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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은이)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04-15 | 초판출간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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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 최고의 책 2위
정가 13,000원
판매가 11,700원 (10%, 1,3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반양장본 | 340쪽 | 205*145mm | 468g | ISBN : 9788996187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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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개정판. 청소년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정감 넘치도록 형식과 내용을 바꾸었으며, 원본과 저자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만들어졌다. 이 책은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노동자 전태일의 일대기다. 평화시장 어린 동심들의 고통에 항상 가슴 저려 하며, 그들을 위해 스물 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전태일 자신과 동료들이 겪고 있었던 고난의 삶과 고통스러운 노동 현실에 분노하다가, 평화시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 등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삶과 투쟁의 과정에서 생기는 고민, 방황, 헌신적 인간애 등을 통해 인간 전태일을 느낄 수 있다.
『전태일 평전』 신판을 내면서 3
서(序) 8
1부 어린 시절
밑바닥에서 13
가출.노동.방황 19
철조망을 넘다 26
청옥 시절 31
꺾인 배움의 꿈 38
서울에서의 패배 43
식모살이 떠난 어머니를 찾아 50
동생을 길바닥에 버리다 54
직업은 있다 61
재회 68
2부 평화시장의 괴로움 속으로
'거리의 천사'에서 평화시장의 노동자로 79
다락방 속의 하루 89
평화시장의 인간조건 95
억울한 생각 104
어린 여공들을 위하여 111
재단사 전태일의 고뇌 117
충격 126
3부 바보회의 조직
근로기준법의 발견 141
재단사 친구들 145
바보회의 사상 152
아버지의 죽음과 바보회의 출발 158
노력 164
좌절 속에서 170
4부 전태일 사상
막노동판에서 본 것 181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 185
나를 따르라 195
인간의 과제 202
왜 노예가 되어야 하나 209
인간, 최소한의 요구 213
모범업체 설립의 꿈과 죽음의 예감 사이 220
번민 231
결단 237
5부 1970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 245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 253
‘평화시장 기사특보'나던 날 264
시위 274
불꽃 283
전야 295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299
부록
1976 . 전태일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313
1983 . 이 아픔, 이 진실, 이 사랑 323
1983 . 태일의 진실이 알려진다니 324
1990 . 개정판을 내면서 327
1995 .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의 가장 비범한 삶 331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노동자.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 - 본문 중에서
전태일 사상은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그것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서 이제껏 현실이 자신에게 강요해왔던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스스로 인간적인 체험에 의거하여 그 자신의 가슴으로 느끼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주체적인 인간의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꾸로의 거꾸로, 사회의 거꾸로된 가치관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그것은 자기비하에서 자존으로, 비굴에서 긍지로, 공포와 위축에서 분노와 용기로, 의존과 자학에서 자주와 해방으로, 체념과 침묵에서 비판과 투쟁으로 전환하여가는 사상, 노예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민중의 사상이다. -198쪽
- Matilda
모든 인간은 서로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전체의 일부" 이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생각할 줄 알며,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이며, 다 같이 "고귀한 생명체"로 본능과 희망을 갖춘, "가치적으로는 동등한 인간"이다. 인간은 또한 "서로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모든 인간은 서로의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존중하고 서로의 인간적 요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207쪽
- Matilda
차병직 (변호사)
: 노동, 삶의 조건인가 생의 소모인가
최영기 (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
: 참된 연대란...인간 전태일에서 만나다
KBS 'TV 책을 말하다'
: 성장의 아픔을 말한 책
최영미 (방송작가)
: 그처럼 목숨을 바칠 순 없지만, 감히 그럴 용기조차 없지만, 그때 알았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태일은 분명 스스로의 몸으로 작은 '촛불'이 되어 우리의 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이인영 (국회의원)
: "다시 만난 ‘아름다운 청년’"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하는 외침 앞에 진실하고자 할 때 <전태일 평전>은 영혼으로 대답한다. 노동자는 인간이라고, 절대로 차별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이것이 다시 읽는 <전태일 평전>의 웅변이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장정일 (소설가, 시인)
- 한겨레 신문 2009년 5월 8일자 '장정일의 책속 이슈'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09년 4월 18일 잠깐 독서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09년 5월 8일자 '장정일의 책속 이슈'
저자 : 조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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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전태일 평전>,<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A Single Spark>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6.7부정선거 규탄, 3선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전태일 분신항거사건을 접했다. 1971년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반 동안 투옥되었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6년 동안 수배생활을 겪었다. 복권 후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사회개혁가이자 인권변호사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다가 1990년 12월 폐암으로 타계하였다.
<전태일 평전>은 수배생활 중 혼신의 열정을 다하여 집필한 책이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내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던 지은이의 이름은, 1991년 1차 개정판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조영래'로 밝혀졌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등이 있다.
청소년과 함께 읽는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
2009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펴낸 개정 신판으로 돌아왔다!!!
신판『전태일 평전』은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며,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지혜와 용기의 사상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삶에 대한 나침판 역할을 하며 지난 25년간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으로 자리잡아 왔다.
21세기에도 전태일은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더욱 세차게 두들기며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지구촌 곳곳을 찾아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고 있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런 시대 흐름에 맞춰 돌베게 출판사에서 펴내던『전태일 평전』을 새롭게 개정해 펴냈다. 새롭게 태어난 신판『전태일 평전』은 청소년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정감 넘치도록 형식과 내용을 바꾸었으며, 원본과 저자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만들어졌다.
『전태일 평전』은 출간 이래 25년 동안 대학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며, 이 책을 읽고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전태일 평전』의 글 속에 담겨 있는 인간적인 세상을 꿈꿨던 전태일의 순수한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우리시대 진정한 리얼리스트 전태일
이 책은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노동자 전태일의 일대기다. 평화시장 어린 동심들의 고통에 항상 가슴 저려 하며, 그들을 위해 스물 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전태일 자신과 동료들이 겪고 있었던 고난의 삶과 고통스러운 노동 현실에 분노하다가, 평화시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 등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삶과 투쟁의 과정에서 생기는 고민, 방황, 헌신적 인간애 등을 통해 인간 전태일을 느낄 수 있다. 전태일은 노동법에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으나 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분신자살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1970년 11월 13일의 일이다.
“전태일은 횃불이었다.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얼굴을 들추어 낸 횃불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횃불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저마다의 작은 욕망을 위해 읽고 있지는 않는가?『전태일 평전』은 우리가 전태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가를 지시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 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이 평전의 필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삶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전태일을 우리들의 가슴 속으로 옮겨와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을 밝은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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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32편
[마이리뷰] 전태일 평전 이지선 ㅣ 2017-05-19 ㅣ 공감(0) ㅣ 댓글 (0)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버섯 ㅣ 2017-04-12 ㅣ 공감(0) ㅣ 댓글 (0)
목숨을 걸지 않는 ‘투쟁’은 거짓이다. 그것은 소리치는 양심의 아픔을 일시적으로 달래는 자기 위안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 (-)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폐되어 껍데기를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異性)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한 인간이 그의 인간성을 풍성하게 하는 과정은 곧 좁은 자아의 환상을 버리고, 그 껍데기를 깨고,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관심의 햇살이 비치는 곳을 향하여 나오는 과정을 뜻한다. 참된 소망, 참된 사랑, 참으로 순수한 그리움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어머니, 놀라시면 안 됩니다.”
태일이 어머니에게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어머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아들의 얼굴을 만져보니 이미 다 굳어 있었다.
팔과 다리도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화기(火氣)는 약간 가신 듯, 말소리만은 또랑또랑한 것을 보고 어머니는 외상이 심할 뿐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져보려 애썼다. 그러나 역시 죽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근로자를 위하여 애쓰는 태일이의 뜻이 이 모양으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이 아니고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기독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품 속에 품고 온 성경책을 아들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그러는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전태일은 말했다.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어머니는 웬일인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흉하게 탄 아들의 얼굴에서 눈도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예수가 인간구원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는 큰 사상을 실천한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때문임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다. 가난한 이웃집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는 그의 어머니의 요청 때문에 아직 ‘자기의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한다. (-)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아픔을 안아야 했고, 나아가 아들의 뜻을 펴는 일에 평생을 바쳤으니 예수의 어머니가 성모로 추앙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평생의 고난, 평생의 설움, 평생의 희생으로 살다간 투사(鬪士) 전태일의 생애와 그의 영혼을 읽다. 헤르메스 ㅣ 2015-11-19 ㅣ 공감(2) ㅣ 댓글 (0)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가 왜 그렇게 죽어야겠다고 결단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리고 그러한 그는 대체 누구인가하는 의문이 들어 거의 충동적으로 읽게 되었다. 전태일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는 향년 22세 일기로 자신의 몸을 노동법과 함께 불살라 생애를 마쳤다. 그의 삶은 철저히 빈곤과 고통, 절망 그리고 상처와 멸시로 점철되어 있다.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5살이 되기도 전에 각종 품팔이, 신문팔이로 거리를 전전하며 가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 아버지의 폭음과 폭력, 자신의 동생들을 책임져야하는 그러한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같이, 자기보다 더 한 고통의 삶을 사는 이들의 짐도 같이 짊어지는 그의 생애는 실로 인간을 초월한 삶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마저 들게한다.
존재론의 철학자 혹은 실존철학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알려진 마르틴 하이데거(M.Heidegger)는 삶의 비본래성과 본래성을 이야기했다. 비약의 정도가 있겠지만,퇴락으로 정의되는 비본래성이란 세인(Das Man)들 사이에 자신의 모습을 가리우고, 함몰된 채 소시민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세인들이 쓰는 말들(Die Rede), 행위들, 심지어 생각들까지도 평균적으로 다를 바 없는 그러한 퇴락된 삶.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 그러한 삶. 보통의 사람들은 이러한 비본래적 삶의 양식들을 향유한다. 그러나 본래성, 본래적 삶이라는 것은 세인들 속에서 자기가 상실되는 것을 극복함과 동시에 이미 피투된 자기 자신을 기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어져오는 것에 대해서 회피하지 않고, 세인들 속에서 함몰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불안을 느끼며, 자신의 필멸성(죽음)을 인지하는 그러한 삶. 자기극복이자 자기정립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본래적 삶을, 나는 전태일의 생애와 죽음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평화시장의 일개의 재단사로서 참혹한 노동현장의 부조리한 현실을 눈감고,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안위만을 우려했다면 전태일은 그렇게 불타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지는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기업주를, 그러한 기업주들의 착취가 벌어지는 그 노동현장을, 그러한 것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거대한 경제개발이라는 계획 아래에 불가피한 희생으로서 노동자들의 질병과 죽음, 그리고 고통을 정당화하는 그 부조리한 사회의 철옹성을 전태일은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 던져져있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주어진 암담한 운명의 무게에 짓눌려 체념에 빠지도록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그 거대한 사회를 상대로 투쟁했다. 그것도 자신의 단순한 억울함 때문이 아닌, 어린 티를 벗지도 못한 시다들과 고통받는 수많은 여공들과 노동자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초월했다. 자신 앞에 죽음이 닥쳐올 그 시점에도 자기가 살아 있을 적에 이루지 못한 노동개혁의 희망을 끝끝내 놓지 않은 전태일은 그렇게 본래적 삶의 대표적인 원형으로 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대단한 이유는, 그가 이렇게 완벽하고 비범한 인물이었다기 보다 그 자신도 여느 인간들처럼 나약하고 두려움과 불안 앞에서 처절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기서 투사 전태일의 죽음이 하이데거나 여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삶의 방식이 가진 한계를 또 한편으로 극복해내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하고 싶다. 대체로 실존철학들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비판을 전면으로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 사회적 담론에서 다루어지기에는 여타 사상들보다 비교적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개인의 실존, 삶의 방식을 강조하는 실존철학은 이렇듯 한계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죽음은 단순히 실존적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으로 그저 착취의 대상으로서 체념과 절망으로 매일매일을 감동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서 자신들이 처해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타개할 동기가 생겼던 것이다. 철저히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타인들과의 단절되어 마치 기계처럼 고작 생존해있던 그들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삶을 외치게 되었던 것은 전태일의 죽음 때문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의 행위, 그의 죽음은 일견 자기극복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개혁의 촉발 사건이자 시대의 변혁을 일으키는 거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전태일은 실존적 삶의 현시이자, 그 자체로 혁명의 주체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노동자로서 당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여건을 개선하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의 진정한 숙고와 부조리와의 투쟁에서 비롯한 유언들 때문이다.
사회를 변혁하는 것, 고통들의 울부짖음, 죽음의 참혹한 단말마들의 종말은 작금의 상황처럼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승리에서 기대해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아니 자신과 함께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처지와 딛고 있는 땅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내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가능적이고 실존적인, 희생적인 삶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전태일을 통해서 깨닫는다.
전태일 평전 만화애니비평 ㅣ 2015-10-03 ㅣ 공감(1) ㅣ 댓글 (0)
몇 년 전에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타계하셨다. 아마 하늘 위에서 한국 땅을 바라보는 그분의 아들인 전태일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하여 귀천(歸天)이라 한다. 죽어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분명 세상 밖의 어디서 바라보고 있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에 부끄러운 일을 남기면 후회하게 된다. 나라고 그렇게 올바르고 좋은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 하고, 만약 했었다고 느끼거나 주변에서 충고를 들으면 거기에 대한 반성을 조금이라고 실시하려 한다.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우나,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다.
나는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타인의 정신 안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전태일 평전>은 여러모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책이다. 전태일이란 이름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들어본 것 같았다. 당시 상당한 연기력을 가진 홍경인 씨가 드라마가 아닌 영화촬영을 한 것이다. 홍경인 씨가 연기한 배우와 영화 제목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전태일의 연기를 하기 위해 스턴트맨이나 대역 없이 홍경인 혼자서 했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모습을 재현하려면 가장 어려운 고비가 남았다.
전태일은 비참한 노동환경에 한탄하며,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린 후에 불을 붙여 스스로 화형을 거행하였다. 노동근로기준법을 손에 잡고, 법전이 있어도 아무런 쓸모없는 그 책을 부여잡고 자신의 몸과 같이 불길 속으로 타올랐다. 홍경인 씨가 연기할 때 그 장면은 무척 위험했다. 하지만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고 모든 것의 의미였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희생하여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죽음조차 불사할 수밖에 없던 한 노동자의 슬픔은 우리 사회에 깊은 파동을 넘긴다.
사실 한국의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인권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그러나 노동문제가 매우 심각한 이유는 인간은 하루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결국 삶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제적인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현재 우리 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어 임금에 대한 갈등이 생기고, 최근 임금피크제도라는 이름으로 신구 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자신이 일하는 곳이 자신의 가게가 아니라 대부분 고용되어 일을 한다.
일을 하면 임금에 의한 인건비가 기업으로서 많은 지출비용에 해당된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은 비정규직을 선호하고, 그들에게 장기계약보다 단기계약을 원한다. 퇴직금이나 휴가, 각종 복리후생 규정에서 비정규직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그나마 현대에 개선된 점은 아동노동이다. 그러나 아동이 현재 가혹한 노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이 성장하면 가혹한 노동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신의 자녀들을 좋은 근무조건에 일하게 하고 높은 수익을 받기 원하여 많은 부모들은 현실의 문제를 뒤로 한 채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아무리 강요해도 일부 누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분명히 일을 해야 한다. 지금은 일부일지 몰라도 전태일이 살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그래 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앞으로 미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임금의 문제가 계속 사회적으로 문제되어 근본에 대한 해결안이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피해보는 것은 힘이 없는 약자이다. 자신이 겪은 배고픔을 자식에게 주지 않겠다며 공부시켜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구조다. 이런 세상에 희망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경제적인 임금보단 노동환경에 대한 부분이다. 아버지가 선원 노동자로 일하면서 나이가 연로하여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퇴직금도 못 받는 일도 생기고, 일하던 중에 다쳐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온 몸에 상처와 바늘자국 그리고 눈에는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가득한 것을 볼 때가 있다. 노동자의 몸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근로조건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이지 그의 인생과 인간성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외면하고, 설사 그것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시끄러운 잡음만 들릴 뿐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 믿으면서 세상의 흐름에서 바닥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영원히 되풀이는 된다는 점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주변의 도처에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을 쇠사슬 밖에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분명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존엄하게 살아가야 하나 이미 세상은 불평등으로 가득하다. 선천적 자연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거나 또는 특별한 신체능력을 가졌다면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 문제다.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고의적인 요소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생각났다. <자본>에서 영국 공장 감독관이 작성한 기록이 나온다. 다행히 공장 감독관은 당시 암울한 공장노동자의 현실을 자세히도 기록했다.
대부분 공장에 어린 소녀들이 옷을 만드는 작업공정에 투입되었다. 이들에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노동을 시켰으며, 하다못해 잠을 못 자게 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강제노동을 시킨 적도 다분했다. 이제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들은 기계의 사이 끼여 있는 불순물을 골라내기 위해 추운 날 맨손으로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환기가 좋지 않아 신선한 공기도 흡입하지 못하고, 음식도 볼품없다. 게다가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온갖 욕설과 심지어 구타까지 일어난다.
이게 인류가 발전했던 원동력 중에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된 성과의 열매는 모조리 기득권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우리의 인류의 역사였고, 그 비극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1960년대 산업화란 이름으로 공장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터도 가열되면 고장이 나므로 쉬는 시간은 노동자들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모터가 돌면 노동자도 돌고, 모터는 기계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는 그 모터의 부품 중에 하나였다. 사람이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일만 하면 몸에 병이 든다.
병자를 두고 가련하다고 말 한 마디로 못해줄망정, 그들에게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그런 병자들은 낡은 골방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위선으로 넘치고 폭력적인 권력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비정한 현실에 자신과 세상을 저주하면서 사라진다. 전태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입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여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나이가 중학교에서 예쁜 교복을 입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며 지내야 할 그 소녀들이 입에서 피를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그런 노동은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어졌다. 외국에서 온 노동자 그것은 여성노동자에게 그때보다 설비와 제도가 발전했다고 해도 무서운 세상의 욕심에서 한도 끝도 없는 억압에 시름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전태일과 친구들처럼 당장이라도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거나 몸에 휘발유를 뿌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을 읽고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은 언제나 비참한 최후의 비극을 맞이한 후에 깨닫는다. 우리의 앞날에 그런 비극을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태일이란 이름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전태일 평전 icaru ㅣ 2015-05-07 ㅣ 공감(5) ㅣ 댓글 (0)
2004-05-27 16:31
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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