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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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임진왜란 때 백성 버리고 도망간 선조, 생 마감
박대윤 기자
입력 2025.03.16 


임진왜란 일어나자 백성을 버리고 망명 기도
임금 도망에 백성은 경복궁 방화로 화답
도망간 왕이 남긴 붕당정치와 민심 이반
논공행상 중 국내 장수보다 명나라 역할 강조

인천투데이=박대윤 기자 | 오늘로부터 417년 전인 1608년 3월 16일, 조일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1598) 당시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조선 14대 임금 선조(1552~1608, 향년 55세)가 정릉동 행궁(현 덕수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대원군 이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을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훈구파를 견제하며 사림을 대거 등용했다. 조광조 등 기묘사화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이황과 이이 같은 성리학자를 중용했다. 또한 명나라의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조선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선조는 당쟁을 적절히 관리하지 못하고 사림 내 갈등을 키우며 붕당정치의 계기를 제공했다. 사림은 이조전랑(현재 인사과장 정도) 추천 문제로 1575년(선조 8년)에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고, 이 당쟁은 조선의 국력 약화로 이어졌다.
경기도 구리시에 소재한 선조 왕릉.(자료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임진왜란 발발에 의주까지 도망... 망명시도까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한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신하는 파천을 감행했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5일자 기사를 보면, 선조는 의주에서 더 나아가 명나라로 망명할 뜻까지 내비쳤다. 결국 자신의 안위를 제일 먼저 고려한 것이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민심을 크게 잃었다. 세자(후에 광해군)가 분조를 이끌고 전장을 돌며 격문을 전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이런 대비는 후에 광해군이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고, 왕위에 오르는 배경이 됐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 승리 그리고 이치전투를 비롯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임금 대신 나라를 지켰다. 이순신의 해전 승리,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의병들의 항전이 없었다면 조선은 붕괴됐을 것이다.

임금 도망 소식에 백성은 경복궁 방화로 화답

선조의 파천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1592년 4월 30일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개성을 거쳐 의주로 도망가자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조정의 통제력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임금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을 포함한 주요 궁궐에 직접 불을 질렀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기사를 보면, 1592년 5월 2일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과 창덕궁 등 주요 궁궐은 이미 백성들에 의해 불탄 상태였다. 이는 일본군이 궁궐을 태운 것이 아니라, 선조의 도망으로 인해 백성들이 직접 궁궐을 불태웠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에서 일어난 연안성 전투 그림.(자료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쟁 승리 후 논공행상도 자신의 공만 강조

전쟁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도 선조는 명나라 군사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이순신 등 국내 장수의 공로를 축소했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의주까지 피신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본인에게 돌리려고 했다.

실제로 선조는 의주까지 파천할 때 도와줬던 신하(호성공신)들을 가장 크게 포상했다. 반면, 실제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의 공을 상대적으로 축소해 파천을 정당화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후 소실된 궁궐(경복궁)을 복구하지 못하고 정릉동 행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경복궁은 이후 270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고종 2년(1865년) 대원군에 의해서야 복구됐다. 선조의 묘(목릉)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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