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9

원폭 80주년, 한일수교 60주년에 되돌아본 한국인 원폭 피해자 관련 기사 : 네이버 블로그

원폭 80주년, 한일수교 60주년에 되돌아본 한국인 원폭 피해자 관련 기사 : 네이버 블로그


원폭 80주년, 한일수교 60주년에 되돌아본 한국인 원폭 피해자 관련 기사

Racecarve

2025. 6. 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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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일본 원폭 피해자 단체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였습니다. 당시 니혼히단쿄는 시상식 대표단 30여 명에 한국인 원폭 피해자인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과 원폭 피해 2세인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 후손회 회장도 포함했었는데요.



[노벨상 시상] 평화상 니혼히단쿄 "전쟁 시작한 日이 원폭 보상해야"



“시상식 연설문에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 언급…"해외 단체와 연대해 호소"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일본 원폭 피해자 단체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10일(현지시간) 시상식 수상 연설에서 일본 정부의 원폭 피해 보상 책임, 한국인의 피해를 언급했다.



니혼히단쿄를 대표해 수상 연설을 한 다나카 데루미 대표위원은 이날 영어와 일본어로 미리 배포된 연설문에서 니혼히단쿄를 출범했을 때 두 가지 기본 요구사항이 있었다면서 "첫 번째는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한 국가가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에 대해 희생자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에 대해 "'전쟁의 희생은 온 국가가 평등하게 감내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니혼히단쿄는 이번 시상식 대표단 30여 명 중 한국인 원폭 피해자인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과 원폭 피해 2세인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 후손회 회장도 포함했다.



다나카 대표위원은 13세이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나가사키 자택에 있었고 가족 5명을 잃었다.



그는 "당시 내가 본 것은 도저히 인간의 죽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며 "전시라고 해도 이런 살인은 절대로 허용돼선 안된다고 강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또 "상상해 보라. 즉각 발사될 준비가 된 핵탄두가 4천개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발생했던 것보다 수백, 수천 배 더 큰 피해가 당장도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핵무기 제거를 위해 뭘 해야 할지 함께 논의하고 각국 정부에 행동을 요구하기를 전 세계 모두에게 청한다"며 "핵무기금지조약(TPNW)을 더 보편화하고 핵무기 폐지를 위한 국제 협약을 결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https://m.yna.co.kr/view/AKR20241210163800085
[노벨상 시상] 평화상 니혼히단쿄 "전쟁 시작한 日이 원폭 보상해야" | 연합뉴스

(오슬로=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일본 원폭 피해자 단체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10일(현지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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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위, '원폭 투하 80년' 맞아 일본서 핵군축 이벤트 연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원자력폭탄 투하 80주년인 올해 일본에서 핵군축 관련 행사를 개최한다고 NHK방송이 13일 보도했다. 노벨위원장이 원폭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NHK에 따르면 노벨위는 오는 7월 말쯤 도쿄에서 관련 행사를 열 계획이다. 지난해 니혼히단쿄(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 이하 히단쿄)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원폭 투하 80주년을 기념해서다.”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5051314180004807
노벨위, '원폭 투하 80년' 맞아 일본서 핵군축 이벤트 연다 | 한국일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원자력폭탄 투하 80주년인 올해 일본에서 핵군축 관련 행사를 개최한다고 NHK방송이 13일 보도했다. 노벨위원장이 원폭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NHK에 따르면 노벨위는 오는 7월 말쯤 도쿄에서 관련 행사를 열 계획이다. 지난해 니혼히단쿄(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 이하 히단쿄)의 노벨평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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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원폭 8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인 원폭 피해자 관련 기사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참고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관련 최초 조사가 시행된 것은 1964년 8월로 당시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현 한국원자력의학원)에서 일본 현지를 방문하여 한국인 피해자를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관련한 자세한 스토리는 다음 링크에~~~



“1964년 8월, 한국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가 피폭자의 신고를 받아 히로시마 피폭자 164명, 나가사키 피폭자 39명의 생존이 밝혀짐.”



https://m.blog.naver.com/racecarve/223214738334
한국의 히로시마, 이치바 준코

1964년 8월, 한국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가 피폭자의 신고를 받아 히로시마 피폭자 164명, 나가사키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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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원’을 아시나요? 11.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 조사



https://m.blog.naver.com/kirams1963/223505434094
‘원자력원’을 아시나요? 11.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 조사

한국원자력의학원 홍보실장 공창배 11.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 조사 원자력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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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록이 남아야 합니다!!!



[히로시마원폭 80년] 86세 日피폭자 "세번째 핵무기 사용 절대 안돼" | 연합뉴스



“피폭 증언자 87.6세 '고령화'…전승자 "누군가는 피폭 경험 이야기해야"



가지야 씨는 2020년 피폭 증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현재는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며 연간 35회 정도 대중에게 원폭의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한때는 강연 횟수가 연 70∼80회였으나, 85세 이후에는 체력적으로 힘들어 줄였다고 했다.



일본 후생노동성 집계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으로 피폭자 수는 9만9천130명이다. 1980년에는 37만2천264명이었으나, 점차 줄어 처음으로 10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생존 피폭자 절반가량은 히로시마현에 거주한다. 피폭자 평균 연령은 전년보다 0.55세 높아진 86.13세였다. 피폭자 중에서도 가지야 씨처럼 공개 증언 활동을 하는 '증언자'는 극히 적다.



피폭 증언자 수 감소와 고령화에 대응해 히로시마시는 피폭자 경험을 학습해 대신 전달하는 '전승자'를 육성하고 있다. 전승자는 피폭자와 일대일로 묶여 경험담을 듣고 원고를 작성한 뒤 강연 실습을 한다. 연수 기간은 2년이다.



올해 4월 기준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가 위촉한 증언자는 29명, 전승자는 239명이다. 평균 연령은 증언자가 87.6세, 전승자가 64.7세다.



히로시마시 관계자는 "전승자 연령 역시 높은 편"이라면서도 "최근 전승자 모집에 응한 사람 중에는 10대와 20대가 총 10명을 넘었다"고 말했다.



가지야 씨가 피폭 경험을 전수한 전승자 중에는 37세인 오키모토 하루키 씨도 있다. 히로시마현 출신인 그는 2023년 10월부터 전승자로 활동 중이다.



지난 8일 강연에 동석한 오키모토 씨는 "독일로 역사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만난 여성 가이드가 몇 시간 동안 안내하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며 "누군가는 히로시마의 피폭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https://www.yna.co.kr/view/AKR20250712037700073
[히로시마원폭 80년] 86세 日피폭자 "세번째 핵무기 사용 절대 안돼" | 연합뉴스

(히로시마=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투하 지점에서 약 1.8㎞ 거리에 있었어요. 저는 살았지만, 같은 장소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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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1.4. 중앙일보



2차 대전 때 일본에서 원자폭탄투하로 피해를 입었던 김장환(49)씨 등 8명이 4일 상오10시30분 「반도호텔」에 있는 일본대사관에서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다.



이에 대해 일본대사관 측에서는 이날 상오까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원폭피해자는 등록된 사람만도 6백 여명이나 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39981



1968.7.12 대한뉴스, 핵확산 금지조항에 가입한 대한민국



핵폭탄 실험으로 검은 버섯구름.

-미국및 강대국들은 핵무기 확산금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원폭 환자들의 사진 및 핵폭탄 실험으로 인한 검은 버섯구름.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 각지에서 핵확산 금지조항 서명하는 세계각국 대표들.

-우리나라및 세계 100여개 국가들 서명.



출처 : 대한뉴스 제 683호

https://youtu.be/TOg-L-dvDtU?si=-hCIxPAutxMhUXIX



한국원자력의학원과 IAEA…



https://m.blog.naver.com/racecarve/222996170935
한국원자력의학원과 IAEA…

2016년 한국원자력의학원의 국가방사선비상센터는 IAEA Capacity Building Center 및 WHO Co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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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장관급 정부기관 ‘원자력원’을 아시나요?



https://m.blog.naver.com/racecarve/223477201782
잊혀진 장관급 정부기관 ‘원자력원’을 아시나요?

2024년 6월 현재 대한민국 원자력계에 ‘원자력원’이라는 정부 기관은 잊혀진 존재입니다… 위는 필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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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8.6. 중앙일보



“6일상오10시 서울 조계사에서 제1회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제가 2백여 피해자와 1백여 사회인사, 친지등이 모인가운데 엄수됐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날을 잡아 위령제올린 집전위원회 (위원장 김팔봉)는 지금까지 23년동안 원폭희생자들은 너무나 외면당했다고 호소하고 원혼을 달래는 향을 살랐다.



이날 위령식장에는 원폭으로 상반신불수가된 김찬희여사(68·영등포동4가16), 안면신겨통이 생긴 이쌍룡씨 (49 경북고령) 등이 부축을 받고 나와 그날의 악몽을 되새기면서 23년동안 그대로 돌보지 않은 일본정부의 매정을 나무랐다.



원폭희생자는 광도 (히로시마) 에서 사망4만명, 부상2만명, 장기 (나가사끼)에서 사망1만명, 부상2만명등 사망5만명 부상3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일본측은 1만명 안팎으로 보고있어 의견도 갈리고있다.



한국인원폭피해자원호협회산하에는 현재2천45명의 피해자가 등록돼있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다.



6일 상오 일본 「나가사끼」 시장은 『한국에 있는 원폭희생자를 돕기위한 시민모금운동을 벌이겠다』 는 저문을 의령제집전위원회에 타전하는 동시에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조전을 보내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69176





1969.2.6. 조선일보



원폭병(原爆病) 환자들, 아물지 않는 상처(傷処)안고 24년(年)

국내(国内) 2만(萬)명 추산(推算)



원자병(原子病)으로 통칭되는 방사능(放射能) 오염자들은 외상(外傷)이 완치된 후에도 중추신경(中枢神経)이 마비되는 등의 각종 후유증을 수반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화상(火傷), 타박상 외에도 신체불구, 백혈구(白血球)장애, 성불구(性不具), 정신이상(精神異常)등 갖가지 폐질(廃疾)이 따르고, 결혼후 자녀를 낳으면 태내출산(胎内出産), 정박아(精薄児), 소두증(小頭症)등 기형아를 낳으며 통증(痛症)을 진정키 위해 장복한 진통제나 신경안정제의 부작용 등은 암(癌), 폐환(肺患), 신경쇠약등을 병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해방후 일본(日本)에서 귀국(帰国)한 피폭자(被爆者)는 그 자녀들까지 합쳐 2,3만명으로 추산되며, 현재 이들의 교섭단체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原爆被害者援護協会)에는 2천6백4명이 등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화상(火傷)(중화상(重火傷)포함)이 2백34명, 반신불구자(半身不具者) 92명, 성불구(性不具) 17명, 비출혈증(鼻出血症) 30명, 저능아(低能児) 20명, 내장장애 32명등 20여종의 각종 질병에 신음하고 있는 환자가 7백여명에 달한다.



이들에 대한 국가(国家)및 사회(社会)의 대책이나 관심은 거의 전무(全無)한 실정에 있다. 65년 방사선(放射線)의학연구소(医學研究所)와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가 첫 실태 파악에 나서 국내 6백여명의 피폭자(被爆者)를 찾아냈고, 67년 8월 한국 원폭피해자 원호협회가 발기된 이래 2천6백4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다.



그러나 그동안 시료(施療) 실적을 보면 동부시립병원(東部市立病院)과 방사선(放射線)의학(医學)연구소 등에서 40여명과 일본(日本) 히로시마 원폭(原爆) 병원에 2명뿐이었다.



작년 10월 부산에 사는 손유달(孫遺達)(38) 여인은 날로심해가는 통증에 견디다 못해 일본에서 치료를 받기위해 밀항(密航)하기도 했었다.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이 병고(病苦)와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고(二重苦)는 국내의 원자병(原子病)환자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교포 환자에게도 마찬가지다. 67년 3월 현재 광도현(広島県)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韓国人)수는 1만4천3백여명으로 그중 상당수가 원자병(原子病)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인 교포는 원호대상에서 제외되어있다.



일본은 57년에 이미 원폭의료법(原爆医療法)을 제정, 27만7천9백명의 일인(日人) 피폭생존자(被爆生存者)에 대한 정기진단, 무료치료 등 의료시술(施術)을 행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피폭(被爆)환자전문병원을 설립하는 한편 피폭자(被爆者) 원호법(援護法)의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원자력청장 안(安)박사는 최근 일본에서도 재한피폭자(在韓被爆者)를 도우려는 노력이 양성화(陽性化)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한국 정부나 또는 어떤 기관이 교량 역할을 맡아줄 것』을 바라고 있다.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471019690206m1061&set_date=19690206&page_no=6



1970.8.5. 중앙일보



제3회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제」가 6일 하오 1시 조계사에서 위령제 집행위원회(회장 안호상) 주최 「한국 원폭피해자 원호협회」 주관으로 베풀어진다.



삼귀의례와 대비주·독경의식으로 진행될 이 위령제는 원폭투하로 사망한 5만명의 우리동포와 부상한 채 귀국 후 사망한 3백여명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히로시마」(광도) 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을 기해 봉행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50034



히로시마 원자폭탄과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https://m.blog.naver.com/racecarve/223090908817
히로시마 원자폭탄과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단독] 尹, 히로시마 G7때 원폭피해 재일동포 만남 추진 이라는 오늘자 (2023.5.2) 단독 기사를 보고 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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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 한인위령비와 나가사키 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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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 한인위령비와 나가사키 평화공원

2023년 2월 히로시마 HICARE 연수에 이은, 2024년 1월 나가사키 NASHIM 연수… 위의 무시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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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6.13 중앙일보



합천에 원폭환자 진료소 세워|「일핵평화국민회」협력으로 결실



한국의 원폭피해환자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 일본인들이 힘써온 보람으로 경남 합천에서 원폭환자 전문진료소가 4개월 후에 문을 열게 되었다. 합천 원폭환자진료소는 일본 핵 병기 평화건설국민회의의장「무라까미」씨와 한국원폭피해자 구조협회(서울 중구 인현동135의4·회장 신영수)의 공동노력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일본에는 현재 원폭피해자 32만6천37명에 지정의료기관 2백88개소, 일반병원 3만3백82개소인데 비해 한국에는 피해자·6천3백69명 (미 등록자 8천여 명 추산)이나 국가의료혜택은 전혀 없는 형편이다. 합천에는 서울 다음으로 1천5백70명의 원폭피해자가 살고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23409



1973.11.13 중앙일보



2차 대전 당시 일본「나가사끼」에 살다 원폭에 희생됐던 김재환씨(전남 무안군 이로면)등 1백50위와 징용 희생자 90위 등 2백40위의 원혼들이 13일 재일 교포 권수용씨(54)등 관계 인사들에 의해 부관「페리」편으로 고국 땅에 돌아왔다.



이날 환국한 유해들은 전쟁이 끝난 뒤 일본「나가사끼」동보사를 비롯, 각지방 사찰에 봉안됐던 무연고 한국인 희생자들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62106



1975.8.15 중앙일보



원폭피해한국인에 무성의한 일본|원폭투하 30년맞아 오덕준씨는 말한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은 45년8월6일 상오8시15분17초. 당시 징용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한국인들중 약 10만명이 원폭피해를 입었으며 그 동안 7만여명이 병마에 시달리다 숨져갔다.



한국원폭피해원호협회은 현재까지 생존한 원폭피해자는 2만∼2만5천명으로 추산했다.



원폭피해자인 예비역육군소장 오덕준씨(54)는 30년전 「히로시마」의 비극과 아물지 않은 피폭상처등을 회상하면서 30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가 한국인 피해자들에 전혀 보상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에 격분했다.



징용당한 한국인을 탁아소에 맡겨진 원생이라고 가정한다면 일본은 탁아소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당연히 져야 한다는 것.



일본인 원폭피해자들은 일본정부나 참전국들로부터 보장을 받고 있다. 일본은 63년 「원폭피해자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 원폭피해자들에게 의료수당·비노동수당등을 지급하고 「원폭수첩」을 가진 피해자들은 누구든지 어느 병원에서나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미국원폭상해조사위원희등에서는 일본피폭자들을 위해 많은 모금과 의약품등을 보내고 있다는 것.



오씨가 원폭세례를 받은 것은 「히로시마」주둔 일본군 중부군관구 사령부114부대 연병장에서였다. 일본 관서대학에 유학중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들어간 오씨는 「후꾸지야마」 (복지산) 예비사관학교를 마치고 견습사관으로 보임받은 곳이 114부대.



주번사관 근무를 위해 사병 2천5백명을 연병장에 모아놓고 훈련을 막 시작할 무렵 번쩍하는 섬광과 폭음에 실려 몸이 날아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알몸뚱이에 머리카락과 눈썹이 탔고 얼굴은 익어 버렸었다.



오씨의 부대는 원자폭탄 폭심(폭심)에서 불과 1·6km지점에 있었다.



새까맣게 탄 시체들을 건너 뛰어 「히로시마」교외 어느 농가에 피신, 부엌에 있는 콩기름 1병을 발견, 화상을 치료한 덕분에 오씨의 얼굴은 곱게 아물었다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13574



1976.4.27 중앙일보



원자폭탄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 했다가 강제 퇴거처분을 받고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손진두씨(49·후꾸오까 속병원입원중)가 제소한 강제퇴거 처분 무효 확인소송에서 3년만에 승소, 치료가 끝날 때까지 일본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26일 하오 「후꾸오까」지방 재판소 민사 3부(재판장 남신오)는 손씨가 「후꾸오까」입국관리 사무소를 상대로 낸 이 소송의 결심 공판을 열고 『송환처분이 집행될 경우 소송의 목적이 없어지기 때문에 본안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송환집행을 정지한다』고 판시, 손씨의 강제퇴거 집행 정지신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35353





1977.8.5 조선일보



원자(原子) 사막

곽귀훈(郭貴勳)



인류 최초의 원자 폭탄이 투하된 것은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일본 광도시(日本廣島市) 상공이었던것은 누구나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제(第)2탄(彈)이 3일후인 9일 장기시(長崎市) 상공에 투하된 후에 32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직접 사람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원자 폭탄을 투하한 일이 없음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광도(廣島)나 장기(長崎)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효력은 예상외로 커서 그로 인해 일본(日本)은 항복했고,연합국은 승리하였으며 덤으로 한국(韓國)이 독립된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가 독립된 것도 원자 폭탄의 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그 반면에 많은 한국(韓國)사람들이 원자 폭탄의 제물(祭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광도(廣島)에 투하된 원폭(原爆)은 20K 탄(彈)으로 약20만명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소사(燒死)되었고, 지상(地上)의 모든 시설물은 모조리 파괴되어 직경4~8㎞(㎞)정도의 원내는 원자 사막(原子沙漠)으로 변해버렸었다.



이러한 원자 무기는 그후 더욱더 발달되어 지금은 광도(廣島)형의 50배~1백배의 메가톤급 원(級原)—수폭(水爆)을 지구상의 어느 곳에나 적중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미 제조된 것만으로도 능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사멸(死滅)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미지상군(美地上軍)의 철수와 관련해서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고되어 가고 있다. 30년전과 달라 핵개발이 비밀이 아닌 이상 개발하려고만 든다면 우리도 가까운 시일내에 원자 폭탄 정도는 제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된다면 북괴(北傀)도 언젠가는 핵(核)무기를 만들 것이고, 그로 인해 더욱더 호전성(好戰性)을 발휘하게 된다면 순식간에 3천리 금수강산은 원자 사막(原子沙漠)으로 변해버릴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광도(廣島)에서 원자탄의 피해로 사경(死境)을 헤매다 소생한 사람이다. 또 다시 이 땅에 원자탄이 터져 너도 죽고 나도 죽으며, 한반도가 원자 사막화(原子沙漠化)되었다고 하면 세계인(世界人)의 조소거리가 되고 말것이 아닌가. 설마 그렇게야 되겠느냐고 자위하는 사람도 있지만, 원자전(原子戰)은 6·25정도로는 비교할 수 없는 사막화 전쟁(沙漠化戰爭)이란 것을 명심해야하고, 또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폭(原爆)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두손 모아 빌 뿐이다. <한국원폭(原爆)피해자협회 부회장>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733219770805m1055&set_date=19770805&page_no=5



2023.1.3 동아일보



일본 밖 원폭 피해자 보상 이끈 곽귀훈 씨 별세



“日정부에 소송 제기… 2003년 승소

韓거주 피폭자 1000여명 수당 받아



일본 밖에 거주하는 원자폭탄 피해자에게도 피해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일본 정부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 낸 곽귀훈 씨(사진)가 지난해 12월 31일 별세했다. 향년 98세.



2일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시민단체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 이치바 준코 회장은 곽 씨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고인은 1998년 오사카지법에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수당을 해외 거주라는 이유로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해 5년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했다. 이 판결로 2003년부터 한국에 사는 피폭자 1000여 명이 일본 정부 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 귀국한 그는 1950년대 말 한 신문에 ‘히로시마 회상기’를 연재하며 강제동원과 원폭 피해 공론화에 힘썼다.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해 일본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으나 ‘1965년 한일협정으로 보상은 끝났다’며 거절당했다. 1998년 7월 자신의 피해수당 지급이 중단되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다.



고인은 2005년, 2011년 자신의 소송 기록 및 원폭 피해자 운동 관련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471566?sid=102

일본 밖 원폭 피해자 보상 이끈 곽귀훈 씨 별세

일본 밖에 거주하는 원자폭탄 피해자에게도 피해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일본 정부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 낸 곽귀훈 씨(사진)가 지난해 12월 31일 별세했다. 향년 98세. 2일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시

n.news.naver.com



1982.8.30 중앙일보



한·일 국교 정상화 17년|풀어야 할 숙제들<1>



<중노동도 서러운데>



전국에 아직 남아있는 2만 5천 여명의 원폭피해자 중 한사람인 안영수씨 (62·서울 진관외동 300). 한일 간에 풀어야할「미결의 여러 과제」가운데서도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일본의 양심을 재는 척도』라고 말한다.



『한국인인 우리들이 왜 바다건너 일본에 가서 원폭을 맞아 죽거나 병신이 되어 돌아와 인생을 저주하며 살아야 했습니까. 일제의 한국침략과 야만적인 식민통치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안씨가 원폭을 맞은 것은 1945년 8월 6일 일본 광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지원병을 뽑아가기 시작했어요. 말이「지원」이지, 사실은 강제였지요. 왜군의 총알받이가 되기는 싫고 궁리 끝에 당시 살던 서울 효자동사무소에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제지원을 면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웬걸 1년도 못돼 징용 영이 내렸습니다. 공무원들이 솔선해야 한다고 해서 꼼짝없이 붙잡혀 동네사람 11명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지요. 광도의 삼능 조선소에 배치돼 하루 15∼18시간씩 중노동을 했습니다. 이 때가 44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광도에는 안씨처럼 끌려갔거나 국내에서 살수가 없어 이주해간 한국인이 약 8만명, 이듬해 일본은 본토마저 B-29의 공습에 유린되기 시작했다. 지구상에 유사이래 처음 원폭이 터지던 역사의 그 날, 45년 8월 6일 상오 8시.



<죽은 한국인만 5만>



『아침을 먹고 난 7시 50분쯤 다급하게 공습경계경보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적기의 소재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때까지 광도는 단 한번도 공습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였습니다. 공장건물 밖에 널린 기계들을 치우고 있는데 순간 번쩍 빛이 스쳐가며 온 세상이 노래지더군요.



현기증 같은 것을 느끼면서 가만히 서 있었어요. l, 2초쯤 뒤「꽝」하는 일발의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는 4㎞밖 시내에서 버섯 같은 구름이 하늘 까마득히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원폭인지를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한발로 인구 60만의 광도 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잠시 후 시내로부터 피투성이가 된 환자들이 조선소 병원에 떼를 지어 수송되기 시작했어요. 어떤 환자는 걸어오다 퍽 쓰러지기도 해요. 피부가 온통 벗겨져 누더기 옷처럼 너덜거리고 있었습니다. 구조반으로 시내에 나가봤더니 거리마다 시체가 깔려 있었습니다. 폭탄이 터지던 그 순간의 자세 그대로 외상도 없이 말짱하게 쓰러져 죽은 시체도 많았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원폭인지 몰랐고, 방사능 오염지역을 쏘다니면 안 된다는 것도 몰랐었지요.』



이어 8월 9일 장기에 두번째 원폭이 터졌고 8월 15일 왜왕 유인은 항복을 성명 했다. 명치유신 이후 70여년 제국주의 침략의 끝장이었다.



이 두 도시에 징용·징병·보국대·정신대 등으로 강제 연행되거나 일제의 약탈로 고국에서 생활근거를 잃고 생계를 찾아 유랑해 노무자 등으로 일하던 한국인은 약 11만명. 광도가 8만명, 장기가 3만 여명이었다. 이중 원폭피해자는 약 10만명.



5만 여명이 폭격 당시 일본인들과 함께 떼죽음을 당했고 5만 여명은 살아남아 해방 후 귀국했다.



그러나 생존자 중 상당수는 폭격 당시의 부상으로 귀국 후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숨졌다.



『원폭병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폭이 원인이 돼서 백혈·빈혈·다혈·혈소판 감소증 등 조혈기질환·간기능 장애·내분비 성장애·각종 암·신경장애·백내장 등 거의 모든 질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을 겁니다. 벌써 37년인데 중증환자는 사실상 이미 다 죽은 셈이지요.』



안씨도 원폭에 직접적인 상처는 입지 않아 당시에는 아무 탈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해방 이듬해 귀국, 의류제조업 등을 해온 안씨는 30대를 넘으면서 간접피해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해도 금방 피로해지고 마는 증세로 의욕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 상처가 나면 아물지 않고 소화가 잘 안되며, 이유 없이 토하는 증세도 나타났다.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해도 위에는 이상이 없다는데 1주일에 한두 번은 이유 없이 구토를 해 견디기가 어렵다.



자신의 증세를 원폭과 관련짓게 된 것은 60년대 이후. 원폭 방사능에 장시간 노출된 때문인 것으로 진단을 받았다.



원폭피해자들은 65년 한일 회담에서조차 자신들의 문제가 외면당하자 67년 7월「한국 원폭 피해자협회」를 조직했다. 우리정부와 일본정부에 진정·건의 등으로 대책을 요구하며, 17년째 자구의 투쟁을 벌이고 있으나 별 성과가 없다.



73년 일본 민간단체인 핵금 회의에서 합천에 원폭 진료소를 세웠으나 위치가 벽지인데다 전문의료 요원도 없어 유명무실한 실정.



<요즘도 잦은 구토증>



일본 정부는 몇 차례『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언질을 주었으나 말뿐이다. 『원폭 피해자문제는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이미 해결됐다』는 태도를 고수하며 시간만 끌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국인 피해자를 1년에 50명씩 일본으로 데려다 치료해 주기로 한 것이 정부차원에서는 유일한 실적.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0명이 일본에 간다. 치료기간은 두달, 생색뿐이다.



『일본인 의사가 와서 대상자를 선발해 가는데 중증환자는 데려가지 않습니다. 1년에 50명이면 10년 해야 5백명 입니다. 10년 내에 현재 남아있는 환자의 상당수는 또 죽을 겁니다. 결국 생색만 내며 시간을 끌어 해결하자는 속셈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한국 원폭 피해자협회 회장 신영수씨(64)의 말이다.



협회의 조사로는 현재 전국에 2천 여명의 중환자, 1만 여명의 경환자 등 모두 2만 5천명의 원폭피해자가 있다. 그 대부분은 원폭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경제활동을 못해 가난과 병고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신 회장은 우리정부에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대일 교섭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51301



1989.8.16. 대한뉴스, 제22회 원폭 피해자 추도식



원자폭탄 피해자 추도식

대한적십자사 서울지부에서 거행된 원폭 피해자 추도식

-그동안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 모두 무관심

-한국원폭피해자협의회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외교 협상에 나섬.

-10만 여 동포 중 생존해 귀국한 4만 여 명

-현 생존자 3만 여 명과 후손들이 상당수 원자병 피해를 입음.



출처 : 대한뉴스 제 1762호

https://youtu.be/SyBvfHDD8Ec?si=0gQF7qToGX9uRuC6



1991.8.3 mbc 뉴스데스크



신영수 회장(판국원폭피해자 협회회장) 인터뷰



https://news.imbc.com/replay/1991/nwdesk/article/1850545_30445.html

신영수 회장(판국원폭피해자 협회회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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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im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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