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0

대만은 친일, 한국은 반일이 된 연유에 대한 하나의 고찰

대만은 친일, 한국은 반일이 된 연유에 대한 하나의 고찰 : 네이버 블로그

대만은 친일, 한국은 반일이 된 연유에 대한 하나의 고찰 비이성적 반일감정 관련 글들

2013. 9. 20. 13:15

https://blog.naver.com/athina/40197424292

우연히 국민대 국사학과 문명기 교수의 '대만, 조선 총독부의 초기 재정 비교 연구 - '식민 제국' 일본의 식민지 통치 역량과 관련하여'라는 논문을 보게 되었다.

전문은 아래 국회전자도서관 싸이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http://dlps.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2010048040&sysid=nhn (대만·조선총독부의 초기 재정 비교연구 : '식민제국' 일본의 식민지 통치역량과 관련하여)

문명기 교수는 1945년 이후 대만과 한국의 대 일본 인식이 뚜렷하게 상이한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만은 주로 친일, 한국은 주로 반일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에는 해방 이후의 역사 연구와 역사 교육의 방향성 또한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해방 직후 일본인 자신들로부터도 대만 통치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나 조선 통치는 그렇지 못했다는 자평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근원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였던 일본의 대만과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 자체에도 상당한 상이점이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어떠한 상이점을 말함인가?




문 교수는 탈식민지 시대에 대만은 친일, 조선은 반일로 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재정적인 측면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제안을 하였다. 식민지 시기에 대만총독부는 조기에 재정자립을 달성하여 탄탄한 재정능력을 바탕으로 대만에 대한 충분한 도로, 철도, 교육 등의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함께 강력한 행정능력과 통치력을 발휘하였는데, 그에 반해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 말기까지도 재정자립을 달성하지 못하고 본국 정부에서 보내주는 재정충당금에 의존하였으며 이 때문에 식민지인들을 만족시킬만한 충분한 사회간접자본 투자에도, 식민지인들을 강제적으로 순화시킬만한 '충분히 강력한' 통치력의 확보에도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만의 경우 상대적으로 일본의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대만의 인구나 국토 면적에 비해 만족스러운 수준이었고 대만인들의 일본어 해독율 등도 조선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조선의 경우 대만보다 훨씬 큰 국토 면적이나 인구에 비해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저조하였다는 것이다.



대만도 일본이 청으로부터 손에 넣은 시초부터 재정이 풍요로운 땅은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조선과 대만의 총독부 재정에 차이가 나게 된 원인으로 문교수는 몇 가지를 들고 있다.



대만의 경우 전매 수입을 올릴 만한 품목이 여러 개 존재하였고 조세원으로서의 산업적 잠재력 또한 우월하였다. 이 논문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만은 아편 상용자가 전 인구의 3%에 달했다(부산 외대 박강 교수의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 참조)



http://blog.naver.com/athina/40177456467 (일본 제국과 아편, 그리고 조선인-1)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하였고, 러일전쟁으로는 요동반도를 '관동주 조차지'로 획득하였다. 이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중국인들로 아편에 중독된 인구가 대략 전체 인구의 3%에 달하였으며 해당 지역사회에서는 공공연히 아편이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만 지배 초기에 항일 무장 세력을 진압하고 통치 기구를 정비하기 위해 많은 예산이 필요했던 데 반해서 대만의 세입은 미미하여 일본 본국에서 국고로 막대한 예산을 대만 쪽으로 보조해야 하는 상태였다.

1898년 내무성 위생국장 고토 신페이는 "단기적으로는 아편을 주요 재원으로 하고 외채를 모집하여 대만의 척식을 추진하고 장기적으로는 적극적인 대만의 식산흥업 정책을 전개시켜 대만재정의 독립을 달성시키자."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한편 대만이나 관동주 조차지에서 의식있는 중국인들은 청말부터 전개되어온 금연 운동(여기서 금연은 담배가 아니라 아편 금지를 말함)을 일본 정부가 지원하기를 요청했고, 한편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중국인들은 "일본이 아편 등의 중국의 전통 습관을 파괴한다."고 하며 아편 매매업자나 아편 흡연자들을 선동하기도 하여 일본 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할지는 현지인들이 주목하는 바였다.

일본은 이미 본국에서 아편에 대한 절대 엄금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던 바, 대만이나 관동주에서는 아편을 허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봐도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아편 흡연자 인구가 있는 지역 사회에서 아편 엄금 정책(단금 정책이라고도 함)을 실시하려면 앵속(양귀비) 경작자나 밀매자, 소비자들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치안력이 필요했고, 가뜩이나 일본 내지에서의 국고를 대만이나 관동주로 쏟아붓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 아편 점금 정책(서서히 금지한다)과 아편 전매 제도를 택하였다.

점금 정책이란 아편의 흡연을 불법화하되 기존의 아편흡연자들이 식민지 당국에 '아편중독자'로 등록하는 경우 정부로부터 아편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막대한 치안 예산이 소요될 엄금 정책에 비해 점금 정책은 그러한 예산이 소요되기는 커녕 도리어 아편 전매로 인한 거대한 수익을 안겨주어 식민지 재정의 자립도를 높여주고, 금연 운동을 하는 중국인들과 아편흡연자 중국인들 모두에게 그닥 저항이 없을 것이라는 일석이조의 방안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편 전매는 재정적으로 당초의 의도대로 쌈박한 결과를 낳아, 대만의 경우 1898년의 아편전매수입은 대만 전체 세입의 46%에 달하는 350만엔이었다. 대만의 식산흥업이 진행되면서 아편전매수입이 세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내려갔지만 그후로도 20여년간 전체 세입에서 10% 이상을 유지하였다.]




박강 교수의 지적처럼 대만에는 일본 식민지가 되기 이전부터이 거대한 아편흡연자 인구가 존재했던 것이다. 본국 일본에서는 아편을 엄금하면서 식민지 대만인들에게는 총독부가 아편의 흡연을 허용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으나 아편 엄금이 도리어 대만인의 항일 무장 투쟁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으며 대만에서 전면적으로 아편을 엄금하려면 2개 사단 병력의 수년간의 주둔이 필요하였다.



결국 일본은 대만에서 아편에 대한 점금 정책과 아편 전매 제도를 택하였으며 이는 대만 총독부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다.



대만에는 각종 약재와 셀룰로이드, 필름, 무연화약의 원료가 되는 장뇌(camphor)라는 또 다른 품목이 있어 이를 전매화한 것도 대만 총독부의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다. 장뇌의 생산 지역은 대만과 중국의 일부 지역과 일본에 국한되어 있었고 일본이 대만을 할양받으면서 전세계의 장뇌 생산은 거의 일본의 독점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1910년 이후 플라스틱이 개발되며 장뇌는 사양 산업이 되었지만 그 전까지 대만총독부의 수입원 중에서 아편에 뒤이은 제 2의 품목이 장뇌 전매업이었다.









또한 소금의 전매와 일본으로의 수출, 그리고 술과 담배의 전매도 대만총독부의 상당한 수입원이 되었다.



전매 제도 외에 대만은 설탕 산업을 통한 세원으로서의 잠재력 또한 상당하였다. 조선의 쌀 산업이 일본의 쌀산업과 경쟁하여 때로는 일본 농민들의 정치적 반발을 낳은 것에 반해 대만의 설탕 산업은 일본에게 완벽한 수입 대체 산업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대만의 설탕 공장들


이처럼 대만총독부는 전매 제도를 통한 방대한 간접세(납세자의 저항이 적은) 재원과 설탕 산업 등의 상당 수준의 세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덕택에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재정독립을 수년 전에 달성한 대만총독부의 대만인 1인당 세출액은 일본 본토로부터 재정충당금을 받고 있던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1인당 세출액의 10여배에 달했다. 이러한 1인당 세출액의 차이는 식민지 말기로 가면서 점차 축소되었으나 식민 통치 말기에도 대만인 1인당 세출액은 조선인 1인당 세출액에 비해 2배에 달했다.



이러한 대만총독부의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재정은 대만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투자, 교육 투자, 행정력 강화로 돌아왔고 강화된 행정력은 전매 제도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조선의 경우 밀조주가 하도 성행하여 일정 규모 이하의 밀조주는 묵인하고 넘어갔으며 술의 전매도 시행되지 못하였던 것에 비해 대만의 경우 밀조주가 거의 완벽히 엄금되었으며 술의 전매가 시행되었다.



문 교수는 대만과 비교하여 조선총독부의 재정이 태생적으로 열악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몇 가지 들고 있다.



조선의 경우 을사보호조약 직전에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일본 본국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었으므로 대만에 비해 일본 본국이 조선에 투자할 여력이 상대적으로 미비하였다. 또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자치육성책'을 내세우며 '병합선결'을 주장하는 야마가타 파의 가츠라, 데라우치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병합선결파가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하는 주된 논지가 '비용의 과다함'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일합병 이후 초대총독이 된 '병합선결파'의 데라우치는 조선 통치에 비용이 과도하게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정치적 부담이 있었으므로 본국으로부터의 전폭적인 충당금을 요구할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대만처럼 아편을 흡연하는 인구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총독부가 아편을 전매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뇌와 같은 짭짤한 특산품이 존재하여 통치 비용에 기여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대한제국 시절부터 전매품이던 홍삼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방대한 재정소요액에 비하면 홍삼 전매로부터의 수입은 조족지혈에 불과하였다.



1911년에 조선총독부 세입에서 홍삼전매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245분의 1, 1937년에는 190분의 1이었으므로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한 금액이었다. 재정상 거의 기여하지 못함에도 전매를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재정상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지만 홍삼의 품질과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도 있을 지경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소금의 전매를 실시하였지만 도리어 적자가 날 지경이라 이 또한 재정에 기여하지 못하였다. 대만과 달리 술의 경우 전매를 실시하기는커녕 주세를 내지 않는 밀조주를 단속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담배의 경우 1920년부터 전매제를 실시하였지만 조선인의 반발을 의식하여 정책이 상당히 점진적으로 추진되었으며 1920년대 말까지도 담배 재배 농민들이 광범위하게 생산량의 상당수를 수매에 응하지 않고 몰래 팔아치우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담세 능력을 지닌 산업의 성장이란 측면에서도 조선의 쌀 산업은 대만의 설탕 산업에 비해 일본 농업에 경쟁적이었고 만족스러운 담세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문명기 교수의 이러한 전반적인 지적과 제안은 상당히 흥미로운 바 있다.



요약하자면 조선은 원천적으로 대만에 비해 그 인구와 영역이 광대하였으며 그럼에도 통치에 필요한 자체적 재원은 대단히 빈약하였다. 이는 태평양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독립을 얻은 후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이 빈약한 자원의 나라가 대외지향적인 고도의 산업국가가 되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을 충분한 수준으로 개발하고 그 땅의 인민을 교육하기 위한 재원이 불충분하였다. 때문에 일본의 조선 통치는 충분히 강력하지도, 충분히 포용적이지도 못한 어정쩡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게 있어 사회간접자본 투자에서 불만족스러운 식민모국이었고, 조선은 일본에게 있어 재정자립을 하지 못하고 모국의 돈만 잡아먹는 불만족스러운 식민지였다.



그에 비해 대만은 조선에 비해 미니 사이즈였으므로 식민 통치에 필요한 재정 자체가 규모가 작았다. 또한 방대한 아편중독자, 장뇌, 설탕 등의 특산물이 있어 처음부터 식민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기에 유리하였고 이를 통해 강력해진 행정력은 전매 제도를 보다 물샐틈없이 시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때문에 대만총독부는 조선총독부에 비해 초기에는 10배, 말기에도 2배의 1인당 세출액을 향유하는 강력한 행정부가 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대만에게 있어 상대적으로 만족스러운 식민모국이었고, 대만은 일본에게 있어 효자 역할을 하는 만족스러운 식민지였다.



이러한 해석은 한국의 반일 감정이 일본의 강력하고 억압적인 식민 통치에서 유래한다는 기존의 통념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문명기 교수의 논지에 따르면 대만의 식민 통치가 조선에 비해 더욱 강력하고 억압적(광범위한 전매 제도의 강행에서 볼 수 있듯)이며 물샐 틈 없는 장악력을 발휘하였는데, 도리어 대만은 친일적이고 조선은 반일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물론 총독부의 재정적 여력에만 양국의 친일과 반일의 연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중국인들이 해당 섬에 진출한 역사가 고작 수백년인 대만과는 달리 천수백년에 이르는 통일 민족국가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상대적인 문화적 우월감(이는 일본 측에서도 조선에 대해 마찬가지로 보유하고 있었지만)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또한 해방 이후 대만은 친일, 한국은 반일 기조로 가게 된 원인에 상당 부분 기여하였을 것이다. 한국이 분단되고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일제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사회간접자본(북한에 비해 빈약한)의 상당수를 상실하였다는 점, 해방 후 한국에서 반일 민족주의를 누가 선명하게 내세우느냐가 정치적 이해득실의 선점 효과를 낳았다는 점 또한 대만에 비해 한국에서 반일의 성향이 높은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하나의 공동체가 특정한 사안에 대한 어떠한 전반적 성향을 지니게 된 데는 다종다양한 원인이 존재한다. 문명기 교수의 제안은 한국 사회의 반일 민족주의와 대만의 친일 성향의 연원에 대한 하나의 신선한 가설이 아닐까 싶다.



위의 본문은 문명기 교수의 논문을 내 나름대로 읽고 감상을 쓴 것이므로 문 교수의 원래의 논지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군데군데 원문을 캡쳐하였으나 원문 전체를 읽을 것을 권한다.



논문에 수록된 표들을 캡쳐하여 아래에 올린다.

















[출처] 대만은 친일, 한국은 반일이 된 연유에 대한 하나의 고찰|작성자 다만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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