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득 교수,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 서술의 근본적인 문제 (1)
- 최은수 교수
- 입력 2025.12.26 10:58
- 수정 2025.12.2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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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선발대를 한국으로 불렀다면, 마페트는 토착적인 교회 설립을 위해 그들을 순회 전도여행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인도했다. 마페트가 평안도로 진출하면서, 남장로회는 충청도나 전라도를 후보지로 생각했는데, 마페트의 판단으로 충청도 대신 전라도를 선택했다.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한국선교를 창시한 아버지라면, 마페트는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를 한국에 정착시키고 교류하면서 그 정책 방향을 인도한 어머니였다고 하겠다.’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

옥성득 교수가 미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사 초기 역사를 서술하면서 위와 같은 전제를 가지고 전체의 글을 전개한 바 있다. 연구자가 자신의 소신대로 특정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격려하고 찬사를 보낼 일이다. 하지만,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와 관련하여, 위와 같은 옥성득 교수의 주장은 한마디로 명확한 역사왜곡이기 때문에, 저자 자신의 학문적인 신뢰성에도 치명적인 위해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전라도사관에 의한 전라도교회사 서술의 객관적이고 정통한 입장의 부메랑에 노출되어 본인이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이다. 위 연구자가 전라도에서 강연하면서, 전라도교회사는 잘 모른다고 했으면, 말한 대로 지키는, 전라도교회사의 모토인, ‘행함과 진실함으로’에 최소한의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이 연구자의 정직성이지 않을까 사료된다. 이는 실로 전라도교회사에 대한 ‘왜자간희(矮者看戱)’이자 ‘곡학아세’라 아니할 수 없어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필자는 본 연구자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고,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간헐적으로 듣는 개인사에 대한 스치고 지나가는 말들이 전부이다. 필자가 위의 저자에 대하여 이렇게 적극적으로 거론하는 이유는, 첫째로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역사왜곡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전라도교회사의 근본인 ‘행함과 진실함으로’가 결여된 듯 오해를 받으면서 정통성 있는 교회사 서술의 진실에 대한 사필귀정이기에 그렇다.
첫째로, 위 연구자의 근본적인 교회사(기독교사) 서술의 문제는 원사료 부족이다. 원사료는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가 기본이다. 요즘 학제 간 연구가 보편화한 세계적인 추세에서 ‘현장’, ‘실용’, ‘경험’ 등이 대단히 중요시되고 있다. 위 연구자가 한국사의 지엽으로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해 왔다고 해도 실증적인 측면에서 더욱 중요시해야 하는 부분이다. 전라도교회사와 관련하여, 위 연구자가 ‘기록된 원사료’에 접근하는 것도 디지털화한 자료들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결정적인 제한성이 있다. 더군다나 ‘기록된 원사료’도 영어로 된, 즉 서구화한 전제에서 기록된 1차 사료에 의존하고 있다는 한계도 문제다. 이 부분은 필자를 포함한 교회사가들의 제한이기도 하지만, 서구적인 1차 사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중단없는 노력의 정도가 관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서구적인 전제의 1차 사료도 최대한 확보하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한국과 주변국들의 관련 자료를 최대한 발굴하여 서구자료와 교차 확인을 통해 교회사 서술을 풍성하게 하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다. 필자는 서천군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 박수환 위원 제위의 도움과 협력을 통하여 전라도교회사 1차 사료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서구권 사료들과 교차점검에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에서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결여된 것이 ‘현장 원사료’이다. 위의 연구자에게는 이 부분이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한계이다. 필자는 세계 장로교의 본산인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연구할 때, 글을 쓰다가 근거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관련 지역의 고문서 보관소를 찾아서 1차 자료를 확보하고 ‘현장 원사료’들을 통해 교차검증을 했었다. 심지어는 영국 잉글랜드의 관련 지역이나 1차 사료 보관소를 찾아 ‘현장’을 확인하고 재차 삼차 검증하곤 했다. 이러한 필자의 기본자세는, 위의 연구자가 언급한,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를 개척 및 선행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필자는 미 남장로교 은퇴 선교사 제위가 많이 생존해 계실 때, 그들로부터 유지를 받들어 전라도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이상규 교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부경 교회사 연구’에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에 대한 논문을 실었다. 아울러 <교회와 신앙>을 통해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현장 원사료’를 중요시한 연구물들을 발표하여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필자가 교회사 서술의 대중화를 위해서 <교회와 신앙>에 기고한 ‘메리 레이번 선교사’, ‘팻시 볼링 선교사’, ‘매티 테이트 선교사’ 등의 글들과 수많은 연구 결과들을 통하여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자 하였다. 필자의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를 총동원한 전문적인 글들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목포 기독교 근대역사관의 배경’(2025)과 ‘최초의 서양 의사 드류 유대모’(2025)을 출간하여 두 개의 원사료에 충실한 결과물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위 연구자는 ‘기록된 원사료’의 제한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무리한 논지를 전개하느라 편향성이 다분한 1차, 2차 자료에 치중되어 객관성의 문제를 노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연구자는 2차 자료와 관련하여 ‘한국기독교와 역사’에 대한 편향성이 농후하다. 이를테면, 연세대학교 박형우 교수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호러스 G. 언더우드의 내한에 관한 연구’(동방학지 제170호, 2015년 1월, 53-83)를 통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문제점 지적(이런 논지에서, 필자의 근간인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를 통하여 옥성득 교수와 언더우드 자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함)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또한, 숭실대학교 김명배 교수의 ‘선교편지와 보고서를 통해 본 언더우드와 마펫의 갈등에 관한 고찰’(한국교회사학회지, 2022년, 63호, 247-284) 등과 같은 연구물들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박형우 교수가 연구한 대로, 언더우드 선교사는 정통 장로교회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을 위의 연구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세계 장로교회의 본산인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스코티쉬 장로교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와서 정통 장로교회의 원리대로 운영되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본산 장로교회사를 연구한 필자의 판단도, 뉴잉글랜드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북장로교보다 남장로교가 더 정통성이 있는 것이다. 언더우드는 정통 장로교와 관련해서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위 연구자는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인 리니 데이비스를 언급하면서, 개척연구자이자 선행연구를 진행한 필자의 글을 인용조차 하지 않은 채, 필자의 글을 발판으로 글을 쓴 한일장신대 임희모 교수의 글을 언급함으로 학문의 기본 질서도 지키지 않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필자는 2020년 12월 21일부터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교회와 신앙>을 통해 교회사의 대중화를 펼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리니 데이비스 논문은 이보다 훨씬 앞서 이상규 교수께서 주도하고 계신 ‘부경교회사연구’ 학술지를 통해 발표했다는 점이다. 위의 연구자가 필자의 선행연구를 인지하지 못했다면, 본인의 전문성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고, 알고도 무시했다면 이는 학문적인 신뢰도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위 연구자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에 대한 서술에 대하여 선행연구자인 필자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할 것 같으면, 필자의 기본 아이디어가 위 연구자의 글에서 보여, 국제적인 기준에서 볼 때, 이는 표절(Plagiarism)의 가능성마저 들어 섬뜩함마저 든다. 개인적인 감정은 절대 없지만, 공적인 관점에서 볼 때, 누군가 이 문제를 대학 당국에 검증을 의뢰하고 필자에게 대학 당국이 의견을 물어온다면, 필자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겠다 싶어 고심이 깊어진다. -계속-
* <교회와신앙>은 옥성득 교수의 반론권을 보장한다. - 편집자 -
옥성득 교수,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 서술의 근본적인 문제 (2)
- 최은수 교수
- 입력 2025.12.29 11:35
- 수정 2025.12.2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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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선발대를 한국으로 불렀다면, 마페트는 토착적인 교회 설립을 위해 그들을 순회 전도여행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인도했다. 마페트가 평안도로 진출하면서, 남장로회는 충청도나 전라도를 후보지로 생각했는데, 마페트의 판단으로 충청도 대신 전라도를 선택했다.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한국선교를 창시한 아버지라면, 마페트는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를 한국에 정착시키고 교류하면서 그 정책 방향을 인도한 어머니였다고 하겠다.’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1)
첫째로, 위 연구자의 근본적인 교회사(기독교사) 서술의 문제는 원사료 부족이다. 원사료는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가 기본이다.
둘째로, 위 연구자는 ‘기록된 원사료’의 제한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무리한 논지를 전개하느라 편향성이 다분한 1차, 2차 자료에 치중되어 객관성의 문제를 노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 연구자는 치명적인 역사왜곡이 ‘사실’(Fact)이 아닌 데서 나온다는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고, 현대사조2)에 편승한 듯이,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를 재구성이라는 미명 하에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 제위의 정신과 전라도교회사의 면면히 흐르는 가치가 집약된, 전라도사관은 전라도교회사를 대하는 품격이며 전라도 기독교인다운 태도다.3) 그렇기 때문에,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에 입문하려는 제위는 필자가 앞에서 지적한 ‘왜자간희’와 ‘곡학아세’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행함과 진실함으로’에 충실해야 한다. 위의 연구자가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근간을 흔들어 파괴한 후, 자신만의 논리를 세우려고 시도했지만, 가장 장로교의 정통성을 견지하여 왔던 전라도교회사의 기초는 워낙 뿌리가 깊어서 요동도 하지 않는다.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뿌리깊은 기초를 놓은 윤치호
단도직입적으로,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초기 역사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한 인물을 꼽으라면, 최대의 공로자이며 기초를 놓은 사람은 윤치호이다. 위의 연구자가 전라도교회사를 근본부터 뒤흔들려고 등장시킨 언더우드와 마펫은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 연구자의 비사실적 언급, 비논리적 전개, 그리고 오판으로 어찌 보면 선의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피치 못하는 상황에서, 필자가 이 두 사람의 인간적인 부분, 즉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면들을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학계의 동향은 윤치호를 ‘민족운동가’로 보는 부류, ‘친일반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측, 그리고 약간 중립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보려는 진영으로 나뉜다.4) 반면, 윤치호를 다루는 서구의 학계에서는 ‘친일반민족주의자’로 보려는 시도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한국에서만 진영논리와 이념대립의 차원에서 그리 분류되는 것이지, 한국 외에 세계적인 견지에서는 윤치호야말로 ‘민족운동가’로 본다는 것이다.5) 이런 학계의 동향을 고려하여, 필자는 ‘민족주의자’로서의 윤치호의 시대와 ‘친일반민족주의자’로서의 윤치호의 시대를 나누고자 한다. 비록 윤치호가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친일파로 지목되고 위협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별세 전에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6)는 유언한 점을 참고코자 한다. 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윤치호의 친일행위는 냉혹한 역사의 판단과 심판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인다. 향후 윤치호에 대한 평가가 어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 증인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유념하면서, 한 인간의 전체 삶을 단정적으로 규정하여 매몰시킬 수는 없으며, 다양한 평가들이 존재하는 점도 있으므로,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와 연관하여 윤치호의 역할과 활동들이 지대한 점들을 원사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사실코자 한다. 윤치호와 관련된 논란은 그렇다치더라도, 위의 연구자가 자신의 논리에 이용하기 위해 등장시킨 언더우드와 마펫, 미 북장로교의 한국선교 초기 막연한 성공(?)에 관한 논란으로 말하자면, 윤치호보다 더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 남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 기독교도, 윤치호
필자는 2025년에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이라는 원사료’에 충실한, 그리고 표절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두 권의 책을 낸 바 있다.7) 이 책들에서 필자는 의도적으로 언더우드보다 윤치호를 먼저 언급했다. 이는 오래전부터 서구신학의 한계라는 차원에서 미국 쪽 자료에만 의존하여 언더우드를 앞세우는 경향에 대한 반성이자 사실을 바르게 규명코자 했었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를 기준으로 볼 때, 미 남장로교 파송 초기 선교사 제위를 제외하고, 적어도 해방 이전 아니 해방 이후로도 오랫동안, 윤치호만큼 미국 남부의 핵심지역들을 순회하며 조선(한국)에 대하여 소개하며 한국 선교의 필요성에 대하여 설파하고 다닌 인물은 윤치호 외에는 결단코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8) 이 글에서 곧 다루겠지만, 위의 연구자가 활용한 언더우드는 윤치호의 폭넓은 활동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되지 않는다.
1. 윤치호가 테네시주 네쉬빌에 위치한 밴더빌트(Vandervillt) 대학교에서 학부 학생으로 수학하기 위해 도착한 것조차도 미국 남부지역 주요 언론에 보도 되었다.9) 미 남부 노스 캐롤라이나주 랄리에 위치한 이 기독언론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영 존 알렌(Dr. Young John Allen) 박사가 윤치호의 미국 유학 소식을 알렸고, 윤치호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웨슬레 홀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윤치호의 영어 이름이 Yun Tchi-Ho로 표기되었다. 이후 미국 남부 포함 그 이외 지역에서 윤치호의 이름은 발음이 어려워서 그런지 성은 정확한데 이름이 다르게 표기되곤 하였다. 윤치호가 밴더빌트 대학 기숙사에 도착한 때는 현지 시간으로 오후 8시 30분이었다. 1888년 11월 4일 오후 8시 30분. 이때부터 윤치호는 미국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그 지역을 넘어서 한국 출신 기독교인으로 점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84년 미 북장로교 파송 알렌 의사 선교사 다음으로 조선에 가서 좌충우돌하다가 잠시 머문 다음, 미국 남부를 잠시 방문하게 되는 언더우드와, 윤치호는 비교 자체가 안되는 것이다. 윤치호는 조선에서 나고 자란 본토인으로 중국과 일본에 대한 경험과 이해까지 남달랐다는 사실로 인하여 미국 남부에서 금방 윤치호의 가치는 크게 부각되었다.10)
2. 윤치호는 일본을 거쳐서 미국 남부로 오는 여정 포함,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면들을 속속들이 목격하며 몸소 겪었던 최초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만난 미 남감리교 파송 알렌 박사의 영향과 실제적인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윤치호였지만, 그는 원래 일본 교토에 위치한 기독교 명문 동지사(도시샤) 대학을 가고자 했으나 거부된 바 있었다.11) 윤치호는 1888년 10월 6일 오후에 동지사 대학의 니시마 교수를 만나서 대화하던 중에, 니시마 교수는 윤치호의 입학서류를 심사할 때, 자신이 부재중이라 거부된 것 같다고 유감을 표하면서 윤치호의 요청에 따라 사진첩에 서명까지 해 주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12) 그때 니시마 교수는 미국에서 더 나쁜 악한 것들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니시마 교수는 미국에 가서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취하라고 애정을 담아서 격려하였다.13)
니시마 교수의 말대로, 윤치호는 미국 남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종차별을 경험하였다. 그가 캔자스 시티에 도착하여 숙소를 구하려고 했지만, 청인(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아서 문전박대를 당했고 정거장에서 날밤을 세워야 했다.14) 그는 밴더빌트 대학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토론회에 참석했는데, 그 주제가 흑인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는 것이었다. 찬성하는 쪽의 논지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동등하지 않고, 백인들과 흑인들이 인종 간 뒤섞이지 않게 하여 백인들의 순수혈통을 보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윤치호는 백인들의 이런 주장을 잔악하다고 보았다.15) 윤치호는 미국 남부의 한복판에서 노골적인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온몸으로 느끼고 당하였고 체험했다.16) 심지어 교회의 젊은이들조차도 유색인종을 교회에 들여놓느니 교회 문을 닫는 것이 낫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회자되었다.
3. 윤치호는 미국 남부에서의 학업과 거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선(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미 남부지역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절실하다는 필연성과 시급성을 설파하였고, 특히 그의 조선(한국)에 대한 선교적 외침은 미국 남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가 네쉬빌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미 남감리교회 소속 웨스트 엔드 감리교회(West End Church, 서변교회) 소속의 커닝핸 박사 부인과 다른 한 부인의 초청을 받고 여전도회가 주최한 선교집회에 초청을 받았다.17) 윤치호는 그 집회에서 자신의 배경과 중국 선교 현황에 대하여 말하면서, 조선 등 동양 각국에 선교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제일이라고 역설하였다.18) 윤치호는 선교보고 집회에도 가능한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19) 윤치호가 미 남감리교 소속이었지만, 그의 선교 관련 연설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미 남부지역 장로교회들에서 수많은 연설을 했다.20) 윤치호는 조선(한국) 선교와 관련된 글들은 빠짐없이 챙겨보려고 노력하였다.21)
윤치호는 네쉬빌에 있는 컴버랜드 장로교회에서 조선(한국)에 대한 연설도 했고,22) 영국 성공회 교회에서도 조선에 대한 글을 나누었고,23) 험프리 스트리트 교회에 가서도 강연했다.24) 아울러 윤치호는 졸업 직전인 1891년 6월 14일 주일에 YMCA가 주최한 대형집회에서 좌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 배경과 조선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였다.25) 윤치호는 밴더빌트 대학 졸업식을 치루고 졸업장을 받은 이후,26) 윤치호는 친구인 스펜서와 함께 버지니아를 비롯한 미국 남부지역들을 폭넓게 방문하며 강연하면서 조선(한국)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으로 일어났다.27) -계속-
* <교회와신앙>은 옥성득 교수의 반론권을 보장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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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
2) Madan Sarup, An Introductory Guide to Post Structualism and Post Modernism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93) and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ity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IVP 2000)을 참조하라. 필자는 세계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교회사회, 대영제국 교회사학회, 미국교회사학회 등을 통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의 현대사조에 부응하여 교회사를 ‘재구성’한다는 미명 하에 교회사를 어지럽히고 혼돈으로 몰아가고 파괴하는 시도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서구의 일반사학계나 각종 역사학회의 흐름도 거의 같은 경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최은수, ‘전라도사관이란 무엇인가?’, 교회와 신앙, 2025년 3월 18일
4) 류충희, ‘1910년대 윤치호의 식민지 조선 인식과 자조론의 정치적 상상력–최남선의 자조론과의 비교를 통하여’, 동방학지, 2016, 제175집; 노상균, ‘방관과 친일 사이: 윤치호의 3·1 운동 인식과 대응’, 한국학, 2018, 153호; 채수은, ‘윤치호의 유교인식과 근대 이해 : ‘유교 지식인’의 근대 수용과 비판‘, 서울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20,학위논문(석사)--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동아시아학과 2020., 1-2
5) 박주영, ‘한말 지식인의 근대 경험과 양가적 정체성: 『윤치호 일기』를 중심으로’, 서울:서강대학교 대학원, 2020, 학위논문(박사), 8
6) ‘윤치호 노인’, 대중일보, 1945년 12월 9일 일요일
7) 최은수, 목포 기독교 근대 역사관의 배경 (서울:좋은땅 2025); 최은수, 최초의 서양 의사 드류 유대모 (서울:좋은땅 2025)
8) 尹致昊日記, 1888-189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 尹致昊日記, 1888년 11월 4일; Raleigh Christian Advocate, November 28 1888, Wednesday, North Carolina; The Abbeville Press and Banner, November 21 and 28 1888, South Carolina
10) 尹致昊日記, 1888. 11월 4일 이후; The Tennessean, June 21 1889 and after
11) 최은수, ‘일본 오니가조 구마노고도 역사문화 순례 및 관서지역 성지순례의 중요성’, 교회와 신앙, 2025년 12월 24일 참조
12) 尹致昊日記, 1891년 12월 3일
13) 尹致昊日記, 1891년 12월 3일
14) 尹致昊日記, 1888년 11월 2일
15) 尹致昊日記, 1888년 11월 17일
16) 尹致昊日記, 1889년 12월 7일부터 윤치호는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 날짜 이후의 일기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글 번역본을 원문과 대조하면서 인용한다. 尹致昊日記, 1889년 12월 8일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제이콥과의 대화 중 인종차별문제. 尹致昊日記, 1889년 12월 9일
17) 尹致昊日記, 1888년 11월 28일
18) 尹致昊日記, 1888년 12월 1일
19) 尹致昊日記, 1889년 3월 9일; 1890년 5월 17일; 1891년 5월 2일
20) 尹致昊日記, 1889년 3월 25일
21) 尹致昊日記, 1889년 5월 9일; 12월 14일
22) 尹致昊日記, 1890년 2월 7일
23) 尹致昊日記, 1890년 5월 18일
24) 尹致昊日記, 1891년 4월 19일
25) The Daily American, June 15 1891
26) 尹致昊日記, 1891년 6월 17일
27) 尹致昊日記, 1891년 6월 18일
옥성득 교수,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 서술의 근본적인 문제 (3)
- 최은수 교수
- 입력 2026.01.06 21:44
- 수정 2026.01.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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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선발대를 한국으로 불렀다면, 마페트는 토착적인 교회 설립을 위해 그들을 순회 전도여행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인도했다. 마페트가 평안도로 진출하면서, 남장로회는 충청도나 전라도를 후보지로 생각했는데, 마페트의 판단으로 충청도 대신 전라도를 선택했다.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한국선교를 창시한 아버지라면, 마페트는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를 한국에 정착시키고 교류하면서 그 정책 방향을 인도한 어머니였다고 하겠다.’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1)
첫째로, 위 연구자의 근본적인 교회사(기독교사) 서술의 문제는 원사료 부족이다. 원사료는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가 기본이다.
둘째로, 위 연구자는 ‘기록된 원사료’의 제한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무리한 논지를 전개하느라 편향성이 다분한 1차, 2차 자료에 치중되어 객관성의 문제를 노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 연구자는 치명적인 역사왜곡이 ‘사실’(Fact)이 아닌 데서 나온다는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고, 현대 사조2)에 편승한 듯이,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를 재구성이라는 미명하에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뿌리깊은 기초를 놓은 윤치호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는 윤치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언더우드, 마펫, 미 북장로교 등의 언급자체가 역사왜곡이고 사실이 아닌 소설이다.
1. 윤치호가 테네시주 네쉬빌에 위치한 밴더빌트(Vandervillt) 대학교에서 학부 학생으로 수학하기 위해 도착한 것조차도 미국 남부지역 주요 언론에 보도 되었다.3)
2. 윤치호는 일본을 거쳐서 미국 남부로 오는 여정 포함,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면들을 속속들이 목격하며 몸소 겪었던 최초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3. 윤치호는 미국 남부에서의 학업과 거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선(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미 남부지역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절실하다는 필연성과 시급성을 설파하였고, 특히 그의 조선(한국)에 대한 선교적 외침은 미국 남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미 남부지역을 요동치게 만든 윤치호의 순회연설
4. 윤치호의 순회연설을 통해서 미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그 지경을 넘어서 경천동지 할 파장을 불러왔다. 1890년대에 들어서 ‘대중매체’의 거대한 파고가 미국 전역에 몰아치고 있었다는 것도 윤치호의 순회연설이 거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4) 이는 흡사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독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채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고, 루터의 개혁적인 소책자들이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개선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확산된 것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5)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후예들이 개척한 곳에서 순회연설의 포문을 열다
1891년 6월 18일 목요일에 윤치호와 친구인 스펜서는 정들었던 밴더빌트 대학 교정을 출발하여 유니언 기차역에서 버지니아로 가는 열차에 탑승했다. 날씨는 맑았으나 남부의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때였다. 그들을 태운 기차는 오후 3시 30분에 출발하여, 오후 9시 30분에 테네시주 채터누가에 도착하였고, 30분 후에 출발하여 밤새도록 달렸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 버지니아 샬롯빌로 가는 갈랜드 박사를 만나기도 하였다.6)
윤치호는 테네시주와 버지니아주의 경계이자, 각 주에 브리스톨(Bristol)7)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을 들러서, 1891년 6월 19일 오전 9시에 버지니아 루럴 리트릿(Rural Retreat)에 도착하였다. 윤치호는 루럴 리트릿이 해발 762m여서 거주하기에 이상적인 곳이며, 루터교회와 감리교회, 학교, 상점 몇 곳이 있는 인구 약 600명의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상세히 묘사하였다.8) 윤치호는 브라운 교수가 집례하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버지니아 크리플 크릭(Cripple Creek)에 있는 에즈베리 교회에 참석하여 조선(한국) 출신 기독교인의 존재를 알렸다. 여기서 윤치호는 암울한 조국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이 소망이고 부활이며 생명임을 절실하게 인식하였다.9)
1891년 6월 28일 주일에 루럴 리트릿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이번 순회집회의 서막을 장식하였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후예들이 개척한 곳에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지역민들이 많이 모였다. 수많은 청중들이 얼마나 윤치호의 강연에 집중하는지 가벼운 농담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반적으로 보면, 강연 장소가 감리교회라고 해서 청중이 해당 교인으로 제한되지는 않았고, 모든 공개강연이 대중들에게 열려있기 때문에, 다양한 신앙 배경의 교인들 뿐만 아니라 교회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주변 지역들에서 참석하였다. 독일계 정착민이 다수였으므로 루럴 리트릿의 새로운 이름으로 독일 종교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아우구스부르그(Augsburg)가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윤치호는 마틴 루터의 후예들에게 강연한 사례비로 8불 85센트를 받았다.10)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11)의 파송교회에서 펼친 역사적인 강연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고향교회이자 파송교회인 싱킹 스프링 장로교회(Sinking Spring Presbyterian Church)는 버지니아 워싱턴 카운티의 모교회였다. 아빙돈(Abingdon)에 위치한 이 교회로부터 이 카운티 내에 있는 교회들이 세워져 나갔다. 이 카운티 자체에는 장로교의 본산지인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스코티시-아이리시 계열의 정착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윤치호는 버지니아 워싱턴 카운티의 아빙돈으로 오기 전에, 버지니아 위즈빌(Wythville) 감리교회의 섬머스 목사의 초청으로 강연하였다. 인구 약 4,000명의 위즈빌에는 감리교회 신자가 장로교회 신자보다 많았지만, 부유층과 학식자들은 장로교회가 훨씬 더 많았고, 심지어 네쉬빌에서 윤치호가 출석하던 웨스트 앤드 교회보다도 이런 계층의 교인들이 월등히 다수를 차지하였다. 윤치호에게는 교단과 교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조선(한국)에 다방면으로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자주 미 남장로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였던 것이다.12) 위즈빌 교회에서의 공개강연은 비가 오고 독일 전통 무도회가 대대적으로 열리는 바람에 많은 수가 참여하지는 못했다. 윤치호는 참석자가 훨씬 많았던 루럴 리트릿 강연보다 약간 더 많은 9불 4센트를 사례비로 받았다.13)
윤치호는 버지니아 루럴 리트릿, 크리플 크릭, 위즈빌을 거쳐서 매리언(Marion) 교회의 케네디 박사의 초청을 받고 강연하였다. 그의 딸들은 아빙돈에 있는 마르다 워싱턴 여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주변 환경에 자리 잡은 매리언 교회는 크고 웅장하였고, 많은 수의 교인들과 지역민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윤치호는 8불 25센트를 사례비로 받았다. 매리언에서 윤치호는 정신병동을 찾아서 환자들을 위로하며 시설을 견학하였다. 사실 윤치호는 1888년 11월 4일 네쉬빌에 도착한 이후로 웨스트 앤드 교회 성도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지역의 정신병동을 방문하며 긍휼을 실천하였었다. 윤치호는 깨끗하게 구비된 매리언 정신병동을 보면서 자유의 여신상보다 이런 시설이 미국의 문명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생각하였다.14)
매리언이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고향인 아빙돈에서 지척에 있었기 때문에, 윤치호는 1891년 7월 3일 오후 12시 35분에 매리언을 출발하여 오후 12시 50분에 아빙돈에 도착하였다. 윤치호는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모교회이자 파송교회인 싱킹 스프링 장로교회의 카든 형제가 마중 나와 환영했다. 비록 이 날이 미국 독립기념일이라서 버지니아주와 테네시주에 걸쳐있는 브리스톨에서 열린 행사로 인하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석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싱킹 스프링 장로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언론매체를 통하여 조신인 기독교도 윤치호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고, 은자의 나라에서 온 윤치호를 직접 보면서 조선(한국)에 대한 강연을 들으니 관심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음이다.15) 당시 선교적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던 리니 데이비스에게 윤치호의 강연은 크나큰 도전이 되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1893년 6월 26일에 윤치호가 노스 캐롤라이주 쉘비에서 교회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조선(한국)에 관한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에 참석한 리니 데이비스의 사촌인 리치먼드의 월드만 여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려졌다.16) 그녀가 자신이 조선(한국)에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인 리니 데이비스의 사촌이라고 윤치호에게 소개하자, 윤치호는 리니 데이비스를 축복하면서, 조선에 간 선교사는 아프리카 정글로 간 선교사보다 더 고생을 해야 된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리니 데이비스가 원래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했던 사실을 포함하여 그녀와 관련된 전후 사정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17)
이러한 근거로 볼 때, 리니 데이비스의 고향교회이자 파송교회에서 행한 윤치호의 연설 자체는, 그동안 언론매체를 통해서 폭넓게 알려지고 있던 윤치호의 활동들과 더불어, 리니 데이비스로 하여금 조선(한국) 선교사로 헌신하는데 있어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연구자가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를 ‘파괴’하기 위해서 이용한, 노회 파송 조선 선교사 카메론 존슨18)의 아전인수격인 주장, 즉 자신이 리니 데이비스에게 조선 선교사를 권했다는 말에 대하여, 위의 연구자가 원사료 검증과 교차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논리를 위해 그대로 인용한 것은 교회사적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2025년 출판된 필자의 두 권의 책과 이 글을 통해서 그 실체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윤치호는 리니 데이비스의 고향에서 역사적인 강연을 마친 후, 아빙돈에 위치한 마르다 워싱턴 여자 대학을 방문하여 총장과도 만나서 조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윤치호는 버지니아 워싱턴 카운티의 수도인 아빙돈을 중심으로 글래이드 스프링 강연, 에모리에 위치한 유서 깊은 에모리 앤 헨리 대학 방문 및 강연을 펼쳤다.19)
1891년 7월의 토네이도급 광풍을 몰고 온 윤치호의 강연
1891년 6월 중순부터 윤치호의 활동들을 통하여 서서히 불어오던 영향력의 바람은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의 고향교회를 중심으로 한 워싱턴 카운티에서 토네이도급 광풍으로 몰아쳐서 다방면에 걸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상에서 나열한 윤치호의 활동들만 통해서도 충만히 알 수 있지만, 위 연구자가 이용한 언더우드, 카메론 존슨, 더나아가 마펫(윤치호의 조선 복귀후 포함) 등의 역할은 찻 잔 속에서 이는 작은 움직임만도 못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음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윤치호의 일거수일투족은 각종 대중매체들에 집중 조명을 받게 되었다. 윤치호가 버지니아 루럴 리트릿에서 1891년 7월 8일 오전 11시 출발하여, 테네시주 그린빌을 경유하여 테네시주 모리스타운(Morristown)에 도착하였다. 모리스타운의 프렌치 목사가 마중 나와 환영했다.20) 윤치호가 모리스타운에 와서 강연한다는 소식은 지역 신문을 통해서 7일 전에 이미 보도되었다.21) 이 신문 매체가 윤치호를 소개하면서 조선(한국)에서 온 중국인으로 일부 잘못 보도했지만, 누구나 무료로 뜨겁게 환영한다고 정성껏 알렸다. 윤치호는 모시 크릭과 뉴 마켓 등으로 이동하면서 강연을 펼쳤다.22)
윤치호의 역사적인 7월 강연은 테네시주 낙스빌(Knoxville)을 강타하였다. 윤치호는 1891년 7월 12일 주일 이전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3) 사회자는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열방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청중들에게 환기시켰다. 그는 자리를 가득 메운 청중들과 함께 ‘저 북방 얼음산과’라는 찬양을 불렀다. 윤치호는 조선(한국)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및 조선에서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다음은 그 핵심 내용이다.
윤치호가 소개되었다. 그는 단정하게 보이는 신사이며, 미국인들에 비하면 왜소하게 보인다. 물론 그의 나라 조선에서는 평균 신장이지만 말이다. 미국에서 만나게 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다. 그의 강연은 우리가 들어본 최고이자 가장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일 정도로 탁월하다. 그는 조선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는 식의 과장된 감상주의도 전혀 없었다. 그런 식의 표현은 흔히 이런 강연에서 나타나곤 한다. 그의 강연에는 유머가 가득했고, 그는 조슈 빌링스(Josh Billings)가 그토록 유명했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본 미국인은 8~9년 전, 박물관에 전시할 골동품을 수집하러 다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미국인은 윤 목사에게 골동품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데려가 주신다면 있다”고 농담처럼 답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미국에서 주목받게 되는 인물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 일본인과 중국인은 많지만, 아마도 자신이 이 지역에서 유일한 조선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은 한 미국인 친구가 그에게 “독일인을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윤 목사는 “그 사람이 뭐가 특별하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그가 독일인이고 이름이 독일식이라는 점”이라고 답했다. 윤 목사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인기 있는 춤에 대해 아는 정도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어떤 조선인도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 없었지만, 이제 그들의 문은 세계를 향해 열렸고, 방문객들도 원한다면 조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24)
윤치호는 조선의 정치체계, 사회, 관습, 전통 종교에 대한 소개를 통하여 한국선교의 가능성과 시급성을 신중하면서도 위트를 더해서 설파하였다. 당시 언론들의 평가는 과장되지 않았고 실제로 미국 남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토네이도급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윤치호의 일기가 1891년 7월 12일 자를 마지막으로 나머지 7월과 8월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윤치호의 7월과 8월 강연은 미국 남부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서 각 지역별로 역사적인 강연을 하느라 일기를 기록하는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25)
1891년 8월의 허리케인급 태풍을 몰고 온 윤치호의 초청 강연
윤치호의 7월 순회강연의 파급력은 테네시주 낙스빌을 거쳐 가며 허리케인급 태풍으로 발전하였고, 조선(한국)과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윤치호는 순회강연의 방향을 미 남부의 중심인 버지니아주로 잡고 주요 도시들을 거쳐서 수도인 워싱턴을 넘어 미 북부까지 광범위하게 태풍급 강연을 펼쳤던 것이다.
윤치호의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과 관련하여, 태풍의 눈은 테네시주와 버지니아주에 각기 걸쳐 있는 브리스톨(Bristol)에서 목격되어 윤치호의 한마디 한마디가 현장의 청중들과 언론매체의 독자들을 사로잡았다.26) 윤치호의 허리케인급 태풍과도 같은 파급력은 로녹(Roanoke)에 다다르며 8월 강연의 서두를 장식하였다.27)
윤치호는 버지니아주의 린치버그(Lynchburg)와 리치몬드(Richmond) 등에서 집회 장소를 옮겨가면서 현지의 뜨거운 반응을 몸소 경험하였다.28) 윤치호는 버지니아주의 주요 도시들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각 인근의 지역들에서 청중이 몰려들면서 그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더군다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쇄술의 발전이 루터 종교개혁을 빠르게 확산시켰듯이, 대중매체의 보편화는 윤치호의 한국 선교에 대한 외침을 거국적으로 저변확대 시켰다.
한국인 최초 미국 대학 졸업생, 변수(1861-1891)와의 만남과 죽음
1891년 8월 강연의 허리케인급 태풍과 같이 엄청난 영향력이 몰아치는 와중에, 윤치호는 미국의 중심지인 수도 워싱턴을 방문하여 다양한 인맥을 통해서 조선(한국) 선교의 필연성과 시급성을 널리 알렸다. 윤치호는 수도 워싱턴 방문 중에 변수를 만났다. 변수는 중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농업기술을 익힌 것을 계기로 국왕(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윤치호와 변수의 처지가 비슷하여 공감하는 바가 컸다. 변수는 1891년에 메릴랜드 주립 농과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여 미주 최초의 한인 대학 졸업생이 되었던 것이다. 변수는 대학 졸업 후, 미 농무국에 취직되어 매달 60달러의 월급을 받았고,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하지만 변수는 프린스 조지 카운티에서 급행열차에 치여 죽었다. 비록 변수가 원칙이 없는 것이 큰 약점이었지만, 변수의 죽음은 윤치호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29)
미 북장로교의 북부지역을 강타한 윤치호의 허리케인급 태풍과 같은 조선(한국) 선교 강연
위의 연구자가 미 북장로교 소속의 조선(한국) 선교사들인 언더우드와 마펫, 그리고 미 북장로교의 좌충우돌식 조선에서의 초기 정착과정을 성공으로 미화 등 이용하여, 자신의 현대사조, 즉 후기 현대주의(Post Modernism)와 후기 구조주의에 입각하여,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를 재구성한다는 미명하에 파괴를 시도한 것에 대하여 이미 충분히 그 역사 왜곡과 사실이 아닌 허구성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앞으로 그런 파괴적인 시도는 필자의 두 개의 원사료에 근거하여 적나라하게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윤치호의 메가톤급 역할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이상에서 다룬 내용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미 남장로교의 남부지역에서 윤치호의 조선 선교에 대한 역할과 기여는 독보적이며 비교 불가이다. 이제 윤치호의 태풍급 8월 강연의 파장은 미 북장로교의 북부지역까지도 초토화 시켰다.
윤치호가 미 북장로교의 북부지역에서 행한 강연들도 언론매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미 북장로교 지역에 고스란히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가 강연하기 전부터 언론매체는 앞다투어 윤치호의 강연 시간과 장소를 고지하는데 열심이었다.30) 미 북장로교 지역에서 윤치호의 태풍급 파급력을 지닌 강연은 미 북장로교의 교회들과 교인들을 포함하여 북부지역 구석구석에까지 조선 선교에 대한 시급성과 필연성을 가장 영향력 있게 전달하였던 것이다.31)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조선(한국)에서 토박이 한국인 윤치호가 직접 미국에 와서 대학을 졸업한 후, 유창한 영어로 조선(한국) 선교에 대하여 설파하니, 미 북장로교의 북부에서도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으로 초토화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미 북장로교의 북부지역을 강타한 윤치호의 태풍급 강연은 미 북장로교 조선(한국) 선교 초기의 좌충우돌, 즉 미 북장로교 파송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그의 조수로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의 갈등,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표제출과 미 북감리교로의 소속 변경 추진, 언더우드의 고집과 아집과 조급한 성과주의로 인한 갈등과 분열, 제국주의적 발상, 정교유착을 통한 정치적인 행보 등으로 답보상태에 있던, 미 북장로교의 조선(한국) 선교에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있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미 북장로교의 조선 선교 초기 문제에 대해서도 곧 다룰 것이다.
1891년 10월 전미신학교선교연맹 대회에서 조선(한국) 선교의 주인공은 윤치호였다. 언더우드는 윤치호의 그늘에 가려져서 미미한 존재였다.3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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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
2) Madan Sarup, An Introductory Guide to Post Structualism and Post Modernism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93) and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ity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IVP 2000)을 참조하라. 필자는 세계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교회사회, 대영제국 교회사학회, 미국교회사학회 등을 통해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의 현대사조에 부응하여 교회사를 ‘재구성’ 한다는 미명하에 교회사를 어지럽히고 혼돈으로 몰아가고 파괴하는 시도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서구의 일반사학계나 각종 역사학회의 흐름도 거의 같은 경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3) 尹致昊日記, 1888년 11월 4일; Raleigh Christian Advocate, November 28 1888, Wednesday, North Carolina; The Abbeville Press and Banner, November 21 and 28 1888, South Carolina
4) Robert McNamara, ‘History of Newspapers In America: The Press Expanded in the 1800s and Grew Into a Potent Force in Society’, ThoughtCo, May 1 2025; Refer to Aurora Wallace, Newspapers and the Making of Modern America: A History (Westport 2005).
5) 최은수, 언약도 (서울 2003); 최은수 역, 장로교 정치제도 형성사 (서울 1997) 참조하라.
6) 尹致昊日記, 1891년 6월 18일.
7) 테네시주와 버지니아주 각각 브리스톨이 있으며, 이곳은 컨트리 뮤직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8) 尹致昊日記, 1891년 6월 19일.
9) 尹致昊日記, 1891년 6월 28일.
10) 尹致昊日記, 1891년 6월 28일. ‘History’, The Town of Rural Retreat, Virginia.
11) 최은수, ‘미국 남장로교회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Selina ‘Linnie’ Fulkerson Davis)의 가정배경에 관한 연구‘, 부경교회사연구, 2020년 11월, 제84호; 최은수, ’리니 데이비스‘, 교회와 신앙, 2020년 12월 21일 이후 시리즈.
12) 윤치호의 미 남장로교와 장로교 관련 기관들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 도착하여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각인되어 갔다.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5일을 참고하라.
13) 尹致昊日記, 1891년 6월 30일.
14) 尹致昊日記, 1891년 7월 2일과 3일.
15) 尹致昊日記, 1891년 7월 3일.
16) 윤치호는 1893년 여름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만 45회의 조선 소개 및 조선 선교에 대한 강연을 펼쳤다. The Charlotte Observer, June 28 1893.
17) 尹致昊日記, 1893년 6월 26일.
18) 옥성득 교수는 카메론 존슨이 독립 선교사라고 하지만, 노회의 관리하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노회 파송 선교사인 것이다. 이는 총회 파송 선교사와 구분하려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언어유희적인 표현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고 혼란을 야기하고 궁극적으로는 ‘파괴’하기 위한 언급들이 너무 많아서 심히 우려된다.
19) 尹致昊日記, 1891년 7월 4일과 5일. 버지니아 워싱턴 카운티에 위치한 글래이드 스프링 장로교회도 아빙돈의 싱킹 스프링 장로교회가 개척한 교회였으며, 전남 순천 안력산병원에서 의사 선교사로 사역했던 로저스(노재수) 선교사의 묘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빙돈에 있던 마르다 워싱턴 여자 대학이 20세기 초에 재정난으로 자립이 힘들게 되자, 에모리에 있는 에모리 앤 헨리 대학에 병합되었는데, 이 대학과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와 관련하여 후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20) 尹致昊日記, 1891년 7월 8일.
21) The Morristown Gazette, July 1 1891.
22) 尹致昊日記, 1891년 7월 9일과 10일.
23) The Evening Sentinel, Saturday, July 11 1891; Knoxville Daily Tribune, Sunday, July 12 1891.
24) The Knoxville Journal, Monday, July 13 1891; The Journal and Tribune, Monday, July 13 1891.
25) 尹致昊日記, 1891년 7월 12일.
26) The Daily Times, July 18 1891; The Roanoke Times, July 18 1891.
27) The Roanoke Times, July 30 1891. 로녹은 미 남장로교 최초의 한국인 세례교인이자, 미주 최초의 한인 세례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필자의 최초 선행 연구를 통하여 주미공사 서리 이채연이 부인 이름이 ‘배선’이라는 점을 밝혀서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로녹을 중심으로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와 윌리엄 전킨이 파송전에 팀사역을 펼치기도 하였다.
28) The News and Advance, August 2, 4, 5 1891; Richmond Dispatch, August 15 1891; Richmond Times Dispatch, August 26 1891.
29) 尹致昊日記, 1891년 11월 2일.
30) The Baltimore Sun, 1891년 8월 12일.
31) The Baltimore Sun, 1891년 8월 13일; The Buffalo Enquirer, 1891년 8월 20일; Richmond Times-Dispatch, 1891년 8월 26일.
32)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0일, 22일, 23일, 24일, 25일.
* <교회와신앙>은 옥성득 교수의 반론권을 보장한다. -
옥성득 교수,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 서술의 근본적인 문제 (4)
- 최은수 교수
- 입력 2026.01.09 15:56
- 수정 2026.01.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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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선발대를 한국으로 불렀다면, 마페트는 토착적인 교회 설립을 위해 그들을 순회 전도여행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인도했다. 마페트가 평안도로 진출하면서, 남장로회는 충청도나 전라도를 후보지로 생각했는데, 마페트의 판단으로 충청도 대신 전라도를 선택했다.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한국선교를 창시한 아버지라면, 마페트는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를 한국에 정착시키고 교류하면서 그 정책 방향을 인도한 어머니였다고 하겠다.’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1)
첫째로, 위 연구자의 근본적인 교회사(기독교사) 서술의 문제는 원사료 부족이다. 원사료는 ‘기록되어진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가 기본이다.
둘째로, 위 연구자는 ‘기록되어진 원사료’의 제한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무리한 논지를 전개하느라 편향성이 다분한 1차, 2차 자료에 치중되어 객관성의 문제를 노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 연구자는 치명적인 역사왜곡이 ‘사실’(Fact)이 아닌데서 나온다는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고, 현대 사조2)에 편승한 듯이,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를 재구성이라는 미명하에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뿌리깊은 기초를 놓은 윤치호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는 윤치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언더우드, 마펫, 미 북장로교 등의 언급자체가 역사왜곡이고 사실이 아닌 소설이다.
1. 윤치호가 테네시주 네쉬빌에 위치한 밴더빌트(Vandervillt) 대학교에서 학부 학생으로 수학하기 위해 도착한 것조차도 미국 남부지역 주요 언론에 보도 되었다.3)
2. 윤치호는 일본을 거쳐서 미국 남부로 오는 여정 포함,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목격하며 몸소 겪었던 최초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3. 윤치호는 미국 남부에서의 학업과 거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선(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미 남부지역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절실하다는 필연성과 시급성을 설파하였고, 특히 그의 조선(한국)에 대한 선교적 외침은 미국 남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미 남부지역을 요동치게 만든 윤치호의 순회연설
4. 윤치호의 순회연설을 통해서 미 남부지역 뿐만 아니라 그 지경을 넘어서 경천동지할 파장을 불러 왔다. 1890년대에 들어서 ‘대중매체’의 거대한 파고가 미국 전역에 몰아치고 있었다는 것도 윤치호의 순회연설이 거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4) 이는 흡사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독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채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고, 루터의 개혁적인 소책자들이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개선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확산된 것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5)
미 북장로교의 북부지역을 강타한 윤치호의 태풍급 강연은 미 북장로교 조선(한국) 선교 초기의 좌충우돌, 즉 미 북장로교 파송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그의 조수로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의 갈등,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표제출과 미 북감리교로의 소속 변경 추진, 언더우드의 고집과 아집과 조급한 성과주의로 인한 갈등과 분열, 제국주의적 발상, 정교유착을 통한 정치적인 행보 등으로 답보상태에 있던, 미 북장로교의 조선(한국) 선교에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있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미 북장로교의 조선 선교 초기 문제에 대해서도 곧 다룰 것이다.
넷째로, 위의 연구자는 언더우드와 미 북장로교에 대한 전제가 너무 강하여, 1891년 10월 전미신학교선교연맹 대회에서 조선(한국) 선교와 관련하여 주인공인 윤치호의 존재감을 과소평가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노출시켰다.
필자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위의 연구자에게 그 어떠한 개인적인 감정은 추호도 없다. 필자는 처음부터 교회를 받들어 섬기며 교회사를 정립하는 학문을 일관되게 수행해 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의 지엽으로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위의 연구자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학문하는 영역이 다르고 접근방식도 상이하므로 필자가 관심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필자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 관련 논문을 위의 연구자가 이런 식으로 기록하지만 않았어도, 필자가 시간을 들여서 역사왜곡을 지적하고 교회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지금의 수고는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위의 연구자가 필자가 최초로 행한 선행연구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이 처음으로 연구하는 것인 양 논문을 전개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첫 번째 글에서 그 심각성을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곧 필자의 글을 통하여 그 문제점을 조목조목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6)
필자가 현재 시리즈로 논하는 글은 위의 연구자가 먼저 필자의 최초 선행연구를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문제점 지적이며, 엄격히 말해서 이런 논의를 시작한 것은 필자가 아니라 위의 연구자이다. 필자가 인터넷 매체인 <교회와신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학술적인 글들을 발표하며 논지를 펴는 것은, <교회와신앙>이 35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논문급 글들을 발표하여 대중화시켜 오고 있다는 품격 있는 수준 때문이다. 요즘 권위 있는 학술논문일수록 대중화의 필요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온라인판에 수시로 게재한다. 위의 연구자가 <교회와신앙>의 편집부에 필자의 글들을 모두 내리라고 요청한 것은 학문하는 기본자세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1891년 10월 전미신학생선교연맹 대회에서 보인 인종차별-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하면서 해외선교를 하는 부조리와 이중성
윤치호가 대회 현장에서 직접 겪었던 인종차별의 내용이다. 영문과 국문으로 병기하여 소개한다.
23rd. Friday. A cold, lovely morning.
Rev. Hugh Price Hughesaddressed the students in the chapel at 9 a.m.
In the afternoon session Dr. Lambuth spoke on Japan and its missionary works with his usual earnestness and clearness. Rev. Underwood, Corea, followed Dr. Lambuth. Then a short talk by Rev. H.P. Beach, Doctor of Divinity, a returned missionary from China. In course of the talk he said that he had been disgusted at the dirty Coreans. This attack on the Coreans was altogether uncalled for. Nor was he just for he never saw any Corean except the coolies. Necessary or unnecessary, just or unjust this remark instantly focalized all eyes on my involuntarily crimsoned face. O, the exquisite torture my whole soul then experienced!
This Reverend Doctor of Divinity seems to be one of those who go to a mission field for no other purpose than for having a little "fun" and adventure among the poorer classes and coming home to brag on howheroicand devoted they are.
Miserable, lonely and unhappy all the rest of the day.
23일 《금요일》 추웠으나 아름다운 아침.
오전 9시에 휴 프라이즈 휴즈(Hugh Price Hughes) 목사가 대학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하였다.
오후 모임에서 여느 때처럼 램버드(Lambuth) 박사가 일본과 선교 사역에 대하여 성실함과 확신을 가지고 강연하였다. 램버드 박사 다음에 언더우드註 001목사가 조선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다음 중국 선교지에서 돌아온 선교사이자 신학박사인 비취(H. P. Beach) 목사가 짤막하게 이야기하였다.
말하는 가운데 비취는 더러운 조선 사람들에게 넌더리가 났다고 했다.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이런 공격은 불필요한 것이다. 조선 사람이라고는 일꾼들 말고 전혀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하지도 않은 비난이다. 필요하든 필요치 않든, 정당하든 정당치 않든, 그의 말로 인해 내 얼굴은 나도 모르게 불거졌고 모든 시선이 곧장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렇게 나의 온 영혼은 참혹한 고문을 겪었다!7)
신학박사요 목사인 이 사람은 다른 목적이 아니라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과 ‘재미 삼아’ 조금 살아보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또 헌신적으로 섬겼는지를 자랑하기 위해 선교지로 가는 선교사들 중 한 사람이다.
온종일 비참하고 외롭고 우울하였다.8)
윤치호는 인종차별을 하면서 해외선교를 하는 현장에서 ‘참혹한 고문’을 겪어야 했다. 윤치호의 일기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중요한 사실을 한가지 발견했는데, 그는 인상적이지 않거나 감동이 안 되는 강의나 발표에 대하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더우드가 10월 23일과 25일에 행한 연설에 대하여 윤치호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9) 언더우드가 행한 조선 선교 관련 연설에 관하여 윤치호가 이렇듯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윤치호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에서10) 온 제이콥과 대화하면서 자기 나라 사람들이 영국이나 미국 선교사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추렸다. 1. ‘선교사들은 개종한 이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거나 행사하고자 한다’; 2. ‘선교사들은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만큼 사례비를 주지도 않으면서 토박이 전도자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3. ‘선교사들은 토박이 전도자들에게 온당한 교육을 하지 않고 있다.’11) 윤치호는 제이콥의 말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종차별은 일상적이었다.


1891년 10월 전미신학교선교연맹 대회에서 조선(한국) 선교의 주인공은 윤치호였다. 언더우드는 윤치호의 그늘에 가려져서 미미한 존재였다.12)
위의 연구자는 언더우드의 강연 내용을 비교적 길게 언급하면서, 윤치호의 강연은 요약적으로 다루었고, 곧이어 ‘사실’(Fact)에 근거한 윤치호보다 언더우드를 즉시 더욱 부각시키며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였다.13) 위의 연구자가 원한 의도와는 정반대로, 조선(한국) 선교의 시급성과 필연성을 설파한 윤치호의 연설이 단연 돋보였고 파급력이 대단하였다. 윤치호는 매우 이성적으로 언더우드의 조선 선교에 대한 강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14) 언더우드의 발언에 대하여 윤치호가 일관되게 동일한 침묵의 태도를 취한 것은, 윤치호의 일기 형식과 그의 단호한 입장을 볼 때, 비공식적으로 주어진 윤치호의 연설이 더욱 무게감 있게 영향을 강하게 끼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윤치호의 영문 연설과 한글 번역이다.
Gentlemen: You have been told that there are 12 perishing millions in Corea; that they hunger and thirst for the gospel; that they beg you to "come over and help" them. Each of those statements has a great deal truth in it. I shall not contradict any: I shall only invite your attention to certain things so far untouched.
1. In the first place I desire to emphasize the fact that Coreahas 12 living millions, living in that whatever good you may do for them in the name of Christ shall not perish with dying men but live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living in that their hearts may be touched, their intellect enlightened, their emotions appealed to; living in that they are capable of doing boundless good or boundless evil.
2. They don't hunger and thirst after the gospel any more than children hunger and thirst after the medicine their mother may give for their benefit. You may feel discouraged to hear me say this. But, gentlemen, go there prepared for the worst and find the people readier accepting the gospel than be disappointed in your sanguine expectations.
3. I don't like using the phrase "Come over and help us". It has become a sort of a missionary chestnut in many instances. Besides, shall I ask you to leave this country where civilization is nearer to perfection than anywhere else and go toCoreawhere every prospect pleases but only man is vile? Shall I ask you to bid a farewell to your fathers and mothers, sisters and brothers, last but not least, to your sweethearts and go to stay among a people who can not understand your language therefore can not understand your message; can not understand your message therefore can not appreciate your motives; can not appreciate your motives therefore can not love you and sympathize with you? No! No one shall hereafter look back to this fair land from that field regretting that I persuaded him for the undertaking. I don't believe in a missionary of human persuation: I don't therefore ask or persuade anybody.
If, however, you are convinced thatCoreais embraced in our common Savior's order of march; if you realize the fact that your light will shine brighter inCorea because of the heathen darkness; that your work which may be a brick in the temple of God here will be a corner-stone of the church of Christ inCorea; if you prefer the most useful and Christ-like life to the enjoyment of comforts for a season; if the Spirit of God tells you go there because of the great need and few laborers-if these are appeals, if these are calls, let them appeal to you and let them call you to the field. My heart and prayers are and shall be with you; and when Providence shall remove the obstacles now in my way so that I may see my native land again, my heart, prayers and service shall be with you in the common cause of winning Corea for our Lord.
“신사 여러분, 조선에는 ‘죽어가는(perishing)’ 사람들이 1,200만 명이나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그리워하고 목 말라 합니다. 그들이 여러분께 “와서 도와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들어 알고 계십니다. 그들의 말은 진심입니다. 저는 어느 것도 반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다루지 않는 몇 가지에 대해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1. 첫째, 조선에는 ‘살아 있는(living)’ 사람들이 1,200만 명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베푼 선한 일은 죽어 가는 사람들과 함께 죽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세대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고 그들의 지식이 개명되며 그들의 감성을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무한히 선한 일도 할 수 있고, 무한히 악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2. 어머니가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치료약을 갈망하고 목말라 하는 것 이상으로 조선 사람들이 복음을 갈망하고 목말라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용기를 잃게 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사 여러분, 낙천적인 기대를 하다가 실망하기보다는 최악의 상태를 대비하시고 그곳으로 가셔서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인민들을 만나십시오.
3. 저는 “와서 도와 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 경우에 선교사들의 케케묵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에 더하여, 어느 곳보다 문명이 거의 완전에 가까운 이 나라를 떠나, 장래는 있지만 인민들이 천한 조선으로 가시라고 요청할까요?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적은 존재가 아닌 애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여러분의 말을 몰라 전하는 내용을 모르는 이들, 여러분이 전하는 내용을 몰라 여러분의 의도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 여러분의 의도를 몰라 여러분을 사랑하거나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러 가시라고 요청할까요? 아닙니다. 이 시간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 유감입니다. 다만 선교지에서는 이 아름다운 나라를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인간의 설득으로 선교사가 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누구에게 요청하지도,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조선이 우리 구세주의 행군 명령에 포함되었다고 확신한다면, 만약 여러분의 빛이 어두움에 쌓여 있는 이방 조선에서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면,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의 벽돌 하나이지만 조선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면, 잠시의 안락을 즐기기보다 가장 가치 있는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아주 필요하나 사역자가 적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그곳으로 가라고 말씀하는 데 순종한다면, 만약 이러한 것들이 매력이고 이러한 것들이 사명이라면,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움직이고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조선이라는 선교지로 가도록 부르게 하십시오.
저의 마음과 기도가 여러분과 함께 있고 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지금 저의 길을 방해하고 있는 장애를 거두어 주셔서 제가 고향 땅을 다시 볼 수 있을 때, 조선이 우리 주님을 믿도록 하는 우리 공동의 사역에 저의 마음, 기도, 그리고 헌신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15)
언더우드의 조선 선교에 대한 발언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 없이 일관되게 침묵하던 윤치호는, 이미 미국 남부와 북부 전역을 초토화시켰던 강연들과 같이, 좌중을 압도하는 연설로 감동을 선사하였다. 사회를 보던 스피어 형제는 윤치호의 유창한 영어로 전달된 영감어린 호소에 압도되어, ‘나의 말이 끝날 직후’16)에 그는 곧바로 조선(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선교 자원자를 묻자, 아담스와 테이트 두 명이 즉각 일어서며 반응하였다. 윤치호는 미 남장로교 소속의 테이트에 대해서는 별다른 걱정이 없어서인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던 반면에, 미 북장로교 소속의 아담스에 대해서는 ‘너무 멋을 부리려 한다’고 우려 섞인 말을 하면서 혹시 아담스가 조선(한국)에서 잘 견디기만 한다면 무척이나 놀랄 일일 것이라고 특별히 기록하였다.17) 윤치호가 볼 때, 미 북장로교의 아담스가 믿음직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치호가 분명하게 밝힌 대로, 그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조선(한국) 선교사로 자원하겠다고 기립한 인물은 미 남장로교 파송 최초 7인의 개척선교사들 가운데 한 명인 미주리주 출신의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위의 연구자가 ‘언더우드의 연설에 영감을 받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 것은 너무 억지다.18) 이 대회에 레이놀즈와 카메론 존슨이 참가했으나, 테이트가 자원하여 기립할 때, 그들은 조선(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할 의사를 밝히지 않고 침묵했다. 윌리엄 전킨은 처음부터 이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19) 이 대회에 참가한 두 명이 왜 그 자리에서 공적으로 헌신을 표하지 않았는지부터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사필귀정한 대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윤치호의 감명어린 연설을 듣고 곧바로 조선(한국) 선교에 헌신한 사람은 루이스 테이트 한 명 뿐이라는 것이다. 루이스 테이트의 여동생인 매티 테이트는 친오빠와 입장이 같았다.20)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도 그녀의 고향교회이며 파송교회인 싱킹 스프링 장로교회에서 윤치호가 펼쳤던 순회강연을 통해서 조선(한국) 선교사로 지원했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21) 총회 파송을 기준으로, 1891년 전미신학생선교연맹 대회에서 조선 선교사로 자원하여 기립하지 않았던 레이놀즈, 아예 참석하지 않았던 전킨, 그리고 이들의 미래 부인들도 모두,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언더우드의 강연이 아닌, 그보다 휠씬 전부터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1888년 말에 조선 출신 윤치호가 미 남부에 와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구체화 되었고, 윤치호의 순회강연을 통하여 확고해졌다.
미국 남부에서 윤치호의 존재 자체가 조선(한국) 선교의 동력, 그리고 존 로스 선교사
윤치호는 미국인들이 인종차별을 노골적으로 하면서, 동시에 해외선교를 하고 있는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체험하였다. 윤치호는 미국에서 학업과 순회사역을 겸하여 진행하면서 미국인들의 잘못된 선입견을 깨고 조선 선교에 나서도록 명확한 선교의 길을 제시하였다. 미국 남부와 북부를 포함하여 언론매체들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조선 선교에 대한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때마침 윤치호가 미 남부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그의 존재만으로도 조선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한 그 어떤 활동도 아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존 로스 선교사의 만주 사역이 구체적으로 미국에 전해지고 있었다.22) 윤치호가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므로 만주를 중심으로 조선인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존 로스 선교사에 대하여 관심이 매우 많았다. 윤치호는 존 로스 선교사에 대한 글을 읽으며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을 통하여 섭리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다.23)
미 남부 최초의 조선(한국) 선교사 지원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 로스 선교사24)가 만주에서 펼친 조선(한국) 선교 사역에 감명을 받고 미국 남부에서 최초의 선교사 지원자가 나왔다. 이런 움직임도 윤치호가 미 남부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역사였다. 윤치호도 존 로스 선교사의 사역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고 있었는데, 밴더빌트 대학의 동료인 비터톤(Betterton)이 존 로스 선교사의 영향으로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윤치호는 비터톤의 건강문제와 조선의 불결한 환경 등을 이유로 우려하였다.25)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윤치호의 존재 자체로 적어도 그의 주변에서, 아니 점차 미국 남부에서, 더 나아가 미 북부지역까지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과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다섯째로, 미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총회, 대회, 노회, 지교회들, 후원성도들의 물질적인 후원과 기도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미화되고 정설처럼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 형제의 물질적인 기여가 얼마나 과장되고 왜곡되었는지 지적하고 사필귀정 할 것이다. 그동안 언더우드 형제의 적은 금액, 즉 한국선교 개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총비용 대비 그들의 헌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낮은지에 대하여 미 남장로교 총회 문서, 대회 자료, 노회 관련 문서, 지교회 자료, 개인후원자들의 비용처리 문서 등을 통하여 사실을 밝힐 것이다. 필자가 강조해 오던 대로,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가 균형을 맞추어 올바른 교회사가 정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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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 이 논문을 게재한 사이트를 방문하든지, 다음의 사이트를 방문하여 옥성득 교수의 글과 필자의 글들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아울러 필자의 선행연구물들과도 비교해서 분석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934605
2) Madan Sarup, An Introductory Guide to Post Structualism and Post Modernism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93) and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ity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IVP 2000)을 참조하라. 필자는 세계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교회사회, 대영제국 교회사학회, 미국교회사학회 등을 통해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의 현대사조에 부응하여 교회사를 ‘재구성’ 한다는 미명하에 교회사를 어지럽히고 혼돈으로 몰아가고 파괴하는 시도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서구의 일반사학계나 각종 역사학회의 흐름도 거의 같은 경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3) 尹致昊日記, 1888년 11월 4일; Raleigh Christian Advocate, November 28 1888, Wednesday, North Carolina; The Abbeville Press and Banner, November 21 and 28 1888, South Carolina
4) Robert McNamara, ‘History of Newspapers In America: The Press Expanded in the 1800s and Grew Into a Potent Force in Society’, ThoughtCo, May 1 2025; Refer to Aurora Wallace, Newspapers and the Making of Modern America: A History (Westport 2005).
5) 최은수, 언약도 (서울 2003); 최은수 역, 장로교 정치제도 형성사 (서울 1997) 참조하라.
6) 최은수, ‘미국 남장로교회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Selina ‘Linnie’ Fulkerson Davis)의 가정배경에 관한 연구‘, 부경교회사연구, 2020년 11월, 제84호; 최은수, ’리니 데이비스‘, 교회와 신앙, 2020년 12월 21일 이후 시리즈; 최은수, ’최초 내한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와 배 선 여사, 교회와 신앙, 2024년 3월 25일. 필자는 이 분야에서 최초의 선행연구를 하여 발표하고 관련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최은수, 목포 기독교 근대 역사관의 배경 (좋은땅 2025)과 최은수, 최초의 서양 의사 드류 유대모 (좋은땅 2025). 아울러 필자의 2026년 근간인 최은수,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 최초의 선행연구를 한 필자의 글과 옥성득 교수의 논문을 비교분석해 보기를 바란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934605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934605
7) 윤치호가 겪은 인종차별적인 모욕감은 당해보지 않은 이들은 절대 공감할 수 없다. 필자는 박사학위(Ph.D.)를 마무리할 즈음인 1990년대 초에, 글래스고 트론(Glasgow Tron)교회에서 한국파송 스코틀랜드인 선교사가 회중에게 한 모욕적인 선교보고 때문에, 대형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필자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수치감을 느꼈었다. 필자는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과 심지어 위에서 던진 큰 가전제품에 의한 공격도 경험하였다.
8)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3일.
9)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3일과 25일.
10) 최은수, 아르메니아 조지아 성지순례 핸드북 (좋은땅 2023)과 최은수, 아르메니아 조지아 성지순례 가이드북 (좋은땅 2025)를 참조하라.
11) 尹致昊日記, 1890년 1월 9일.
12)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0일, 22일, 23일, 24일, 25일.
13) 옥성득, 86-88.
14)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5일.
15)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5일.
16)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5일, ‘after my talk’.
17) 尹致昊日記, 1891년 10월 25일, ‘shall be agreeably surprised’.
18) 옥성득, 87.
19) 최은수, 목포 기독교 근대 역사관의 배경; 최은수, 최초의 서양 의사 드류 유대모 참조.
20) 최은수, ‘미 남장로교 파송 매티 새뮤얼 테이트의 배경 연구’, 교회와 신앙, 2021년 2월 9일 이후 시리즈를 보라. 루이스 테이트와 매티 테이트의 배경을 제대로 보면, 루이스 테이트가 왜 매코믹 신학교를 가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명약관화하게 알게 된다. 필자는 역사왜곡에 대한 사필귀정 후,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기초부터 제대로 정립하여 기초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21) 옥성득, 88. 카메론 존슨의 입장을 여과없이 수용하여 리니 데이비스를 언더우드의 영향권으로 포함시키려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다. 언더우드나 카메론 존슨이 아니라, 리니 데이비스는 윤치호의 순회강연을 통해서 조선 선교사로 헌신했던 것이다.
22) The Central Presbyterian (Richmond, Virginia), Wednesday, May 10 1882.
23) 尹致昊日記, 1890년 3월 24일.
24) 필자가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에서 본산 장로교회사 전공으로로 박사학위(Ph.D.)를 진행하면서 존 로스 선교사의 손자 가족을 만나서 교제한 바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장로로 섬기던 존 로스 선교사의 손자는 할아버지 관련 사진들과 관련 물품들을 보여주며 대단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25) 尹致昊日記, 1890년 3월 26일.
* <교회와신앙>은 옥성득 교수의 반론
옥성득 교수,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 서술의 근본적인 문제 (5)
- 최은수 교수
- 입력 2026.01.15 17:15
- 수정 2026.01.1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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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조지아연구소(AGSI)와 남장로교연구소(SPSI) 대표1)
필자는 학문적인 논의만 한다. 진영논리, 이념논쟁, 지방색 운운하는 것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한다. 우선, 다섯째 논지를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를 통하여 사필귀정할 것이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가 서구중심사고(사대주의)와 영어자료에 편향되어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하위 사료 몇 편에 의존하여 설명되고 화석화하여, 신화처럼 전해지는 내용들을 바로잡고 공식적이고 주된 흐름의 차원에서 올바르게 교정할 것이다.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시작인 미 남부의 총체적인 상황과 정서에 대한 이해가 간과되고 무시되어 온 점도 바로잡아 제자리에 놓을 것이다. 서구중심사고(사대주의)와 미국 쪽 영어 사료에 편향된 원사료들을 거르고 교차검증하면서, 백인 우월주의에 근거한 한국과 한국인 인종차별적 선교보고들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바로잡고, 한국과 영국 등 다양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원사료들을 발굴하여 풍성한 교회사가 되도록 할 것이다. 모든 논의들은 고명하신 교계 지도자 제위의 조언대로 ‘사랑과 긍휼’로 담아내며, 보다 알기 쉽고 간결하게 정리할 것이다.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선발대를 한국으로 불렀다면, 마페트는 토착적인 교회 설립을 위해 그들을 순회 전도여행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인도했다. 마페트가 평안도로 진출하면서, 남장로회는 충청도나 전라도를 후보지로 생각했는데, 마페트의 판단으로 충청도 대신 전라도를 선택했다. 언더우드가 남장로회 한국선교를 창시한 아버지라면, 마페트는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를 한국에 정착시키고 교류하면서 그 정책 방향을 인도한 어머니였다고 하겠다.’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2)
첫째로, 위 연구자의 근본적인 교회사(기독교사) 서술의 문제는 원사료 부족이다. 원사료는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가 기본이다.
둘째로, 위 연구자는 ‘기록된 원사료’의 제한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무리한 논지를 전개하느라 편향성이 다분한 1차, 2차 자료에 치중되어 객관성의 문제를 노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 연구자는 치명적인 역사 왜곡이 ‘사실’(Fact)이 아닌 데서 나온다는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고, 현대 사조3)에 편승한 듯이,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를 재구성이라는 미명하에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뿌리 깊은 기초를 놓은 윤치호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는 윤치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언더우드, 마펫, 미 북장로교 등의 언급 자체가 역사 왜곡이고 사실이 아닌 소설이다.
1. 윤치호가 테네시주 네쉬빌에 위치한 밴더빌트(Vandervillt) 대학교에서 학부 학생으로 수학하기 위해 도착한 것조차도 미국 남부지역 주요 언론에 보도 되었다.4)
2. 윤치호는 일본을 거쳐서 미국 남부로 오는 여정 포함,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목격하며 몸소 겪었던 최초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3. 윤치호는 미국 남부에서의 학업과 거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선(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미 남부지역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절실하다는 필연성과 시급성을 설파하였고, 특히 그의 조선(한국)에 대한 선교적 외침은 미국 남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미 남부지역을 요동치게 만든 윤치호의 순회연설
4. 윤치호의 순회연설을 통해서 미 남부지역 뿐만 아니라 그 지경을 넘어서 경천동지할 파장을 불러왔다. 1890년대에 들어서 ‘대중매체’의 거대한 파고가 미국 전역에 몰아치고 있었다는 것도 윤치호의 순회연설이 거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5) 이는 흡사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독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채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고, 루터의 개혁적인 소책자들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개선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확산된 것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6)
미 북장로교의 북부지역을 강타한 윤치호의 태풍급 강연은 미 북장로교 조선(한국) 선교 초기의 좌충우돌, 즉 미 북장로교 파송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그의 조수로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의 갈등,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표제출과 미 북감리교로의 소속 변경 추진, 언더우드의 고집과 아집과 조급한 성과주의로 인한 갈등과 분열, 제국주의적 발상, 정교유착을 통한 정치적인 행보 등으로 답보상태에 있던, 미 북장로교의 조선(한국) 선교에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있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미 북장로교의 조선 선교 초기 문제에 대해서도 곧 다룰 것이다.
넷째로, 위의 연구자는 언더우드와 미 북장로교에 대한 전제가 너무 강하여, 1891년 10월 전미신학교선교연맹 대회에서 조선(한국) 선교와 관련하여 주인공인 윤치호의 존재감을 과소평가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노출시켰다. 윤치호가 미 남부에 온 후, 세계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파송 존 로스7) 만주지역 선교사의 조선(한국) 관련 사역이 미 남부 포함 미국 전역에 소개되면서 미 남부지역에서 최초의 조선 선교사 자원자가 나왔다.
다섯째로, 미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총회, 대회, 노회, 지교회들, 후원 성도들의 재정적인 후원과 기도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미화되고 정설처럼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 형제의 물질적인 기여가 얼마나 과장되고 왜곡되었는지 지적하고 사필귀정할 것이다. 그동안 언더우드 형제의 적은 금액, 즉 한국선교 개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총비용 대비 그들의 헌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낮은지에 대하여 미 남장로교 총회 문서, 대회 자료, 노회 관련 문서, 지교회 자료, 개인후원자들의 비용처리 문서 등을 통하여 사실을 밝힐 것이다. 필자가 강조해 오던 대로,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가 균형을 맞추어 올바른 교회사가 정립될 것이다.
1. 모든 문제의 발단은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하위 원사료에 편향적으로 의존한 데서 비롯되었다. 필자도 미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의 The Missionary와 같은 선교잡지들을 참고는 하지만, 공식적인 판단은 미 남장로교회의 최고결정기구인 총회(General Assembly) 관련 공식문서들에 근거하고, 하위 기구들은 대회(Synod)와 노회(Presbytery) 관련 문서들과 지교회들의 공식문서들을 중요시한다.8) 더군다나 선교잡지에 실린 기고문들은 각 기고자의 주관적인 시각이 강하고, 선교잡지의 독자들이 백인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총체적인 편향성이 있으며, 백인 우월주의가 근저에 깔려 있어서 조선(한국)과 조선인에 대한 무시, 생략, 제한, 왜곡, 과장에 대한 검증과 교차확인이 필수이다.
2. 미 남장로교의 배경인 미 남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없이 제반 연구들과 기록들이 진행되어 시작부터 기초가 부실한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이다.9)
3. 미 남장로교의 총회적인 선교비 지출과 관련하여, 1865년 총회의 해외선교비 총액은 $46,027.89이고 국내선교비는 $96,653.86으로 총회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해외보다 국내선교에 대한 지출이 두 배 가까이 많았다.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으로 남부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있었던 것에 비하면 고무적인 금액이었다.10) 조선(한국) 선교를 시작하기 한 해 전인, 1891년 총회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서 집계한 해외선교비 수입만 $112,951.49이었으니 전체 해외선교 관련 총액은 $150,000에 육박하였다.11) 해외선교비 수입 항목은 별세한 성도들의 유산 기증, 상속분, 교회와 개인들, 선교회들, 주일학교들 등이다. 1891년 기준으로 1,546개 교회, 570개 선교회, 414개의 주일학교가 해외선교에 참여하였다. 이때 남장로교 소속 전체 세례교인이 169,000명, 1,200명의 목사가 소속되었다.12) 남장로교 총회에 속한 전체 교회 숫자가 약 2,500개 정도였으니 해외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들의 비율이 62%를 상회하였다.
4. 미 남장로교 총회가 조선(한국) 선교를 시작하는 1892년도에 해외선교비는 $130,276.32의 수입이 있었다.13) 1891년도에 비해서, 1892년에 교회들의 기여는 $16,000 정도가 증가하였다. 남장로교 총회 파송 최초의 7인 선교사들 중에 5명이 버지니아 대회(Synod of Virginia) 소속이었고, 2명이 미주리 대회(Synod of Missouri)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버지니아와 미주리 대회의 해외선교비 기여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1892년에 총회가 조선(한국) 선교를 시작한 이후, 해외선교비에 동참하는 교회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이같은 현상은 각종 선교회나 각급 주일학교들의 참여도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14)
미 남장로교를 총회적으로 언급할 때 해외선교비가 위와 같다는 말이지, 한 선교사가 해외로 파송을 받는 데 있어 가족, 친구, 교인, 교회, 출신 학교, 노회 등 무명의 헌신자들이 많다는 점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15)
정리하자면, 1892년 미 남장로교 총회의 조선(한국) 선교는 언더우드 형제와 같이 특정 개인의 선교비 기부로 시작되지 않았다. 매년 발표되는 해외선교비 기여 항목에 교회들과 개인들이 묶여서 보고되는데 언더우드 형제의 선교금도 여기에 해당될 뿐이다. 1892년 교회와 개인 기여 항목을 기준으로 본다면, 언더우드 형제의 선교비는 1%도 안되는 0.03% 정도였다.16) 1892년 총회가 해외선교를 위해서 지출한 총비용으로 환산하면 그 비율은 더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해외선교를 위해 헌금한 개인들 가운데 일부였을 뿐이다. 필자는 사실만 직시할 뿐이지 절대로 그런 헌신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교회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천명해야만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해외선교비 측면에서 볼 때, 미 남장로교의 조선(한국) 선교는 총회, 대회, 노회, 지교회, 수다한 무명의 개인 헌금자들, 크고 작은 선교회들, 주일학교 어린아이들의 코묻은 돈들이 모두 합쳐져서 유기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총 5편의 글을 통하여 본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논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필자는 다음 글을 통하여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초기역사를 ‘기록된 원사료’와 ‘현장 원사료’를 통하여 올바르게 정립하여 기술할 것이다. ‘미 남장로교 전라도교회사의 배경, 준비, 시작’.
■
1)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연구의 편의를 제공해 오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감사드리고, 그동안 GTU에서 박사(Ph. D.)를 받고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자랑스럽다. 아울러 버클리 대학교와 스탠포드 대학교 및 각 대학 고문서보관소 관계자 제위에게 연구의 편의를 제공해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또한 필자가 박사(Ph. D.)를 받은 전후, 영국 전역에 걸쳐서 3,500개가 넘는 고문서 보관소(Archives)들을 거의 섭렵하면서, 특히 세계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전역과 심지어 시골에 있는 수 많은 고문서 보관소들까지 발로 뛰고, 셀 수도 없는 교회 자체의 고문서보관소 등 관계자 제위께 고마움을 전한다. 유럽 각지의 주요 고문서보관소 포함, 글래스고,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미국의 주요 대학의 아카이브, 미국 남부의 고문서보관소, 미국 남부 교회들 자체의 고문서보관소, 그리고 미국 남부의 남장로교 전통을 아직까지 간직하며 각 가문의 소중한 문화유산급 기록들까지 제공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현재 고문서들의 디지털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라치면, 상당 부분이 현장을 가야 볼 수 있어서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2) 옥성득,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재구성, 1891-1894’, 한국기독교와 역사, 61호, 2024년 9월 25일, 122. 이 논문을 게재한 사이트를 방문하든지, 다음의 사이트를 방문하여 옥성득 교수의 글과 필자의 글들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아울러 필자의 선행연구물들과도 비교해서 분석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934605
3) Madan Sarup, An Introductory Guide to Post Structualism and Post Modernism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93) and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ity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IVP 2000)을 참조하라. 필자는 세계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교회사학회, 대영제국 교회사학회, 미국교회사학회 등을 통해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의 현대사조에 부응하여 교회사를 ‘재구성’ 한다는 미명하에 교회사를 어지럽히고 혼돈으로 몰아가고 파괴하는 시도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서구의 일반사학계나 각종 역사학회의 흐름도 거의 같은 경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4) 尹致昊日記, 1888년 11월 4일; Raleigh Christian Advocate, November 28 1888, Wednesday, North Carolina; The Abbeville Press and Banner, November 21 and 28 1888, South Carolina
5) Robert McNamara, ‘History of Newspapers In America: The Press Expanded in the 1800s and Grew Into a Potent Force in Society’, ThoughtCo, May 1 2025; Refer to Aurora Wallace, Newspapers and the Making of Modern America: A History (Westport 2005).
6) 최은수, 언약도 (서울 2003); 최은수 역, 장로교 정치제도 형성사 (서울 1997) 참조하라.
7) John Ross Family Collections, Glasgow, Scotland.
8) 최은수 역, 장로교 정치제도 형성사 참조.
9) 최은수, ‘미 남장로교 파송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실존적 이해, 1, 2’, 교회와 신앙, 2021년 12월 29일과 2022년 1월 3일.
10) Report of Treasurer of Domestic Missions and Report of Treasurer of Foreign Missions, Minutes of 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1865, Augusta, Georgia. 미 남장로교 총회 관련 문서들이 디지털화 되어 온라인에도 있지만, 디지털 작업에서 빠진 것이 있어서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PCA) Historical Center and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Archives (St. Louis, Missouri)를 방문. 웨인 스파크맨(Wayne Sparkman) 소장은 필자가 요청하는 것과 그이상의 희귀자료들을 찾아주었고, 부인 사별후 장애인 아들을 센터에서도 돌보는 헌신적인 분이다. 미국 장로교(PCA) 재정 총괄자인 딕시 지로(Dr. Dixie Zietlow)박사는 점심식사도 제공하였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11) Report of the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s, Minutes, 1891.
12) 1891 Report.
13) 1892 Report.
14) 1893 Report.
15) 최초의 내한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도 작고한 부친이 넉넉한 유산을 남겼으므로 부족함 없이 살았다. (최은수, ‘리니 데이비스’ 참조) 메리 레이번도 최상류층의 딸로 태어나서 부족함 없이 성장했고, 팻시 볼링도 비슷한 처지였다.(최은수, ‘메리 레이번과 팻시 볼링’ 참조) 루이스 테이트와 매티 테이트 남매도 부모가 남겨준 유산이 적지 않았다.(최은수, ‘매티 테이트’ 참조; Church Archives of Mexico Presbyterian Church, Mexico, Missouri) 루이스 테이트는 그가 속한 교회와 노회로부터도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았다.(Church Archives of Auxvasse Presbyterian Church, Auxvasse, Missouri; Minutes of Presbytery of Missouri, 1891 and after, The State Historical Society of Missouri Archives and University Archives of Missouri, Columbia, Missouri; Westminster College Archives, Fulton, Missouri; Callaway County Historical Society Archives, Fulton, Missouri). 레이놀즈도 의사이며 지역 유지로서 교회와 사회에서 명망이 높던 부친의 후광이 컸다.(Richmont Dispatch, April 2 1892) 전킨도 부친의 영향력 뿐만 아니라 전킨을 위한 후원회, 일명 한국선교후원회가 조직되어 스핀들 여사가 회장에, 에스크릿지 여사가 회계가 되었다.(Christian Observer, September 7 1892, originally dated on August 30 1892). 미 남장로교회의 경우, 보통 부부의 경우, 남편과 부인 각자가 별도로 후원교회와 후원자들이 있었다.(최은수, 최초의 서양 의사 드류 유대모) 참조하라.
16) 1892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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