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1

3.1 운동 -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3.1 운동 

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때는 1919년(기미년) 2월 하순 어느 날, 어스름이 깔리는 안국동 사거리 근처에 한 사내가 땅 밑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 이었다. 그는 발 밑으로 들려오는 어떤 기계 소리를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옆 건물인 보성 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였다. 불빛은 없었다. 그가 닫힌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불빛이 환했고 운전 기에서는 무엇인가 인쇄중이었다. 빼내어 보니 「독립선언서」였다. 인쇄소를 급습 당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추-: 33인의 1인)의 얼굴이 흙빛이 되 었다. 신철은 선언서 한 장을 챙겨들고 말없이 인쇄소를 나갔다.

어느 고등계 형사의 죽음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불법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최린은 그에게 5천 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값이 41원이 었다. 일본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음으로써 3•1운동의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 여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철은 현장을 피하여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압될 무렵인 5월 14일 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경성헌병대에 투옥 중에 곧 자살했다. (《매일신보》 1919년 5월 22일자)

본래 독립선언서는 최남선불#이 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장이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만해해 한용운 # 이 다시 쓸 것을 자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이 금석같은 맹약을 식하였다 하여 일본의 무신을 죄하려 하지 않노 라'는 식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게 되었다.

태화관은 이완용의 별장이었던 곳

거사 전날인 2월 28일 경 지도부는 최종 점검을 위해 재동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우선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은 약 속 장소인 파고다공원으로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민족 대표들은 어디에서 모일 것인가? 여러 얘기 끝에 당시 장안의 제일 가는 요정인 태화관제에서 모이기로 했다.
이 요정은 한말에 궁내부 의전국장을 지낸 안순환후이 운영하던 곳으로, 요정으로 문을 열기 전에는 이완용축#의 별장이었다. 이곳은 지 난날 주산월#이 일하던 곳이었다. 당시 명월관 기생 이난향축의 『회고록』(《중앙일보》 1971년 1월 15일자『남기고싶은 이야기: 명월관편」)에 의하면, 산은 손병희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사이'였다고 한다.

(좌) 3•1운동의 산실 태화관. (우)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 29인의 회동

3월 1일 오후 2시 「3 1절 노래에 기미년 3월 1일 정오'라고 가사를 지은 것은 정인보해 의 착오임), 약속대로 젊은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였으 나 민족 대표들은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당황했지만 곧 경신※학교 출신인 정재용 t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민족 대표 의 불참에 대하여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분, 연희전전문학교의 김원벽규로, 그리고 한위건이 민 족 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그때가 오후 3시였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2시에 모이기로 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모인 것은 오후 3시였으며 숫자 는 29인이었다.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카, 정춘수출* 등 4명의 목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음식상이 나왔으나 식사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 받아 읽어본 후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것을 경하하며, 더한 층 노력하자'는 연설을 한 다음 그의 선창으로 만세 삼창을 했다. 이때가 오후 4시였다.

전화통고설은 입증되지 않아

이 무렵에 강기덕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들이 태화관으로 몰려와 민족 대표들이 파고다공원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이에 당대의 논객 이었던 박희도가 무저항•비폭력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방침에 따라 불가피하게 불참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곧 이어 경찰이 들이닥쳐 민족 대표 29인을 체포하여 남산의 왜성대(1초:경무총감부)로 연행했다.

종래의 관찬 기록에 의하면, 경찰이 태화관으로 쳐들어 온 것은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으로 하여금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집회를 통고하도록 했고, 이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 민족 대표를 연행했다고 되어 있으나 (원호처, 『한국독립운동사』 2권, p. 102) 출처가 없다. 아 마도 이 기록은 이난향의 회고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이 전화통고설은 어떤 일차 사료로써도 확인되지 않는다. 전 화를 정확히 몇 시에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화를 건 것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혈안이 되어 민족 대표의 소재를 찾기 위해 2시간이나 헤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갑성후의 경성지방법원 예심 조서(4월 28일자)에 의하면, 그는 3월 1일에 집을 나서면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서영환#*을 시켜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솜/117에게 「독립청원서」를 전하도록 하고 집합 장소를 태화관으로 기록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의 정황 으로 볼 때 '집에서 부리는 사람'이 조선 총독을 만나 문서를 전하러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자수'냐, '통고'냐, 아니면 '투항'이냐 하면서 한때 치열한 감정 싸움까지 번진 적이 있으나, 사실의 내막을 정확 하게 알고 나면 그처럼 다툴 사안이 아니었다. 자수라 함은 '범죄인이 체포되기 전에 사직 당국에 스스로 출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 운동이 범 죄는 아니므로 자수란 말은 온당치 않다. 통고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원초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투항이라는 용어는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더 이 상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행위로서 이 또한 독립운동자들에게는 맞지 않는 용어이다. 그냥 연행되어 간 것이다.

변절자들도 있어

연행된 민족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와 경무총감부, 그리고 경성지방법원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손병희는 '나는 한일 합병에 대하여 별로 찬성이라든가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손병희에 대한 경성지법 예심조서, 4월 10일자) 정춘수는 '나는 본래 한일 합병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정춘수에 대한 검사조서, 3월 21일자) 홍병기는 '총독부에 독립건의서를 제출하고 그 회답을 기다리면서 선 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태화관에 갔다'고 대답했다. (홍병기에 대한 경찰조서, 3월 1일자)

S• 분증 관련사들의 사진

한용운은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일관되게 독립 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한붉은 심문 중에 옥에서 순국했다. 그 밖의 민족 대표들 중에는 지조를 지킨 분도 있고, 훼절한 사람도 있다. 오늘날 미국의 최고 지성의 한 사람인 촘스키Noam Chomsky의 말을 빌리면,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
31운동의 지도부의 전략과 당일의 처사를 볼 때 우리는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3•1운동을 영웅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1 독립운동 기록화 - 3•1 운동의 주역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더 많다.

따라서 3•1운동을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의 주역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더 많다. 역사의 조타수1포는 당대의 지식인들이지만 역사의 추진 세력은 그 시대의 민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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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기

이 글이 나간 후로 나는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33인 유족회가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학의 이사장실과 총장실을 찾아가 나의 파면을 요구했 다고 들었다. 그들은 나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들이 가장 격렬하게 항변한 것은 표제가 3•1운동은 33인의 거사가 아니 다'라는 부분이었다. 그후 그들은 '동아일보와 신복룡 교수 역사 왜곡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를 압박했다. 그 분들이 항의한 부분(표) 이 나 혼자만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전혀 무근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의 반론문을 여기에 함께 게재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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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문>

2001년 8월 4일자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3•1운동편은 사실과 다른 점을 기술함으로써 33인유족회에 많은 아픔을 주었으므로 이에 다 

첫째, 글의 표제어에서 <3•1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의 거사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3•1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민족 대표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비하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했다. 역사의 주체가 그 시대의 지도자인지 아니면 민중인지의의 문제는 사관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민족운동사를 전적으로 민중 운동 만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균형 있는 역사 서술이 아니다. 지도 계급의 발화가 없는 자연발생적 민중 운동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연행 이후에도 <독립 소원의 지조를 지킨 이는 극히 일부분'이라는 소제목>과 지조를 지킨 분으로 한용운과 양한묵만을 지칭한 것은 여타의 모든 분들이 변절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약속 장소에 나갈 때의 민족 대표의 각오는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고, 문초 과정에서 독립 정신을 지킨 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셋째,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네 분이 마치 현장 도피의 성격을 갖는 것처럼 기록된 것>은 사실과 다르다. 태화관에 참석하지 않은 네 분은 각자 지방에서 만세 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책무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늦었거나 참석을 못한 것이다.

넷째, 약속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은 민족 대표가 파고다집회에 참석할 경우에 흥분한 청년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함으로써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 을 걱정한 것이었다. 특히 약속 장소가 이완용의 별장이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친일적인 장소에서 민족 정기를 표현하는 것이 더욱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다섯째, <본문의 삽화에 기생들이 시중드는 장면은 애국 정신을 훼손한 것이다.> 태화관에 참석한 열두 분의 목사님들은 음식이 나오자 민족을 위한 기도를 올렸고 기생의 시중을 받지 않았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도 엄숙하여 차려놓은 음식조차 들지 못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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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열혈한 젊은이들은 내가 북한의 주장을 베꼈다고 주장했지만 과연 그들이 북한의 역사 인식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런 말을 했는지도 의심스럽다.

33인유족회 중에서도 천도교측의 인사들이 가장 격렬하게 항변했다. 33인 유족회의 반론 이외에 천도교측이 지적하는 것은, 첫째로, 신철 은 최린으로부터 돈을 받았으며, 둘째로, 3월 1일 그 시간에 태화관의 지도부와 파고다공원의 학생 대표들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있었으므로 학생 들이 지도부를 찾아다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셋째로, 태화관 기생 산은 1913년부터 손병희의 소실로 살림을 차려 기생의 생활을 청산했기 때문에 3월 1일의 태화관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철이 돈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그를 비하하려는 측과 그의 의기를 칭찬하는 측의 주장이 달라 어느 쪽의 말이 맞는지를 속단하기 어 렵고, 따라서 어느 쪽의 말에 더 비중을 두고 믿느냐는 독자가 판단할 문제이다. 지도부와 학생 사이의 연락의 문제는 학생측의 자료로 입증될 때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지 지도부의 말만 믿을 수는 없는 문제이다. 산월의 문제는 덕이 안 되는 문제이므로 여기에서 덮는 것이 순리라고 나는 생각 한다. 더 까발려 보았자 서로 상처만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명서를 통하여 <'야바위꾼 신복룡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요구했다. 내가 정말로 야바위꾼인지,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역사적 논쟁에 그런 용어를 써도 괜찮은 것인지, 나의 주장이 과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안인지, 논쟁을 이런 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나는 납득할 수 없다. 

기왕에 나간 「전봉준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는 글로 인하여 서로가 마음상한 터에 이번의 글로 더욱 감정이 북받쳤으리라는 인정하지만, 이번의 일련의 사태에서 천도교측의 대응 자세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진실로 문제삼을 부분은 손병희의 법정 진술이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대응도 없었다. 그들이 보내준 유인물과 기관지의 기사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글 들이 사실을 오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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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3.1정신을 모독하지 말라는 독자 투고(kccar@ netsgo.com)가 있었고, 33인 중의 일부 변절의 문제는 엄연한 사실이므로 밝힐 것은 밝혀야 한다는 투고(asp593@hanmail.net)가 있었다. 나는 33인의 문제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은 사실이지만 3•1정신을 모 독할 뜻은 없었다. 3•1정신과 33인의 문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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