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1

Park Yuha - 개인적 ’독립‘ 후 살아온 10년을 회고하고 자축하며 쓴 글 2014

Park Yuha - 대문에 걸어 놓은 글에 추가한 참고용 글. 페친으로서의 시간이 아직 짧은 친구 분들께 자기소개 겸... | Facebook


Park Yuha 250301shared a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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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에 걸어 놓은 글에 추가한 참고용 글. 페친으로서의 시간이 아직 짧은 친구 분들께 자기소개 겸 공유도 해 둔다.
개인적 ’독립‘ 후 살아온 10년을 회고하고 자축하며 쓴 글이었다. 그런데 석달 반후에 고발당해, 다시 10년을 힘들게 보냈다.
지난 10년 회고는 아직 진행 중이다. “다음 십년”은 어떤 시간이 될까.
**다시 읽으며 느낀 점.
“가구 딸린 작은 집을 월세로 빌려 몇 달” 사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던 내가 그때부터 있었구나. ㅋ
**다시 올리면서, 읽기 편하도록 행갈이, 기호수정등을 했지만 내용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11 years ago
독립기념일

2004년 3월1일, 집을 나왔다. 청담동에 살았는데, 삼성동에 가구딸린 작은 집을 월세로 얻어 몇달 살았다.
우연히 그 해에 지인들과 의기투합해 한일양국의 민족주의를 넘어 대화가능한 공간을 지향하는 <한일,연대21>이라는 모임을 조직해 가을에 심포지엄을 했다.
 
첫번째 테마는 교과서문제.
 
그리고 다음해 겨울엔 와다하루키선생,우에노치즈코선생,고모리요이치선생을 초청해 위안부문제를 논의했었다. 어제 신문에 난 '아시아여성기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재평가하려는 모임이었기에 정대협의 윤미향대표를 토론자로 불렀지만 대화는 전혀 되지 않았다.
 
다음해에 야스쿠니문제,그 다음해엔 '요코이야기'파문을 테마로 '가해와 피해의 기억'에 대해 생각하는 모임을 가졌고 2008년에 정리해 책을 냈으니 (『한일역사인식논쟁의 메타히스토리』일본판은 『東アジア歴史認識論争のメターヒストリ』)
지난 십년간의 전반은 분명 한일갈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집을 나온지 꼭 1년되던 2005년 봄, 갑자기 찾아온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화해를 위해서-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를 썼다. “인당수에 몸 던지는 ” 심경으로 냈지만 의외로 언론이 호의적이어서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지만 팔리지는 않았다.
다음해 말에 낸 일본어판 역시 반은 일본비판인데도 '오사라기지로 논단상'이라는、아사히신문사에서 주는 상을 수상했다.
2007년 여름, <한일연대21>의 네번째 심포지엄을 마치고, 또 나의 작업의 원점이기도 했던 논문집 『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ジェンダー』 다음해에 낸 한국어판 『내셔널아이덴티티와 젠더-소세키/문학/근대』 는 소세키론 이외엔 생략했는데、일본비판이어서였는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를 내고 도망치듯 떠났던 미국 코넬대학에서 나는 그 소식을 들었다.
 
시차관계로 새벽에 아사히신문사 기자의 전화를 받았는데, 기쁘다기 보단 잠시 당혹스러운 심경이었던 걸 기억한다. 한일 문제를 논한 책에 '일본이 주는 상'을 받을 경우 따라올 억측을 예상하면서도 결국 받기로 한 건、이른바 '전문가'가 아닌 내가 이런 문제에 관해 발언 가능한 '라이센스'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작년에 낸 『제국의 위안부』에서도 그랬지만 이른바 각 문제의 '전문가'들 만으로는 한일문제를 풀 수가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만큼 복잡하고 다방면에 걸친 사고가 필요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역사(내셔널히스토리)와 문학과 사상과 법과 외교와 NGO에 대한 공부가、한일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선 필요했다.
그런데 2008년 1월의 수상식 때 사진을 보면 극도로 피곤에 쩔어있는 우울한 얼굴이다. 미국에서의 반년동안의 생활도 떠나기 전까지의 몇년간의 긴장을 풀어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혹은, 2007년 봄에 일본에서 했던 위안부문제발언을 악의적으로 부분만 보도했던 TV뉴스때문에 당했던 인터넷공격에 의한 상처가 아직 살아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009년, 소속대학의 교수협의회장을 맡게 되어 그 해 1년은 거의 연구를 못했던 것 같다. 학교재단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내가 맡아야 할 순서가 아니었음에도 고민끝에 맡았던 건, ‘지는 싸움'이라는 것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던 탓인지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때문이기도 했지만, 학내의 합리적인 운영과 정의를 위한 싸움을 그저 '좌파의 책동'으로 몰고 가는 학내담론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투쟁은 실패했고 그 여파는 아직 지속중이다.

2010년1월, 다시 한번 <한일,연대21> 의 워크샵을 이번에는 비공개로 열었는데, 내가 직접 초청해 양국의 전직대사나 장/차관도 참여했던 그 회의는, 침묵이나 갈등이 부쩍 많아졌던 다른 한일관련 회의들과 달리 '대화'가 가능했던 모임이었고, 모두가 웃으며 헤어졌다.
그 외에 2010년에 뭘 했는지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저런 학회발표와 강연을 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일본문학,혹은 한일갈등에 대해서.
 
그리고 2011년 가을, 연구년은 반년이었지만 반년 더 휴직할 결심으로 이번에는 일본으로 떠났는데 한달 후였던 한글날, 길에서 넘어져 꼬박 한 달을 외출하지 못하는 불상사도 겪었다. 다리 부상은 경미했지만 얼굴을 다쳤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방문하기로 했던 오에겐자부로 선생님 댁에는 다음해 봄에야 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해 겨울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고, 이때부터 한일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 2012년 여름의 이명박대통령의 독도방문. 어떤 후유증이 올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영웅적'인 행동을 감행한 대통령을 둔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경박성을 먼저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8월이었다.

8월말에 귀국하여 촌음을 아껴가며 책을 썼다. 2013년6월말, 책 작업을 마치고 긴 여행을 떠나 휴식을 취했지만 아직 나의 싸움은 진행중이다. 다음 십년 역시 비슷한 날들이 이어질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동안도 몇 번의 연애를 했고, 여러 사람들과 영혼의 교류를 했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수많은 실수와 좌절과 상처 속에서도 2004년 3월1일 이후의 십년을 버텨 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들의 사랑과 우정 덕분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들에게 특별히 감사를 전하고 싶은 날이다. 최근 몇달간 페북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모든 분들께도. 물론 언제고 위안을 주었던 풍경과 음악과 책들에게도.
그리고 마흔일곱을 눈앞에 둔 어느날의 나자신에게도 수고했단 말을 건네야겠다. 돈도 체력도 없이 무작정 반란을 일으켰던 아직 젊은 날의 나에게.
수상식때 사진을 빼면 이후의 사진들은 대체로 표정이 밝으니 삼일절뿐 아니라 나의 독립기념일 역시 축하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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