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로 본 김일성에 의한 "625 학살"
푸른 솔
2018.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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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3월 31일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라는 책이 있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이 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명부는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 등 총 8개 항목으로 피살자
들의 신원을 기록해 놓고 있다.
명부는 피살자들을 크게 각 시도별로 구분한 다음 군(郡)이나 구(區)별로 세분화해 피해가 많
은 성씨(姓氏) 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대상을 “군경(軍警)을 제외한 비(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통계는 ‘내전 중’에 죽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다는 얘기다.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 전남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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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만4008명,
여자가 1만5956명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
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1952년에 작성된 <대한민국 통계연감>은 피살자 수를 12만2799명으로 밝히고 있다.
이렇게 숫자만 나열하면 무척이나 무의미해 진다.
그 실제 사례를 하나 보자. 영광군 염산면의 사례다.
염산면에는 이웃 함평군까지 이어지는 월암산(338m) 이 있다.
염산지역 빨치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고 월암산 밑에 오동리는 남조선 노동당 지하총책이었
던 '김삼룡'의 고향으로 그를 추종하는 지역 빨치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염산면은 이곳 사람들이 6·25 전쟁 때 염산면 사람들의 절반은 죽었을 것이라고 증언을 할 정
도로 좌익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백수면의 빨치산들이 칼이나 죽창으로 양민을 학살한 반면 이곳 빨치산들은 설도港에다 산 채
로 수장(水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목에 돌을 매달아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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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족이 몰살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염산면에서는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많았
다.
영광군 내에서 신도들이 가장 많이 학살된 교회는 염산면에 있는 염산교회다.
염산교회는 全교인의 3분의 2가 넘는 77명이 학살당했다.
염산교회 학살 사건도 9·28 수복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염산교회 김태균(47) 담임 목사가
전하는 당시의 이야기다.
서울 수복 이후 영광에도 국군과 유엔군이 곧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익청년들은 9월29일, 이들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고 이때부터 좌익들의 보복이 시작됐다.
그해 10월7일 좌익들은 염산교회에 불을 지르고 기삼도씨를 비롯한 청년 신도들 다섯 명을 잡
아갔다.
기삼도씨는 좌익들의 죽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청년들은 새끼줄에 서로 얽혀 매인 채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10월 8일에는 이 교회 집사였던 노병재씨 일가족 아홉 명, 동생인 노병인씨의 일곱 식구, 역시
동생인 노병규씨의 식구 일곱 명이 설도 수문에 수장된다.
노씨 일가만 23명이 같은 날 학살당한 것이다.
노씨 일가 외에도 김동곤 장로의 일가족 등 수많은 염산교회 신도들이 바닷물에 던져졌고 그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1950년 3월에 염산교회 3대 목사로 부임한 김방호 목사 일가의 죽음은 끔찍함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교회가 소실되고 신도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김 목사는 한 신도의 집에 지하교회를 만들어 예
배를 드렸다.
10월26일 좌익들이 지하교회를 덮쳤다.
그들은 김 목사의 부인, 아들, 손자 등 여덟 명의 가족을 한 줄로 세워 놓고 김 목사의 아들들에
게 몽둥이를 주면서 김 목사를 치라고 했다고 한다.
김 목사의 아들들은 차마 아버지를 몽둥이로 치지 못하고 “함께 죽여 달라”며 애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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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들은 김 목사의 아들들을 발로 차버린 후 직접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
그들은 김 목사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패서 金 목사를 살해했다.
그 뒤를 이어 김 목사의 부인, 아들, 여덟 살과 다섯 살이었던 손자들이 차례로 그들의 몽둥이
에 맞고 죽창에 찔려 죽었다.
같은 염산면의 야월교회도 좌익들에 의한 집단학살이 벌어진 곳으로 교인 65명이 학살당했는
데 염산교회의 피살자 77명보다 숫자는 적지만 학살당한 65명은 당시 야월교회의 신도 전부
였다.
전(全)교인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야월교회에서 학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염산교
회와 똑같다.
청년 신도들이 국군과 유엔군 환영대회에 참석을 한 것이다.
살해하는 방법은 달랐는데 야월리에 난입한 빨치산들이 전교인을 교회에 모아 놓고 석유를 뿌
린 후 교회당과 함께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영광군 순교자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펴낸 문건 <한국전쟁(6·25 동란)과 영광지방 순교자 현
황>에는 영광군의 당시 피해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국군들이 영광읍내에 진주한 1950년 10월30일경에는 영광읍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
다.
사망자 수만 하더라도 군민 13만 중 3만여 명을 헤아렸는데, 그 중에서도 염산면 일대는 1만
여 면민 중 목숨을 잃은 자만 5000여 명이 넘었으니 그 당시 영광군 일대의 상황이 얼마나 처
참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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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조선> 2002년 4월호에 김성동 기자가 쓴 <6·25 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명부 발견 영광 대학살 2만1225명>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 받아 정리한 글 *
☞문제는 당시 대한민국내 모든 도시나 지방에서 우파청년들이 중심이 돼 국군과 유엔군의 환
영행사를 똑같이 치뤘는데도 유독 전라도 지방에서만 빨치산 빨갱이들에 의한 기독교인 학살
이 유별나게 많았던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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