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e Jungha
8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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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역사.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저 참혹한 싸움터로 울며울며 당신 곁을 떠나는" 노동자 아들과 "오손도손 평온한 가정을 바라는" 어머니의 갈등을 박노해가 이렇게 토해냈을 때, 80년대 우리 사회는 된통 육중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의 당혹과 혼란이 가시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운동의 '과학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이해가 옳든 그르든 노동자 시인이 제기한 '모성애의 이적성'은 사회 인식에서 감상과 과학의 분별을 일깨운 중요한 고비가 되었다. (정운영, “나는 네가 아닌가?”에서, 한겨레 1997. 1. 6.)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정운영 선생의 칼럼을 읽으면서 낯이 뜨거워지다가, 문득 복음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느새 유명인사가 된 아들을 보겠다고 먼 나사렛 땅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갈릴리까지 걸어서 왔지. 동굴 입구에서 어느 제자에게 소식을 전하니 제자는 깜짝 놀라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냐? 여기 곁에 있는 과부와 벙어리, 소경과 앉은뱅이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다. 모르는 사람들이니 돌아가라고 해라.”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국가를 그리다가 정치가들에게 일체의 사유재산은 물론 가족을 이루는 일까지도 원천 금지했다. 가족을 이루면 반드시 타락한다는 근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악명 높은 “부인공유제”도 이런 논리에서 나왔다.)
친아들이자 왕위를 이을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가 깊은 고민에 빠져 출가를 모색한다는 소식을 듣자 부왕(父王)은 계책을 시행한다.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왕자와 결혼을 시킨 것이다. 왕자비는 싯다르타의 아들을 낳는다. 그 아들을 보고 싯다르타는 “라훌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장애물”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 이름이 장애물이라니,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싯다르타는 처자식도 버리고 야밤에 궁성을 탈출하여 고행의 수도승이 된다. 먼 훗날, 싯다르타의 부인과 라훌라는 머리칼을 깎고 부처의 제자가 된다.
“타락”이라고 하면 뭔가 음험하고 사악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 대부분의 변형은 매우 느리고 점층적이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느낌마저 준다. 우리 모두는 한줌 신생아로 태어나 지루하게 자라난다. 그러다 명절날에 만나는 큰아버지, 이모가 저울이다. “와! 진짜 많이 컸네!” 단절적 변화는 예외상황일 뿐이다. 모든 예외상황은 역설적으로 규칙성을 강하게 증명한다. 연속적이고 부드럽게 우리 모두는 조금씩 전향하고 조용하게 타협하면서 차츰 젖어든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 대부분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죄는 아니다. 주름살이 접히고 피부가 늘어지고 배가 나오거나 흰머리가 번지는 일이 죄가 아니듯이. 문제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애저녁에 변질된 자가 아직도 순수한 척 굴 때 진실을 뻔히 아는 자들의 얼굴은 굳어진다. 순순히 인정하고 뉘우치는 사람을 매몰차게 가격하는 사람은 아주 없지는 않아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누구나 자책감을 창자처럼 매달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뻔뻔한 사람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망함과 황당함을 느낀다.
갑자기 조금 다르게 들리지만, “노동자에겐 조국이 없다.” 이 말은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 노동자에겐 민족이 없으며 노동자에게는 가족도 없어야 할지 모른다. “만국의 노동자계급”이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사해동포주의요 코스모폴리타니즘이다. 비록 제2 인터내셔널이 붕괴되고 말았지만 본래 노동자계급은 국경 따위로 가두어질 수 없는 전지구적이고 계급적인 동지체(同志體)다.
그러나 1948년 이후 미군정을 거쳐 “건국”된 이 나라의 대표적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막대한 돈을 벌어 왔다. 마가렛 대처가 “사회라는 것은 없다”고 부르짖었는데 그 연장선에서 언제나 이 나라에서는 “내 가족”만이 불가침의 성역이었다. 앞서 예수의 일갈을 거론했지만 이 나라의 교회는 가족주의의 기복신앙 매표소에 지나지 않았다. 하기사 입시지옥이나 부동산투기 등도 죄다 “내 가족 제일주의”라는 반석 위의 장대한 건축물들이 아닌가. 정부부처명도 “여성가족부”인 이 몹시도 정겨운 나라에서 말이다.
“믿을 건 피붙이뿐”인 사회는 지옥이다. 사회도, 남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전쟁터다. 각자도생의 지옥도 속에서 최후의 진지와 참호로서 오로지 가족의 번영과 안식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극우적 경계심으로 난민과 이주민을 비하하고 차별한다. 중국을 일상적으로 폄하, 조롱하는 언설은 급기야 “부정선거론”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북한이든 조선족이든 이제는 이념이 아니라 가난의 문제로 기피되고 극혐 당한다. 이런 나라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수년 째 계류 중인 이유를 굳이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조국 전 의원이 실정법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관심이 없다. 윤석열과 보수집단의 반동적 총공세도 나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내내 불편하고 힘이 들었던 건 더 근본적인 층위였다. 조국의 행위는 설령 그것이 위법의 영역이 아니고 모든 게 극우적 흉계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가 전혀 불온하거나 급진적이지 않았다는 증명이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자기계급의 이해를 배신하지 않았고 한국의 가족주의에 충실한 가장이었으며 입시제도의 규칙을 정교하게 활용해 세대 간의 계급 재생산을 성실히 도모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제시해 온 일부 가치와 어긋난다. 그의 과거행적은 분열적이다. 그의 몸과 일상이 그가 선호해 온 가치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분열상의 난점을 해소하고자 외부의 타켓을 동원한다. 극우보수집단이다. 물론 그의 지적 일부는 사실이다. 국민의힘과 조선일보 등지는 자신들을 위해 경쟁세력을 맹렬히 더럽히고 짓이겼으며 그로 인해 조국의 인격권이 침해당했고 그 가족이 치룬 댓가는 엄청났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그러한 댓가조차 본래 지녀본 일이 없던 사람들은 이 진창싸움을 멀리서 냉랭하게 스쳐보았다. 그들은 엘리트들의 하향동정(downward-sympathy)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아니면 자신들과는 무관한 귀족들 간의 패싸움이라 여겼는지 불신에 찌든 채 본인들의 비루한 일상을 묵묵히 감내하는 중이었다.
조국의 딸, 조민 씨가 고졸이 되었으며 의사면허도 박탈당했다는 애절한 사연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고졸이나 다름없는 비명문대 출신들과 실제로 원래부터 고졸인 사람들에게 이런 뉴스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뉴스에 등장하는 각종 용어들의 범람은 또 무엇이었나. 한영외고 국제반이며 의학저널 논문 1저자며 고급인턴쉽이며 눈부신 수상경력과 봉사활동 등의 낱말들은 교내 분리수거나 동네사회복지관 방문이 스펙의 전부인 “일반고” 아이들에게 별세계의 기막힌 스토리텔링이었다.
누군가는 검찰총장과 한동훈의 딸은 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언설은 조국과 심우정과 한동훈이 결국 같은 동네 사람임을, 평범한 우리들과는 출발부터가 아예 다른 종자임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증거목록에 다름 아니었다.
재차 삼차 반복하지만, 한국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대결의 구도와 조국 사태가 품고 있는 계급적 함의는 전혀 별개의 논점인데 일명 “조국 논쟁”에서는 이 모든 얘기들이 서로 동문서답처럼 독백과 방백 수준에서 마구 뒤섞이고 있다.
조국을 비판적으로 말하면 “국힘의 프락치”가 되고 “순진한 원론주의자”가 되며 “저 혼자 잘난체하는 관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조국을 누구라고 말하는 자들은 사실 조국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본인인증하고 있다. 자신의 계급적 가담과 자신이 중시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서슴없이 자백하고 날인하는 것인 줄 알고서 하는 말들일까.
사람들은 천재도 아니지만 바보도 아니다. 이 모든 소동의 배후에 윤석열과 검찰만 도사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온라인에서나 들끓는 논란들과는 전혀 달리 일상의 무표정한 다수의 침묵이 더 두렵다. 사람들은 엷게 비웃으며 외면한다. 어차피 그런 줄 이제 알았느냐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관심은 그들을 “국민”이라 부르든 “민중”이라 부르든 상관없이 강고하다. 세상을 비판하고 그 세상을 바꾸자던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바뀐 것을 인정하기보다 더 악독한 사람들을 끌고 와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가린다.
인간의 역사는 수천 년이 흘렀어도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구도 안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플라톤이 우려한 이상국가 건설의 전제조건이며, 싯다르타가 제 아들 이름을 “장애물”이라 지은 것이며, 예수가 동굴 밖의 가족들을 매몰차게 내친 일은 박노해가 겨냥한 “모성애의 이적성”을 선명하게 증거한다. 80년대의 근본적이고 전복적인 비판으로부터 2025년 오늘의 우리가 얼마나 퇴행하고 후퇴했는지 실감하는 일은 괴롭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할수록 좋은 세상”이라는 말이 대관절 무슨 뜻인지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답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제 자식만 감싸고 제 가족만 위해 살아가는 일을 장하고도 아름다이 여긴다. 혁명은 무슨 개뿔인가. 진보정치는 무슨 개뿔인가. 이제 우리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오늘의 우리는 전혀 불온하지 않다. 드디어 우리는 모두 잘 길들여졌다. 우리는 순수하고 선량하며 바람직한 시민이 되었다. 결국 세상이 이겼다.
최근 읽은 글 중에 가장 빼어나고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좀 씨니컬하지만.
참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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