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8

정도전 집안 이야기 - 아들 정진

이문영 - 태조 4년(1395). 한 남자의 시체가 어떤 집 앞에서 발견되었다. 시체는 의흥친군 십위 소속의 정8품... | Facebook

태조 4년(1395).
한 남자의 시체가 어떤 집 앞에서 발견되었다. 시체는 의흥친군 십위 소속의 정8품 무관 최안종이었고, 그가 발견된 곳은 그의 첩 집이었다. (정8품이면 말단인데, 첩이 따로 집을 가지고 있었다니...)
당연히 첩이 바로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 시절 수사라는 게 대개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소인은 죄가 없나이다"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인 경우가 많았으니, 첩은 두들겨 맞은 끝에 거짓 자백을 했다.
범인의 자백은 예나 지금이나 막중한 증거이므로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나 했는데, 이때 형조전서(=형조판서를 조선 초에는 이렇게 불렀다)가 사건보고서를 보고 의문을 가졌다.
"사람을 죽인 자는 그 흔적을 지우고자 노력하는 법이다. 남편을 죽이고 문밖에 두었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다시 수사하라."
그야말로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재수사가 시작되었다. 첩을 살인범으로 몰아 득을 볼 사람은 누구인가?
최안종의 아내 중보가 잡혀왔다. 중보는 남편의 고종사촌 동생인 김중명과 간통을 하고 있었고, 걸리적거리는 남편을 치우기로 결정하고는 남편을 목졸라 죽였다. 상식적으로 무관 남편을 여자가 목을 졸라 죽이긴 쉽지 않을 듯한데, 아마도 실제 범행은 김중명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김중명은 사건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재빨리 행방을 감춘 상태였다.
결국 중보가 살인죄의 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해졌다. 목을 매서 죽는 교살형이었다.
억울하게 죽을 뻔한 첩을 구한 형조판서는 정진, 그는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죽은 정도전의 아들이었다.
스물둘에 고려의 관직에 나갔고 조선이 개국했을 때는 일등공신인 정도전의 아들로 위세가 대단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지방관을 자청하여 연안부사에 임명되었다. 연안 사람들은 그가 공신의 집안인지라 교만하고 행정도 잘 볼 줄 모를 것이라 여겼으나, 그는 대단히 유능한데다 겸손하기까지 했다.
그의 명성이 올라가자 형조전서(형조판서)의 자리까지 고속승진한 것이었다. 이때 나이가 서른다섯.
그러나 3년 후,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정진은 중추원부사였는데, 당연히 잡혀서 끌려왔다. 그는 전라도의 수군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이 당시 수군은 완전 천직으로 죄수들이 형벌로 임명되는 곳이었다. 이때 대신들은 참수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으나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함께 거론된 사람은 참수형을 당했다.)
정진이 몇 년을 수군으로 뺑이를 쳤는지는 잘 알 수가 없는데, 9년 후 그는 나주목사로 복귀한다. 태종이 나주목사 자리에 누가 좋겠느냐고 하는데 정진이 추천된 것이다. 아마도 그 전 해쯤 풀려났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복권된 것은 아니다. 태종은 그의 직첩(관리 임명장)을 돌려주지 않다가 10년 후에 돌려준다. 세종 때가 되면 아버지의 그림자를 완전히 없애버린 듯,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한성부사, 개성유후, 형조판서를 역임한다. 성절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온다.
67세에 졸하니, 희절(僖節)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심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의 희, 청렴하고 스스로 억제한다는 절이라는 시호이니 그가 정도전의 일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평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종은 3일간 조회를 보지 않고 그를 애도하고, 제문도 내렸다. 제문에는 정도전 이야기 같은 건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연좌제가 지극히 당연할 것 같은 조선 시대였지만 유능한 인재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은, 조선 전기의 번성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 같다.
김수종
정도전 집안 이야기

조선시대에 죄를 지으면, 삼족을 멸한다고?
김수종 작가 l 기사입력 2023-05-18


봉화정씨 집안의 자손인 희절공 정진(鄭津)은 1361년(공민왕 16)에 출생하여 1427년(세종 9)까지 살다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정진은 조선 첫 영의정을 지낸 문헌공(文憲公)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과 경숙택주 경주최씨(慶淑宅主 慶州崔氏)사이에서 장남으로 1361년 고려의 왕도인 개성에서 태어났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니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의 하늘이다’라며 백성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정도전의 사상을 이어받아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다. 그는 1382년(우왕 8) 낭장이 되고, 사재령, 전농령을 지냈다.

1391년(공양왕 3) 정몽주 등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려는 보수파 세력의 탄핵을 받아 아버지인 정도전과 함께 삭직됐다. 1392년(태조 1)에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나와 개국공신의 아들로 연안부사로 등용됐다.


연안부사로 임지에 가니 사람들이 “개국공신의 아들이라 교만하고 자부심이 많아 일을 친히 보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정진은 겸손하면서 성실하고 부지런해 고을사람들이 크게 탄복했다. 1393년에는 사재감사가 되고 공조전서가 되었다가 형조전서가 됐다.

이때 최안종이라는 사람이 아내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내는 최안종을 죽이고 그 시신을 최안종의 첩의 집 문 밖에 두었다. 살인 용의자가 된 최안종의 첩은 매질을 당했고 이를 견디다 못해 없는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고 말았다.

결국 사건이 그대로 종결될 뻔 했는데 정진은 “살인자가 증거 인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어떤 살인자가 남편을 죽이고 자기 집 앞에 두겠냐”며 최안종의 아내를 다시 수사했고, 그녀는 결국 죄를 자백했다.

최안종의 아내가 ‘말이 궁하여 자복했다’고 표현한 것을 보아 아내도 어떻게든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아내로부터 자복을 받아내어 공정한 옥사를 처결한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소개되어있다. 이후 경흥부윤, 원주목사를 지내고 1398년에 중추원부사에 임명됐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도승지로 태조를 모시고 지방에 갔다가 화를 면했지만, 정도전이 이방원과는 반대파에 해당되어 체포, 감옥에 갇혔다. 성실하고 똑똑하다는 평을 받아온 그는 얼마 후 전라수군에 보내지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한편 당시 삼봉의 둘째 동생 정도복은 한성판윤으로 있다가 형이 죽은 후 문하찬성사에 제수됐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영주(영천)로 낙향했다가 태종 3년(1403)에 성주 유학교수에 부임하여 7년여 동안 교육에 힘썼다.

1409년 8월에는 인녕부사윤으로 부임했다. 이후 부친의 산소가 있는 고향 영주(영천)에서 말년을 보냈다. 또 삼봉의 매제인 황유정도 정도전 사후에 연좌되지 않고 벼슬을 계속하다가 말년에 고향 영주(영천)로 낙향하여 처가의 집을 물려받아 ‘삼판서고택’의 주인이 된다.

역적의 아들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전라수군으로 근무하던 정진은 1407년(태종 7) 좌이정 성석린의 천거로 나주목사로 기용됐다. 당시 태종은 나주목사로 임명할 때 개국공신 권근의 6촌 권숙과 정진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정진이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낫다’는 의견을 듣자 망설이지 않고 결정했다. 정진이 ‘정도전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반면 태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 데 공을 세운 처남들은 모두 제거됐다. 사돈이었던 영의정 심온 대감도 마찬가지였다.

심온은 세자의 장인이 된 지 석 달 만에 반역을 주도한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했다. 언뜻 잔혹해 보이는 태종의 인사 통치철학은 지공무사(至公無私,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음)을 추구한 결과물이다. 태종은 언제나 공(公)에 입각해 말하고 행동했으며,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거스를 경우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정진은 이후에도 1411년 ‘목은 이색의 신도비문을 중국에서 받아온 것이 나라의 체면과 관련 된다’하여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 하륜의 간계에 의해 불똥이 죽은 삼봉에게 향해 관작이 다시 회수되고 자손이 폐서인되자 또 다시 관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어렵게 다시 복권되어 1416년 인녕부윤이 되어 크게 치적을 올렸다. 1419년(세종 1) 충청도관찰사가 됐다. 5월에 왜구의 배 50여 척이 비인현을 침입하자 이를 보고했다. 각 고을의 청년들과 병사들이 대마도를 정벌하러 가자 그들의 공납을 탕감할 것을 상소했다.

또 선비를 가르치기 위해 각 고을에 훈도관을 두도록 상소해 500호 이상 되는 각 고을에 훈도관에 두게 됐다. 이후 1420년 한성부사가 됐다. 그 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관찰사가 됐다.

1423년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424년 개성유후사유후가 됐으며, 1425년 형조판서가 됐다. 형조를 맡으면서 세종대왕의 부인인 소헌왕후의 친정어머니 안씨가 ‘천민 명부(賤案)’에 올라있음을 알리고 풀어주도록 진언했다. 이에 감격한 세종대왕이 노루 한 마리를 하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426년에는 세종의 뜻을 받아 아록위전, 국둔전 등을 혁파하는 것을 논의하는 일에 참여했다. 1427년에 사망했다. 그는 일을 잘하고 성실한 인품이 인정되어 태종 조에 다시 등용됐다가 세종 조에 판서를 마지막으로 영예로운 관직생활을 누렸다. 그가 죽자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했으며, 부의(賻儀)와 함께 손수 치제문(致祭文)을 지었다.

우찬성으로 추증하며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하고 정하는 일을 관장하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올리는 평상시 행적을 적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친히 희절(僖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심하여 두려워함을 희(僖)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억제함을 절(節)이라 한다”는 시호의 의미로 보아 그의 평생은 일관된 성실함과 청렴한 정신이 돋보인다.

정진의 가족들이 터를 잡아 세거해 온 곳이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속칭 산대마을이다. 평택시에 있는 정도전의 사당 문헌사(文憲祠)로 오르는 계단 좌측에 사당이 하나 더 있는데 희절사(僖節祠)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바로 정도전의 장남 희절공 정진을 모신 사당이다.

정진은 평생을 성실, 겸양, 덕으로 일관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기에 사당에 모셔진 것이다. 그는 고향인 영주시 모현사(慕賢祠)에 배향됐으며, 자신이 터를 잡은 평택시 희절사에 주향됐다. 물론 그의 자손들 역시 대를 이어 고관대작을 지냈다.

정진의 장남은 용인현령을 지낸 정래이고, 둘째는 직산현감을 역임한 정속이다. 차남 정속의 아들이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鄭文炯)은 세종 조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말년에는 우의정을 지냈다. 삼봉 정도전의 복권은 공식적으로는 400여 년 이상이 걸렸으나, 역사적으로는 아들 정진의 복권과 함께 태종 조에 회복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필자/김수종

김수종 작가는 1968년생으로 대학에서 종가학문인 철학을 공부한 덕에 같은 줄기인 문학과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주로 역사, 문화와 관련된 유물 유적과 지역을 둘러보면서 연구도 하고 글도 쓰고 있다. 서울 성북구에서 사진 찍는 아내와 대학생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열정과 집념으로 승부한다> <영주를 걷다> <역사 그리고 문화, 그 삶의 흔적을 거닐다> <지방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등을 집필하여 책으로 출간했다. 현재 민간 문화재청+환경부 역할을 하고 있는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NT)에서 문화유산위원회 위원, 망우리 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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