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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음악]
[음악]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 있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 우리가 아편 전쟁하고 태평천국의 난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사실 중국이 근세와 맞닥뜨리면서 가장 큰 위기를 맞는데
그때마다 중국본 어 이홍장 곽성도 이런 그 지도자들이 어 부상을 하면서
어떻게 그 위기를 넘기고 어 그리고 소위 말하는 동치 중까지 걸거 왔는가
그 부분을 좀 살펴봤습니다 오늘 하고 다음 시간에는 이제 계속해서 그럼
조선에서 개화파 그이 일본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접촉을 하게 되었을까 그 완전히 쇄국의
상태였었다 이유로 극단적으로 제안하고 어 그 끊어 놓은 상태에서 일본이
급속한 개국을 하고 어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근대화를 해 나가는 그런
과정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 어떻게 접촉을 하게 돼서 그 있는지
사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우리 그 근세사의 장면들입니다 특히 그
장면에서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가 이동이라는 화입니다
스님인데 불교 스님인데 어 처음으로 개화를
문명을 그 맞이하는 제가 봤을 때 어떻게 보면 조선 최초의 근대인
이라고까지 볼 수 있습니다 초로 근대화를 는 외국 이번이 경우
일본이에 나가서 아 근대 사회라는게 이렇게 바뀌고 있 있구나라는 거를
몸서 처음으로 취득하고 배워서 와서 그다음에 또 말씀드릴
김옥균 이런 사람들하고 접촉을 하면서 일본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도 빨리 따라가야 겠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중차대한 역할을 한 사람이 어 개화성 이동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죠 않고 어 사실 비극적으로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는 인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남긴 어 그 족적 그리고 그
사람이 어 시작한 조선의 문명개화 저는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오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어 이동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하고 접촉을 하기 시작하면서 어 일본측 기록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 전까진 사실 부산에 있는 범어사에서 출가한 어 불교 승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878년부터
기록들이 이제 나오기 시작합니다 부산의 보호사 출신 스님 이동인이
사실 그 당시에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이렇죠 그니까 부산 사람이면 강화도
조약을 통해서 1876년에 개항을 하거든요 근데 개항하는 데가 어디를 하냐면 부산을
하거든요 그니까 그 개을 하는 부산에 있는 스님의 입장에서 한번 야이
일본이 도대체 뭐를 하는 나라일까 어떻게 해서 산 이란 데를 굳이
열어서 개을 하라고 그렇게 날서 와서는 그럼 도체 뭐를 하는 건가이 사람들이 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죠 임진란 때 그랬지만 이번에는 개을 하자 하자 해 갖고 와서 하는 거를 보니까 어이
사람들이 와서 장사를 하기 시작하고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하고 무슨 병원을
짓고 이제 이런 일들을 하면서 전혀 자기가 생각했던 거와는 다른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이 알고 있었 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어떠한 상업적인 삶을 본격적으로
꾸려나가는 걸이 사람들이 이제 보는 거죠 이동인 이제 그중에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자기가
이거는 공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일본 사람들이 불교
신자들 아닙니까 그때에 거기에 일본 사람들의 종교 생활을 위해서 일본에서
또 스님이 와서 저를 열 그죠 일본 스님이 와서 절을 열고서
포교를 하고 그러니까 조선의 스님으로서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뭐 궁금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겠지만 정말 이동인이라 사람은
실제로 찾아가서 그 일본 스님을 찾아가서 자 나 좀 리켜 주시오
당신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고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 이제 이런 거를 물어봅니다 알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진취적인 굉장히 진취적인 정신이
놀랍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어 대사들을 보낼 때
그때 후쿠아 기지가 따라가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가 갖고 왔다 갔다 하다가 거기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사진사에 딸하고 사진을 찍게 해 달라 해서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는 말씀을 드렸고 사진도 어 보여 드린 적이
있는데요 사실 전 굉장히 그런 거 같습니다 아 이게 나라가 어떠한
점프를 할 때 새로운 단계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거는 이런
진취적인 사람들이다 뭐 가능성들 새로운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걸 그냥 피상적으로 피동적으로 보는게 아니라
찾아가서 이거 뭐 하는 거요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지만 되는데
저는 그런 의미에서이 동인이
부산에 일본 절이 열리니까 거기를 찾아간다는 거 저는 이거는 우리
개화사 있서 결정적 전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때에 이동인이 거기서 그
절에서 배운 거를 그 절에 가서 일본 스님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면서
배운 거를 갖고서 한양에 올라가서 김옥균 서재필 박용효 당시 아주 젊은
뭔가 나라 걱정을 많이 하는 거 같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거 같은 그런 젊은이들을 접촉을 해서 그 사람들하고
만나서 부산에 있는 스님으로부터 얻은 일본 관련 서적들 사진들 이런 거를
박영 서재필 김한테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 저는 우리 개화의 시작이라고 어
생각을 합니다 자 그때 이제 기록을 보시면 서재필이 이렇게 얘기를 하죠 이동인 역할에 대해서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그때 가져온 책이 여러 권인데 역사도 있고 질의도 있고 물리 화학
같은 것도 있어 이것을 보려고 선달 동안 그 절에 다니다가 그때는 이런 책을 보다 들키다 men 들키기 하면
사악 즉 사문 난 적이죠이라 해서 중보를 받게 되므로 한 군데서 오랫동안 볼 수가 없어 그다음에는
동대문 막 그게 무슨 절이라 영도사 가서 아마 얼마 동안 보다가 다시
봉원사 이렇게 하기를 1년 이상이나 걸려서 그 책들을 다 읽었지 그때 그
책이 일본말로 쓴 것인데 우리가 한문은 대게 짐작하게 한 문자만 연달아 읽어보면 뜻은 모두 통한다
말이야
그래서 그 책들을 다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강 짐작할 거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이라는 주흥이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세절 절이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여기서
세절이라는 것은 지금 그 그 봉원동이란 제가 잘한 동네입니다
어려서부터 1959년부터 어 살았던 동네인데 그 봉원동 봉원사란 절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 절이 뒷산에 있어서 놀러 맨날 놀러갔었는데 그걸
세절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래서 왜 세절이라 그러는지 몰랐는데 여기도 보니까 그거를 세절이라
그러더라고요 서재필 씨가 절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동인이 거기에서
책을 갖고 와서 거기서 김옥균 박영 서재필과 함께
일본 책들을 읽은 거죠 일본말로 돼 있어서 다 아는 문 있지만 그래도
뭐이 분들이야 워낙 한문에 출중한 통통한 분들이니까 나가나 이런 것만
조금 알면은 대충 넘어가면 뜻을 알았다 이거죠 그렇게 해서 자기네가
개화를 해야 되겠다라고 나서게 됐답니다 자 그러면이 동인이 일본을 배우게 된다는 건 저는 결코 의연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 지만 우선이 부산이라는 데가 놀라운 데죠 여러분
지금은 한국의 대한민국의 제 2의 도시라 그럽니다
그때는 부산이라는 것은 동네 부라는 조그만 관청이 있는 마을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외진 곳이었고 거의 인구가 천명 2천명 밖에 안 되는 곳이었고 그리고 거기
외관 초량지점 만들어서 이제 거기에 일본 어 수시아 섬에 대마도에 배 20척
세견선 1년에 그 20척 man 들어오게 했었던 바로 그 동네입니다 조선 임진 내란 이후 내내 일본
사람이 그나마 조선하 접촉할 수 있는 데가 초량제 거기밖에 없었으니까
강화도 조약을 통해서 일본이 조선 보고 개항을 해라 해라 하면서 그러면
제일 가까운 데니까 그럼 우리가 초량제 하자 초량제 그 대신 그동안에 이렇게 철책이 이런 걸로 가둬 왔는데
그걸 다 치워 버리고 이제 마음대로 일본 사람들이 와서 정착도 할 수
있게 하고 건물도 질 수 있게 하고 상점도 짓고 장사도 할 수 있게 하자 이게 강화도 조약입니다
그러니까는 부산은 일본 사람들이 만드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일본
사람들이 근대 도시를 처음으로 만들어 가면서 이쪽에는 상가들이 있고 저쪽에
뭐 병원이 있고 뭐 학교도 있을 거고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절도 지어놓고 이제 이런 쭉 근대 도시의
모습이 쭉 나오는 거를 제일 먼저 경험하고 목격한게 부산 사람들이고 그
중에서 이동인이 그걸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일본 하고의 근대 무역의
발상 지구 일본하고 무역관의 발상지가 아니죠 사실은 조선이 개국을 해서
근대 국제 질서 속에 들어오게 되면서 그야말로 근대 국 세계 질서와
접촉하게 되는 첫 만나는 지점이 그게 부산이 됩니다
겁니다 저는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여러분 아시죠
불교는 조선시대 내내 탄압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스님들은 천민이 조선 도성에 4대문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금지가 돼
있었습니다 스님들이 도성에 들어온지 아세요 갑보 경장 때 들어옵니다
1895년 6년이 돼서야 그때에 96년에 스님들이 진정서를 내서
누구한테 내느냐 그때에 조선의 2차 갑보 경장을 주도하기 위해서 왔던
인호의 가오루 공사한 우리 스님들도 사대문 안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때 그걸 허가를 해줍니다 일본 사람
불교신자였던 면 이동인이라는 분의 입장에서 이런
거 아닙니까 자 조선에서는 불교는 이루 만 말할 수 없이 탄압받던 종교입니다 불교라는 거를 나라에서
해주는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교 사찰들 전부 다 쇠락 됐습니다 여러분
불국사 이런 사진들 보시면요 옛날 사진들 보시면 정말 처참합니다 그죠 석구라 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거를 일본 학자들이 가서 발굴을 하고 하게 되는 거고 신라에 있는 모든 어 고분들
이런 것들이 일본 학자들이 와서 다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하기 시작하고 그러는 거죠
그랬었는데 어 일본이란 나라가 와서 하는 거를 보면 일본이 놀라운 변화를
겪고 있고 정말로 경천동지할 새로운 문명을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자기네가 부산에서 직접 목격을 하는데 해필이면이 이게 뭐냐면 불교 문명이
유교 문명인 조선 자기네를 천시하는 유교 문명은 완전히 쇠락을 하고 있고
불교 국가인 일본에서는 나라가 흥하면서 하도
흥하다 못해서 이제 조선까지 개국을 시키고 와서 부산이란 도시를 만들면서
거기에서 근대 사회의 도시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게 되는 거죠
불교신자 불교 이 동인의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근대화라는게
뭐냐 대화라는게 뭐냐 아 유교를 무너뜨리고 불교 쪽으로 가야지 오히려
불교가 데랑 저 잘 맞는 것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분명히 저는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조선 체제의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사대부들과는 전혀 달 다르게 조선 체제로부터 가장 탄압을 받는 불교
스님의 입장에서는 빨 근대화로 가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그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 일본이 와서 적극적으로 부산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상점들 짓고 창고들 짓고 한구 짓고 재판소 짓고
병원 짓고 이제 이러면서 자기네가 거기서 자치 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모든 기반을 마련하면서 어 장사를
하면서 그 상업도시로 이제 부산이 나오기 시작을 한 거죠 그런데 이제
일본 사람들이 불교 신자들이 그 불교 신자로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이제 일본 정부가 그 오쿠보
도시 미치가 당시 모든 일본의 정책을 이끌고 나갔던 유신삼걸 중에 하나죠
오쿠보 어 그 조선에도 가서 포교를 해 달라 그러면서 당시 일본 최대
불교의 최대 종파 아인 정토진종의 본산인 동본원사 히가시
홍간지의 조선 포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근데 그래서이 히가시
홍간지 동본원사 오쿠무라 엔진이라는 스님한테 당신이 좀 조선에
건너가서 포교를 해 주십시오 그럽니다 그런데이 사람들이 그냥 막연히
오쿠무라 인신을 뽑은게 아닙니다
오쿠무라 신은 그 멧돼지
할아버지가 사실은 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의 전국 시대
말기에 오다노부나가 그죠 오다노부 나가가 사실은 암살 당하지 않았으면 일본을
통일했을 전국 시대를 끝냈을 사람인데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을 암살이 되면서
그 밑에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실은 오다가 거의 다 이뤘던 그
천하 통일을 마지막 단계를 완성을 하는게 도요토미가 되는 거죠 도미씨 그
나가가 사를 당하니까 그 밑에 있었던 신하였던 오쿠라
카노스라는 사람이 불교의 귀의를 합니다 불교 승이 되 버립니다 자기 어 그 주인이 죽으니까 그러고 나서
조신이 법명을 받고서 1588년 선조 21년에 혼간지 10대 주지 교인이라
사람으로부터 황금과 아미타 열상을 받아갔고 조선으로 건 조선의 고독사는
저를 창건을 합니다 신는 그 조신의 후손입니다 직계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본 사람들은요 사실 조선학교의 관계를 면밀하게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거죠 그니까 옛날부터 관계가 있었던 히가시 홍간지 다시
가서 200년 전에 고독사란 절까지 관 참관했던 사람을 그 후손을
찾아내서 가서 포기를 해 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오쿠무라 인신이 부산으로
건너와서 부산에서 히가시 홍간지 부산 별원
동본원사 부산 변론을 창건을 합니다 그래서 그게
1877년 있니다이 절에 이동인이 나타나는
거죠이 절에 이동인 나타나서이 오꾸라 인신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일본 사람들은 뭐 그때나 지금이나 철저하게 기록을 합니다 그래서 그때에
오쿠무라 인신이 매일같이 기록을 하고 자기 동본원사 본부에 늘 보고를 했던
그 보고서의 그 포교 일지라게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부산
변론이 개설된 다음해인 메이지 11년 1878년 12월 1일 살을 에이는
추운 아침이었다 통도사의 승이라고 하는 이동이 은근 이 오쿠라의 지도를
받겠다고 결론을 방문하여 왔다 품격도 있고 문필 뛰어나 지금까지 오쿠무라
만난 승려와 취향이 달라서 오쿠무라 씨를 정중이 맞아 한동안 얘기를 하고
씨는 같다 그 후 신은 오쿠라의 후위에 힘입어 자주 내방하고 혹은
벼원에서 수일간 체제하 언제나 시사를 말하고 국제간의 정세를 말하지 불교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오구라는 날로 더욱 씨가 보통의 승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몰래 씨의 참 모습을
간파하고 하였으나 씨는 용이하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그냥 그야말로 거지 같은 행색을 하고
천민으로 차별 받으면서
그러고 다니던 이동인이 보니까 어느 날 새로 생기는 부산이란 도시
한복판에 아주 멋진 화려한 절이 생기는거예요 그리고 가서 들어가 왔더니 뭐 다 갖췄어 사실 불경 이런 거 언제 구경이나 제대로 된 불경 세트 같은 거 구경해 받겠습니까 너무나 안락하게 모든 거 편하게 해 놓고 나서 깨끗하게 해놓고 불 공들 들리고 있고 불교 공부를 하고 있고 참선 하고
이런 모습을 보고서는 얼마나 이동이 놀랐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들어가서 얘기를 시작하 말을 걸었던 거죠 그래서 대화를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이제 불교 얘기를 좀
했답니다 그래도 불교 성이니 당연히 근데 가은 갈수록이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뭡니까 국제 정세 이런 거에 관심이 오히려 많고 가면 갈수록 불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벌써 오쿠무라인 씨도 아 이거 보통 사람이 아니다 생각을 했었던 거죠 그래서 이제 몇 달을
지냈는데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또 나타나서 아유 나 단 분간 못
오겠습니다 그리고 홀연이 사라졌답니다
1879년 초여름에 나 경성 좀 다녀 올테니까 당분간 못 오겠습니다 하고
이제 사라졌답니다 그러고 나서는 8월 중순이 되니까 몇 달 있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났다는 거죠 그러면 이게 언제입니까요 사이에 뭡니까 이동인이
오쿠무라 인신부터 받은 책들 조선의 근대화 개화 뭐 이런 거에 대한
자료들을 뭐 진 책도 있었을 거고 사진 첩도 있었 이런 거를 다 가지고 한양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김옥균
박영호와 접촉을 해서 봉원 사에 모여서 자기가 가지고간 책들 보여 준 거죠 그러면서 그때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이 와 이거 너무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거 큰일났다
우리 이거 따라가야 된다 어떻게든지 배워야 된다 근데 이걸 어떻게 배워요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지금 일본에 누가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항은 했다지만 일본 사람들이
건너오는 것이지 부산에 건너오는 것이지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갈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여권도 없고 뭐
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죠 그런데 이거 건너가야 된다 그러면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이
이동인 테 임무를 줍니다 우리가이 사진하고 책으로 이제 봤는데 너무나
놀라운데 당신이 눈으로 보고 배워와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다시 이동이 웃의 신한테 나타납니다 8월 중순이 되자 연이 경성에서 내방하여
사람들을 멀리 하고는 지금까지 속마음을 말하기 꺼려 하였으나 이제야 그 시기가 도달하였다고 하고는 신은
박영효 김옥균 양씨의 의을 받고 일본의 정세 시찰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음 말하고 차제에 일본의 태도를 시찰하고 문물을 연구함으로써 조선의
문화 개혁에 공하고 싶다고 말하며 또한 박영혁 김옥균 양씨가 여비로
주었다고 하는 2천이 넘는 순금의 봉 네개를 보이면서 여행의 준비를
상담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이런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한테 가르쳐 준 일본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다 얘기를 했더니 이분이 나한테 어떻게서든지
일본에 건너가서 좀 일본을 정세를 살피고 와 달라 그러면서 자기한테이 금덩어리가 이제도 줬다 그러니 나중
1번에 보내 주십시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떡합니까 오쿠무라 인신이 교도의 동본원사 본부에 다
연락을 하고 다 논의를 한 끝에 그래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만 이거는 우리가
모험을 해서라도이 사람을 어떻게 쓰지 이렇게까지 일본을 배우겠다 그랬는데 우리가 일본에 가도록 해 줘야 되겠다
그래서 벙어리 거지로 변장을 시켜서 배에 태워서 1879년 6월에
일본으로 밀항을 시킵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을 한 다음에 교도의
동본원사 가시 관제에 가서 거기에서 일본말을 배우고 그리고 아예 일본의
승려로서 일본에서 이제 공 일본에서 도식을 해야 되니까 제대로 승려가
되려면 그러면 어차피 일본말도 배우고 일본말로 불경도 읽고 그러기 위해서
도식을 준비를 해서 1년에 걸쳐서 공부를 해서 1880년 4월 5일 도의 동보원
사에서 어 도식을 합니다 이때 도식을 하면서 본식 이름을 갔는데 그때 조야
동인 조선의 야인 아사노 도진이랑 이름으로 어 도식을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득도 시까지 하고 나니까 이제는 완전히 일본 말도 하게 되고
이가시 간지에서이 사람은 교도에 지금 둘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어떡합니까
도쿄에 있는 자기네 지원으로 보내는 거 그래서 도쿄에
보내서 이동인이 도쿄로가 가지고는
거기에서 모든 중요한 인물들을 다 만났다 일본의 지도자들을 다 만나고
일본의 지도자들만 만나는게 아니라 도쿄에 와 있는 상주하고 있는 서양의
외교관들도 다 만나고 그리고 그때 벌써 본이 조직을 해서 서세동점의
파고를 우리가 같이 힘을 합쳐서 막아야 되겠다라는 취지로 만든 흥하라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 흥해에 어 이동인 참석을
하면서 부산 동네에 구석에서
차별받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이동이라 인물이 사진과 그림 책을
통해서 일본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리고는 직접 본으로 건너와서 일본
말을 배우고 일반의 문화를 다 익히고 그러고는 아예 도교로 가서 도교에
있는 모든 정재계 인사들과 외국 사절 단들 아지도 다
[음악]
만납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근데 굉장히 적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기록들을 해 놓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
일본에어와 있었던 영국 어 외교관이 스 세터라는 사람입니다 미스 토라는
사람은 정말 어 일본에서 20 몇 년간 근무를 하면서 일본 부인도 없고
일본말 한문을 능숙하게 완벽하게 하게 되고 그럽니다 자
그래서이 세터도 가서 어 이동이 만납니다 그 만남의 장면을 세터는
이렇게 기록을 하 오늘 아침 아사노 조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의 예방을 받다 그는 아사노 조선의 야만을 또한 의미한다고 기지에
차게 설명하고 자신은 자기 나라 사람들을 몽시 목적으로 세계를 보기 위해 이곳에 몰래 왔노라고 말하다
그는 서툰 일본어를 구사하였으며
이들을 갖고 가서 외국의 위대함에 관한 얘기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싶다고
하고 또한 영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다 다음 일요일 아침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하다 그러니까 구한테 받았던 책자만이 아니라 아예 이제
영국 외교관 테 가서 영국의 발전상을 보여줄 수 있는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이 놀라운 산업 혁명을 우리가
직접 알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사진들이랑이 자료들 좀 달라 내가
서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안 믿을 텐데 허황된 얘기 말라고 안 믿을 텐데
거기 증거로 보여 줄 자료들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그걸 받아냅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일본을 배우고 그 조선에 절 전파 궁리를 하고 놀라운 인맥을
만들어 내고 그러고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그럼 이걸 어떻게 조선에
전파를 합니까 조선에 전파하는게 문제가 되는 거죠 근데 초선에 전파할
기회가 생깁니다 그게 언제 뭡니까 바로 1880년에 일본에 누가 옵니까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직후에 김기수가 1차 수신사로 왔었죠 아무것도 그때 안 보겠다 그러고 모든
걸 거부하고 돌아가서 아 일본이 하고 있는이 개화하고 이거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고정한 보고했던 그
김기수가 다녀간 이후로 로 4년 만에 2차 수 신사를 이제 보냈던 거죠
그래서 어 뭐 보낸 이유는 여러 가지 이제 뭐 세금 문제 이런 것 때문에 어 그 가지만 어쨌든 그래서
1880년에 8월에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일벌이 그러니까
이때에 이동인고 만나게 됩니다 자 근데 만나게 되는게 이것도 극적입니다
사실이 동이는 지금 미을 해서 온 사람입니다 아직도
나라에서는 국입니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허락해 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죠 뭐 수신사 이런 특별한 사람들 빼놓고는 자
그런데 자기는 허학도 안 받고 지금 일본에서 1년씩이나 있었는데 뭐
섣불리 나설 수가 없는 거죠 사실은 그랬는데 조선의 수신사 그전에 통신사
모두가 다 교도에 먼저 오면은 히가시 간지에 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김홍집
히가시 홍간지
머니다시보기 벌어지고 있었냐면 김홍집이 왔으니까
일본 측에서는 자 우리가 강화 도작 하면서 분명히 우리가 약속한게 세개
항구를 개항을 하겠다라고 조선이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은 개을
했습니다 그럼 이제 나머지 두 개를 더 개을 해야 되는데 4년이 지나서 1880년 됐는데도 조선은 더 이상
개을 안 해요 다른 항구를 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본은 계속해서
두 개 항구를 열어 달라고 그런 거죠 하나는 재물포 어쨌든 서울로 항상
가야 되니까 그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재물포 인천이 열려야 됩니다 그래서 재물포 열어달라 재물 또 하나 이제
산이죠 반대쪽에서 원산을 열어 달라고 이제 했던 건데 자 조선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다 재물 보는 우리 한양에서 너무 가까워서 절대 안 된다 이렇게 오히려 이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에 그 설득을 한하고 있는데 김홍이 말을 안 듣고 있는데 그때
옆에서 이동인 그걸 보고서 어그마 심 보고 일본 사람들고 내가 한번
들어가서 설득을 해보겠어 그래요 그랬더니 일본 사람들이 거꾸 아니 당신 지금 미에서 왔는데 김홍집이 너
너 이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러면 어떡 하려 그럽니까 아니라고 그래도 이동인 내가 어떻게 서든지 이건
설득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동인이 들어가서 김홍집
만납니다 그때에 일본 사람이 안 된다 그러니까 이동인이 이렇게 말을 하고 일본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을 하고 김홍집 만났다고 합니다 동인이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구근에 보답하고 불은에 부흥하고자 하는 것인데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조치가 있어도 우려하지 않 바라건데 수사를 배도록
하여 달라고 하다 하나부사 스기 모두 탄복하여 수사에게도록 하였다 동인이
일번 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니 수사가 상이 여겨 자세한 것을 물었다 동인이
무릎을 가까이 하여 지난해 나라를 위해 이곳에 와 교도 도쿄에 있으면서
일본의 귀관은 물론이고 제야의 뜻이 있는 사람들을 접하여 그 의도하는
바를 탐지하여 보니 조선에 대하여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 나라를 계명에 이르게 하는
것뿐이라 말하다 그런데 이번에 하나 부사의 말을 용납하여 수신사 이렇게서 귀국한 후에 적절한 주선이 있기를
바란다고 온갖 말을 다하여 설득하다 수신사 무릎을 치며 오호라 여기에
기나 아가 있어 구근에 보답하려 하니 감명 바이다라고 하다
그러니까 김홍집 하고 일본 사람들하고 앉아서 동본 원사에 앉아서 이러고
계속해서 일본 사람들은 설득을 하고 있는데 말을 안 듣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일본 옷을 입은 웬 사람이 들어와 갖고 한데 아니이 사람 뭐야
그런데 잠깐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는 김홍집한테 가까이 와서는 사실
저 조선 사람입니다 작년에 몰래 미에서 와서 일본에 대해서 배우려고
그랬습니다 이거 빨리 우리 조선에서도 따라야 됩니다 알려야 됩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이제 이렇게 얘기 하는 거죠 그랬더니 김홍집이 릎을 치면서 아 세상에 내가
지금 와 갖고 일본에 와서 몇 달 있으면 이렇게 답답하고 사실은 서양 사람들은 볼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누구 만납니까 하여장고 황준원 만나 갖고 조선 책략 이런 책들 받아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실 그때에이 사람이 조선책략 책을 받아가면서 빨리 열어야
되겠다 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에 큰 역할을 한게 또 이동인 이죠 이동인 만나
보니까어야 조선 사람인데도 일본 사람 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고 서양 사람들하고 이렇게 막역하게 지르면서
이런 거를 다 알 수가 있는 거구나 교류를 할 수 있는 거구나 걸 김홍집이 처음 안 거죠 자기는
못했는데 그러니까는 가자 내가 데려가겠다
그래서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일본 사람들 오히려 김홍집이 화를 내면서
미랑 한 놈 뭐야 하면서 잡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야 같이 가자 이거 알려야 되겠다 너 대단한
사람이다 웬 젊은 청년이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서 데려갑니다 그때이 동이는 그냥 가지 않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일본에 히가시 간지로 천엔을 돈을 빌려서 등유 등불을
케로신 램프를 가져갑니다 여러분 그 일본이 개항을 할 때에 뭐 페리
제독이 오게 되는 것이 미국이 고래 잡이를 해서 왜냐면 고래의 기름이 산업 혁명의 등유 역할을 했었다는 거
근데 그것이 없어지게 된 것은 펜슬 에서 석유가 나기 시작하면서 로크텔라
같은 사람이 석유를 발견해서 그거를 정지해서 등유는 거 만들어서 이제는 케로신 램프를 켤 수가 있는 거죠
등유 이런 그 촛불 밖에 못 키는 조선에 이런 거를 보여주겠다 그래서
히가시 간지에서 돈을 빌려 갖고 케로신 램프를 사고 성냥 시계 이런
물건들을 사는 한편 일본의 근대 과정에 대한 정보를 다 수집을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김홍집 따라가겠습니다 그랬더니 오쿠무라 그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한번 극비로
귀국해야 할 사정을 말하고 뭐지 하나 다시 오겠노라고 하니 말릴 수도 없는
일이어서 지난날 수신사 일행과 같은 배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출발을
합니다 이때에 일본 신문에 이동인이 조선에 다시 간다라는 거에
대한 기사를 씁니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선을 어떻게해서든지 열려고 그고 조선에서
수사가 김기수 187에 왔었는데 아무 효과 없었고 1880년에 또 김홍집
왔는데 김홍집이 와서는 김홍집 서양 사람들은 하나도 안 만나겠다 그러고 재물도 열지 않겠다 그러고 그런데
이동이 나서서 설득해 보겠다 그러면서 건너가게 됩니다 그랬더니
1번 신문이 이렇게 기사를 썼습니다 작년 9월 다녀간 조선사람 이이는
귀국했다 그는 발 하고 유럽 옷을 입었다 그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계몽시키다 한다 지난 9월부터 일본에 머무르고 있으며 조선의 문명화를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동이 치토세 마르르 호를 타고 12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육로로 한양으로 향했다 유럽 옷을 입고 허리에는 번쩍이는 금식의 줄을
차고 머리도 유럽식으로 한 그는 일본 사람처럼 도쿄 사투리를 쓴다 아무도 그를 조선 조선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매우 지적이 한 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니까 이제 빌린
돈으로 산 시계 금시계 같은 거 이렇게 탁 그 서양 신사들이 하듯이이 포켓에 넣고서 이제 금줄 늘어뜨리고
이런 거를 다 하고서 서양 정장을 하고 그 조선으로 건너갑니다 자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김홍집이 동인을 정한테 소개를 했고 그래서
고종이 그때 아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디어 설득을 당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일본하고 열어야 되겠다 그러면서 일본을 배우자 이때 통리
기모 암문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죠 여태까지 외국하고 외교를 하는 예조
통해서 하는 외교 이런 건 안 되겠다 조선 최초의 근데 정부 기구적 그걸 만들어서
거기에 그것이 청하고 일본하고 그다음에 다른 나라들 고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역할을 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거기에이 동인을 주사로 임명을 합니다 스님이 관리로
임명이 되는 거죠 사실 때까지만 해도 고정이 굉장히
개방적이었다 말을 수영을 하면서 빨리 조선에 건 일본에 건너갈 방법을 어
생각해라 그러면서 이때 이동이 주도를 해서 뭐를 만듭니까 신사유람단 꾸리기
시작을 합니다 조선의 4대부 들이 대거 아예 그냥 대규모 사절단을
차려서 일본에 가서 일본에 곳곳 샅샅이 한번 보고 오자 배우고 오자
이런 걸 해서 신사유람단 꾸리게 합니다 다 이동인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에 고정이이 정말로 우리도 개화를 해야
되겠다 1번을 배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조정회의 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나라의 풍습이 본래부터 이러하므로 세계 웃음거리가 된다 비록 서양 나라들에 말대 말하더라도 본래 서로
은혜를 입은 일도 원한을 품은 일도 없었는데 애당초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들이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강화도와 평양의 분쟁을 일으켰으니 병인 양육하고 신미 양육 뭐 이런 얘기들이 분쟁을 일으켰으니이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바이다 몇 년 전에 서양 사람들을 중국에 들여보낸 것은 중국의 의
자문에 의하여 좋게 처리하였다 대체로 양선이 서양 배가 우리 경에
들어오기만 하면 대뜸 사학을 핑계대는 말로 삼지만 삼은 난적이다 사이다
이런 얘기를 맨날 하는데 서양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서 사는데도 중국 사람들이 모두 사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른바 사악이란 배척해야 마땅하지만 불화가 생기기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얼마나 놀라운 변합니까 특히 나중에 고정하고 사실 다르죠 나중에 이모 고
갑신 정병 걷고 하는 그 그다음부터 위축되고 줄어드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걱정하는 그런 고정이 아니라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어 이거 우리 한번 해보자 서양이 우리한테 뭘
잘못했다고 맨날 사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괜히 심미 양하고 병인 양
때 싸움이나 하고 그 그럴 일이 뭐가 있느냐 자 그러지 말자 그러면서
이동인 보고 당신 우리 진짜 이제 간다 4대를
이제 신 라고 들겠습니다 그 신사들이 다 건너가면이 사람들이 뭐를 보고 어디 가서 뭐를 어떻게 할 건지
일정을 쭉 한번 일본 사람들하고 일정을 다 논의해서 만들어 갖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이동인이 같은 개화성 무블 탁정 10이라는 개화성고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합니다 이제는 어명을 바꿔서 가는 겁니다 근데
사실 이때에 부산을 통해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왜냐면 조선은 아직도 위정 사파가 꽉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부산에 건너가서 일본 건너간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원산으로 갑니다 동본원사 원산에 결론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원산이 개강될 것을 생각해서 그래서 이번에는 원산을 통해서 원에 원산에
있는 동본원사 원을 통해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으로가
갖고 또 예를 들어서 뭐 다 정부 사람 다 만나고 그러지만 세터를 다시
찾아갑니다 영국 영사 세터를 다시 사합니다 세터의 기록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산호 이동인지 지금 막
도착하여 여행 가방을 들고 밤늦게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국왕이 계몽되어 좋은 뉴스를 전하면서
국왕으로부터 받은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국왕은 그의 나라가 러시아에게 노출된 위험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수주일 이내 의 자유당이 현재 국 내각을 전복할 것이라고
하다라고 1880년 11월일 세터의 일기에 나옵니다 어 그리고 자기가 어
그 김홍집이 일본에 건너갔을 때 서양 외교관들 안
만났지만 중국 외교관 공사 하 여장하고 참사관 황준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빨리 열어야 되고 미국하고 연계하고 어떻게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된다라는 그 중국 사람들의 전략을 또 전달을 했었습니다 그게 조선 책략이 그래서 그 조선
책략을 김홍집이 가지고오고 이동인 데리고 올 때 같이 왔던 거죠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조선 조종에서
조선 책략을 읽으면서 와 러시아가 저렇게 블라디 보스까지 만들고 이게 남아에서 우리를 먹으려고 그러는
거구나 중국도 이렇게 경계를 하고 있고 일본도 경계를 하는 거구나 그러니까 같이 힘을 합쳐서 이거를
정신을 차 겠다 그 얘기를 고종이 다 읽 알았던 거죠 이제 드디어 조선
책략을 읽고서 그러니까 이제 그 얘기를 이동인 해서 이동인 그거를
이제 세트한테 가서도 야 우리 국왕도 화만게 아니라 이제 국제 정세도 알게 됐어 러시아의 남아를 막아야 된다는
거 이거 다 알게 됐다 그런 겁니다 그리고 그때에
김홍집이 이동이 일본을 밀명을 받고 고정의 밀명을 받고 본에 간다니까
한테는 나의 편지를 전달해 다오 그래서 하여장 테 전할 편지를 김홍집이 써서 이동한 줍니다 그
편지까지 동이는 세트한테 보여주면서 율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 실제로 진짜 이렇게 변하고 있다라는 거를 증거로서
세트한테 그 길도 어 그 글도 보여 줍니다 자 그래서 1880년 12월
1일 이동이 이번에는 히가시 홍간지 가서 2만엔을 빌립니다 지난번에는 1천엔
빌려 갔는데 이번에 이제 판이 졌으니까 2만 엔이나 빌려가서 여러 가지 근데 물품들을 전부 다 사
가지고 귀구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또 세터가 이렇게 썼습니다 아사노
오늘 아침 조찬 후 떠났다 그의 가장 최신 구상은 조선에서 가장 앞선 인사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곳에
데리고 와서 외국 사절들을 맺는 것이다 그리고
어 옵니다 1881년 1월 4일이 되니까 고정은
청에도 조선 학생들을 이제 보내겠다 발표를 하고
그리고이 나라들의 관계를 하기 위해서 통리 기무 화문을 만들고 거기에 이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이 이동인 그 참모 여튼 주사 참모로
이제 임명을 하고 더 놀라운게 뭔지 아십니까 1881년 1월
16일 재물 를 개항을 합니다 인천을 개항을 합니다 그러니까 김홍집이 몇
달 전에만 갔을 때만 해도 절대 안 된다고 그러던 거를 이동인이 들어가서 설득을 하고 그 이동이랑 같이 와서
조선 책략을 들고 고정을 만나서 고정이 그걸 다 읽고 조선 조종이 그걸 다 읽어보고 야 이렇게 해야
되는 거구나라고 하면서 통리 기문 암문을 만들고 청에도 유학생들을
보내겠다 그러고 일본에 대고 사절단을 보내겠다 그러면서 이거를 탁 꾸리기
시작하고 제물포도서관
일이 진행이 되니까 일본 측에서 깜짝 놀랐고 외국 사람들이 깜짝 놀랐답니다 여러분 다 이동인이라 사람 때문에
이게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조선은
철저하게 지금 의정 착사 파들이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 김홍집이 이동이라고 귀국하면 조선이란 황준이 쓴 책을 갖고 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습니다 조정해 전부 다 대신들이 같이 고정이라 읽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가 바깥으로 나가서
어떻게 됩니까 영남 만인 소라는게 일어나는 거죠 조선에 대부들이 유림이 대거
들고 일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금 뭐 서양 놈들하고 뭐를 하고
일본하고 뭐를 하고 뭐 러시아가 우리한테 뭐를 잘못했다고 러시아를 경를 하고 무슨 소리 하면서 영남
만인 만명의 대부들이 연해서 상소를 올리고
홍재학이란 사람이 홍학 상소가 올라고 그러면서 엄청난 개국 반대 운동이
벌어집니다 지금 강화도 조약을 통해서 이런 연 것도 부족해서 지금 당신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절대 안 됩니다 라면서 불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본 가서 배우자 않는 사람들 어떻게 됩니까 청나라에 건너가서 하는 거야 워낙 조선 사대부들이 4대를
하는 중국에 대해서 4대를 한 사람들이니까 뭐 청나라의 유학생들 파견한다는 거에 대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일본에 도대체 조선의 신사들이 건너간다 이게 도대체 무슨 당신 무슨
말하는 겁니까 그러면서 이제 반대가 일어나는 거니까 신사유람단 꾸리는 사람들이 야 이거 진짜 들키면
큰일이다 그러면서 조심 아예 일본 나간다는 소리도 못해요 그냥 동래부
이런데 시찰하러 간다 부산 시찰하러 간다 그러면서 그것도 각게 전투 한
사람 한 사람 따로따로 단체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어느 날 어디로 집결해 이래 갖고 간신이 모여서 몰래
배를 타고 그러고 일본에 건너가는게 그게 신사 유란다입니다
그런데 1800 81년 3월이 동인이
행방불명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다시는 우리가 그 흔적을 못 봅니다
얼마나 적이 많았겠습니까 뭐 대원군뿐만 아니라 뭐 사실 그 당시에 유림 사대부 전부 다가 이동인 저것
왼 천한 어 중놈이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렇게
했겠죠 그러니까는 어 표적이 됐을 건데 또 그 당시에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 김홍집이 그랬다 뭐 이런 얘기들도 있는데 어 김웅이 너무 시생을 해서 자기가 소개를 다했는데
자기보다는 형이랑 이런 사람들을 추정을 하니까 이제 뭐 죽였다 뭐
이런 이런 설도 있습니다 근데 다만 뭐가 됐든지 이동이라 사람이 그 진취적인 기상 겁없이
오구라 엔신 찾아가고 겁없이 일본 미을 하고 겁없이 김홍집
앞에 나타나고 겁없이 와서 또 신사유람단 꾸리고 하는 그 그 기질
때문에 사실은 아무것도 꺼리지 않았죠 위험하다 위험하다 다 할텐데이 사람이
전혀 꺼리지 않고 숨지도 않고 그러고 다녔답니다 그러니까 누가 사를 하려고
했었으면 사실 굉장히 쉬운 표적이었던 것이고 뭐 불교 스님 중인데 뭐
천민인 사라지는 거에 대해서 죽이는 거에 대해서 누가 수사를 할 것도
아니고 어 그러니까 그렇게 어 비극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어
사라집니다 그 대신 이동인이 만들어 놓은 신사들이
건너오면 어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십시오 뭐를 구경시키고 했든 그대로
신사유람단이 건너가서 합니다 그래서 일본이 소개해 주는 거 다 구경하고
서양 사람들 다 만나보고 중국 사람들 다 만나보고 내무성 농무성 뭐 전부
다 배 만드는데 철도 모든 거 다 구경을 하고
그리고 일준 윤치호 이런 사람들을
최초의 유학생으로 남기는데 그게 누가 해 줍니까 후크 사와 키치가 해주는
거죠 후쿠사 키치가 왜 그걸 해 줍니까 이동인이 수차에 와서 부탁을 해서 우리나라에서 유학생들이 올테니까
당신이 지금 개어 의숙 개혁 대학 이게 전신이 만들어서 학생들
훈련시키고 있는데 거기서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해서 다 후구가 치가
받아주는 거죠 일주는 개 의수에 그리고 윤치호는 어 친구한테 부탁을
동임 사라고 영웅 교육하는 때 또 어 그 보냅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이 열리기
시작하고 어 그렇지만 이동인 그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이동인이
없었으면 조선의 개화파는 없었습니다 물론 뭐 훨씬 나중에
생겼을지 모르겠지만 이동인이
과감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전혀 막혀 있던 그 통로를 다
뚫으면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일본하고 조선을
오가면서 설득을 하고 모든 기회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조선이 본격적으로
일본하고 열리고 그때에 김옥균 서재필
박용효 윤치호 일준 이런 사람들이 다 건너가서 동인이 만들어온 네트워크를
통해 가지고 거기서 공부하고 일하고 교류하게 됩니다 이동인이 후쿠사 기치를 처음
만난 거는 1880년 4월이었다 기치를 만나서 독립정신을
배우게 되는 것은 1882년 6월 1일이니까 사실은
이동민이 2년이나 먼저 후자를 만나고 개화사상을 흡수를 합니다 그 해서
조선의 최초의 화인 화승이 아니라 어
화인 근대 사회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를 최초로 경험한 조선 사람은 바로
이동인이라는 화승이 이번 시간에는 어 이동인이라는
참 길이나 우리 근세사의 어 정말 놀라운 역할을 해준 인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동을 설해 일본에 건너가게 했던 바로 그
김옥균 또 하나의이 근대의 길이나 어 김옥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김옥균은 어떻게 보면이 동인이 열어 놓은 그 길을 그 길을 그대로
밟으면서 그다음 단계에 개화파의 형성 조선의 근대화 담론을 활짝 여는 어
역할을 하는 그런 일입니다 다음 시간에 김옥균에 대해서 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해 보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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