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6

함재봉교수의 한국사, 한국사람 만들기 5편 친미기독교파 새로운 변화의 시작



Transcript


222
안녕하십니까 흠 재봉 입니다 한국
사람 만들기
또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어 지난 시간에 제가 그 칼뱅 주 의
와 근대사회의 대해서 지금 보시는 이
국기 들을 보여드리면서 왜 이 근대
사회의 근데 자본주의
아 근데 자유민주주의를 만드는데
있어서 현재의 가장 잘 살고 가장
자유로 운영하면서 자유로운 이 나라를
만든 sol 칼뱅 죄가 역할을 했는지
왼쪽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이제 오늘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말 약속드린 대로
자 그러면 칼뱅 주 의를
갖고 들어온 이 선교사들을 통해서
젖은 사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키
시작했는가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뭐 역사의 책에서도 자만이
보고 배우는 있죠
우선 들어가서 보면 사회의 조선의
봉건 사회를 60 겪고 전화가 안 된
지 대표적인 제 근데 의료원이 줘 곽
광양 원이란 이게 생기고 그 알렌
알렌 목사가 이건 말씀을 못 드렸지만
은 즉
갑신정변 때 그 인시 척 쪽 예 가장
사랑 받는 조카인 민영익 2
2
갑신정변 팟 을 칼을 맞은 데 아침
그 칼 그 값인 정민이 일어나기 딱
2개월 전에 이 알렌 이라는 허 라스
알렌 이란 목사가 원래는 홀레 는
중국 남경에 선교사로 갔는데 중국에
가서 일 년 살면서 고기 사람이라고
맨날 싸우고 사이가 안좋았고 딴데로
가겠다 그래서 동료들이 조선이란
나라가 우리가 1882년에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을 했는데 곧 우리 우리
그 공사도 하나가 있지만 분 열릴 것
같은가 성견 안되지만 곧 열릴 것
가봐라 그래서 제 알렌이 건너와서
한번 본다 그러고 왔는데 좋았어요
그래서 이제 가족들을 다시 테 가서
데려와 갖고 정 착한게 1884년
10월 17일 인가 그런데 갑신정변
나기 두달전 냐
그래서 그때 5의 사는데 이 사람인지
미국의사 공부라고 왔던 사람이라서
있었는데 민영이 칼을 맞았을 때 그때
이제 가서 232 냥이 걸 살려
주니까 고정하고 민비가 완전히
죽어가는 사람이
어기게 그 인형이 칼을 7번이나
맞습니다 그 정변 받을 한테 소재 필
서재 창 이런 사람들
그래서 그 그 알렌 일기에 보면
알리니 자세하게 의 사기 때문에 의
조적 의학적으로 찍기로 그랬는데 7번
칼에 찔리고 창에 맞고 받쳐주고
부서지고 끊어지고 있는 것을 이
사람을 1 딸의 걸쳐서 결국 살려내
그러니까 이제 고정하고 미니가 너무
고마워서 물을 원하는 야 다 해주겠다
그랬더니 병원 지 깨 달라 그래서
그래서 광해 온 이라는게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그
광혜원리 지어졌고 광해 오니 열렸고
그 다음에
광혜원 첫회에
알레나 고 알렌이 언더우드 뭐 이런
분들하고 같이 해 같고 관
2000명을 출 일 년 써 니 까
아무 일어 이 께 없는 상황에서 다
몰려들어 있었겠죠
그런데 이제 또 거기에서 어
조선 여성들이
외간남자 또 외국 사람의 진료를 받을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 따라 이거
알고서 그러면 빨리
여서 여성 여자 의료선교 6 않을
보내달라고 애 같고 그 때 이제
최초로 메타 하워드 라는 분이 와서
2분이 뭐 그 옆 아니라는 여성전용
병원을 세우 져 그 엿 그 병원이
그게 동대문 병원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1회 비대 병원이 되는 거죠
우리가 그
동대문 옆에 토성 어머 도성을 다시
축성 한다고 그 동대문 병원은 이제
허물어 버렸는데 참 그런 역사의식
보이스는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내무 병원이 무슨 의미인지 좀 9
보호구역 아니었다는 것도 허물고
하는거고 참 도성은 아름답게 지는 지
몰라도 의미는 참 모르고 짓는 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역사를 알아야 된 또 나님 아무튼 뭐
그 여관이 돼 같고 이제 여기서
그렇게 열심히
진료를 하고
어 그 다음에 또 고 얘긴 또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근데
교육이 버러지 줘 그렇죠 2화 매자
이온이 숨 속에서 처음으로 여성
들한테 저렇게 가리키기 시작하고 5
평민 들한테 첫 민 들한테 도 이런
글을 가지기 시작하고 과학기술
그야말로 화학 뭐 이런 수업들이 10
시작하는 거죠 안 상에 차별 신분의
차별 없이 교육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그중에 이제 대표적인 이해가 뭐냐면은
2
신분제 에 대한 도조
무어 목사라는 분이 오셔 가지고 는
그럼 군 당 꼴이라는 게 저 좀 뭐한
아 동대문 그쪽 이어 뜨고 봤습니다
거기에서 그
백정 들이 사는 동네인데
거기에 가서 그렇게 그 성결을 위한
거예요 예 어 젊은 그 오른쪽 사진에
보면 박 쩍
학 서양 확 써 형 이라는 사람인데
원래 이름이 박봉 출 입니다 박서
향은 나중에 그 어디 사극에 도
나왔는데 최초로 조선 사람으로 최초로
세브란스 에 가서 여러분 에서 최초의
의사가 되는 아 아 악 뽕 출
나중에 개 면에서 박서 향인데 이제
젊은 어린 박서 향이 이제 지나간
길가에서 이제 그 뭐 목사가 성결
하니까 얇고 많이 깍아서 궁금해서
이제 뭐 이런저런 주는 4 적들도
봐서 받아오고 책자 들도 받아오고
이렇게 했죠
그래놓고 있는데 어느날 그 아버지가
근데 이제 박서 양은 저 백정 애
아들임이 아버지가 박성준 인데 악성
춘희 이제 그
획정 이었죠
그런데 그 아버지가
2 장티푸스 에 걸림
그래서 병에 걸려서
확 뽕 추리 2 선교사 무어 목사는
테 가서 우리 아버지가 아프니까 좀
어떻게 해 달라 그러니까 뭐 목사가
그때 이제 세브란스 에 와서
진료하고 있든 에비슨 에비슨 박사 를
소개를 해서 앱 잊은 박사가 박성 춘
을 치료를 해서 그 박승춘 이
났습니다
그랬더니 박성준 이요
그 백정이 을 내면 사는 얘기
에비슨 박사 면 지금 뭐 이 아닌
야오이 초 고정하고 민비를
진료하는 사람이
근데 어떻게 왕을 치료하는 사람이
나가던 100점을 치료하는 야 이게
도대체 무슨 종교 인데 너희는
이런거를 할 수 있느냐 그래서 나도
이런거 믿겠다 그래서 박성준 이
개종한
그리고 나서는 요의 박성 춘희 개종을
하고 나서 더 나중에 그
가보 기억이 일어났을 때에는 또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백정 들은 상추를
틀 질 못했습니까 무슨 말씀 나면
조선 남자들은 다 어렸을 때는
떠꺼머리 총각 드리게 머리를 따지
않습니까 그쳐 이제 어른이 되면서
부터는 꼭 상추를 즐겨 있거든요 그걸
말아 올려 상투를 틀어 짠 씁니다
백정 드는 걸 못 하냐
그래서 상투를 모터 서 이렇게 풀어져
찌거기가 영화 같은데서 100정도
이렇게 머리 길게 그냥 마 주고 산
저가 청도 조까치 나 나 주지
않습니까 그 천민이 라서 그러면 백정
이라서
그러면은
그러니 때문에
보통 평민 보통 아이들 어린애들도
백정 어른한테 말을 놓았습니다 반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이런 거에 대해서
이제 박성 춘희 굉장히 제한이
생기니까 많았으니까 이런 것을 이제
뭐 목사 네 부탁을 해서
사실은 뭐 목사가 탄원서를 같이
써주고 그래갖고 그래서 이제 100종
들도
저 상투 올리게 해 주고 갓을 써도
된다 이제 해서 그 당시 이제 이런
이런 변화도 이제 일으키고 했든
근데 저는 어 무튼 참 중요한 것이
기독교가 들어옴으로써 처음으로 이신
문제가 여러분 극복 되기 시작한
구체적인 안될 이해가 나오 시작했다
는 말씀을 드리고 시오
그 다음에 이제
남녀차별에 대한 극복 입니다
어 여기 사진을 은데 아요 다음 거
부터 먼저 보여드릴
이런 겁니다 여기 이제 사진에는 지금
어우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의 유명한
여성 해방 운동 다들 그렇죠
네 염 엘의 악 에스터 1 4 김활란
물론 민족운동 한 분들도 있고
여성운동을 역군 운동했던 대표적인
분들이죠 염 엘의 근데 이제 넘
엘에이 가우 제가 2분들 사진 갖다
놓은 게 왜 그러냐 어
염에 레 가 뭐냐 뭐
4 래 가 뭡니까 매매입니다 매
그 다음에 닭 박에스더 는 에스더
구유 하란 3 맨 씨입니다 낸 ce
김활란 인레 니즈 그 왜요 매매
mle oso 팟 nc 하이 엘렌 킴
왜 그런지 아세요 왜 서양 이름들을
받았습니까 가졌으니까
이게 무슨 뭐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애들이라 3p 국수와 산게 아니라
여성들이 그때까지 이름이 웁 썼기 뜰
얘기를 암 슬라이드에서 보입니다
이게 1888년 9월 이화 학당 에서
이와 땅이 1886년에 세워지고 동력
그 스크랜턴 여사가 니까 스크랜튼
박사가 오고 스캔들 의사 스크랜튼 요
그 어머니도 이제 여성 성결하게 따고
따라왔던 거죠 그래서 이와 악당을
1886년에 세우는데 그 이화학당 2
이제 세워지지 2년 지난 시점에서
학생들한테 이제 처음으로 쓰 세례식을
하는것
그래서 그 당시 이런 기록을 슬랜트
여사가 해놨습니다 주 전 저녁에 후인
3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도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 조선 여인들은 이름이 없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부인들은 이씨 박씨 같은 집안 혹은
어떤 남성의 소유 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올 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 씁니다 우리는 처음에
생각하기를 이들이 어렸을 때 불렸던
이름을 되찾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릴 때
그저 큰애기 원작은 애기같은 침 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이제 와서 그런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마르다
미리암 쌀 어메 같은 기독교식 이름을
지워지고 했습니다
그래서 lng 에스더
nll
좀 이런 이름들이 조선 여성들이 서양
이름들 갖게 됩니다
일제 시대가 되고
그렇죠 일제 시대가 되고 처음으로
1910년 민 적법 지금의 우리의 각
그 주민등록증 같은 게 이제 이 제가
그걸 아
실시를 하니까 다 이름을 가져야 되고
성실을 가져야 되고 이름을 가져야
되게 됩니다 조선 사람들이 까 천민
출신 이든 뭐 평민 출신 여자고
남자고
생각을 해보세요 남자들이여 뭐 남자
이름들 가 있으니까
근데 아직도 우리 그 전통이 있지만은
여자들은 돌림자 도안 붙여줄 않습니까
딸들 한테는
그건 지금도 그런데 하물며 이 때는
우리가 이 여자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건 누구 누구 100 그쵸 우리도
그러잖아요 뭐 친구 부임 은 친구
이름 부인 절대 못 불러 줘 뭐
제수씨 제수씨 일은 이런 것 누구
엄마 이렇게 된거죠 근데 이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일제 시대 가
되니까 일제 시대가 되어 갔고 여성들
보고도 이름이 없던 사람들한테 갑자기
이름을 다 지우를 하니까 어떻겠습니까
일본 이름을 50초 이번 식으로 순자
미자 이런식으로 영자
스크 이름들이 무슨 꼬 무슨 꼬 1
일본식 이름이 계속 붓지 않습니까 뭐
영자의 전성시대 뭐 이런거 60년
70년 80년대 계속 그런 것
그래서 어쨌든 이름이 여성 들한테
조선 여성들 한테 이름이 생길 얘기
적기 때문이죠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었던 이 조선
추측해 선거 2
저는 그
어디가서 이제 p 산이 핏을 은데
한국 사람들이
최초로 선거를 해본게 언제냐
자기 지도자 를 자기 손으로 뽑아
본교 줘 뭐 전부 다 대부분 역사를
하신 분들은
1948년 제헌국회
선거 때 좀 그때 수표 냈다고 해서
모스 진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모
할머니 쥐에서 애들이 서서 투표장에
서 있는 사진도 있고 이런거 많이 4
4 아닙니다 사실은 조선 사람들은 요
그 훨씬 이전부터
투표를 했습니다
누가 있었냐 며 이 도끼 힘들겠습니까
특히 장로 교인들이 했습니다
왜냐면요
장로교가 모릅니다
칼뱅 2 장 칼뱅 임 새롭게 교회를
만들어서
교회 구조와 제도를 새롭게 천주교가
아닌 카톨릭이 아닌 교회를 만들어서
제네바에서 그것을 처음으로 실험을 해
봤고 그 실험을 아까도 말씀드린
좋은 억수 같은 사람이 가서 배워서
그거를 스코틀랜드 고향으로 가져와서
만든 게 그게 이제 장로 교회 라고
말씀드렸는데
장로 교회는 뭐냐면요
교회를 운영하는 게 장모 드립니다
그럼 2장 너를 누가 뽑습니다 까
보통 표 일반 교인들이 몹 수
투표를 통해서 뽑아요
줘 그러니까 는 천주교는 카톨릭은
교황이
수개월 임명하고 추기경을 추기경이
주교를 임하고 주교가 뭐
그쵸 일반 사체 들 임명하고 이렇게
되는거 아닙니까
다 중앙에서 한우 2 에서부터
장로교는 밑에서부터 합니다
그래서 일반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서
1인 1표를 통해서 그래서 잔 노를
뽑고 그 장로들이 자기네 목사님을
청빙 해온
오쇼 오는 거죠
시도 자를 밑줄 이게 민주주의 m
최초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시작이 된
그런데
장로 기욱이 때문에 언더우드 목사가
들어와서
1887년 10월 7일 교회를
세웁니다
그 교회를 세운 날의 기록 일으킬
남아있습니다
안도 우드 목사의 기록입니다 지난주
화요일 1887 10월 7일 입니다
우리는 2명의 장로를 선출하고 그
다음 일요일 임명 함으로써 장로교회의
조직을 완성했다 우리는 14명의
교인으로 시작하였고 일요일 한 명을
더 받았다
이게 3번 한 교회의 시작
저는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게
두 명의 장로를 선출했다 그럼 그
열네 명의 교인이 모여앉아 가지고요
자기네 이 투표를 해서 2명을 선출한
민주적인 투표가
10시 부터 시작이 되는것
더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같은
날 해피룸 같은 다니기로 인데 이전
로스 라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가 만주 해서 성기 하고 있던 분인데
조금 이따 또 말씀입니다 나오죠
이문희
대표적으로
이 한글로 성서를 번역한 최초의 그
선교사 중에 하나가 4 이번 인자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이런 목사들
하고 이제 최초로 한글 번역 성서
번역을 한데
이날도
2분이 서기 그날 기록 임 같이 날
기록입니다 성 신약성서 문제로 우리가
또 번역 문제를 가지고 안도는 옥사
람도 날아온 즉 한양으로 문제로
뱃길로 한양으로 같다 나는 특별한 날
저녁에 한양의 도착했다 나를 맞아준
언더 드시는 날 밤 자신의 작은
예배당에 가서 그곳에서 자신의 작은
모임을 공식적인 장로교회 로 추적할
것이란 사실을 알려 줘 볼까
어둠이 덮자 어둠이 도시를 없자 나는
그와 그의 의사 동료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장지 문을 살짝 두드리자 우리는 어느
방 안으로 인도 되었고 그 곳에는
총명 해보이는 정장 1 14 명의
남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한명은 그날 밤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참석자들의 투표를 통해서 그 중
2명을 장로로 선출하는 일이었다
그중 두명이 만장일치로 선출 되고 그
다음 안식일에 공식으로 명
여러분 민주주의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니까 1948년 제헌국회 가 시작될
텐데 까지는 요 최소한 조선에 있는
장무 교인들은 교회 다닌 사람은
대부분 까
48년 이니까 이제 조금 60 년
전입니다 1887년 60 년 전부터
조선 사람들은 일부는
토론을 통해서 자기들 중에서 자기의
지도자 를 뽑고 그것도 인기가 정해져
있는
잘 볶고 그 사람들이 또 목사님을
모시고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된 민주주의 토론하고 투표하는 방식에
대해서 완전히 습득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
여러분은 생각해 보 수
아까 이제 10문제 얘기로 돌아가서
이런것 투표를 통해서 장로를 보니까요
아까 바로 그 박성 춘 얘기로
돌아가서 그룹
그 권당 꼴 교회에서 아까 말씀드린
그 악성 춘희 이제 에비슨 박사의
치료를 받고 감동을 해서 게송을 해서
뭐 목사가 하는 권 단결 교회의 이제
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이제
음 박성준은 사진이 없을 거야 아들
학생 사진만 넣어 낮지만
그러면
가속 악성 춘희 이제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니까 그 군 단결
교회에 다니던 양반들이
안 나타나기 시작해요 교회 참석을 안
합니다 그래서 뭐 썩 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더니 그 중에 한 사람이
목사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이런 신분 차별 하고 그런거 안 되는
건지 나는데
이거는 ep 백정 하고 같이 저희를
아니라고 하는 거죠 예배 보라는 거의
것은 도저히 제가 이것만큼 죄송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까 우선 에 나가서
쪽이 따로 차리게 습니다 그래서 따로
그래서 그게 이제 남대문 교회 거에요
그런데
아무튼
그래서 나가는 건데요 이런 일이
부지기수였다 써 니 까 왜요 왜 이
왜 일어납니까
1인 1표 제 창호는
보통사람
보통 이라는 것은 즉 뭡니까 천민이
고 상민이 고향 반이고 아무 차별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뭐냐면 그
당시에 개종을 해서 개신교의 다닌
사람들이 양반은 극소수 였죠 왜냐면
제사를 못지 내게 아니까 그 대부분
상민 천민 드렸죠 그러니까 장로로
뽑으려고 는 천민 투표 훨씬 많죠
100점 투표가 끝 1인 1표 지니까
무조건 처음 인들이 되는 거죠
이런 변화를 통해서 이제 그걸 못
받아들이는 그치만 제이제 아참
해피엔딩이 있습니다
그건 단결 교회를 뛰쳐나가 같은데
나중에 꼰 2년 후에 건담 돌 회갑
우리 나갔고 그러니까 천민 들이
다니는 그 교회가 완전히 불에 타
버립니다
그랬더니 2세 교원 나가서 양반들이
따로 교회를 차렸던 사람들이 이
천 민들을 환영을 다시 받아들여서
크게
하시
승 동 교회로
만들어질 뭐 그렇게 해서 이제 교회가
다시 만들어 준 해피엔딩이 생기면서
이 과정을 통해서 조선 사람들이
신분제도 이제 극복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 이제 마지막으로 2부 한글의 재
창제 그리고 여러분 저는 이런 이런
생각 많이 우리나라가 지금 아이치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전자 이런데서 앞서 나가는
거에요 저는 요새도 가끔 가다가
하자 칠때마다 제정된 께 감사를
드리는 데 우리가 타자기가 영어
타자기 안과 원래가 영어와 20
예제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한 그렇게 지금 세종대왕의
20 8자를 만 만드셨는데 그중에
내자 가 없어져서 갖고 안써서 우리가
처음 쑥을 내 자요
그러면요 단추 1 r 을 눌러서
하나를 한번 눌르면 그게
영어 타자가 되고 똑같은 자판을
가지고 한번 더 눌러 은 크게 한글이
됨 여러분
중국이나 일본도 생각은 상상도 못한
입니까
중국 사람들은 요 타자를 칠 때
어떻게 안녕하세요
예를 들어 우리말로 명 목숨 명 2에
꿈 조모 이름 양도 있고 밝을명 짓고
여러 만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중국도 똑같아요 그러면 밍 돼 갖고
영어로 ming 를 침은 요 엠마의
n 지랑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는
한자 드리죠 역 뜨면 그 중에 자기가
원하는 민자로 올라야 됩니다
이런식으로 이 사람들이 타자를 줘야
되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냥 타 잘
전원 진짜 한국의 한국의 산업화 나
이런 그이 통신사업 이런거 ai 뭐
이런거에 4차 산업 발전 핸들은 시
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아무튼 그런데 이 한글은
세종대왕이 발명했지만 어떻게 됐습니까
안 썼습니다
그 밑엔 사대부들이 절대로 무술 계약
모습으로 쓰겠습니다 해서 세종대왕도
결국은 한 거를 보급에 실패하면
그래서 완전히 사장이 되버려서 뭡니까
무식한 현 형민 들이나 뭐 가끔 이런
저런 글을 쓰자 부족한데 하는 거죠
그리고 전부다 모르겠습니까 한번
많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시 조선 말기의
왔을 때의 선교사들이 와서 다 하는
얘기가 어 왜 조선에는 역사도 없고
문학도 없고 철학도 없고 사상도 없고
왜 공문서 도 전부 다 중 말로만
쓰지
그쳤습니다 한걸 문화 게 어딨습니까
1 거리 철학이 없습니까 다 중국
말만 했어 좀더 꿀만 했었죠
중국 문서도 정부 문서도 전부다
왕조실록 점당 앞문으로 만 썼고 산
소문도 한 번 더 많이 올려
좋습니까
그랬는데 그랬는데
선교사들이 와서 자 왔으니까 새
종교를 퍼트릴 나면은 성서를 번역을
해야 되는건 어느 말로 번역을 해야
되냐 문제가 나왔어요 근데 이때 이
사람이 놀라운 발전을 아주머
원문 일한 지 떨어야 1 그릴을
아니 그런데 이 언문 이라는 게 너무
쉬운데 너무 놀랍게 빨리 배울 수
있고 그리고 아무도 안 써도 되는
거에요 근데 결정을 하는 거죠 아
이걸로 하면 되겠구요
그래서
제가요 2분 리가 읽어보겠습니다 이게
이제 선교사들이 써 놓은 겁니다
선교사들은 성소와 기타 기독교 문화
꽈 서적들을 언문 이라 불리는 조선의
글로 인쇄 한다면 조선 사람들 모두가
글을 읽게 할 수 읽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봤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자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쉽기 때문에 언문 을 그토록
경멸한 사대부 계급을 일시적으로 나마
쓰게 시킬 수 밖에 없으니까 사대부
들한테 다 그랬대요 왜 한국어를 안
돼 안 쓰냐 그랬더니 아 그 여자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그런데
그걸 왜 우리가 쓰냐고 그렇게 때는
그걸 이제 이 사람이 사람들이 빗대서
하는 얘기죠 그렇게 언문 을 경멸한
사대부 2를 어쩔 수 없다는 거죠
조선의 글은 따라서 기독교를 전파한
되있어서 헤아릴 수 없이 값진 도구가
되었다 무지한 남자 여자 아이들도 꽃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사대부 계층이 자신들의 성경과 책들을
굳이 중국어로 인쇄하는 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지만
일반인들은 한글을 사용하면 됐다
업무는
며칠만 되고 곧바로 조선어 성경을
읽고 조선의 글과 말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더 큰
축복이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한국
말은 다 아는데 그를 몰랐고 한문을
몰랐던 글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선교사들이 꺼꾸로 한 그를 가리켜
주니까 반나절이면 배우지 않습니까
턱은 다 자기 말인데 말은 이미 야
선교사들이 야 말도 못 하니까
한국말도 배우고 급여는 글도 봐야
됐지만
한국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은 이미
한국말 다하고 있었고 그 한 거리라는
2 숨을 내 자료 된 뭐 그땐 28
g 않겠지만 반나절이면 배우지
않습니까 그럼 다음날 글을 읽을 수
있게 된거고
이러니까 우리가 이걸 갖고 성서를
번역하자면
그간 똘 나온 역사가 벌어짐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 글은
선교사들이 게임조선 게재 창조했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여기
사진에 보시면 왼쪽에 로스 목사
언더우드 목사 아펜젤러 목사 갤 목사
무이 수정씨 이런 분들도
뭐 책에는 자세하게 나와있고 말씀으론
말씀 못 드리겠지만 어떤 이런 분들이
성서를 1 물로 번역하며 로써
나옵니다 왼쪽 아래 사진은 이제 성소
번역해 사진이고 로스 목사가 최초로
가로쓰기 를 하고
최초로 떼어 쓰기 라는 겁니다 여러분
띄어쓰기 라는 게 없었습니다
1 문에는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그쵸
1 그런 띄어쓰기가 있습니다 왜
선교사들이 띄어쓰기를 시작했기 때문
그리고 생각을 해보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역사도 철학도 문학도 없는 한글로 된
그런 상황에서 성경 이라는 것을 9
약부터 시다 까지를 번역을 한라 그런
어휘나 이런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중국 일본 오 이런
것을 배워 가면서 이어 인용을 해서
배워가면서
사용하면서 햇지만 은
저는 이 성서 라는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2 1 글이라는 문학이 이제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걸 이제 이광수
일은 이런 분들이 이제 가지고 가서
또 배워서 주시경 이런 분들이 한번
그 밑에서 공부해서 또 번 또 해가꼬
한 글이 제대로 이제 뭐 문법 이같이
작하고 무좀 이런 걸 통해서 한글
문학이 이제 나오기 시작하고 이제
그런 겁니다 한글은
사형 공식적으로 상한 70 년 밖에
안된 언어 고 문 앞 또 철학도
역사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국 사람과 달리 프랑스 사람과 달리
로샤 사람들 관리 200년 전의 문학
300년 전에 문학 뭔 읽습니다 cx
피어 오백 년 전과 영삼이 읽습니다
그니까 영어가 잘 된 영화 문제를
알라 그러면 섹시 피어있고 밀턴 있고
그런데 우리는 잘된 한결이 뭔지도
지금 모릅니다 그 기준이 뭔지도 모르
완전히 우리가 새로 만들어 가고 있는
명이고 한 글은 이런한 글이란 글을
씀 영화는 한국 사람들 사람들이
어렸을 때 새나라의 어린이 그런데
정말로 세 나라
여러분들 이런 이런 것이 지금 한국
사람이
이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왼 처음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한국사람 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우리 매체가 사용
하기 시작한게 제가 찾아본 바른
1962년 수 21절 조선 읽었어요
60 년 밖에 안된 사람 7시 년
밖에 안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고
번역하고 흡수 해야될 것
그러면서 한국 사람을 만들어 감으로써
한국식 결혼식 m 올지 가장 아름답고
외국사람들이 감동 줄 수 있는 한국식
결혼식 장례식
입학식 졸업식 아무런 감동 주지
못하는 대통령 취임식 이런거 가
아니라 정말로 감동을 줄 수 있고
우리를 한국 사람 임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곰 공감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크게
한국사람 만들게 과제이고
그런 것이 우리의 과제 라는 거
경제만 발전한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심는 것 당연히
중요하죠 그치만 그 과정에서 우리 거
스 로써 만들어 가려 그러면은 이러한
역사의식이 있고 우리 가정 확실한
무슨 과제를 안고 있다는거 알아야
되는데 역사를 너구리가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지금 역사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어떻게 만들 시작했는지 알면서
제대로 된 한국 사람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제가
한국사람 만들기 란 책을 쓰고 있고
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장시간 씨카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함재봉교수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