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낯선 삼일운동 -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정병욱 (지은이)역사비평사202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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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파일 형식 : ePub(30.56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 328쪽
책소개
저자는 엘리트가 남긴 사료 중심으로 연구, 서술되는 역사를 비판한다. 삼일운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2019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국가기록원이 공동 주최했던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 전시회뿐 아니라 전국에서 열린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모두 ‘엘리트 중심의 전시’였음을 분석해냈다.
삼일운동 관련 피고인 중 근대 학교교육을 받은 자는 19%에 불과한데도 전시에서는 76%를 차지하고 있다며, 엘리트 편향은 결국 민중의 주변화나 실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유명하지 않거나 엘리트가 아니면 자료가 없어 전시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으며, 단지 의지와 방법, 그리고 시간의 문제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 책은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삼일운동을 바라보게 한다. 저자는 뭉뚱그려진 민중의 모습이 아닌 삼일운동 참여자로서 개인의 생애에도 주목한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와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삼일운동이 일어난 마을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삶과 일상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동안 눈멀고 귀먹은 우리가 낯설지만 더듬더듬 삼일운동의 주역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목차
0 최흥백, 두만강을 건너다
1 단천 천도교인 최덕복의 어떤 결심
2 평양 시민, 경찰서에 돌질하다
3 수안의 황천왕동이 홍석정, 한낮에 비로소 쉬다
4 심영식, 겉눈만 못 보지 속눈마저 못 보는 줄 아냐
5 삼일운동 참여자 수감 사진의 비밀
6 태형, 고통의 크기
7 3월 22일 서울 남대문역 부근 만세시위, 누가 주역인가?
8 3월 말 서울의 만세시위, ‘군중’
9 수원군 장안면·우정면 만세시위,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10 제주 신좌면 만세시위, 그 후
보론 1: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와 사료 비판
보론 2: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
보론 3: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
책속에서
첫문장
1869년 9월 9일 최흥백은 자식 둘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갔다.
P. 30어쩌면 그에게 ‘독립’은 자신과 동료를 죽이거나 죽이려 했던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만든다는 결심이었을지 모른다. ‘만세’는 그것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노예처럼 사는 삶보다 낫다는 외침이 아니었을까.
P. 44“국토는 식민지, 민족은 노예”
P. 70경찰, “장님이 무슨 독립운동을 한다고 육갑이냐.” 심영식, “겉눈만 못 보지 속눈마저 못 보는 줄 아느냐.”
P. 88삼일운동은 여러 세대의 같은 소망이 담긴 운동이었다.
P. 104삼일운동은 ‘태형’으로 상징되는 1910년대 ‘무단통치’를 끝냈다. 삼일운동이 조선총독부의 지배에 끼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경찰·헌병의 범죄즉결사건 수와 그 처분 인원수의 추이다<그림 21>. 경찰과 헌병 수는 거의 변함이 없는데, 범죄즉결사건 및 그 인원수는 1919년과 1920년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축소되었다. 경찰 수가 대폭 늘어난 뒤 1920년대 중반에 가서야 삼일운동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삼일운동이라는 ‘망치’에 얻어맞아 1910년대 ‘무단통치’기에 구축된 경찰·헌병의 통치력, 일상적 민중 통제 장치가 찌그러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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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병욱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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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고려대학교 문학박사.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했다. 대표 논저로 『낯선 삼일운동』(역사비평사, 2022), 『식민지 불온열전』(역사비평사, 2013),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공저, 소명출판, 2013), 『한국근대금융연구-조선식산은행과 식민지 경제』(역사비평사, 2004), 「일제강점기 불경(不敬) 사건과 행위자들」(『역사와현실』 130, 2023), 「1931년 식민지 조선 반중국인 폭동의 학살 현장 검토」(『사총』 97, 2019),
“Migrant Labor and Massacres: A Comparison of the 1923 Massacre of Koreans and Chinese during the Great Kanto Earthquake and the 1931 Anti-Chinese Riots and Massacre of Chinese in Colonial Korea”(Cross-Currents Vol. 6, No.1, 2017) 등 다수. 접기
최근작 : <한국 근대사 연구의 쟁점>,<유언비어 1>,<낯선 삼일운동> … 총 1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에 대해서 지도부와 엘리트가 있고 그들의 지도에 따라 민중이 만세시위에 나섰다고 생각한다. 지도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이다. 만약 33인의 독립선언만 있고 방방곡곡에서 그에 호응한 만세시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큰 조직 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33인이 지도자로서 받게 되는 존경 또는 실망도 지금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자임’을 추인하여 명실상부한 ‘대표’로 만든 것은 나라 안팎의 만세시위였다. 그런데 우리는 만세시위 참여자를 잘 모른다. 참여 민중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공감하고 연대했던 민중이 주인공인 삼일운동의 역사다.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삼일운동
왜 ‘낯선 삼일운동’일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삼일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데 ‘낯선 삼일운동’이라니? 대체 무엇이 낯설다는 거지?
저자는 엘리트가 남긴 사료 중심으로 연구, 서술되는 역사를 비판한다. 삼일운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2019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국가기록원이 공동 주최했던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 전시회뿐 아니라 전국에서 열린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모두 ‘엘리트 중심의 전시’였음을 분석해냈다. 삼일운동 관련 피고인 중 근대 학교교육을 받은 자는 19%에 불과한데도 전시에서는 76%를 차지하고 있다며, 엘리트 편향은 결국 민중의 주변화나 실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유명하지 않거나 엘리트가 아니면 자료가 없어 전시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으며, 단지 의지와 방법, 그리고 시간의 문제라고 일침을 놓는다. 너무 빛나는 엘리트 위주의 사료만 보다가 눈이 멀고 귀가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책은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삼일운동을 바라보게 한다. 저자는 뭉뚱그려진 민중의 모습이 아닌 삼일운동 참여자로서 개인의 생애에도 주목한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와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삼일운동이 일어난 마을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삶과 일상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동안 눈멀고 귀먹은 우리가 낯설지만 더듬더듬 삼일운동의 주역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밤새 걷고 또 걸어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홍석정
그의 최후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삼일운동
1919년 당시 쉰네 살의 홍석정. 황해도 수안군의 전 천도교교구장인 그는 3월 2일 새벽 3시 독립선언서를 이웃한 곡산군에 전달하고 돌아와서 3월 3일 새벽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수안군에서 곡산군까지는 90리, 35.3km다. 하루 꼬박 90리를 왕복하는 게 가능할까? 그것도 잘 닦여진 평탄한 길도 아니고 산길이다. 게다가 쉰네 살의 젊지 않은 나이다.
젊은 나이도 아니지만, 서울 중앙교구에서 보낸 중요 문서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기에 전 수안교구장 홍석정이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곡산에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되니 그렇게 하라’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몇 집을 들르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도 시위에 나오라고 권유했다. 판결문에 나오는 수안면의 1~3차 만세시위 참가자 58인 중 22인이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나섰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바삐 움직이며 사람들을 만났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3일 새벽 6시 홍석정을 포함한 1차 시위대는 헌병대를 찾아가 항의하고 헌병분대를 인도하라는 구호를 외친 뒤 돌아왔다. 그 전날 헌병대의 수안교구실 압수 수색과 수안교구실 간부 연행에 따른 항의 성격이 짙다. 이후 교구실은 교구실대로, 헌병대는 헌병대대로 각기 대책을 마련한다. 수안교구실은 군내 각지에서 몰려들 교인들의 만세시위를 준비해야 할 터이고, 헌병대는 또다시 있을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헌병·경찰 외에도 일본인 상인과 사냥꾼 중에 총기 소지자를 불러 모았다.
그런데 11시 30분쯤 헌병대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수안면의 옛 서부면 거주자들과 대천면 사람들이 수안면 석교리 교구실로 오다가 헌병분대 앞을 지나가면서 만세를 외쳤는데(2차 시위), 헌병대는 해산에 불응한 1차 시위대가 다시 시위에 나섰다고 판단하여 총격을 가한 것이다.
교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교구실 간부와 교인들이 다시 나섰다. 3차 시위의 시작이다. 이 시위에서는 구경하던 열두 살 소녀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등, 일제 검경의 4월 말 집계 보고에 따르면 13명이 사망하는 잔혹한 진압이 이루어졌다. 180리(약 71km) 길을 밤새 걷고 또 걸어 곡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시위를 독려했던 홍석정도 이 3차 시위에서 총을 맞는다. 밤새 걷느라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다리 한 번 펴지 못한 채 만세시위에 참여했을 홍석정은 그제서야 쉼을 얻고 눈을 감는다.
3차 시위에서 살아남은 한병익은 곡산으로 가 수안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곡산의 만세 시위에까지 참여한다. 그는 이 일로 내란죄로 기소되어 경성의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본문 「3. 수안의 황천왕동이 홍석정, 한낮에 비로소 쉬다」는 「보론 2: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과 같이 읽으면 좋다. 「보론」에서는 조선총독부 판검사가 수안군 시위에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쓴 ‘습격’, ‘폭동’이라는 단어를 역사학자들이 사료 비판 없이 긍정적 의미의 관점으로 바꿔 ‘공세적 시위’라고 서술하는 데 반대한다. 저자는 ‘습격’이나 ‘공세적 시위’가 아니라 해서 수안군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며, 그 의미도 깎이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나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종교공동체·지역공동체에 속한 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요구하는 ‘구속자 석방’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데 있다. 즉, 그 역시 식민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이라는 것이다.
삼일운동 수감자 머그샷의 비밀
그들은 단체로 사진을 찍혔다!
역사영화는 작가의 상상이 들어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료에 근거한 팩트 체크가 기본적으로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신문 기사는 공신력이 있다고 생각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가 많다. 그러나 무턱대고 사실로 믿어버리면 안 된다. 영화, 신문, 인터넷 자료의 정보가 모두 사실은 아니다.
우선, 제일 많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유관순의 수인번호. 1965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는 치안국에서 유관순 수감사진을 발견했다며 그의 수인번호를 ‘371’이라고 했다.
“이 사진은 유관순 양이 3·1만세운동 때 왜경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찍은 것으로 푸른 수인복을 입은 유 양 가슴에는 ‘371’의 수인번호가 뚜렷하다.”
―『동아일보』 1965. 3. 26.
2019년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도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371이다. 그러나 371은 수인번호가 아닌 ‘사진 원판 보존번호’이다. 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부착할 사진을 인화하는 데 쓰인 원판의 번호라는 것이다.
저자는 수안면 만세시위로 잡힌 이들의 수감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놀라운 발견을 한다. 인물카드에는 개개의 인물 사진이 보통의 사진처럼 사각형이 아닌 양옆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거나 한쪽이 사선으로 잘려 나가 있다. 이들 사진을 잘린 면을 중심으로 맞춰 보았더니 5~6인씩 찍은 단체사진이었다(81쪽, <그림 15>와 <그림 15-1> 참조). 사진의 오른편에는(보는 사람의 시각으로는 왼쪽) 많은 사람들이 수인번호로 착각한 보존번호가 일련번호로 적혀 있다. 보존번호가 이웃한다는 것은 곧 같은 사건으로 잡힌 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별 카드에 부착된 사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이다. 20세기 초부터 사람의 초상이 찍힌 사진이 민중 통제에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비싼 비용 때문에 한 사람씩 찍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체사진 속 각각의 인물 사진 가장자리를 많이 오려버린 탓에 수안면 만세시위자 수감자 사진처럼 잘 연결되지 않지만,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도 함께 찍혔을 가능성이 높다(87쪽, <그림 18> 참조). 1864년생 이승훈, 1879년생 한용운, 1890년생 최남선이 벽돌 건물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잘라진 사진 속에서 상상해볼 수 있다. 저자는 50대, 40대, 30대가 나란히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보면서 여러 세대의 같은 소망이 담긴 삼일운동을 생각한다.
【편집자 노트】
저자는 2013년에 『식민지 불온열전』을 펴냈다. 식민지 권력이 일상 영역에 침투하고 통제를 강화하며 삶을 옥죄던 때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 죄로 검거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라는 거대 역사 대신, 당대의 작은 개인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의 일상과 저항을 복원했다. 저자 스스로 ‘불온한 글쓰기’라 이름한,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면서 행위자에 어울리는 이야기식 글쓰기, 분석과 검증, 그리고 상세한 주를 단 논문식 글쓰기를 병행했다. 『낯선 삼일운동』도 저자의 그 같은 글쓰기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서사가 한층 풍부해졌다. 『낯선 삼일운동』의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찡한 감동과 뭉클함이 밀려온다.
2016~2017년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질 때 친구 하나가 다섯 달 가까이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추운 날씨에 독감까지 걸려 기침을 해대면서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갔다. 왜 그렇게 가냐고 물었더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야 바뀔 것 같아서...”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리는 사회상이 다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정농단 사태를 두고만 볼 수 없고 사회가, 정치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길 원하는 바람은 같았을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여한 보통사람들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나라가 사라진 상황, 헌병경찰통치하 이미 폐지된 태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시행되고, 자유와 권리는 탄압되는 상황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저자라면 1919년 민중의 삼일운동을 썼듯이, 먼 훗날 시민이 주인공인 촛불시위를 역사적 서사 구조를 가지고 감동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듯하다. 접기
최근작 : <한국 근대사 연구의 쟁점>,<유언비어 1>,<낯선 삼일운동> … 총 1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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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에 대해서 지도부와 엘리트가 있고 그들의 지도에 따라 민중이 만세시위에 나섰다고 생각한다. 지도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이다. 만약 33인의 독립선언만 있고 방방곡곡에서 그에 호응한 만세시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의 큰 조직 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33인이 지도자로서 받게 되는 존경 또는 실망도 지금보다 크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자임’을 추인하여 명실상부한 ‘대표’로 만든 것은 나라 안팎의 만세시위였다. 그런데 우리는 만세시위 참여자를 잘 모른다. 참여 민중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공감하고 연대했던 민중이 주인공인 삼일운동의 역사다.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삼일운동
왜 ‘낯선 삼일운동’일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삼일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데 ‘낯선 삼일운동’이라니? 대체 무엇이 낯설다는 거지?
저자는 엘리트가 남긴 사료 중심으로 연구, 서술되는 역사를 비판한다. 삼일운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2019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국가기록원이 공동 주최했던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 전시회뿐 아니라 전국에서 열린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모두 ‘엘리트 중심의 전시’였음을 분석해냈다. 삼일운동 관련 피고인 중 근대 학교교육을 받은 자는 19%에 불과한데도 전시에서는 76%를 차지하고 있다며, 엘리트 편향은 결국 민중의 주변화나 실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유명하지 않거나 엘리트가 아니면 자료가 없어 전시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품으며, 단지 의지와 방법, 그리고 시간의 문제라고 일침을 놓는다. 너무 빛나는 엘리트 위주의 사료만 보다가 눈이 멀고 귀가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책은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삼일운동을 바라보게 한다. 저자는 뭉뚱그려진 민중의 모습이 아닌 삼일운동 참여자로서 개인의 생애에도 주목한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현장 답사와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삼일운동이 일어난 마을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삶과 일상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동안 눈멀고 귀먹은 우리가 낯설지만 더듬더듬 삼일운동의 주역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밤새 걷고 또 걸어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홍석정
그의 최후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삼일운동
1919년 당시 쉰네 살의 홍석정. 황해도 수안군의 전 천도교교구장인 그는 3월 2일 새벽 3시 독립선언서를 이웃한 곡산군에 전달하고 돌아와서 3월 3일 새벽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수안군에서 곡산군까지는 90리, 35.3km다. 하루 꼬박 90리를 왕복하는 게 가능할까? 그것도 잘 닦여진 평탄한 길도 아니고 산길이다. 게다가 쉰네 살의 젊지 않은 나이다.
젊은 나이도 아니지만, 서울 중앙교구에서 보낸 중요 문서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기에 전 수안교구장 홍석정이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곡산에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되니 그렇게 하라’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몇 집을 들르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도 시위에 나오라고 권유했다. 판결문에 나오는 수안면의 1~3차 만세시위 참가자 58인 중 22인이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나섰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바삐 움직이며 사람들을 만났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3일 새벽 6시 홍석정을 포함한 1차 시위대는 헌병대를 찾아가 항의하고 헌병분대를 인도하라는 구호를 외친 뒤 돌아왔다. 그 전날 헌병대의 수안교구실 압수 수색과 수안교구실 간부 연행에 따른 항의 성격이 짙다. 이후 교구실은 교구실대로, 헌병대는 헌병대대로 각기 대책을 마련한다. 수안교구실은 군내 각지에서 몰려들 교인들의 만세시위를 준비해야 할 터이고, 헌병대는 또다시 있을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헌병·경찰 외에도 일본인 상인과 사냥꾼 중에 총기 소지자를 불러 모았다.
그런데 11시 30분쯤 헌병대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수안면의 옛 서부면 거주자들과 대천면 사람들이 수안면 석교리 교구실로 오다가 헌병분대 앞을 지나가면서 만세를 외쳤는데(2차 시위), 헌병대는 해산에 불응한 1차 시위대가 다시 시위에 나섰다고 판단하여 총격을 가한 것이다.
교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교구실 간부와 교인들이 다시 나섰다. 3차 시위의 시작이다. 이 시위에서는 구경하던 열두 살 소녀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등, 일제 검경의 4월 말 집계 보고에 따르면 13명이 사망하는 잔혹한 진압이 이루어졌다. 180리(약 71km) 길을 밤새 걷고 또 걸어 곡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시위를 독려했던 홍석정도 이 3차 시위에서 총을 맞는다. 밤새 걷느라 눈 한 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다리 한 번 펴지 못한 채 만세시위에 참여했을 홍석정은 그제서야 쉼을 얻고 눈을 감는다.
3차 시위에서 살아남은 한병익은 곡산으로 가 수안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곡산의 만세 시위에까지 참여한다. 그는 이 일로 내란죄로 기소되어 경성의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본문 「3. 수안의 황천왕동이 홍석정, 한낮에 비로소 쉬다」는 「보론 2: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과 같이 읽으면 좋다. 「보론」에서는 조선총독부 판검사가 수안군 시위에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쓴 ‘습격’, ‘폭동’이라는 단어를 역사학자들이 사료 비판 없이 긍정적 의미의 관점으로 바꿔 ‘공세적 시위’라고 서술하는 데 반대한다. 저자는 ‘습격’이나 ‘공세적 시위’가 아니라 해서 수안군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며, 그 의미도 깎이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나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종교공동체·지역공동체에 속한 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요구하는 ‘구속자 석방’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데 있다. 즉, 그 역시 식민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이라는 것이다.
삼일운동 수감자 머그샷의 비밀
그들은 단체로 사진을 찍혔다!
역사영화는 작가의 상상이 들어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료에 근거한 팩트 체크가 기본적으로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신문 기사는 공신력이 있다고 생각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가 많다. 그러나 무턱대고 사실로 믿어버리면 안 된다. 영화, 신문, 인터넷 자료의 정보가 모두 사실은 아니다.
우선, 제일 많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유관순의 수인번호. 1965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는 치안국에서 유관순 수감사진을 발견했다며 그의 수인번호를 ‘371’이라고 했다.
“이 사진은 유관순 양이 3·1만세운동 때 왜경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찍은 것으로 푸른 수인복을 입은 유 양 가슴에는 ‘371’의 수인번호가 뚜렷하다.”
―『동아일보』 1965. 3. 26.
2019년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도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371이다. 그러나 371은 수인번호가 아닌 ‘사진 원판 보존번호’이다. 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부착할 사진을 인화하는 데 쓰인 원판의 번호라는 것이다.
저자는 수안면 만세시위로 잡힌 이들의 수감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놀라운 발견을 한다. 인물카드에는 개개의 인물 사진이 보통의 사진처럼 사각형이 아닌 양옆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거나 한쪽이 사선으로 잘려 나가 있다. 이들 사진을 잘린 면을 중심으로 맞춰 보았더니 5~6인씩 찍은 단체사진이었다(81쪽, <그림 15>와 <그림 15-1> 참조). 사진의 오른편에는(보는 사람의 시각으로는 왼쪽) 많은 사람들이 수인번호로 착각한 보존번호가 일련번호로 적혀 있다. 보존번호가 이웃한다는 것은 곧 같은 사건으로 잡힌 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별 카드에 부착된 사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이다. 20세기 초부터 사람의 초상이 찍힌 사진이 민중 통제에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비싼 비용 때문에 한 사람씩 찍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체사진 속 각각의 인물 사진 가장자리를 많이 오려버린 탓에 수안면 만세시위자 수감자 사진처럼 잘 연결되지 않지만, 이승훈, 한용운, 최남선도 함께 찍혔을 가능성이 높다(87쪽, <그림 18> 참조). 1864년생 이승훈, 1879년생 한용운, 1890년생 최남선이 벽돌 건물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잘라진 사진 속에서 상상해볼 수 있다. 저자는 50대, 40대, 30대가 나란히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보면서 여러 세대의 같은 소망이 담긴 삼일운동을 생각한다.
【편집자 노트】
저자는 2013년에 『식민지 불온열전』을 펴냈다. 식민지 권력이 일상 영역에 침투하고 통제를 강화하며 삶을 옥죄던 때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 죄로 검거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라는 거대 역사 대신, 당대의 작은 개인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의 일상과 저항을 복원했다. 저자 스스로 ‘불온한 글쓰기’라 이름한,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면서 행위자에 어울리는 이야기식 글쓰기, 분석과 검증, 그리고 상세한 주를 단 논문식 글쓰기를 병행했다. 『낯선 삼일운동』도 저자의 그 같은 글쓰기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서사가 한층 풍부해졌다. 『낯선 삼일운동』의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찡한 감동과 뭉클함이 밀려온다.
2016~2017년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질 때 친구 하나가 다섯 달 가까이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추운 날씨에 독감까지 걸려 기침을 해대면서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갔다. 왜 그렇게 가냐고 물었더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야 바뀔 것 같아서...”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리는 사회상이 다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정농단 사태를 두고만 볼 수 없고 사회가, 정치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길 원하는 바람은 같았을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여한 보통사람들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나라가 사라진 상황, 헌병경찰통치하 이미 폐지된 태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시행되고, 자유와 권리는 탄압되는 상황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저자라면 1919년 민중의 삼일운동을 썼듯이, 먼 훗날 시민이 주인공인 촛불시위를 역사적 서사 구조를 가지고 감동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듯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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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7월(통권 31호)
[서평] 운동의 ‘낯선’ 모습과 갱신되는 ‘낯섦’
(정병욱 지음, 『낯선 삼일운동: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역사비평사, 2022)
김명재(근대사분과)
1. 100주년의 ‘잔치’가 끝난 후
2019년. 한 지역의 3.1운동 100주년 학술 행사에서 임시 스태프로 일하던 때였다. 1년 내내 3.1운동의 ‘생일 잔치’를 치르듯 워낙 많은 학술대회들이 열리던 와중에, 으레 진행되는 발표회와 마찬가지로 각 세션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지고 오후 느즈막에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다. 한창 토론이 진행되던 중, 어떤 토론자가 “그런데 실상 지금 우리 연구가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에 했던 얘기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근대 한국의 운동 중에서도 영향력이 큰 3.1운동, 그 운동의 100주년으로 인해 관련 연구와 담론, 대중적 관심이 쏟아질 때였다. 이와 같은 시기 기존과는 다른 ‘낯선’ 연구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토론자의 말이 가진 울림은 생각보다 강했고, 그 장면은 3.1운동과 그 새로운 의미에 천착하는 연구자들의 끊임없는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에 인상에 깊이 남았다.
주지하다시피 2019년도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역사연구회에서 기획한 『3.1운동 100년』(휴머니스트, 2019)과 같은 각종 단행본들과 대중서, 논문, 전집, 학술대회, 행사 등 학술적·대중적 에너지들이 그야말로 ‘폭발’했던 때였다. 그러나 마치 매장에서 대박 세일이 끝난 후 손님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이, 100주년이라는 ‘잔치’의 후유증 속에서 3.1운동의 상(像)을 대중적으로 갈무리하는 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발간된 『낯선 삼일운동: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역사비평사, 2022)의 등장은 이런 의미에서 반가웠다. 정병욱의 저서 『낯선 삼일운동』은 한국역사연구회 웹진 ‘역사랑(歷史廊)’에 2020년 4월부터 2021년 4월까지 장장 1년간 기고한 글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2. 『낯선 삼일운동』의 특징과 미덕
저자는 제목에서 ‘낯선’이라는 단어와 최병한이 말한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165쪽)는 부제를 통해 이미 책에서 지향하는 바를 표방하고 있다. 인기 있는 역사학계 대중서인 『식민지 불온열전』(역사비평사, 2013)에서 이미 보통 사람들을 역사적 서사의 주인공으로 삼은 데에 이어, 다시 한번 밀도 있고 디테일을 갖춘 서술을 무기로, 저자는 ‘민중’을 중심으로 여러 사건과 인물들에게서 3.1운동의 낯설고 다양한 상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저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최흥백, 최덕복, 평양 시민들, 홍석정, 심영식, 3.1운동 참여자 수감 사진과 번호, 태형, 서울 남대문역 부근 만세 시위, 3월 말 서울 만세 시위, 수원군 장안면·우정면 만세 시위, 제주 신좌면 만세 시위 등 11개의 3.1운동 사례와 참여 주체를 다루었다. 후반부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삼일 DB’를 활용한 사료 비판, 황해도 수안 만세 시위의 재구성, 3.1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를 주제로 한 연구 차원의 보론 3개로 구성되었다.
저자는 책의 주안점으로 3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 엘리트주의에 가려진 민중의 모습으로 사건 재해석하기, 둘째, 집단으로서 민중보다는 참여자 각각이 행위자가 되도록 서술하기, 셋째, 관련 인물의 생애 전반을 추적하여 생애에서 3.1운동의 의미를 되묻기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 규정되면서도 그 조건을 전유하면서’ 살아갔던 민중”(9쪽)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 그러한 서술은 ‘모두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3.1운동 속 민중의 상을 그리려던 저자의 초기 기획에도 드러난다. 물론 그러한 기획은 현실상의 ‘어려움’ 속에서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저서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먼저 저서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적 서술과 차별화하여 3.1운동의 다양한 하위 주체를 발굴한다. “삼일운동은 민중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다면 ‘33인 사건’에 그쳤을 것”(6쪽)이라는 역설적인 첫 구절처럼, 기존 역사 서술에서 홀대받았던 민중의 시각에서 3.1운동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여기에 각 사례 속 그 ‘주역’들의 생애사를 훑고 여러 시기와 사건들 간의 연관을 살펴봄으로써 3.1운동이라는 단발적인 사건만이 아닌 운동의 의미를 보다 넓고 깊게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점은 경원 최흥백의 연해주 이주와 그의 아들 최재형 및 그의 가족사, 1900년대 천도교인들의 의병전쟁 경험과 단천 천도교인 최덕복의 ‘독립’, 제주 신좌면의 만세 시위와 제주 4.3사건 등의 사례 등에서 나타난다.
또한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없지만, 일종의 ‘집합적 주체’로서 서울의 기층민중과 군중, 평양 시민들과 같이 당시에 회집하였던 ‘무리’들의 운동과 시각장애인 독립운동가 심영식(심명철)에도 주목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저자의 끈질긴 질문과 파헤침이 빛을 발한다. 이미 『식민지 불온열전』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던 인물과 사건에 대한 거듭되는 의문, 재해석, 파고들기, 다각도에 걸친 추적과 교차 검증을 통해 대중운동으로서 3.1운동의 현장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본 저서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각종 문헌자료와 사료는 물론, 발로 다닌 답사의 흔적들과 사진, 영화, 다큐멘터리, 심지어 다양한 연구자 네트워크의 활용도 눈에 띈다. 특히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되는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들로 장식된 표지 속 인물들의 사진과 그 사진에서 보이는 3.1운동 참여자들의 부은 얼굴, 표정과 눈은 운동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새로운 정보와 연구사적 차별점을 제공하는 점 또한 눈에 띈다. 영화 ‘항거(2019)’에서 잘못 재현되었고 연구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유관순을 비롯한 수형자 번호의 오류를 짚어준 점도 중요하다. 보론에서는 ‘삼일 DB’를 활용하여 판결문 자료, 개설서들을 교차하면서 연구자들의 재확인이 필요한 부분을 짚는다든지, 기존에 ‘공세적 시위’의 대명사로 알려진 황해도 수안 시위에 대한 재구성과 재인식, 3.1운동과 제2차 조선교육령 실시 이후 학력주의 제도화에 대한 재해석 등은 대중뿐만 아니라 학술 연구자의 지적 계몽에도 기여한다,
결국, 대중적이고 현장성 가득한 3.1운동 역사 서술과 학술적인 보론을 통한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서술 전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1차 자료과 사료 교차를 통한 인내심과 밀도 있는 접근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그 기획이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낯선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갱신될 것인가.
2019년 100주년이 된 3.1운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역시나 ‘다양성’이었다. 그리고 이 화두는 각종 대중서나 대중매체, 심지어 학술 연구 등에서 ‘다양한’ 주체의 발굴로 귀결되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소수자와 하위 주체를 얼마나 포괄했는지, 민중(혹은 보통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등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소위 ‘민중’이라고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3.1운동 참여와 그 기여를 발굴하고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본 저서에서도 ‘다양한 민중’의 존재,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운동 참여 동기의 ‘자발성’, 그리고 각 사건의 알려지지 않은 ‘주역’을 찾는 작업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렇듯 민중의 3.1운동 참여에 있어서 ‘자발성’과 ‘의도’, 운동의 ‘주역’에 대한 고민과 강조는, 책에서 지향하는 ‘민중의 시각에 나타난 3.1운동’이라는 서술 의도와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권력 관계 속에서 주로 ‘약자’에 속”(6쪽)하는 민중과 그 참여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3.1운동 ‘선동론’이나 ‘협박 및 동원론’과의 구분 짓기와 무관치 않다. 예를 들어 8장과 9장에서 3.1운동에 참여한 ‘기층민중’과 ‘군중’의 재판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장면을 민중의 ‘자발적 몰주체성’, ‘능동적 수동성’, ‘의도적 무지’로 평가하거나(146~147쪽), 3.1운동 참여 과정에서 드러나는 ‘협박’과 ‘동원’을 매개로 하는 공동체적 규제에 대해 참가자의 수동성보다는 오히려 당시 만세 시위가 ‘대세’였음을 의미하는 지표라고 주장한다(163~165쪽). 이 과정에서 민중 층의 ‘수동적’ 혹은 ‘비자발적’ 운동 참여에 대한 방어적 논리가 엿보인다.
이렇듯 참여 민중의 자발성과 의도, 주역에 주로 주목하다 보니 저서에서는 ‘보통’의 주체들에 주목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몇몇 사례와 주체들에서 강조되는 ‘영웅적’ 행위와 ‘독립의지’는 더 이상 이들을 ‘보통’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범접할 수 없는 주체들의 ‘의거(義擧)’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에 대한 ‘반성’과 그들에 대한 ‘우러름’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와 같은 서술방식이 현재의 ‘운동’ 인식 및 기존의 운동사·사회사 서술과 어떤 다른 상을 부여할 수 있을까. ‘익숙’하고 ‘낯설지 않은’ 위인이나 영웅들의 전기(傳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서술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과 영감을 주지만, 반대로 ‘나라면 저렇게까지는 못해’라는 식으로 대중과 운동의 거리를 벌리는 측면은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운동 참여 계층의 ‘자발성’과 그 ‘의도’의 성격, ‘주역’의 탐구 또한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3.1운동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아닐 수 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의 식민지적 삶과 3.1운동 참여, 그 이후의 수감 생활과 운동 기념, 그리고 또 다른 운동의 과정 등에서 3.1운동의 참여 경험과 의도는 재/구성된다. 저서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듯이 시각장애인 운동가 심영식, 서울 남대문역 시위 참여자들, 3월 말 서울의 군중,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의 머슴들, 제주 신좌면 만세 시위 이후 여성운동에 참여한 김시숙 등의 사례와 같이 일제에 대한 적대감이나 독립의식뿐만 아니라 인물과 사건 각각의 상황과 배경, 의도와 경험에 따라 3.1운동이 보여주는 상은 이질적이다. 그런 과정과 운동의 엇나감, 교차, 그리고 이질성도 3.1운동의 광범위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 또한 자발성과 의도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오히려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과 이해관계 속에서 누구든, 언제나, 어디서나 참여할 수 있고,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의도’가 없더라도 우연적이고 즉흥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인정할 때, ‘나였어도 저렇게 했을 것’이라는 공감 속에서 그 운동의 무게와 대중과의 거리감은 줄어들지 않을까.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근에 국가의 법체계와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맞선 운동들에 대해 운동자의 요구와 그 상황에 공감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시위 방식이나 ‘행태’가 ‘문명적’인지 ‘비문명적’인지, ‘합법’인지 ‘위법’인지, ‘폭력’인지 ‘비폭력’인지, ‘선량한 시민’들에 피해를 주는 방식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시기가 되어버렸다. 운동을 이른바 ‘과격행동’, ‘생떼’, 혹은 ‘나와 무관한 일’ 정도로 생각하는 혐오적 댓글과 대중의 무관심은 일정 부분 대중과 운동의 거리가 멀어진 오늘날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운동과 대중의 간극이 벌어진 시기, 3.1운동을 연구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학술계에서의 ‘기념’은 그 연구 경향을 흡수하여 정형화시키기도, 기억을 재정리하기도, 그리고 새로운 여진(餘震)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100주년은 그러한 양상이 더욱 증폭되는 시기일 테다. 한국 근대 운동의 각종 100주년의 도래를 눈앞에 둔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운동들의 ‘낯섦’을 갱신할 때, 그것은 어떤 ‘갱신’이어야 할까. 그리고 그 갱신의 에너지를 어떻게 연구서, 나아가 대중서에 담아낼 것인가 등의 과제를 연구자에게 환기시키는 것 또한 본 저서가 가진 미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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