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 (지은이)풀빛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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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아일보에 '신복룡의 한국사 새로 보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을 모았다. 한국 정치사를 전공한 저자는 우리 역사를 연구하면서 제도권 사학의 오만과 아집에 눈을 뜨게 되었고, 한국사학사를 멍들게 한 식민지 사학에서 우리의 역사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다.
또한 저자는 신라 중심사로 그 시대를 보려는 시각에서 자유로와져, 발해와 백제의 편에서 역사를 다시 쓰고 싶었으며, '역사의 패배자에 대한 연민'으로 그들에 대해 웅변을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고 이야기 한다.
그만큼 이 책에는 예민한 대목들이 많다. '한국인은 단일혈통이 아니다' '최만리는 한글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 등의 이야기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연재 당시에는 신문사와의 입장 차이로 게재되지 못했던 10편을 추가 수록했고, 당시의 반론들과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도 함께 실었다.
목차
필자 서문
-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서낭당은 원시 석전石戰 시대의 병참 기지였다
-풍수지리설의 신비
-화랑은 모계 사회의 궁남宮男들이었다
-의자왕義慈王과 3천 궁녀의 허구
-삼국 통일은 허구이다
-첨성대瞻星臺는 천문대가 아니다
-빗나간 신라중심사와 약소 민족의 논리
-훈요십조訓要十條 제8조 호남湖南 기피에 얽힌 비밀
-묘청妙淸은 반역자가 아니다
-최만리崔萬理는 한글 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성삼문成三問과 신숙주申叔舟
-조광조趙光祖는 편집偏執된 이상주의자
-임진왜란과 김성일金誠一의 책임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
-환곡還穀과 장리쌀長利米
-당쟁黨爭은 식민지사학의 희생양
-광해군光海君을 위한 변명
-김옥균金玉均의 생애
-전봉준全琫準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
-대원군大院君과 개혁 정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초상은 없다
-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망국亡國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학
-미국은 당초 4대국 분할을 획책했다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
-김일성金日成의 진위眞僞 논쟁
-두계학파斗溪學派와 실증주의 사학의 허구
-오역誤譯의 역사
-기독교의 수용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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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신복룡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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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번역가.
충북 괴산 출신으로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정외과 교수 및 동 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를 맡은 바 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과 대학원장, 대한민국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및 한국정치학회 인재학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아침의 메아리>, <한말 개화사상 연구>, <한국의 정치사상가>, <한국분단사연구 : 1943-1953>), <大同團實記>,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서재 채워드릴까요?>,The Politics of Separ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해방정국의 풍경>, <전봉준 평전>, <한국사에서의 전쟁과 평화>, <잘못 배운 한국사>, <이방인이 본 조선의 풍경> 등이 있다.
또 번역서로는 <민족자결주의>, <외교론>, <군주론>. <칼 마르크스>, <현대 정치사상>, <모택동 자전>, <묵시록의 4기사>, <林董秘密回顧錄>, <정치권력론>, <入唐求法巡禮行記>, <갑신정변 회고록>, <한말 외국인 기록>, <삼국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한국 분단 보고서>(공역)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한국현대사관계 미국관문서자료집 - 전2권>,<전봉준 평전>,<해방정국의 풍경> … 총 10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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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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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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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책부터 바꿔야 한다.
[기미년 3월1일에 있었던 일] 중에 나오는 촘스키의 말을 빌리면,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205~206p)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역사를 되집어 보는 일은 계속 되어 지고 있다. 왜?? 당연히 꼭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자 함이고 다른 한 편으론 현재에도 그렇게 쓰여지고 있는 역사이야기에 경종이 되고 싶음이 아닌가?
일간지에 기록된 내용이라 그런지 호흡이 짧았던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비교적 쉽게 쓰여진 글이라 흥미롭게 읽혔지만, 제한된 분량 때문에 너무 생략되어 앞뒤 사정을 미루어 짐작해야하는 내용들이 더러 있었다. 또 단지 이런 내용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었으면 하는 맘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나타나던 그 문중이나, 종교 단체들 정말 대단하다. 요즘 판을 치는 가족 이기주의처럼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처해지는 악담들의 내용이 담신 '후기'의 내용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하긴 이런 내용의 책이 나오게 된 게 기득권을 가진 힘 많은 이들이 써 온 역사의 통상 알고 있던 내용을 바꿔보고자 함일테니 말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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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liope 2002-03-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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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과 반대
갑자기 심해진 감기몸살로 인하여 계획에 없던 휴가를 받았다.
아침에는 곧 죽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흡곤란과 격심한 기침 등으로 고생을 했는데,
병원에 가서 주사맞고 약을 먹으니 한결 가벼워진 거 같다.
집에 돌아와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못보고 미루어 놓은 책들 중에서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를 집어들고 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은 오늘 새벽 3시에서야 끝을 보고 책을 내려놓았다.
일부 내용은 알고 있었던 것도 있고(예: 원균에 대한 평가, 김일성의 진짜/가짜 논쟁등), 처음 접하게 되거나 기존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예: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었다는 주장,최만리가 한글창제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전봉준이 동학교도가 아니라는 주장 등등)도 있어서 더욱
흥미진진했다.
다만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는데,예를 들면 성삼문과 신숙주에
대한 양시론적 입장에서 신숙주의 세조정권 참여가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본 것은 지조 내지 양심에 충실했던 이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모두가 지조와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버릴 수 없다는 것이 그동안
경험으로 느껴온 현실이기는 하지만,그에 반하여 출세를 지향하고 고위 관직에서 호의호식을 했던
이들에 대하여 현실 참여를 이유로 면죄부를 준다면 일제 시대 독립투사들과 군사 독재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위하여 살신성인한 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 질수 있을까?
비록 신숙주가 많은 업적을 남긴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변절자"라는 역사적 평가를 피해갈 수는 없지 않을까?
본서를 덮으면서 드는 잔상은 역사는 엄정한 사실이 규명되고,그 다음에 각 사관에 따른 평가가 이루어
지는 것이 순서인데,우리의 역사는 문중의 명예(또는 이해관계)와 역사학자의 처한 입장에 따라 사실도
왜곡되고 이러한 왜곡된 사실에 의해 평가마저 엉뚱하게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제도권 교육을 통하여 확실한 진리로 자리잡게 된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잘된 것은 잘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저자를 포함한 많은 역사학자들이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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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아빠 2004-06-0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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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사실과 평가는 반드시 진실의 계곡을 거쳐야 된다
책속의 여러가지 주제는 분명히 이슈가 될 만한 내용들이 많이있다. 신선하다고 할까??
이런 책이 나오게 될수 있는 이시대가 참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중에서 김일성에 관한 내용이 제일 충격적이엇다. 지금껏 김일성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별 무리없이 받아들였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엄청난 역사의 왜곡이 있었다는 것에 충격이었다. 역사 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스럽게 깨닫게 되었고 참 역사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분명히 밝혀야 (묻어두어서는 안될)될 진실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올바른 역사(부끄러운 역사라할지라도 진실을 가르쳐야 한다.)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인식시키고 가르칠때 역사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민족이 될 것이다. 또 읽어봐야지.. 재미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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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act29 2004-01-0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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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된 역사관에 반발하는 책
역사란 주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몰라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중고등학교때 배운 것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란 기록에 의해
해석됨에 따라 바뀌는 성격이 짙기 때문에 한 시대에 주된 흐름 즉 주류에 따라 가는 경우가 많다 저자가 쓴 글은 우리가 배운 그 주류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을 알수가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깊이 생각한 것은 우리역사학계의 뿌리깊은 내부 식민사관이다 한 단락들의 새로운 사실들도 놀라웠지만 그 이면의 역사학계의 강한 보수성과 아집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역사란 객관적이면 가장 좋고 적어도 축소하거나 더 약하고 추하게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저자는 여기에 반발하여 자기의 소신껏 나름대로의 객관적자료로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학의 기록을 전부 믿는게 아니라 거기에 어떠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유연함도 보여고 있다 세조와 신숙주의 이야기에서는 영락제를 보고 무엇을 느꼈을 것인가하는 대목에서는 무언가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이책을 평하자면 몇가지 지식보다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밑틀이 바뀐다는 것 주입된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림이라면 뭔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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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쌍 2002-01-2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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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이야기
한겨레21에서 강준만의 글을 가져왔다.
가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까지도 가문의 영향력은 존재한다.
그게 나의 관심이기도 하다. 가문의 권력 속에서 개인의 위치 말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가문과 족보 따지는 걸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의 취미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윤학준의 <양반동네 소동기>(2000)라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일본 법정대 교수인 저자가 자기 고향의 양반문화를 소개한 책이다. 그는 그 이전에 낸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로 인해 고향에서 왕따를 당하고 절교까지 당하는 수난을 감수해야 했다. 무슨 비리를 들춰낸 것도 아니고, 말로는 누구나 해오던 이야기를 글로 쓴 죄 때문이었다고 한다.
△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아직도 봉건적 잔재인 가문의 전통이 중시된다. 한 대가족 집안에서 도포를 입고 제례를 지내는 모습. (사진/ 한겨레)
연고가 명분보다 강했던 역사
양반문화는 옛날 이야기인가? 아니다. 지금도 가문 좋은 한국 엘리트들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야기다. 가문·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겐 싱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한국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기에 족하다. 이 책엔 한국 문단에서 가문·족보를 비교적 소중히 여기는 걸로 유명한 이문열·이인화 이야기가 등장한다.
윤학준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남인의 후예인 작가의 노론에 대한 한풀이 소설”로 이해한다. 이 소설에 대해 이문열은 윤학준에게 “그 작품이 나오면서부터 노론 쪽의 분노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윤학준의 말이다.
“나는 순간 도깨비한테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남인이니 노론이니 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그럼 이인화씨는 저 미운 노론에게 일침을 가한 셈이 되는 건가?’라는 나의 말에, 그는 ‘아마 그렇겠죠’라며 껄껄 웃었다.”
실제로 이문열은 <여우사냥>의 머리말에서 “내 역사 인식의 기초에는 남인들의 사관(史觀)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렇다. 사색당쟁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지금 그걸 강조하려는 건 아니다. ‘보호막’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가문이란 무엇인가? 보호막이다. 출세의 필수적인 발판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유효하다.
조선의 부정부패에 관한 학자들의 논쟁에선 이른바 ‘공명첩’(空名帖)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공명첩은 부정부패의 핵심이 아니다. 공명첩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직 임명장으로 어떤 신분이건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면 다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명첩을 산 평민의 자식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기에 실속이 없었다. 그저 벼슬 못하고 양반 못된 것에 한 맺힌 사람들의 일시적인 한풀이 수준이었다.
조선의 진짜 부정부패는 가문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부정부패는 가문이라는 문화적 결속의 장막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밝혀질 수도 없었거니와 심지어는 바람직한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정삼품 이상 당상관이 내외 8촌까지 먹여살리는 건 미덕인 동시에 의무였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면 20촌이 넘는 먼 친척까지 돌봐야 했다.
봉급으로?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신복룡은 고부 봉기를 촉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물욕에 눈이 뒤집힌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영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를 그곳에 심어준 문족(門族)들에게 상납하기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어디 조병갑만 그랬겠는가?
지금 조선을 폄하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가문·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게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를 정확히 이해해보자는 뜻이다. 역사학자들이 사소하게 여겨 언급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의 이면을 파고들면 ‘연고’가 ‘명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역사는 명분 위주로 기록되는 게 아니던가.
그런 이면을 밝히는 데 비교적 신경을 쓰는 대표적인 역사학자가 바로 박노자다. 박노자의 최근작인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일독을 권한다. 예컨대, 거의 모든 책에 훌륭한 애국지사로만 소개된 남궁억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상놈’ 김구의 변신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신복룡의 <한국사 새로보기>도 읽을 만하다. 이 책은 그 자체의 가치를 떠나 한국 사회에서 가문을 건드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웅변해준다. 신복룡은 그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관계자의 후손들이 연구실을 점거하는가 하면 직장 책임자를 찾아가 파면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의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문중의 문제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요, 금기의 지대였다. 그럴 때마다 절망하기도 했고,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망연자실한 적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돌아서면 내 생전에 내가 이길 것만 같은 자신감이 나를 다시 부추겨주었다.”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지 않아 소개할 수 없어서 그렇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필화 사건만 해도 여럿이다. 문중 파워, 정말 무섭다. 나라 망하는 건 팔짱 끼고 구경하다가도 문중을 건드리면 목숨 걸고 총궐기하곤 했다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게 실감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문중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비판을 하긴 매우 쉽다. 아무리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펴더라도 괜찮다. 옛날 이야기이니 국가보안법에 걸릴 위험도 없다. 그러나 문중을 건드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30여 년간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607명을 추적 연구한 송준호는 “조선시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제나 양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했다. 최근 우리 학계에 “민중이 주역이었지 양반이 뭐가 중요한가” 하는 주장들이 제기됐고, 나아가 양반 연구자들에게 비난과 공격이 쏟아지고 있지만, 양반을 도외시한 조선의 역사는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 되었어야 한다는 ‘당위’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추구하는 ‘실증’ 사이의 충돌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송준호는 연구 파트너인 미국학자 에드워드 와그너와 더불어 “민중의 시대에 양반을 연구하는 보수 반동주의자”라는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비난이다. 혹 진보·보수의 구분보다 더 강하고 원초적인 그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엔 진보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양반 혈통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며 족보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진보파는 절대 가문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가문은 이데올로기의 상위 개념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윤학준의 책에도 나오지만, 이념에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마저도 족보 앞에선 흐물흐물해진다.
△ 정규직, 비정규직 갈등과 모순의 본질도 ‘보호막’ 쟁취 투쟁이다. 이랜드 일반노조원들이 8월31일 서울 광화문 집회에서 비정규직 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어려서부터 자기 집안이 ‘상놈’ 출신인 걸로 알고 자라 ‘상놈’을 적극 옹호했던 김구의 경우도 흥미롭다. 김구는 나중에 자신이 양반, 그것도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선 문중에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해방 뒤 귀국해서 경순왕릉을 참배했고, 이후 자신의 가계와 관련된 모든 기록에서 자신이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화려하게 산 이유
가문과 족보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극소수 아닌가? 아니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회적 관계망 가입 비율은 동창회가 50.4%로 가장 높고, 종교단체 24.7%, 종친회 22.0%, 향우회 16.8%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공익성이 짙은 단체들의 가입률은 2%대에 머물렀다. 종친회 가입률 22%는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지난 2005년 종친회를 빙자해 5년 동안 7900명에게 싸구려 족자를 비싼 값에 팔아 7억여 원을 뜯어낸 사기 사건은 어떤가. 이 사건에서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피해 신고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종친회의 가공할 파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문을 너무 당연시 하는 경향이 있다. 가문이 없거나 약한 사람이 나름의 보호막을 찾으려는 걸 냉소적으로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보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튼튼한 가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연한 사람과 그게 없기 때문에 자기 보호막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을 다르게 취급해도 괜찮은 걸까?
개화기 시절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보호막은 바로 외세(外勢)였다. 물론 외세야 상층 엘리트 계급도 보호막으로 삼곤 했지만, 보통 사람들의 외세 이용은 신앙의 형태로 나타났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는 것, 그것이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조선 정부가 일본에 휘둘리건 러시아에 휘둘리건 개신교·천주교 교회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이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드라마틱하게 나타났다. 보호가 너무 잘된 나머지 나중엔 교회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는 일까지 나타났다.
개화기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사치스럽게 살았다. 당시에도 그런 비판이 제기됐던 모양인데, 실은 사치스럽게 사는 게 선교의 한 방편이었다. 정치적으로건 물질적으로건 선교사들에게 힘이 있다고 보여야 신도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한 선교사는 사치스러운 삶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우리 종교의 결실이요, 또 그 발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독교의 실제적 가치는 그들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사들이 때로는 안락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사치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어 열풍·비정규직 갈등의 본질
교회뿐만 아니라 서양인과 교제를 갖는 것도 보호막이 되었다. 외국인을 보호막으로 삼는 건 이미 1880년대부터 유행했던 현상이다. 1885년에서 1886년까지 2년간 조선에 머물렀던 청나라 상인 허오는 자신이 편찬한 <조선잡술>에서 일반 백성은 관원들을 매우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일단 외국인에게 고용이 되고 나면 매우 우쭐대며 교만해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고 주장했다.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어떤 형태로건 외세를 등에 업는 게 보호막이 되는 건 분명했고, 놀랍게도 이런 역사는 1980년대까지 지속됐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가를 위한 보호막이 돼줄 수 있는 건 누구였는가? 물론 그 보호막은 부실했고 때론 기회주의적이긴 했지만, 주로 외세였다. 한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보편주의에 매료된 주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어떤가? 양상이 좀 바뀌었을 뿐, 보호막 형성을 위한 외부 지향성은 여전하다. ‘유학 열풍’과 ‘영어 열풍’도 그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제도적으로 공정한 보호막 메커니즘을 만드는 데 매우 서투른 나라다. 아예 신경을 안 쓴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거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개화기·일제 시절 한국 지식인을 사로잡았던 사회진화론을 국제관계의 관점에서만 말하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진화론의 내부 작동 방식이다.
사회진화론의 3대 지주라 할 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은 한국 내부에서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 원리를 예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여기서 그걸 놓고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그걸 예찬하는 사람조차 인정할 수준의 과도함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한국 사회는 그 과도함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없다!
왜 없는가? 사회적 보호막 장치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엘리트 계급이 가문 보호막에 안주해 있어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문 보호막이 없는 사람들은 종교와 더불어 학벌 보호막을 갖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언론·지식인의 담론 생산만이라도
한국인 다수에겐 대세에 편승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이 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보호막을 찾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각종 ‘신드롬’이 양산되는 이유와 무관치 않다. 이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편승이 잘 이루어지면 우리가 가진 역량 이상의 성취를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불안정과 피곤함은 피할 길이 없다.
좋은 가문·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 고수를 위해 일로매진할 경우 보호막 쟁취를 위한 대중의 투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지금 가장 현저한 투쟁은 ‘기업 보호막’ 쟁취 투쟁이다. 정규직·비정규직 갈등의 본질도 바로 그것이다. 비슷한 조건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누구는 과도한 보호를 해주고 누구는 보호를 해주지 않는 방식으론 사회적 안정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이를 평등주의 논리로 비판하려면 비판자 자신의 보호막부터 검증해볼 일이다.
사회적 불안정과 피곤함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감수해야겠지만, 언론·지식인의 담론 생산 방향만이라도 ‘보호막 사유화’ 체제를 ‘보호막 공영화’ 체제로 나아가는 쪽을 향한다면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보호막 공영화는 복지 예산을 늘리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기회의 단계부터 공정한 게임의 룰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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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7-09-1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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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배운 한국사
신복룡 (지은이)집문당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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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100자평(1)리뷰(1)
기본정보
416쪽
책소개
<한국사 새로 보기> 개정판으로, 강단 사학과 관찬 사학 그리고 문중과 종교 사학은 무엇을 어떻게 틀리게 가르쳤는가를 써본 책이다. 강단에서 차마 말 못한 이야기, 논문으로 쓰기에는 다소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실(史實),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단시하던 주제들을 대중적인 글로 집필하였다.
목차
개정 증보판 서문
초판 서문
01. 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02. 서낭당은 원시 석전石戰 시대의 병참 기지였다
03. 풍수지리설의 신비
04. 화랑은 무사가 아니었다
05. 의자왕義慈王과 3천 궁녀의 허구
06. 삼국 통일은 허구이다
07. 첨성대瞻星臺는 천문대가 아니다
08. 빗나간 신라중심사와 약소 민족의 논리
09.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위찬僞纂
10. 묘청妙淸은 반역자가 아니다
11. 최만리崔萬理는 한글 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12. 성삼문成三問과 신숙주申叔舟
13. 정여립鄭汝立은 역신逆臣이 아니다
14. 조광조趙光祖는 편집偏執된 이상주의자
15. 임진왜란과 김성일金誠一의 책임
16.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
17. 환곡還穀과 장리쌀[長利米]
18. 당쟁黨爭은 식민지 사학의 희생양
19. 광해군光海君을 위한 변명
20. 김옥균金玉均의 생애
21. 전봉준全琫準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
22. 대원군大院君과 개혁 정치
23.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초상은 없다
24. 고종高宗은 계몽 군주인가?
25. 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26. 망국亡國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학
27. 반일이 곧 애국이라는 오해
28. 미국은 당초 4대국 분할을 획책했다
29.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의 우정과 이별
30. 김일성金日成의 진위眞僞 논쟁
31. 해방정국에서 미·소는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32. 찬탁과 반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33. 건국절 논쟁 : 1919년인가? 1948년인가?
34. 실증주의 사학의 허구
35. 중국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36. 오역誤譯의 역사
37. 기독교의 수용과 현실
38.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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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신복룡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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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번역가.
충북 괴산 출신으로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정외과 교수 및 동 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를 맡은 바 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과 대학원장, 대한민국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및 한국정치학회 인재학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아침의 메아리>, <한말 개화사상 연구>, <한국의 정... 더보기
최근작 : <한국현대사관계 미국관문서자료집 - 전2권>,<전봉준 평전>,<해방정국의 풍경> … 총 10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필자의 변(辯)》
역사는 직실(直實)해야 한다지만, 실제로 역사가 얼마나 정직하고 공의로웠는가에 대하여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랬다고 대답할 사학자가 몇이나 될까? 특히 나를 포함하여 제도권 사학이나 강단 사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얼마나 따랐느냐고 묻는다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을 학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었다는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승자의 기록은 햇볕을 받아 역사가 되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묻혀 전설이 된다.”고 이병주(李炳注)가 말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정도의 문제였다. 만약 승자가 패자를 좀 더 보듬었더라면, 역사가들이 그늘에서 울고 있는 패자에게도 귀를 기울였더라면, 우리 사회는 덜 슬펐고, 덜 억울했고, 덜 불행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에는 왜 그리 왜곡이 많았을까? 곧, 우리 역사는 문중(門中) 사학, 종교의 근본주의, 지역 감정, 관찬(官撰) 사학이라는 네 가지 병폐로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그 기간은 의외로 길었고,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대학 nepotism까지 보태져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이 장벽은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교과서를 지배했고, 거기에 도전하는 역사학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어 논문 게재는 물론 취업의 길마저 막혔다. 나는 좌파 교과서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저항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는 일말의 공감을 하고 있다.
나는 본디 역사학도가 아니라 정치학도이다. 그러나 정치학의 분과학인 역사학을 공부하다 보니 역사학계에서는 나를 분과사학자로 분류했고, 나 자신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치학도라기보다는 역사학도라는 것이 싫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나는 “변방에 우짖는 새”처럼 양쪽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십자포화를 맞을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온 것을 보면 나의 삶에는 미욱한 데가 있었다. 좀 더 편한 길도 있었는데….
나는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서럽게 살았고, 억울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으며, 마음이 여린 탓으로 나 같은 역사의 패배자에게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위장된 승자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에너지로 삼아 삶을 견뎠다. 그 분노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우상(偶像)파괴자(iconoclast)가 되고 싶었다.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내 역사학의 본질은 “억울한 판정에 의한 패배자에게 보내는 연민(憐憫)”이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천지의 기운이 막힌다.”는 강일순(姜一淳) 선생의 가르침 곧 해원(解冤)이 내 역사학의 표상이었다.
나는 강단에서 차마 말 못한 이야기, 논문으로 쓰기에는 다소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실(史實),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단시하던 주제들을 대중적인 글로 써보고 싶은 열망을 젊었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제 강단을 떠나 비교적 자유로운 몸이 된 지금 나는 20여 년 전에 한국사 새로 보기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꾸준히 읽혀왔던 구판을 보완하여 새로운 독자층을 만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판을 쓰면서, 아주 후련한 심정으로, 강단 사학과 관찬 사학 그리고 문중과 종교 사학은 무엇을 어떻게 틀리게 가르쳤는가를 써본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이 찬사를 받을 부분이 왜 없을까만은 아마도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독자들은 먼저 목차를 눈여겨보아 주기를 바란다. 새로운 사실과 사진 자료를 고려한다면 이 판본은 구판의 50%를 다시 쓴 셈이다.
나는 이 글이, 역사의 왜곡 속에 죄인이 된 선인(先人)이나 그래서 풀 죽어 살아야 했던 그 후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해줄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외로운 여정에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겪어야 할 험난한 도전은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접기
"나의 글은 우상 파괴의 글이다" 에서 볼 수 있듯 저자는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단시하던 주제들을 신랄하게 풀어냈다.
초록물고기 2024-07-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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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쪽
책소개
<한국사 새로 보기> 개정판으로, 강단 사학과 관찬 사학 그리고 문중과 종교 사학은 무엇을 어떻게 틀리게 가르쳤는가를 써본 책이다. 강단에서 차마 말 못한 이야기, 논문으로 쓰기에는 다소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실(史實),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단시하던 주제들을 대중적인 글로 집필하였다.
목차
개정 증보판 서문
초판 서문
01. 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02. 서낭당은 원시 석전石戰 시대의 병참 기지였다
03. 풍수지리설의 신비
04. 화랑은 무사가 아니었다
05. 의자왕義慈王과 3천 궁녀의 허구
06. 삼국 통일은 허구이다
07. 첨성대瞻星臺는 천문대가 아니다
08. 빗나간 신라중심사와 약소 민족의 논리
09.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위찬僞纂
10. 묘청妙淸은 반역자가 아니다
11. 최만리崔萬理는 한글 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12. 성삼문成三問과 신숙주申叔舟
13. 정여립鄭汝立은 역신逆臣이 아니다
14. 조광조趙光祖는 편집偏執된 이상주의자
15. 임진왜란과 김성일金誠一의 책임
16.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
17. 환곡還穀과 장리쌀[長利米]
18. 당쟁黨爭은 식민지 사학의 희생양
19. 광해군光海君을 위한 변명
20. 김옥균金玉均의 생애
21. 전봉준全琫準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
22. 대원군大院君과 개혁 정치
23.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초상은 없다
24. 고종高宗은 계몽 군주인가?
25. 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26. 망국亡國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학
27. 반일이 곧 애국이라는 오해
28. 미국은 당초 4대국 분할을 획책했다
29.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의 우정과 이별
30. 김일성金日成의 진위眞僞 논쟁
31. 해방정국에서 미·소는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32. 찬탁과 반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33. 건국절 논쟁 : 1919년인가? 1948년인가?
34. 실증주의 사학의 허구
35. 중국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36. 오역誤譯의 역사
37. 기독교의 수용과 현실
38.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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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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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번역가.
충북 괴산 출신으로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정외과 교수 및 동 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를 맡은 바 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장과 대학원장, 대한민국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및 한국정치학회 인재학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아침의 메아리>, <한말 개화사상 연구>, <한국의 정... 더보기
최근작 : <한국현대사관계 미국관문서자료집 - 전2권>,<전봉준 평전>,<해방정국의 풍경> … 총 10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필자의 변(辯)》
역사는 직실(直實)해야 한다지만, 실제로 역사가 얼마나 정직하고 공의로웠는가에 대하여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랬다고 대답할 사학자가 몇이나 될까? 특히 나를 포함하여 제도권 사학이나 강단 사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얼마나 따랐느냐고 묻는다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을 학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었다는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승자의 기록은 햇볕을 받아 역사가 되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묻혀 전설이 된다.”고 이병주(李炳注)가 말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정도의 문제였다. 만약 승자가 패자를 좀 더 보듬었더라면, 역사가들이 그늘에서 울고 있는 패자에게도 귀를 기울였더라면, 우리 사회는 덜 슬펐고, 덜 억울했고, 덜 불행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에는 왜 그리 왜곡이 많았을까? 곧, 우리 역사는 문중(門中) 사학, 종교의 근본주의, 지역 감정, 관찬(官撰) 사학이라는 네 가지 병폐로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그 기간은 의외로 길었고,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대학 nepotism까지 보태져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이 장벽은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교과서를 지배했고, 거기에 도전하는 역사학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어 논문 게재는 물론 취업의 길마저 막혔다. 나는 좌파 교과서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저항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는 일말의 공감을 하고 있다.
나는 본디 역사학도가 아니라 정치학도이다. 그러나 정치학의 분과학인 역사학을 공부하다 보니 역사학계에서는 나를 분과사학자로 분류했고, 나 자신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치학도라기보다는 역사학도라는 것이 싫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나는 “변방에 우짖는 새”처럼 양쪽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십자포화를 맞을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온 것을 보면 나의 삶에는 미욱한 데가 있었다. 좀 더 편한 길도 있었는데….
나는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서럽게 살았고, 억울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으며, 마음이 여린 탓으로 나 같은 역사의 패배자에게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위장된 승자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에너지로 삼아 삶을 견뎠다. 그 분노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우상(偶像)파괴자(iconoclast)가 되고 싶었다.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내 역사학의 본질은 “억울한 판정에 의한 패배자에게 보내는 연민(憐憫)”이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천지의 기운이 막힌다.”는 강일순(姜一淳) 선생의 가르침 곧 해원(解冤)이 내 역사학의 표상이었다.
나는 강단에서 차마 말 못한 이야기, 논문으로 쓰기에는 다소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실(史實),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단시하던 주제들을 대중적인 글로 써보고 싶은 열망을 젊었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제 강단을 떠나 비교적 자유로운 몸이 된 지금 나는 20여 년 전에 한국사 새로 보기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꾸준히 읽혀왔던 구판을 보완하여 새로운 독자층을 만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판을 쓰면서, 아주 후련한 심정으로, 강단 사학과 관찬 사학 그리고 문중과 종교 사학은 무엇을 어떻게 틀리게 가르쳤는가를 써본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이 찬사를 받을 부분이 왜 없을까만은 아마도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독자들은 먼저 목차를 눈여겨보아 주기를 바란다. 새로운 사실과 사진 자료를 고려한다면 이 판본은 구판의 50%를 다시 쓴 셈이다.
나는 이 글이, 역사의 왜곡 속에 죄인이 된 선인(先人)이나 그래서 풀 죽어 살아야 했던 그 후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해줄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외로운 여정에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겪어야 할 험난한 도전은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접기
"나의 글은 우상 파괴의 글이다" 에서 볼 수 있듯 저자는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단시하던 주제들을 신랄하게 풀어냈다.
초록물고기 2024-07-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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