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협동농장의 어두운 오늘
농민, 군인 가릴 것 없이 농장 곡식 훔쳐가기 바빠 … 전기 없어 탈곡 못한 벼이삭, 겨우내 절구로 찧어 먹어
주성하|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2010년 07월 호
열심히 일한 만큼 분배받는 협동농장은 북한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고난의 행군 이후 수확량이 급감하면서 협동농장은 온갖 비리와 도둑질이 판치는 썩은 땅이 되어버렸다. 농민들은 농장을 외면하고 개인 텃밭에 매달려 끼니를 이어간다.
사회주의 정신이 사라지고 개혁 의지마저 잃은 북한의 협동농장과 곤궁한 농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
북한 농촌 마을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호 중 하나다. 1987년 등장한 이 구호는 협동농장 포전(圃田·구획을 나눠놓은 경작지)을 개인 텃밭처럼 정성을 다해 가꾸라는 뜻이다. 북한의 다른 정치구호들과 전혀 달리 이 구호는 나오자마자 주민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인기’ 구호가 됐다. 물론 그 이유는 당국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가을이 되면 농장원들은 저마다 농장 밭에서 벼나 옥수수를 훔쳐가기에 바쁘다. 한밤중에 훔친 곡식을 배낭에 담아 메고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라고 하지 않았어. 주인인 내가 좀 조절(도둑질)해 오지 않으면 남이 다 가져가잖아” 하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군인들도 농장 밭을 털다 잡히면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라고 하지 않았시오. 왜 그래요” 하며 능글맞은 표정을 짓기 일쑤다.
주인이 없어진 북한의 사회주의 협동농장, 그 현실을 해부해본다.
매년 5월10일~6월10일, 9월20일~10월10일에 북한 농촌은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당국은 이 시기에 각 도시와 군 소재지인 읍에서 노동력 있는 사람들을 차출해 어떻게든 농촌에 보내려고 한다. “숟가락 드는 사람은 다 농촌에 나가라”는 것이 노동당의 지시다. 북한에선 이 시기를 ‘농촌동원기간’이라고 부른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5월31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북한 당국이 탈북자 가족을 색출하기 위해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민들에게 새로운 공민증(주민등록증)을 발급하기 위해 가구조사를 벌이면서 행방불명된 사람들도 함께 조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세대별 가구조사도 5월10일부터는 중단됐다. 사람들이 모두 농촌에 가 있어 정확한 조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농촌동원기간에는 곳곳에 단속초소가 설치돼 길 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왜 농촌에 내려가지 않았는지 따져 묻는다. 합당한 사유가 없으면 즉시 농촌에 실려 간다. 그렇기 때문에 농촌동원기간에는 도시가 한산해지게 마련이다.
북한에는 전국적으로 3000여 개의 협동농장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 농장들에 속해 있는 농민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0% 정도로 추산된다. 하지만 모내기철에는 농민들보다 훨씬 많은 도시 사람이 농촌으로 내려간다. 농장별로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 명씩 지원을 나간다.
대학생은 물론이요 중학교 3학년 이상은 모두 농촌으로 가 합숙하면서 일을 도와야 한다. 중3이면 만 13세 정도다. 농촌학교에선 10세만 돼도 ‘강냉이 영양단지 이식’에 동원된다.
영양단지는 고 김일성 주석이 창시했다는 주체농법의 일환이다. 영양물질이 많이 섞인 흙덩어리를 만든 뒤, 여기에 강냉이 씨앗을 심고 어느 정도 자라면 흙덩어리째 밭에 옮겨 심는 것이다. 빨리 고르게 튼튼한 모를 키우고 씨앗을 절약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손이 많이 가는 까닭에 효율성 측면에선 상당히 뒤떨어진 농법이다.
북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우스갯소리로 영양단지를 ‘학생단지’로, 농민은 ‘지도농민’으로 부르고 있다. 영양단지를 밭에 옮겨 심는 일을 거의 다 학생들이 하고, 농민들은 그저 노력동원 나온 도시 사람들을 감독, 지도만 한다는 뜻에서다.
영양단지 이식은 대개 5월 중순이면 끝나지만 모내기는 6월10일을 전후로 마무리된다. 가을 추수는 9월20일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강냉이를 수확하고 벼는 10월10일까지 수확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제 기일을 지킬 때가 많진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1년에 두 차례씩 농촌에 동원을 나가다보니 웬만한 북한 주민들은 다 농사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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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낫으로 추수
모내기와 추수시기에 도시 사람들이 동원되는 이유는 농촌의 기계화 사정이 상당히 열악하기 때문이다. 기계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때는 1980년대 중반경이었다.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치면서 북한 농촌은 1940~50년대로 회귀했다. 농기계가 있어도 연료가 없어 무용지물이고, 기계가 가동되지 않으니 부속이 녹슬어버리고, 공장이 멈춰서다보니 새 부속도 구하기 힘든 악순환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모내기는 옛적부터 해오던 대로 사람들이 논에 죽 늘어서서 모를 꽂는 식으로 이뤄진다. 벼 추수도 수확기는 꿈도 못 꾸고 낫으로 베야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협동농장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시사람들을 불러다 농사짓던 일은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농사는 농민들이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협동농장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농민들의 근로의욕이 사라졌고, 그 결과 도시에서 막대한 인력이 투입됐음에도 농장의 생산량은 시원치 않다. 농민이나 지원노(동)력 모두 주인의식과는 거리가 먼 탓이다.
북한은 정전(停戰) 직후인 1953년 8월부터 1958년 8월까지 개인들의 토지를 모두 합쳐 협동농장을 만들었다. 오늘날 협동농장은 관리위원회 산하에 여러 개의 작업반이 있고, 작업반 아래 다시 분조가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한 개 협동농장에는 지역에 따라 5~20여 개의 작업반이 있다. 한 개 작업반은 5~8개의 분조로 구성되고, 분조의 인원수는 대개 10~20명 정도다. 그러니 한 개 작업반에 속한 인원은 50~150명쯤 된다. 작업반은 다시 일에 따라 농산반, 남새반, 축산반, 과수반, 기계화반 하는 식으로 나눠진다. 군대가 보병, 포병, 기계화병, 공병 등으로 세분화돼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중 지원노력들이 주로 가는 곳은 농산반이다.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수산반, 임업반, 누에반, 주택보수반과 같은 작업 단위가 있는 농장들도 있다.
군 사령관에 비유할 수 있는 농장의 총책임자는 관리위원장이고, 정치위원 역할은 리당비서, 참모장 역할은 기사장이 수행한다. 농장의 실권자는 인물에 따라 관리위원장이 될 수도 있고 리당비서가 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사장이 쥐락펴락 하는 곳도 있다.
협동농장원들은 일한 양을 공수로 따져서 평가받는다. 북한에는 그날 한 노동의 성격과 양에 따라 몇 공수를 줘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자세히 마련돼 있다.
실례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는 농촌에서도 가장 힘든 작업에 속하는데 150평을 갈면 1공수를 주는 식이다. 농촌에서 가장 많은 작업 중 하나인 김매기는 면적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하루에 보통 1~1.2공수를 받는다.
공수를 매기는 사람은 말단 책임자인 분조장이다. 이렇게 공수를 모아보면 1년에 농장원당 대략 300공수 정도를 받는다. 오래된 은어이긴 하지만 북한에선 몸이 튼튼하고 일 잘하는 농촌여자를 가리켜 ‘600공수’라고 한다. 600공수는 몸도 아프지 않고 남보다 2배, 3배씩 일해야 받을 수 있다. 도시에서 온 지원노력도 그날그날의 실적에 따라 분조장이 매겨준 공수를 가지고 일을 잘했나 못했나를 평가받는다.
‘600공수 여자’
북한의 협동농장에서는 탈곡까지 끝난 12월 말경에 결산분배라는 것을 한다. 그해 농장이 생산한 전체 알곡 생산량 중 국가에 내는 것을 뺀 나머지 알곡과 생산물을 국가에서 수매하거나 도시에 판매해 얻은 현금수입, 이 두 가지를 농장 소속 전체 농장원이 받은 공수로 나눈다. 그러면 1공수당 알곡은 몇 kg, 돈은 얼마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다시 각 농장원이 1년간 모은 공수만큼 곱해 알곡과 현금으로 지급한다.
농장이 국가계획을 초과 수행하면 잉여 몫이 커져 농민들 몫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나 계획에 미달하면 쪽박을 찬다. 이 때문에 협동농장이 생겨난 초기에는 농장 간에 알곡 및 현금 분배에 많은 차이가 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가계획을 집행하는 농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분배에 기대를 거는 농민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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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들이 국가계획에 미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농민들의 근로의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 풍작을 거둬봤자 놀고먹던 간부들이 이래저래 다 빼돌려 자기 배만 채우니, 농민들로서는 일할 의욕이 생겨날 수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국가계획 과제가 너무 높게 하달되기 때문이다. 농장의 정보당 쌀 생산량이 2t에 불과한데 국가에선 4t으로 정해주는 식이다. 이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계획을 달성할 수가 없다. 국가계획이 높게 내려오는 것은 지역 및 농장 간부들의 책임이 크다. 추궁이 두려워 상부에 생산량을 과장해 보고하는 바람에 농민들만 애꿎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선군정치가 시작되면서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이때부터 가을이면 군인들이 총을 메고 농촌에 와 군량미를 걷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군량미는 국가계획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농장들이 늘 국가계획에 미달하자 당국은 군부대별로 농장을 지정해주고는 필요한 군량미를 직접 조달해가도록 한다. 군량미 챙기기에 혈안이 된 군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택수색까지 벌여 양곡을 걷어가고 있다.
이런 일은 특히 곡창지대인 황해도 농촌에서 심하다. 고난의 행군 초기에는 황해도 쪽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요즘은 풀 캐 먹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 가장 많다고 한다. 특히 이곳 농촌은 규율조차 엄격해 개인 텃밭 일을 할 시간조차 내기 쉽지 않다.
과거에는 계획에 미달한 농장에 한해 국가가 외상으로 농민에게 배급해주고, 다음해 알곡 생산량에서 이를 공제해줬다. 그러나 이마저 국가에서 배급해주던 시절의 얘기고, 이제는 이런 것도 없다.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농촌은 점점 황폐해지고 있으며,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봤자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먹어야 농사지을 힘이 있는 법이므로 각 농장은 가을에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양곡을 분배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전력난 때문에 12월 결산분배 때까지 탈곡을 못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벼나 옥수수 이삭째로 배급을 주는 경우가 많다. 북한 주민들은 겨우내 벼나 옥수수를 절구로 찧어 먹느라 고달프다.
달갑지 않은 ‘지원노력’
벼나 옥수수는 수분 함량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농민들이 받는 몫이 크게 차이가 난다. 양곡 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는 수분 감모를 최소한으로 계산해준다. 이렇게 되면 장부상으론 100㎏을 받은 것으로 돼 있어도 이를 말려보면 실제로는 60~70㎏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농민들은 장부상으로는 식량을 많이 받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봄까지 견디기가 힘들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에는 모내기철이 되면 농장마다 지원노력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가 지원노력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배급제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엔 농촌지원 노력에 한해 배급을 줬지만, 이제는 지원노력을 먹이는 부담도 농장이 상당부분 걸머져야 한다. 풀뿌리를 캐 먹는 농민이 많은데, 지원노력들에게 나눠줄 식량이 있을 리 만무하다.
물론 지원노력들은 일차적으로 식량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요즘 국가에서 하는 일이라곤 그냥 사람들을 농촌으로 내모는 게 전부다. 도시 사람들 입장에선 자기가 장사해 번 양곡을 메고 농촌에 내려가 한 달 이상 무보수 노동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일단 농촌에 가면 모자란 식량이나 부식물을 현지에 손을 내밀어 해결할 수밖에 없다.
농장 입장에선 농사를 망쳐도 좋으니 지원노력이 오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어차피 국가계획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 뻔해 추수 후에 받는 몫이 거의 없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부들은 정해진 시일 내에 모내기나 추수를 마치지 못하면 추궁을 받기 때문에 이런 반발을 누르고 지원노력을 보내달라고 한다.
가을마다 지원노력들은 곡식을 훔쳐가는 데 열을 올린다. 농민이 훔쳐가고, 지원노력이 훔쳐가 상당히 많은 곡물이 유실된다. 이를 막기 위해 북한은 가을마다 군인들에게 실탄을 지급해가며 포전 경비를 서도록 한다. 그래서 농작물 도둑질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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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추수기에 어떻게든 훔치지 못하면 내년 봄까지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훔치는 쪽도 필사적이다. 농민들 입장에선 지원노력들까지 도둑질에 합세하면 자기 몫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들이 더구나 반갑지가 않다.
훔치는 방법도 정말 다양하다. 대담한 농민은 아예 밭에 구덩이를 파고 벼이삭이나 옥수수를 몇 t씩 묻어버린다. 그리고 군인들이 가택수색까지 끝내고 철수한 다음에야 천천히 꺼내 집으로 나른다.
옷 안에 큰 주머니를 만들어 붙인 뒤 탈곡 과정에 몰래 숨겨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점심 저녁 먹으러 드나들 때마다 몇 ㎏씩 훔쳐도 상당한 양이 된다. 밤에 배낭을 메고 논에 나가 볏단에서 벼이삭만 잘라오는 사람도 상당수다. 서두에 썼듯 ‘농장 포전이 나의 포전’이 되는 순간이다.
물론 농장 포전을 나의 포전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농민뿐만이 아니다. 대도시 주변 농촌에는 남새(채소) 작업반이 상당히 많다. 도시에서 소비하는 각종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다.
가을마다 훔치고 붙잡고…
이들 남새 작업반의 가장 큰 임무는 김장철에 도시에서 소비되는 배추, 무, 고추 등을 공급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농민들이 남새 농사를 지으면 도시에서 기관이나 공장별로 내려와 인원수만큼 배추나 무를 실어갔다. 물론 이런 배분에서도 남새 농사가 가장 잘된 포전 순으로 노동당, 보위부, 보안부, 검찰, 행정위원회 등 권력기관들이 차지했고, 농사가 잘 안된 포전은 힘없는 노동자 몫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1990년대 북한 경제사정이 어려워지고 비료 공급 상황이 열악해지면서 툭하면 남새농사를 망쳤다. 농민들도 잘하든 못하든 자기 먹는 것과 별 상관없는 남새농사에 매달리지 않았고 대신 개인 텃밭 관리에 열을 올렸다. 당국이 아무리 농민들을 닦달해도 “비료가 없어 방법이 없다” 또는 “식량이 없어 배고파 일을 못 하겠다” 등의 구실을 대기 일쑤였다. 결국 그 손해는 도시 주민들이 볼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 집중돼 살고 있는 간부들조차 김장배추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그러자 1990년대 중반부터 아예 농장 포전을 기관, 기업소, 군부대별로 나눠주고 가을 김장용 남새를 해결하는 방법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멈춰선 공장에서 딱히 할 일이 없는 노동자들은 자기 공장에 할당된 농장 밭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 비료도 자신들이 구입해야 했다. 밭을 아예 도급 받았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든 못되든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가을 밭 경비를 서는 것도 모두 노동자들의 몫이 되었다. 군부대들도 공장과 마찬가지로 농사부터 경비, 운송까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권력기관들은 포전을 가꾸는 흉내만 낼 뿐이다. 이들 몫의 포전은 공장, 기업소에 땅을 나눠줘 농사 부담이 줄어든 농민들이 떠맡았다. 권력기관들의 밭에는 비료도 잘 공급됐다.
북한의 현실에서 이런 식의 땅 떼어주기는 모두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것이라 하겠다. 권력기관은 자기 몫의 밭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면 그만이고, 농민들은 농장일이 줄어든 덕분에 텃밭 관리를 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많아져 좋았다. 흉작이 많이 든 밭만 할당받은 힘없는 공장, 기업소, 군부대들은 넘쳐나는 유휴 노동력을 활용해 열심히 농사지으면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은 수확을 거둘 수 있어 나름대로 만족했다.
한편 수많은 아사자를 초래했던 고난의 행군은 북한 농촌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이제는 농촌에 ‘지주’가 생겨나고 있다. 북한 농촌의 지주는 일종의 작업반장이다.
수하에 10~20명을 거느린 분조장보다 이런 분조를 여러 개 관할하는 작업반장의 권한이 더 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북한 농장은 부락별로 작업반이 구성되기 때문에, 작업반장은 그 부락의 장(長)이나 다름없다.
국가에서 농사를 위해 대주는 것이 일절 없으니 농사를 어떻게 짓는가 하는 것은 농장 간부들의 수완에 달렸다. 또 식량이 없어 자기 부락의 농민이 굶주리면 대개 작업반장이 이들을 돌봐야 했다. 이를테면 작업반장은 마을의 보스다.
요즘 들어 북한의 작업반장들은 농장 일에 별로 머리를 내밀지 않는다. 대신 비료, 농기계 연료, 비닐박막 등 영농자재를 구한답시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읍내를 돌아다닌다. 능력이 좋은 작업반장이 영농자재도 많이 구해온다.
작업반장의 능력은 딴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통은 가을에 눈치껏 딴 주머니를 얼마나 찼는지에 달렸다. 비료나 연료 역시 숨겨둔 알곡을 내다 팔아 구해오기 때문이다. 물론 분조장들도 이런 일을 하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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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알곡을 어떤 가격에 파는지는 공개되지 않는다. 불법적으로 숨겨놓은 알곡이기 때문이다. 비리의 소지가 크다보니 작업반장들의 집은 점점 더 부유해진다. 이들은 자기 집 땔감도 농민들을 시켜 해오도록 한다.
물론 작업반장을 오래하려면 수하 농민들의 신망을 얻어야 하고, 윗간부들에게는 뇌물을 주기적으로 바쳐야 한다. 북한 농민들은 대대로 농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분의 굴레를 쓰고 있다. 농장원의 자녀 열 명 중 한두 명이 겨우 농촌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니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마을 구성원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작업반장을 오래하려면 이런 점도 고려해 꾸준히 ‘덕’을 쌓아야 한다.
좌절된 ‘포전담당제’
남쪽에서 비료가 몇 십만t씩 지원되던 시절에는 이 비료를 놓고 치열한 뇌물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농장 간부들은 비료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상급 간부들에게 뇌물을 들고 가 ‘사업’을 했다. 적잖은 비료가 장마당에 흘러나와 개인의 텃밭에 투입할 비료로 팔렸다.
하지만 남쪽의 비료 지원이 중단된 이후부터 중국산 비료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지난해 6월에도 서해의 남포나 동해의 청진항에 중국 비료가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올해는 비료 수급 상황이 지난해에 훨씬 못 미친다고 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요소비료 1㎏을 옥수수 1㎏과 맞바꿀 수 있었으나 올해는 옥수수 3㎏으로 올랐다고 한다. 물론 비료는 통제품으로 장마당에서 공공연하게 거래할 수 없다. 하지만 사려고 맘먹으면 안면을 통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것이 비료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어떻게든 비료를 빼돌려 자기 텃밭에 가져가려고 한다. 농장 작물은 가을이 되면 군인의 것이 되지만, 개인 텃밭은 온전히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다. 농장 밭에선 1정보(3000평)당 쌀이든 옥수수든 2~3t씩 수확하기 힘들지만, 개인 텃밭은 그보다 두세 배 많은 소출을 낸다.
북한의 개혁개방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것이 농촌의 토지 분배다. 중국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가족 단위 생산책임제도를 먼저 도입했기 때문이다. 북한도 2004년 협동농장에서 중국을 모방한 개혁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다만 가족 단위가 아니라 10~20명으로 구성된 분조를 2~5가구로 보다 소규모로 쪼개는 방식으로 일부 지역에서 시험했다. ‘포전담당제’로 불린 이 제도는 사실상 소규모 가족단위 영농제다.
포전담당제는 개혁주의적인 마인드가 강했던 박봉주 당시 총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안해 허락을 받았다. 박 전 총리는 벼 생산 중심의 황해도와 옥수수 생산 중심의 함경도에서 30여 개의 협동농장을 선택해 포전담당제를 도입시켰다.
그리고 토지사용료와 생산비용, 군량미 등의 명목으로 국가에 납부하는 수량을 제외한 나머지 생산물은 전부 생산자가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런 조치는 일선 협동농장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실 1990년대 후반에도 몇몇 관리위원장이 농민들에게 농장 땅의 일부를 텃밭으로 나눠줬던 사례가 있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농민들이 굶어죽는 사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부 관리위원장이 국가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집행한 일이었다. 이들은 농민들에겐 ‘용기 있는 간부’로 환영 받았지만 당국의 눈에는 ‘일시적 위기 앞에 사회주의적 원칙을 버리고 타협한 위험분자’로 비쳤다. 결국 이들은 숙청되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
그랬던 북한에서 소규모 가족단위 생산제도가 도입됐으니 이 소식은 즉각 전국에 소문으로 퍼져갔다. 사람들은 “우리도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나봐” 하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2004년 가을 시범단위의 알곡 생산량은 전년의 150~200%로 늘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다음해 전국으로 일반화되기는커녕 시범 농장 자체가 사라졌다. 집단주의적 경제시스템을 흔드는 박 전 총리의 개혁 조치를 못마땅하게 여긴 노동당 원로들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들은 150~200%의 증산 효과가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해당 지역 간부들이 포전담당제를 성공적인 영농방법으로 만들기 위해 영농자재와 비료 등을 우선적으로 은밀하게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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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총리보다 큰 권력을 갖고 개혁을 추진했던 박 전 총리는 결국 2년 뒤 실각했다. 박 전 총리의 좌절을 목격한 북한 간부들이 이후에 또다시 농업 개혁을 언급할 리는 만무한 일이다.
지난해 12월 단행된 화폐개혁은 농민들의 팔자를 크게 바꿀 것처럼 보였다. 국가가 화폐가치를 100대 1로 낮추면서도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주는 월급이나 분배를 기존 액수 그대로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매달 월급을 받는 노동자와 달리 농민은 대개 12월에 진행하는 결산분배에서 1년치 현금을 한꺼번에 받는다. 기존에 10만원을 받던 농민이 지난해 12월에도 10만원을 받았다면, 이는 화폐개혁 전 가치로 1000만원을 받은 셈이 된다.
갑자기 뭉칫돈을 손에 쥐게 된 농민들은 화폐개혁으로 상품의 국정가격이 기존의 100분의 1로 재조정된 국영상점에 몰려가 TV 같은 비싼 가전제품을 사들였고 노동자들은 이를 부럽게 쳐다만 봤다.
하지만 화폐개혁이 있은 지 반 년이 지난 6월 초 현재 북한에서 화폐개혁 전 2000원 정도 했던 쌀 1㎏이 대략 350~500원에 거래되고 있다. 구권과 신권을 100대 1로 교환해주었던 화폐개혁의 효과가 인플레이션 때문에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화폐개혁 직후 신권의 가치가 가장 높았을 때 현물을 구매했던 농민들은 덕분에 크게 이득을 보았다. 이렇게 농민들이 가장 크게 덕을 본 정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없었다.
겨울이면 북한의 농촌 마을마다 도시에서 온 행상인들이 각종 물건이 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농민들은 한 해 농사를 지어 식량과 약간의 현금을 분배받는다. 하지만 ‘밭을 메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옷, 신발도 사고 자녀들 학용품도 사고, 기름이나 조미료 같은 것도 사야 한다. 농민들은 얼마 받지도 못한 식량을 퍼내 행상인들이 메고 온 물건과 교환했다. 가뜩이나 영세한 농민들이 더 울 수밖에 없는 생활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뙈기밭에 매달리는 농민들
그나마 농민들이 굶어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산을 벗겨내 일군 소토지 덕분이다. 소토지를 뙈기밭이라고도 부른다. 농민 중에 소토지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장 일에만 매달려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토지를 몇 평 갖고 있는지에 따라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결정된다.
북·중 국경 일대에서 북한 쪽을 건너다보면 산 정상까지 모두 밭으로 개간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전부 개인들이 일군 소토지인데 북한 어느 지역에서나 상황은 비슷하다. 이런 소토지도 남보다 먼저 산을 개간한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고, 뒤늦게 뛰어든 사람에게는 개간할 임야조차 남아있지 않다.
소토지를 많이 일군 농민들은 삯일꾼까지 쓸 정도다. 소토지 선점 경쟁에서 뒤처진 농민들은 5~6월 춘궁기에 양곡을 꾸어먹고 대신 품을 팔아 빚을 갚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억지로 농장 일에 동원된 농민들의 머릿속은 온통 소토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 10여 년간 국제기구들이 추정한 북한의 알곡 생산량이 실제 필요량보다 수백 만t씩 부족함에도 북한에서 대량 아사(餓死)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던 비결(?)은 바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토지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던 데 있다.
가을철 북한 농민들은 거의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 소토지에 도둑이 들까봐 산에 움막을 치고 경비를 선다. 농장 밭 경비에 동원되기도 하지만, 이런 날은 농작물을 훔치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다. 낮에는 지원노력들을 감독하면서 얼렁뚱땅 시간을 보내면서 틈나는 대로 소토지에 달려가 자기 농작물을 수확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농민들은 북한 전역에 가득하다. 일한 만큼 분배 받는 협동농장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다.
사회주의 정신이 사라지고 개혁 의지마저 잃은 북한의 협동농장과 곤궁한 농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
북한 농촌 마을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호 중 하나다. 1987년 등장한 이 구호는 협동농장 포전(圃田·구획을 나눠놓은 경작지)을 개인 텃밭처럼 정성을 다해 가꾸라는 뜻이다. 북한의 다른 정치구호들과 전혀 달리 이 구호는 나오자마자 주민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인기’ 구호가 됐다. 물론 그 이유는 당국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가을이 되면 농장원들은 저마다 농장 밭에서 벼나 옥수수를 훔쳐가기에 바쁘다. 한밤중에 훔친 곡식을 배낭에 담아 메고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라고 하지 않았어. 주인인 내가 좀 조절(도둑질)해 오지 않으면 남이 다 가져가잖아” 하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군인들도 농장 밭을 털다 잡히면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라고 하지 않았시오. 왜 그래요” 하며 능글맞은 표정을 짓기 일쑤다.
주인이 없어진 북한의 사회주의 협동농장, 그 현실을 해부해본다.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5월31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북한 당국이 탈북자 가족을 색출하기 위해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민들에게 새로운 공민증(주민등록증)을 발급하기 위해 가구조사를 벌이면서 행방불명된 사람들도 함께 조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세대별 가구조사도 5월10일부터는 중단됐다. 사람들이 모두 농촌에 가 있어 정확한 조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농촌동원기간에는 곳곳에 단속초소가 설치돼 길 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왜 농촌에 내려가지 않았는지 따져 묻는다. 합당한 사유가 없으면 즉시 농촌에 실려 간다. 그렇기 때문에 농촌동원기간에는 도시가 한산해지게 마련이다.
북한에는 전국적으로 3000여 개의 협동농장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 농장들에 속해 있는 농민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0% 정도로 추산된다. 하지만 모내기철에는 농민들보다 훨씬 많은 도시 사람이 농촌으로 내려간다. 농장별로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 명씩 지원을 나간다.
대학생은 물론이요 중학교 3학년 이상은 모두 농촌으로 가 합숙하면서 일을 도와야 한다. 중3이면 만 13세 정도다. 농촌학교에선 10세만 돼도 ‘강냉이 영양단지 이식’에 동원된다.
영양단지는 고 김일성 주석이 창시했다는 주체농법의 일환이다. 영양물질이 많이 섞인 흙덩어리를 만든 뒤, 여기에 강냉이 씨앗을 심고 어느 정도 자라면 흙덩어리째 밭에 옮겨 심는 것이다. 빨리 고르게 튼튼한 모를 키우고 씨앗을 절약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손이 많이 가는 까닭에 효율성 측면에선 상당히 뒤떨어진 농법이다.
북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우스갯소리로 영양단지를 ‘학생단지’로, 농민은 ‘지도농민’으로 부르고 있다. 영양단지를 밭에 옮겨 심는 일을 거의 다 학생들이 하고, 농민들은 그저 노력동원 나온 도시 사람들을 감독, 지도만 한다는 뜻에서다.
영양단지 이식은 대개 5월 중순이면 끝나지만 모내기는 6월10일을 전후로 마무리된다. 가을 추수는 9월20일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강냉이를 수확하고 벼는 10월10일까지 수확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제 기일을 지킬 때가 많진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1년에 두 차례씩 농촌에 동원을 나가다보니 웬만한 북한 주민들은 다 농사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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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낫으로 추수
모내기와 추수시기에 도시 사람들이 동원되는 이유는 농촌의 기계화 사정이 상당히 열악하기 때문이다. 기계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때는 1980년대 중반경이었다.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치면서 북한 농촌은 1940~50년대로 회귀했다. 농기계가 있어도 연료가 없어 무용지물이고, 기계가 가동되지 않으니 부속이 녹슬어버리고, 공장이 멈춰서다보니 새 부속도 구하기 힘든 악순환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모내기는 옛적부터 해오던 대로 사람들이 논에 죽 늘어서서 모를 꽂는 식으로 이뤄진다. 벼 추수도 수확기는 꿈도 못 꾸고 낫으로 베야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협동농장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시사람들을 불러다 농사짓던 일은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농사는 농민들이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협동농장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농민들의 근로의욕이 사라졌고, 그 결과 도시에서 막대한 인력이 투입됐음에도 농장의 생산량은 시원치 않다. 농민이나 지원노(동)력 모두 주인의식과는 거리가 먼 탓이다.
북한은 정전(停戰) 직후인 1953년 8월부터 1958년 8월까지 개인들의 토지를 모두 합쳐 협동농장을 만들었다. 오늘날 협동농장은 관리위원회 산하에 여러 개의 작업반이 있고, 작업반 아래 다시 분조가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한 개 협동농장에는 지역에 따라 5~20여 개의 작업반이 있다. 한 개 작업반은 5~8개의 분조로 구성되고, 분조의 인원수는 대개 10~20명 정도다. 그러니 한 개 작업반에 속한 인원은 50~150명쯤 된다. 작업반은 다시 일에 따라 농산반, 남새반, 축산반, 과수반, 기계화반 하는 식으로 나눠진다. 군대가 보병, 포병, 기계화병, 공병 등으로 세분화돼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중 지원노력들이 주로 가는 곳은 농산반이다.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수산반, 임업반, 누에반, 주택보수반과 같은 작업 단위가 있는 농장들도 있다.
군 사령관에 비유할 수 있는 농장의 총책임자는 관리위원장이고, 정치위원 역할은 리당비서, 참모장 역할은 기사장이 수행한다. 농장의 실권자는 인물에 따라 관리위원장이 될 수도 있고 리당비서가 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사장이 쥐락펴락 하는 곳도 있다.
협동농장원들은 일한 양을 공수로 따져서 평가받는다. 북한에는 그날 한 노동의 성격과 양에 따라 몇 공수를 줘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자세히 마련돼 있다.
실례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는 농촌에서도 가장 힘든 작업에 속하는데 150평을 갈면 1공수를 주는 식이다. 농촌에서 가장 많은 작업 중 하나인 김매기는 면적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하루에 보통 1~1.2공수를 받는다.
공수를 매기는 사람은 말단 책임자인 분조장이다. 이렇게 공수를 모아보면 1년에 농장원당 대략 300공수 정도를 받는다. 오래된 은어이긴 하지만 북한에선 몸이 튼튼하고 일 잘하는 농촌여자를 가리켜 ‘600공수’라고 한다. 600공수는 몸도 아프지 않고 남보다 2배, 3배씩 일해야 받을 수 있다. 도시에서 온 지원노력도 그날그날의 실적에 따라 분조장이 매겨준 공수를 가지고 일을 잘했나 못했나를 평가받는다.
‘600공수 여자’
북한의 협동농장에서는 탈곡까지 끝난 12월 말경에 결산분배라는 것을 한다. 그해 농장이 생산한 전체 알곡 생산량 중 국가에 내는 것을 뺀 나머지 알곡과 생산물을 국가에서 수매하거나 도시에 판매해 얻은 현금수입, 이 두 가지를 농장 소속 전체 농장원이 받은 공수로 나눈다. 그러면 1공수당 알곡은 몇 kg, 돈은 얼마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다시 각 농장원이 1년간 모은 공수만큼 곱해 알곡과 현금으로 지급한다.
농장이 국가계획을 초과 수행하면 잉여 몫이 커져 농민들 몫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나 계획에 미달하면 쪽박을 찬다. 이 때문에 협동농장이 생겨난 초기에는 농장 간에 알곡 및 현금 분배에 많은 차이가 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가계획을 집행하는 농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분배에 기대를 거는 농민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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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들이 국가계획에 미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농민들의 근로의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 풍작을 거둬봤자 놀고먹던 간부들이 이래저래 다 빼돌려 자기 배만 채우니, 농민들로서는 일할 의욕이 생겨날 수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국가계획 과제가 너무 높게 하달되기 때문이다. 농장의 정보당 쌀 생산량이 2t에 불과한데 국가에선 4t으로 정해주는 식이다. 이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계획을 달성할 수가 없다. 국가계획이 높게 내려오는 것은 지역 및 농장 간부들의 책임이 크다. 추궁이 두려워 상부에 생산량을 과장해 보고하는 바람에 농민들만 애꿎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선군정치가 시작되면서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이때부터 가을이면 군인들이 총을 메고 농촌에 와 군량미를 걷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군량미는 국가계획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농장들이 늘 국가계획에 미달하자 당국은 군부대별로 농장을 지정해주고는 필요한 군량미를 직접 조달해가도록 한다. 군량미 챙기기에 혈안이 된 군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택수색까지 벌여 양곡을 걷어가고 있다.
이런 일은 특히 곡창지대인 황해도 농촌에서 심하다. 고난의 행군 초기에는 황해도 쪽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요즘은 풀 캐 먹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 가장 많다고 한다. 특히 이곳 농촌은 규율조차 엄격해 개인 텃밭 일을 할 시간조차 내기 쉽지 않다.
과거에는 계획에 미달한 농장에 한해 국가가 외상으로 농민에게 배급해주고, 다음해 알곡 생산량에서 이를 공제해줬다. 그러나 이마저 국가에서 배급해주던 시절의 얘기고, 이제는 이런 것도 없다.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농촌은 점점 황폐해지고 있으며,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봤자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먹어야 농사지을 힘이 있는 법이므로 각 농장은 가을에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양곡을 분배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전력난 때문에 12월 결산분배 때까지 탈곡을 못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벼나 옥수수 이삭째로 배급을 주는 경우가 많다. 북한 주민들은 겨우내 벼나 옥수수를 절구로 찧어 먹느라 고달프다.
달갑지 않은 ‘지원노력’
벼나 옥수수는 수분 함량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농민들이 받는 몫이 크게 차이가 난다. 양곡 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는 수분 감모를 최소한으로 계산해준다. 이렇게 되면 장부상으론 100㎏을 받은 것으로 돼 있어도 이를 말려보면 실제로는 60~70㎏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농민들은 장부상으로는 식량을 많이 받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봄까지 견디기가 힘들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에는 모내기철이 되면 농장마다 지원노력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가 지원노력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배급제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엔 농촌지원 노력에 한해 배급을 줬지만, 이제는 지원노력을 먹이는 부담도 농장이 상당부분 걸머져야 한다. 풀뿌리를 캐 먹는 농민이 많은데, 지원노력들에게 나눠줄 식량이 있을 리 만무하다.
물론 지원노력들은 일차적으로 식량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요즘 국가에서 하는 일이라곤 그냥 사람들을 농촌으로 내모는 게 전부다. 도시 사람들 입장에선 자기가 장사해 번 양곡을 메고 농촌에 내려가 한 달 이상 무보수 노동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일단 농촌에 가면 모자란 식량이나 부식물을 현지에 손을 내밀어 해결할 수밖에 없다.
농장 입장에선 농사를 망쳐도 좋으니 지원노력이 오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어차피 국가계획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 뻔해 추수 후에 받는 몫이 거의 없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부들은 정해진 시일 내에 모내기나 추수를 마치지 못하면 추궁을 받기 때문에 이런 반발을 누르고 지원노력을 보내달라고 한다.
가을마다 지원노력들은 곡식을 훔쳐가는 데 열을 올린다. 농민이 훔쳐가고, 지원노력이 훔쳐가 상당히 많은 곡물이 유실된다. 이를 막기 위해 북한은 가을마다 군인들에게 실탄을 지급해가며 포전 경비를 서도록 한다. 그래서 농작물 도둑질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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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추수기에 어떻게든 훔치지 못하면 내년 봄까지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훔치는 쪽도 필사적이다. 농민들 입장에선 지원노력들까지 도둑질에 합세하면 자기 몫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들이 더구나 반갑지가 않다.
훔치는 방법도 정말 다양하다. 대담한 농민은 아예 밭에 구덩이를 파고 벼이삭이나 옥수수를 몇 t씩 묻어버린다. 그리고 군인들이 가택수색까지 끝내고 철수한 다음에야 천천히 꺼내 집으로 나른다.
옷 안에 큰 주머니를 만들어 붙인 뒤 탈곡 과정에 몰래 숨겨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점심 저녁 먹으러 드나들 때마다 몇 ㎏씩 훔쳐도 상당한 양이 된다. 밤에 배낭을 메고 논에 나가 볏단에서 벼이삭만 잘라오는 사람도 상당수다. 서두에 썼듯 ‘농장 포전이 나의 포전’이 되는 순간이다.
물론 농장 포전을 나의 포전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농민뿐만이 아니다. 대도시 주변 농촌에는 남새(채소) 작업반이 상당히 많다. 도시에서 소비하는 각종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다.
가을마다 훔치고 붙잡고…
이들 남새 작업반의 가장 큰 임무는 김장철에 도시에서 소비되는 배추, 무, 고추 등을 공급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농민들이 남새 농사를 지으면 도시에서 기관이나 공장별로 내려와 인원수만큼 배추나 무를 실어갔다. 물론 이런 배분에서도 남새 농사가 가장 잘된 포전 순으로 노동당, 보위부, 보안부, 검찰, 행정위원회 등 권력기관들이 차지했고, 농사가 잘 안된 포전은 힘없는 노동자 몫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1990년대 북한 경제사정이 어려워지고 비료 공급 상황이 열악해지면서 툭하면 남새농사를 망쳤다. 농민들도 잘하든 못하든 자기 먹는 것과 별 상관없는 남새농사에 매달리지 않았고 대신 개인 텃밭 관리에 열을 올렸다. 당국이 아무리 농민들을 닦달해도 “비료가 없어 방법이 없다” 또는 “식량이 없어 배고파 일을 못 하겠다” 등의 구실을 대기 일쑤였다. 결국 그 손해는 도시 주민들이 볼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 집중돼 살고 있는 간부들조차 김장배추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그러자 1990년대 중반부터 아예 농장 포전을 기관, 기업소, 군부대별로 나눠주고 가을 김장용 남새를 해결하는 방법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멈춰선 공장에서 딱히 할 일이 없는 노동자들은 자기 공장에 할당된 농장 밭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 비료도 자신들이 구입해야 했다. 밭을 아예 도급 받았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든 못되든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가을 밭 경비를 서는 것도 모두 노동자들의 몫이 되었다. 군부대들도 공장과 마찬가지로 농사부터 경비, 운송까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권력기관들은 포전을 가꾸는 흉내만 낼 뿐이다. 이들 몫의 포전은 공장, 기업소에 땅을 나눠줘 농사 부담이 줄어든 농민들이 떠맡았다. 권력기관들의 밭에는 비료도 잘 공급됐다.
북한의 현실에서 이런 식의 땅 떼어주기는 모두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것이라 하겠다. 권력기관은 자기 몫의 밭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면 그만이고, 농민들은 농장일이 줄어든 덕분에 텃밭 관리를 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많아져 좋았다. 흉작이 많이 든 밭만 할당받은 힘없는 공장, 기업소, 군부대들은 넘쳐나는 유휴 노동력을 활용해 열심히 농사지으면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은 수확을 거둘 수 있어 나름대로 만족했다.
한편 수많은 아사자를 초래했던 고난의 행군은 북한 농촌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이제는 농촌에 ‘지주’가 생겨나고 있다. 북한 농촌의 지주는 일종의 작업반장이다.
수하에 10~20명을 거느린 분조장보다 이런 분조를 여러 개 관할하는 작업반장의 권한이 더 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북한 농장은 부락별로 작업반이 구성되기 때문에, 작업반장은 그 부락의 장(長)이나 다름없다.
국가에서 농사를 위해 대주는 것이 일절 없으니 농사를 어떻게 짓는가 하는 것은 농장 간부들의 수완에 달렸다. 또 식량이 없어 자기 부락의 농민이 굶주리면 대개 작업반장이 이들을 돌봐야 했다. 이를테면 작업반장은 마을의 보스다.
요즘 들어 북한의 작업반장들은 농장 일에 별로 머리를 내밀지 않는다. 대신 비료, 농기계 연료, 비닐박막 등 영농자재를 구한답시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읍내를 돌아다닌다. 능력이 좋은 작업반장이 영농자재도 많이 구해온다.
작업반장의 능력은 딴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통은 가을에 눈치껏 딴 주머니를 얼마나 찼는지에 달렸다. 비료나 연료 역시 숨겨둔 알곡을 내다 팔아 구해오기 때문이다. 물론 분조장들도 이런 일을 하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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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알곡을 어떤 가격에 파는지는 공개되지 않는다. 불법적으로 숨겨놓은 알곡이기 때문이다. 비리의 소지가 크다보니 작업반장들의 집은 점점 더 부유해진다. 이들은 자기 집 땔감도 농민들을 시켜 해오도록 한다.
물론 작업반장을 오래하려면 수하 농민들의 신망을 얻어야 하고, 윗간부들에게는 뇌물을 주기적으로 바쳐야 한다. 북한 농민들은 대대로 농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분의 굴레를 쓰고 있다. 농장원의 자녀 열 명 중 한두 명이 겨우 농촌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니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마을 구성원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작업반장을 오래하려면 이런 점도 고려해 꾸준히 ‘덕’을 쌓아야 한다.
좌절된 ‘포전담당제’
남쪽에서 비료가 몇 십만t씩 지원되던 시절에는 이 비료를 놓고 치열한 뇌물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농장 간부들은 비료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상급 간부들에게 뇌물을 들고 가 ‘사업’을 했다. 적잖은 비료가 장마당에 흘러나와 개인의 텃밭에 투입할 비료로 팔렸다.
하지만 남쪽의 비료 지원이 중단된 이후부터 중국산 비료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지난해 6월에도 서해의 남포나 동해의 청진항에 중국 비료가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올해는 비료 수급 상황이 지난해에 훨씬 못 미친다고 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요소비료 1㎏을 옥수수 1㎏과 맞바꿀 수 있었으나 올해는 옥수수 3㎏으로 올랐다고 한다. 물론 비료는 통제품으로 장마당에서 공공연하게 거래할 수 없다. 하지만 사려고 맘먹으면 안면을 통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것이 비료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어떻게든 비료를 빼돌려 자기 텃밭에 가져가려고 한다. 농장 작물은 가을이 되면 군인의 것이 되지만, 개인 텃밭은 온전히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다. 농장 밭에선 1정보(3000평)당 쌀이든 옥수수든 2~3t씩 수확하기 힘들지만, 개인 텃밭은 그보다 두세 배 많은 소출을 낸다.
북한의 개혁개방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것이 농촌의 토지 분배다. 중국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가족 단위 생산책임제도를 먼저 도입했기 때문이다. 북한도 2004년 협동농장에서 중국을 모방한 개혁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다만 가족 단위가 아니라 10~20명으로 구성된 분조를 2~5가구로 보다 소규모로 쪼개는 방식으로 일부 지역에서 시험했다. ‘포전담당제’로 불린 이 제도는 사실상 소규모 가족단위 영농제다.
포전담당제는 개혁주의적인 마인드가 강했던 박봉주 당시 총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안해 허락을 받았다. 박 전 총리는 벼 생산 중심의 황해도와 옥수수 생산 중심의 함경도에서 30여 개의 협동농장을 선택해 포전담당제를 도입시켰다.
그리고 토지사용료와 생산비용, 군량미 등의 명목으로 국가에 납부하는 수량을 제외한 나머지 생산물은 전부 생산자가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런 조치는 일선 협동농장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실 1990년대 후반에도 몇몇 관리위원장이 농민들에게 농장 땅의 일부를 텃밭으로 나눠줬던 사례가 있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농민들이 굶어죽는 사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부 관리위원장이 국가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집행한 일이었다. 이들은 농민들에겐 ‘용기 있는 간부’로 환영 받았지만 당국의 눈에는 ‘일시적 위기 앞에 사회주의적 원칙을 버리고 타협한 위험분자’로 비쳤다. 결국 이들은 숙청되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
그랬던 북한에서 소규모 가족단위 생산제도가 도입됐으니 이 소식은 즉각 전국에 소문으로 퍼져갔다. 사람들은 “우리도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나봐” 하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2004년 가을 시범단위의 알곡 생산량은 전년의 150~200%로 늘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다음해 전국으로 일반화되기는커녕 시범 농장 자체가 사라졌다. 집단주의적 경제시스템을 흔드는 박 전 총리의 개혁 조치를 못마땅하게 여긴 노동당 원로들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들은 150~200%의 증산 효과가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해당 지역 간부들이 포전담당제를 성공적인 영농방법으로 만들기 위해 영농자재와 비료 등을 우선적으로 은밀하게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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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총리보다 큰 권력을 갖고 개혁을 추진했던 박 전 총리는 결국 2년 뒤 실각했다. 박 전 총리의 좌절을 목격한 북한 간부들이 이후에 또다시 농업 개혁을 언급할 리는 만무한 일이다.
지난해 12월 단행된 화폐개혁은 농민들의 팔자를 크게 바꿀 것처럼 보였다. 국가가 화폐가치를 100대 1로 낮추면서도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주는 월급이나 분배를 기존 액수 그대로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매달 월급을 받는 노동자와 달리 농민은 대개 12월에 진행하는 결산분배에서 1년치 현금을 한꺼번에 받는다. 기존에 10만원을 받던 농민이 지난해 12월에도 10만원을 받았다면, 이는 화폐개혁 전 가치로 1000만원을 받은 셈이 된다.
갑자기 뭉칫돈을 손에 쥐게 된 농민들은 화폐개혁으로 상품의 국정가격이 기존의 100분의 1로 재조정된 국영상점에 몰려가 TV 같은 비싼 가전제품을 사들였고 노동자들은 이를 부럽게 쳐다만 봤다.
하지만 화폐개혁이 있은 지 반 년이 지난 6월 초 현재 북한에서 화폐개혁 전 2000원 정도 했던 쌀 1㎏이 대략 350~500원에 거래되고 있다. 구권과 신권을 100대 1로 교환해주었던 화폐개혁의 효과가 인플레이션 때문에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화폐개혁 직후 신권의 가치가 가장 높았을 때 현물을 구매했던 농민들은 덕분에 크게 이득을 보았다. 이렇게 농민들이 가장 크게 덕을 본 정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없었다.
겨울이면 북한의 농촌 마을마다 도시에서 온 행상인들이 각종 물건이 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농민들은 한 해 농사를 지어 식량과 약간의 현금을 분배받는다. 하지만 ‘밭을 메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옷, 신발도 사고 자녀들 학용품도 사고, 기름이나 조미료 같은 것도 사야 한다. 농민들은 얼마 받지도 못한 식량을 퍼내 행상인들이 메고 온 물건과 교환했다. 가뜩이나 영세한 농민들이 더 울 수밖에 없는 생활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뙈기밭에 매달리는 농민들
그나마 농민들이 굶어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산을 벗겨내 일군 소토지 덕분이다. 소토지를 뙈기밭이라고도 부른다. 농민 중에 소토지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장 일에만 매달려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토지를 몇 평 갖고 있는지에 따라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결정된다.
북·중 국경 일대에서 북한 쪽을 건너다보면 산 정상까지 모두 밭으로 개간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전부 개인들이 일군 소토지인데 북한 어느 지역에서나 상황은 비슷하다. 이런 소토지도 남보다 먼저 산을 개간한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고, 뒤늦게 뛰어든 사람에게는 개간할 임야조차 남아있지 않다.
소토지를 많이 일군 농민들은 삯일꾼까지 쓸 정도다. 소토지 선점 경쟁에서 뒤처진 농민들은 5~6월 춘궁기에 양곡을 꾸어먹고 대신 품을 팔아 빚을 갚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억지로 농장 일에 동원된 농민들의 머릿속은 온통 소토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 10여 년간 국제기구들이 추정한 북한의 알곡 생산량이 실제 필요량보다 수백 만t씩 부족함에도 북한에서 대량 아사(餓死)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던 비결(?)은 바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토지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던 데 있다.
가을철 북한 농민들은 거의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 소토지에 도둑이 들까봐 산에 움막을 치고 경비를 선다. 농장 밭 경비에 동원되기도 하지만, 이런 날은 농작물을 훔치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다. 낮에는 지원노력들을 감독하면서 얼렁뚱땅 시간을 보내면서 틈나는 대로 소토지에 달려가 자기 농작물을 수확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농민들은 북한 전역에 가득하다. 일한 만큼 분배 받는 협동농장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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