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1

박정미 - 망국적 당파싸움과 율곡의 길 ㅡ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를 읽고 “한 때 사림의... | Facebook

박정미 - 망국적 당파싸움과 율곡의 길 ㅡ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박정미

8h ·

망국적 당파싸움과 율곡의 길
ㅡ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를 읽고

“한 때 사림의 빛나는 이상으로 투사되었던 것들은 현실에서 거의 구현되지 못했다. 선조 즉위 무렵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거대한 정치적 파국인 기축옥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개청과 최영경이 사망한 지 2년이 못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정치적 파국은 정치권을 넘어서 국가적 파국으로 이어졌다. “

묵혀두었던 이정철 박사의 역작,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를 손에 든 것은 지난 12월 3일 화요일 밤의 계엄사태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 꼬박 4주가 지나는 동안 온 나라를 휩쓴 광기와 증오의 기운을 견디며 이 책을 읽었다. 분명 이 시대는 독선과 증오의 불꽃이 선비들을 태우고 서로 죽이는 선조연간의 동서분당 상황과 정확히 조응하고 있었다.

사림의 등장과 그들의 도덕적 자기확신이 동서분당의 격렬한 대립구도를 만들었다면 이 시대 나라를 둘로 쪼갠 것은 86세대와 그 후배세대 운동권의 자기확신이다. 그들은 우리 정치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실종시키고 선조연간과 같은 극단적 정치풍토를 만들었다.

450여년 전 우리 선조들의 격렬한 정치투쟁이 기축옥사를 거쳐 임진왜란을 불러일으켰다면 되풀이되는 역사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대를 다시 되짚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시대의 중심에 선 고독한 인간, 율곡 이이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사실은 율곡이야말로 당시 운동권인 사림의 대부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선조 즉위 초에 조정에 등장하여 이준경과 같은 구신들에게 취했던 태도는 그의 후배세대 사림인 동인이 그를 배척했던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사림들은 사안에 대한 시시비비를 사람과 당파에 대한 소인/군자론으로 확장시켰고, 
부패한 인물의 배제를 구 시대의 극복 그 자체로 이해했던 것이다.

“다만 선조7년을 기점으로 이이의 정치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이 바뀌었을뿐이다. 이제 사림은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이 아닌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다시 말해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이는 그것을 정확히 이해했다. 문제는 이이만이 그것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이다. “

선조 8년 물증이 없는 한 살인사건의 처리에 대한 시시비비 로 갈라진 사림의 분열은 이조전랑 자리에 대한 각축으로 감정골이 깊어지면서 서서히 동인과 서인으로 진영을 갖추어 갔다. 율곡은 사림의 분열을 막고자 애썼지만 이미 갈라진 대세를 막을 힘이 없었다.

“동서 진영갈등의 진정한 전환점은 선조 11년 이후부터인데 
이 때부터 동인이 구신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신들과 서인을 선과 악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본래 동인과 서인은 정치적 입장이 다를 뿐, 정사(正邪)로 구분되지는 않았다. 
이 때부터 동인 일부는 서인을 공공연히 소인(小人)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동인과 서인 간의 구분이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에서 정사(正邪)를 나누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소인은 정치적 대화나 타협의 대상이 아닌, 싸워서 격퇴시켜야 할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인은 당시의 조정이 ‘외척세력 서인’ 대 ‘진정한 사림 동인’으로 대립한다고 인식했다. 동인은 서인 전부를 외척 심의겸의 당여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동인은 이이까지도 심의겸의 당여로 인식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서인을 ‘친심’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동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공격방식이었다. 이미 심의겸이 유배된지 오래고 정치적 힘을 잃었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그들은 심의겸을 살아있는 호랑이처럼 대했다.
이것은 현재 민주당주류가 국민의 힘을 친일의 후예로 규정하고 상종 못할 세력으로 대하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선조8년부터 이이가 사망한 선조 17년까지 이 대립구도는 유동했지만 계속 유지되었다. 당시 조정의 세력구도는 선조가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고, 사림이 분열한 상황이었다. 이이는 ‘조제와 보합의 정치’를 주장하며 사림의 단합을 촉구했지만 이이가 주장한 정치개혁의 내용은 그 덫에서 벗어나야 실현될 수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이이의 동인 비판은 깊고 정밀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안타까움과 분노가 배어나왔다. 이이는 동인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이발에게 보낸 서한에서 동인이 서인보다 얼마나 더 무리하게 행동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유자들이 정치에 참여한 본래의 원칙과 이유를 물었다. 그는 ‘정치 논리’ 뒤로 몸을 숨긴 개인의 판단과 행위를 정조준했다.

“이이는 개인이 집단 안에서의 역할로 한 행위와 개인의 독립적이고도 실존적 행위를 같은 차원에서 보았다. 그의 논리에서는 정치나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책임을 면제받을 수 없었다.”

선조 13년 12월 이이가 낙향한지 5년만에 다시 조정에 나온 이후 이율곡은 기존의 사림분열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분열된 동서를 통합하여 그 통합된 힘으로 선조에게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것을 단념하고 그 통합의 권한을 선조에게 넘긴 것이다.

선조 16년 자신에 대한 탄핵으로 촉발된 계미삼찬의 파란을 겪은 후 율곡의 조제보합론 사상은 더 구체화되었다. 사림의 단결을 동인과 서인간의 집단적 화합이 아니라 당파를 배제하고 개인의 능력과 안목에 주안점을 두어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이는 동인 일색으로 채워진 언관 모두가 정치적 욕망 때문에 자신을 공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서로 다른 믿음의 차이를 이이는 ‘시비’나 ‘정사’가 아닌 ‘식견’의 문제로 이해했다. 상황을 파악하는 안목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는 동서간의 시비와 정사, 그리고 군자와 소인이라는 구분 기준 대신에 개인의 역량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이가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선조 16년에 있었던 북방사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이의 진단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군사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 처해있던 위기적 상황의 단면이었다. 당시 이이는 초조했던 것 같다.“

선조는 동인과 서인의 반목 속에서 중도를 잃지 않는 이이를 등에 업고 능력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새로운 정치를 해보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런 포부는 다음해 선조17년 1월 이이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선조는 믿었던 지주를 잃은 충격과 절망감 속에서 대의와 균형감을 잃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갔다.
그리고 불안한 희망 속에서 시작된 선조의 치세는 기축옥사와 임진왜란과 선조의 독재로 귀결되었다.

이이의 운명은 동서 양극의 극렬한 자장권 하에 처한 중도파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도의 길은 양측이 서로 자기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편으로 여겨 배척의 대상이 될 확률이 높다. 이이는 그렇게 홀홀단신으로 양측에서 협공당하며 분투할 수밖에 없었고 끝내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조직논리를 거부하는 개인신념을 가진 자가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할 때 봉착할 수밖에 없는 정치력의 한계를 이율곡은 보여준다. 애초에 파당을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 지성과 대의가 아니라 정서와 이해관계와 욕망이기에 이율곡처럼 영민하고 당대 최고의 지성과 경세감각을 가진 사람도 그런 중도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여러사람들이 지적하는 ‘대중적이지 못한’ 이이의 개인적 성품에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도의 운명 자체라고 본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에서 득세하는 것은 동 아니면 서, 국민의 힘 아니면 민주당일 것인데 중도의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이 시대 주권자는 임금이 아니라 국민이다. 그리고 우리 세대의 율곡들은 이이처럼 급사하지는 않을 것이고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율곡이 와도 국민의 힘과 민주당의 조제와 보합의 정치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율곡의 노선은 당시에도 백성과 민초들에게는 깊은 신뢰와 감동을 주었다.
이항복이 쓴 이이 신도비문은 이이의 죽음이 백성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여염의 백성들이 방아 찧는 일을 중지하기까지 하였다.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가 도성을 기울인 가운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발인 때에는 담장 밖으로 나와서 등불을 잡고 장송하는 이들이 모두 방성통곡을 하며 지치게 슬퍼하였으므로, 군자가 말하기를, “(이율곡의 )덕이 넉넉하고 크도다. 덕이 대중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도다.’라고 하였다.”

희망은 이이의 새로운 노선에 있다. 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실력과 현실적 성과를 보고 투표하여 양 당을 바로 세우면서 '식견'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 개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이 사후 고삐 풀린 듯 질주하던 동인의 치세는 1589년 정여립에 대한 고변으로 발발한 기축옥사로 끝이 났다. 2년반동안 1000여명의 희생자를 낳고 기축옥사가 일단락 된 이후 그 다음해 1592년에 참혹한 임진왜란이 터졌다.

동인과 서인 중에 누가 더 나았고 누가 더 옳았느냐, 묻지마라. 우리 후손의 눈에는 동인이나 서인이나 똑같이 전란을 불러온 못난 조상들일뿐이다.
마찬가지로 민주당과 국민의 힘 중에 누구 주장이 더 옳은지 지금은 묻지 마라. 이대로 가면 우리 모두는 공멸하고 후손들 눈에는 다 똑 같은 죄인들일뿐이다. 지금은 당파를 초월한 개인의 인격과 책임을 걸고 양보하여 파국을 피해야 할 시간이다.

어제는 기어이 무안공항 사고가 터져나왔는데 그 슬픔과 안타까움에 이것이 비극적 결말이 아닌 거대한 파국의 예고편이 될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예감이 더해졌다. 전화통을 붙들고 광주의 친정오빠와 86세대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선배언니에게 예의를 벗어나 큰 소리로 화내고 외쳤다. 억울하더라도 시시비비는 그만두고 남탓은 그만하고 우리부터 변해야 한다고 울었다. 이 시대의 율곡들이 파당의 미몽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모자란 사람의 절박함이었다.





김대호

저도 읽어 보려고 찜 해놨는데 주문해서 읽어 봐야겠네요

박정미

김대호 깊고 좋은 책입니다.민주당 당파성, 국민의힘 당파성에 함몰된 사람들을 겨냥한 책인것 같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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