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1

일진회 - 위키백과 一進会

일진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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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一進會)는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유학주, 동학교 이용구 등이 조직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단체이다.

1904년 8월 18일 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월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그해 9월에 동학의 잔존세력을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 주도 하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 하에 일본의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라는 이름은 '조선과 일본이 하나로 나가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의 일진(一進)은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친일 단체이기 때문에 일진회(日進會)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한자 병기이다. 실제로 이 한자가 쓰였던 일진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쪽은 반일 및 항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개요

창립과정

일찍이 민씨 세도가문의 박해를 받아 10여 년간 일본에 망명하여 있던 송병준이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오타니 기쿠조 소장을 따라 군사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송병준은 정국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다가 한성부에서 전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윤시병, 유학주 등과 빈번한 접촉 끝에 1904년 8월 18일 '유신회'를 조직하고 임시 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했다. 8월 20일에 다시 특별회를 개최하여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다시 회장에 윤시병을,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이때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칙령으로 경무사 신태휴로 하여금 그들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이 이를 막았고, 오히려 경무청 순검을 검속한다고 위협하여 그들의 회합을 옹호하였다.

일진회는 발족과 동시에 4대 강령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실을 존중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공고하게 할 것
  •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할 것
  • 정부의 개선정치를 실시하게 할 것
  • 군정과 재정을 정리하게 할 것

일진회는 창립의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비정(秕政)에 대한 국정개혁이나, 이 해 9월에 일진회의 급선무로서 회원의 일심단결의 표적인 단발착모와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그러나 이해 10월 22일에 평의원 회의를 개최하고,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군략상에 조금도 방해가 없다는 뜻을 의결하여 이날 주한일본군사령관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 헌병대장 다카야마, 그리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전달한 공적 서한 내용에는 일진회가 추구하는 국정개혁이나 단발착모 등 표면상의 취지와는 달리 일제 침략에 동조하여 친일색채를 공공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의 방향과 병행한 표리가 부동한 상투적인 구호에 불과했다. 이때 각종 사회단체가 한성부를 무대로 활동하였을 뿐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일진회의 활동 역시 한성부를 무대로 하였을 뿐, 그나마도 대중의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일제의 보호하에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무렵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이해 9월 하순에 조직한 '진보회'는 강령과 취지에서 제시한 국정개혁이나 갑진개화운동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하여 송병준은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한 결과, 이해 12월 2일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조직

이용구는 지방지부 회원의 거의가 진보회의 회원이라는 미명 하에 13도지방 총회장 직에 앉게 되었으며, 이면에서 일진회를 조종하던 송병준은 이듬해 평의원장(評義員長)에 취임하였다. 송병준은 일제의 계략적인 흉계에 호응하여 윤시병을 멀리하고 이용구를 매수하여 1905년 12월 22일 총회에서 회장에 이용구, 부회장에는 윤시병, 지방총회장에 송병준, 평의원장에 홍긍섭을 선출하였다. 일진회는 일본인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한편 일본군의 지원을 비밀리에 받아 활동했다. 일진회 회원은 창립 당시 300명, 진보회와 통합한 뒤 곧 수만의 회원이 되고, 한일 병합 이후에는 이른바 '100만의 회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실제는 10만명쯤 되었다. 이와 같이 조직된 일진회와 연계성을 가진 외곽단체나 주변단체가 또한 조직되어 일제와 일진회의 사주와 매수 공작에 의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일제 침략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는 한성부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군의 보호 하에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온 조직이 미미한 단체로부터 시작해 일본의 지원하에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가진 전국적인 단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운영

일진회는 그 운영의 재정염출 문제에 대한 규칙을 보면,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정규적인 회비 징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일정한 수입의 재원도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송병준이 일제의 군사기밀비에 의하여 운영되어왔다. 일진회가 매국적인 행각의 기치를 점차 선명히 내세움에 따라 일본 제국은 이를 이용하고자 5만원을 몰래 지원하여 특별한 보호를 하였고, 러일 전쟁 중 일진회 회원들의 일본군을 위한 수송, 정탐, 노역 등에 대한 일본군으로부터의 총영수고금 8만 9940원, 전쟁 종료 후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원씩의 기밀보조금, 이해 5월 15일 일본육군성으로부터 10만 원을 각각 교부받았으며, 이해 8월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보조금으로 26만원을 받았다. 또 송병준이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외무성 장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이토 히로부미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일진회가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등 일제 당국자들로부터 이따금 금품을 받아 매국 행위를 감행하고 있었음이 확실했다. 결국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히 결부되어 일제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일진회의 규칙에는 고문을 두도록 되어 있지 않았으나 일진회의 배후에서 일본인 고문들이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일제 특히 군부에서 파견된 일본인들로 구성된 고문이 그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활동

일제 침략정책 적극 수행

일진회가 창립발기된 처음부터 해산될 때까지의 시일을 전후해서 일본 국수주의자들이나 낭인들이 각각 막후의 조종자나 고문으로서 일제의 침략과 일진회의 매국 행각을 위한 계책을 전수하였으며, 일진회원들은 그들의 계책을 실천하는데 급급했다. 우선, 일제의 침략정책 수행에 직접 협력한 것이다. 일제가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에 대한제국과 맺은 한일의정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이른바 '고문정치제제'를 확립하여 식민지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일진회는 일제 당국에 협력하는 적극적인 행각으로서 일제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본군을 위해서 북진수송대의 군수품 운반(1905년 6월 10일~1905년 10월 20일), 함경도로부터 간도에 이르는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에 대한 동태를 정탐하고, 경의선 철도부설공사(1904년 10월 ~ 1905년 9월)를 일제가 급격히 서두르자 일진회원들은 자진해서 이 공사에 20여만 명의 회원을 거의 무보수로 노역을 동원하였으며, 100여명의 사상자까지 내어 큰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이 일제에서 유리하게 종결되고, 이 무렵 영국미국 등 열강과의 국제적인 균형과 체면을 무난히 유지해 가면서 1905년 7월에 미국과 비밀리에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8월 영국과 맺은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9월에는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이 성립됨에 따라 동양의 대세는 일제에 의해 좌우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다는 소문이 유포되고 대한제국의 조야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가운데, 일진회에서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일본인 고문이 기초한 문건인 선언서에 수정을 가하여 1905년 11월 6일에 외교권의 이양을 제창한 이른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일본의 보호지도를 받기 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는 것으로서 을사늑약이 강요되기 10여일 전에 발표된 이 선언서는 일진회의 매국 행위 정체를 공표한 것이었다. 11월 17일 일제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완전히 강탈되고, 이듬해 2월에 일제 통감부가 한성부에 설치되었으며, 조약 체결의 주동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일제 식민지화의 제일보가 된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군부의 보호하에 있던 일진회는 그 관계를 끊고 통감부의 휘하에서 일본인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더욱 매국 행위 앞잡이에 들어갔다. '일진회 선언서'와 을사늑약에 대한 전 국민의 격분은 절정에 달하고 있는 반면에 일진회원들은 부일행위의 반대급부로 조약이 체결된 직후 군수로, 반년 후에는 관찰사(도지사)까지 기용되고, 드디어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뒤에 내부대신에 승진)이 되었다.

1907년 일진회가 일본 제국 황태자 다이쇼의 대한제국 방문 때 서울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 사진에는 일진회의 이름이 담긴 대형 아치 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해 있으나 아치의 중간에 '받들어 맞이한다'는 의미의 '봉영(奉迎)'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제는 일진회를 이용함으로써 침략정책을 무난히 강행하려고 했다. 한편, 일진회는 기관지 국민신보를 발간해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적극 옹호했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하여 송병준은 이완용과 결탁하고, 일제 당국에 영합해서 고종황제의 양위를 강요,협박하고 동시에 일진회원들에게 양위를 재촉하는 시위를 하게 하여 마침내 고종 황제는 양위를 하게 되었다. 일제는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의 내정간섭을 합리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1907년 7월 24일에 신문지법7월 27일에는 보안법을 공포케 하여 한국민의 정당한 의사표시와 항일운동, 애국계몽운동에 규제를 가했다. 여기에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가 일차적으로 해산을 당했다. 이어 한국군의 해산이 단행되어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봉기하자 일제는 막대한 병력과 군비를 투입하여 무자비한 살육전을 펼쳤고 일진회는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1] 등의 조종하에 의병을 진압할 이른바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토벌에 앞장섰으며 심지어 의병을 '폭도'로 여겼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매국 행각은 당시 의병들로부터 커다란 분격을 사게 되었는데,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입은 일진회원의 피해는 사살자 9260명, 부상자 10명, 소각가옥 360호, 재산 손해액 5만 501원 31전에 달할 정도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무수한 일진회원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10월 일본 제국의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내한하였을 때에도 일진회는 일본인 고문의 조종하에 환영녹문(歡迎錄門)을 세우고, 토산물 헌납과 제등(提燈) 행렬등 맞이했다. 일진회는 경향각지에서 유세,강연회 등을 거듭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성격에서 보아 국민들을 선동하고 여론조작하기 위한 공작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일진회의 외곽단체인 기관지 국민신보사, 시천교회, 자선부인회는 일진회에 영합했다. 또한 주변단체인 자혜부인회동양애국부인회대한신문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의 앞잡이 행각을 담당하였다.

프로파간다 역할 및 여론조작 선동

이어 일진회는 일제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여 국내의 여론을 이른바 '합방의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하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일진회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선언서' 기초 작성, 유세, 강연회 등의 매국행각을 감행했다. 1909년에 이르러 일제는 사법권 및 감옥사무를 탈취하는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군부까지 폐지하는 등 온갖 탄압을 자행했다. 또한 경찰권 강탈에 이어 1909년 3월 26일 출판법도 공포하는등 한국민의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에서 물러나고, 부통감인 소네 아라스케가 통감이 되었다가 무능하다 하여 곧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5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이 되었다. 데라우치 통감은 '한국병합실행에 관한 방침'에 따라 7월에 '병합처리방안'을 성안하여 일진회의 각의를 거쳐 이를 처결하였다. 이제 일제에 남은 하나의 조치는 이른바 '병합'의 공표만 남았다. 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다. 이토의 죽음에 대하여 일진회는 '사죄단'과 '동아찬영회'를 조직하여 이 기회에 일제 당국과 통감부에 잘보일려고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일제의 '대한강경파'인 가쓰라, 야마가타 등을 비롯한 그들의 고문인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스기야마 시게마루 등이 일진회의 합방성명을 조작하였다. 1909년 12월 4일에 발표한 일진회의 이른바 일련의 '합방성명서'는 경술국치가 단행되기 약 8개월 전의 일로서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성명은 일제가 조작한 여론 환기수단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성격으로 보아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기에 한국 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켜 성토와 규탄의 대상이되었다. 그 근거로 대한매일신보는 지상을 통하여 이를 '노회선언'(奴會宣言)이라 혹평하였을뿐만 아니라 중추원의장 김윤식 등은 송병준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기까지 했었으나 이는 일제의 비호로 묵살되었다. 궁지에 몰린 일진회는 그들 간부나 회원 중에서 퇴회하는 자가 속출하여 불과 수일 만에 90여 명에 달하였으며, 이용구와 우치다 료헤이도 일본헌병대에 신변을 보호받아야만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용구등 일제 앞잡이들과 고문인 우치다 등이 결탁하여 일진회의 외곽단체인 한성보신사대한상무조합수국민동지찬성회 등 유명무실한 10 여개 단체를 사주, 매수하여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지지하도록 조작하고 일제 병탄을 합리화하는 매국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일진회의 성명서에 대한 반향(反響)에 의해서 스스로 반대세력의 폭과 깊이를 알아챈 일제당국은 이듬해 강합적으로 단행된 이른바 합방을 위한 최종적 마무리 작업을 용이하게 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1주일 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 강점당했다.

해체

일진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형성과정에서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타협안인 아우스글라이히(키에제제시)로 인해 헝가리인과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이 대등한 권리를 누리듯이 한일 합방으로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연방 체제를 수립할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진회는 일제의 한국병탄을 위하여 앞잡이 노릇을 다하였으나 1910년 9월 26일에 모든 사회단체들이 해산될 때 일진회도 일제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에 의해서 해산료 15만원을 받고 해산을 당했는데, 당시 형식상 1주일의 유예 기간을 둔 자진 해산이었다. 당시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에 합병 청원 및 간도 이주 소요자금으로 3백만 엔을 요구했으며, 가쓰라 총리는 3천만 엔이라도 지원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게 된다. 일진회 주요 간부들 가운데 논공행상으로 송병준에게 조선귀족으로 자작 작위를 주었고, 이용구에게는 10만원을 주는 데 그쳤다.

일진회의 회원

각주

같이 보기

참고 자료

  •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56-57쪽. ISBN 978-89-86072-03-7.
  •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76~79쪽쪽. ISBN 89-7199-036-8.
  • 《한국독립운동사사전》, 독립기념관 저

외부 링크

분류: 한일 병합
친일단체
일진회
1904년 설립된 단체
1910년 폐지
대한제국의 단체
러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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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進会

目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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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進会(いっしんかい、イルジヌェ、朝鮮語: 일진회)は、1904年から1910年まで大韓帝国で活動した政治結社

1904年に李容九宋秉畯らの開化派によって創設された。日清戦争日露戦争の勝利により世界的に影響力を強めつつあった大日本帝国(日本)に注目・接近し、日本政府日本軍の特別の庇護を受けた。日本と大韓帝国の対等な連邦である「韓日合邦(日韓併合とは異なる概念)」実現のために活動した。

当時、大韓帝国では最大の政治結社であり、会員数は公称80万人から100万人[1]。一説には実数は4,000人未満にすぎなかったとの見解もある[2]が、日露戦争をロシア帝国(ロシア)に代表される西欧侵略勢力との決戦とみなし、日韓軍事同盟でロシアの侵略を阻止しようと考えた李容九は、日本に協力し、日本が武器弾薬を北方へ輸送するために鉄道(後の京義線)を建設した際、その工事に無償で参加した一進会員は全部で15万人であったとされ、また北鮮から満州国(満州)へ軍需品を運搬する業務動員された会員は11万5000人で、あわせて約27万人が日露戦争時に一進会として活動したという話も残っている[3][要ページ番号]。

日韓併合の目的を達成した一進会は、その後、統監府が朝鮮内の政治的混乱を収拾するために朝鮮の政治結社を全面的に禁止したため、解散費用として十五万円を与えられて他の政治結社と同様に解散したが[4]、一進会を率いた宋秉畯らは朝鮮総督府中枢院顧問となり、合併後の朝鮮の政治にも大きく影響を与え続けた。合邦善後策として桂太郎首相に資金百五十万円を懇請したところ、千万円でも差し支えなしと答えられ、活動に猛進した。

背景

李氏朝鮮(朝鮮)では、日清戦争で大日本帝国(日本)がに勝利すると、王妃である閔妃が朝鮮で一層強化する日本の支配力を警戒した。三国干渉によってロシア帝国(ロシア)の東アジアへの影響力が強まったことで、日本への牽制を含めて親露政策を強めるようになる。その後、乙未事変で閔妃が暗殺され(殺害現場にいた純宗の言で『乙未事件ニ際シ、現ニ朕ガ目撃セシ国母ノ仇、禹範善』となっているだけでなく、この禹範善は『禹ハ旧年王妃ヲ弑セシハ自己ナリトノ意ヲ漏セリ』と自ら犯人であることを漏らしている。[5]1896年2月11日、親露派の李範晋や李完用らによってクーデターが行われ、国王の高宗がロシア公使館に移り、執務(露館播遷)を行うようになった。日本の後押しを受けていた開化派政権は崩壊し、ロシアの影響力が強まった。1896年7月、開化派の流れを汲む者たちが朝鮮の自主独立、法治主義の確立、新教育の振興、農業の改良、工業の育成、愛国心君主への忠誠心の培養を訴え、李完用らが独立協会を設立した。

1897年以降、ロシアの影響力が顕著になると、独立協会は反露闘争を展開、国王の高宗に王宮に戻ることを要請した。高宗は王宮に戻り、大韓帝国の独立を宣言した。これによりロシアの勢力は朝鮮半島から後退したが、独立協会の主張は次第に守旧派官僚との対立を招き、最終的に高宗の勅令により独立協会は解散させられた。

ロシアの勢力が朝鮮半島から後退したことによって再び日本の勢力が増大し、大韓帝国の経済的支配を進めた。ロシアと日本は朝鮮半島や満州の利権を巡り対立を深めた。こうした背景のもと、日露戦争中に日本軍通訳をつとめた宋秉畯が日本の影響下に政治改革のための組織を計画したが、この計画は元独立協会系の者たちに受け入れられた。

一進会の設立

宋秉畯は、日露戦争のさなか、日韓議定書が締結された約半年後の1904年8月8日に独立協会系の尹始炳らと共に、政治結社一進会を設立する(当初、名称は「維新会」。8月20日に「一進会」に改名)。

その後、韓廷が進歩会に対し「法令に背いて集会し詔勅無くして断髪するのは乱民だから解散せよ、しなければ砲刑に処す」と訓令を発したため、一進会は進歩会に対し「怨みがあれば訴え、訴えるのに会するのは自然の理である。また、乙未削髪詔勅(断髪令)は未だ取り消されておらず、軍人警察官外交官の断髪は詔勅によるものではない。現在の惨状を座視するのは忍びないから、現政府に従うな」と助言を発した[6]。進歩会は一進会に対し主義目的が同じだとして合併を依頼し、中央の一進会は十三道の進歩会を吸収した[6]。ちなみに同年8月22日には第一次日韓協約が締結されている。

当初、尹始炳が会長であったが、尹の要請によって李容九が会長に就任した。

他にも、初代統監であった伊藤博文が、黒龍会主幹を務めていた内田良平共謀し、「韓国から日本との合邦を提議させるために」、一進会を設立させたという見方もある[7]。しかし、陸軍側の資料である「魚潭少将回顧録」によれば、一進会は、帝国陸軍韓国駐剳軍と統監府の対立の中で、韓国駐剳軍が統監府及び伊藤博文統監を間接的に攻撃するために設立させたものであり、その後、一進会が内田良平を通じて統監側に近づいたとしている[8]

会員・役員

1905年時点で会員は全国28万4千人あまりに達し、特に平安道咸鏡道の二道に多かったとされる[9][要ページ番号]。初期の役員は以下の通り[9]

目的

一進会では、独立協会に見られる民主主義、独立国家主義の思想を継承し、「政治改革と民主の自由」を掲げた[10]。また、日露戦争時に設立され、日韓軍事同盟においてロシアの侵攻を阻止することが、大韓帝国に対するロシアの影響力を弱め、さらには欧米列強のアジア進出を防ぎ、朝鮮の復興になるとも考えていた。

会則

1904年12月22日、尹始炳は以下の五ヶ条の会則を発布した[11]

一、本会員は一切断髪する事
二、帽子は外国の様子を傚行し、務めて本国品にて製造する事
三、平常服は現行せる本国俗制を変ぜざる事
四、平常服表衣は窄袖の周衣を以て施行し染色する事、但し公私服はこの限に非ず
五、洋服の一款は或自由に属するも極めて簡略を旨とし財産を乱費するなき事

活動

日露戦争における日本軍への協力

一進会の設立当初、日本側の一進会への評価は低かった[10]が、一進会の設立後、宋秉畯は当時の日本の大佐、松石安治に対し書簡を送り、現状の高宗およびその官僚主導では大韓帝国の独立・維持は困難であると説明し、また京義線敷設の協力をも申し出ている[12]。当時の日露戦争においては、日本軍が物資輸送のため京義線の敷設を計画するが、日本軍の人員不足で計画が暗礁に乗り上げており、この際、一進会がこの敷設工事に無償支援し、会員14万人以上を動員した。さらに一進会は、日本軍の軍事物資輸送の支援にも乗り出し、10万人以上の会員が自費で日本軍の武器、食料を戦地まで運んでいる。また、この日露戦争当時、一進会会員は、当時の伝統であった長髪をやめ、自主独立運動の象徴としている。朝鮮では露館播遷断髪令を廃止しており、このような断髪は一般市民からは考えられないものであった。

演説

独立門の西側にある独立館が一進会の演説会場であった[9]。しかし、独立館は600 - 700人以上の聴衆を入れることはできず手狭になったため、独立館の北側に新たに1,600 - 1,700人の聴衆を入れることのできる八角堂を建設した[9][要ページ番号]

統監政治

1905年明治38年)10月、日本政府は韓国保護権の確立の方針を閣議決定し、翌11月には伊藤博文特使として派遣し、11月28日第二次日韓協約の締結が強行された。これに先立ち、一進会は同年11月5日に「外交権を日本政府に委任し日本の指導保護を受け、朝鮮の独立、安定を維持せよ」という宣言書を発表している。[13]

韓国統治の総責任者だった伊藤は早期の韓国併合に反対していた。しかし、1909年(明治42年)4月、伊藤は桂太郎小村壽太郎との会談において、両人が提示した併合の方針について大綱を是認している[14]。1909年(明治42年)10月、伊藤が満州のハルビン安重根暗殺された後、1910年(明治43年)5月に韓国統監(第三代)に就任した寺内正毅は、義兵の制圧と並行して、韓国併合への準備を進めた。

韓日合邦の要請

一進会は、1909年12月「韓日合邦建議書(韓日合邦を要求する声明書)」を純宗、第二代韓国統監曾禰荒助、首相李完用に送り、韓日合邦を要請している。

この上奏文を書いたのは内田良平が率いる国粋主義団体黒龍会の武田範之である。武田によって起草された上奏文は、山縣有朋桂太郎首相(当時)、寺内正毅陸軍大臣に内示され、事前の了解を得ていた[15]

この建議書の中で、李容九は会員100万人の声明と称して、「日本は日清戦争で莫大な費用と多数の人命を費やし韓国を独立させてくれた。また日露戦争では日本の損害は甲午の二十倍を出しながらも、韓国がロシアの口に飲み込まれる肉になるのを助け、東洋全体の平和を維持した。韓国はこれに感謝もせず、あちこちの国にすがり、外交権が奪われ、保護条約に至ったのは、我々が招いたのである。第三次日韓協約(丁未条約)ハーグ密使事件も我々が招いたのである。今後どのような危険が訪れるかも分からないが、これも我々が招いたことである。我が国の皇帝陛下と日本の天皇陛下に懇願し、我々も一等国民の待遇を享受して、政府と社会を発展させようではないか」と主張し、韓国と日本の連邦形式の対等合邦を求めた[16]

声明発表後の各方面からの反発

一進会の声明に対して大韓協会、西北学会や天道教徒がただちに反対した。声明発表翌日には漢城府西大門において、李完用が大演説会を開き、併合反対決議が行われた。統監府の憲兵隊が当時の韓国統監であった曾禰荒助に送った報告によれば、この声明発表は日本人の政治活動家である内田良平が主謀したものであり、一進会に対して大規模な反対運動が起こった。この事態を重くみた曽禰統監は、一進会の集会、演説を禁止し、一進会と大韓協会の日本人顧問に対して論旨退去を命じ、活動を弾圧した。併合を既定方針とした日本政府にとって、賛成、反対の議論が沸騰し、両派の衝突が起こり秩序が乱れること自体が障害と映ったからである[17]

併合後に設置された朝鮮総督府によっても、当時の韓国民衆が一進会に対して大きな反対の声を挙げ、その結果として一進会が孤立状態にあったことが指摘されている[18]

解散

一進会の主張はあくまで日韓両国民の対等な地位に基づく日韓共栄であって、日本の考える外地としての併合とは全く異なるものであることや、日韓併合については韓国側の要求は一切受け入れない方針であったため、日本政府は一進会の請願を拒否した[19][20]。これは、当時の大韓帝国の巨額の債務や土地インフラに膨大な予算が必要になることから日本国民の理解を得ることは難しいとの政治判断からであった。一方、一進会の宋秉畯も、韓日の対等合邦は国力の差から困難であると判断して韓日併合論を展開し、1910年(明治43年)、第2次桂内閣により韓国併合がなされた。韓国併合後、韓国統監府は、親日派/非親日派の政治団体の対立による治安の混乱を収拾するため、朝鮮の全ての政治結社を禁止し、解散させた。これにより、一進会は併合直後の1910年(明治43年)9月12日に日本政府によって解散を命じられ、解散費用15万円を与えられ、同年9月25日に解散した[4]。一進会を率い、韓日併合論を説いた宋秉畯らは朝鮮総督府中枢院顧問となり、併合後の朝鮮の政治にも大きく影響を与え続け、その後、その功績により宋秉畯には伯爵位が与えられた。

一方では日韓の対等合邦を日本側が拒否し、その後に韓国を飲み込む形で併合したということから元会員の間には失望、怒りが広がり、後の三・一運動に身を投じる者も多く存在した。一進会の中心人物であった李容九は日本政府から送られた華族の叙爵を断り、会の解散から1年経たないうちに憤死した。喀血し、入院していた際に訪れた日本人の友人に対して一進会の活動についての後悔を語った[21]

日本人の関与

一進会の活動には内田良平や日韓電報通信社長の菊池忠三郎など日本人が深く関与し、日韓合邦の要請を出すことに成功したが、最終的には伊藤暗殺や一進会に対する政府、韓国国民の反発からコントロールできなくなってしまい、 菊池忠三郎によって「日韓合邦が頓挫した今、一進会は暴徒に変ずる恐れがある」という報告がされている[22]。 日本人顧問であった杉山茂丸は会の目的である「日韓合邦」が失敗し、併合された後の1921年(大正10年)に、元会員たちから自決を要求された。これを受けて杉山は、朝鮮の日本統治改革を強く訴える建白を執筆し、李容九や一進会の元会員たちを騙したことについても懺悔した[21]

評価

一進会に対する評価はその活動の解釈や政治的立場によって大きく異る。以下には日韓において出版されている一般書籍での評価について概述する(順不同)。

  • 平凡社の『朝鮮を知る事典』では、一進会を「親日御用団体」と呼び、表立った運動以外にスパイ活動などにも協力したとしている。また、親日団体としての働きについてはプラスの効果よりも民衆の反発を招いたマイナスの結果の部分が大きかったとしている。また、一進会の実態が「李容九や宋秉畯などの利権集団」であったとも記述している。
  • 鹿鳴海馬の『伊藤博文はなぜ殺されたか』(1995)では一進会は日本が日本軍の通訳をしていた宋秉畯に作らせた親日派の政治団体であるとしている。「一進会は日本の国粋団体・黒龍会の内田良平といった有力者を顧問に、日本の保護を受け朝鮮国内の反日分子や反日運動のスパイ活動を行い、大衆の反感を買った。特に日露戦争後、一進会が日本の指導保護を要請する宣言を発表したので猛烈な反発を受けた。中でも「共進会」や「大韓自強会」といった民族派の団体から一斉に売国奴として非難された。」と記述されている。
  • 三省堂の『朝鮮の歴史 新版』では、一進会が1909年(明治42年)に出した声明について、民衆の声を代表しておらず、かつ「会員100万人」も実体のない数字だったとしている。
  • 金完燮の『親日派のための弁明』(2002)では、一進会の運動を、李氏朝鮮政府の圧政をはねのけようとする農民階級東学党進歩会)と、支配階級出身で朝鮮の近代化をめざす改革派知識人グループ(維新会)、そして朝鮮近代化を支援することで「攻撃的な防御」を確保しようとする日本、の3つの改革勢力が結集されたものとして高く評価している。また、大韓民国政府が一進会を「親日御用エセ団体」と歪曲して韓国民に教えていると批判している。
  • 呉善花は、著書『韓国併合への道』で「少なくとも民族の尊厳の確保に賭けて大アジア主義を掲げ、国内で最大限の努力を傾けた李容九らを売国奴と決めつけ、国内で表立った活動をすることもなく外国で抗日活動を展開した安昌浩李承晩らを愛国者・抗日の闘士と高く評価するバランス・シートは、私にはまったく不当なものである」と評価している。
  • 山田朗は、当時の大韓帝国は政党政治ではなく、一進会が韓日合邦を望んでいたとしても、それは韓国人の民意を示したものではなく、一進会は韓国民衆から強い批判を受けていたと主張している[23]
  • 木村幹は、韓国併合直前期に日本に協力的だった韓国の政治勢力(すなわち親日派)には李完用を中心とする韓国の官僚達と、一進会のような民間の団体の二つの派閥があり、初代統監の伊藤は李完用を韓国側の協力者として選び、伊藤の支持を背景に李完用らは影響力を拡大する一方、一進会は日本側の、同じく民間の団体(黒龍会など)と提携し、伊藤・李完用らとは対立関係にあったとする。李完用らは日本に協力することで日本側に介入の口実を与えないようにし、大韓帝国の保持を図ったのに対し、一進会はそのような王朝国家の枠組みそのものを否定し、韓日両国民が日本の天皇の下で、対等な国民(一等国民)となることを考えた点に両者の対立の根本的な原因があったとする。一進会はそのような立場からより併合(合邦)に対し前向きな動きを見せたが、(日本による植民地化という形での)韓国併合の成立とともにその役割は終了し、切り捨てられてしまうのに対し、李完用らは日本を取引をするという強かな姿勢で臨み、併合後においても朝鮮貴族の地位の獲得に成功したが日韓の国力差の前ではそうした強かさすら大きな意味を持ち得ず、朝鮮貴族の地位も名誉的なものにすぎなかった[24]

出典

  1. ^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レファレンスコードB03041514200, pp.12, "種別 政社, 名称 一進会, 設立年月 光武八年八月, 事務所 永楽町二丁目, 重ナル役員 会長 李容九 副会長 洪肯燮, 会員数 ?八十万名"
  2. ^ 内田良平『日韓合邦秘事』下巻 合邦主唱者タル一進会ガ実数四千ニ満サル会員ヲ以テ漫リニ百万ト称スルハ虚勢モ亦甚シ
  3. ^ 中村粲「大東亜戦争への道」(大東国男「李容九の生涯」)。
  4. a b 日韓合邦秘史
  5. ^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在本邦韓国亡命者禹範善同国人高永根魯允明等ニ於テ殺害一件』
  6. a b 最近の韓国: 日露戦争中に於ける韓国の諸問題 松宮春一郎 1905年
  7. ^ 姜在彦 1987, p. 259.
  8. ^ 藤村道生「資料紹介 韓国侍従武官からみた日本の韓国併合 : 『魚潭少将回顧録』より「韓国末期の外交秘話」」『九州工業大学研究報告. 人文・社会科学』第21巻、九州工業大学、1973年、18頁、ISSN 0453-0349NAID 110000151831
  9. a b c d 韓国経営 P.75-P.87 加藤政之助 1905年
  10. a b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レファレンスコードB03050325500
  11. ^ 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細井肇 1910年
  12. ^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レファレンスコード B03050325700
  13. ^ 『朝鮮最近史』
  14. ^ 海野福寿 『韓国併合』 207頁
  15. ^ 吉岡吉典 2007, p. 146.
  16. ^ 統監府文書 8、警秘第4106号の1
  17. ^ 海野福寿 2003, p. 657.
  18. ^ 韓国学文献研究所 1987, p. 318.
  19. ^ 一進会請願書の取り扱いにつき曾禰統監請訓 1909年12月5日 「日韓合邦ニ関スル一進会上進ノ趣旨ハ、要スルニ(一)韓国皇室ノ尊栄ヲ日本皇室ト共ニ永遠不朽ニ垂レント欲スルコト。(二)韓国ヲシテ世界一等国ノ班ニ列シ、韓国民モ日本人同様ノ権利幸福ヲ享受セシメントスルノ二点ニ帰着シ、合邦ノ意味ハ連邦ナルカ如ク、又、合併ナルカ如ク見エ、甚タ不明ナリ。元来、此ル大事ヲ一進会如キモノヽ行動ニ基キ今日ニ実行セントスルカ如キハ、徒ニ平地ニ風波ヲ起シ、其局ヲ統ルコトナキニ終ルヘシ」
  20. ^ 桂首相より一進会顧問・杉山茂丸宛内訓 1910年2月2日 「合邦論ニ耳ヲ傾クルト然ラサルトハ日本政府ノ方針活動ノ如何ニアル事故、寸毫モ韓国民ノ容喙ヲ許サス」(『同上』666頁)
  21. a b 西尾陽太郎 1978.
  22. ^ 国立公文書館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伊藤公爵薨去後ニ於ケル韓国政局並ニ総理大臣李完用遭難一件 3 隆煕4年〔明治43年〕1月7日から〔明治43年〕2月18日』(レファレンスコードB03050610500)
  23. ^ 山田朗 2001, p. 117.
  24. ^ 木村幹 2000, 第3章

参考文献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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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는 1904년 부터 1910  까지 대한 제국 에서 활동한 정치 결사 이다 .

1904년에 이용구 , 송치바 등의 개화파에 의해 창설되었다. 닛신 전쟁 , 러일 전쟁 의 승리로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던 대일본 제국 (일본)에 주목·근접해, 일본 ​​정부 · 일본군 의 특별한 비호를 받았다. 일본과 대한제국의 대등 한 연방 인 '한일합방( 한일병합 과는 다른 개념)' 실현을 위해 활동했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최대의 정치결사이며 회원수는 공칭 80만명에서 100만명 [ 1 ] . 일설에는 실수가 4,000명 미만에 불과했다는 견해도 있다 [ 2 ] 가 러일 전쟁을 러시아 제국 (러시아)으로 대표되는 서구 침략 세력과의 결전 으로 간주, 한일 군사 동맹 에서 러시아의 침략 을 저지하려고 생각한 이용구 는 일본에 협력해 일본이 무기 탄약 을 북방으로 수송하기 위해 철도(후의 경의선 )를 건설했을 때 그 공사에 무상으로 참가한 일진회원은 전부 15만명이었다고 하며, 또 북한 에서 만주국 (만주)으로 군수품을 운반하는 업무 에 동원 된 회원은 11만5000명으로 아울러 약 27만명이 러일전쟁시 일진회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 3 ] [ 요점 페이지 번호 ] .

한일병합의 목적을 달성한 일진회는 이후 통감부 가 조선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의 정치결사를 전면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해산비용으로 15만엔을 주어 다른 정치결사와 마찬가지로 해산 했지만 [ 4 ] ,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치바 등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합병 후 조선 의 정치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합방선후책으로 가쓰라타로 총리에게 자금 백50만엔을 간청했더니 천만엔에서도 지장없다고 대답돼 활동에 맹진했다.

배경

이씨 조선 에서는 청일전쟁 에서 대일본제국이  에 승리하자 왕비인 민비 가 조선에서 더욱 강화하는 일본의 지배력을 경계했다. 삼국 간섭 에 의해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동아시아 에 대한 영향력이 강해진 것으로, 일본에의 견제를 포함해 친로 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그 후, 을미 사변 으로 민비가 암살 당해 (살해 현장에 있던 순종의 말로 『을미 사건 니시시, 현니 朕ガ 목격 세시 국모 노선, 우범선』)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대범선 은 '하하 구년 왕비 오징어 세시하 자기 나리토노 의누루 세리'와 스스로 범인임을 누설하고 있다. [ 5 ] 1896년 2월 11일 친노파 이범진과 이완용 등에 의해 쿠데타 가 열리며 국왕 고종 이 러시아 공사관 으로 옮겨 집무( 노관 파천 )를 하게 됐다. 영향력이 강해졌다 1896년 7월 개화파의 흐름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조선의 자주독립, 법치주의 의 확립, 신교육 의 진흥, 농업의 개량, 공업의 육성, 애국심 , 군주 에 대한 충성심 의 배양을 호소하고 이완용 등이 독립협회 를 설립했다.

1897년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현저해지자 독립협회는 반로투쟁을 전개하고 국왕 고종에게 왕궁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고종은 왕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세력은 한반도에서 후퇴했지만 독립협회의 주장은 점차 수구파 관료 와의 대립을 초래하여 최종적으로 고종의 칙령 에 의해 독립협회는 해산되었다.

러시아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후퇴함에 따라 다시 일본의 세력이 증대해 대한제국의 경제적 지배를 추진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 의 이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깊게 했다. 이런 배경 아래 러일전쟁 중에 일본군 통역 을 맡은 송아지 가 일본의 영향하에 정치개혁 을 위한 조직을 계획했지만, 이 계획은 전 독립협회계의 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일진회 설립

송치바는 러일전쟁 가운데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약 반년 후인 1904년 8월 8일 에 독립협회계의 윤시병 등과 함께 정치결사 일진회를 설립한다.

그 후 한정이 진보회에 대해 “법령을 뒤집어 집회하고 사냥 없게 하고 단발하는 것은 난민이니까 해산하라, 하지 않으면 포형 에 처한다”고 훈령 을 발했기 때문에 일진회는 진보회에 대해 “ 원한이 있으면 호소하고 호소하는데 회하는 것은 자연의 이론이다. 또 을미삭발사냥( 단발령 )은 아직 취소되지 않았고, 군인 이나 경찰관 이나 외교관 의 단발은 사냥에 의한 것이 아니다 . 6 ] . 진보회는 일진회에 대해 주의 목적이 같다고 합병을 의뢰하고, 중앙의 일진회는 13도의 진보회를 흡수했다 [ 6 ] . 덧붙여서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있다.

당초 윤시병이 회장이었지만 윤의 요청에 따라 이용구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 밖에도 초대 통감 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가 흑룡회 주간을 맡고 있던 우치다 료헤이 와 공모 해, “한국에서 일본과의 합방을 제의시키기 위해서”, 일진회를 설립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 7 ] . 그러나 육군 측의 자료인 '어담 소장 회고록'에 따르면 일진회는 제국 육군 한국 주도군 과 통감부의 대립 속에서 한국 주봉군이 통감부 및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설립시킨 것으로,  후 일진회가 우치다 료헤이  통해 통감했다 .

회원·임원

1905년 시점에서 회원은 전국 28만 4천여 명에 달했으며, 특히 헤이안도와 함경도  길에 많았다고 한다 [ 9 ] [ 요점번호 ] . 초기 임원은 다음과 같다 [ 9 ] .

목적

일진회에서는 독립협회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 , 독립국가주의 사상을 계승하여 '정치개혁과 민주의 자유'를 내걸었다 [ 10 ] . 또 러일전쟁시에 설립되어 한일군사동맹에서 러시아 침공을 저지하는 것이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심지어 서양 열강 의 아시아 진출을 막아 조선의 부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칙

1904년 12월 22일, 윤시병은 이하의 5개조의 회칙을 발포했다 [ 11 ] .

1, 본 회원은 1 절단 머리를하는 것
둘째, 모자 는 외국의 모습을 은행 하고 맡아 본국품으로 제조하는 일
셋째, 평상복은 현행 할 수있는 본국 속제를 바꾸지 않을 것
넷째, 평상복 표의는 깡통 의 주의를 시행해 염색 하는 일, 단 공사복은 이 한계에 없이
5,  의 일관은 혹은 자유롭게 속하는 것도 극히 간략을 취하고 재산을 난비하지 않는 일

활동

러일전쟁에서 일본군과의 협력

일진회 설립 당초 일본 측 일진회 평가는 낮았다 [ 10 ] 가 일진회 설립 후 송희반은 당시 일본의 대령, 마츠이시 안지 에게 서한을 보내고, 현재 의 고종 및 그 관료 주도에서는 대한 제국 의 독립 · 유지가 곤란하다고 설명 했다 . 당시의 러일전쟁에서는 일본군이 물자 수송을 위해 경의선 부설을 계획했지만, 일본군의 인원 부족으로 계획이 암초에 올라 왔으며, 이때 일진회가 이 부설 공사에 무상 지원해 회원 14만명 이상을 동원했다. 한층 더 일진회는, 일본군의 군사 물자 수송의 지원에도 나서고, 10만명 이상의 회원이 자비로 일본군의 무기, 식량을 전지 까지 운반하고 있다. 또 이날 이슬전쟁 당시 일진회 회원은 당시의 전통이었던 긴 머리 ,을 그만두고, 자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노관 파천 으로 단발령 을 폐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단발은 일반시민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연설

독립문의 서쪽에 있는 독립관이 일진회의 연설 회장이었다 [ 9 ] . 그러나 독립관은 600-700명 이상의 청중을 넣을 수 없어 좁아졌기 때문에 독립관의 북쪽에 새롭게 1,600-1,700명의 청중을 넣을 수 있는 팔각당을 건설했다 [ 9 ] [ 요점 번호 ] .

통감 정치

1905년 ( 메이지 38년) 10월, 일본 정부는 한국 보호권 의 확립 방침을 각의 결정하고, 다음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를 특사 로 파견해, 11월 28일 에 제2차 한일 협약 의 체결이 강행되었다. 이에 앞서 일진회는 같은 해 11월 5일 “ 외교권 을 일본 정부에 위임해 일본의 지도보호를 받아 조선의 독립, 안정을 유지하라”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있다. [ 13 ]

한국통치의 총책임자였던 이토는 조기 한국 병합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9년 (메이지 42년) 4월, 이토는 가쓰라타로 , 고무라 유타로 와의 회담에서, 양인이 제시한 병합의 방침에 대해서 대강을 시인하고 있다 [ 14 ] . 1909년(메이지 42년) 10월, 이토가 만주의 하얼빈 에서 안중근 에 암살 된 후, 1910년 (메이지 43년) 5월에 한국통감(제3대)에 취임한 테라우치 마사타키 는, 의병 의 제압과 병행해, 한국 병합에의 준비를 진행했다.

한일 합방의 요청

일진회는 1909년 12월 ' 한일 합방 건의서(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를 순종 , 제2대 한국통감 증황 황조 , 총리 이완용으로 보내 한일 합방을 요청하고 있다.

이 상주문을 쓴 것은 우치다 료헤이 가 이끄는 국수주의 단체 흑룡회의 다케다 범지이다. 다케다에 의해 기초된 우에주문은 야마가타 아리모토 , 가쓰라타로 총리(당시), 테라우치 마사히로 육군 대신에 내시되어, 사전의 양해를 얻고 있었다 [ 15 ] .

이 건의서 안에서 이용구는 회원 100만명의 성명이라고 칭하며 “일본은 닛신 전쟁에서 막대한 비용과 다수의 인명을 지출해 한국을 독립시켜 주었다. 아의 입에 삼키는 고기가 되는 것을 돕고, 동양 전체 의 평화를 유지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 도 우리가 초대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우리 가 초대  것이다 . 16 ] .

성명 발표 후 각 방면에서 반발

일진회 성명에 대해 대한협회, 서북학회와 천도교 도가 즉시 반대했다. 성명 발표 다음날에는 한성부 서대문 에서 이완용이 대연설회를 열고 병합 반대 결의가 이뤄졌다. 통감부의 헌병대 가 당시 한국 통감 이었던 나야아라스케 에게 보낸 보고에 의하면, 이 성명 발표는 일본인의 정치 활동가인 우치다 료헤이 가 주모한 것으로, 일진회에 대해 대규모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태를 무겁게 본 소선통감은 일진회 집회, 연설을 금지하고 일진회와 대한협회의 일본인 고문에 대해 논지 퇴거를 명하며 활동을 탄압 했다. 병합을 기본 방침으로 한 일본 정부에 있어서 찬성, 반대의 논의가 끓어오르고, 양파의 충돌이 일어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 자체가 장애라고 비쳤기 때문이다 [ 17 ] .

병합 후에 설치된 조선총독부 에 의해서도 당시 한국민중이 일진회에 대해 큰 반대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결과로 일진회가 고립상태에 있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 18 ] .

해산

일진회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한일 양국민의 대등한 지위에 근거한 한일공영이었고, 일본이 생각하는 외지 로서의 병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나 한일병합에 대해서는 한국측의 요구는 일절 받아들이지 않을 방침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일진회의 청원 을 거부 했다 [ 19 .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거액의 채무 나 토지 인프라 에 방대한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 국민 의 이해를 얻기가 어렵다는 정치 판단 때문이었다. 한편 일진회 송조도 역시 한일의 대등합방은 국력 의 차이로 인해 어려운 것으로 판단해 한일병합론을 전개했으며, 1910년(메이지 43년) 제2차 가쓰라 내각 에 의해 한국 병합이 이루어졌다. 한국 병합 후 한국 통감부 는 친일파/비친일파 정치단체의 대립에 의한 치안 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의 모든 정치결사를 금지하고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일진회는 병합 직후인 1910년(메이지 43년) 9월 12일 에 일본 정부에 의해 해산을 명령받아 해산 비용 15만엔을 주어, 같은 해 9월 25일 에 해산했다 [ 4 ] . 일진회를 이끌고 한·일 병합론을 설 송송희 들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병합 후 조선의 정치에도 크게 영향을 주고 그 후 그 공적에 따라 송조에는 백작 위가 주어졌다.

한편으로는 한일의 대등 합방을 일본측이 거부하고, 그 뒤에 한국을 삼키는 형태로 병합했다는 점에서 전 회원 사이에는 실망, 분노가 퍼지고, 후의 3·1 운동 에 몸을 던지는 사람도 많이 존재했다. 일진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용구 는 일본 정부에서 보낸 화족 의 서작을 거절하고 회의 해산으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아 분사했다. 객혈 하고 입원했을 때 방문한 일본인 친구에 대해 일진회 활동에 대한 후회를 말했다 [ 21 ] .

일본인의 참여

일진회 활동에는 우치다 료헤이 나 한일전보통신 사장인 기쿠치 타다사부로 등 일본인이 깊이 관여해 한일 합방의 요청을 내는 데 성공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이토 암살이나 일진회에 대한 정부, 한국 국민의 반발에서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기쿠치 다다사부로에 의해 “한일 합방이 좌절한 지금, 일진회는 폭도로 바꿀 우려가 있다”라고 보고가 되고 있다 [ 22 ] . 일본인 고문이었던 스기야마 시게마루 는 회의 목적인 '한일 합방'이 실패하고 병합 된 후인 1921년 (다이쇼 10년)에 전 회원들로부터 자결 을 요구받았다. 이에 따라 스기야마는 조선의 일본통치개혁을 강력히 호소하는 건백을 집필하고 이용구와 일진회 전 회원들을 속인 것에 대해서도 회개했다 [ 21 ] .

평가

일진회에 대한 평가는 그 활동의 해석이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크게 다르다. 이하에는 한일에서 출판되고 있는 일반 서적에서의 평가에 대해 개략한다(순부동).

  • 1] 평범 사의 '조선을 아는 사전'에서는 일진회를 '친일 어용단체'라고 부르며 드러난 운동 이외에 스파이 활동 등에도 협력했다고 한다. 또, 친일단체로서의 일에 대해서는 플러스의 효과보다도 민중 의 반발을 초래한 마이너스의 결과의 부분이 컸다고 하고 있다. 또 일진회의 실태가 ‘이용구나 송희반 등의 이권 집단’이었다고도 기술하고 있다.
  • 2] 나루카이마의 『이토 히로부미는 왜 살해당했는가』(1995)에서는 일진회는 일본이 일본군의 통역을 하고 있던 송조바탕에 만든 친일파의 정치단체라고 하고 있다. “일진회는 일본의 국수단체·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라는 유력자를 고문으로, 일본의 보호를 받아 조선 국내의 반일 분자나 반일 운동의 스파이 활동을 실시해, 대중의 반감을 샀다.특히 일러전 쟁후 일진회가 일본의 지도보호를 요청하는 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에 맹렬한 반발을 받았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 3] 삼성당 의 '조선의 역사 신판'에서는 일진회가 1909년(메이지 42년)에 내놓은 성명에 대해 민중의 목소리를 대표하지 않았으며, '회원 100만명'도 실체 없는 숫자였다고 한다.
  • 4] 김완료 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2002)에서는 일진회 운동을 이씨 조선 정부의 압정을 튕겨내려는 농민 계급 ( 동학당 → 진보회 )과 지배계급 출신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자수 개혁파 지식인 그룹( 유신회 ), 그리고 조선 근대화 를 지원함으로써 '공격적인 방어'를 확보하려는 일본의 세 개혁 세력이 결집된 것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 정부가 일진회를 '친일어용 에세단체'라고 왜곡해 한국민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 5] 우선화 는 저서 '한국병합에의 길'에서 “적어도 민족의 존엄 확보에 베팅해 대아시아주의를 내걸고 국내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이용구들을 매국 녀석으로 정해 국내에서 드러난 활 움직이지 않고 외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한 안창호 와 이승만 등을 애국자·항일투사와 높이 평가하는 밸런스·시트는 나에게는 전혀 부당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6] 야마다로 는 당시 대한제국은 정당 정치가 아니고, 일진회가 한일 합방을 원했다고 해도, 그것은 한국인의 민의를 보여준 것이 아니고, 일진회는 한국민중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23 ] .
  • 7] 기무라 간은 , 한국 병합 직전기에 일본에 협력적이었던 한국의 정치 세력(즉 친일파 )에는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관료들과, 일진회와 같은 민간의 단체의 2개의 파벌이 있어, 초대통감의 이토는 이완 용을 한국측의 협력자로 선택해, 이토의 지지를 배경으로 이완용 등은 영향력을 확대하는 한편, 일진회는 일본측의, 마찬가지로 민간의 단체(흑룡회 등)와 제휴해, 이토·이완용 등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 등은 일본에 협력함으로써 일본 측에 개입의 구실을 주지 않게 하고, 대한제국의 유지를 도모한 것에 대해, 일진회는 그러한 왕조 국가의 틀 자체를 부정하고, 한일 양국민이 일본의 천황 아래에서, 대등한 국민(일등 국민)이 되는 것을 생각한 점에 양자의 ​​대립. 일진회는 그러한 입장에서 보다 병합(합방)에 대해 긍정적인 움직임을 보였지만,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라는 형태로의) 한국 병합의 성립과 함께 그 역할은 종료해, 버려져 버리는 것에 비해, 이완용 등은 일 책을 거래한다는 강한 자세로 임해, 병합 후에도 조선귀족 의 지위 획득에 성공했지만 한일의 국력차 앞에서는 그러한 강함조차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고, 조선귀족의 지위도 명예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 24 ] .

출처

  1. ↑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 레퍼런스 코드 B03041514200, pp.12, "종별 정사, 명칭 일진회, 설립 연월 광무 8년 8월, 사무소 나가라쿠초 니쵸메, 중나루 임원 회장 이용구 부회장 홍긍정, 회원명
  2. ^ 우치다 료헤이 "한일 합방 비사"하권 합방 주창자 타루 일진회
  3. ^ 나카무라 죽 "대동아 전쟁에의 길"(대동 국남 "이용구의 평생").
  4. ↑ b 한일 합방 비사
  5. ^ 아시아 역사자료센터 『재본방 한국 망명자 우범선 동국인 다카나네네 루명명 등 니대태 살해 일건』
  6. ↑ b 최근의 한국: 러일전쟁중에 있는 한국의 여러 문제 마츠미야 하루이치로 1905년
  7.  姜在彦 1987 , p. 259.
  8. 후지무라 미치오「자료소개 한국사무종무관에서 본 일본의 한국병합 : 『어담소장 회고록』에서 「한국말기의 외교비화」『규슈공업대학 연구보고. 인문・사회과학 제 21  권 110000151831 . 
  9. ↑ d 한국경영 P.75-P.87 카토 마사유스케 1905년
  10. ↑ b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레퍼런스 코드 B03050325500
  11. ↑ 현대한성의 풍운과 명사 호소이 다리 1910년
  12.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레퍼런스 코드 B03050325700
  13.  『조선최근사』
  14.  카미노 후쿠스 『한국 병합』 207페이지
  15. ↑ 요시오카 요시노리 2007 , p. 146.
  16.  통감부 문서 8, 경비 제4106호의 1
  17. ↑ 카미노 후쿠스 2003 , p. 657.
  18. ↑ 한국학 문헌 연구소 1987 , p. 318.
  19.  일진회 청원서의 취급에 대해 증관통 감청훈 1909년 12월 5일 “한일 합방 니세키 술 일진회 상진 노 취지 하, 요 술니(1) 한국 황실 노 존영 ヲ 일본 황실 토공 니 영원 불후 니타루렌트 욕 술코토. 점 니 귀착시, 합방노 의미 하연방 나루카여 쿠, 또, 합병 날카여 쿠미에, 진타불명나리.
  20. ^ 가쓰라 총리보다 일진회 고문·스기야마 시게마루 앞내훈
  21. b Nishio Yotaro 1978 .
  22.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이토 공작장거거 후 니모루 켈 한국정국 나라니 총리대신 이완용 조난 1건 3 융희 4년〔메이지 43년〕
  23. ↑ 야마다 로 2001 , p. 117.
  24. ↑ 기무라 간 2000 , 제3장

참고문헌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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