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9

손민석 사회적 권리, 의무 등에 대한 인식

(1) Facebook


파리에 와서 이런저런 경험을 할 때마다 내가 너무 타인의 악의를 쉽게 상정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어제도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유색인종 남성이 와서 내게 막 야야!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거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바로 적대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그러니까 그 남성을 공격할 태도로 전환되었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서 있는 곳에 기차가 안 서고 앞쪽에 선다고, 지금 빨리 뛰지 않으면 기차 놓친다고 알려주는 거였다. 순간 너무 민망해져서 그 남자를 따라갔고 등을 두들기며 고맙다고 말하자, 그 남성은 내게 환하게 웃으면서 손짓으로 아, 이 열차가 이게 막 저기까지 가서 내가 알려줬다고. 너 타서 다행이다. 막 그러면서 웃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많았다. 파리에 오기 전에 찾아본 여러 유튜브 영상이나 여행 후기 글 등 곳곳에서 소매치기, 강도, 인종차별 등의 사례를 접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절대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들만 반복해서 접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약간 편견을 갖고 접근한 것 같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많은 이들이 나같은 외국인의 곤란을 외면하지 않고 먼저 다가와서 알려주고, 도와주고, 자기 일처럼 해결해주려고 하는 걸 보고 부끄러웠다. 타인의 악의를 상정하고 언제든지 그것에 맞설 자세가 되어 있는 그 심성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임승차를 걸렸을 때 화내는 것도 그렇고 프랑스와 한국 사회의 심성세계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여기서는 이동의 자유, 그런 걸 일종의 천부인권에 속하는,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는 것 같다.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사적 소유권이라는 틀로 제한하려고 하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겠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내든 안 내든 그것과 관계없이 이동의 자유는 일종의 권리이기에 무조건적으로 국가, 사회 등에 의해 제공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식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바게트가 어디를 가든 1유로 초반대인데 국가 정책적으로 이를 지원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서 보면 대부분의 바게트에 국가 공인 바게트 등의 표시들이 붙어 있다. 국가가 바게트의 품질에서부터 유통, 가격 등의 여러 차원에서 세심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인데 이건 바게트의 공급을 일종의 권리, 당연한 복지로 생각하지 않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햇반이 싸다고 한들 국가가 개입해서 품질을 관리하고 가격을 공시하고 그러지는 않는데 반해서 프랑스 정부는 그렇게 하고 있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렇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사회적 권리, 의무 등에 대한 인식은 희박한데 반해서 개인의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의식은 드높다. 프랑스에서는 권리의 개념에 속하는 것들이 한국에서는 서비스 재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내가 '내 돈'을 내고 구입했으니 나는 여기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외국인들이 희한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좋은 치안 상태도 나는 여기서 비롯된거라 본다. 국가는 타인의 소유권에 대한 침해를 엄격하게 처벌하고, 개인들은 타인의 소유에 "절대성"을 부여해 그것을 침해하려 하지 않는다.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 남의 사적 소유에 피해를 입히는 일 자체를 모조리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공정 담론이라든지 그런 것도 결국 다 소비자 권리 의식, 사적 소유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내가 타인에게 침해받는 것도 싫고 타인을 침해하는 것도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구입했다는 느낌이 들면 곧바로 진상으로 돌변해 권리행사를 하는거다. 나는 그럴 권리가 있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 때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조심하지만, 돈을 내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전제적인 지배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프랑스에는 '사회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이고, 한국은 '사회적인 것'의 형성보다는, 원자화된 개인들이 상품시장을 매개로 각자도생하는 느낌이다.

이렇다보니 개개인들의 심성세계에 큰 차이가 생긴다. 타인이 내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지,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내 손해를 줄이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인의 심성세계와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하고 따지는 프랑스인의 심성세계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어느 사회가 더 우월하네 마네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경로가 다르다는거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적 경로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계기가 많다 생각하지만서도 그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은 듯하다.
가령 프랑스에 와서 몇번 마트를 가서 장을 봤지만, 마트 곳곳에서 계산안한채로 음식을 까먹고 버리는 이들이나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딱히 그걸 제지하거나 열심히 적발하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음료, 음식 등을 바로 까먹고 아무데나 버려둔다. 그런 걸로 인해 다른 멀쩡한 상품까지 버려지게 되는 경우가 있을 듯하다. 이것조차도 사회적 권리의식의 발현이라 보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마트에 진열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걸 일정한 정도로 방치하는 이 심성세계가 내게는 참 낯설게 느껴진다. 훔치는 게 잘못됐다,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사회적 권리의식에 필연적으로 부대하는 '비용'으로 이걸 다뤄야 될지 어떻게 다뤄야 될지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다. 자칫하면 이런 게 사회적인 것의 개념에 균열을 내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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