(1994)는 일본의 고도성장에 따른 재일조선인 사회의 변화로 ‘조 선인 부락’의 해체, 재일조선인의 신중산층 의식과 사생활 중시, 조국과 민 족이란 ‘추상적 대의’의 해체를 지적한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의 주체의식 과 역사감각에 맞는 시민(주민)적 공생을 추구함으로써 국민국가의 틀을 극 복하자는 논지다.59 
57 서 경식, 형진의 옮김,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반비, 2012, 134쪽.
58 水野直樹 · 文京洙, 『在日朝鮮人 歴史と現在』, 岩波新書, 2015, 108~198, 145쪽. 서경식의 글은 인터넷 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http://kkangjong.blog.me/220298444870(2015. 11. 10 검색) 
59 文京洙 , 「在日朝鮮人にとっての「国民国家」, 歴史学研究会 編, 『国民国家を問う』, 青木書店, 1994; 서경 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78~81쪽.
문경수에 대한 서경식의 비판은 세 가지로 제시된다. 첫 번째 논점은 기
성세대의 경직된 민족관을 극복하기보다 “재일조선인과 ‘민족’과의 연결 일반을 부정하는 결과”가 엿보인다는 것이다.60 이는 ‘공생론’과 ‘시민사회 론적 재일론’이 “재일조선인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모순관계를, 일본 국 내의 소수민족집단(에스닉 마이너리티-인용자)으로서의 그것에 한정하고 있다” 는 세 번째의 논점과 연결된다.61 즉, ‘한일협정체제’하에서 “군사정권에 의 해 박해받고 인권과 재산권을 위협받았”던 재일조선인이 중요한 자기해방 의 소명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문경수를 비롯한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자’들 은 한국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에 관여하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생각하 지 않는다. 일본사회의 ‘시민’으로서 ‘재일조선인’의 아이덴티티와 역사를 중시할 뿐이다. 서경식은 한일협정체제에 대한 그들의 ‘비판 없음’과 ‘거리 두기’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영주자격과 의료보험 혜택 등이 보장되는 협정영주권은 한국국적자에 게만 부여되었다. 조선적 소지자는 한국국적으로의 이동을 암묵적으로 강 요당한 셈이다. 한일협정이 일본의 ‘역사청산’을 도외시하고 일본의 신식민 지적 경제침략에 종속된 ‘민족사의 굴욕’이라고 비판했던 조선적 재일조선 인은 그것의 무효화를 위해 싸웠다. 서경식 자신도 형들의 구호활동을 위해 조선적에서 한국국적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굴욕감 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인간해방’은 ‘민족해방’이어야 한다. “재 일조선인이 ‘민족’과 ‘조국’에 관심을 가지고 그 민주적 변혁과 민족통일의 과정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은 “관념적인 ‘당위’나 ‘조국지향’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에게 바람직한 미래를 만 들기 위해서다.”62 서경식의 어법은 ‘민족해방론자’에게 전형적인 사회성격 인식론과 주체의 실천론을 반복하고 있다. 두 번째 논점은, 고도성장이 정치의 우익화, 환경파괴, 가족과 교육의 황
60 서 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78~79쪽. 61  서 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80쪽.
62 서 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80~81쪽.
폐, ‘안락으로 향하는 전체주의’(후지타 쇼조)로 진행된 것이라고 지적되는 일 본의 현실에서, 거꾸로 “시민의 자립성이 착실히 붕괴되어온 것”이 아닌가 라는 반론에 있다.63 일본인이 시민혁명을 추구한다면, “현행 헌법의 상징 천황제 폐지, 기본적 인권보장에서 국적 조항(제11조) 파기”를 위해 싸워야 마땅한데, 그런 자립적 시민은 일본에 없다는 것이다.64 이러한 시민운동론 비판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문제로 대립하게 된 상황에서 와다 하루키를 천황제의 전쟁책임에 소홀한 ‘국민주의’로 설정하고 비판하 는 태도로 이어진다.65 
문경수의 논의는 아직 버블 붕괴 이후의 ‘혁신 지자체’의 실패나 배타주 의 현상을 예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제적 호황기나 경제대국에서도 사회 적 격차 및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은 여전히 관철되었고, 저성장 시대에도 일 본은 여전히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골격을 유지한다. 문제는 오히려 ‘안락 공동체’에서 깨어나 국가적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일부 일본인이 배타적 내 셔널리즘으로 경도되는 현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위기만을 강 조하는 동아시아의 각 세력이 서로의 닮은꼴을 돌아보지 않고, 적대적인 비 방으로 충돌하는 현실에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전후헌법의 상징천황제 폐지 구호가 신좌익 운동에서 사라진 대신,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죽음에 영향 받은 ‘민족파 신우 익’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상징천황제를 비롯한 전후체제가 일본의 전통과 일본인의 자율적 의지를 반영하지 않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종속된 것 으로 규정하고 그 타파를 외친다. 그 후신인 ‘일수회’(一水会)는 1990년대 후 반부터 반미주체화를 촉구하는 대중집회를 활발하게 재개한다. 2010년 이 후 ‘일본문화채널 사쿠라’(日本文化チャンネル桜)와 같은 ‘신보수’ 매체의 토론 
63 역 시 마루야마 마사오의 제자인 후지타 쇼조(藤田省三)와 같은 윤리적 급진론의 지식인들은 1970년 대부터 탈정치화된 친미적 시민사회를 ‘안락 공동체’로 냉소했다. 藤田省三, 「全体主義の時代経験」, 
『藤田省三著作集 6』, みすず書房, 1997, 29~41쪽.
64 서 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79쪽.
65 서 경식과 권혁태가 “한국어(조선어)”로 대화한 대담 「국민주의와 리버럴 세력: 일본을 바로알기 위 해」 참조. 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436~451쪽.
프로그램을 보면, 비록 극소수지만 헌법개정을 막는 의회민주주의를 부정 하고 천황친정의 민족적 전통을 회복시키자는 주장조차 들린다. 미국과 아 시아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일본’의 재건을 위해 ‘민족의 전체성’을 대표하 는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통합을 꾀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천황제 민족주의든, 조선(한국)의 반제(반일· 반미)민족주의든, 그 들이 현실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태도는 묘하게도 닮은꼴을 취한다. 의회 민주주의나 ‘시민적 공생’에 입각하여 정치적 균열과 차이를 조율하기보다, ‘전체로서의 민족’ 논리에 입각하여 정치적 의지를 통합하려는 것이다. 천 황론자든 천황제 폐지론자든, 문제의 설정과 해법의 모색에서 당위론적 이 상론과 원리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서경식은 ‘일본 내 소수자’ 에 머물지 않고 ‘네이션’을 지향할 때, 재일조선인의 귀속 대상은 “전체로 서의 ‘민족’”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자기해방의 과제로서의 ‘통일된 조 선’”이라고 한다.66 하지만 모든 민족의 자각에 의한 ‘네이션’의 구성이 막 연하다는 사실은 서경석 자신도 인정했다.67 그 후에도 ‘네이션’론에 더 이 상의 진전은 없어 보인다. 일본과 한국을 정치적 거점으로 삼고 연결시키려 는 재일조선인의 정치운동은 2007년 한국에서 보수정권이 집권한 이후 좌 절된 것으로 보인다.68 
‘네이션’론의 실질적 후퇴와 함께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마이너리티로 인정하지 않던 태도가 변화한다. 1990년대 저작에서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이 ‘일본 내 소수민족=에스닉 마이너리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69 하지만 일본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2012년의 저작 『재일조선인은 어떤 사람?: 중
66 서 경식,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366쪽.
67 서 경식,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369쪽.
68 한 국의 보수정권은 조선적 재일조선인의 한국 내 정치 활동을 제한했다. 다만 일정한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제한하는 태도는 각각의 정치세력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참정권 운동을 펼 친 재일한국인 활동가들도 일본 내 지방참정권 운동이 논점을 분산시키고 혐한을 초래한다며 반기 지 않는 모습이다. 일본인 대다수는 재일조선인의 이중국적 혜택에 반발한다. 조선총련은 공식적으 로 북한의 해외공민으로 머물고자 한다. 
69 서 경식,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85~86쪽;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361~362쪽. 
학생의 질문상자』에서는 달라진다. “재일조선인을 정의할 때 가정 먼저 ‘일 본사회의 마이너리티(minority)’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70 소수자인 재일 조선인에 대해 아는 것이 곧바로 다수자인 일본인 자신들의 역사를 아는 출 발점이라는 논지에서다. 이러한 논지의 변화는 세계적인 탈냉전 이후 대두 한 난민 담론을 흡수하고, 일본의 재특회 활동에 대응한 현상으로 결코 비 난받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조차 분간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과 
일본의 담론장에서 상대방과 똑같은 논리로 적대적 대립을 반복하고 증폭 시키는 현실에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갈등 속에는 역사적 변 화의 실상을 드러내지 못한 채, 자민족 중심의 논리와 좌우의 당파적 이념 으로 착종된 문제들이 정치적 전선의 어느 한 쪽에 진지를 틀고 숨어버리는 문제가 수없이 많다. 따라서 연구자는 ‘다문화공생’이 아닌 ‘적대적 공존’의 도돌이표, 그 감춰진 ‘피드백’의 논리적 구도를 드러내고 내파시킬 필요가 있다. 마치 철옹성과도 같은 집단적 기억과 정치적 길항구도에 갇혀서 탈출 구를 잃어버린 문제들은 무엇인가? 그 문제의 실상을 분석하고 해결의 실 마리를 찾아내는 작업이 연구자의 책무라 할 수 있겠다. 

5. ‘철옹성의 아우성’을 내파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인식과 해석의 차이, 역사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입장의 충 돌은 재일조선인의 공생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한다. 강제연행설을 둘러싼 일 본의 혐한론과의 갈등을 짚어보자. 혐한론자들은 “1939년부터 실행된 노동 자의 모집과 알선, 1944년 징용령에 의거한 합법적 노동동원”이 있었을 뿐, 그 이전의 이주는 생계를 위한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71 당대의 법
70 서 경식,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21쪽(일본어판 원제 『在日朝鮮人ってどんな人?: 中學生の質問箱』, 平凡社, 2012)
71 山野車輪 , 『嫌韓流』, 晋遊舎, 2005, 86~88쪽.
적 논리로 강제연행이 아니었다 해도 일본의 식민지배와 총력전 동원체제 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에서 거주하게 된 재일조선인의 삶을 모 두 일본국가의 지배구도와 강제연행설에 연루시키는 재일조선인의 경직된 논리가 거꾸로 혐한의 논리를 역사적 사실로 부각시키는 기제로 활용된다. 한편, 혐한론자들의 식민지 미화론 역시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 한다. 영미제국에 저항한 ‘일본의 아시아해방투쟁사관’을 정당화하는 것이 다. 그들은 서구적 근대화를 비판하면서도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를 긍정하 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민족정화를 욕구하고 배타적 기억을 집단화하는 모습에 서 한일의 민족주의는 서로 닮아 있다.72 일본사회의 소수자로서 공생을 모 색하기보다 민족의 ‘네이션’으로 나아가라는 논리는, 의도치 않게 일본 배 외주의자들의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주장에 호응하며 그들의 주장에 힘 을 실어준다. 서경식의 본래 의도는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 본국과 일본 양 쪽에서 참정권을 획득하여 정치적 주권을 행사하고 양국의 공존을 기약하 자는 것에 있다.73 그러나 일본인은 재일조선인이 이중국적의 혜택과 ‘재일 의 특권’을 꾀하면서 일본에서 일본인을 밀어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 중 일부는 ‘조선진주군’이 일본을 ‘침략’한다는 피해망상까지 펼친다.74 그러니 까 ‘반일’은 일본을 떠나라고 외친다. 재일조선인의 조국지향적인 민족운동 론이 일본의 배외주의와 ‘혐한’의 입지를 강화하고, 이것이 다시 일본의 식 민주의와 배외주의를 비판하는 ‘반일’의 논거로 상승 작용한다. 
한일의 민족감정은 서로를 자극하며 어떠한 양보도 타협도 허락하지 않 는 ‘철옹성의 아우성’으로 울린다. 서로 대립하는 주장이 서로의 입지를 강 화하는 역설적인 울림 현상은 비단 상징천황제 반대와 의회제 민주주의 반
72 일 본은 ‘일본의 서사’를 정화하기 위해 ‘서양 근대의 초극’이나 ‘대미종속, 반미민족운동’론을 펼쳤 고, 재일과 한국은 통일민족국가 건설(자주적 근대의 완성)을 위해 역시 ‘제국주의 일본과 미국’을 철저히 배제하는 민족해방론을 펼쳐왔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저항민족주의가 ‘내통’하는 기저에 대 해서는 조관자, 「반미주체화와 아시아주의의 이중변주」, 『아세아연구』 156호, 2014 참조.
73 서 경식,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369~370쪽. 74  < 조선진주군을 용납하지 않은 시민 모임>의 동영상은 유튜브에서도 검색된다. 
대, 그리고 민족국가 건설론과 배타적 국민국가론의 착종된 호응과 대립 관 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좌파의 평화옹호론과 우파의 자주방위론 도 보완적 호응관계를 이룬다. 미일동맹을 비판하고 반미자주성을 외친 일 본과 재일,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2010년 무렵까지도 일본의 안보 공백 문제를 외면한 채, 동아시아 평화를 외쳤다. 그들은 미국의 핵우산을 벗어 난 일본이, 중국의 핵무기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고 국가적 생존을 강구하 기 위해 선택할 방법을 묻지 않았다. 평화헌법의 포기나 핵무장의 가능성을 무시한 채,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를 환상하는 듯했다. 오래된 관성처럼 미 국의 세계지배전략에 종속된 전후민주주의의 허구성과 일본의 전쟁책임만 을 지적하고, 오키나와의 평화를 절실하게 외칠 뿐이었다. 좌파진영의 안일 한 현실인식과 독선적 지조가 1990년대 이후 우익민족주의의 전후민주주 의 비판론, 자주방위론, 자주헌법론을 실질적으로 보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 결과를 해명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하자는 목소리는 아 직까지 들리지 않는다. 
윤건차와 서경식은 일본의 좌파 혁신운동, 시민운동에서 자취를 감춘 
상징천황제의 폐지 문제를 고집스럽게 추궁해왔다. 일본 천황의 전쟁책임 을 제기하고, 반미민족자주를 혁명적 과제로 삼으면서 일본의 시민운동을 비판했던 재일조선인의 ‘지조’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코 하나의 목 소리는 아니지만, 자주헌법을 옹호하는 주장은 좌우의 이념을 초월하여 일 본민족주의의 속내를 대변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자립적 시민’의 죽음과 ‘일본 전후의 붕괴’를 예단하는 재일과 한국의 지식인은 과연 어떠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가? 재일조선 인의 ‘민족해방론’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 비타협적 민족담론이 일본과 한반도의 탈식민화, 아시아의 탈냉전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다. 적대적인 것들과 대립하면서 윤리적 선명성을 견지했던 자신들의 신념과 행동이 시 대상황과 어떻게 호응했는지를 돌아볼 때다. 역사적 불행을 반복하지 말자 는 식민주의 비판담론이 역설적으로 젊은 일본인들의 몰이해를 불러일으키 고, 한일 간의 적대성을 고조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비판과 저항 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때다. 시대상황의 변화 속에서 현실인 식을 새롭게 하고 복잡한 관계성을 다각도로 파악하는 것이 지식인의 바람 직한 태도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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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집단의 현황을 통해 본 재일동포사회: 변호사와 연구자를 중심으로 | 유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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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일본비평 14호 
국문초록
 
특집 | 동아시아 속의 재일코리안: 현재와 전망 디아스포라론과 동아시아 속의 재일코리안 | 신기영
투고일자: 2015. 12. 26 | 심사완료일자: 2016. 1. 9 | 게재확정일자: 2016. 2. 3
이 글은 재일코리안의 역사와 현재 및 집단적· 개인적 경험을 이해하는 개념틀로서 디아스포라론 의 유용성과 한계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금까지 재일코리안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시각 은 일본 내 소수민족집단이나, 넓게는 초국가적 이주민의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재일코리안은 정주 국에 사회문화적으로 동화의 수준이 높으면서도 귀환할 수 있는 모국(현실적 또는 상상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다른 소수집단과 다르며, 귀화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 해온 점에서 초국가적 이주집단의 틀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반면 1990년대 이후 주목받아온 디아스 포라론은 재일코리안을 정주국과 모국의 시공간적 경계를 넘어 형성되는 민족집단으로 특징짓고, 모 국-디아스포라-정주국의 삼자구도 조건 속에 형성되는 이주와 정주의 역사 및 정체성에 대한 분석 틀을 제공한다. 그러한 디아스포라론에 입각할 때 재일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왜, 어떠한 과정을 통해 디아스포라가 되었으며, 무엇이 지금까지 디아스포라적인 상황을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고찰할 수 있 게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재일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특수성을 전통적인 디아스포라론의 삼자구도 가 아닌, 동아시아의 전후 냉전의 역사에서 형성된 사자구도(적대적인 남북한-재일코리안-일본)의 구조에 두고, 재일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구체적인 삶과 정체성은 이러한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 되고 변화해왔음을 지적한다. 나아가 이러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는 단일한 집단정체성의 가정을 배제하고, 재일코리안의 디아스포라화에 대한 복수(複数)의 역사를 듣고 쓸 것을 제안한다. 주제어:  디아스포라, 재일코리안, 동아시아, 마이너리티, 디아스포라화
1990년대 이후 한국에 소개된 재일조선인 지식인의 민족담론:  서경식의 ‘식민주의 저항’ 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 조관자
투고일자: 2015. 11. 18 | 심사완료일자: 2015. 12. 3 | 게재확정일자: 2016. 2. 3
서경식은 1990년대에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포함한 ‘전체 민족의 네이션’을 주장했다. 그러나 2002년 무렵부터 그의 논점이 변화한다. 재일조선인을 ‘민족해방· 주권국가의 주체’에서 ‘난민· 반(半)난민’ 으로 재규정했다. 그의 입론은 팔레스타인의 현재적 문제를 재일조선인론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 글은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한 서경식의 저항 담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1990년대부터 일본은 ‘다문화공생’ 정책을 추진했다. 재일코리안 사회에서도 ‘다국적, 다민족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공생론이 대두했다. 그러나 서경식은 ‘공생’을 ‘동화’로 비판한다. 재일조선인
302   일본비평 14호 
은 일본의 ‘에스닉 마이너리티’가 아니며, ‘전체 민족의 네이션’을 건설할 주체라는 것이다. 그는 모 든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식민지배로 인해 조국에서 추방당했다는 ‘식민지 기원 신화’를 만들고, 일본 에서 식민주의가 계속되고 있다고 고발한다. 따라서 민족해방의 도달점으로서, 팔레스타인민족평의
회(Palestine National Council)와 같은 ‘전체 민족’의 ‘주권기구’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코리안의 네이션’론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시오니즘과 닮아 있다.
서경식은 상징천황제를 유지하는 일본사회에 ‘시민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제 민족주의든, 코리안의 반일 민족주의든, 그들이 현실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태도는 닮았다. 그들은 시민적 공생에 입각하여 정치적 균열과 차이를 조율하기보다, ‘전체로서의 민족’ 논리에 입각하여 정치적 의지를 통합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서경식의 비타협적 민족담론이 과연 일본과 한반 도의 탈식민화, 그리고 아시아의 탈냉전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지를 되묻 고 있다. 주제어:  공생, 코리안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 다민족시민사회
재일코리안의 직업적 지위의 동태:  인구 센서스 데이터로 보는 1980~2010년의 변화 | 히구치 나오토
투고일자: 2015. 11. 17 | 심사완료일자: 2015. 12. 1 | 게재확정일자: 2016. 2. 3
재일코리안은 취직 차별 때문에 자영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1980년대 이후에는 취직 차별이 완화되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재일코리안의 직업은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인구 센서 스 위탁조사 집계를 사용하여 지난 30년간의 변화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여기서 변화의 방향으로 (1) 에스닉 엔클레이브화, (2) 경제적 동화, (3) 분극화라는 세 가지 유형을 설정하고 각 각의 타당성을 검증했다. (1) 자영업 이탈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에스닉 비즈니스
(ethnic businesses)가 유지되며 젊은층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에스닉 엔클레이브화는 지속되고 있다. (2) 1966년 이후 출생자의 대부분은 화이트칼라로 진출하여 일본인과의 차이가 적어지고 세대 교체 에 의해 경제적 동화가 진행되고 있다. (3) 1946~65년생은 자영업 폐업과 실업자 증가를 경험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실업자 비율이 높은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분극화가 발생하지는 않았
다. 젊은층에서도 실업률에 격차가 있다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전체적으로 (1)과 (2)의 효과에 의해 재일코리안과 일본인의 직업상 격차는 해소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재일코리안, 계층, 취직 차별
전문가 집단의 현황을 통해 본 재일동포사회: 변호사와 연구자를 중심으로 | 유혁수
투고일자: 2015. 11. 22 | 심사완료일자: 2015. 12. 6 | 게재확정일자: 2016. 2. 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일동포들은 높은 법적· 제도적 차별 장벽과 극심한 사회적· 경제적 차별 속 에서 에스닉 공동체의 정보를 축적· 배분하는 등 에스닉 경제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신분 상승 을 꾀해왔다. 히구치 교수는 “지난 30년간의 변화를 볼 때, 이민 연구 용어로 재일코리안을 자리매김 한다면 분명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가 될 것이다. 이 용어는 현재 주로 재미 아시아계 이 민에 대해 쓰고 있는데, 2세의 높은 교육수준과 화이트칼라 진출을 특징으로 한다. 재일코리안의 경 우 취직 차별 때문에 재미 아시아계 이민보다 한 세대 더 오랜 시간이 걸려 ‘모델 마이너리티’의 지 위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히구치의 가설과 결론을 전문가 집단에 대입하면 어떤 결론이 
303 국문초록
영문초록         Abstract
 
 Zainichi Koreans in the east asian Context 
Diaspora theory and Zainichi Koreans in the east asian Political Context | 
SHIN Ki Young 
This article aims to review the usefulness and limits of the theory of diaspora as a conceptual tool in understanding the history and the present, and the personal and group experiences of ethnic Koreans (Zainichi Koreans) in Japan. Neither the concept of ethnic minority nor transnational migrants fully captures the state of Zainichi  Koreans; while they are highly assimilated to the host society culturally and economically, Koreans have kept their ethnic identity and nationality, retaining a strong emotional bond with their homeland. The conceptual framework of diaspora, focusing on triad relations of diaspora, host society, and homeland, can help us better understand the complex relationship of Zainichi  Koreans with Japan (the host society) and two Koreas (homeland) as well as their identities. Yet a review of studies on Zainichi  Koreans suggests that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traditional diaspora needs to be reformulated to a four-party relationship in order to analyze how the competitive yet hostile relationship between two homelands shaped by Cold War politics in East Asia has affected Korean diaspora in Japan. To do this task, the article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listening to and writing multiple histories of various disaporic subjects on their experiences with the host society and homelands, and deconstructing the myth of monolithic group identity based on a shared victim history.
• Keywords:  diaspora, Zainichi Koreans, East Asia, minority, diasporization
Zainichi-Korean intellectual’s ethno-national Discourse in Korea since 1990s: 
a Critical review on Kyung-sik seo’s Discourse for “resistance against 
Colonialism” | JO Gwan Ja 
In the 1990s, Kyung-sik Seo presented the “nation of every Korean,” which includes Korean diaspora. Since 2002, however, his argument has changed. He redefined the Zainichi-Korean as a “refugee or half-refugee” instead of a “subject of the sovereign state and the national liberation.” Seo’s argument shows that he has applied the current issue of Palestinians to the theory of Zainichi-Korean.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ritically review Kyung-sik Seo’s discourse of resistance that has changed over time. 
306   일본비평 14호 
From the 1990s, Japan promoted a policy of “multicultural coexistence/symbiosis” (Tabunka Kyōsei). The theory of symbiosis which advocates the “multinational, multiethnic civil society” was popular in the Zainichi-Korean society. However, Kyung-sik Seo criticized the reality of “coexistence/symbiosis” as the policy for assimilation. He rather argued that Zainichi Koreans are not the “ethnic minority” but the subject that would establish the “nation of every Korean.” He further created the “myth of the origin,” that every Korean diaspora was exiled from the home country due to colonialism, and argued that colonialism still continues in Japan. Therefore, his alternative is that every Korean’s sovereign organization such as the PNC(Palestine National Council) must be established. Yet, the theory of nation of every Korean resembles Zionism of Jewish diaspora. 
Kyung-sik Seo states that “there is no citizen” in the Japanese society which preserves the Emperor as the symbol of the state. However, whether it is Japan’s Emperor-centered nationalism or Korea’s anti-Japanese nationalism, both of their nationalism are similar in that they aim to criticize the present reality and overcome it. Rather than mediating political divisions and differences according to civil symbiosis, they attempted to consolidate the political wills based on the logic of “nation as the whole.”  This paper inquires whether Kyungsik Seo’s ethno-national discourse effectively contributes to Japan and Korea’s post-colonialism and further to Asia’s peace in the post-Cold War era. 
• Keywords:  symbiosis, Korean diaspora, Palestine National Council, multiethnic civil society, nation as the whole
30 years trend in occupational status of Zainichi-Koreans:  analyzing Data of Population Census, 1980-2010 | HIGuCHI Naoto 
Zainichi-Koreans are known to be limited in the labor market because of discrimination in employment. Yet, the discrimination has been mitigated since the 1980s. Then, how has the occupational structure (or status) of Zainichi Koreans changed? This paper seeks to analyze the changes in the occupation structure of the past 30 years, using the census data from 1980 to 2010. The three types of changes—(1) ethnic enclave, (2) economic assimilation, (3) intra-ethnic polarization—are set as hypothesis and tested with the following results: (1) Ethnic enclave is maintained in a sense that ethnic businesses (enterprises) over a certain size continue to survive with the participation of younger generations while self-employed businesses decline. (2) Economic assimilation has developed as most of post-1966 generations are employed as white-collar workers in Japanese firms and the occupational gap between Zainichi-Koreans and Japanese decreases. (3) Those who are born between 1946 and 1965 have experienced downward mobility due to the closure of self-employed businesses and the increase in unemployment rate. Yet, except the high unemployment rate that still continues, the overall trend shows that the intra-ethnic polarization has not occurred. For younger generations, it is still true that unemployment rate remains higher, but the overall effect of 
307 영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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