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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 사회주의 붕괴를 인정하지 않은 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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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청년들은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어도 사실상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고 믿었고 여전히 사회주의적 이상이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도전했던 그들의 시도는 원칙적으로 틀리지 않은 것이었으며 사회주의는 언젠가는 실현될 대안적 체제였다.
사실 내가 그랬다. 나는 감옥에서 IMF 구제금융 발표를 지켜봤다. 나는 곧바로 파국, 전면적 파탄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떠올렸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알-카에다 때도 유사했다. 나는 TV를 통해 충돌 장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더랬다. 이 역시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80년대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인텔리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심리 상태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경제상황에 대한 담론과 기술에서 극단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한미FTA 범국민운동본부의 이해영은 한미FTA를 낯선 식민지로 가는 길이라 묘사했고 헬조선과 같은 극단적인 조어들이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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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구체적인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공부의 뼈대가 된다고 보고 간단히 정리한다.
첫째. 개방경제에 대한 반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미FTA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 ‘경제 천동설 손절하기’에는 한미FTA를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변형윤 교수들의 서울대 제자들이 많고 이들은 이후 노무현.문재인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다고 한다.
둘째. 신자유주의를 시장과 자본 주도의 경제를 대변한다고 했을 때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그에 맞서 사회적 경제.사회권.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인간다움 등을 강조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원초적인 관념, 자본주의는 원래부터 글러 먹었고 무언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확장하는 방향에서 문제를 찾기보다는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게끔 견인했다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미국식 자본주의와 사민주의적 색채가 짙은 유럽식 자본주의의 우열이 전자의 우위로 갈린 점이다.
셋째. 둘째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방도로 직접민주주의, 민중의 정치적 참여를 중시한다. 촛불-문재인정권-이재명 정치세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본과 관료.전문가 집단을 불온시하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국민.대중.민중의 정치참여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위 세가지가 모두 실현된 것이 다름아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였다. 그들에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악마와 같은 신자유주의와 일진일퇴하는 살아있는 혁명이었던 것이다. 차베스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의 내막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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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문재인 정권-이재명 정치세력도 위 궤적위에 있는 것 같다. 시장과 자본주도 경제에 대한 부정속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의 연장선하에 있는 것이 기본소득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방도가 직접 민주주의인 셈이다. .
결론적으로 문재인과 이재명을 분석하기 위해 사회주의 붕괴 국면으로부터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비율로 하자면 한 20~30%
안병직, 지식사상 분야의 빛나는 별
- 개인 공부 노트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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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70년대까지 식민지반봉건사회론, 주변부자본주의론이 우세했으나 사구체 논쟁을 통과하면서 “한국경제는 이미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자본주의.공업화가 불가능하여 사회전반에 낙후한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이론이다. 70년대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자본주의화가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불행했던 것은 이를 북한과 북한 추종론자들이 오랜 기간 주장하고 운동에서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한국 사회운동의 질곡과 퇴행을 긴긴 세월 온전시켰다는 점이다.
둘째.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경합했던 신식국독자론은 한국이 공업화.자본주의화된 것은 맞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다국적 기업의 역할 즉 종속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안병직은 “한국경제발전의 주역은 한국인기업이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이병철.정주영.김우중의 활약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현실이 아니라 이론의 영역에 들어가면 딴 소리를 한다. 우리는 종속이라는 뿌리깊은 DNA를 어쩔 수 없어 자본주의화.공업화를 인정하면서 거기에 기어코 종속적이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자기만족하는 것 같다.
신식국독자란 예나 지금이나 묘한 이론이다. 안병직은 신식국독자에 대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회구성체론이라는 것이 독점강화 종속심화하는 테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경제가 국독자단계까지 발전했다고 하면서도 한국경제가 발전하는 것인지 퇴보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발전하는지 퇴보하는지 하는 상식적인 문제도 알 수 없는 이론을 내걸고 그것이 사회구성체론이라고 하니 정말 딱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신식국독자이론이 한국경제가 공업화.자본주의화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기묘한 정신상태의 산물이라고 본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했던 주사파도 제 정신이 아니지만 그것을 넘어선다고 주장했던 이른바 PD파의 수준도 그러했다.
셋째, 한국인들의 활동으로 독점 자본이 형성되는데 이때의 독점은 산업자본주의를 지양하고 들어선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아니라 “처음부터 국제적 영향하에서 독점자본으로 형성되어 조립.가공적 성격이 강해 그 체질이 매우 취약하고 또 계급으로서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종속해 있다”고 말한 후 이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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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은 식민지반봉건사회 주창자로서 정파로 분류한다면 NL-주사파이다. NL-주사파의 (경제적인 맥락에서) 핵심적인 주장은 공업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70년대 한국에서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면서 그는 이른바 NL를 버린다.
공업화.자본주의화가 확인되면서 한국의 공업적 발전을 추인하려는 제 흐름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이른바 PD이다.
PD와 안병직이 갈라서는 지점은 그런 공업화가 어떻게 가능했고 이후 무엇을 해야하는가이다. 안병직은 그런 작업이 한국의 대기업과 군부의 연합에 의해 이뤄진 만큼 이후에도 한국 자본주의의 이후 발전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반면 PD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지금 안병직처럼 세상을 본다. 한국경제가 있고 한국경제는 정책 담당자들이 세계정세의 변화추세에 맞게 정세를 분석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독자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말이다.
안병직은 혁명이론에 찌든 과잉담론의 시대에 상황을 담담하게 추인하고 그에 맞춰 실사구시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던 지식.사상 분야의 별이었다. 우리는 과거를 이해함에 있어 신영복.리영희.박현채.변형윤과 같은 사람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반면 안병직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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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자기 합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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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유시민의 생각은 그의 출세작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 ‘20세기의 종언, 독일 통일’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글을 95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95년이 중요한 이유는 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3~4년이 지나 사회주의 붕괴의 결과가 충분히 확인된 이후라는 점이다.
그는 말한다.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지만 “사회주의 이념마저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만든 사회주의 국가는 무너졌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생활의 불안정에 대한 항의와 비판으로서 사회주의가 가진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해 보려는 민주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한 경제체제”가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면 충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에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한과 같은 불필요한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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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주장도 자본주의는 뭔가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고 사회주의적 이상은 정당했는데 아쉽게 실패했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사민주의라는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로 이어지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천편일률적 레파터리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몇가지 특징을 도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주의적 이상은 결국 자신들의 과거 행적에 대한 강한 변론, 자기 합리화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회주의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헛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옳지만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이상적인 실험,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졌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 이상은 운운하는 유보적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 신자유주의 국면이 도래했을 때 재빨리 친사회주의,반자본주의 스탠스로 선회하게 된다. 실천적으로 매우 해로웠던 것은 21세기 20년 동안 신자유주의를 악마화하며 급진적 사회경제적 개혁에 경도된다.
셋째. 역시 반성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사상들이 어지럽게 혼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유시민은 사회주의 붕괴를 정리하면서 엉뚱하게 “사회주의 몰락과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의 모습”이란다.
바로 앞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이 틀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변했던 열혈 청년 유시민은 열린 사회라는 누가 보아도 듣기 좋은 말을 찾아 자신의 주장을 적당히 물타기한다.
나라면 90년대 중반 시점에도 마지막까지 사회주의적 이상을 주장하는 청년 유시민에게 보다 애정이 갔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정희수
그래서 그런지 신자유주의를 완벽히 행한 김대중대통령한테 정권말기에 세아들 부정부패 사건당시에 유촉새가 김대중 하야하라고 난리 친거였군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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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교조적 인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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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자신이 그랬으면 하는 자아 이미지를 갖고 있다. 리영희의 책들을 보면 유독 자유인.휴머니즘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90년 7월 범우사에서 펴낸 리영희의 평론집의 제목은 “자유인”이다. 특별히 그런 제목을 달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그는 굳이 자신의 책 제목을 자유인이라 붙였다. 70년대 극우 반공주의에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던 자신의 작업을 그렇게 보는 듯 하다. 그리고 거기에 긍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94년 두레에서 출판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71쪽에는 “내가 전환시대의 논리” 등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휴머니즘이었지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작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기저에 휴머니즘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운동권 대부분이 그렇지만 나 또한 한 때는 리영희에 열광했던 시절이 있다. 나는 그의 주장처럼 무언가를 신격화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본다. 그의 용어를 빌리면 자유롭게 말이다. 내가 또는 우리가 그에 열광했던 어떤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 그의 시대를 넘어설 때가 한참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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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유롭게 세상을 본다고 하면서 한치도 넘어서려 하지 않는 도그마가 있다. 자본주의는 착취와 불평등의 사회이고 사회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지 못했지만 본래부터 선한 존재라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주의의 인간중시적 가치관만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리영희만이 아니다. 강만길.유시민 등 거의 모든 진보 지식인들이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 나아가 그는 자본주의는 자신만의 힘으로는 교정될 수 없고 적어도 사민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가치로 보완해야만이 수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구의 존재처럼 보인다.
이것이 교조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교조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고 자본론으로 대표되는 후기 경제적 분석은 시대에 부합하지 않지만 전기 분석은 ”특히 아직도 계급의 해소 내지는 계급의 융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많은 제3세계 지역과 국가에서는 마르크스 인간학의 사상적 설득력은 크다“고 쓰고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는 또 마르크스의 사상을 전기 휴머니즘과 후기 경제분석으로 구분하여 전자를 중심으로 보완하자고 주장하면서 이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풍부화이며 인류전체의 행복으로 승화되는 의미이다.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후퇴라고 서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리고 쓰고 있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거나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쓴 91년 시점에는 적어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마르크스주의에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영희는 그가 자신이 그랬으면 하는 이미지와 달리 경직되고 관념적인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또다른 관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문화대혁명과 같은 현상에 집착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는 실용.현상.유연함보다는 이념.도그마에 보다 친화적인 성향이라고 본다.
나는 70년대 중국과 베트남의 진실을 파헤쳐 한국 사상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리영희를 존중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에서 그가 강조했던 사상과 인식의 자유를 진정으로 추구한다면 우리는 리영희와 그의 세계를 터무니없이 지탱하고 있는 또다른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Yi San
문화혁명에 대한 환상을 평생 버리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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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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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강만길의 견해
‘강만길의 책, “역사가의 시간” 323쪽~330쪽에는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그의 견해가 실려 있다. 일단 흥미있는 것은 해당 단락의 제목이다. “‘사회주의 조국’이 무너지는 ‘역사’도 겪고”라고 제목이 달려 있다. 사회주의 조국에 따옴표가 달려 있다. 강만길 교수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강만길의 놀라운 워딩은 이후에도 있다.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는 생산력이 발전했지만 극악한 체제이다.
둘째. 공동체주의로서의 사회주의가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셋째. 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자본주의는 더 극악한 체제, 신자유주의가 되었다.
넷째. ”21세기는 내가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내가 되는 사회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각각의 주장에 대해 인용할만한 주장들이 많으나 생략한다. 마지막 주장에서 내가 곧 우리가 운운하는 대목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문구를 연상시킨다. 단락의 제목을 그렇게 단 것이 실수가 아니었던 셈이다. 강만길 교수는 이미지와 달리 매우 관념적이고 과격?한 사람인 것 같다.
강만길의 생각은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진보적 지식인 다수가 갖고 있는 생각으로 보인다. 유시민의 생각도 거의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 유시민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다룬다. 각각에 대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적 지식인 모두가 자본주의의 생산력에 대해 우호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의 운명은 혹평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 듯 하다.
반면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푸줏간 주인에 대한 비유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돈벌이에 대한 관심이 비인간성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비유로 읽힌다.
둘째.세째.넷째는 경제적 분석이라기보다는 도덕적 다짐처럼 들린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그것은 도덕적이고 문명적이며 우월한 체제였고 사회주의의 견제가 사라진 조건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극악한 사회체제 신자유주의가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악마화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주의 체제와 경쟁해서 이긴 자본주의 체제 다음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결론도 도덕적이다. 강만길 교수는 그것을 “21세기는 내가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내가 되는 사회체제“라고 한다. 1980년대 펄펄 피가 끓던 20대 청년 혁명가가 썼을 법한 험악한 문구를 2010년 역사를 전공하는 노교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생기면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생각을 수집.정리했으면 한다. 아마도 그들 거의 대부분은 강만길 교수와 동일한 논리구조를 갖고 있을 듯 하다.
요약하면 사회주의는 붕괴했지만 사회주의적 이상은 여전히 살아 있다.
실천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2018년?의 어느날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무심히 듣고 있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연설문은 운동권 출신인 ***가 썼다고 한다. 연설문은 80년대 중후반 익숙하던 운동권 학생들의 어투를 닮아 있었다. 말과 생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80년대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생각이 오늘의 중장년 진보지식인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한다.......
양관수
매우 냉철한 비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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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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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은 97년 구속된 후 4년 1개월 정도의 형을 살고 2001년 출소한 한총련 합법화 운동을 진행한다. 4년 여의 수감생활도 그렇고 출소한 후 한총련 합법화 운동을 진행한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다. 그럼 사회진출 후에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특히 사상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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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강위원”에는 특이하고 대담한 주장들이 많다. 논쟁적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쳐 21세기 대한민국은 복지, 문화, 영성 시대가 열릴 것이라 진단했다”
“대동 민주주의, 대동회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이었다”.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수천수만의 마을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공화국이다”.
“민주주의란 마이크를 독점한 소수 엘리트로부터 마이크를 회수해서 마이크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위대한 평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기본사회론은 이재명표 사회구성체론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개화한 시민정치를 일상적인 차원에서 정칙시키고자 합니다.....시민이 주인되는 정치, 억강부약 대동세상의 광주를 만들고 싶습니다. 마침내 시민공동정부를 구성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광주를 만들 것입니다” 등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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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의 주장은 이재명 대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위원은 이재명 대표와 정치적 여정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여민동락공동체 10주년 행사 자리에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은 부인과 정책시장을 보냈다. 평소 혁신은 변방에서 이뤄진다는 소신을 품고 여민동락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2019년 경기도농수산진흥원 원장에 부임했다”
2024년 4월 총선에서 더민주전국혁신회의 사무총장, 당대표 특보를 하고 총선출마를 시도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다면 위 강위원의 주장은 이재명 대표의 주장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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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의 주장 중 특별히 기억할만한 것은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수천수만의 마을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공화국이다”이다.
아마도 춘추전국시대 노자의 주장이 그러했을 것이다.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높아지고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자연친화적이고 목가적인 과거를 추억하면서 생긴 이론이다. 원시 시대를 이상향으로 그리는 일련의 생각들이 모두 그러하다. 지금도 운동권 또는 운동권을 뿌리로 한 사람들.소공동체에서 문명을 불온시하고 정감이 넘치는 공동체를 희구하는 견해가 많다.
이 단순한 의견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경기도의 아파트에 산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KTX 할인티켓을 타고 시내로 가 일을 보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온다. 아파트에 산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옆집에 정확히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수십개의 카톡방에 둘러 싸여 살고 아마도 그들과 가족보다 몇배 많은 소통을 할 것이다.
한국이 마을공동체로 이뤄졌다는 주장은 아마도 농촌에 산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도시 특히 서울.경기와 같은 대도시라면 마을공동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21세기 대한민국가 수천개의 마을공동체로 이뤄져 있다는 주장 자체가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주장 자체는 논란의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검토의 여지가 있는 것은 강위원과 이재명의 핵심 주장, 직접민주주의, 기본사회론 등이 마을공화국론과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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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전대협 뿐만 아니라 93~97년 한총련 운동이 다분히 친농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93~97년 한총련운동은 주로 호남 학생들이 주도했다. 강위원의 마을공동체론도 학생운동.한총련 운동의 성향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학생운동 성향이 2000년대 촛불시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강조는 80년대 민족해방운동에서의 전민항쟁을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위원의 사상 작업은 한총련의 사상의 알파한 수준으로 보인다.
Se Jin Hwang
민경우 대표님 빨대왕에서 대표님 안계기면 재미가 떨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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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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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은 97년 구속된 후 4년 1개월 정도의 형을 살고 2001년 출소한 한총련 합법화 운동을 진행한다. 4년 여의 수감생활도 그렇고 출소한 후 한총련 합법화 운동을 진행한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다. 그럼 사회진출 후에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특히 사상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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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강위원”에는 특이하고 대담한 주장들이 많다. 논쟁적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쳐 21세기 대한민국은 복지, 문화, 영성 시대가 열릴 것이라 진단했다”
“대동 민주주의, 대동회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이었다”.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수천수만의 마을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공화국이다”.
“민주주의란 마이크를 독점한 소수 엘리트로부터 마이크를 회수해서 마이크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위대한 평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기본사회론은 이재명표 사회구성체론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개화한 시민정치를 일상적인 차원에서 정칙시키고자 합니다.....시민이 주인되는 정치, 억강부약 대동세상의 광주를 만들고 싶습니다. 마침내 시민공동정부를 구성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광주를 만들 것입니다” 등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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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원의 주장은 이재명 대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위원은 이재명 대표와 정치적 여정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여민동락공동체 10주년 행사 자리에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은 부인과 정책시장을 보냈다. 평소 혁신은 변방에서 이뤄진다는 소신을 품고 여민동락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2019년 경기도농수산진흥원 원장에 부임했다”
2024년 4월 총선에서 더민주전국혁신회의 사무총장, 당대표 특보를 하고 총선출마를 시도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다면 위 강위원의 주장은 이재명 대표의 주장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4.
강위원의 주장 중 특별히 기억할만한 것은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수천수만의 마을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공화국이다”이다.
아마도 춘추전국시대 노자의 주장이 그러했을 것이다.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높아지고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자연친화적이고 목가적인 과거를 추억하면서 생긴 이론이다. 원시 시대를 이상향으로 그리는 일련의 생각들이 모두 그러하다. 지금도 운동권 또는 운동권을 뿌리로 한 사람들.소공동체에서 문명을 불온시하고 정감이 넘치는 공동체를 희구하는 견해가 많다.
이 단순한 의견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경기도의 아파트에 산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KTX 할인티켓을 타고 시내로 가 일을 보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온다. 아파트에 산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옆집에 정확히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수십개의 카톡방에 둘러 싸여 살고 아마도 그들과 가족보다 몇배 많은 소통을 할 것이다.
한국이 마을공동체로 이뤄졌다는 주장은 아마도 농촌에 산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도시 특히 서울.경기와 같은 대도시라면 마을공동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21세기 대한민국가 수천개의 마을공동체로 이뤄져 있다는 주장 자체가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주장 자체는 논란의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검토의 여지가 있는 것은 강위원과 이재명의 핵심 주장, 직접민주주의, 기본사회론 등이 마을공화국론과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두가지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전대협 뿐만 아니라 93~97년 한총련 운동이 다분히 친농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93~97년 한총련운동은 주로 호남 학생들이 주도했다. 강위원의 마을공동체론도 학생운동.한총련 운동의 성향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학생운동 성향이 2000년대 촛불시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강조는 80년대 민족해방운동에서의 전민항쟁을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위원의 사상 작업은 한총련의 사상의 알파한 수준으로 보인다.
Se Jin Hwang
민경우 대표님 빨대왕에서 대표님 안계기면 재미가 떨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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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청산 시즌 2 / 이학영, 국회부의장이 될 남민전 전사 또는 민투의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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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년 학생운동에 맑스레닌주의가 본격 도입되면서 전위조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중에서도 인혁당.통혁당.남민전 등이 중심이었다. 나도 인혁.통혁 공소장을 흥미있게 봤던 기억이 선하다.
그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남민전이었다.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남민전 총책 이재문이 기록을 많이 남기는 바람에 남민전의 행적이 많이 알려진 점 그래서 본의아니게 공소장이 풍부했다. 개중에는 이재문이 직접 거리에서 삐라살포를 한다거나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들을 수의를 가지고 남민전 깃발을 만들었다는 등의 신화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둘째. 유신말기에 검거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광주사태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는 가정 등이 해당한다. 우리는 80년 광주 때 남민전이 살아있었다면 하고 술자리 대화를 이어간 적이 있더랬다. 셋째.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석방된 사람들 중 김남주.이재오(유명 정치인 이재오가 맞다).홍세화 등이 남민전 신화화를 부추긴 점 등이다.
어쨌든 80년대 중후반 남민전은 학생운동의 모범.선배 또는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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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민전 전사 한사람을 소개한다. 남민전은 조직을 중층화하여 산하에 민주국민투쟁위원회 약칭 민투를 두었다. 정확히는 민투의 구성원이었던 이학영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곧 대한민국 국회 부의장이 될 예정이다.
이학영이 2015년에 쓴 책, “이학영, 세상을 사랑하였네”(심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민투로 구속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민전 사건을 접하게 된 상황에서 이학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는 그 사건을 민주투쟁국민위원회 사건이라 부르지 않고 남민전 사건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런 이름이 왜 나왔는지는 재판과정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는 반박정희투쟁을 중심으로 했던 민투소속원이기는 하지만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했던 남민전인지는 잘 몰랐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1쪽에 걸쳐
“구속된 민투의 조직원 모두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들이었다. 간첩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다.....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을 하지 않았으면 남북이 평화롭게 살았더라면 굳이 그런 험한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 착한 아버지요,아내요, 아들이요 딸이었다....”
나는 이학영 의원의 진술에서 남민전이라는 말이 등장할지 말지가 관심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니까 가령 이인영 의원이 남긴 책에는 전대협 의장이긴 해도 반미청년회 일원이라는 말은 완전히 빠진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이학영 의원의 책에는 남민전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남민전은 민투를 조직하고 민투를 통해 박정희 반대 투쟁을 벌였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전위조직이 아니라 민투와는 별 상관이 없는 별도의 조직처럼 묘사된다. 이학영 의원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이 반독재투쟁을 했지만 급진이념에는 경도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간첩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다”는 주장을 민투 성원으로 구속되었을 때 했더라면 그나마 이해는 간다. 근데 이 책이 나온 것은 2015년이다. 2015년 시점에 남민전을 북한과 무관한 조직으로 몰아가는 것은 치졸?해 보인다
3.
그의 책에는 학생운동.사회운동 경력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활동했던 활동가들의 이름도 소개되었다. 책에는 사상계.씨알의소리.창비, 인물은 김남주.김지하.박석률 등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런데 명색이 남민전 산하 민투성원이었던 이학영의 독서노트와 사색에는 주체사상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남민전의 전사, 민투의 투사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숨기고(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면 내가 볼 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세상에 젖어드는 것이 혁명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반면 남민전 전사를 기억하는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세상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뚜렷히 밝히고 그 사상에 입각해 세상을 사는 것이 혁명적인 삶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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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에 회자되는 최원석 회장 강도 사건은 무시한다.
나정석
한국 좌파 운동사를 연구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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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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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쿠테타
80년대 제국주의와 기득권층이 민의를 거스르는 방법은 주로 군부 쿠테타였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73년 칠레 아연데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 쿠테타였다. 덕분에 선거가 진보의 상징이었고 선거를 통해 확인된 민심은 절대선과 같은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포퓰리즘의 시대를 맞았다. 포퓰리즘은 선거를 통해 법과 제도 그리고 법과 제도를 지탱하는 엘리트.관료 집단을 정조준하고 있다.
만약 총선을 통해 이재명과 조국 그리고 그들의 정치세력이 승리한다면 우리는 선거가 무엇이고 선거를 통해 확인된 민의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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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주당 우위의 정치환경이 도래했을까?
- 그냥 시론
1.
한동훈의 개인기에 기초한 국힘 상승국면, 민주당 공천 파동에 따른 민주당 지지세의 위축 국면에서는 대통령부정평가.정권심판론-민주당지지=20% 정도(a)가 침체되어 있었다.
2.
조국혁신당 출현이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혁신당의 출현으로 위 a) 집단이 조국혁신당에서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면서 민주당의 케파.파이가 갑자기 커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비례 지지율의 경우 국힘 35.3%, 조국혁신당 30.2%, 민주당 19.2%로 범민주계열의 비례정당 지지는 30.2+19.2=49.4%로 이는 대충 정권 심판론에 육박한다.
여기에 장예찬.도태우 사태로 국힘 지지기반이 이완되고 위 a) 세력이 이종섭.황상무 사태를 계기로 빠르게 정권심판론으로 이동하여 정치지형을 흔든 것으로 보인다.
3. 전망 및 대응
더 이상의 지지기반 약화는 막아야 한다. 윤석열정권.한동훈비대위원장은 갈등을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다음으로 조국혁신당 지지율 상승은 거의 한계치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수치에서 보듯 민주당+조국혁신당의 비례지지 정도는 정권심판론 50%에 거의 육박, 조국혁신당은 중도층.청년층에서는 강한 비토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힘 지지기반을 확충할 필요가 있는데 의식적으로 20~30대 남성층을 타켓으로 할 필요가 있다.
4. 간단한 메모
전체적인 전선을 이재명.조국과조국혁신당.진보당을 하나로 묶고 이들 전체를 극단주의.급진주의.파퓰리즘으로 네이밍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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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선생의 최근 행보는 황당하다. 그만이 아니다. 함세웅.김상근.이부영.유시민.이해찬 등 70년대 전설적인? 투사들의 언행이 그러하다. 운동권 청산 3번째 작업(1라운드 386, 2라운드 진보당류)으로 이들을 다루면 어떨까 싶다. 마침 백낙청 선생의 어이없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동아일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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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백낙청과 이재명의 위험한 결합](https://external.fadl3-1.fna.fbcdn.net/emg1/v/t13/40274338784438050?url=https%3A%2F%2Fdimg1.donga.com%2Fwps%2FNEWS%2FIMAGE%2F2024%2F03%2F19%2F124054854.2.jpg&fb_obo=1&utld=donga.com&stp=c0.5000x0.5000f_dst-jpg_flffffff_p800x417_q75_tt6&ccb=13-1&oh=06_Q399uqhfxMdGyV7L1QuhESjcI_2JKI5Lr-ZRgaZX-68Z4yk&oe=67C8A8DE&_nc_sid=c97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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