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4

민경우 김구와 이승만

 

김구와 주사파 통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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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생 아버지, 1933년생 어머니가 1970년대 서울에서 1965년생 아들과 간혹 대화를 나눌 때 당신들은 말하곤 했다.
한국이 존재했던 것은 미군 때문이야. 당신들의 입장에서 실제적인 군대와 물리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존재가 주인공이었고 그들의 주된 스토리는 중공군, 인민군 등 군대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어머니가 들려주던 중공군 이야기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1979년 해전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점령군이고 그들은 일제를 등용했다. 1948년 들어선 대한민국은 민족정기가 훼손된 친일파의 나라다 등등 그렇게 우리는 해전사가 깔아놓은 시대를 살고 있고 김구는 그 시대의 총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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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주사파가 성장하면서 주사파적인 통일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주사파는 김구 이야기를 교묘히 비틀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김구가 충돌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편승한 단선단정, 김구는 남북협상회의를 통한 통일정부를 강조하기 시작한다.
김구의 기념비적인 성명이 있다. 제목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위 성명에서 김구가 협력하지 않겠다고 주장한 단독정부가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이다. 따라서 김구의 성명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화하는 무서운 함의를 깔고 있었다. 주사파는 역으로 이 점에 착안했다. 주사파가 주장했던 통일은 북한 주도의 통일이지만 대중적으로는 일단 김구의 생각을 징검다리로 두기로 작정한다.
89년 3월 문익환 목사, 89년 6월 임수경 학생의 방북이 정확히 김구의 노선과 동일했다. 북한 주도의 통일을 노골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아니면 그것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 가상의 통일 조국을 만들어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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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시작된 주사파적인 통일운동은 96~97년 한총련 사태와 함께 막을 내렸다. 주사파적 통일 이야기도 대중적으로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김구-주사파-문익환.임수경이 어우러졌던 어떤 맥락에서 일부는 교묘히 살아남았다.
결론을 맺기 전에 오해를 바로잡을 것이 있다. 주사파를 좁게 정의하면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조선노동당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주사파는 몇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그렇지 않다.
북한은 조선노동당과 주체사상에 대한 거부감.공포감을 고려하여 대용물을 내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한민전이다. 따라서 주사파의 전성기안 88~90년대 중반 주사파 대부분은 한민전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로 요약할 수 있다.
정리하면 주사파는 적절한 대용물을 내세워 그들의 충성 대상을 교묘히 치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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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그렇게 활용되었다. 김구의 사상,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겠다는 주장은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주사파와 잘 어울렸다. 그들은 김일성.북한.조선노동당 대신 김구를 대용물로 세웠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영상이 있다. 2000년 7월 23일 이인영 통일부장관 청문회에서
이인영 후보자는 “저는 우리의 국부는 김구주석이 되는 것이 더 마땅했다”고 답한다.
전대협 1기 의장, 반미청년회 멤버로 이인영의 역사관은 김구를 한참 뛰어 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과 지향을 대변하면서도 대중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지위를 고려하여 김구 정도면 자신의 사상과 노선을 집약적으로 대변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인영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고 그를 바탕으로 김구는 시대의 총아로 부상했다. 2020년대의 한국에서 김구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다. 70년대의 김유신.광개토왕은 자취가 희미해진 지 오래이고 이순신.세종대왕 또한 기억이 가물하다. 여전히 역동적인 생명력을 가진 것은 김구를 비롯해 총.칼 들고 일제와 싸운 사람들이다.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주사파 학생운동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전대협 출범식은 연인원 1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끝났고 그들 모두는 다시쓰는한국현대사.태백산맥 등을 통해 대중적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80년대 그들의 염원과 사상을 살짝 김구에 심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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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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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는 사상을 내포할 때가 있다. 오래 전에 본 우화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려서부터 쇠줄에 묶여 자란 코끼리는 막상 쇠로 된 목줄이 끊겨도 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른다. 목에 감긴 물리적인 쇠줄보다 마음속에 드리운 사상이라는 쇠줄이 훨씬 강하고 질기기 때문이다.
진보 지식인에 동아줄과 같은 질긴 목줄이 감겨져 있었다. 그것은 첫째.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불평등의 근원은 외세이고 이를 극복해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 둘째. 화폐.시장 경제는 우리 내부를 분할.분열시킬 수 있기 때문에 욕망을 자극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몰아 혁명론을 설계했다. 사회구성체논쟁, NL-PD로 불리웠던 이 거창한 논쟁의 주제 또한 외세 때문에 한국의 공업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명을 통해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도덕과 수양, 전통과 우애를 강조하던 자리에 혁명 투쟁이 대체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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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이어 벼락처럼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었다. 세상이 변했지만 사상의 잔재는 질기게 살아 남았다. 코끼리를 가로막던 목줄은 사라졌지만 목줄의 여운은 지구상 최대의 육상 포유류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변화는 외부에서 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돌이켜 보면 이런 것들이 있었다.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
김우중의 수필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한비야의 여행기, 지구 밖으로 행진하라
이건희의 담화, 자식과 마누라빼고는 다 바꿔라 등등
일단 주목할 것은 지리였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세계를 논했지만 세상은 우리 밖에 있었다. 제국주의는 언제나 거대하고 우리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었으며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싸워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리적 범위를 넘어서는 사상적 범위는 한반도가 된다.
반면 김우중은 세계로의 진출이었다. 수출에 관여했던 그의 경험이 독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우는 처음 사업을 벌일 때부터 해외로 눈을 돌렸다. 대우가 창업할 당시는 수출하면 오히려 밑진다는 부정적 사고 방식이 일반화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보다 앞섰던 몇몇 기업들은 해외로부터 수입만 하고 있었지 수출을 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우리는 과감하게 해외시장의 개척에 착수했다”
수출에 대한 태도가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수입에서 수출, 한반도에서 세상,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역경을 헤치고 도전하는 삶이라는 한국의 기업가 정신 또는 새로운 사상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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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0년대 한국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주역들, 가령 김우중과 이건희는 새로운 한국을 건설한 성과를 바탕으로 시대를 선도할만한 사상과 비젼을 뿌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사상과 업적이 한국사회에 보다 적극적으로 투사되지 못하고 낙후한 사상, 반외세.농촌과 농민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안빈낙도와 수양을 강조했던 흐름에 주도권을 넘겨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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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San and 9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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