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9

Yipyo Hong - 독도, 울릉도, 울진의 서글픈 변경사(辺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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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pyo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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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울릉도, 울진의 서글픈 변경사(辺境史)
어제 이시바 총리의 선출과 관련해 돗토리현 이야기를 했다. 그 가운데 옛 돗토리번이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님을 천명했던 역사를 소개했고, 그 불편한 역사 때문인지 메이지 정부는 1905년에 독도를 돗토리가 아닌 시마네현으로 편입한 사실도 언급했다. 그런데 이게 일본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찜찜하고 비슷한 강원도 관할 지역에 대한 왜곡의 역사가 있다.
울릉도는 신라 지증왕 13년인 512년에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며 한반도의 역사에 비로소 편입된다. 고려시대에도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지자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에 안무사 김인우를 파견해 강원도가 직접 관할토록 했다. 1693-96년의 일본 어민들과의 충돌에서 안용복이 활약해 조선 영토임을 다시 천명할 때도 삼척첨사 장한상이 울릉도 일대를 수호했다. 1883년에 울릉도로 주민을 이주할 때도 대부분 강원도민이었고, 1895년에도 삼척영장을 울릉도의 도장(島長), 이후의 도감(島監)으로 임명했다. 대한제국기인 1900년의 행정개편 때도 강원도 울도군(鬱島郡)이었다. 이처럼 울릉도와 그 옆의 독도는 500여년 간 강원도 관할이었다.
그러던 것이 러일전쟁 승리 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 정치를 시작한 1906년에 뜬금없이 울도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이속(변경)된다. (“六郡移付”. 《대한매일신보》 (333). 1906년 9월 28일. ) 총독부 통치가 시작된 수년 뒤인 1914년에는 경남에서 경북도로 다시 이속(변경)된다.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1913년 12월 29일자.)
1980년대에 늘 듣고 불렀던 ‘독도는 우리땅’ 가사의 2절,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이라는 가사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늘 위화감으로 다가왔었다. 지도를 보면 분명 강원도 바로 옆의 섬인데, 사회과부도를 보면 더 멀리 떨어진 포항에서만 항로가 그려져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나는 1905년에 일본 정부가 돗토리번에서 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제외시킨 불편한 역사로 인해 시마네를 선택했듯이, 초대 총리이자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도 곧장 500년간 강원도가 관할해 온 울릉도와 독도 관할을 새로운 지역으로 넘겨 역사 세탁을 하려 한 것이라 의심하고 있다.
기독교 전래사를 보더라도 울릉도에 첫 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강원도 삼척 사람들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朝鮮耶蘇敎長老會史記)참조.) 하지만 그렇게 경상도로 빼앗긴 울릉도의 사람들은 모두 경상도 방언을 쓰며 스스로의 역사와 정체성을 망각한 채 살고 있다. 저 일본 열도 남단의 류큐(琉球,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말이다.
강원도 굴욕의 역사는 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서 다시 한 번 연출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마자 군인들은 초법적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1961-1963)를 통해 지도를 펼쳐 놓고 마음대로 칼질을 한 것이다. 1962년 12월 12일 서울특별시, 도, 군, 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 1172호)을 통해 강원도 울진군을 1963년 1월 1일부로 경상북도에 넘긴 것이다. 박정희가 자기 고향을 위해 작은 선물하듯 울진을 넘길 때 김종필은 고향을 위해 전북의 금산군을 충남으로 편입시킨다. 저 구미의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에서 땅따먹기하며 지도에 선긋기 놀이를 했듯이 말이다.
(물론 도청소재지 춘천이 너무 멀고, 대구와 포항에 의존한 지역경제 등을 이유로 소수의 지역 유지들이 경북 편입을 바랐던 것도 있었지만, 그건 군민 다수의 의견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수 유지들의 민원에 집권한 군인 박정희가 무식하게 독재적으로 응답한 결과다. 안타깝게도 지역 경제를 위한다는 논리로 경북 편입을 수용한 울진은 어찌 되었을까? 여전히 봉화 영주 등과 함께 TK의 가장 소외된 지역이며, 받은 거라곤 흉물스러운 거대한 원자력발전소라는 정도다.)
이 일로 인해 1000년 동안 이어져 온 울진의 강원도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동시에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 등에서 정리한 이른바 ‘관동8경’(1. 통천 총석정, 2. 고성 삼일포, 3.간성 청간정, 4.양양 낙산사 의상대, 5.강릉 경포대, 6.삼척 죽서루, 7.울진 망양정, 8.평해 월송정) 가운데 두 곳은 강원도에서 뜯겨져 나가 경북의 명승지가 되어 버렸다. 총석정과 삼일포가 이북에 있으니 지금 대한민국의 강원도에 남아 있는 관동팔경은 단지 네 곳 뿐이다.
나의 외조부 故 김영기 옹은 늘 강원도 울진이 경북에 빼앗긴 것을 한스럽게 여기셨다. 또 한 사람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을 지내셨고 스위스 바젤에서 칼 바르트에게 직접 사사한 신학자 윤성범 선생께서도 울진 출신이신데, 1976년 <크리스천신문>에 연재한 “나의 생애와 신학”이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 강원도(현재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나다 ----- 나는 강원도 울진에서 고(故) 윤태현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고향산천을 등지고 집시 무리와도 같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사십대가 되도록 고향에 가보지 못 했다. (…) 울진은 얼마 전에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마치 독(獨)・불(仏) 국경이 자리 잡고 있는 알사스 로렌(Alsace-Lorraine) 지방과도 같다.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편입된 것은 나로서도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감자바우 강원도가 마음에 든다. 순박하고 절대 평범하고 무던하고 그리고 두루뭉술하고! (…) 내 고향 여기에는 관동팔경 중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이 있다. 이 지점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말할 나위 없이 좋거니와 되돌아서서 서쪽으로 왕비천의 맑은 시내와 길고도 멋진 왕비교를 끼고 석양 하늘 아래 중첩된 영봉들을 바라 볼 때 나는 저 독일의 대학도시로 널리 알려졌고, 그리고 시인 휄더린(Friedrich Hölderlin)이 찬사를 아끼지 아니한 하이델베르크의 풍경, 곧 네카(Neckar)) 강과 그 다리, 그리고 고성(古城)과 중첩된 산들을 연상해 본다.” (윤남옥 편저, 『성(誠)의 신학자 윤성범의 삶과 신학』, 한들, 2019, 19-20.)
나는 저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1905)과 울릉도의 경상남북도 편입(1906, 1914), 울진군의 경북 편입(1962)의 역사를 모두 일제와 친일 군인들의 동일한 역사선상에서 바라보며 유감을 느낀다.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변경(辺境)의 역사는 늘 참으로 무참하다. 거대한 중심과 중심 사이의 힘 앞에서 끊임없이 유린과 착취, 자기정체의 부정을 강요 당하기도 한다. 이북과 남한으로 두 동강난 내 고향 강원도는 또 저렇게 제국일본의 군인들과 해방 이후 친일부역 군인들에게 난도질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류큐(오키나와)가 그렇고, 사할린과 북해도가 그러하며, 제주도와 대만이 그러하며 저 동토의 북간도 땅도 그러하다.
그러고도 저 순박하고 무던하기만 한 감자바우들은, 일본의 저 조슈번(長州藩)처럼 권력화되고 흑화된 경북의 패권주의에 기생할 생각만 한 채 주체로서 거듭나질 못 한다. 내가 저 일본의 깡시골 돗토리에서 40년 간 주류 정치판에서 왕따를 당하면서도 우직하게 버텨와 결국 총리 자리에까지 오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라는 사람을 목도하며 비애를 느끼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이시바를 탄생시킨 밑바탕에는, 시마네와는 구별된 돗토리 지역민의 주체적 정체성과 성숙한 민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TK도 오랜 개발독재 기득권 환상의 옛 꿈속에서 깨어나고, 거기에 기생하려는 강원도 감자바우들도 제발 좀 정신들 좀 차리면 좋겠다. 요즘 험한 뉴스들 보면 죄다 머저리 같은 감자바우들이 김건희 치마폭에서 놀아나는 기괴한 모습들 뿐이라 바다 건너 왜국 땅에서도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산돌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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