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8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재발간 : 네이버 블로그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재발간 : 네이버 블로그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재발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 2020. 11. 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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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일, 故 송곡 최형섭 박사 탄신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KIST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과학기술계에서 종사하시는 분들이라면 익숙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대중들에게 최형섭 박사는 여전히 낯설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분일 것입니다. 송곡(松谷) 최형섭 박사는 최초의 정부 출연연구소 KIST의 초대 소장이자 과학기술처 장관(1971~1978)을 지내신 분입니다. 탄신 100주년을 맞아 KIST에서는 1995년에 발행된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새로 재발간했는데요. 다양한 업적과 일화를 다룬 회고록 중에서 박사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 두 가지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故 송곡 최형섭 박사



바로 이분이 H.S.Choi!


1973년, 중요 연구기관의 책임자들과 양국 간 과학기술 협력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호주를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CSIRO(호주 연구기관) 산하의 금속제련연구소에서 담당 교수가 중요 합금 재료 첨가제인 특수금속추출에 관한 설명을 할 때였습니다. 설명 도중에 그가 “이 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가진 에이치.에스.최.(H.S.Choi)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옆에 앉아 있던 CSIRO 총재 프라이스 박사가 최형섭 박사를 가리키면서, “바로 이분이 에이치.에스.최”라고 해서 자리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과학기술처 장관이기 이전에 한 명의 뛰어난 과학자로서 최형섭 박사의 연구성과가 과학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분에게는 마치 평소에 좋아하는 연예인을 눈앞에서 가까이 마주한 기분이지 않았을까요? (웃음)



우리가 일하는 목적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부임 당시 과학기술계 출신은 5%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국장은 행정직 공무원인 이사관으로 임명되어야 한다는 관행에 따라 기술직 공무원들은 배제되었는데요. 과학기술용어조차 모르는 행정관리들만으로 어떻게 연구자들을 제대로 지원할 수 있겠는가라고 판단했던 최형섭 박사는 국·실장들을 전부 기술직으로 교체하고, 하위 직원들도 점차 대체해 50% 이상으로 기술직의 비율을 확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행정직 직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때 최형섭 박사는 이러한 말로 불만을 잠재우고 본인의 철학을 지켜냈습니다.


“우리가 과기처에서 일하는 목적은

과학기술행정 자체가 아니라 훌륭한 과학기술자가 많이 배출되는 바탕을 만들어주고

이 사람들이 불철주야로 연구에 전념해서 성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소?

행정 절차가 희생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들을 지원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오....!”





최형섭 박사는 회고록 내내 같은 이야기를 강조했습니다. 1.과학을 이해하고 기술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2. 과학기술을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3. 과학기술행정은 언제나 연구자들을 위한 조정과 지원이 원칙이다.

당시 최형섭 박사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주눅 들지 않고 연구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당당하게 건의하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라면 조직개편이나 법안 개정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방면으로 노력하신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간혹 KIST가 미국의 주도 아래 설립과 운영이 된 것이 아니냐는 오해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최형섭 박사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언급합니다. KIST가 설립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국군의 현대화와 경제원조를 해 주겠다는 목적으로 박 대통령을 초청했는데요. 이때 발표된 공동 성명문 안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동 성명서에 연구소 설립에 관한 합의만 이루어졌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형섭 박사가 주도적으로 캐나다, 호주, 독일, 일본 등 선진국 연구소의 장점만을 본따 우리 상황에 맞는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KIST는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구상하고 운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속에 최형섭 박사는 항상 빠짐없이 등장하구요. 이런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연구원들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지금의 한국 과학기술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는 별명도 이때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회고록 안에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인상깊은 내용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관민 일체가 되어 기초와 응용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회고록이 쓰인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2020년인 현재에도 적용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KIST가 앞으로 정부출연연구소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해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연구소의 불이 꺼지지 않고 언제나 항상 빛날 수 있도록, 최형섭 박사의 뜻이 유지되어 더 찬란한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꽃피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KIST와 모든 사람들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출처]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재발간|작성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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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좋은 책을 발견했다. 책을 볼 시력과 사명이 퇴락하여, 소장한 책 1만권을 100권으로 줄인다고 해도 소장할 것 같은 책이다.이런 책 1년에 한 두권 정도 만난다.
박정희가 주도한 위대한 경제•산업 발전 정책을 국제정치학(남북 체제 경쟁, 일본의 존재, 냉전시기 미국의 세계전략 등)과 경제•금융•재정•지방균형발전 정책의 관점에서 조명한 책은 제법 봤다.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의 영웅적 창조•도전 스토리도 제법 안다.
그런데 (경공업화라면 몰라도) 선진 산업 강국이 되려면 고부가가치 산업을 일으켜야하고, 이는 높은 과학기술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정치인의 영도와 상인의 도전은 빼어난 과학기술자들의 영웅적 뒷받침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인도, 아랍, 중동, 동유럽, 남미에도 한국만큼 빼어난 정치인과 상인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인력이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K반도체, K자동차, K방산, K원전, K조선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의 조타수가 박정희라면, 엔진은 엔지니어가 아니었나 싶다.
최형섭(1920~2004) 회고록을 통해 비로소 한강의 기적의 만든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느낌이다.
작년 8월 말, 회사에 온 이후, 원자력 관련한 책 20권 쯤 읽었다. 그러다가 한필순(1933~2015) 이라는 K원전의 영웅을 알았다. 10주기 추도식에도 참석하고, 사보에 추도 칼럼을 썼다. 회사에 흉상이라도 하나 세우고 싶다.
이 과정에서 1960 ~70년대의 원자력 정책 관련하여 풀리지 않는 의문(어떻게 캐나다, 프랑스와 협력을 했는지 등)이 있었는데, 최형섭 회고록을 읽으니 어느정도 의문이 풀렸다.
최형섭은 1962~65년에 원자력연구소장을 했지만, 단지 원자력맨이 아니다. 1960~70년대 과학기술 입국의 총 설계자이자 실행자다. 한필순이 원자력계의 거목이라면, 최형섭은 그런 거목 수십 개를 품은 큰산이고, 박정희는 큰산 수십개 거느린 산맥이다.
최형섭은 지폐 인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세종, 이순신, 퇴계, 율곡, 사임당을 대체할 인물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지폐 인물은 이승만, 박정희, 안창호, 최형섭, 정주영 등이다.
내가 대전 시장이라면 반드시 '최형섭로'를 만들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놀란 것은 최형섭과 나의 인연이다.
같이 금속공학을 전공하고(와세다 대 38학번, 나는 서울공대 82학번), 부평 대우지동차에서 일했다.(최형섭 장관은 대우차의 전신인 국산자동차 근무) 그리고 지금 내가 일하는 대덕단지도 최형섭이 만들었다. 같은 원자력맨이자, 산업기술정책맨 이기도 하다.
가장 놀란 것은 1960년대 초 통의동 광업회관에 금속연료연구소를 열어 수십명의 연구원들을 지휘하면서 일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2019~2022년, 주 2~3회씩 다닌 도장(천지선공)이 3층을 임대해 있던 건물이다. 더 놀란 것은 최장관이 같이 일했던 연구원(대부분이 금속공학전공)들이 내가 대학 다닐때 뵌 우리과 노교수들(김연식, 이동녕) 아닌가!!
금속공학과 1980~85학번 중에서 아마 내가 최대의 문제 학생이 아니었나 싶다. 1983년에 금속과 배정 받고 2개월 여만에 학내 시위 하다가 잡혀서 1년 무기정학을 당하고, 1990년 졸업까지 감옥을 2번을 갔는데, 그 땐 교수들에게 지도 책임을 물었기에 내가 속을 무지 썩혔을 것이다.
최형섭과 함께 금속공학으로서 한강의 기적의 초석을 닦은, 1920년대 생 노교수들은 이제 살아계신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혹시 무덤에 헌화하러 간다면 정말 뵐 낯이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 민주화운동을 팔아온 자들이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은 커녕, 대한민국을 압축적으로 퇴보, 퇴행시키는 주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상업출판 된 책이 아니라 비매품이다. 1995년에 최초 출간된 책이다. 대한민국이 위대한 산업•과학•기술 영웅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나?!
음수사원 굴정지인이라고, 건국과 산업강국의 물을 마시면서, 천신만고를 겪으며 우물을 판 1920•30•40년 대생들에게 생들에게 감사 또 감사한다.
생각해보니, 가지 말라는 길을 가서, 온갖 개고생 다하고, 늦게서야 철들어 돌아온 탕아가 바로 내가 아닐까 한다.
그래도 살날이 30년이상은 남은 듯 한데, 과거에 진 빚을 얼마나 갚을 수 있을지!? 경계를 몇 번이나 넘나든 개고생도 소중한 경험적 자산이니, 못할 일은 아닐 것이다.





정승민

오잉? 명저라고 하셔서 구입하려고하니 조회가 안돼요!!ㅜ 전문영역에서만 돌려보는 책인가요..?ㅜ


박찬형

화폐에 올라가야 될 두 분 : 최형섭, 김재익..


Jung Rak Kim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 김재관 박사님의 이야기도 참 좋았습니다.
김감사님과 저는 이제 재료공학부로 바뀐 같은 과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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