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식민지’라는 ‘민중론’, 민중사학 뿌리 돼
⑤-1. ‘민중사학’의 등장
정경희 영산대 교수
입력 2015-11-02
80년대 말 젊은 역사학자들, ‘민중사학’ 앞세워...기존 역사연구 비판
▲ 현재 사용 중인 검인정 고교 한국사교과서. ⓒ MBN 캡처
[편집자 주]
정부가 중학교 역사 및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방침을 밝히면서 이른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과, 전교조 및 친전교조 성향의 학부모단체, 수정주의 민중사관이 장악한 국사학계는 정부의 방침을 '유신독재 시대로의 회귀'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필진조차 구성되지 않은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친일 독재 미화'라는 낙인을 이미 찍었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이 되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것이란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지만, 그 파급력은 매우 크다. 이미 상당수 국민들이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전체주의를 '살기 좋은 복지 국가'로,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역사왜곡 실태는 일반 국민과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진보를 자처하지만 실제는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의 역사왜곡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 국민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비뚤어진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국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에 야당과 국사학계의 주장에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벌어지는 현재의 논란은, 속칭 진보를 자처하는 북한 전체주의 추종세력과 자유민주주의 보호 세력이 벌이는 사상-문화전쟁이다.
자유를 훼손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의 전달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질식시키려는, 전체주의 추종세력의 역사-사상왜곡과 거짓된 선전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바로 알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이에 뉴데일리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어련 과정을 거쳐 편향성을 띠게 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한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이 논문은 2년전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라는 제목의 서적으로 출간된 상태다.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뉴데일리는 위 책의 저자인 정경희 영산대 교수와, 이책을 펴낸 비봉출판사(대표이사 박기봉)의 허락을 얻어, 위 책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연재한다.
이 책은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이념적 편향성의 뿌리를 규명하고 있다. 나아가 검인정 한국사교고서를 오염시킨 이념적 편향성의 근원이 친북-반대한민국적 민중사관이란 사실과, 민중사관이 어떻게 한국사교과서에 녹아들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인 정경희 교수(영산대 자유전공학부)는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서울대와 서강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탐라대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역사학과 객원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정경희 교수는 처음 <미국을 만든 사람들>, <中道의 정치: 미국 헌법 제정사> 등의 저서 및 논문을 통해, 주로 미국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나 정경희 교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절감하게 됐다. 대학생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편향됐는지를 깨달은 정경희 교수는 이후 역사교과서에 관심을 가졌다.
정경희 교수가 쓴 역사교육 관련 논문으로는 <미국 역사표준서 논쟁 연구>(《역사교육》 제89집, 2004년 3월), <역사교육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이념논쟁 비교>(《미국학논집》 제40집 3호, 2008년 겨울), <세계사 교과서 속의 미국: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역사교육》 제114집, 2010년 6월) 등이 있다.
정경희 교수가 2013년 집필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는 학술논문이면서 동시에 대중적 성격도 갖고 있다. 이 책은 역사교과서 연구에 천착해 온 정경희 교수가 일반국민들에게 선사하는 값진 성과물이다.
이 책을 통해, 일반 국민과 독자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바탕위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논쟁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귀한 연구 결과물의 연재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정경희 교수와 비봉출판사 박기봉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목 차 -
머리말
1장.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1969):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시작
2장. 1970년대 국사교육의 강화: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조장
3장. 상고사 논쟁과 국사 교과서 파동: 중진급 역사학자의 교과서 집필 기피
4장. 제4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 개정(1982)
5장. 제5차 준거안 작성(1987): 국사 교과서 편향의 시작
6장. 민중사학의 대두
7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1988)과 대중용 국사 교과서의 발간
8장. 제5차 국사 교과서의 서술 변화와 국사 교과서에 대한 계속적 비판
9장. 준거안 파동(1994)
10장.‘한국 근·현대사’과목의 신설과 제7차 준거안의 편향성
11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사 교과서에 대한 끝없는 비판(2001)
12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과 그로 인한 교과서 파동(2002~2008)
13장. 한국사 교과서의 여전한 이념 편향성
6장. 민중사학의 대두
1990년에 발행된 5차 국정 국사교과서는 1980년대 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변화를 반영하여 서술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침 5차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이 작성된 1987년 6월은 1980년 이래 군부정권에 대한 반감이 ‘6월 민주 항쟁’으로 분출된 시점이기도 하다.
준거안이 작성된 1987년 6월부터 5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가 발행된 1990년 사이에 한국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국사교과서 서술에 영향을 미친 1980년대 말의 사회 변화로는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했다는 것, 그리고 이들 민중사학자들에 의해 국사교과서 국정제에 대한 비판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의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민중사학의 대두에 대해 살펴보자.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한국사회의 당면 과제와 현실 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성장하였고, 이것은 학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하여 민족·민주운동이 제기하는 새로운 현실 인식에 충격을 받으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진보좌파 세력이 대두했다.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움직임의 확산은 역사학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초반, 역사학자 중 진보좌파 성향의 젊은 연구자들이 기존의 역사연구를 비판하면서 이른바 ‘민중사학’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실변혁과 분단의 자주적 극복을 목표로 내세우고, 이를 실천할 변혁의 주체로 민중을 설정했다.
이들의 민중주의적 민족주의는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민중사학’으로 대두했다.
1. 민중사학이란 무엇인가?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선언적 명제에 기초하여 “역사를 민중의 주체성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의 전망을 모색하는 실천적인 학문 경향”이라고 규정된다.(※ 민중사학자인 김성보가 ‘민중사학’에 대해 하나의 ‘학문 경향’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 이유는, 실제 ‘민중사학’이 명확한 하나의 사관 또는 역사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사학’은 사실상 실천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인식을 지향하는, 그 안에는 다양한 조류가 섞여 있는, 진보적인 역사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성’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성보, 「‘민중사학’ 아직도 유효한가」, 『역사비평』 14, 1991, p.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중사학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1970년대의 민중론이 한국사회를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사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론은 한국사회의 특수한 조건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한국사회는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사회라는 점, 이러한 조건에서는 서구와 같은 자립적 자본주의에로의 발전전망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따라서 한국에서는 독자의 발전전망, 변혁의 전망을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한국사회에서의 변혁이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양자를 통일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도달하였고, 그 극복의 주체로서 두 모순을 함께 지양해 나갈 ‘민중’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성보에 따르면 ‘민중사학’의 공통분모는 첫째, 한국사회의 발전경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아닌 제국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이라는 점, 둘째, 한국사회의 발전경로를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 규정한다고 할 때 그 주체는 민중이라는 점이다. 김성보, 같은 논문, pp.49-50.)
민중사학에서 말하는 민중이란 근대 역사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도식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배계급과 기층 민중의 대립구도라는 도식으로 파악한데서 비롯된 용어이다.
2.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전반의 민중사학론
민중사학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몇몇 학자들이 이미 민중사학론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제3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집권층의 한계가 드러나고 노동운동·주민운동 등이 활성화됨에 따라 학계에서는 일반 대중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사회과학계에서는 ‘민중론’이 제기되었으며,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이와 보조를 같이 해 민중사학론이 제창되었던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중사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전반에 민중사학론을 제창한 주역으로는 강만길, 이만열, 정창렬, 조동걸 등을 꼽을 수 있다. 민중사학론은 크게 강만길의 분단사학론과 이만열, 정창렬의 민중적 민족사관으로 나눌 수 있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뉴시스
강만길은 누구인가? 1970년대의 한국사학계는 1960년대에 제시된 식민사관 비판과 새로운 한국사상의 수립이라는 과제의 연속선상에서 1960년대의 내재적 발전론을 이론적으로 더욱 다듬고, 실증적으로 더욱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강만길은 당시에 김용섭 등과 더불어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에 주력했던 인물이다.(※ 박찬승, 「분단시대 남한의 한국사학」, pp. 341, 343.)
강만길의 분단사학론은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에서 이루어진 한국사교육 강화에 대한 대응으로 제창된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즉 1970년대 초 체제의 경직화 과정에서 정권측이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민족사관의 정립’을 내세우면서 한국사 연구비 지원을 크게 강화하였는데, 이는 한국사 연구 성과와 연구 인력이 증대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민족사학의 방향 정립이 시급한 과제로 요청되면서 1975년 전국역사학대회에서 강만길의 ‘분단시대 사학론’이 제창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만길의 분단사학론은 정권 측의 ‘민족사관 정립’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나아가 ‘통일운동의 일환으로서의 역사학’이라는 당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남지대, 「고교 국사교과서 근현대편의 서술과 문제점」, 『역사비평』 3, 1988, pp.291-292. 강만길의 사학론은 학자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박찬승은 ‘분단사학론’, 남지대는 ‘분단시대 사학론’, 김성보는 ‘분단시대사학론’과 ‘통일지향의 역사학’을 병용한다.)
강만길의 분단사학론은 기존의 ‘민족사관’의 논의의 폭을 식민사관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통일지향사관의 수립으로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의 시대를 ‘분단시대’ 혹은 ‘통일지향의 시대’라고 명명하고, 분단시대의 역사학은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통일운동의 일환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강만길의 분단시대론은 이후 여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도 ‘분단시대의 학문적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역사학에서의 현재성의 반영 방법, 역사학에서의 가치판단의 문제, ‘분단시대 역사학’의 구체적 연구방법론 등을 둘러싸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만길의 분단시대론은 이후 여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도 ‘분단시대의 학문적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역사학에서의 현재성의 반영 방법, 역사학에서의 가치판단의 문제, ‘분단시대 역사학’의 구체적 연구방법론 등을 둘러싸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박찬승, 「분단시대 남한의 한국사학」, p.341.)
▲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 네이버 화면 캡처
이만열은 1980년대 초에, 민족의 범주에는 계층적 의미에서 볼 때 민중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서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하는 민족사를 제창하였다.
정창렬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고유한 민중의 존재를 설정하였다.
그는 한국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봉건사회를 청산하지 못한 채 세계 제국주의에 편입, 종속됨으로써 인간해방, 계급해방, 민족해방의 과제를 짊어지게 되었으며, 그 과제 해결의 주체는 민중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조동걸도 ‘민중’은 조선후기 이후에 형성된 근대사적 실체로서 불특정한 대중에서 운동주체로 성장한 것이라고 보았다.(※ 박찬승, 같은 논문, p.353.)
이상의 연구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사학’이라기보다는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으로 정의할 수 있다. 민족주의사학, 또는 민족사관의 틀 안에서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는 시대적 경향을 수용한 것이었다.
3. 민중사학의 성격과 문제점
1980년대에 ‘민중사학’을 표방하고 대두한 새로운 학풍에 대하여 기존 한국사학계에서는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이들의 세력 결집을 ‘진보학풍’의 대두로 간주하고, 기존의 보수학계와 함께 자유·민주의 원칙 위에서 공존과 경쟁을 통해 한국사학의 발전을 기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사관은 네오마르크시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낡은 한국판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며, 이들의 역사연구는 현재 한국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민중해방 내지 민중혁명 전략을 모색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했다.(※ 박찬승, 같은 논문, p.354.)
흥미로운 것은 민중사학을 두고 한편에서는 ‘진보’로,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판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즉 민중사학에 관한 논의에서 진보사학이란 마르크스주의사학에 다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민중사학은 한국 마르크스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이 접목되어 나타난 것이다.
민중사학의 역사방법론과 사관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적 유물론(史的 唯物論)에 입각하고 있다.
민중사학자인 연세대 김성보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의 진보적인 역사학계가 역사방법론, 나아가서는 사관의 토대를 주로 사적 유물론에 두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김성보는 민중사학이 아직도 고전적인 맑스-레닌주의운동론의 틀에 맞추어 한국사를 설명하려한다는 것을 비판한다. 김성보, 앞의 논문, pp.53-54.)
좁은 의미의 민중사학은 민중적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면서도 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민중의 자기 해방 과정을 보다 중시하는 특징을 지닌다.
민족 해방은 한 과정이며 보다 궁극적으로는 민족 내부의 사회경제적 갈등, 불평등까지 해소되어야만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적 유물론의 시각과 부분적으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중사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또한 민중사학은 한국 근현대사를 기본적으로 반봉건의 근대화와 반제항쟁 과정으로 파악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민중사학자들은 ‘유물사관’이나 ‘사회 구성체 이론’과 같은 좌파 이론을 도입하는 실험도 서슴지 않았다.(※ 이주영, 앞의 논문, p.149.)
민중사학의 연구 과제는 민주화, 자주화, 민족통일로 집약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므로 민중사학의 첫째 과제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이었다.
강만길 교수는 1970년대부터 기존의 한국사 연구가 분단 현실을 외면하는, 따라서 분단 체제를 정착, 지속시키는 데만 이바지하는 빗나간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대신에 그는 분단 체제 극복을 위한 사론, 즉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지도 원리로서 올바른 민족주의를 수립하고 그러한 목적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하는 국사학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강만길의 이러한 제안은 역사학이 현재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통일에 도움이 될 사실(史實)만을 골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주영, 앞의 논문, p.151.)
이처럼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상과제로 삼는 까닭에 민중사학자들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결정적인 결함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술한다는 역사학의 근본 목표로부터 크게 벗어남으로써 역사학을 명분 또는 염원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 위에 올려놓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현재로서 통일은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대상일 뿐인 데, 그것을 향해 역사 연구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연구자의 희망에 따라 곡해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중사학자들은 통일의 가능성을 찾는 데 집착하다 보니까 해방 직후의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김구, 김규식, 여운형 같은 중도적 인물들이 추앙받고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역사 인식의 산물이다. 이주영, 앞의 논문,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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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정부가 중학교 역사 및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방침을 밝히면서 이른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과, 전교조 및 친전교조 성향의 학부모단체, 수정주의 민중사관이 장악한 국사학계는 정부의 방침을 '유신독재 시대로의 회귀'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필진조차 구성되지 않은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친일 독재 미화'라는 낙인을 이미 찍었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이 되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것이란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지만, 그 파급력은 매우 크다. 이미 상당수 국민들이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전체주의를 '살기 좋은 복지 국가'로,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역사왜곡 실태는 일반 국민과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진보를 자처하지만 실제는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들의 역사왜곡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 국민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비뚤어진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국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에 야당과 국사학계의 주장에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벌어지는 현재의 논란은, 속칭 진보를 자처하는 북한 전체주의 추종세력과 자유민주주의 보호 세력이 벌이는 사상-문화전쟁이다.
자유를 훼손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는 보호받을 가치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의 전달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질식시키려는, 전체주의 추종세력의 역사-사상왜곡과 거짓된 선전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바로 알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이에 뉴데일리는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어련 과정을 거쳐 편향성을 띠게 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한 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이 논문은 2년전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라는 제목의 서적으로 출간된 상태다.
▲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책 표지. ⓒ 비봉출판사 제공
뉴데일리는 위 책의 저자인 정경희 영산대 교수와, 이책을 펴낸 비봉출판사(대표이사 박기봉)의 허락을 얻어, 위 책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연재한다.
이 책은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가 안고 있는 이념적 편향성의 뿌리를 규명하고 있다. 나아가 검인정 한국사교고서를 오염시킨 이념적 편향성의 근원이 친북-반대한민국적 민중사관이란 사실과, 민중사관이 어떻게 한국사교과서에 녹아들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인 정경희 교수(영산대 자유전공학부)는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서울대와 서강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탐라대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역사학과 객원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 정경희 영산대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정경희 교수는 처음 <미국을 만든 사람들>, <中道의 정치: 미국 헌법 제정사> 등의 저서 및 논문을 통해, 주로 미국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나 정경희 교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 중고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절감하게 됐다. 대학생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편향됐는지를 깨달은 정경희 교수는 이후 역사교과서에 관심을 가졌다.
정경희 교수가 쓴 역사교육 관련 논문으로는 <미국 역사표준서 논쟁 연구>(《역사교육》 제89집, 2004년 3월), <역사교육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이념논쟁 비교>(《미국학논집》 제40집 3호, 2008년 겨울), <세계사 교과서 속의 미국: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역사교육》 제114집, 2010년 6월) 등이 있다.
정경희 교수가 2013년 집필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는 학술논문이면서 동시에 대중적 성격도 갖고 있다. 이 책은 역사교과서 연구에 천착해 온 정경희 교수가 일반국민들에게 선사하는 값진 성과물이다.
이 책을 통해, 일반 국민과 독자들이 현행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바탕위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논쟁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귀한 연구 결과물의 연재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정경희 교수와 비봉출판사 박기봉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목 차 -
머리말
1장.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1969):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시작
2장. 1970년대 국사교육의 강화: 민족주의적 국사교육의 조장
3장. 상고사 논쟁과 국사 교과서 파동: 중진급 역사학자의 교과서 집필 기피
4장. 제4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 개정(1982)
5장. 제5차 준거안 작성(1987): 국사 교과서 편향의 시작
6장. 민중사학의 대두
7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1988)과 대중용 국사 교과서의 발간
8장. 제5차 국사 교과서의 서술 변화와 국사 교과서에 대한 계속적 비판
9장. 준거안 파동(1994)
10장.‘한국 근·현대사’과목의 신설과 제7차 준거안의 편향성
11장. 민중사학자들의 국사 교과서에 대한 끝없는 비판(2001)
12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과 그로 인한 교과서 파동(2002~2008)
13장. 한국사 교과서의 여전한 이념 편향성
6장. 민중사학의 대두
1990년에 발행된 5차 국정 국사교과서는 1980년대 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변화를 반영하여 서술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침 5차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이 작성된 1987년 6월은 1980년 이래 군부정권에 대한 반감이 ‘6월 민주 항쟁’으로 분출된 시점이기도 하다.
준거안이 작성된 1987년 6월부터 5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가 발행된 1990년 사이에 한국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국사교과서 서술에 영향을 미친 1980년대 말의 사회 변화로는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했다는 것, 그리고 이들 민중사학자들에 의해 국사교과서 국정제에 대한 비판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의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민중사학의 대두에 대해 살펴보자.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한국사회의 당면 과제와 현실 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성장하였고, 이것은 학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하여 민족·민주운동이 제기하는 새로운 현실 인식에 충격을 받으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진보좌파 세력이 대두했다.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움직임의 확산은 역사학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초반, 역사학자 중 진보좌파 성향의 젊은 연구자들이 기존의 역사연구를 비판하면서 이른바 ‘민중사학’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실변혁과 분단의 자주적 극복을 목표로 내세우고, 이를 실천할 변혁의 주체로 민중을 설정했다.
이들의 민중주의적 민족주의는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민중사학’으로 대두했다.
1. 민중사학이란 무엇인가?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선언적 명제에 기초하여 “역사를 민중의 주체성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의 전망을 모색하는 실천적인 학문 경향”이라고 규정된다.(※ 민중사학자인 김성보가 ‘민중사학’에 대해 하나의 ‘학문 경향’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 이유는, 실제 ‘민중사학’이 명확한 하나의 사관 또는 역사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사학’은 사실상 실천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인식을 지향하는, 그 안에는 다양한 조류가 섞여 있는, 진보적인 역사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성’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성보, 「‘민중사학’ 아직도 유효한가」, 『역사비평』 14, 1991, p.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중사학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1970년대의 민중론이 한국사회를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사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론은 한국사회의 특수한 조건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한국사회는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사회라는 점, 이러한 조건에서는 서구와 같은 자립적 자본주의에로의 발전전망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따라서 한국에서는 독자의 발전전망, 변혁의 전망을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한국사회에서의 변혁이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양자를 통일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도달하였고, 그 극복의 주체로서 두 모순을 함께 지양해 나갈 ‘민중’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성보에 따르면 ‘민중사학’의 공통분모는 첫째, 한국사회의 발전경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아닌 제국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이라는 점, 둘째, 한국사회의 발전경로를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 규정한다고 할 때 그 주체는 민중이라는 점이다. 김성보, 같은 논문, pp.49-50.)
민중사학에서 말하는 민중이란 근대 역사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도식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배계급과 기층 민중의 대립구도라는 도식으로 파악한데서 비롯된 용어이다.
2.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전반의 민중사학론
민중사학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몇몇 학자들이 이미 민중사학론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제3공화국의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집권층의 한계가 드러나고 노동운동·주민운동 등이 활성화됨에 따라 학계에서는 일반 대중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사회과학계에서는 ‘민중론’이 제기되었으며,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이와 보조를 같이 해 민중사학론이 제창되었던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중사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전반에 민중사학론을 제창한 주역으로는 강만길, 이만열, 정창렬, 조동걸 등을 꼽을 수 있다. 민중사학론은 크게 강만길의 분단사학론과 이만열, 정창렬의 민중적 민족사관으로 나눌 수 있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뉴시스
강만길은 누구인가? 1970년대의 한국사학계는 1960년대에 제시된 식민사관 비판과 새로운 한국사상의 수립이라는 과제의 연속선상에서 1960년대의 내재적 발전론을 이론적으로 더욱 다듬고, 실증적으로 더욱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강만길은 당시에 김용섭 등과 더불어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에 주력했던 인물이다.(※ 박찬승, 「분단시대 남한의 한국사학」, pp. 341, 343.)
강만길의 분단사학론은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에서 이루어진 한국사교육 강화에 대한 대응으로 제창된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즉 1970년대 초 체제의 경직화 과정에서 정권측이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민족사관의 정립’을 내세우면서 한국사 연구비 지원을 크게 강화하였는데, 이는 한국사 연구 성과와 연구 인력이 증대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민족사학의 방향 정립이 시급한 과제로 요청되면서 1975년 전국역사학대회에서 강만길의 ‘분단시대 사학론’이 제창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만길의 분단사학론은 정권 측의 ‘민족사관 정립’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나아가 ‘통일운동의 일환으로서의 역사학’이라는 당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남지대, 「고교 국사교과서 근현대편의 서술과 문제점」, 『역사비평』 3, 1988, pp.291-292. 강만길의 사학론은 학자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박찬승은 ‘분단사학론’, 남지대는 ‘분단시대 사학론’, 김성보는 ‘분단시대사학론’과 ‘통일지향의 역사학’을 병용한다.)
강만길의 분단사학론은 기존의 ‘민족사관’의 논의의 폭을 식민사관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통일지향사관의 수립으로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의 시대를 ‘분단시대’ 혹은 ‘통일지향의 시대’라고 명명하고, 분단시대의 역사학은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통일운동의 일환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강만길의 분단시대론은 이후 여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도 ‘분단시대의 학문적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역사학에서의 현재성의 반영 방법, 역사학에서의 가치판단의 문제, ‘분단시대 역사학’의 구체적 연구방법론 등을 둘러싸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만길의 분단시대론은 이후 여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도 ‘분단시대의 학문적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역사학에서의 현재성의 반영 방법, 역사학에서의 가치판단의 문제, ‘분단시대 역사학’의 구체적 연구방법론 등을 둘러싸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박찬승, 「분단시대 남한의 한국사학」, p.341.)
▲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 네이버 화면 캡처
이만열은 1980년대 초에, 민족의 범주에는 계층적 의미에서 볼 때 민중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서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하는 민족사를 제창하였다.
정창렬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고유한 민중의 존재를 설정하였다.
그는 한국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봉건사회를 청산하지 못한 채 세계 제국주의에 편입, 종속됨으로써 인간해방, 계급해방, 민족해방의 과제를 짊어지게 되었으며, 그 과제 해결의 주체는 민중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조동걸도 ‘민중’은 조선후기 이후에 형성된 근대사적 실체로서 불특정한 대중에서 운동주체로 성장한 것이라고 보았다.(※ 박찬승, 같은 논문, p.353.)
이상의 연구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사학’이라기보다는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으로 정의할 수 있다. 민족주의사학, 또는 민족사관의 틀 안에서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는 시대적 경향을 수용한 것이었다.
3. 민중사학의 성격과 문제점
1980년대에 ‘민중사학’을 표방하고 대두한 새로운 학풍에 대하여 기존 한국사학계에서는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이들의 세력 결집을 ‘진보학풍’의 대두로 간주하고, 기존의 보수학계와 함께 자유·민주의 원칙 위에서 공존과 경쟁을 통해 한국사학의 발전을 기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사관은 네오마르크시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낡은 한국판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며, 이들의 역사연구는 현재 한국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민중해방 내지 민중혁명 전략을 모색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했다.(※ 박찬승, 같은 논문, p.354.)
흥미로운 것은 민중사학을 두고 한편에서는 ‘진보’로,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판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즉 민중사학에 관한 논의에서 진보사학이란 마르크스주의사학에 다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민중사학은 한국 마르크스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이 접목되어 나타난 것이다.
민중사학의 역사방법론과 사관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적 유물론(史的 唯物論)에 입각하고 있다.
민중사학자인 연세대 김성보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의 진보적인 역사학계가 역사방법론, 나아가서는 사관의 토대를 주로 사적 유물론에 두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김성보는 민중사학이 아직도 고전적인 맑스-레닌주의운동론의 틀에 맞추어 한국사를 설명하려한다는 것을 비판한다. 김성보, 앞의 논문, pp.53-54.)
좁은 의미의 민중사학은 민중적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면서도 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민중의 자기 해방 과정을 보다 중시하는 특징을 지닌다.
민족 해방은 한 과정이며 보다 궁극적으로는 민족 내부의 사회경제적 갈등, 불평등까지 해소되어야만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적 유물론의 시각과 부분적으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중사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또한 민중사학은 한국 근현대사를 기본적으로 반봉건의 근대화와 반제항쟁 과정으로 파악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민중사학자들은 ‘유물사관’이나 ‘사회 구성체 이론’과 같은 좌파 이론을 도입하는 실험도 서슴지 않았다.(※ 이주영, 앞의 논문, p.149.)
민중사학의 연구 과제는 민주화, 자주화, 민족통일로 집약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므로 민중사학의 첫째 과제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이었다.
강만길 교수는 1970년대부터 기존의 한국사 연구가 분단 현실을 외면하는, 따라서 분단 체제를 정착, 지속시키는 데만 이바지하는 빗나간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대신에 그는 분단 체제 극복을 위한 사론, 즉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지도 원리로서 올바른 민족주의를 수립하고 그러한 목적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하는 국사학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강만길의 이러한 제안은 역사학이 현재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통일에 도움이 될 사실(史實)만을 골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주영, 앞의 논문, p.151.)
이처럼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상과제로 삼는 까닭에 민중사학자들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결정적인 결함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술한다는 역사학의 근본 목표로부터 크게 벗어남으로써 역사학을 명분 또는 염원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 위에 올려놓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현재로서 통일은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대상일 뿐인 데, 그것을 향해 역사 연구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연구자의 희망에 따라 곡해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중사학자들은 통일의 가능성을 찾는 데 집착하다 보니까 해방 직후의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김구, 김규식, 여운형 같은 중도적 인물들이 추앙받고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역사 인식의 산물이다. 이주영, 앞의 논문,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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