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 240708
91년 5월 투쟁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1
2
여기서는 5월투쟁이 갖는 의미에 대해 기술해 보겠다. 화두를 잡기 위해
첫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작 91년 5월 투쟁 관련 영상
둘째. 한국민주화운동사3을 텍스트로 한다.
91년 4월 26일 강경대군이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정권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했을까? 한국민주화운동사3, 433~434쪽에는 노태우 정권이 취했던 조치와 그에 따른 영향을 아래와 같이 열거한다.
4.27 안응모내무 경질, 사건 관련 서장 및 중대장 직위해제
5월 2일 대통령 간접 사과, 진압전경5명 구속
5월 22일 노재봉 총리 자진사퇴 수리
5.25 내각 개편
5.29 내각제 개헌 포기 명시 등이다.
이에 따라 김대중 신민당 총재는 “국민 대다수가 부도덕하고 무능한 노 정권의 퇴진을 바라고 있지만 국민들은 한편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재야.학생들에 의한 정권퇴진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4월 26일 강경대군 사과 이후 노태우 정권은 정권 퇴진이외에는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야당 또한 근원적인 문제는 차기 선거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정권 퇴진이외에는 다른 조치가 무의미했다. 2021년 제작된 위 영상에도 이런 분위기가 잘 녹아 있다. ”잇따른 죽음과 불타오르던 뜨거웠던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권은 퇴진하지 않았다“고 결말을 요약한다. 결국 투쟁의 끝이 노태우 정권 퇴진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3
정권의 퇴진은 합당한 사유가 있을 때 적절한 법적 과정을 거쳐 진행되는 것이다. 91년 강경대군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정권이 퇴진해야할 사안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태우 정권은 정치적 책임을 나름대로 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당시나 지금이나 91년 5월 투쟁의 끝이 정권의 퇴진이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권의 비민주적 행보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식민지 사회의 전민항쟁의 관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은 한국사회를 식민지로 보고 식민지 사회에서는 선거를 비롯한 민주적 제권리가 근원적으로 보장될 수 없다고 봤다. 따라서 전민항쟁을 통해 식민지 파쇼폭압기구를 해체해야 비로소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다고 봤다.
87년 6월항쟁에서 학생운동이 반독재투쟁을 대하는 관점 자체가 그러했다. 87년 직선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학생들의 생각은 좀처럼 식민지라는 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91년 두 개의 민주주의가 충돌했다. 설사 노태우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의 임기는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관점이라면 6월에 이어 한국을 식민지로 보고 전민항쟁을 통해 파쇼통치를 송두리째 부숴 버려야 한다는 것이 급진적 민주주의 관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
민경우 240711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 그냥 개인 공부임
1
80년대 중반 아크로폴리스 광장의 연사와 청중들은 전두환과 부인 이순자를 그들의 용모에 빗대어 가차없이 조롱하고는 했다. 80년대 초반 관악 캠퍼스의 관점에서 보면 전두환은 시대착오적인 폭군이자 일고의 여지조차 없는 어리석인 혼군이었다.
아마도 그 정점에 88 서울 올림픽이 있었을 것이다. 3S 정책에 대한 운동권의 혐오와 분노는 매우 커서 대학생이었던 나는 오랫동안 88 올림픽 내내 심리적 도피처를 찾아 헤매 다녀야 했다.
2
돌이켜 보면 내가 또는 우리가 틀렸다. 82년 시작된 프로야구는 2024년 현재 전 국민의 관심과 사랑속에 절찬리에 진행되고 있고 88년 서울 올릭픽은 그야말로 전국민의 열광적인 지지와 관심속에 대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을 비판하는 “한국민주화운동사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은 전두환 정권의 3S를 지적하면서 “통행금지 해제 조치와 함께 전두환 정권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을 크게 완화하였다. 그리하여 ‘애마부인’,‘엠마뉴엘’과 같은 도색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평가는 도덕적 엄숙주의 또는 강한 선민의식을 담고 있는데 이는 당시 운동권들이 갖고 있던 3S 정책, 나아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모멸적 평가와 맞닿아 있다.
경제적으로는 김재익과 안병직을 주목해야 한다. 김재익은 정부 주도 경제에서 민간 주도 경제로의 변화를 모색했고 안병직은 운동권의 식민지 타령에 일격을 가하며 중진국 자본주의론을 정초했다.
3
3S 정책은
- 전두환 정권이 정권 연장을 위해 취했던 일련의 공작이라는 측면과
- 한국경제의 성장을 배경으로 중산층으로 성장한 국민들의 내적인 요구를 충족시킨 측면
모두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운동권은 주로 전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후자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면
시대의 추이는 후자가 옳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S에 대한 평가는 전두환 정권의 평가와도 관련이 있다. 단적으로 전두환 정권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폭력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저질 정권인가
아니면 나름의 정치적 맥락을 지닌 정권인가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이후 진행된 6,29 선언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이 있다.
70년대부터 본격화된 중화학공업화는 고도 경제성장과 중산층을 길러 냈고 그렇게 해서 성장한 중산층은 정치적 민주화, 경제에서 민간 주도 경제로의 이행, 사회문화적 자유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민주화는 6.29 선언과 함께 직선제로, 사회문화적 자유는 3S 정책으로 나타났다.
6.29 선언은 다른 방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나는 가끔 꽤 가끔 6월 민주항쟁이 유혈충돌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으로 끝난 점을 감사드릴 때가 있다. 그 만큼 6.29선언은 시민 항쟁에 의한 군부의 일방적인 굴복이 아니라 정치세력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고 정치세력에는 군부-민간정치세력-재야와 학생운동과 시민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
민경우 240712
4.19가 학생운동의 기원인가?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 공부
1
진중권 교수는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에 대한 논평에서 건국전쟁을 역사수정주의라거나 반헌법적이라며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 https://v.daum.net/v/20240214180832595
진중권 교수에 따르면 4.19는 단순히 민주항쟁이 아니라 일종의 건국과 같은 보다 근본적인 사건이고 헌법에 수록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보는 듯 하다. 따라서 이승만이 4.19를 통해 축출되었다면 그를 복권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는 반헌법적, 역사수정주의라는 것이다.
나는 진중권 교수를 꽤 합리적인 지식인으로 보는 편이다. 그런데 건국전쟁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도를 한참 넘어섰다. 4.19는 반독재 민주항쟁으로 나라를 세우는 건국과는 한참 차원이 떨어지는 문제로. 건국이 영토.국민.국방 등과 관련해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이라면 민주주의는 그 틀안에서 소프트웨어를 정비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나라를 건국했던 이승만의 역할과 공이 있고
- 그 보다 하위 수준에서 독재와 연관되어 있던 이승만의 과와 잘못이 있다고
보면 되는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왜 4.19를 논하면서 헌법.역사수정주의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 비약하는가이다.
2
4.19를 단순한 민주항쟁이 아니라
일종의 건국신화쯤으로 보는 일련의 견해는 문학작품에서 잘 발견된다. (잘 모르지만)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는 다음과 같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
이에 따르면 4.19는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는 민족의 시원, 공동체의 근원과 연결된 역사적.민족적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4.19를 대하는 당대의 인식이었고 이 당대의 인식을 공유하는 집단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것이 일종의 민주화운동권이다.
3
대충 그렇게 보고 학생운동사의 시작을 4.19로 해도 문제가 없을 듯 하다.
4.19를
뭔지 잘 모르지만, 신동엽의 시구를 빌리면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을 공유하는 집단 공동체로 보면 어떨까 싶다.
==
민경우 240712
전두한.노태우 시대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 공부
1.
전두환-노태우가 그렇게 철저히 무능하다면 첫째. 모든 변화의 한쪽 주역은 미국이거나 민중.재야가 된다. 둘째. 6.29 선언과 같은 극적인 정치적 변화가 있다면 전두환-노태우는 단순 참가 또는 있으나 마나한 무능한 존재이고 전두환.노태우의 정치적 지분은 없다.
2
일단 6.29 선언이 그러했다. 6.29 선언에서 전두환-노태우는 군부의 진압을 막고 정치과정을 직선제 선거로 돌려 세우는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 운동권은 6.29 선언을 전적으로 시민의 승리로 봤다.
90년 1월 3당합당도 그러했다. 전두환-노태우는 6.29 선언에서 의미있는 플레이어였다. 6.29 선언에 이어 군부는 김영삼의 부산, 김종필의 충청을 끌어들여 DJ의 호남을 고립시키는 정치연합을 시도한다. 6.29 선언에서 군부의 지분을 인정한다면 이 연합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운동권이 보기에 6.29 선언에서 전두환-노태우의 정치적 지분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대부분 시민.민중의 몫이었고 선거에서 진 것은 후보 단일화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3당합당은 군부가 진행한 나름 합당한 정치연합이 아니라 아무런 지분도 없는 군부가 진행한 정치공작에 가까운 것이다.
여기서 3당합당에서 DJ에 합류했던 정치연합이 두 갈래로 쪼개진다.
DJ는 3당합당이라는 정치질서에 순응하고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인다. 대중경제론에서 3세계 민족주의와 같은 관점을 버리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점, 91년 5월투쟁에서 재야의 거리투쟁에 일정한 거리를 둔 점 등을 들 수 있다. 3당합당이 정치연합이라면 그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뒤집는 새로운 정치연합이라야 하는데 97년 대선에서 DJ+JP연합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반대로 3당합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재야.민중운동 진영은 3당합당을 전면 부인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태의 독재야합(보수대연합)으로 받아들인다. 아무런 지분도 없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정치공작을 통해 정세를 뒤집은 만큼 남은 것은 거리 항쟁밖에는 남지 않았다. 91년 5월투쟁, 96~97년 한총련 사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3
개인적으로는 만사지탄이다.
나는 수십년간 6.29 선언은 전적으로 시민들의 항쟁의 결과이고 6.29 선언 이후의 과정은 무능한 전두환.노태우를 끌어 내리면 된다고 봤다. 6.29의 연장선에서 3당합당은 논란의 여지조차 없는 정치공작으로 이를 주도한 김영삼은 민주주의의 배신자이고 노태우 정권은 타도되어야 한다고 봤다.
반면 이른바 87년 체제하에서 군부의 지분이 인정된다면 우리가 할 일은 정치혁신, 새로운 정치연합을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면 될 일이었다.
몇가지 실천적 쟁점을 다시 환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91년 5월 투쟁, 96~97년 한총련 사태는 잘못된 것이다. 둘째. 군부의 지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6.29 선언 결정적으로 90년 3당합당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또한 6월민주항쟁과정에서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점, 93년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저항하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셋째. 김영삼을 배신자 등으로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
민경우 240616
문제의 80년대 중반, 북한의 개입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 공부
1
여기서 의문은 한국 주사파 운동에 석연치 않는 도약이 있다는 점이다. 느슨한 경사로를 오르던 주사파 운동은 80년대 초반 갑자기 기울기가 급상승하며 남한에 상륙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는 주사파 운동의 도약과 관련된 몇가지 문제를 다뤄 본다.
2.
대남공작원 김동식이 쓴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144쪽, 기파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980년대 초 김정일은 공작원들의 세대교체와 관련해 새 세대 청년들을 선발하며 그들을 지도핵심으로 키울 것을 강조했다. 당시만 해도 공작원 집단의 주류는 6.25를 전후로 해서 월북한 남한 출신 공작원들이었고 그들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할 수 있는 공작원으로서의 활동을 계속 해나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이로써 공작원의 세대교체는 필수적인 사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북한 그리고 김정일이 구세대의 노쇠화에 직면하여 새로운 대남 방침을 제기하며 사업을 적극화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3
2의 결과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이 그런 방침을 세우고도 제대로 집행을 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작업이 현실화.사건화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는 것인지 나로써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 수준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예속과함성 둘째. 한민전 창립 셋째. 김동식 등 신세대 공작원의 파견 등이다.
김성만.양동화 등 재미유학생들이 관여된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80년대 중반 남한 학생운동에 대한 북한의 직간접적인 개입을 확인할 수 있다. 84~85년 무렵만 해도 학생운동의 주된 슬로건은 반독재.반파쇼였다. 예속과함성이 특별했던 것은 반미를 전면에 두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고 당시 이런 수준의 인식의 기원은 대부분 북한이었다.
85년 7월 한민전 창립선언문에 따르면 통혁당을 한민전으로 개칭하는 것에 대해 정세와 대중운동발전의 요청 등으로 설명한다. 80년대 중반 북한이 통혁당을 그대로 둘 수 있었음에도 굳이 이를 한민전으로 개칭한데는 남한 학생운동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하겠다는 의사로 보인다. 실제로 87년 6월항쟁과 전대협 출범에 한민전 방송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방송을 넘어 인적.조직적으로 관여된 정도는 확인하기 어렵다.
세 번째는 김동식 등 신세대 간첩과 자생 주사파의 결합에 의한 민혁당.중부지역당 등의 결성이다. 90년대 초반 남한에는 민혁당.중부지역당이외에도 구국전위.왕재산.일심회 등의 북한과 연계된 선이 가동되고 있었다.
3
운동에서 비약은 좀처럼 없다. 80년대 중반 남한 학생운동에서 주사파.친북파.전대협 등이 만들어진데는 무언가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이 빈틈을 메꾸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
민경우 240718
70년대 중후반 서울대 학생운동 스케치 / 소박한 휴머니즘.행동 공동체
- 민경우가 쓴 학생운동사 / 공부
1
“그러고 보면 77년과 78년 내가 사귄 1백 명에 가까운 후배들, 나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나의 존재에 가장 큰 근거가 되어준 사람들은 지금 대부분 학자가 아니면 기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원래 학자가 될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그들을 투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권력 투쟁이나 파벌싸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개인들끼리도 어떤 경쟁심 같은 것도 없었으며 집단적으로도 어떤 헤게모니 다툼 같은 것도 없었다.
인간의 본성 이면에서 성악설이 거기에 근거하는 권력욕이라든지 하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지하 써클들은 서로 역사도 다르고 선배들도 달랐지만 완전히 하나의 동질감과 단결을 이뤘으며 그런 단결의 중심에 비밀모임이 있었다.
그런 경험은 나의 인간관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성선설 쪽으로 기울게 했으며 공산주의 가능성을 너무 쉽게 믿도록 했는지도 모른다”라고 쓰고 있다.
2
위 인용문에 나오는 비밀모임이 세칭 무림으로 서울대 10개 지하써클에서 76학번을 한 사람씩 모아서 만든 일종의 써클 연합체와 같은 조직이었다. 학생들은 학교 단위의 가투투쟁이라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일종의 전술적 지도조직을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써클 연합체가 70년대 중후반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조직적 실체였다. 주대환은 군대를 갔다온 덕에 73학번으로 참가해 일종의 좌장역할을 했던 것 같다.
주대환의 기록이외에 몇가지 기록이 있다. 그 중 특별한 기록물은 서울대 농촌법학회 50년 역사를 다룬 “고난의 꽃봉오리가 되다”이다. 이 또한 70년대 학생운동을 주대환과 비슷하게 묘사한다. 부연하자면
첫째. 주로 세미나를 하고 뒷풀이 자리에서 선후배 동료간 동고동락하던 형태였고(학교와 무관하게) 둘째. 가끔 연합 가두시위를 통해 세를 과시하는데 셋째. 유신 시기임을 고려하여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울한 전망에 짓눌려 있던 상황이었다.(한번의 가두 시위로 기약없는 감옥과 군대를 가야 하는) 넷째. 농활에 대한 각별한 추억들 다섯째. 학생들이 현실을 타개하는 선각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강조 등이다
상황을 종합하면 농촌.사회주의적 성향을 기저에 깐 소박한 휴머니즘.행동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5.18 이후 학림(이태복.전민학련).민추위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학림과 민추위는 무림에서는 찾아 보기 어려운 단어.개념들을 꺼내 들기 시작한다.
첫째. 학생은 선각자가 아니라 혁명가.투사이고 둘째.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이며 셋째. 조직과 행동의 중요성 넷째. 레닌과 모택동 등의 중요성이다.
넷째와 관련해 주대환은 학생운동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출발은 4.19, 거기서 연유하고 김수영의 시로 대변되는 급진적인 자유주의를 밑바탕으로 하여 싸르트르, 브레히트, 루카치 또 마루쿠제, 프롬, 그리고 파농, 아민, 스위지 같은 사상가들의 책과 사상이 흘러 들어오고 그 후에 다시 거꾸로 거슬러 모택동과 레닌과 맑스, 엥겔스로 되돌아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주대환의 회고에서 중요한 것은 싸르트르~~스위지로 발전했던 공부들이 거꾸러 거슬러 모택동.레닌으로 되돌아간 점이다. 이것은 70년대 중후반 목가적인 휴머니즘 공동체가 혁명.조직.실천을 고리로 급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같은 사회주의라도 레닌 이후 선진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한 서구형 자본주의에서 19세기~20세기 초반 러시아.중국 등 후진국을 배경으로 한 낡은 시야에 묶이게 됨을 상징했다.
==
민경우 240718
무림에서 학림.민추위로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 공부
1.
민추위의 활동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84년 8월 17일부터 10월 4일까지 깃발 1~2호를 제작하여 서울대에 배포
둘째. 84년과 85년에 걸쳐 서울대.연대.고대 등에 민투 또는 삼민투를 결성하고
셋째. 매우 격렬한 가두시위 등을 수차례 벌였다.
더 중요한 것은 민추위가 85년을 고리로 학생운동의 다양한 분화에 허브가 된다는 점이다. 이를 일별하면
첫째. 김근태 배후조정과 고문 사건이 있고
둘째. 민추위 멤버였던 박종운을 잡기 위한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고
셋째. 노투 조직원이었던 김영환이 이로 인해 수배가 되고 86년 주사파로 탈바꿈하는 등의 사건이 있다.
2.
앞의 주대환의 증언처럼 불과 몇 년 선배로 낭만적인 휴머니즘을 갖고 있었던 학생운동 지도그룹 무림에 비해 민추위는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학생운동을 극적인 단계로 몰고 갔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적인 개입과 지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바 민추위에 영향을 미쳤던 제 경향을 알아본다.
첫째. 민추위 공소장에 따르면(공안사건기록, 세계) 84년 2월 8일~6월 13일까지 문용식이 전민학련 관련자 박문식(서울대 경제학과, 1958년생)을 접촉하여 토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문식은...소위 민족민주혁명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교양하고(문용식에게) 민족민주혁명의 주체와 내용, 전략-전술을 비롯하여....등에 대해 모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는 문용식과 민청련의 접촉이다.
문용식 공소장에 따르면 85년 2월 하순경 김근태-문용식, 4월 4일 문용식이 이을호,장신환,양재원 등과 접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근태는 민청련 의장으로 있던 85년 2월 하순경 ~~ 문용식을 만나 ~~ 현하 사회혁명 방법론에 대한 논리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민족민주혁명이 각종 학생운동단체의 통합지도이념이 되어야 한다고 교양하는 등 문용식에 대한 이념적 지도를 하여 왔고”
“85년 4월 4일 민청련 편집실에서 이을호가 주제발표를 하면서 ”NDR은 한국사회구성체를 신식민주의적 독점자본주의로 파악“하고 ”민청련 정책실은 이러한 NDR 이념을 보다 분명히 정립하고 그 이론을 보다 엄밀한 과학적 운동론으로 발전시켜 점차 확산해 나가는 운동론의 확대재생산 기능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첫째와 둘째에 기초하면 무림에서 민추위를 비약하는 과정에서 선배.주변의 개입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알 수 있다.
민추위 다음은 구학련이다. 무림의 주력이 76학번이었고 문용식이 79학번이었다. 민추위를 구성했던 하부 성원들 중 다수가 82학번이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영환이 다음해 구학련을 통해 파란을 또다른 차원에서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
민경우 240719
사회주의에서 북한으로 이르는 길, 김영환의 사례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 공부
1
후자의 흐름은 주로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면 5.18 이후 학생운동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열정에 휩쌓여 있었다. 덕분에 당을 만들어 세상을 뒤집어 엎겠다는 레닌의 저작들이 인기를 끌었고 이론적인 것도 보다 정통적인 것, 마르크스의 저작에 관심이 갔다.
85년 정점에 이른 학생운동의 사회주의 사조에는 근본적인 벽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북한이었다.
“김영환이 공산주의 혁명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북한에 대한 언급이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한번은 선배에게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왜 연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또 몇 차례 이 문제를 술자리에서 제기할 때마다 선배들은 한결같이 아예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투로 반응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국가보안법 체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보다 깊은 데 연유하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서울대의 정통사회주의 운동권에서는 북한이 과연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자리하고 있었다”(“82들의 혁명놀음”, 선, 우태영)
2
서울대 사회주의 운동권의 관점에서 북한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이를 넘기 위해서는 비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용기를 넘어 북한 그리고 사회주의권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안목이 긴요했다.
이 우회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필요했다. 안기부조차 20대 중반의 김영환 대신 40대 중반의 가공의 인물을 내세웠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필자 또한 이 대목에서 약간의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여기서는 김영환이 사회주의에서 북한으로 비약하기 위한 과정에 징검다리가 되었던 부분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그리고 그것은 주사파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듯 하다.
위 책, 82들의혁명놀음에는 남민전.북한 방송 등 다양한 징검다리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역사가 아닐까 싶다.
85년 10월, 15일간의 구류를 마친 후 김영환은 주로 도서관에서 “주로 읽은 것은 한국독립운동사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것들이었다. 김영환은 특히 김일성의 항일운동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한국 출신 학자들이 쓴 책들이었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전면 부정한 책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항일운동을 인정하는 쪽이었다. 다만 김일성의 항일운동이 별것 아닌데 너무 부풀려졌다거나 북한이 선전의 목적으로 과장한다거나 아니면 나중에 소련 편향으로 흘렀다는 등의 이유로 비판하는 것들이었다. 김영환은 김일성이 항일운동을 한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고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르크스라면 사회주의가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이다. 이건 이미 70년대 해결되었다.
둘째.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면 레닌이나 모택동이 중요해진다.
셋째. 남한 주사파 또는 김영환의 최종 귀착지는 북한의 주체사상이다. 그런데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는 일단 북한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 필요한데 이 때 중요한 징검다리가 역사이고 역사를 통해 일단 북한으로 관심을 돌렸으면 다음으로 주체사상으로 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넷째. 북한 역사에서 일단 김일성 가짜설을 돌파해야 하는데 이는 80년대 초반 공산주의 저작들에서 이미 밝혀 놓았다.
다섯째 국내 공산주의 운동에서 박헌영과 남로당이 아니라 김일성 세력이 주류임을 밝혀야 하고
여섯째. 그 김일성 세력이 주체사상을 창립하고 전개한 세력임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첫째~네번째까지가 과제이고 다섯째~여섯번째는 다음에서 다룬다.
김영환의 작업은 남한 주사파의 착근 과정을 잘 보여준다. 70년대 학생운동의 사회주의 분석은 주로 맑스가 옳으니 레닌이 옳으니 하는 비교사회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반면 사회주의 분석이 북한으로 이동하고 북한 이해의 고리가 역사에서 찾아지면서 갑자기 역사 문제가 전면에 제기된다.
70년대 학생운동은 자신의 생각을 휴머니즘.이성 등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사회주의 또한 그 연장선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가 역사를 매개로 북한으로 이동하는 순간 학생운동은 보다 토착적이고 음울한? 동양적 민족주의와 결합하고 세계사의 흐름과 결정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
민경우 240719
한민전을 따르는 혁명조직 / 자민통
- 민경우가 쓰는 학생운동사 / 이 글은 거의 기록에 가까움
1
“두번째 대표적인 자생적 주사파 조직은 ‘반미청년회’로 조혁.안희정등 고려대 학생운동권이 중심이 되어 전대협 결성을 주도하면서 전국조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1987~88년 전투적 학생회론을 앞세워 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 주사파의 전국적 확산을 실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반미청년회는 전투적 학생회론을 주장하면서 주사파 활동가조직을 추스르는데 실패하고 노학연대에 대한 결핍 등의 비판에 직면하면서 쇠락하게 된다
세 번째. 대표적인 자생적 주사파 조직은 ‘자민통’인데 정통주사파인 구 자민통 시기를 거쳐 89년 하반기 노동운동의 새벽그룹(장명국 등)과 연대하면서 전국적인 대규모 통합적 주사파 조직 신 자민통(구해우 등)을 만들게 된다. ‘자주적 학생회운동론’을 통해 교조적 주사파 반대, 활동가조직의 중요성, 노학연대의 중요성을 앞세워 1990년, 1991년 학생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990년 안기부에 의해 발표된 자민통 사건은 구 자민통 일부가 검거되면서 발생된 사건이다.”
이어 176쪽에는
대중적 사상조직운동을 내세우던 신 자민통 조직의 쇠락은 학생운동 등에서 다시금 교조적 주사파가 확산되는 조건을 제공하게 된다. 이는 1992년 중부지역당 사건을 통해서 표출된다. 또한 90년대 이후 주사파 조직의 핵심적 특징은 80년대대 학생운동의 자생적 주사파 지하조직과는 달리 북한의 노동당과 직접 연계성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것이다. 1992년 민혁당과 중부지역당 그리고 이후 구국전위사건과 일심회 사건 등에서 확인된다. 이 같은 교조적 주사파의 발호와 지하조직의 북한노동당과의 연계는 주사파 NL 학생운동의 소수화로 귀결된다.
==
==
===
==
==
==
==
==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