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카나다 김수해선생의 삶은 분단역사 > 통일 | 민족통신
[탐방]카나다 김수해선생의 삶은 분단역사
작성자 편집실 18-01-25 16:49 조회443회 댓글2건
=========
민족통신 노길남편집인은 카나다의 몬트리얼에 거주하는 김수해선생을 심방했다. 그와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김수해선생의 삶은 곧 일제 식민지역사이며 그리고 분단의 역사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또한 기자는 그의 어머니 묘소를 비롯 일요일 교회에 함께 갔고, 교인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졌다. 이곳에서도<평창올림픽이 평화제전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염원하면서 국내외 극우반평화세력의 준동에 분노하는 동포들도 있어 국내외 촛불민심의 한 부분을 느끼는 계기도 되었다. 카나다에서의 귀중한 시간들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사진]카나다 몬트리얼의 김수해 선생
[탐방]
카나다 김수해선생의 삶은 분단역사
[사진]몬트리얼서 식품점을 운영하는 김수해선생과 대담하는 민족통신 기자
[몬트리얼=민족통신 노길남편집인] 카나다 김수해선생의 삶은 분단역사 그 자체이다.
그래서 토요일인 1월20일 오후6시께 토론토에서 도착하여 이날밤 8시30분에 버스를 타고7시간걸려 1월21일 새벽3시께 몬트리얼에 도착했다.김수해선생이 그 새벽시간에 버스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숨자고 일요일인 21일 오후1시께 교회로 가자고 제언하며 가는길에 어머니 묘소에 잠간들려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좋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도착하는 날 새벽부터 시작된 대화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한국에서 당했던 억울한 이야기 등은 장편소설 서너 편을 읽는 내용들이었다. 다시말하면 김수해 선생에 관한 가정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일제 식민지역사>였고, 이어서 그 삶은 <분단역사>, 그 자체였다.
김수해선생은 일본식민지 말기인 1943년 6월19일 중국 땅, 샹하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구선생과 한독당에서 활동하기도 했기 때문에 6~7살 어린시절에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 줄때 서너차례 백범 김구선생을 본 기억이 난다고 그는 회고하는 한편 그의 누이가 그 연회장 행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기억도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할 무렵, 어머니 묘소에 도착했다.김수해선생과 기자는 무릎까지 올라 온 눈속을 밟으며 그 묘비가 있는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권사> 김제례라고 쓴 묘비(1907.1.17~1994.6.27) 앞에 서 잠시 묵도를 하고 다시 우리나라식으로 하는 절을 하며 두껍게 쌓인 눈속에 무릎꿇고 엎드려 인사를 한다. 그리고 몬트리얼 도심지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산언덕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어머니에 관한 이모저모
[사진]두아들과 부인, 어머니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우리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대화를 주고받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되었다. 방금 들렸던 묘소의 김제례 어머니는 김수해 어머니가 아니고 이복남매중 둘째 누이(평양거주 성악가수로 활약해 오다가 11년전 별세)의 생모라는 것이다.
그래서 재차 되물었다. 그러면 김수해선생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는지 질문하자 그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긴 숨을 내쉬다가 “생사를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형제자매는 모두 1남3녀인데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김수해선생은 자신은 막내라고 설명하면서 자기와 셋째누이는 한배에서 태어났고, 첫째와 둘째 누이도 각각 생모가 다르다는 것이다. “4년전 세상을 떠난 큰누이는 우리집안의 첫어머니 자식인데 서울과 도꾜에서 살다가 운명했고, 오늘 참배한 어머니는 둘째 어머니(김제례)로서 북녘에서 성악가수로 활동하다가 평양에서 2007년 별세한 둘째 누이의 생모이고 그리고 세째누이와 김수해선생의 생모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중국계 어머니라고 말한다.
자신과 바로 윗 누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필요하여 대를 잇는 목적로 아들을 낳으려고 샹하이에 거주할 때 집주인 딸과 인연이 되어 낳은 자식들이라고 말한다.
기자는 이야기들을 듣는 순단 충격적이었다. 더군다나 이 같은 가정사에 대한 내용을 수십년이 지난 시기에도 모르고 있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김수해선생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하였을까. 이 같은 내용을 입밖에 꺼내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이것이 우리민족의 비극적 분단사라는 것을 인식했는지 긴긴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대 진실을 밝혀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평양 누이의 조카들이 같은 할머니의 뿌리고 알아 왔는데 이것을 알면 어떻게 할까라고 한편으로는 걱정하기도 했다.
기자는 이 사실은 분단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에 이복형제자매들도 그 자식들도 진실을 아는게 좋지 않느냐고 위로하면서 이런 비극사도 분단시대가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잠시 충격은 있겠지만 그 진실을 알아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고 말해 주기도 했다.
*<조국통일상>받은 아버지에 관한 이모저모
[사진]부친이 남녘에서 운명한지 57만에 받은 조국통일상
김수해선생의 부친, 김민홍선생은 전라남도 강진출생으로 1930년대 하반기 일제식민지 시기에는 중국에서 <백중고 제약회사>를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뒷돈을 대주는 역할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 있다가 서울에 들어와서는 <풍국제분>의 사장으로 그 당시 재벌로 평판이 있었던 인물이다.전쟁시기에는 이승만정권하의 합창의장이었던 채병덕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겼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일제, 전쟁시기를 거치면서 김수해선생의 부친은 한때는 김구선생을 도와왔지만 그가 반민족 무리들인 안두희 일당에게 암살당하고 여운형선생까지 괴한들에게 살해당하자 그 이후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자기의 길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길은 백범 김구선생이 택한 길이었다.
백범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미국이 지원한 소수의 이승만세력을 제외한 남,북, 해외동포 대표들 모두가 함께한 자리에서 크나 큰 감동과 감명을 받고 회의가 끝날 무렵 그가 소지하여 온 중국임시정부 시절 옥쇄, 즉 국쇄를 김일성주석께 드렸다. 그러나 김주석은 그것은 선생님께서 기념으로 소지하시라고 사양하면서 “나는 우리 인민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평양의 남북연석회의는 우리민족사에 획기적인 행사였다고 해내외 동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해 왔다.
김수해선생의 부친 김민홍선생도 김구선생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남녘의 대구형무소에서 1959년 12월18일 이승만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북녘에서는 그를 열사로 평가하여 <열사증>을 수여하는 한편 사후 58년만인 2016년에는 <조국통일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자본가 출신으로 <열사증>을 받은것도 처음이었지만 자본가 출신으로 <조국통일상>을 받은 인물도 아마도 최초일것이다.
그의 부친은 마치도 <아름다운 부자>로 알려져 온 이종만선생과 비슷한 점도 있다. 이종만 선생의 이야기는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라는 도서가 2010년 6월15일 그의 딸 이남순에 의해 <정신세계원>에서 출판되어 화제를 모아왔는데 그 책의 주인공인 아버지도 그 당시 남녘의 대재벌이었다. 한국정권에서 그의 재산을 압수하려고 하자 그는 월북을 결심하고 북으로 가서 그의 재산을 사회공익에 써달라고 헌납한 그야말로 아름다운 재벌중 한분인데 김수해선생의 부친도 이분처럼 자본가계급에 속하는 인물이었다.이종만 선생은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였다가 그의 꿈인 <대동사회>건설과 조국통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대로 북녘땅에 머물러 활동하다가 1977년 서거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김수해선생의 가문은 일제시대때도 그리고 분단시대에 와서도 애국자집안이었다.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으로 우리나라 전국이 요란하던 그 시대에도 그의 할머니의 부친인 김경업, 즉 증조부께서 전라남도 지역의 동학대장으로 활약하였다고 그의 할머니가 생전에 말해 왔다. 다시말하면 그의 가문에는 역대로 애국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내외 삶속에 늘 따라다니는 고통들
김수해선생의 삶은 문자 그대로 분단역사 그 자체이다. 그 고통은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언제나 가까이에 붙어 다닌다. 샹하이에서부터 시작한 그의 삶은 서울에 와서도 그리고 1987년 카나다 이민와서도 분단의 고통들은 늘 따라 다닌다.
한국에서 카나다로 이민오기전에는 경남중학교, 서울공고, 한양대학교 토목과를 나와 건축공사 감독등으로 일하던 시대에도 해외에 공사들이 있어 좋은 조건으로 파견나갈 수 있었는게 그런 기회들이 번번히 좌절되고 말았다.
1972년 한국의 해외개발공사가 모집하는 해외건설 파견감독을 2명 뽑는데 무려 150명이 몰렸는데 여기에 2명중 한사람으로 합격하여 50명 기능공들을 데리고 총102명이 괌으로 가서 회사, 주택들을 건설하는 일이 있어 그 당시 일하던 충주비료공장에서 송별회 연회까지 하고 준비하였는데 신원조예에서 불가로 나와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3대독자이기 때문에 군복무가 면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연행하여 강제로 민방위에 복무시키는 폭거를 자행하기도 한것이 이승만 박정희정권의 횡포였다.
그는 그 당시 현대건설을 포함하여 금강주식회사, 사우디 아라비아 지사 소장근무, 개인 회사 <신신토건>등을 경영하기도 하다가 해외여행이 풀려서 1987년 카나다 이민을 결심하고 결혼한지 18년만에 부인 정화은여사와 두 아들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났다. 카나다에 정착하고 3개월만에 지금의 식료품점을 인수하여 30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장사를 하면서도 앉으나 서나 이북에 있는 둘째 누이를 찾는 문제와 그의 생모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일천추로 그리움에 사무쳐 견디기가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 이같은 고통들은 모두가 분단의 아픔들이었다.
사실은 김수해선생 가족들은 이북에 있는 둘째 누이를 찾기위해 1962년부터 노력했다. 첫째 누이가 일본에 거주할때 일본방송에서 김혜숙 성악가수가 모스코바에서 공연하여 열창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가수가 동생같다고 생각하여 일본적십자사를 통하여 동생을 찿아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흘러가도 둘째누이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강산이 세번이나 바뀐 세월이 지난 지난 1994년 일본적십자사를 통하여 작은 누이가 평양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김제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채 평생소원을 푼것처럼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그 소식을 들은 3개월후에 영면하고 말았다.
김수해선생은 수소문을 하여 이북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1995년 첫 방북길로 들어섰다. 그는 둘째 누이와 극적으로 상봉하고 막바로 물었다. 1962년에 적십자사를 통해 편지를 보냈는데 어찌하여 30년이 넘은 시기에 답장을 보냈느냐고 묻자, 그의 둘째 누이는 “내가 그 때 바로 편지를 보냈다면 너는 지금 아마 나를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남조선에 연좌제라는 것이 있고,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있어 네가 그곳에서 발붙이고 어려운 것을 감안하여 쓰고 싶은 편지를 억제하여 온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누이는 동생과 가족들을 위하여 쓰고 싶었던 편지를 억제하였다고 설명하자 동생인 김수해선생은 고마움에 감동하면서 하염없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의 둘째 누이는 11년전인 2007년 운명했다. 그때부터 김수해선생은 방북하면 조카들만 만났다. 그가 지금까지 방북한 횟수는 25차례가 된다.
조국분단 70여년의 아픔으로 남북,해외동포들 8천만의 비명소리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김수해선생은 하루속히 평화가 안착되고 통일조국이 이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1천만이산가족들이 고령화되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가족찿기 사업을 포함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만들기 위하여 카나다코리아연합에 가입하여 활동해 왔다.
국내외 삶속에 이러저러한 고통들이 따라왔지만 김수해선생은 그 고통들을 극복하며 카나다동포사회에서 친북,친남을 초월하여 서로 한 형제자매로 분단조국을 통일조국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여 왔다. 그리고 지난 2004년부터는 카나다코리아연합회의 회장이 되어 남북관계 화해협력을 비롯하여 해내외동포들의 교류사업 및 북부조국 바로알기 운동 등도 펼쳐왔다.
그는 그의 가정사가 안고 온 한과 분노, 그리고 누적되고 누적된 원한들을 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라고 말한다.(끝)
[카나다 심방]암투병하는 김태정선생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196
[심방]박문재박사: ”세계비핵화는 바람직하다”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91
[심방]조용한 애국자,뉴욕의 김수곤선생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90
(대담) 이복신여사가 만난 북녘의 핏줄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89
[심방]필라델피아 황규식선생의 어제와 오늘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192
《약자돕는 교사》,김은주 박사의25시 활동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79
김수해선생의 부친 김민홍선생도 김구선생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남녘의 대구형무소에서 1959년 12월18일 이승만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북녘에서는 그를 열사로 평가하여 <열사증>을 수여하는 한편 사후 58년만인 2016년에는 <조국통일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자본가 출신으로 <열사증>을 받은것도 처음이었지만 자본가 출신으로 <조국통일상>을 받은 인물도 아마도 최초일것이다.
그의 부친은 마치도 <아름다운 부자>로 알려져 온 이종만선생과 비슷한 점도 있다. 이종만 선생의 이야기는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라는 도서가 2010년 6월15일 그의 딸 이남순에 의해 <정신세계원>에서 출판되어 화제를 모아왔는데 그 책의 주인공인 아버지도 그 당시 남녘의 대재벌이었다. 한국정권에서 그의 재산을 압수하려고 하자 그는 월북을 결심하고 북으로 가서 그의 재산을 사회공익에 써달라고 헌납한 그야말로 아름다운 재벌중 한분인데 김수해선생의 부친도 이분처럼 자본가계급에 속하는 인물이었다.이종만 선생은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였다가 그의 꿈인 <대동사회>건설과 조국통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대로 북녘땅에 머물러 활동하다가 1977년 서거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김수해선생의 가문은 일제시대때도 그리고 분단시대에 와서도 애국자집안이었다.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으로 우리나라 전국이 요란하던 그 시대에도 그의 할머니의 부친인 김경업, 즉 증조부께서 전라남도 지역의 동학대장으로 활약하였다고 그의 할머니가 생전에 말해 왔다. 다시말하면 그의 가문에는 역대로 애국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내외 삶속에 늘 따라다니는 고통들
김수해선생의 삶은 문자 그대로 분단역사 그 자체이다. 그 고통은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언제나 가까이에 붙어 다닌다. 샹하이에서부터 시작한 그의 삶은 서울에 와서도 그리고 1987년 카나다 이민와서도 분단의 고통들은 늘 따라 다닌다.
한국에서 카나다로 이민오기전에는 경남중학교, 서울공고, 한양대학교 토목과를 나와 건축공사 감독등으로 일하던 시대에도 해외에 공사들이 있어 좋은 조건으로 파견나갈 수 있었는게 그런 기회들이 번번히 좌절되고 말았다.
1972년 한국의 해외개발공사가 모집하는 해외건설 파견감독을 2명 뽑는데 무려 150명이 몰렸는데 여기에 2명중 한사람으로 합격하여 50명 기능공들을 데리고 총102명이 괌으로 가서 회사, 주택들을 건설하는 일이 있어 그 당시 일하던 충주비료공장에서 송별회 연회까지 하고 준비하였는데 신원조예에서 불가로 나와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3대독자이기 때문에 군복무가 면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연행하여 강제로 민방위에 복무시키는 폭거를 자행하기도 한것이 이승만 박정희정권의 횡포였다.
그는 그 당시 현대건설을 포함하여 금강주식회사, 사우디 아라비아 지사 소장근무, 개인 회사 <신신토건>등을 경영하기도 하다가 해외여행이 풀려서 1987년 카나다 이민을 결심하고 결혼한지 18년만에 부인 정화은여사와 두 아들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났다. 카나다에 정착하고 3개월만에 지금의 식료품점을 인수하여 30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장사를 하면서도 앉으나 서나 이북에 있는 둘째 누이를 찾는 문제와 그의 생모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일천추로 그리움에 사무쳐 견디기가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 이같은 고통들은 모두가 분단의 아픔들이었다.
사실은 김수해선생 가족들은 이북에 있는 둘째 누이를 찾기위해 1962년부터 노력했다. 첫째 누이가 일본에 거주할때 일본방송에서 김혜숙 성악가수가 모스코바에서 공연하여 열창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가수가 동생같다고 생각하여 일본적십자사를 통하여 동생을 찿아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흘러가도 둘째누이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강산이 세번이나 바뀐 세월이 지난 지난 1994년 일본적십자사를 통하여 작은 누이가 평양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김제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채 평생소원을 푼것처럼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그 소식을 들은 3개월후에 영면하고 말았다.
김수해선생은 수소문을 하여 이북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1995년 첫 방북길로 들어섰다. 그는 둘째 누이와 극적으로 상봉하고 막바로 물었다. 1962년에 적십자사를 통해 편지를 보냈는데 어찌하여 30년이 넘은 시기에 답장을 보냈느냐고 묻자, 그의 둘째 누이는 “내가 그 때 바로 편지를 보냈다면 너는 지금 아마 나를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남조선에 연좌제라는 것이 있고,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있어 네가 그곳에서 발붙이고 어려운 것을 감안하여 쓰고 싶은 편지를 억제하여 온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누이는 동생과 가족들을 위하여 쓰고 싶었던 편지를 억제하였다고 설명하자 동생인 김수해선생은 고마움에 감동하면서 하염없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의 둘째 누이는 11년전인 2007년 운명했다. 그때부터 김수해선생은 방북하면 조카들만 만났다. 그가 지금까지 방북한 횟수는 25차례가 된다.
조국분단 70여년의 아픔으로 남북,해외동포들 8천만의 비명소리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김수해선생은 하루속히 평화가 안착되고 통일조국이 이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1천만이산가족들이 고령화되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가족찿기 사업을 포함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만들기 위하여 카나다코리아연합에 가입하여 활동해 왔다.
국내외 삶속에 이러저러한 고통들이 따라왔지만 김수해선생은 그 고통들을 극복하며 카나다동포사회에서 친북,친남을 초월하여 서로 한 형제자매로 분단조국을 통일조국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여 왔다. 그리고 지난 2004년부터는 카나다코리아연합회의 회장이 되어 남북관계 화해협력을 비롯하여 해내외동포들의 교류사업 및 북부조국 바로알기 운동 등도 펼쳐왔다.
그는 그의 가정사가 안고 온 한과 분노, 그리고 누적되고 누적된 원한들을 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라고 말한다.(끝)
[카나다 심방]암투병하는 김태정선생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196
[심방]박문재박사: ”세계비핵화는 바람직하다”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91
[심방]조용한 애국자,뉴욕의 김수곤선생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90
(대담) 이복신여사가 만난 북녘의 핏줄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89
[심방]필라델피아 황규식선생의 어제와 오늘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192
《약자돕는 교사》,김은주 박사의25시 활동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579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