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나라 1]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 이영훈 교수
이승만TV
18,369 views Jun 18, 2018
정규재TV에 연제되었던 이영훈 교수님의 강의입니다.
관련한 교수님의 저서가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라는 제목을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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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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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에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의 e 행운 교수입니다
화미 2년전에 이정규 적 극 tv 극강 프로그래머 구매나 넣어서
대한민국의 나라 만들기 역사라는 에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에 오늘 부터 다시 에 제가 이 프로그램에 나와서 1씩 회에 걸쳐서
아 제 평소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어서 대단히 이 기쁘게 셔야 합니다
제가 이번 출연에서 10 획을 침강 이에 공통 주제를
아 말씀을 드리며 는 환상의 나라 아이입니다
아 그 나라는 대한민국 입니다 써 아 이올린 아라가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는 여러가지 허한 상이 있다
많다 아 깊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대적인 어여 10까지의 환상을
제가 앞으로 차례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때 맹 천지의 무슨 1 상위자아 아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대기 들어보시고 마 과연 환상이 지 아닌지 한번
어여 여러분 나름대로 한번 생각을 해보시면 아 좋겠다 그런 취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화상 때문에 에 환상 이란 것은 결국 합리적 사고를
아 판단이라 관찰을 어렵게 만듭니다
아 뭔가 집단적인 환상을 갖고 있을 때 어 이 사회가
대단히 개방적 이거나 어떤 시민 적인 어떤 교양으로 잘 통합되기 힘들
수가 있습니다 전 오늘날 한국 대한민국의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 정책 인게 문화의
문제가 그 역사적 깊은 그 논에 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일상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는 환상의 있다 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제가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그 환상은
아 세종은 과연 성분 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따 을 다시 핏에 정원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역사적으로 존경하는
어 존경하는 역사적 그이 물입니다 뭐 때 설 때 장 설명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전국초등학교 어딜가도
어 세종 의 동상이 줘 뭐 우리가 서는 화폐 더 세종 의 초상화가 있구요
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도로가 세종로 고 구 매 년 전에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에 세워졌습니다 새로운 행정수도 홍 경 억 중심지를 만들면서 또 3종
있으라 했구요 뭐 해군이 배를 만들어도 세정 아니고요 뭐 모든 것의 적이 있습니다
너 과연 그렇게 우리 대한민국 아 예 국민들이
에 21세기에 올라도 존경할만한 선물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아 저는 오랫동안 업무를 가져왔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세종대에 그 양반 노비 신분 제도가 확립되었다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조선왕조가 남긴 여러 가지 그 자료들을 보면 요 왕조 실록 을
비롯해서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 에서 소장하고 있는 허 적자를 보며 는 고정 에
등록된 이후에 한 40% 어가 너비 입니다
뭐 엉겨 줄로 글 잘 분석해 부터 이미 15세기 후반에 인구의 40% 가까이 간 놈이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어 17세기 말까지 이 그러했습니다 40% 얘기 50% 가 너비 우
였읍니다 이 노비는 주인의 재산입니다
어 사고 팔리고 상속 되고 정려 되고 있죠 경국대전 에는 그 노비가 기계 첫정 돼 있는데요 저와 사촌 자리라 해서
쌀 숨 웃음 입니다 그런 말 한 필 가게 하고 같구요
노동 로 따지면 666 일에 노동 가치의 에 해당합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그 토지 보다도 뜨 소중하게 여긴
재산입니다 동 사 니 죠 채 털 입니다 에
15세기에 양반 가문에서 남겨 삼성 문서를 보면 은 토지 보다 더 노비를 먼저 적습니다 그래서 미국 남부의 그 농 영주들이
너 이제 시절의 말이죠 상승 무설 남길 때 보면은 내 말을 제일 먼저 좋습니다 말이 가장 소중한
재산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장 소중한 재산을 먼저 이렇게 상소문을 3rd 라비 죽는데
조선에는 너비를 주셨습니다 합궁 더 비강 에 소중한 아 재산이 겟습니다
너비가 얼마나 말하면 g 에 태종을 한 임금이 놈이 소 유사한 제도를 정했습니다 그때
에 왕족들 과정일 품은 300 명
그 차츰 닫았던 줄여서 정 7품 에서 9품 의한 엇갈리는 150명 그랬어
150 명 300m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더 신하들은 건 너무 그 상한 규모가 잡습니다 해서 유일한 물려 타고 말았습니다
그 중앙에 관여를 하게 되면 적어도 최소한 아무리 말 단관 지기라도 100 100명의 노비는 소유의 등 듯이 10월 없애기
4 우리의 암반 드립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겁이 너무나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는 뜻이 있죠
아 제가 올해 때론 추행 가지입니다 많아 그 이전에 10 내지 14 성 이쪽
고래 왕조를 보면은 놈이고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나갈 때는 전체 인구의 1 5% 정도 있구요
그리고 노비가 아 조선왕조 처럼 신분이 세습 떼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 함부로 사고 팔릴 수도 없었구요 4981 경우에는 처벌을 말씀 그리고 양이 나고 너비가 아닌 양이라고
괴로움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결혼을 시키면 노비 주일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구요
신분이 3 수입되지 않고 논 가츠 칸노 b 가치가 1 121 노동 가치 얻습니다 따라서
아 재산가치 갖춰서 너 조선왕조의 너비보다 단어 보낼 정도였고
따라서 얼마든지 쉬게 해방 뵐 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는 너비 출산으로 수장고 님 더 많고요 있다 이 몇 무신 시대 2
의 미네랄을 그 장본인이 너비 치크 노출 신임 나중에 신돈 이라는 지 꿈 간의 나오는데 이 사람도
노출신이 그래서 거래 시대 4 신분이 자세 수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조사에 말라 마 일종의 사적인 종자 비슷한 어 집사 비슷한 그런 사람들이 너 비었습니다
노비의 권리가 있었구요 정치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잘못하면 소송도
할 수 있을 거에요 근데 조선시대도 구매는 그 모든 권리가 박탈 이 저것 조 섯 노무 나와는 2개나 소외의 동
어둠의 비유되는 개똥이 소통이 말 동의 뭘 좀 뭐 바위 버리죠 뭐 이런 시기를
마당 새 마당에 있는 소 뭐 이런식으로 물 상해 비유되는 죄 안 존재로
어 이렇게 떨어지고 맙니다 그런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 는 어땠어요
15 력 수행에 있어 17세기까지 가우리 한국사회 도비 지쳐 생긴 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느냐 했을 때 저는 세종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럼 그 아버지 태종 때만 하더라도 또 양인과 노 위에 결혼을 검기
시켰습니다 그런데 시키고 결혼을 하게 되면 관계로 이행을 이온을 시킬수 너와 결혼
아니 양인 여자는 처벌을 해가지고 코 관 더미로 삼아 꺼도 그 소생 들은 또 가 너비로 다
따라서 중이니 그렇죠 자기 너가 하므로 양인 제자와 결혼할 중에 면 그
소생 들을 잃어버리게 돼 수 남의 태종은
비가 비가 양이 남자가 결혼 했을 때 그 소생한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서
종부 법 이라 합니다 그냥 인으로 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종은 대단히 그 강인한 군 함으로써 나의 백성 인데 누가
노비가 있단 말이냐 이와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어 거래 시대부터 내려오는 높 이제
예 중대한 매수를 가 해가지고 넣어 즉 비가 양이 남자와 결혼할 때는 그 자식을
아 아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서양인이 다른 해법을 만들었습니다 고려시대는 그게 종목 법이라 있어 어머니이신 분 를 따라서 거 같죠
너비가 되었습니다 많아 이렇게 그저 개혁적인 군 앙 이태종 이었는데요
그 세종이 들어가 가지고 어순 아들이 선자 그 강인한 군왕 표정이 죽고 나니까 세종이
어린 나이에 저기를 하니까 그 강 신들이 이 법을 폐지해야 된다 고 주장을 합니다 세종은 아버지가 남긴 만세 힘
아름다운 법이다 라고 아버지의 법을 엉 어 를 했습니다만 학을 결국은 50화 들의 강청 을 못
이겨서 세종 14년 의 그 비가 약의 남자와 결혼을 할 때 그 자식은 아버지 신분을 따라서
양인이 된다는 그 법을 폐지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종 모종 전법을
이렇게 에 만들어 내죠 이후에 노회의 국악 압수 카게 증가합니다 웃은 양과 노비 사이에 결혼이
자유롭게 흘리 됐어요 허락에 됐습니다 아 녹아 양인 여자와 결혼을 했을 때 와야 긴 여자 글을 쓸 때 그
고려시대 이래로 그것은 아니 금지되고 있었다 했는데 대종 역시 그것을 금지를 하고 그 자식들을 속공을 시키고 그렇게 했다고 했는데 그 법은
세종 때는 때도 형식적으로 존재합니다 많은 실행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않고 그러나 세종이 죽고 나서 단동 태극 엄마 그 범 마저 폐지돼 가지고
녹아 약인 여자 와 개 를 했을 때 생산한 출생한 자녀들도 모두 어
아버지의 신부를 따라서 놓아 된다 하는 그런 경우에는 또 정보 법이 생리를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나 어머니 둘 중의 하나가 높 이 일대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것 이 세종대에 그쳐서 단동 세종에서 단정 대에 걸쳐서
에 정비가 됩니다 확립이 되고 그의 경국대전 에 참조 손에 금 습지 전 그 에 이러할 경국대전 에 그 법이 올라갑니다
2 그렇게 노비와 양이 4 괴로움이 법적 제재가 때 대상이 되지 않고 그
소생 들이 무조건 그 즉 너비로 되는 그런 독재가 정비를 하자
정비가 되자 높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거죠
또 3등은 어 너희의 법적 권리를 박탈해 습니다 너비는 주인을 고수할 수
없다 세종 임 어 등급을 하고 나서 세종 4년 의 그런 법을 만듭니다
너비가 주인을 고수하게 되면은 교양의 차다 이랬습니다 목매어 쭉 인다 이런 뜻이 이후 노비의 대한 주인의 그 폭력 생사 이어
탈 침탈 이 마음대로 이루어줄 주 졌습니다
노비를 죽어도 범죄가 되지 안 쓰고 너비를 죽이네 양이 양반 그 사대부들이 너무 말하니까 세종이
너비를 함부로 죽이려 버치 줄은 처벌한다는 법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신하들이 반대를 합니다
그 호라이 같은 신하들이 급 연결해 안게 된 사람들이 반대를 하니까 그것도 세종이 그 주저앉아 1호
[음악] 그렇게 해서 놈이 는 주인의 어떠한 그 즉 비리 너희 억 즉 주인이 자기 어머니를 강간했다 그러면 그
아들이 그 어떻게 할 수가 없는게 해요 어 아 자 기 분을 주겠다 이렇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됩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안전이 법적 권리가 박탈당한 부터 노 외적 상태로
떨어진 게 3종 되다 그 뿐만 아닙니다 세종은
거래 이랬는데 로 오는거 즉 괌의 감에는 그 이제 예능을 담당하고 거나 또는 져 의술을 담당 하거나
손님 었을 때 사신이 5 할 때 그렇지 생정 쓸쓸 재원의 기생들이 있었습니다
이 기생들의 자식도 전부 문의에 신부를 따라서 영원히 귀성 이다
아 천안 갱신 분다 이 법을 만든 것도 3종 이에요 제 소리
어 세종이 저 함경도 육지를 개최했습니다 그때 저 남쪽에서 많은 군인
들이 올라가서 6개월씩 또 면 일 년씩 수 자리를 하는데 군인들의 수 자리에 공로가 마리가 기상을 설치하라
이래가지고 갖고 얼마다 말 주 60 명씩 기생을 쓸지 해서 그 구린 들을
위로를 하라 글입니다 2 군 위안부 제도 허튼 의미에서는 셀렉터 만들어졌던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조선의 노비 제도나 아기새 인제
새 선적인 기수인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세종이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마음 수도 안되 걸었고 양반 사대부 들에게 전선 문으로 충성 받는 그다 갔던 성분이지만 은 것은 양반 사대부들의
성분이 있고 과연 일반 민중들 민서 들의 입장에서 성분 있느냐에 대해서는
에 저는 많은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앙 만 사대부 아 에선 분이었다
너비 제도를 만들면 사람 제가 생각하는 성분은 18세기에 영동 입니다
18세기 영조 은 바로 잊어 비가 양념 남자가 결혼을 했을 때 출생 1
아 그 소생은 양이다 하 난 그저 종부 어 종양 법을 10 1744년 에
확립한 많은 양반관료들에게 반대를 무릅쓰고 관찰해 내는 그 소 민들의 그 왕이 줘 그 사람이 저는 성군 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종은 선거 여기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노비 저를 확립한 사람이 다음 주
제가 3조 기성 군이라는 그 저 통설 적인 이해의 업무를 갖는 두 번째
이유는요 이 4대 주 의를 확립했다 는 바로 그런 것이고요
어 조선왕조는 그 이전에 신라와 면화 고려 왕조 와 달리 그 역사 의식
이나 세계관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신라 박용하 고려 왕조는 4만 1통 이라 해서 우리가 4만 을
통일한 왕조 다 명확히 중국과 대립적인 어떤 그런 역사가 죽을 것 같고 또 그런거 세계가
를 가진 그런 왕조 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대한 제사도 직접 그 행을 했지요 천재
앨범 구단을 만들고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고려왕조 난
담 아 지 신에 대한 제 서도 지냈고 열로 그럴 수 없고 려 사 야 그 예지를 보면은
에 즉 원단과 방 택에 제 4 는 걸왕 조각을 쭉 독자적 으로 지내왔습니다
고려 왕조는 중국의 큰 나라와 정치외교 도로는 어 져 군사 졌지 는 사대 관계를 형성 을 했습니다 뭐 하는 어디까지나
정치외교 1인까지 감격 5 독자 아이덴티티 에 있어서는 양 확히 독립국가로 4 한 알과 직접 교통
1 그런 그와 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왕 너는 그 스승님 초기부터 조선이라는 국회 자체를 명나라를 부터 하사를 받을 때
이승기 자 조선의 정통 보통을 도통을 있는 나라다 라는 그 역사는 수익을
따졌습니다 기자 성인 기자가 중국 천자의 보호함을 받아서 동쪽으로 와서 캄캄한
야만의 이 국가를 문명 아 시켜줬다 그 스 인 기자의 도통을 있는 나라가
좋습니다 하는 이와 같은 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졌어요 아 그렇게 해서 그의 충실하게 국가체제를 도와 자기 아이 된
dt 를 정비해 나아갑니다 그 준비한 계기가 그 완성 어느 정도 골격이 잡힌 께 3종 됩니다
그 아버지 임금 태종 때만 하더라도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 써요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동방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할 수 퇴
종을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다만 천자의 얘 니까 전자의 니까 하늘에 대한 지제 설지 되더라도
동 망 을 지키는 하늘 신청 제 또 청결은 또 춘하추동 해서 춘 재 입니다 이 봄 했죠
비가 어느 때는 제 기우제를 드릴 때 천계에 해 드리는데 따라서 동방에 봄 외 에
이사 한계인 천계의 대해서 기우제 형태로 이렇게 에 서울 암 교회 원구단 을 지어 놓고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세종이 퇴 종이 죽고나서 세종이 등극해 가지고는 그 아버지 신하들이 그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게 된다 고 강 노를 했습니다 병 계란 같은 이가 역시 대표적인데요
그래서 3종 한 십 년 동안은 기우제 형태로 걸치는 데모 초면에 지나지 않아 놀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강요를 해서 지내다가 그 신하들이 다 죽고 나니까 그 하늘에
대한 제사를 페이지를 합니다 참나 마다 어떻게 재우 가 되어서 천자의 재산을 지내는가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하늘이 빈 원래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 얘가 않으면 하늘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감으로 너
기우제를 지낼 풀고 있다 이렇게 이해가 되요 한번에 심하게 가본 적이 있습니다
신하들이 아 원단의 가서 이렇게 기우제를 지내십시오 천재를 진입시 할 때
안 된다 참나 마다 오히려 하늘이 노 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 il lee 아 그래서 그 어 세조가 세종이 편찬한 5월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 또
땅에 대한 제사는 폐지된 다원 부와 방 태에 대한 재산을 폐지가 되고
이것이 결국 나중에 성종 때 최종 정비 되는 국조를 에 의해
에 그게 그대로 어 이어져서 어 그 아들 셋 오라는 임금은 대사 리그
강연한 그 군 주권 을 추구한 사람입니다만 따라서 아버지 세종 과 달리
그 즉 비가 아야 긴 담장을 결혼했을 때 그 자식을 노비로 삼는다 는 그
종목 뽑을 폐지하고 다시 할아버지 태종 때 와 같은 좀 부부로 으 돌아가
그 다음에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직접 지냈습니다 세조는 라크 세조가 잠시 그러고 나서는 다수 이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거나
않도록 운항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나지 않고 19세기 말까지 참외 종족 군으로 해방된 1897년 이
되어서야 다시 에 황거 고무 당신 환구단 2
아 이렇게 다시 죄를 되었습니다만 이렇게 제 후에 나로써 국제 를 정비를 해 나가는 그 단초가 세종이 어따
세종이 세종은 또 이 올해 를 재정 하면서 올해 중에 그 2군 매라고 있습니다
길래 흉내 군내 빈 내가 아래 이렇게 있는데 그 고려는 940 강한 군사
국가일 등의 구매를 대단히 주셨습니다 고 님이 출전 할 때는 그 거대한 그 장한 출저 기
이 출정하는 군대가 도열하고 상 양군이 임금 한테 나가서 임금이 내리는 도끼를 봤고
그렇게 해서 출정 하고 임금을 만 테 만세를 부르고 돌아와서는 다시 또 또 도끼를 바치는 이 독립국가로 4
라 독자의 군국주의 구 궁 국지 병을 행세하는 그런 국가로서의 도 위 형 의식을 갖춘 것이 걸어 이식 약간
고래를 마라 글 된다니 강인한 군 서곡과 했어요 뭔고 하고 물에 20 20 팝 8 년 말을 전쟁을 했잖 씁니다
어허라 조선왕조는 그 군대 세종은 올해 를 제정하면서 출점 요일을
표시합니다 제후 애국가가 출정 의 를 행사할 수 없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최종희 만든 노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뢰입니다 을해 뭐 향 사례 뭐 활을 쏘고 뭐 군대를 연수 보라고 열병 안 하고
했죠 하는 뭐 그런 정도로 뒤 막상 궁극의 지가 학 성적으로 1축 되는 그러한 출정에 있는 세종의
표제가 됐죠 우선 아 시간과 미사토 자세하게 발생 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아 세종은 참치 성 4대 있습니다 그 사이 뭐 세종은 얼마나 자주 독립 자주독립 이야기를 했는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있는데 그런 세종실록 을 쪄서 자세 길지 않고 어 그런 이야기를 회로 세종은 폐암 알로 지 슥 어
예를 들어서 이 저하 방지 방에서 청매 날개가 푸른 매가 납니다 1000원이 진기한 그 본 무리로
어 그것을 자발적으로 중구 관계의 바칩니다 마치 중국의 당시 선 종류라는 황 걔가 굉장히 그런거겠지 기물을 탐 내겐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조선의 처녀를 0 출 해가지고 하라 에서 세종시 밑에 태종
때부터 부담하는 3종 안 16명 까지 대면 조선의 전혀 들을 에공 출
해놔서 어 에 그런 마음입니다 많이 이 사람 마음에 들려고 말이죠
그렇죠 천하의 진기한 청매 를 잡아 가지고 해 청 회동 춤이라 그렇죠
지금 중국 함게 3개를 하는데 해동 층이 잡히지 않으니까 얼마나 조조 해야할
미스 말이죠 그래서 또 그러한 상을 잡을 수 중국의 보냈으면 되었는데 또
잡혔어요 신하들이 드 보내지 마라 해도 어허 관계를 위해서 잡았는데 안 보내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할 수 그 보냅니다 이렇게 거즈 그 백성들을 말이죠
그제 에 제외 쉽게 가지고 삼고 깨기 위해서 그 추운데 그런 이제 천하의 진기한 청매 를 잡으려고 애쓰는 세 종의 모습을 보며
는 그야말로 지성사 들이에요 그 낮은 3명이 죽고 나니까 중국의 관계가 뭐죠
참으로 효성이 지극한 왕이었다 라고 그렇게 자문을 내려줍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전에 3 정신력으로 문 어 일금 에서 이런 외벽 세척
어허 잔 더 든 술 많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만 아
그래서 째는 그건 너 b 제를 확인 했다 아 그 다음에는 제 4대 교의를 허니 뭐 그래서 했다 하는 네 그런
점에서 어 세종은 그야말로 나라의 표준을 조선왕조의 표절 을 세운 임금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잉 느낌이었다 4 에서 10분 동의를 합니다 많은
아 또 양반들에게 찍으 기차로 조손 3종 36년 통치 기의 사대부 로써
처형을 당한 사람은 아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쿠 사대부 양반 사대부의 너그럽고 그러 학문을 좋아하는
아 그러한 그렇지 라 학문의 왕이 그 세종실록 을 오면 신하들이 왕을
성분이라고 칭송하는 작년의 여러 철의 나옵니다 과연 성분 이었죠 조선왕조의 성원이 얻습니다 양반 사대부의 성분인데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군 일까 대한민국의 21세기 1r 국민이
지금도 오빠 떨어야 될 선고 일까 에 대해서는 상당히 업무를 같습니다
m 마지막으로 제 전공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에 조금 그 저 알려 조심스럽습니다 만한 더 표현해 조금 실수가 있더라도 이해를 주시면
좋겠는데 3종을 성군으로 바꾸는 빠 떠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저 훈민정음의
창제에 있다고 그렇게 다들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훈민정음 2 그 드냐 는 것에 대해서 최근에 아 뭐 심맥을 걸어
가겠습니다 3면 여자 대학의 정당한 교수 라든가 고래 대학이 스테이지가 신청 광해 교수 라던가 이런 분들이 순 논문들을
보면 은 역시 나라의 그 백성들에게 정음 정음 이란 건 올바른 한자음
입니다 올바름 1 자음을 가리키기 위한 목적에서 차 안게 된 예문 짜다 a
것이다 제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많은 이 정담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은 중화를 전유 하기 위해서
이제 중얼 어플로 플레이트 하기 위해서 중국의 한자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중국어를 정확하게 구사를 위해서 4
한국인 중 하의 본 봉 고장인 중국과의 외교적 소통 문화적 소통 에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러한 목적에서 흑인 경험을 장 절 했고 나아가서는 바로 벌써 구민정 업을 1443년 인가 장기 하고 나서 그 다음에 곧바로
했죠 중국의 홍무 제가 편찬한 그 중국의 표준 문서 그저 허무 정원을
번역을 하죠 번역을 하고 홍무 점은 여 쿤 이라 해서
그러고 그 중국의 그 착한 중국인들이 허무 제가 천하의 반포한 표 전적인
중고급 바람을 어떻게 좋아하게 표결을 할 것인가 이거 제대로 하지 않아서 큰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어요
양국간에 군사 째 충돌이 있을 뻔 했습니다 중국 황제에 올린 그 표 전 외교 문서에 의 그 그 즉 발음이 아주 거 약해서 중국 함께 가 듣기
헤이즐 고약한 그런 대목이 있을 전무 제가 화를 내면서 다음부터는 글 줄을 좀 똑바로 서라 중국말을 제대로 하는 사실을 보내라
해서 역정을 낸 적이 있습니다 아 바로 그 중국어를 정확하게 표현을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동은 우리 동
국 인 들 리 또 중국 그 한 자를 표 전적으로 제대로 발음 하기 위해서
덩 국정원 이라는 원수를 편찬 했습니까 그렇게 해서 이 중화를 어 프로 풀이 에이트 하는 소 중화의 질서
아 소중한 의의 질서를 장계 하는 일환으로 3종 안 국호 올의 어릴 재정
했을 뿐 아니라 그 올해의 상응하는 운 짜 정책을 치렀다 이걸 오늘날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뭐 사드 쥬리나 뭐 좀 민족주의 날
식민주의 나 그런 관점으로 * 표현되기 는 고단하고 그 당시에 고유한 세계관 국제 담 과학 역사 옷이 바로 그 속에서 조회수
나름의 자기 아이덴티티를 확립 회원은 과정이다 아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아 이러면 제품 9 각자를 이야기라서
제가 되서는 소개 하지 않겠습니다만 역시 저는 그러한 해석이 옳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알고있는 세종의 신분 정책이나 아기 차
외교정책을 볼 때 세종의 문자 정책도 1 따라가 문자를 만난다는 것
대단히 중대한 어떤 거쳐 나라가 들었을 당시의 통치 행위 인해 그 통치
행위를 당시의 국제 감각이나 역사의식과 무관하게 에 떼어먹고 오늘날 관점에서 어린 백성들에게 에 문자를 하나 선사 해서
그들의 그렇죠 아 에 삶의 질을 높인다 않은 단순한 그런 식의 민족주의 쭉 박상 으로
이해할 수 없는 종전의 그래 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에
그러한 그저 새로운 해석이 있다는 것도 염두에 2시고 어제 이야기 하고 관리를 시키면 은 전후 맥락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지속 드리고 싶은 것은 어 21세기 오늘날의 대한민국 조차 2인 이 국가나 정부가 여전히 3종을
성분으로 빠 것들 때 그 저변에 뭐가 흐르고 있는 다
c 알게 모르게 조선왕조의 신 민 할 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 조선 1 계신 미니 아니고 자유입니다 자유입니다
절로 님 합니까 그 자유인으로 수에 척 극적인 아이덴티티 k 슈니 없는거예요
뭐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벌 45 순이 오십 년 전부터 이미
학자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3종을 3종을 성군으로 봐 뜨는 국가적
선경은 점점 늪 발달해 왔잖 씁니까 70년대 이후의 말이죠 최근에는 이 세종로에 에 세종의 통상을 수
없잖아요 세종시를 쉬워 짜요 그래서 무엇을 의미할까 이 상징은 무엇을 우리 한국인들에게
당신들은 누구냐 라고 는 어떤 정체성의 질문이 이 재개될 때 어떠한 어떤
그 츠 어 에 한국인들은 대답을 하게 만들까 하는 것을 우리가 좀 곰곰히
되돌아 보게 하는 그러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아 이거 숄 어 여기까지가 오늘 제가 처음 소개한 제일의 3개입니다
예 다음 시간도 일주일 뒤에 또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어느 이정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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