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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스마트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 한국인에게 오펜하이머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펜하이머 주위에선 수많은 현대과학의 거인들이 명멸했다. 미국의 국력과 함께 놀라운 인적 네트워크의 힘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가능케 했다. 별처럼 빛나는 한 인물의 성취는 개인의 평지돌출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지성의 성좌(星座) 덕분인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가 버트란드 러셀 전기를 읽을 때의 경험과 닮았다. 러셀의 자서전엔 20세기 서양지성사에 등장하는 숱한 대가들이 출몰한다. 오펜하이머 자신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그의 손엔 ‘원자폭탄의 아버지’란 ‘피가 묻어 있었다’), 오펜하이머 주위엔 노벨상 수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철학자 러셀의 행보가 무수한 현대사상사와 문화예술계의 거장들과 얽혀 있는 것 비슷하다. 한마디로 오펜하이머와 러셀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세계를 만든 질서의 구획자이자 담론의 생성자였다.
오펜하이머와 러셀의 공통점은 둘 다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이론물리학자로서 미국에 양자물리학을 도입한 선두 주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인문학, 즉 문사철 전반에도 해박했다.
오펜하이머는 7살 때 사촌 누나에게 ‘누나가 내게 라틴어로 물으면 내가 희랍어로 답해줄게’라고 할 정도로 조숙했다. 영화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그는 산스크리트어에도 정통했고, 네델란드어를 단 6주 공부한 후 네델란드어로 화란 현지 대학에서 강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세계에 아인쉬타인 상대성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몇명 안된다는 소문이 무성했을 때 버트란드 러셀은 ‘The ABC of Relativity’라는 책을 썼는데 내 지력으로는 따라 읽기 어려웠다. 러셀은 인문학자도 현대과학의 기본 성과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문사철의 기본을 아는 게 바람직하다. 나는 현대철학과 인문사회과학도 과학의 틀 위에서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언명은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 지난 과학중심주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테제다.
오펜하이머 평전(‘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을 읽을 때 인상적인 대목 가운데 하나는 오펜하이머를 만난 많은 이들이 ‘나는 그렇게 스마트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는 사실이다. 오펜하이머의 경쟁자나 적들조차도 반응은 비슷하다.
오펜하이머는 불문학자를 만나면 불문학을, 미학 교수를 만나면 예술비평을 전문적 수준에서 토론할 수 있는 이론물리학자였다. 나중에 그를 매카시즘의 함정에 빠트리게 되는 좌파에 대한 관심은 특유의 정의감과 함께 마르크스의 자본론 세 권과 레닌 전집을 청년 시절에 독일어 원본으로 읽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스마트하다’는 표현은 단지 지력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20대 중반에 버클리와 칼텍 양자물리학 교수가 됐다. 하지만 그는 섬약한 강단 지식인에 머물지 않고 당시로선 맨땅에 헤딩하는 시도였던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국가적 대업을 39살에 위임받아 세계사를 바꾼 집단 협업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과학 행정가였다.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엔 미국 ‘국가 과학자’의 명성을 활용해 핵군축에 앞장서게 된다. ‘시대를 거스르는’ 선택이었다. 이런 선택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동학(動學)과 충돌해 자신의 삶을 ‘파탄’냈을 때 오펜하이머는 그 운명을 온몸으로 감내한 ‘스토익’한 인간이었다.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자신에게 정직했고 과학의 윤리적 책임을 고민했으며 핵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인류에게 던진 과제를 고뇌했다는 점에서 오펜하이머는 더 없이 ‘스마트한’ 공감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지력과 공감 능력은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그의 인생을 극에서 극으로 몰고 갔다. 20세기 초 독일은 양자역학과 핵분열 연구 자체에선 미국과 영국보다 한참 앞서간 선진국이었다. 하버드를 나온 오펜하이머가 캠브리지 대학을 거쳐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히틀러와 갈등하면서도 끝까지 조국을 떠나지 않고 핵무기 개발에 몰두했던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독일 물리학자들의 ‘우라늄 그룹’은 연합국 포로가 된 이후 1945년 8월 6일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히로시마를 강타했을 때조차 ‘적국(敵國)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미국뿐 아니라 독일과 일본도 핵무기 개발에 국력을 쏟던 시기였다. 필사의 경주였다. 만약 히틀러가 먼저 핵을 손에 쥐었더라면 세계사는 완전히 달리 씌어졌을 것이다.
‘나치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만 한다’는 ‘미국인 오펜하이머’의 불타는 애국심은 제2차세계대전 승리 후엔 인류를 아마겟돈 핵전쟁에서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전화했고 그 결과 오펜하이머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를 매카시즘의 희생양으로만 그리는 영화와 평전의 흐름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 오펜하이머를 절벽으로 몰고 간 당시 원자력 위원회 의장 루이스 스토르스 그룹의 행보를 개인적 악의의 소산으로만 축소하는 것도 균형잡힌 서술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펜하이머의 부인, 연인, 동생, 친구, 지인들이 공산당원이었고 오펜하이머 본인은 당적을 가진 적은 없지만 젊었을 때 공산당 ‘sympathizer’(동조자)였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가 되기엔 너무나 복잡한 귀족주의적 개인주의자였고 비판적 교양인이었으며 정치적 실천에서 진보적 뉴딜주의자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는 차츰 공산주의의 실체에 눈을 뜨게 되면서 소련과 공산당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극비리에 진행했던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에도 핵무기를 향한 소련의 스파이 활동은 집요한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오랜 친구였던 슈라이버를 통한 소련의 공작 시도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오펜하이머에게 평생 족쇄로 남게 된다.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 연구소 총책임자로 임명한 것을 ‘자신의 일평생 가장 잘한 일’이라고 공언했던 그로브스 장군조차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의 정직성과 인간됨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표명하면서도 ‘그 시점에서는 오펜하이머 일급 보안 인가를 연장하기 어렵다’는 데 대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은 1944년~45년 그로브스 장군이 유럽에 파견한 ‘알소스 부대’(희랍어로 알소스는 grove를 뜻한다)는 ‘나치 핵개발의 아버지’ 격인 하이젠베르크 암살 반보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하이젠베르크는 이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알소스 부대는 독일 물리학자들이 추출한 우라늄 대부분을 회수하고 중수소 생산시설을 파괴했으며 나치 ‘우라늄 그룹’ 핵 과학자들 대다수를 소련에 앞서 체포해 미국과 영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하이젠베르크가 핵분열 연구의 방향에서 오류를 범한 것은 미국과 세계 전체엔 천행이었고 히틀러에겐 불운이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를 소련 첩자로 몰고간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지만 미국 정보 당국으로선 후버 FBI의 편집증을 감안한다 해도 객관적으로 의심할만한 여지가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다 오펜하이머의 경이적인 성공과 명성, 인간적 결함에서 나온 오만과 실언, 경쟁자의 질투와 악의, 원자력 정치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해 오펜하이머의 수직 추락을 초래한 것이다. 그게 오펜하이머 평전과 영화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에 그 토대가 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나 관련 자료를 읽고 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수많은 등장인물의 계보에 대한 최소한의 지도 그리기가 선행한다면 영화 읽기의 즐거움도 배가될 것이다. 물론 놀란은 단 세 시간 상영시간에 천 페이지가 넘는 평전과 여타 관련 자료를 능숙하게 버무려 오펜하이머라는 모순적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180분 상영시간 내내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가 평전과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 객관적 사실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다큐멘타리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영화미학적 효과를 시연한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핵무기와 맨해튼 프로젝트는 ‘오펜하이머라는 입체적 인간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모티브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로서는 오펜하이머 평전도 그렇거니와 영화도 흥미진진했다. 특히 영화 끝 장면이 섬찟했다. 대기권 밖으로 솟아오른 핵미사일들이 강타해 핵 화염으로 불타오르는 지구와, 사람을 빨아들이는 심연 같은 오펜하이머의 두 눈이 굉음 속에서 교차하는 최후 시퀀스....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와 자신에게 치명적 비수를 꽂게 될 루이스 스트로스에 반대해 원자폭탄이 ‘모든 미래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그것은 오펜하이머의 소망 사고에 그쳤다.
인류는 지구 전체를 수천번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지상에서 전쟁이 멈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오펜하이머 이후 핵보유 강대국들이 직접 격돌하는 大전쟁(세계대전)이 적어도 지금까진 억제되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세계적 핵전쟁으로 가는 아마겟돈의 문턱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인륜적 참극을 야기한 러시아가 세(勢) 불리해진 순간이 핵전쟁 위험성이 극대화된 시점이었다는 사실은 인간 이성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비극적 아이러니다.
마찬가지로 북한 유일체제가 흔들릴수록 한반도 핵전쟁 가능성도 급상승할 것이라는 인식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순으로 가득한 인물 오펜하이머’는 결코 사멸(死滅)하지 않는 선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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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지젝의 책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에 대한 내 서평('황해문화' 2006년)이다. 그 이후에 난 지젝 책을 읽는 걸 중단했다. 지젝의 길과, 내가 가는 길은 너무나 달랐다. 지젝은 아마 지금도 매해 새 책을 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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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무망한 시대에 혁명을 사유하라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슬라보이 지젝 지음, 도서출판 길, 2006)서평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지젝은 구 유고지역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 난 ‘스타 철학자’로서 ‘동유럽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사뭇 낯선 인구 2백만의 소국 출신이지만 그는 현재 가장 독창적인 ‘서구 사상가’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독일관념론을 양대 축으로 삼는 그의 사유 실험은 영화이론, 대중문화분석, 미학에서부터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을 거쳐 21세기 정치의 지형과 국가론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끊임없는 특강과 강의로 구미 유수의 대학에서 화제를 모으고 세계 곳곳의 학회를 누비고 있지만 철학자와 사회비판가, 그리고 문화평론가로서의 그의 창조성은 아직 소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지젝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어 지금까지 번역된 책만도 수십 권에 이른다.
라캉 전문가라는 인상과는 달리 지젝이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 부른 것은 꽤 오래되었다. 2003년 방한해 강연했을 때도 이 명칭의 함의에 대해 길게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 토론의 저본 노릇을 한 것이 이 저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목 만으로도 독자들의 즉각적 반응을 불러온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21세기에 유물론에 입각한 혁명을 운위하다니! 자본주의가 인류의 뇌수와 무의식까지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처절한 실패로 끝나버린 소련 혁명의 창도자이자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였던 레닌을 화두로 삼다니! 대안이 사라져버린 시대의 대안을 갈구하는 지식사회의 성감대를 어루만지는데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는 지젝은 의도적인 충격요법을 구사한다.
책 앞부분에서 지젝은 총체적 재앙으로 귀결되었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즉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 급진적 좌파혁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관련해 레닌이 현실사회주의 파탄의 원죄로 간주된다는 것도 인정한다. 현실정치는 결과가 말해주는 것이므로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대계급을 일소하는 계급투쟁이나 전위당에 의한 폭력혁명의 이념과 실천이 오히려 온전한 사회주의의 꿈, 즉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비전을 철저히 배반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살아남은 좌파들이 마르크스를 살리기 위해 레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통례이기도 하려니와, ‘인본주의적 마르크스’를 운위하는 일반인들도 ‘인간의 얼굴을 한 레닌’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레닌과 스탈린은 비슷한 범주로 취급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젝 같은 논자가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안이하고 피상적인 해결책이다.
과연 "레닌은 죽었다." 그는 붉은 광장의 창백한 미이라로 누워있으며 궤멸된 사회주의의 기표로 허공에 떠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젝은 극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선언한다. 레닌의 완벽한 죽음은, 레닌 스스로도 알지 못한 "레닌 안에 레닌 자신보다 더 많이 있었던 --- 유토피아적 불꽃이 남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득세는 오히려 그 불꽃을 내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일극적 세계지배가 제국의 몰락을 내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왜 하필 마르크스나 스탈린이 아니고 레닌인가? 약간의 혁명 활동을 했지만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이었다. [자본론]은 세계의 공장이자 제국주의의 모태였던 영국이 구축한 지적 인프라인 대영도서관 고정석에서 쓴 것이다. 이에 비해 스탈린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인 현실 권력투쟁의 달인이자 생래적 마키아벨리스트로서 음험한 비잔틴적 궁정정치를 혁명의 이름으로 체현했다. 편집증에 가득 찬 냉혈한과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사회주의 교리가 결합할 때 소련을 휩쓴 전체주의적 大 테러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레닌은 바로 그 경계선 상에, 즉 마르크스와 스탈린 사이에 있다. 독일로 망명한 패배자 레닌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당시 유럽의 상황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거의 제로로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인 정황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 레닌은 무엇을 했던가? 그는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하는 학습노트를 쓰면서 철학적 성찰을 계속하였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의 사태 전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던 레닌은 2월혁명이 발발하자 동료 볼셰비키들의 판단, 즉 그것의 부르주아 혁명적 성격과 멘셰비키들의 단계론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의 대기론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레닌의 판단과 정치적 실천은 단순한 급진적 主意論으로 폄하될 수 없으며, 차라리 민주주의의 근원적 아이러니를 예시하는 것이라 지젝은 본다.
예컨대 정치공동체 테두리 바깥에 놓여있는 Homo Sacer(희생인)의 21세기적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고대 로마인들에게 호모 사케르는 인간이지만 아무런 법적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존재이며,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희생인들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그런 대상이다. 이태리의 정치절학자 아감벤(G. Agamben)은 미국이 관타나모 수용자(이른바 ‘이슬람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을 미국 국내법과 국제법의 ‘외부’에서 다루는 것, 즉 그들이 마치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에 대해 현대 정치의 근원인 주권의 본질적 실재(라캉적 의미의 빈 틈)를 가리키는 현상으로 읽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젝은 고대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혁명적 의의를 평민의 권력 장악뿐만 아니라 ‘배제된 자들이 사회 전체를 대신하는 진정한 보편성으로 등장’한 주체화의 계기로 판독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지젝의 ‘반시대적 고찰’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단일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강고한 성채에 균열을 내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레닌의 기동전은 ‘자본론에 反하는’ 10월혁명을 성사시켰다. 자칭 레닌주의자 지젝은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 어떤 급진주의자도 더 이상 변혁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는 세태를 뚫고 혁명의 원천을 사유한다. 혁명의 잠재력이 사멸한 듯 보이는 시대가 혁명의 가능성을 극한의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지평이라는 역설이 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펼쳐지는 것이다.
13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본문은 지젝 類의 ‘혁명적 유물론’을 실험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것의 내파 가능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그의 말처럼 “누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주체화할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
지젝이 독일관념론, 특히 헤겔에 대해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결국은 주체 형성의 문제 때문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 우리는 러시아혁명사의 일단을 상기하게 된다. 말년에 레닌은 스탈린에 대해 갈수록 경계심을 가졌지만 애초에 당 운영의 핵심 직위에 스탈린을 임명한 것은 다름 아닌 레닌 자신이었다. 스탈린이 권력을 착착 굳혀가던 와중에 발생한 레닌의 연이은 심장발작은 그의 지력과 신체뿐 아니라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기능도 마비 상태에 빠뜨리고 만다. 결국 레닌은 공산당 전체회의에서 자신의 사후에 발표될 유서의 형태로 스탈린을 숙청하려 한 주관적 의도와 관계없이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의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레닌의 때 이른 퇴장은 러시아 혁명의 총체적 타락에 대해 레닌에게 상당한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닌이 정식화한 볼셰비키 혁명의 구조와 동학, 그리고 혁명 지도부의 면면을 보면 혁명의 진로가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카메네프나 지노비에프, 또는 트로츠키나 부하린이 스탈린의 자리를 대신했더라도 레닌이 착근시킨 혁명의 구조와 동학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타격하기 위해 수립한 혁명적 주체화의 전략이 당 내부에서나 전(全)사회적으로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나의 이런 비판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것이라면, 지젝이 책 말미에서 강조하는 “레닌이라는 기표가 가진 전복적인 측면”은 유명무실해지고 만다고 나는 본다. 결국 혁명에 대한 근본적 사유라는 지젝의 실험은 근본적으로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지젝에게도 할 말은 있다. 라캉에게 있어 실재계는 零 그 자체, 즉 공허로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사태의 뿌리를 드러내려는 지젝식 급진주의(Radicalism)는 그 공허로서의 실재와 맞부딜 칠 때 빛을 발한다. 지젝은 이런 역설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아마도 데리다 이후 가장 생산적이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상가일 것이다.
지젝의 텍스트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지식의 향연은 우리를 매혹한다. 근본적인 것을 사유함으로써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그의 재기발랄함은 눈부실 정도다. 나는 이 저작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수많은 자료와 사례들을 버무려 현란한 생각의 탑을 쌓아 올리는 지젝의 솜씨는 여전하지만 이 책이 ‘읽히는 데’는 역자의 공이 컸다. 복합성의 사상가 지젝의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글이 번역자의 지젝 이해를 바탕으로 투명한 한국어로 옮겨져 있다.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는 혁명이 무망한 시대에 좌파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이다. 나는 지젝의 사유에 동의할 수 없지만, 좌파혁명의 가능성을 자본주의 내부에서 모색하고 있는 한 ‘레닌주의 실천이론가’의 고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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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문 [한국현대사와 리영희]를 여기에 옮긴다.
이 글은 『비평』2006년 겨울호에 처음 실렸고 졸저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생각의 나무, 2008)에 전재되었다. 이 잡지와 책 모두 지금은 절판되었다.
내 논문을 페북에 옮기는 과정에서 각주가 본문에 따라붙는 기술적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각주를 본문옆에 숫자와 함께 괄호를 쳐서 일일이 옮길 수 밖에 없었다.]
[한국현대사와 리영희]
[1]. ‘사상의 은사’ 리영희
한 시대가 가고 있다. 잔인하고 억압적이었던 한국적 반공규율사회와 온 몸으로 투쟁해 온 리영희 선생이 은퇴를 선언했다. 50여년의 왕성한 문필활동을 접는 장렬한 퇴장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한 반공친미의 구조에 내장된 허위를 칼끝 같이 고발한 대가로 그는 아홉 번 연행돼 다섯 번 구속당하고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기 두 번씩 해직되었다. 역대의 어떤 군사독재정권도 진실과 사실을 추구하는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가히 불꽃같은 삶이었다.
리영희의 삶은 실천적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 준다. 그러나 논객 리영희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투쟁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의 은사’였다. 동료 후학들이 리영희 전집 출간으로 그를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했던 주장이 이제 상식이 되었으니, 내 글의 소임은 다한 것 같다.”는 은퇴의 변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의 엄청난 영향력을 입증한다.1
(각주1~ 연세대학원 신문은 교수와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국내외의 학자와 저작에 대해 설문 조사한 바 있다.(연세대학원 신문 94호, 1999년 12월 9일자 기획특집) 그 결과 국내에서는 리영희, 국외에서는 프로이트가 1위로 뽑혔으며, 저작으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선정되었다. 교수보다 대학원생들이 리영희를 많이 선호한데서 엿볼 수 있듯이 운동권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 일반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참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냉전반공주의의 음험한 본질과 은폐된 작동기제를 폭로하는데 있어 한국현대사에서 리영희처럼 투명한 이성을 나는 알지 못한다. 민주화 이후 오늘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반공규율사회의 모순에 대한 인식의 상당 부분은 리영희로부터 빚진 것이다.
어두운 시대의 우상을 깨뜨린 실천적 이성의 권화(權化), 이것이 20대 초반 학생 시절 내가 독자로서 만난 리영희의 인상이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과 중국혁명에 대한 예리한 분석은 내 ‘눈 위의 비늘을 벗겨준’ 지적 충격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감탄과 경외의 와중에서도 그의 논변의 어떤 한 부분에서 무엇인가 치명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느낌을 처음부터 지울 수 없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박정희 시대 반공교육의 한 희생자로서 내가 아직 우상의 세뇌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리영희의 논리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가?
이 글은 이처럼 오랜 개인적 의문의 소산이다.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모순과 정면으로 대결한 거인 리영희에 대한 사숙(私淑)이 사사로운 차원에 멈출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 시대의 지적 패러다임을 규정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준 그의 논리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레 그가 미화한 패러다임 자체의 타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 연결된다. 리영희에 대한 질문은 한국 현대사의 행로 자체에 대한 전면적 성찰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래의 글에서 나는 한국사회의 계몽과 해방을 위한 리영희의 긍정적 기여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다. 리영희 전집 출간을 계기로 쏟아진 선후배 동학들의 높은 평가에 큰 테두리에서 공감하기 때문이다.2
(각주 2~아무래도 찬사 위주일 수밖에 없는 지인들의 덕담보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으로는 두 단행본,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김만수, 나남출판, 2003)와『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강준만 편저, 개마고원, 2004)를 참고할 수 있다. 김만수의 책이 훨씬 상세한 정보와 자료를 담고 있다.)
나는 리영희의 성취를 전제하고 그 기초위에서 그의 맹점과 한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3
(각주3~거의 모든 것이 권력투쟁으로 비화되고 흑백론과 진영논리가 창궐하는 와중에 이성적 개인의 목소리가 묻혀 버리기 십상인 우리 사회에서 진보의 대부로 불리는 리영희에 대한 어떤 합리적 비판도 즉각 보수 세력의 진보 매도에 ‘이용되거나 악용’될 개연성이 상존한다. 그러나 이 글은 이처럼 ‘구조적으로 왜곡된’ 한국적 담론상황의 난경(難境)을 헤쳐 나가기 위한 시도로 읽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일생을 진실과 사실 추구에 헌신한 리영희 선생 자신이 스스로의 지적 작업에 대한 이성적 비판을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상을 타격하는 그의 이성이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세운 또 다른 우상에 의해 광휘(光輝)가 바래 이성의 존재이유를 훼손한다는 사실이 논변된다.
[2]. 소박한 ‘인본적 사회주의’의 우상
앞에서 나는 리영희에 대한 내외의 상찬, 즉 사상의 은사라는 이름을 일단 수긍하였다. 냉전반공주의의 철벽에 이성의 펜을 가지고 도전한 리영희의 시대적 역할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른 쪽으로 과도히 기울어 진 남한의 반공규율사회를 제 자리로 돌리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너무 지나치게 밀고 말았다. 리영희의 이런 또 다른 ‘기울어 짐’은 ‘좌우의 날개로 나는 새’라는 명분으로 방법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4 (각주4~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1994).)
그러나 리영희의 편향은 해방 후 우리 사회의 주도권을 잡아 온 극우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방법론적 고려보다 훨씬 깊은 실존적 정향으로부터 나온다. 반공규율사회로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와, 천민자본주의로 얼룩진 시장 기제에 대한 리영희의 극렬한 반감은 그 정반대 자리에 있다고 그가 상상(또는 표상)한 ‘인본적 사회주의에 대한 선망’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냉전반공주의가 지배하는 불모의 토양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학술적 논의나 단순한 상상조차 금기시되었던 ‘겨울공화국’의 기억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금단의 열매가 매혹의 대상이었던 것은 비단 리영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군사권위주의 정권과 그것을 후견한 미국의 실체에 대한 인식이 1980년 광주의 경험 때문에 집합적 차원으로 확장되었을 때 사회주의에 대한 금기는 비판적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지식인 사회와 운동단체의 바깥에 있는 평균적 한국시민의 생활세계에서 사회주의(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북핵 위기와 대통령선거 등을 둘러싸고 좌우이념투쟁이 변형된 형태로 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더 민감한 주제다. 리영희를 인본적 사회주의자라 부를 때 명칭 자체가 초래할 수도 있는 이데올로기적 채색 효과(이른바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런 방식의 난폭한 딱지 붙이기보다 리영희의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컨대 그는 현실사회주의, 특히 스탈린식 국가사회주의 체제인 소련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한국적 담론투쟁의 지평에 대한 고려와 함께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사회주의나 ‘사회주의적인 것’에 대한 리영희의 인식이 매우 소박하기 때문에 무슨 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리영희가 마르크스의 초기 작업, 즉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진단과 인간 소외론에 경도되어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진 인본적 사회주의자 리영희는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5
(각주5~ 리영희,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63쪽. 이 글은 원래 1991년 1월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발표되었다가 「신동아」에 전재되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보수 진영에서는 진보지식인 사회 대부의 귀순이라 보았고, 운동권 진영에서는 리영희의 변절이라고 비판하였으나 모두 잘못 짚은 것임은 이후의 작업이 증명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사상은 이른바 ‘후기 마르크스’로 불리는 경제이론의 결함 및 오류와 ‘전기 마르크스’ 이론철학으로서의 ‘인간학’이 분리되어야”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지탱해주는 이론적 근거로서 ‘전기 마르크스’의 존재론적 인간학은 이후에도 철학․윤리적 지침으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서구의 신좌파가 1950~60년대에 내렸던 결론을 뒤늦게 추인하는 것으로서 리영희 판(版) 사회주의 사상의 시간적 지체와 질적 소략함을 여실히 입증한다. 한편으로 그는 ‘사회주의가 냉전에서 패배’했음을 시인하며, 현실사회주의의 해체가 스탈린식 사회주의만의 패배라는 좌파 지식인들의 논리에도 반대한다. 또 한편 그는 청년 마르크스의 인본주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현실사회주의의 해체로 인한 마르크스 사상 성찰의 계기를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풍부화”라 부르기까지 한다.6 (각주6~ 리영희, 같은 글, 같은 책, 163쪽.)
그러나 이 두 명제가 이론적으로 서로 화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7
(각주7~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합성과 이론의 정합성에 대한 현대철학적 탐색에 대한 연구를 나는 다음의 책에서 수행한 바 있다. 윤평중, 『담론이론의 사회철학』(문예출판사, 1998년). 특히 「시민사회론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의 두 논문을 참조하라. 같은 책, 81~145쪽.)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을 청년 마르크스의 소외론에서 찾고,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조차 결코 훼손시킬 수 없는 영원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치를 적극 옹호하고자 하는 리영희의 혼란스러운 입장은 그가 놓여 있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증명한다.
이처럼 리영희의 사회주의적 정향은 직관적이며 그만큼 소박하다. 사회주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론정합성을 갖춘 논의 자체가 부재한 것이다. 그의 사회주의 지향은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삶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난 질박한 실천적 강령으로 이해되는 것이 온당하다. 해방 이후 남한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그가 목도한 총체적 부정부패와 인간소외 현상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사회주의가 자못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방식으로 설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탐욕과 경쟁과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그 속에서는 절대 평화로운 사회, 나누는 사회, 토론하는 사회, 더불어 기뻐하는 사회가 될 수 없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무제한적인 사치, 방종, 이기주의, 이런 구제불능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나라가 없다.”고 역설한다.8 (각주8~ 「리영희 선생과의 인터뷰」(프레시안 2005년 3월 29일, 대담자 김민웅). www.pressian.com참조.)
미국의 자본주의를 변태적으로 차용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고발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진단과 처방으로 확장된다. “사회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부패․불법․부정․타락․빈부격차․폭력․범죄․잔인․인간소외 등을 낳게 마련이에요.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본태성 질병’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사회주의의 인간중시적 가치관만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9.
(각주9~ 리영희, 『대화』(대담 임헌영, 한길사, 2005), 685쪽. 리영희 본인이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자서전’이다. 자서전 문화가 척박한 우리 문화 지형의 질곡을 일거에 깨뜨린 쾌거인 이 역저는 그의 개인사인 동시에 현대한국의 총체적 사회사로도 읽히며, 『역정: 나의 청년시대』(창작과 비평사, 1988년)를 잇는 후속 완결판이다. 자화자찬만이 넘쳐나는 불모의 다른 자서전들과는 완전히 다른 리영희의 풍부한 텍스트와 비견할만한 자전으로는 얼마 전 타계한 강원룡 목사의 『역사의 언덕에서』 전5권(한길사, 2003)을 들 수 있으며, 고전으로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가 그나마 그에 가까울 것이다. 자서전 문화의 부재는 리영희가 강조하는 ‘자유와 책임’의 시민의식을 찾기 어려운 한국적 상황의 반영이다. 중요한 자리에 있던 유명 인사에서 보통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자서전들이 서점을 메우고 있는 구미사회와, 그렇지 못한 한국 시민사회의 비교는 우리가 직면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명하는 데도 일정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악마성과 사회주의의 위대성에 대한 리영희의 확신은 오래된 것으로서, 장안의 지가를 올린 유명한 칼럼 「당산 시민을 위한 애도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10 (각주10~ 리영희 칼럼「한겨레 논단」(한겨레신문 1988년 11월 6일자).)
1976년 수십만의 사상자를 낳고 온 도시를 폐허로 만든 당산대지진에서 중국 인민들이 보여 주었다는 자기희생과 질서의식, 공동체 정신에 감명 받은 리영희는 사회주의 “중국 도시의 시민들이 예수의 10계명대로 행동했다.”고 찬탄했다.
이에 비해 몇 달 뒤 뉴욕 시에서 12시간의 정전이 발생했을 때 뉴욕은 온갖 범죄와 강간과 약탈이 난무하는 ‘연옥’이 되어 “예수의 10계명을 배반했다”는 것이다. 리영희에 의하면, “같은 種에 속한 인간의 행동 양식이라기에는 그 차이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이런 극적인 대비가 “이기주의를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와 공동의 이익을 원리로 삼는 사회주의 도덕의 차이일까?”라고 묻는다.
비록 의문문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그가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가는 내용상 자명하다. 모택동의 중국을 인본적 사회주의가 구현된 사회라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사회주의에 대한 리영희의 열망은 너무나 강력해서 전체주의적 당․국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관리되어 언론자유가 완전히 결여된 사회주의 제도언론의 체제선전 선동성 보도를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간주할 정도로 일방적인 것이었다.
미국을 모델로 하는 자본주의의 실상이 부정적으로 인식될수록 그 반대 항으로 설정된 사회주의의 형상이 긍정적으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화폐가 물신으로 경배되는 곳에서는 돈이면 못할게 없는 극심한 인간소외가 팽만(膨滿)하게 된다는 청년 마르크스의 그림에서는 사유재산권과 분업의 폐지가 해결책으로 공약된다. 보통 사람이 “아침이면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밤에는 비판을 하는” 전인성(全人性)이 실현된 사회는 과연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일 수 있을 것이다.11 (각주 11~ Marx and Engels, The German Ideology, in Collected Works (Moscow: Progress, 1975), Vol. 5, 47쪽. )
자본주의의 모순에 격노한 지식인들이 그 대안으로 장밋빛 사회주의에 열광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리영희의 글 곳곳에 산재한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기실 19세기에 마르크스가 창도한 이후 오랫동안 서구의 비판적 지식인들을 격발(激發)시킨 집합감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우상을 부순 자리에 리영희가 세운 것은 바로 사회주의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3]. 중국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리영희가 세운 사회주의라는 우상은, 모택동의 중국에 대한 그의 숭앙에서 절정에 달한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적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고 민중의 자발성이 존중되며, 돈과 재물의 유혹을 거부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주의의 아름다운 그림이 모택동식 사회주의에 대한 리영희의 익애(溺愛)의 원천인 것이다. 모택동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최근의 보고나 고발도 그의 강고한 확신을 흔들지 못한다.
사실 학자로서 리영희의 전공분야는 동북아 지역 국제관계학과 중국현대 정치사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냉전적 편견을 통타한『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 비평사, 1974년)와 함께 중국전문가로서 그를 자임하게 한 책들로는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1977년), 『중국백서』(전예원, 1982),『10억인의 나라』(두레, 1983년) 등이 있다. ‘빨갱이 국가 중공’의 실상을 알리는 작업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검열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책은 유수의 세계적(특히 구미) 중국전문가들의 논설이나 기행문을 편역․주석해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었다.
냉전반공친미체제의 파수병인 당시 공안당국자들에게 ‘당신들이 경배하는 구미의 세계적 전문가들의 학문적 성과’라는 방어막을 친 것이었으며, 이 전략은 알게 모르게 서양숭배에 빠져있는 일반 독자들에 대한 파급력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효과적인 것이었다. 리영희 본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서양 학자들의 발언을 통해 전달되는 사회주의 중국의 현황은 외양적 설득력과 객관성이라는 잣대에서 훨씬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8억인과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12
(각주12~ “이 책을 엮는데 … 체험과 견문의 주체는 반드시 서방세계의, 각 해당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거나 저명한 전문가로서,… 〈친중공〉적인 편견을 가졌다고 알려진 개인…은 일체 배제한다.” 리영희 편역,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1977년), 4쪽.)
그러나 전문적인 사회과학 방법론과 과학철학의 성과를 원용하지 않더라도 리영희가 자신만만하게 자임한 객관성의 신화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산처럼 쌓인 중국 관련자료 가운데서 한정된 몇몇 글들을 취사선택하는 것이나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는 과정에 편역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중국혁명의 의미나 성과에 대해 정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논자들을 서로 병치시켜 독자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게 해야 했으나 리영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머리에 뿔 달린 중공 빨갱이’식의 반공구호가 횡행하는 세상의 균형을 잡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말한다.
리영희가 편역한 중국 관련 책들은 빨갱이 구호의 선동성이나 피상성과 대조되는 논리적 체재를 갖추었지만, 내용적으로는 모택동 치하의 중국을 미화한 채 형언하기 어려운 중국인민의 비극과 고통을 은폐하는 성격의 글들이 모여 사회주의 중국의 실제인 양 그려지는 효과를 낳았다. 리영희의 사회주의적 정향이 취사선택의 궁극적 기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리영희는 구미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우회적으로 진술하는 방식을 채택해 객관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면서 독자와 후학들을 오도한 것이다. 모택동의 중국에 대한 이 중국전문가들의 호의적 평가가 인본적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확신을 강화하는 상호 되먹임(feedback)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이런 되먹임 관계가 ‘중국전문가 리영희’에게 큰 학문적 부담을 지우면서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신화를 균열시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8억인과의 대화』와『10억인의 나라』에서 서양전문가들이 개진한 중국혁명관이 다름 아닌 리영희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육성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리영희에 의하면, 중국혁명은 ‘인민대중노선, 정신주의와 도덕적 인간행위의 숭상, 자기희생적 헌신의 미덕, 지식인계급의 권위를 부정하는 하방제도, 평등주의적 사회정신, 군 내부의 계급철폐, 대중의 간부 비판의 권리와 자유의 제도화, 대중토론에 기초한 상향식 의사결정원리의 강조, 양성평등 제도의 존중, 합리적․과학적 제도의 철저화, 검소하고 질박한 실용적 물질생활의 존중, 자민족 문화와 전통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의 결정체다.13
(각주13~ 본문이 너무 길어 리영희가 대조법을 사용해 부각시킨 중국혁명의 장점만을 적시했다. 리영희, 『대화』, 447~448쪽 참조. 이 부분은 리영희가 어떻게 균형감각을 잃고 실족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약한 고리’라 할 수 있다.)
어떤가? 이는 리영희가 꿈꾸었던 인본적 사회주의의 거의 완벽한 지상에서의 육화가 아닌가? 모택동의 지도를 정점으로 해 이루어진 ‘인류사에 전무후무한 정신혁명’의 결과 완전히 새로운 인본적 사회주의 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리영희의 이런 평가가 정확한 것이라면 모택동 사후 등소평의 실용주의적 개혁이야말로 중국사회주의의 총체적 변질이자 타락이라는 결론도 불가피해 진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한국전쟁의 불행한 기억을 일단 배제하고, 반만년 중국사에 비추어 볼 때 중국공산당이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높이 사는 점은, 천하대란과 천하대치(天下大治)의 반복 속에서 억만의 인민이 속절없이 희생당해 온 역사의 고리를 끊고 특히 등소평의 지도하에 천하대치를 구현해 평균적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이다. 정치공동체의 기본을 충족시킨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리영희 중국관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의 기본중의 기본을 그가 무시하고, 자신이 설정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상에 인민의 현실을 무리하게 구겨 넣는다는 점에 있다.
이념을 현실에 억지로 투사할 때 인민들의 비근한 생활세계는 잊혀 진다. 리영희는 자신이 이념적으로 투사한 중국의 이미지에 도취되어 모택동이 추진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무자비한 권력투쟁적 성격을 경시했다. 리영희의 도저한 도덕주의와 정신주의는 중국 대륙전체를 고통의 바다에 빠트리고 수천만 명의 무고한 중국 인민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조차 정당화하려 시도한다. 알렝 뻬르피뜨(Alain Peyrefitte)의 입을 빌려 그는 ‘공포와 유혈없는 혁명없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함을 암시하면서 영구혁명론을 옹호한다.14 (각주14~ 리영희, 『8억인과의 대화』, 44쪽.)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념이 추동하는 테러가 가장 극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헤겔이 프랑스대혁명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면서 설파한 혁명의 동학, 즉 혁명가의 작업이 보편성을 강변할 때 “죽음이란 배추의 밑둥을 쳐낸다거나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는 혁명의 역리를 간과하는 것이다.15 (각주15~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Werke 3 (Suhrkamp, 1969), 436쪽.)
그러나 이념이 평범한 인간의 삶을 말살하는 것에 대해 리영희 자신이 일생을 몸 바쳐 투쟁해오지 않았던가? 옳은 이념이 인간을 겁박(劫迫)하는 것은 정당하고, 부당한 이념은 폭력을 통해서라도 철폐되어야 한다고 할 때 과연 누가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것인가? 전인민의 총체적 고통을 담보로 한 모택동의 극좌적 실험은 이념의 미명아래 평균적 인민의 삶을 오히려 황폐화시키지 않았는가? 무서운 질주로 인간적 겸양을 상실한 맹목의 이념은 리영희가 신봉하는 인본적 사회주의의 가치를 뿌리부터 부정하지 않는가?
리영희의 좌편향은 공산당이 이끈 중국인민들의 집합적 자기 판단까지 거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150년에 이르는 중국 근현대사를 사실(史實)과 이론 양 면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문건에서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으로 당과 국가와 인민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았다.”고 선언한다.16 (각주16~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 편, 허원 옮김 『정통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사계절, 1990년), 33쪽.)
이어 결의는 “‘문화대혁명’의 역사는 모택동 동지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주요 논점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의 실정과도 맞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선포한다.17 (각주17~ 같은 책, 34쪽.)
리영희는 모택동 이후 중국의 변화를 추적한 『10억인의 나라』에서 중국공산당의 이 결의를 발췌해 맨 앞에 실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다음에 등소평 노선을 전면 부정하는 논자의 입을 빌려 “현 중국지도부(등소평 일당…인용자)는 역사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수정주의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그들도 결국은 패배를 면하지는 못하리라.”라며 울분을 토한다.18 (각주18~ 리영희, 『10억인의 나라』, 54쪽.)
그의 문화대혁명관을 감안하면 이런 분노는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이다.
문제는 모택동의 중국이 인본적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실현하고 있다는 리영희의 소망 사고(wishful thinking)가 명명백백한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는 데서 극점에 이른다. 간난에 찬 중국혁명의 도정이 중국인민들 자신의 손에 의해 수정되고 결집되어 도도한 물꼬를 만들어가는 흐름 자체의 의의를 부인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등소평 노선이 옳다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리영희가 절망하고 현재의 중국지도부 자신이 고민하듯 숱한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시장사회주의는 모택동 일인숭배에 기초한 극좌혁명노선을 거부한 중국 인민들의 집합적 실천이성의 발현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성급한 예단을 삼갈 필요가 있다.
역사에 전선진미(全善眞美)란 없다. 만약 누가 역사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강변한다면 그것은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리영희의 정신주의는 그런 이상향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한국이나 미국에 대한 그의 가혹한 평가를 보라. 그러나 ‘중국전문가’ 리영희를 능가하는 평균적 중국 인민들의 지혜는 모택동에 대한 다음의 결의에서 다시 빛을 발한다. 모택동의 “전 생애를 놓고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이 잘못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의 공적이 1차적이고 오류는 2차적이다.”라는 것이다.19 (각주19~『정통 중국현대사』, 47쪽.)
공산당의 정통성에 대한 정치적 배려 외에도 중국인민의 역사적 균형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리영희는 “30년 전의 문화대혁명 시기의 평가와, 30년 후의 실제적 검증 사이의 괴리는 비단 나 한사람에 한정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중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거의 공통된 사실”이라고 ‘변명’한다.20 (각주20~ 리영희, 『대화』, 447쪽.)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해명은 주관적으로 옹색하며 객관적으로 비학문적이다. 주관적 차원에서 지식인 리영희의 염결성을 회의하게 하며, 객관적 지평에서 중국전문가 리영희의 학문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답변인 것이다.
그는 30년 전 평가의 대종을 뒤엎는 엄청난 수량의 자료들이 웅변하는 압도적 증거에 대해 눈을 감으면서까지 이미 실효(失效)된 중국혁명 상을 강변하고 있다. 처참한 수용소군도의 실상조차 극좌적 서구 지식인들이 신봉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망상을 균열시키는 데는 충분치 않았다. 명백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사상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실 대신 이념을 선택하였다. 그것이 50년 전의 일이다. 극좌파와는 거리가 먼 한반도의 ‘사상의 은사’ 리영희가 인본적 사회주의의 미명아래 비슷한 오류를 무려 반세기가 지난 후 반복하는 것처럼 우리를 처연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4]. 시장맹(市場盲) 리영희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리영희를 ‘유학자적 인본주의자’로 부른다. 불의와 억압에 굴하지 않는 지사적 태도, 물질을 내려다보는 정신주의, 옳고 그른 것을 추상같이 가르는 품격 등에 걸 맞는 이름이다. 지금까지 분석한 인본적 사회주의와 유가적 인본주의에는 몇 가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양자의 가장 의미심장한 공통점은 시장을 적대시한다는 사실이다. 유교적 전통에서 상업에 대한 구조적 홀대와 경멸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다. 사농공상의 계층구조와 상업이 제일 밑바닥을 차지하는 체제에서 시장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선비는 돈을 만지는 것 자체를 터부시 했고 경제활동을 생존을 위한 필요악 정도로 치부했다. 현대의 선비인 금욕주의자 리영희에게도 그런 자취가 약여(躍如)하다.
사회주의자가 볼 때 만 악의 근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윤논리로 환원시키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다. 청년 마르크스가 개탄하고 분노한 바로 그 대상이며 후기의 성숙한 마르크스가 사유재산과 분업을 폐지함으로써 철폐하고자 꿈꿨던 악마의 기제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중핵을 형성하는 시장의 부작용에 대한 인본적 사회주의자 리영희의 절규에 가까운 경고를 우리는 곳곳에서 조우(遭遇)하게 된다. “물질적 소유의 다과가 인간적 덕성보다 존경과 선망의 표적이 되고, 형제․시민․동포적 유대가 단절되고 개개인이 자기 이익만을 좇는 분자화된, 사람이 나눔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빼앗음의 대상화로만 일반화되고, … 그래서 모든 인간이 소외된 상태”인 자본주의 체제를 고발하는데 그는 결코 지치지 않는다.21 (각주21~ 리영희, 『반세기의 신화』(삼인, 1999년), 252~253쪽.)
그러나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시장에는 리영희가 알지 못했던 오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에게 시장의 유일한 순기능은 생산력 창출 정도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 리영희는 마르크스의 진단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웅변하는 대목 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시장 기제의 경이로운 생산력 창출 능력에 대한 언급이다. ‘이전의 모든 사회구성체가 이룬 생산력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생산력을 산출한 자본주의’에 대한 찬탄이 『선언』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자가 볼 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윤을 매개로 작동하는 시장은 생산력의 확대와 함께 바람직한 사회의 기초를 구성한다. 리영희 스스로 평생 신봉한 ‘자유인’의 이상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와 규범적 제도들이 근대적 시장경제의 성숙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리영희는 “자유는 인간존재의 전부며 그 본질이다. …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고 사자후를 토하는 데 22(각주22~ 리영희, 『自由人, 자유인』 (범우사, 1990년), 7~8쪽),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개인의 출현은 근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정립을 기다려야만 했다.
불가침의 자연권에서 가장 중요한 실질적 내용은 사유재산권이었다. 생명과 자유의 물적 근거가 재산권이었던 것이다. 재산권을 보통의 시민들이 법적으로 향유하고 거래의 자유와 이윤추구의 권리를 보장 받을 때 고전적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만개할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존재론적 근거는 개인인데, 개인의 제도적 근거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였던 것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조차 ‘인격의 근원이 재산권’이라는 사실을 옳게 이해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 상호순환관계를 맺었던 시민권과 재산권, 또는 근대민주주의 질서와 자본주의 질서 사이에서 배태된 역동적 긴장의 지평이야말로 리영희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인의 현실적 거소(居所)였던 것이다.
리영희의 정신주의는 근대 이후 인본주의적 인류문명의 기저를 구성하는 자본주의적 시장 기제의 이런 입체적 성격을 일면적으로 단순화시킨다. 그의 도덕주의는 자연발생적으로 복합화된 ‘자생적 질서’로서의 시장이야말로 삶을 살맛나게 하는 다원성과 다양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생산력의 산출 장소 정도로 폄하하는 시장이 개인의 자유를 창출하고 권리를 정초함으로써 근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동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시장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시장은 리영희나 마르크스가 형상화하는 것처럼 인간 소외의 원흉이나 생산력 산출의 도구로만 폄하될 수 없다. 시장에 그런 요소가 본질적으로 있지만, 그것과 모순적으로 동행하는 현상이 이윤을 추구하는 개인들 각자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의 귀결로 ‘누군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행위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다. 밑으로부터 솟아나는 이런 ‘자기 조직적 구조’는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처소(處所)로서 인간의 자율성과 활동성의 초석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근대의 시장을 떠나서 성찰적 시민사회와 합리적 국가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생산력의 저하로 인한 체제경쟁 실패로만 설명될 수 없다. 시장을 부정한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율성과 창발성을 사멸시킬 수밖에 없었고, 시민사회의 탄생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국가를 전체주의화 하였다. 그 결과 모택동 식 사회주의를 포함한 현실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악성의 방식으로 인민들을 총체적으로 소외시키고 말았다. 리영희의 인본적 사회주의와 유가적 도덕주의는 근대적 시장의 입체성과 역동성을 이해 못하는 시장맹(市場盲)으로 귀결됨으로써 자유인의 존재 근거를 부인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5]. 리영희의 공(功)이 먼저고 과(過)는 다음이다. 그러나 그 과오는 치명적이다.
리영희가 현실사회주의의 해체가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공식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회주의는 역사에서 퇴출된 공산주의와는 다르다’고 확신하는 것은 앞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의 사유에 새롭게 부가된 것은 국가사회주의로 변질된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경험이었다. 그 결과 그는 “사회주의의 인간중심주의적 생산방식이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한다.23 (각주23~ 리영희, 『대화』, 686쪽.)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의 생산방식은 결코 그가 묘사하듯 인간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의 시장맹,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소망사고는 다른 논제에서는 치밀하고 정교한 분석가로 알려진 리영희를 거친 절충주의로 인도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요소를 5할 정도 수용하고 사회주의적 요소도 5할 정도 융합하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인류 사회의 현 발전 단계에서 가장 낫다’고 보고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을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라고 부르면서 통일 한반도의 모델로 간주하는 해답을 내 놓는다.
모택동 치하 중국사회주의의 본 모습을 특유의 소망사고로 굴절시킨 리영희의 인본적 사회주의는 북한을 다루는 데서 더 편향된 형태로 재현된다. 그에 의하면 “해방 후 신생독립국가 건설사업의 길에서 전자의 인간형(강렬한 정의감, 헌신적․자기희생적 인간 … 인용자)이 주로 ‘좌’의 자리에 섰고, 친일파․민족반역자로 지목됐거나 그런 오명을 찍힌 후자의 인간형(기회주의적․현실주의 인간 … 인용자)이 ‘우’의 자리에 마주섰”으며. 그리하여 “전자의 인물들은 분단된 북쪽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했고, 후자의 인물들은 남쪽에서 자본주의를 건설했다”는 것이다.24 (각주24~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67쪽. )
선악의 단순구도로 역사를 평면화하는 리영희의 인본적 사회주의는 다음과 같은 북한맹(北韓盲) 적 재단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북쪽은 (남쪽과 … 인용자) 반대의 철학으로 나라 만들기를 서두른 결과, 높은 민족적 자존과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도덕적 생존, 그리고 동포애가 감도는 순박한 인간평등의 사회를 실현한 것으로 주장한다. 많은 공평한 관측자․방문객들에 의해서 그 측면의 사회적 善은 증언되고 있다.”고 단언한다.25 (각주25~ 같은 책, 167~168쪽.)
나는 기본적으로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라는 그의 규정에도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북한 인민들의 삶의 실태는 ‘고난의 행군’ 이전에도 그가 목가적으로 서술하는 것과는 딴 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치밀하게 ‘관리’되었던 모택동 시기 중국처럼 철저한 폐쇄사회인 북한의 경우도 외부 인사의 ‘관측과 방문’이 갖는 한계를 감안해야 하는데 리영희는 인본적 사회주의의 안경을 쓰고 그것을 무시한다.
나는 북한국가 건설 초창기에 인민의 삶이 나름대로 질박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북한 체제가 아직 그런대로 작동할 때 국가가 선도한 사회주의적 가치관의 구현이라는 측면과 함께, 남한 농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승된 공동체적 삶의 질서가 투영된 측면이 컸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수령에 의한 유일영도체계가 굳어지면서 리영희가 채색하는 북한 사회의 순박함은 빠르게 증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비판과 자유가 실종된 사회에서 자율적 책임에 입각한 도덕을 운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민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부인하고 수령만을 경배하는 사회에서 민족의 자존은 수령만이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자주성 테제에 대한 정면 배반이다. 북한 인민들이 평등하다는 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어떤 계층이 만약 평등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노예의 평등’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된다.
리영희 류 인본적 사회주의의 평면적 절충주의는 남북통일 문제를 다루는 데서 재현된다. 냉전반공주의가 배양한 남한식 한반도문제 이해의 일면성과 구조적 편견을 고발하는 데 탁절(卓絶)한 분석을 보여주는 데 비해 26 (각주26~ 예컨대 리영희,『역설의 변증』(두레, 1987년) 제 1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에 실린 4편의 논문들은 그 모범적 사례다. 같은 책, 11~108쪽 참조.), 그의 통일 논리는 매우 단순하다. 예컨대 “남한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북한은 시장경제를 수용하여 사회의 기본 성격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을 거부하는 한 진정한 평화적 통일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27 (각주27~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69쪽.)
나아가 “남북한도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절반씩 도입해서 비슷한 경제․문화가 되어야 각기 국민(인민)의 행복이 증진할 수 있어요. 그렇게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절반씩 가미한 제도와 국가는 통합되기가 쉽지, 이 방식이 내가 주장하는 ‘체제수렴적 통일론’이”라는 것이다.28 (각주28~ 리영희, 『대화』, 694~695쪽.)
남과 북의 장점을 ‘절반씩’ 섞어 평화통일하자는 리영희 발언에는 수사학의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원을 떠나서 리영희의 수렴론적 통일론은 동어반복적 소망 표출에 지나지 않으며, 통일 논의의 진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한다. 내가「헌법철학으로 본 분단과 통일」에서 논변했듯이 국가철학과 헌법철학의 시각에서 볼 때 가능한 통일방안은 '자유민주적인 것'이 되든지 아니면 '주체사회주의적인 것'이 되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29 (각주29~ 이는 2006년 5월에 열린 한국철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문으로서, 『논쟁과 철학』(고려대 출판부, 2007년)에 전재되었다.)
양자의 수렴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주체사회주의가 핵심강령을 수정할 자체 능력을 이미 상실했음을 논증했고, 이에 비해 자유민주적 질서는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자기 확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리영희의 시대적 의의를 십분 인정한다. 단적인 사례로, 적화통일에 대한 공포나 재래식 북한군사력 위협론이 얼마나 부실한 기초위에 서있는가를 촌철살인적으로 해부하고 있는「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에서 노정되는 리영희의 탁월한 실증적 분석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30 (각주30~ 리영희, 『自由人, 자유인』, 101~133쪽.)
그렇게 예리한 논증이 주는 해방감은 우상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참으로 신선한 이성의 청량제였다. 그런 리영희가 총체적 재앙이었던 모택동의 실험과 북한의 참혹한 현실에 대해 우리를 미혹(迷惑)하는 발언을 확신에 차 계속할 때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아름다운 얼굴이 ‘새로운 우상숭배자’의 형상과 겹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리영희는 모택동의 중국과 김 父子의 북한을 다루는 데 있어 그리도 맹목인 것일까? 이 글은 그런 오래된 개인적 의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 졌다. 소박하고 도식적인 그의 인본적 사회주의는 시장맹과 북한맹을 배태(胚胎)하면서 우리 시대를 계몽함과 동시에 미몽에 빠트렸다. 결국 리영희는 냉전반공주의가 압살한 불행한 시대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모택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를 패러디하자면, 리영희의 공이 일차적이고 과는 이차적이다. 공적이 하늘을 찌르는 것과 함께 그 과실(過失)도 가히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 풍(風)이 몰아치는 작금의 세태가 이를 웅변한다. 그는 비록 붓을 꺾었지만 우리는 리영희라는, 모순에 찬 거인이 남긴 후과(後果·後過)와 씨름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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