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4

모리사키 가즈에가 부르는 ‘조선’의 목소리 - 모리사키 가즈에, 박승주ㆍ마쓰이 리에 옮김,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목소리—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일본인의 수기』, 글항아리, 2020

모리사키 가즈에가 부르는 ‘조선’의 목소리 - 모리사키 가즈에, 박승주ㆍ마쓰이 리에 옮김,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목소리—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일본인의 수기』, 글항아리, 2020



모리사키 가즈에가 부르는 ‘조선’의 목소리 - 모리사키 가즈에, 박승주ㆍ마쓰이 리에 옮김,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목소리—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일본인의 수기』, 글항아리, 2020The voice of “Joseon” sung by Morisaki Kazue -Written by Morisaki Kazue, Translated by Park SeungJoo, Matsui Rie, Gyeongju, the voice of a mother, Geulhangari, 2020




상허학보

2021, vol.62, pp. 445-484 (40 pages)

DOI : 10.22936/sh.62..202106.013


발행기관 : 상허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강문희 /Kang, Mun-hee 1


1도시샤대학 글로벌스터디즈연구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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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모리사키 가즈에 지음ㆍ박승주, 마쓰이 리에 옮김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목소리—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일본인의 수기』(글항아리, 2020년)의 서평이다. 모리사키 가즈에는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태어나 성장한 일본인으로, 이 책은 조선의 대구, 경주, 김천에서 지낸 시간들을 자서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역자들은 대구에서 시민운동을 수행하는 등 모리사키가 태어난 대구 삼덕동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 책을 번역했다. 본고는 모리사키가 조선 경험을 서술한 이 책을 바탕으로 패전 후 일본에서의 사상 활동이 모리사키의 조선 인식과 가지는 연관성을 규명하고자 했다. 패전 후 일본에서의 사상을 전개해가는 데에는 모리사키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으며 그 중심에는 이질적인 집단(이족)들과의 교류, 그리고 ‘듣고-쓰기[聞き書き]’ 행위가 있었다.


This is a book review of “Gyeongju, the voice of a mother” by Morisaki Kazue, translated by Park Seungjoo and Matsui Rie. Morisaki Kazue is a Japanese who was born and raised in Jose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is book is an autobiographical description of her time in Daegu, Gyeongju, and Gimcheon in Joseon. Translators translated this book in the relationship with Samdeok-dong, Daegu, where Morisaki was born, such as conducting civic movements in Daegu. Based on this book, which describes Morisaki’s experience in Joseon, this paper attempted to clarify the relationship between Morisaki’s perception of Joseon and her activities in post-war Japan. Morisaki’s own ‘Woman’ played a big role in developing post-war thoughts in Japan. Interaction with outsider’s communes and the act of ‘Listening and ensuing writing’ were the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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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키 가즈에,
조선,
‘듣고-쓰기[聞き書き]’,
여성,
경주

Morisaki Kazue, Joseon, Listening and ensuing writing, Woman,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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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키 가즈에 에 나타난 식민지조 *1)
- 사카 타 를 경 식민지 경험 재구 -

미 **2)
は、 の における がどのような 、
コンテクストの で され、 され、 されたかを した。その 、 は 2 として 1 の 、 に するの と にいることがわかった。まず、 として
は との の で の と を り ることで、について 1 の と しようとしたことを らかにした。 に、 は に が で いた をし、 とアジアの と らし わせ、 の と を
DOI http://dx.doi.org/10.21792/ trijpn.2021..92.018
した。それが は の び ーわが (1984)であり、テキストにれる に する は、 のような 1 の をしている。 は、 に する と の な とに する を せてくれたが、 それは を い、 なの を せてくれるアイロニーを んだ。したがって、
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の として に するスタンスは、な としての の にも している。
キーワード :
(모리사키 가즈에, 사카 타 , 식민지경험, 재조 일본인)
1. 리말
모리사키 가즈에( , 1927 , 이 모리사키)는 식민지 조 에 태어난 장 고뇌를 사상 삼 동 작가이다. コレクション の 1-5 ( ,
2008-2009)가 결 었 , 그 는 ‘식민2 뚤어진 원죄
* 이 논 2020 도 신 연구 지원 연구 었 .
** 신 벌 일본 과 , mjungoh@hanmail.net
식 고자 고뇌 면 살 나 족 ’이라고 했다.1) 모리사키 작 からゆきさん (채경희 , 쇠사슬 다
이 출 사, 2002), は の び ーわが (승주, 마쓰 이 리에 , 경주는 어 니가 부르는 소리-식민지 조 에 장 일본인 항 리, 2020)가 번역 어, 국내에 재 조일본인 연구가 고, 심이 높 진 것 보여 다.
국내 연구 는 다나베 후미 , 이 희, 송 경, 신승모 논 들
이 있고, 소리마 마스미가 사논 에 근 국내외 연구 과 를 리 고, 모리사키 시를 분 다.2) 일본에 는 2000 이후 여 , 노동, 포스트 니얼 에 모리사키 연구가 축 고 있다.3)
본 논 에 주목 는 모리사키 식민지 경험이 어떤 역사
, 사회 스트 속에 억 고, 재구 어 고, 그 과 에 엇이 드러나고 감추어 는가 는 이다. 모리사키는 식 민2 식민1 조 , 일본에 인식 연속과 단 상에 있다. 17지 식민지에 식 지 자 생 식민2 경험 명 것이지만, 모리사키는 후 지속 일본어 식민지 자료들 통해 식민지 조 에 해 습 고, 자신 억과 체험 재구 다. 식민1 분 는 일본인 들이 남 조 에 담 들, 특히 사카 타 같 인 들
1) (2009) を えて 、No.205、pp.14-15.
2) (1985) ふるさと と かなる への (1) 일본어
연구 1집, 국일본어 회, pp.69-86; (1989) は の び
わが への (2) 일본어 연구 5집, 국일본어 회, pp.151-176;이 희(2015) 모리사키 가즈에( ) 작품 속 약자를 향 시
-식민지조 과 변( ) 여 심 일본어 68집, 일본어 회, pp.433-454;송 경(2018) 식민지 재조일본인 2 여 조 체험과 식민지 주 -모리사키 가즈에( )를 심- 35 , 국일본사상사 회, pp.233-255;신승모(2019) 식민자 2 여 과 신사 모리사키 가 즈에( )를 심 일본연구 79 , 국외국어 일본연구소, pp. 125-143; (2020) 고 사논 , pp.1-122.
3) (2013) サークル と ー と のヴィジョン ナカニシヤ
、pp.1-424; (2018) んだ による : の について 67(11)、 、pp.47-57; (2019) をぐ: の 78、 、pp.55-68.
를 경 고 있다. 본 논 에 는 は の び ーわが (이 약칭)를 심 식민지 경험이 어떤 식 재구 는지를 분 다.
2. 후 일본 재조일본인
모리사키는 1927 구에 출생 여 원인 버지 근 지
를 라 구, 경주, 천 갔다가, 1944 상 진 해 후쿠 카 귀 했다. 17간 식민지조 에 식민2 , 후 일본에 는 일본 모르는 구 재조일본인 ‘히키 게샤(
)’ , 조 과 일본 사이에 자신 체 에 해 고민했다. 모리사키가 식민지조 말 는 사상 ‘후 일본 사회’ 경험과 버랩 다. 후 일본 사회 격 속에 만 그 식 민지 경험 그 실체가 분명해지고, 언어 있었다. 후 일본 탄 노동, 여 , 계 , 민족 차별 등 고 면 , 나 민족 공동체 감 동 지 는, 식민 2 원죄 식에 ‘식민지경험’ 언어 했고, 나 가 ‘이 질 견과 승인’4) 이어지는 지향했다. 구식민지에 귀 베 고보, 고 야시 마사루, 후루야마 고마 등 마찬가지 일본 고 식민지를 고향 생각 귀 자 공통 감 , 즉 후 일본과 합 지 못 는 이 인 감 보여 다. 이러 심 다 과 같이 다.
は らずの である。 が で んだ
の である。その が に ったのか、 は だったのか。 はで であったのか。また の というところで はであったのか。いや、 であろうと をけずったか。 は、
ここで、この で、 まれながらの かであるという さを 4) (1984) は の び -わが 、p.226.
に っていなかった。 は ものかであろうと、 の でるかぎりの き をした。まるで った かを そうとするかのように。
は がなかった。が、しかし、 の なしは、 なにしたがっての である。 には、 にさわることが な
の がある。それは (そして によって られたものだ。5) (이 인용에 작 자가 강조 시 것임)
일본에 귀 ‘얼굴이 없는 자’ 자신 체 에 갈등
이야 고 있다. 모리사키는 지쿠 에 ‘재일조 인 존재는 일본 민 에게 사상 요 다’며6), 자신과 이스인 재 일조 인 통해 식민2 자신 존재 미를 찰 다. 모리 사키는 식민지 조 에 자랐지만, 조 어는 지 못했다. 후에 야 ‘속죄 신생’ 추구 며, 이웃에 사는 재일조 인 소 에게 우고 일본에 국인에게 웠다고 다.7)
내지를 모르는 내지인 , 자신 체 찾
후 20에 걸쳐 다. 개인사에 맞추어 조 사건, 출
, 속담, 민요, 생 법 등 써가며, 출생과 장 생각 마다 떠 르는 조 인 ‘어 니(オモニ)’ 마 고 싶었다고 다.

이 구 모리사키 ‘식민지 경험’이 어떤 식 재구 는
지를 보여 다. 개인 역사 추어 시 계, 그리고 조 역사를 조 며 스트가 이고, 거 에 식민지 17 경험이 재구 어 있다. 모리사키는 자신 식민지 경험 개인사 는 것이 니라, 식민지조 에 해 식 민1 들 말과 통해 식민지 조 에 해 후에 새 이 습 고, 그것 자신 경험과 추어 고찰 다.
‘귀 자’라는 상황이 식민지조 에 경험이 엇이었는가 라는 다고 있다. 그 답 찾 해 모리사키는 조 에 담 읽고, 국 해 인 요가 있었다. 이런 회 를 통해 모리사키는 1968 이후에야 식민지 경험 재구 나가게 다.
がものを き したのは に ってからだが、である ーかつての ーに、 ふれ したの
は もなかばをすぎてからだった。そしてそれは、そのものにふれるというよりも、フィルターをかけた のように、 を として の がふりかえった であった。( , p.223)
그것 원체험 자체가 니라 ‘ ’를 끼운 사진과 같 것이다. 그 ‘ ’란 계 식민지조 에 해 모리사키가 돌 본 식이다. 이러 식이 식민1 조 에 인식과는 단 나타났다고 있다.
3. 식민 1 들 조 담

1968 첫 국 이 이루어지고 나 야 모리사키는 복 식민지 시 를 회고 고, 1984 를 다. 이 회고담 모리사키 ‘식민2 뚤어진 원죄 식’이 엇인지, 그것 어떻게 극복 는지를 보여주는 단 라 것이다.
는 6장 , 출생부 1927 출생부 1937지
구에 경험이 1, 2장, 1938 부 1942지 경주 구에 경험이 3장, 1943-1944 1월 지 천 략 어 있다.
장과 종장 귀 직후 국 에 이다. 미 운
‘경주’에 체재는 17 5 도이지만, 모리사키는 그 경 주에 ‘나 원향’이라고 커다란 미를 부여 다는 이다.
그것 일? 당시 모리사키가 거주 구 미사카 (,
재 구시 구 삼 동 일 )에 존재는 부분 재조일 본인들이었다. 천에 도 상황 마찬가지 다. 구 일본인 거주 지역 일본군 보병 80연 군부 일본인 사가 집 다. 상 경주는 일본인이 어, 보다 많 조 인과 이 가능했다. 나는 구나 천이 주 일상생 에 경험이라면, 경주는 ‘식민지 조 고 역사 ’에 있는 일상 공간이 도 했다. 경주가 ‘원향’이 해 는, 그곳에 거주했다 는 사실뿐 니라, ‘고향’에 합당 역사 재구 요가 있었다.
이에 향 미 인 들이 에 등장 다. 부 모리사키 구 라지( , 1897-1952), 다카 시 도루( , 1878-1967) 미 시나 키히데( , 1902-1972) 같 역사 자, 사카 타
( , 1877-1974)라는 민간 역사 자이다. 이들에 주목 는
것 모리사키가 후 식민지 경험 회고 는데, 그 들 식민지조 연구가 향 미 이다. 모리사키는 식민지 단 20여 시간에 걸쳐 식민지조 에 에 해 언 식민1 자료들 읽고, 조 어가 지 는 식민2 경험과 인 식 보 여, 50 가 어 자신 식민지 경험 다. 에 언 인 들 모 부 모리사키 구라지
어 있다. 식민지조 인 는 ‘원’이라는 입장에 있었 식민1들이다. 모리사키 구라지 외에는 조 어가 창 남 일 본인들이었고, 식민지조 역사 를 집 고 연구 다. 귀 해 도 조 에 담 이 자 , 그들이 식민2들에 게 어떤 인식과 단 보여주었는지는 요 다.
식민지조 에 착 일본인 이주민 공동체를 이 어간 이주 착 민들 ‘국 커(brokers of empire)’라고 우 다 지칭했 다. 그들이 본국 자본과 통 (달자) , 근 국가 국 장 는 일본 조 것에 주목 개 이다.8) 그들 일본
과 식민지 조 사이에 일본인들에게는 식민지 조 상황에 , 조 인들에게는 식민자를 해야 는 임 를 임 없이 이야 했다. 재조일본인들 조 역사, , 를 집 고 연구 여, 조 에 담 만들어냄 써, 일본과 식민지 조 양쪽 재 는 존재들이었다. 그것 나 가 식민권 리이거나 잡이 역 도 에 없었다. 모리사키에게 향 미 식민1들도 마찬가지 입장에 있었다.
3.1 모리사키 구라지( , 1897-1952)
모리사키는 식민2 재조일본인 여 장했고, 그 과 에
부 모리사키 구라지가 미 향 단히 크다.9) 모리사키 연 보( 5 , p.345) 4장 에 르면, 모리사 키 구라지는 다 에 역사를 공 고, 독일 고 라()사회 연구소에 갈 이었다. 집 편이 어 워 이 라키 원 근 다. 1919 에 립 라연구소를 목 했다는 것 시 그가 사회, 노동 에 심이 많 다는 것 증 다.
모리사키 구라지는 1926 구공립고등보통 를 시작 1938
경주 , 1943 천 장 근 했다. 실
에 는 역사 지리를 담당 다. 모리사키 구라지는 다이쇼 리버 럴리스트 경향이 다분했 것 보인다. 가훈도 ‘자 임’이었 고, 후에도 가족 체가 ‘자 ’에 강 동경 보여 다.10) 부 그 지 인 장과 역사 식 해주는 존재
8) 우 다 승동 역(2020) 국 커 도 출 , pp.29-30.
9) 송 경(2018) 식민지 재조일본인 2 여 조 체험과 식민지주 -모리사키 가즈에( )를 심 - 35 , 국일본사상사 회, pp.233-255.
10) (1984) 、pp.219-222.
다. 모리사키 구라지는 조 어가 지 다.
모리사키 구라지는 에게 경주 남산 라보며 ‘남산에 뼈를
고 싶고’, ‘조 쇼카손주쿠( )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는 일본과 조 어느 쪽이 소 민족이냐고 는 질 에 ‘어 느 쪽도 소 민족이라 지 고’, ‘조 인 일본과 동등 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일본인들만 행 를 고 들면 조 인들이 소 민족과 같 슷 처지에 놓인다’고 답 다.( , pp.131-
132)
‘쇼카손주쿠’는 요시다 쇼인이 만든 사 이토 히 부미, 야마가타 리토모 같 이지 신 리 를 출했다. 식민지 조 이라는 새 운 경에 모리사키 구라지는 인재를 출 는 를 꿈꾸고 있었는데, 이러 사고 에는 조 식민지 를 ‘ 이지 신’과 같 부 개 여 는 이 분명 게 드러난다. 모리사키 구라지가 국주 식민 책 가장 일 에 실행 일본인 원이었다는 부인 없다. 그럼에도 이 에 해 모리사키는 ‘부 도 나도 식민지라고 는 타민족에 침해를, 민족 새 운 시 향 는 출 고, 그 속에 인권 추구 고 했다’고 다.( , p.220)
침략 에 새 운 출 과 인권추구가 가능 리라 생각 이
함 후 식민지를 잃고 공직에 추 모리사키 구라지에게 마 속 상처를 입히고, 식민지에 삶에 해 작열 듯이 자 게 했다.( , p.214) 모리사키 그 부 식민지 를 당 연 게 여 며, 태 움 느끼면 도, 자 인권 시 는 평 운 ‘재자’ 자임 는 것에 모 느끼지 것이다.
3.2 다카 시 도루( , 1878-1967)
のこと、 に する はまだ につかず、の で の を んでいた 、 に
のある などをみた。その くは の だった。どぎりとした。その はしばしば にしていた。 の から。 は を っているようには えなかった。( )

1916 구고등보통 장, 1922 조 독부 국 시
거쳐 경 국 조 어, , 가르 고,
후에도 ‘조 회’를 만들어 조 연구를 계속했다.11)
조 연구 명 다카 시 도루가 구고등보통 에 경 근 후 모리사키 구라지가 부임했다. 독부 국 료가 지 법요강 과 ‘자 임’ 주장 는 모리사키 구 라지 이 생각이 달랐다고 있다.
식민지 행 외에 모리사키가 다카 시 도루에 해 게
것 그가 편 조 민요집 에 해 이다. 조 어가 창했 다 카 시는 조 속담, 민요 등 집 고 간행했다. 다카 시 도루는 ‘조 ( ) 통해 국체 부재를 증명 고 그 자리에 일본 국 국체를 이식 ’고자 했고, 조 민요는 ( ) 과는 조 조 민족 담고 있는 자료
과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198(검색일:2020.12.18)
고 이를 고찰 여 식민지 에 용 고자 했다.12) 다카 시가 일본 국체를 강조 고, 식민지 체 에 입각해 ‘조 이 내분 약체 어, 일본이 병합 구했다’는 입장에 조 과 그 고 를 이해 고, 그것 식민지 에 용 고자 했다는 에 , 모리사키 부 가 동 어 운 이 있었다고 것이다.
3.3 미시나 쇼에이( , 1902-1972)
모리사키가 언 는 다른 인 미시나 쇼에이이다. 인용 에 모리사키는 후 그 작 읽고 부 ‘심 ’ 게 었고, 그것이 ‘후에도 계승 가능 시 사’이었다고
다.
미시나는 토 국 사 과 출신 일본과 조 고 신 를 연구 다. 미시나가 조 사 연구를 게 계 는 일본사 를 공 고 , 사는 이거니 사 도 조 를 모르면 일본 고 사 여러 가 해명 지 못 다 는 통감했 이라 다.13)
우리 강림신 에는 많 이 ()이 있고, 그 어떤 것 조 그것과는 가 도 달 상 보여 주는데, 편 어떤 것에는 상당 사 보이는 단 것도 있다.14)
인용 에 있듯이 미시나는 일본과 조 본질
공 는 부분이 있고, ‘달’ 도에 차이가 인 는데, 이는 동 일 권 면 도 내부에 존재 는 계를 강조 는 역
12) 임경 (2019) 다카 시 도루 ‘조 ’ 인식: ‘조 어’ 에 주목 여 동 지 186집, 연 국 연구원, pp.255-279.
13) (1972) の 、p.453.
14) (1973) 5 と 、p.564;심 희찬(2016) 미시나 쇼헤이 신 연구 근 역사 -식민주 역사 사상 사 재구 - 역사 연구 36 , 역사 연구소, p.270에 재인용.
사 이다. 미시나 역사 조 사 포를 일 본 근 역사 립시킨 이라 있다. ) 미시나 역 사 다카 시 도루처럼 직 조 체, 타 강 조 지는 지만, 조 과 일본 고 역사 연 신 연구 부 도출 고, 조 과 일본 연 강조 는 식민주 역사 나간다. 후에도 다카 시 도루 조 회에 이 여 며 조 사에 언 계속했다. 모리사키가 말 는 ‘후에도 계승 가능 시 사 ’이란 고 국과 일본 사이 연 ’ 견
는 것이었 ?
3.4 사카 타 ( , 1877-1974)
모리사키에게 조 과 해 향 명 사카 (명 )이다. 타
を する 、 は の を にくださったので、 になさい と が った。のちに に する し、 も ち いた である。だち の まいのそばを っていた 、 が った。この の 、 よ。 が きなの。 よりも。
の をするのよ。オモニを めて、 を えたり、 えたりして も るのよ。だからね。 たちはつきあわんようにしているのよ。うちのおとうさんたちはつきあわんのよ。
そうか は になったら のような になりたいと った。( , p.122

에 사카 타 는 조 입고 일본인보다 조 인
사랑 는 독특 일본인 다른 일본인들이 인 사
다. 모리사키는 그 작 후에도 지참 고, 어른이 면 ‘ 사카 같 자가 고 싶다’고 도 요 게 언 다. 사카는 모리사키 구라지 마찬가지 식민지 조 일본인 원이었다.16) 다카 시 도루나 미시나 쇼에이 같이 카데 미즘에 소속 지 에, 연구나 연구사는 거 없다. 그 럼에도 일 강 회 , 경주 신라 , , 신 연구 해 는 재도 자주 언 는 인 이다.
사카는 1877 카이도에 태어나 1907 회 공립보통, 1915-1930 경주 공립보통 원, 1938-1945 경주 장 등 역임 인 , 작도 상당히 많다.17) 조 에 행 다 다. 첫째, 조 인이 다니는 보통 원이었다. 인용 에 보 듯이, 사카는 일본인 사 조 상황과 조 인 동 이 해 고 계몽 는 욕이 높 , 재조일본인들 부 ‘별종( 이라는 평가를 다. 국경 도시 회 에 일본인이어 상 이 걸릴 도 험이 있었지만, ‘함경북도 역사’를 리 거나, 조 인 생들과 인간 인 가 있어, 조 인 생들이 보 해주었다 고 다.18)
작가 장 주(, 1905-1997)에게도 큰 향 미쳤다. 사카가 경주공립보통 에 근 , 장 주는 사카에게 사랑 일본어 실 이 늘고, 신라고 답사도 며 고고 과 역사에 심 가 다고 다.19) 국인 장 일본어 작품 작 가 , 식민지 권 에 항, , 도일, 일본인 귀 라는 여러 굴곡 거 장 주라는 식민지 조 출신 가 행 에 식민지 일본인 원 향 이 어른거린다. 째, 신라 굴, 조사, 리에 여 다. 1913 ‘경주
16) 다카사키 소지 이규슈 역(2006) 식민지 조 일본인들-군인에 상인, 그리 고 게이샤 지 역사 평사, pp.100-101.
17) 일 강 직원 자료 http://db.history.go.kr/(검색일:2020.12.20),
(1967) 45、 、pp.71-110 참고.
18) (2009) ある への - のこと- コレクション の 5 、pp.71-72.
19) 사카는 작에 장 주를 언 지 지만, 장 주는 여러 번 사카 향 상 게 언 다. 시라카 타카(2009) 장 주 연구 동국 출 부, p.251; (1975) の 、pp.3-146; (1977) と
、pp.69-72.
고 보존회’라는 민간단체가 만들어 , 일 강 재를 조사 고, 내외에 소개 는 데 큰 역 는데, 그 심에 그가 있었다.20) 사카는 식 역사 자는 니었 나, 신라 역사 굴, 리, 시를 통해 조 고 사 연구에 큰 여를 다 고 평가 다.21)
그럼에도 불구 고, 그러 작업들 조 인 신라, 경주가 니
라, 일본인 고 를 상상 는 것 연결 었다. 야마다 요시 ( )가 ‘신라 도시(=경주)에 보면 가미요( )가 생각날지도’라고 것처럼, 일본인 경주에 조 내 특 장소를 만났다 보다 고 일본 보고 있었다.22) 사카 같 재조일본인 식 속에 경주는 일본 외부가 닌, 일본 고 역사 인 고도가 었 것이다. 모리사키 작에 도 경 주는 ‘나라()’를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째, 신라 과 신 를 집, 리 여 일본어 간 다. 사카는 독부 지 에 경주 1-3 (1921) 연재 고, 이후 단행본 간행 고, 여러 작에 실었다.23) 쟁 에는 신라 에 여 내 일체를 주장 는 했다. 사카는 신라 에 상, 탈해, 공, 연 랑 등 들고, 실 일 강 임진 란 일본에 간 조 인 후손 조상 찾 사 를 들어 연 내 일체 사 를 들고 있다. 동해를 사이에 고 고 부 지 일 간 가 이어지고 있다는 증 용 고 있다. 그 고 신라 굴 과 연구 귀결 결국 일 상 간 사 과 ‘근원


이러 사고 이 식민지 조 인들에게는 용 어 운 식민지 체 를 당 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감했다. 사카 신라 에 입각 내 일체 심지어 일 동조 에 동 고, 후에도 일이 같 뿌리라는 것 증명 는데 집 장 주에 게 조차, 1910 후 소 시 에는 용 어 웠다.
はこれらの を のころ、いやというほど かされ
た。それらの たちの の と じ で ったので、 の
がおいてあったという へは も と してつれられていき、 の がつるされてあったという ( の だったかおぼえていない も にいった。 のはいっていたかごが れついたという は のある から も した。の の が の のでもあったからである。
はそれらの を として くきいた。が、 というものを、そのころ い でも、 に け れられない かが にあった。あれは のつくり だろうぐらい け めていた。( 략) の はいつも のことばで ばれた。
するに、 , , 、みな の 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はいずれも のひとである。そして、
は から たものと っている。 の は である、との は、 に にあるようだった。25)
미시나가 인종 , 연 근 계를 강조 는 일 동조 것에 해, 사카는 신라 에 여 인종 , 연 근 계를 강조 며 일 동조 주장 는 차이를 보인다.
1920 일본인 원이면 조 독부 국 소속 인
、p.89.
에 다카 시 도루나 사카 타 같 이들 창 조 어 능 탕 많 를 집했다. 집 는 고 부 조 과 일본 동질 뒷 침 는 근거 과 편찬 에 용 었다. 식민지 조 동들에게 낯 일본 보다 조 래 소재를 사용 는 것이 식민지 에 효과 이라고 단 것이다. 이에 라 고도 경주 고 ‘신라를 상상 는 장 가 고, 신라 그것 보 는 역 ’ 했고, ‘ 경주는 지 어 번 게 ‘외지’ 나라( )에 ’었다.26)
<사진2> 27)
째, 후 귀 자 신라 과 연구를
다. 사카는 후에도 다카 시 도루가 심이 어 만든 조 회 에 여러 논 했다. 편 일본에 건 간
26) (2012) の とその びの 1 、
p.15;식(2012) 조 독부 편찬 일본어 과 국어독본 조 과 고찰 18집, 연민 회, pp.104-117; (2014) における の 、pp.149-174.
27) 사진1 の 지, http://www.nl.go.kr(검색일:2020.12.20) : 사진2 の 지, http://www.nl.go.kr(검색일:2020.12.20) : 사진3 Gyeongju Face- Patter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yeongju_Face-Pattern_tile.jpg
(검색일:2020.12.20)
국 재 에 조 도 했다. ) 이상 보면, 사카는 식민지 원, 독부 료 , 민간 역사 자 , 일 동조 근거가 는 조 과 일본 공통 역사 , 뿌리를 찾, 내 일체를 실에 실 인 이다. 사카 신라 연구는 조 에 일본 고 를 상상 게 여, 일 동조 사상 근거 작용 고, 그 인 집과 연구는 그 근거 용 것이다.
그럼에도 재조일본인 2 모리사키 가즈에게 그는 ‘경주 일본
인’ ‘식민지조 ’에 향토 를 가지고 그 향토에 착 는 람직 식민1 모델이었다. 미시나도 다카 시도 단지
연구 상 ‘경주’를 라보 다면, 사카는 경주를 새
착 거주자 입장에 라보 이다.
4. 식민지 경험 재구
이상, 모리사키 식민지경험 찰, 재구 과 조 담 신자들에 해 고찰 다. 이들 식민지 장에 조 에 해 자료를 집, 연구, 신 이들이다. 이들 식민주
에 면 도 이후 식민지 시 조 연구에 향 미쳤다.
1965 일 양국 국 상 를 했다. 양국 간에 민간인들 래가 시작 고, 재조일본인들 국 가 다 다.
원에 장 사 가쓰에( ) 같 작가들 이 국 고, 그 를 국 언 이나 일본 미 어에 다. 일회담 이후 재조일본인들 국 그들 후 국에 인식 구축 는 나 계 , 식민지 조
에 노스탤지어, 식민지체험 객 , 찰, 자 집 고 등 다양 향 가지고 있었다. 일회담 이후 국 나 이에 식민지 시 를 회고 는 담 들이 주 게 고찰 어야 는 이 이다.
모리사키는 거 20 주 국 고 식민지 경험에
해 해 다. 모리사키는 1968 41에 경주 고등 30주 행사에 작고 부 신 여 후 처 국
다. 후 평 집 어 니 나라 상 (ははのくにとの
, 1970), 이족 원 ( の ) ( , 1971)에 과거를 회상 고, 국 에 해 했다. 그 지 식민2 자신 여러 에 언 했지만, 식민지 조 에 경험 본격 지 다. 1980에 들어
び -わが ( , 1984) 17간 식민지 경험이 후
40 만에 게 다. 1980 일역사 과 일 간에 갈등이 고조 시 이 도 다.
1985 3월, 58에 거 20 만에 국 재 다. 생 인 채경희( からゆきさん 번역자)를 동 여, 구, 울
다. 1986 리 울리는 산 속 - 국 행 85 (こだまひびく のなかへ- , 1986) 었다.
다시 20이 지나 개 말 마 어느 식민 2 후
(つのことばつのこころ ある の ) ( ,
1995)를 직후에, 1995 7월에 번째 속 등 장 지 를 했다.
식민지조 회고 는 여러 작 에 는 그 체 시
를 다루는 에 요 다. 장에 작가는 자신 식 민지 경험 는 를 이 게 히고 있다.
わたしは の を しておきたくて、 い
のあと、ようやく にしたのは、わたし のことではなく、わたしと な と えるからゆきさんのことであった。わたしと じようにアジアの に しつつ に を した、いたいげな を つめることは、わたしには をから き すような いだった。そのことでわたしは、ただのになりたかったのだが。
が、 は えないのだろう、ここに、 いペンを り、
じように の、けれどもはるかに い の 々を すことにする。( , p.10
자신 식민지체험 객 고 싶었는데, 시작 가라 키상 에 해 쓰는 것이었고, 그 경험이 자신 뒤에 찌르는 것 같 고통 했고, 그 과 통해 ‘이름 없지만’, ‘훨 죄가 많 시 일 인들 매일 매일 ’ 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에 살 보통 일본인들 일상 그들이 살면 범 에 없었 크고 작 ‘죄 ’ 드러내는 것이 도 했다. 그러 죄 식 에 해 모리사키는 식민지 경험 재구 것이다. 그 에 식민지 를 당연시 다카 시 도루같 식민1 에 해 는 거
리를 에 없었다.
울러 모리사키는 식민지경험 말 , ‘시’
시 다. 여부가 니라, 일본 열도가 시 과 연결 역 사 행 에 맞춘다. 이 에 미시나 사카 타 시 사 이 소 다.
사카에 모리사키 평가는 굴곡진 것이었다. 모리사키는 1953 에 라 그램 에 연락 여 사카 귀 지가 마쓰에()인 것 냈다. 1952 모리사키 구라지가 사망 고 1953 남동생이 자살 직후이다. 그럼에도 사카를 찾지 다 가, 국 직후인 1968 10월에 모리사키는 그를 고, 1970 9월 2차 다. 사카가 후 에 게재 논 들 다 찾 읽었다고 힌다. 그를 고, 그 일 생에 해 노트를 했다.29) 거처를 소 여 찾고, 연보에도 입 도 사카 ‘해후’가 모리사키에게 요했다.
、pp.353-355.
それは にとって、 な のなかにしみとおっている
の な の をさぐるための、その となるもののように、なぜか、 えた。( の 5 , p.64)
모리사키는 사카를 것에 해 ‘나 민족 뿌
리를 찾 , 실마리가 는 것’이라고 도 미를 부여 고 있다. 사카 재회는 모리사키가 후 식민지 경험 는 시 과 겹 다. 국 고 나 10월에 그를 찾 것 모리사키 내면에 있 ‘식민지조 ’에 어떤 감 들 리 고 자 는 욕구 겹쳤 것이다.
사카 해후 고 나 모리사키는 ‘이민족과 만남’이라는 마 사카에 해 다. 사카를 사실 언
지 고, A라 칭 며, 그가 조 1907 도() 시 시 , 시 주 , 회 에 조 인 생들과 맺 미담 자 게 소개 다. 그럼에도 사카를 ‘객 보면, 지 권 큰 도에 들린 나에 지나지 는다’고 다.30) 그 후 사카는 에 다시 언 다. 경주에 사카
처 면 날, 모리사키는 경주 부지에 있 신 종, 일명 에 종 소리를 듣는다. 책 목도 에 종이 ‘조 인들 그 색 어 니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 p.122) 고 것에 것이라 추 다. 에 사카는 지 자 역사 를 이해 고 집 며, 지 자 동 는 그래 모리사키가 ‘닮고 싶 ’ 재조일본인 모델 그 진다. 에 는 신라 고도 경주 여러 고 이 등장 는데, 신종, 계림, 에 해 언 며, 신라 고 에 해 부 과 를 나 는 장면 사카 경주 참고 했다고 보인다. 모리사키가 상상 고 신라 일본 만남 사카 신라에 담 들 향인 것이다.
사카에 해 ある への - のこと (1995) 에 자 게 언 다. 모리사키는 사카 조 다루이 도
、pp.51-60.
키 ( ) 동합( ) 에 가 다고 거나,
사카는 ‘조 과 일본 천황 에 평등 합병’ 꿈꾸었 나 군부 가 해 조 히 식민지 몰 었다고 이야 했다고 다.
のアジア は の と している。けれ
ども 々の は ずしも ではない。 と とのかかわり は からみるならば、それは と を にする。ちょうどいま きている たちが、そうであるように。31)
사카에 모리사키 평가는 ‘민족 뿌리를 찾
실마리’에 , ‘지 권 큰 도에 린 나’ , 다시 ‘닮고 싶 모델’ , ‘국가 과 궤도를 같이 ’ 인 변 고 있다.
객 보면, 사카는 조 지도 는 임 를 맡 자
사명감 가지고 ‘국과 식민지’ 사이에 그 개 고 조 는 재조일본인들 입장 여실히 보여 다. 식민지조 에 사카는 국 일본 지()를 구 는 일부분 조 역 사, 민속, 를 집 고, 일본어 간행 다. 고 시 민 족 간 이동과 를 상상 며, 20 시 민족 간 이동과 를 상상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식민 계 속에 히 식민자 언어 멸, 용어 일본어 를 강 했다는 사실 간과했다. 결과 보면 ‘일본 국 카 데미즘 계’인 것이다.32) 모리사키 구라지, 다카 시 도루, 미시 나 히데 키, 사카 타 라는 식민지 원 역 에 일본어 일본 를 식민지조 인에게 일 에 강 는 것이 었다.

5. 결

후 일본 사회에 귀 자 살 간다는 것, 식민지 조 에 살 다는 것 미를 복 집요 게 모리사키는 고 있다. 그 답 어떠 식 출 었는가? 모리사키 식민지경험 식민1 조 에 인식과 연속 면 도, 단 는 과 통해 재구 었다. 그것 식민지 일본인이었 자 체 과 직결 것이었다.
식민2 모리사키는 후 지속 일본어 식민1 들이 남 식민지 자료들 습 며, 자신 억과 체험들 회고 다. 부 모리사키 구라지, 조 역사 를 연구 자들, 신라를 연구 사카 타 같 식민1들 작업 찰 했다. 그들 식민지조 역사 를 체 계 면 도 동시에 식민지조 일본인들 ‘고향’ 만들어주 는 근거를 구축 했다. 신라-고 -조 역사가 겹겹이 인 경주에 일본인들이 ‘신라 고도’만 보고자 것 , 고 신라 일본 연 강조함 써, 식민지조 과 일본 일 체 를 당연시 고, 20 경주에 이주 여 토착민 뿌리를 내리 는 재조일본인들 자 체 보 해 다. 그 에 그들이 만든 조 담 습 모리사키는 사카 타
같 인 에게 강 심 연 느끼며, 식민지조 에 인식에 연속 는 이 있다.
편 는 후 식민지 일상 일본인들 매일매
일 시 역사 며 회고 는 것 , 그 자신 포함 여 재조일본인 모습과 직면 는 것이었다. 사카 타 를 롯 식민1들 조 담 ‘국가 과 궤도를 같이 것’ 에 죄책감과 속죄 식 읽 있다. 그 에 식민1
부 단 시도했다 것이다.

それは とともに へ、 を、そしてわたしをおとしいれたものであった。 の のようにわたしたちが、 のや たちとひそかに ち おうとしたもの、 の
への やその な への な は、 な よりもなお い、わたしはそのことを、 にさえ 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まっくらだった。( , p.218)
그럼에도 매 남는다. 모리사키는 식민지에 죄 식 에 면 도, ‘개인에 신뢰 고 에 개인 이 침략보다 다’고 다. 모리사키가 신뢰 고 닮고 싶 모델이었 사카 타 는 조 인에 신뢰 신라 고 과 에 보여주었지만, 그것 ‘일 동조’ 를 말 고, 훌륭 ‘내 일체’ 모범 보여주는 이러니를 낳
다. 자 체 견 장소 ‘경주’에 모리사키 시 ‘량’ 차별주 자 재조일본인 모습에 연속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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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ju Face-Patter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yeongju_Face- Pattern_tile.jpg(검색일:2020.12.20)
<Abstract>
Colonial Korea Described in the
Kazue Morisaki’s Literature
- Reconstruction of Colonial Experiences through Kintaro Osaka -
Oh, Mi-Jung
In this article, I examined the ways in which Kazue Morisaki’s experience in Colonial Korea has been historically and socially remembered and reconstructed. I suggested that Kazue Morisaki, a second generation in colonial Korea, represents continuation and discontinuation of the first generation’s perspective about Chosun and Japan. First of all, as a Japanese repatriate in the post-war era, She tried to disconnect her colonial experienc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first generation by reflecting on the memories and experiences of the colonies under the tension with Japan at the time. Next, She reconstructed her own memories and experiences by continuously learning through the documents related to the colony written in Japanese, and by comparing them with the history of Japan and Asia. This can be seen in Gyeongju, the Sound of my mom’s call. She reconstructed her colonial experiences through thoughts of Kintaro Osaka or such first generation’s persons. Kintaro Osaka showed trust in Koreans and affection for Silla’s unique legends and culture, but it ultimately gave rise to irony that set a good example of the theory of same ancestry of Japanese and Korean. Therefore, Morisaki’s perspetive on ‘Gyeongju’ as a place of her identity is continuous to the first generation in colonial korea as ‘good discriminators’ too.
Key words : Kazue Morisaki, Kintaro Osaka, colonial experience, Japanese resident in Korea
고 일 : 2021 01월 09일 심 사 일 : 2021 01월 12일 게재 일 : 2021 0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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