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선
33m ·
<한국信연구소 오늘, 25.02.20(목)>
-손녀 진서의 유치윈 졸업식과 나라의 미래-
장구합주를 졸업식 연주로 들려주는 손녀 진서의 유치원 졸업식에 다녀와서 밤늦게까지 MBC백분토론을 들으면서 이재명 대표의 이야기에 많은 신뢰를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서 페북 글들을 읽었습니다.
그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과 한반도의 미래가 그렇게 편치 않을 것 같은 생각에 더욱 간절한 마음의 기도가 나옵니다.
두 페북 글을 복사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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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교수페북, 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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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교수님 (성공회대) 글
불쌍한 젤렌스키
자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휴전회담에 초대받지 못하고, 트럼프의 희토류 수입의 반,720조 요구?, 요구를 받은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젤린스키의 심정은 어떠할까? 영국의 파병 거부를 시작으로 유럽은 이제 우크라이나 편에 서지 않을 것이고, 영토를 러시아에 떼어주고 휴전하라는 트럼프 노선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다. 군사 정치적 주권이 없으면 우크라이나 신세가 된다.
강대국 지원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말했듯이 수십년 갚아도, 아무리 갚아도 계속 더 내라고 한다. 이제 곧 트럼프가 청구서들고 한국에 올 것이다. 젤렌스키는 러시아 제국주의와 바이든-트럼프의 제국주의 중간에 끼여 처참한 신세가 되었다. 세계는 드디어 제국주의 시대가 되었다.
기시감이 있지 않나? 한국전쟁 휴전 회담에 초대받지 못한 이승만과ㅇ 남한 사람들.... 지금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과거와 현재의 한국을 보지 못하는 남한 사람들, 어이없게도 지금 중국만 때리는 극우들 모두 정치적 문맹이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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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논설위원 페북, 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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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연재가 거의 마무리 됐다.
앞으로 2회 정도 남았다. 1904년 말 정도까지만 쓰고, 전체적인 결론을 낼 생각이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나면, 조선에겐 더 이상 '갈림길'이 없었다.
결론을 내야 하는데 갑갑하다. 조선 망국의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외교 실책'이 아닌 '내치 실패'였다. 내치에 실패해 국가가 허약하고 형편 없었으니 온갖 제갈량들이 몰려온들 나라가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고종이 추진한 중립화는 좋은 생각이었지만, 그러려면 주변국 특히 일본이 이를 지지해야 했다.
일본이 조선을 먹어야 하는데, 이를 지지했겠냐! 라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결과론이다. 저 사람들인들 청일전쟁+러일전쟁 지들이 이길 줄 알았겠는가. 일본이 지지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중립화하라고 내버려 둬도 내정이 엉망이니 다시 여러 국란이 나서 주변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일본만 그렇게 본 게 아니라 러시아 빼고 대부분이 그렇게 봤다.
러시아라고 대한제국이나 고종을 믿은 게 아니었다. 자기네들이 만주 경영을 해야 하니, 조선을 중립화로 비워두는 게 지들에게 유리하다고 봤다. 그래서 지지했다.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과 이즈볼스키 주일 러시아 대사가 1900년 12월 이 문제로 대화한 게 있다. 그 기록을 보면, 그냥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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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치가 중요했다. 세력 교체 시기일 수도록 더 그렇다. 내치가 무너지면 주변국들의 존중을 받지 못한다. 조선은 국가의 조세부담율이 2% 정도밖에 안 되는 매우 국가능력이 낮은 나라였다(대한민국은 20% 안팎이다). 재정능력이 약한데 그나마 고종이 이를 마구 맘대로 써댔다. 돈이 모자라면 악화를 발행해 썼다. 그 유명한 전환국의 백동화였다. 백동화로 인한 인플레로 나라가 작살이 났다.
외교 정책이라는 것도 의정부에서 숙의를 거쳐 방침을 정한 뒤 진득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했다. 고종의 스타일은 본인의 밀지를 통한 '뒤통수 외교'였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이 사람은 1880년대 초부터 거듭 왕권의 위협을 받았다. 와이프는 살해당했다. 재위 중 역모가 30건이 넘는다. 연에 0.8회 정도였다. 누굴 믿겠는가.
국민들이 마음을 한데 모으려면 내각+의회 제도 등을 만들어 합리적인 국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짜야했다. 1904년까지도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서구 세력이 몰려오는데, 나라의 모습을 어떻게 가져 가느냐! 우린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보신전쟁을 거치며 이 결판을 냈다. 혁명과 내전으로 갈 길을 정한 것이다.
우리에겐 그런 결단의 순간이 없었다. 그러니, 망하는 순간까지 고종이 맘대로 하는 고종의 나라였다. 고종은 자신의 군주권을 제한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모든 것을 지 맘대로 해야 했다. 그러니 정책이 조변석개하고, 대신들이 며칠마다 수시로 바뀌고... 예산이 집행됐는데 어디로 썼는지 모르고, 황실재정이 정부재정을 압도하고, 그 상당 부분은 사치에 쓰이고... 뭐 대충 그랬다.
그나마 똑똑한 신하들은 자기에게 개긴다고 다 죽여 없앴다. 지금도 1896년 2월 김홍집이 죽던 그날 기록을 읽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고무라 주타로 주한 일본공사는 이 광경을 건조한 필체로 본국에 전했다. 절망한 것이다. 저 고무라가 외무대신이 되어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을 추진하게 된다.
그나마 남은 신하들도 개겼다. 나라가 사실 망했는데 1904년 3월에 고종 권력을 제어하려 의정부 관제 개정을 한다. 고종은 1904년 3월 찾아온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 사실을 이른다. 이를 듣고 이토가 길게, 길게, 길게, 길게 잔소리를 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기록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서 울었다.
그러니 한때 고종의 편이라던 호러스 알렌은 1902년 무렵에 본국에 "조선엔 정부가 없다"고 써 보고한다. 조선엔 고종만 있었지 정부가 없었다. 이딴 왕정은 쓰러뜨려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역모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개혁 세력의 힘이 약해 자체 역량으로 역모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줄 유일한 세력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처음엔 구경하다(1876~청일전쟁까지)
나중엔 개입하다(청일전쟁 이후 갑오개혁)
그 다음엔 직접했다(한일의정서 이후)
이게 구한말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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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은 단단한 국가를 만들었지만, 극한 이념 대립으로 나라가 쪼개져 있다. 이래선 국가가 효율적으로 정책을 집행하기 힘들다. 자칫하면 내치가 흔들려, 국가 능력이 떨어지고, 국력이 전반적으로 저하될 수밖에 없다. 그럼, 이 난세에 주변국들이 우리를 보는 평가가 낮아지게 된다. 존중받고, 대접받지 못하는 국가가 되면, 다시 위기가 닥쳐오는 것이다.
국가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온갖 제갈량이 몰려온들 다 소용 없다. 대충 그런 언저리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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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사력을 등에 업은 하야시가 고종을 찾아온 것은 이튿날인 오후 3시 반이었다. 공사관의 무관인 이치지 고스케 소장을 대동하고 고종을 찾아와 러·일의 외교관계가 단절된 사실과 일본군이 상륙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뒤 “다른 공사관으로 파천한다는 풍문이 있는데 그럴 생각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고종은 “뜻밖에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그럴 뜻이 없다고 말했다.
10일 일본의 ‘선전포고의 조칙’이 공개됐다. 10년 전 청일전쟁 때 있었던 ‘조선의 독립’이란 표현은 애매한 ‘한국의 보전’이란 말로 바뀌어 있었다. 고종은 11일 자신을 찾아온 가토 마스오 전 일본 공사에게 “각국에 중립을 통첩한 뒤에 일·러가 개전하면 양국 병사의 입국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조처하였지만 효과는 없었다”라고 인정했다.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 고종을 압박하기 시작한 이상 더 이상 조약 체결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지용은 13일 하야시를 찾아와 “한국 위아래가 이제는 전적으로 일본을 따르고 복종하여 일·한 양국의 제휴에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
양재성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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