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8
(1) Sejong Park - 김시덕 선생께서 클럽장을 맡은 트레바리 독서 모임 '근대아시아'에서 《제국의 폐허에서》를 함께...
(1) Sejong Park - 김시덕 선생께서 클럽장을 맡은 트레바리 독서 모임 '근대아시아'에서 《제국의 폐허에서》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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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ong Park
14 hrs ·
김시덕 선생께서 클럽장을 맡은 트레바리 독서 모임 '근대아시아'에서 《제국의 폐허에서》를 함께 읽고 있다. 몇몇 다른 책을 겹쳐 읽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 책은 근대 세계를 아시아의 시각에서 바라보려 한 책이다. 물론 그 주요 대상은 서구 독자겠다. 저자가 서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사상가들("두 주역"은 알아프가니, 량치차오다)의 지적 여정을 중심으로 책을 서술했다고 밝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근대 아시아 역사에 익숙하지 않기로는 한국의 여건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때 '극동(Far East)'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럼 없이 수용했을 만큼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의 역사 해석에 익숙한데다,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친일과 항일의 이분법 프레임이 가장 손쉽게 다가오니 말이다. '범아시아주의'나 아시아연대론이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니 이러한 시각에서 아시아사를 바라보는 일은 친일사관의 프레임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이 책은 그러니 실상 한국 바깥의 아시아에서(저자는 인도 태생 저술가다) 당시의 아시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이해하는가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되겠다.
'근대화'가 시대적 사명이자 소명의 단계에 오른 19-20세기. 힘의 논리가 최우선순위에 놓인 사회진화론이 광범위한 설득력을 지녔다. 외래의 힘, 다시 말해 서구의 압도적인 무력과 공업·상업력 앞에서 아시아의 사상가·정치가·활동가들은 다양한 갈래의 반응을 보였다.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강해질 수 있다는 "반동적 신념"으로, 혹은 "전통"에 입각해 "서구의 몇 가지 기술"만을 받아들이는 "온건한 입장"으로, 또는 "옛 생활방식을 송두리째 혁신"하는 경로가 제시됐다. 사람들은 한 입장만을 고수하기보다는 내면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여러 신념체계를 교차했다. 힘은 두려움과 동시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약육강식 논리가 만연한 세계에서 침략과 개화, 수탈과 자선은 서로 뒤섞였다. 사태의 이해가 단순화될 수 없는 이유다.
아시아는 서구의 충격에 직면하여 좌절했고 뒤이어 일본의 발빠른 근대화를 바라보며 각성했다. 책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현대 세계는 1905년 5월의 이틀 동안 쓰시마 해협의 좁은 물길에서 결정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서구라는 외래의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지역의 강자인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 범아시아주의가 설득력을 얻어감과 동시에 서구 열강의 경로를 답습하는 일본의 제국주의도 함께 강력해졌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독립국이 된 조선은 중화제국 체제에서 떨어져나와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세계에 그대로 내던져졌다. 일각에서는 군주가 '민국'을 즐겨 입에 올렸다느니 서울에 노면전차가 다녔다느니 하는 주장을 펼친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걸까? 그러나 대황제는 "무한하온 군권을 향유"('대한국 국제')했고 변변한 간선철도망조차 놓이지 않았다. 이 시기를 바라보는 데 빈번히 쓰이는 렌즈, '친일/항일 프레임'은 전후 성립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통합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사후적 도구로는 유용했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책의 두 주역 알아프가니와 량치차오는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전통, 혁신, 절충의 사상을 오갔다. 알아프가니는 이슬람 세계를 오가며, 또한 위의 세 입장을 오가며 근대 아시아를 살았던 인물이다. 현대 중동의 이념지형과 정치지형이 형성되는 데 상당히 기여했던, 혹은 적어도 그러한 형성의 기저에 깔린 원인에 폭넓게 천착했던 인물이다. 그의 폭넓은 사상의 범위는 알아프가니가 현재 이슬람 세계의 종파 차이를 막론하고 추앙받는 존재가 되게 했다. 량치차오는 유교적 전통에서 성장했으나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그 전통에서 벗어났고, 진보와 힘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근대화과정에 내재한 양면성을 인식했다. 열강의 제국주의가 통치자의 야심만이 아닌 피통치자들의 동의에도 기반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강한 국가건설을 과제로 내세웠으며,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를 자임하는 서구에서도 국가형성기에 벌어진 일이었음을 포착했다. 1차대전에서 저질러진 막대한 규모의 파괴와 전쟁 뒤 '민족자결주의'가 실현되지 않은 데 대한 배신감으로, 량치차오는 유교로 되돌아간다. 그는 급진적 이념과 온건한 지향을 오가기는 했으나 줄곧 '자애로운 전제정'을 목표로 삼았던 듯싶다. 이는 후일 장개석과 모택동에 의해 각기 다른 방면으로 계승될 것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파편화된 국가에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장개석은 국가 상부구조를, 모택동은 인민의 토대를 형성했던 것이다(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침략과 혁명과 전쟁을 통해 국가와 국민이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가며 주조되었다. 범아시아인, 반反만주 한족 집단, 광의의 '중화민족', 혁명적 인민 등 여러 정체성이 각축을 벌였다. 이러한 정체성의 경쟁을 친일과 항일과 같은 느슨한 이분법으로 포괄할 수는 없다.
찰스 틸리는 (서구)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이 전쟁과 전쟁 준비에서 촉발되었다는 유명한 테제를 남겼다.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는 국민을 통합했고, 국민에 손을 벌렸고 그 대가로 일정한 권리를 부여했다. 국민과 민족은 전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방식으로 형성된 바 없다. 아시아에서 국민의식과 민족의식은 제국주의적 식민관계에서 대두했다. 본래 ‘필리핀인’은 필리핀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즉 크리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필리핀인이라는 단어가 여러 부족으로 나뉜 토착민을 묶어주는 개념으로 바뀐 것은 식민본국 및 다른 식민지 해방운동과의 교류와 투쟁의 결과였다(베네딕트 앤더슨, «세 깃발 아래에서»). 사회다윈주의의 각축장에서 아시아 사람들은 자신을 신분이 아닌 민족으로 묶어내기 시작했으며, '자강'을 위해 노력했고, 그 갈등과 협력의 과정에서 오늘날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 유일의 (민족) 분단국가'라는 오해 속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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