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1

Kim Hyun Jun - 한국우익의 형성

(4) Kim Hyun Jun - 최근 정세와 극우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댓글에 무료 공개된 원문을... | Facebook


최근 정세와 극우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댓글에 무료 공개된 원문을 링크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관련 연구나 기사들을 종종 올리고 소개해볼까 합니다)
· 황병주 「해방 이후 우익정치의 계보학과 주체 형성」
· 김현준 「개신교 우익청년대중운동의 형성 : 극우정치에서 개신교의 효용과 문화 구조」
· 김정인 「전향우익 분석 : ‘북(北)’에 근거한 프레임과 권력 욕망」
· 박현선 「태극기집회의 대중심리와 텅 빈 신화들」
· 김성일 「한국 우익진영의 대응사회운동 전개와 정치 과정」
· 조형근 「합리적 보수는 언제 올까· : 한국 우파의 혁신 가능성에 대한 탐색」
· 북클럽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우익의 기원』(김건우, 느타나무책방, 2017) 김건우, 김성일, 이기훈, 오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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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발간사

[91호] 특집_해방 이후 우익정치의 계보학과 주체 형성_황병주

[91호] 특집_개신교 우익청년대중운동의 형성: 극우정치에서 개신교의 효용과 문화 구조_김현준

[91호] 특집_전향우익 분석: '북(北)'에 근거한 프레임과 권력 욕망_김정인

[91호] 특집_태극기집회의 대중심리와 텅 빈 신화들_박현선

[91호] 특집_한국 우익진영의 대응사회운동 전개와 정치과정_김성일

[91호] 특집_합리적 보수는 언제 올까?: 한국 우파의 혁신 가능성에 대한 탐색_조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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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발간사
대통령이 바뀐 지도 넉 달이 다 되어간다. 그 넉 달 동안 여론조사업체들이 발 표하는 대통령 지지율은 줄곧 70~80퍼센트를 오르내리고 있다. 임기 시작 직 후의 높은 지지율이야 높은 기대감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라고 해도, 문재인 대 통령의 이 빠질 듯 빠지지 않는 높은 지지율에는 신비로운 감이 있다. 원인이야 따지면 다양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기대 이상으로 잘 하고 있 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전 집권세력이 저지른 역대급 망나니 짓에 따른 반사이익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분열된 이 우익 정치세력은 좌우를 넘 어서 한국사회의 해묵은 숙제거리가 되어오다가 마침내 자폭해버렸다. 이 세력 은 이승만의 집권 이래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뤄온 집단이다. 좋든 싫
91호를 발간하며
든 한국 현대사는 이 세력의 형성과 부침, 굴곡과 함께 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세력의 처참한 몰락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주류 정치권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현재 이 세력이 당면한 최대 문제점
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의 위기를 구원하던 당시의 박근혜 같은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지금 우익세력에게는 메시아 노릇을 해줄 인물이 없다. 잘됐다, 싶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이 이대로 영원히 몰락했으면 싶기도 하다. 완전히 타서 재가 되고 난 다음 무언가 다른, 좀 나은 세력이 이들의 자리를 대체하기를 바라게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이들
은 아무튼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일시적인 정세의 부침이나 인물난과는 별도로 장기지속해온 한국사회의 이념 지형 구도를 고려하면, 지금 보수우익의 극한 위축은 일시적 현상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보수우익의 부활이 어차피 닥칠 현 실이라면,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한국의 우익은 어쩌다 이 꼴이 된 건가? 아 무튼 다시 부활할 우익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어봐도 되는 건가? 이번 호 『문화/과학』은 특집 “한국우익의 형성”에 실린 여섯 편의 글을 통
해 이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타진하고 있다. 어느 글도 지금 한국 제도정치권 내의 우익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이들의 정치 행태를 배태한 역사적 계 보를 따지고, 세력으로서 사회운동으로서 대중운동으로서의 우익을 추적하고 그 미래를 타진한다. 특집을 여는 황병주의 글 「해방 이후 우익정치의 계보학과 주체 형성」은 밀
도 높고 함축적인 글이라 술술 읽기가 쉽지 않다. 대신 그만큼 사유의 재료들 을 듬뿍 안겨준다.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멸사봉공(滅私奉公)이 어떻게 멸공봉 사(滅公奉私)의 길로 이어지는지, 좌익이 사라진 공간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어 떻게 과잉대표된 빨갱이로 재현되었는지 서사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그 긴 세 월을 관통하는 우익의 주체 형식으로 호모 포시덴스, 소유적 인간의 탄생에 초 점을 맞추는 부분에서는 서늘한 통찰력을 엿보게 된다. 
김현준의 글 「개신교 우익청년대중운동의 형성: 극우정치에서 개신교의 효 용과 문화 구조」는 오늘날 우익 대중운동의 저변 확장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개 신교 청년대중에 시선을 맞춘다. 그동안 개신교의 정치화에 대해서는 교세 감 소나 사회적 신뢰 감소라는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해석이 많았지만, 이 글은 우익대중의 행동주의를 이해하려면 그 이상으로 이해를 심화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위기의식을 대중의 ‘사회적 상상’이나 박탈감, 혐오와 같은 정서로 변형 시키고 내재화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그 계기로 반동성 애 담론과 종북척결 담론을 꼽고 있다. 동성애와 종북을 현재의 국가적ㆍ사회 적ㆍ종교문화적 위기를 초래하는 적으로 규정하는 문화전쟁 프레임이야말로 이들을 반지성주의적 행동주의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인의 글 「전향우익 분석: ‘북(北)’에 근거한 프레임과 권력 욕망」은 뉴라 이트의 주축이 된 전향386을 다룬다. 주사파 출신으로서 누구보다도 북에 열 광하던 이들이 우익의 열렬 선봉이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김정인은 이 글 에서 이들이 여전히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착목한다. 주체사 상은 절대적 휴머니즘으로서 여전히 옳지만, 북의 정권이 이를 실천하지 않았 다는 것이다. 대신 이들은 자신들의 음습한 출신을 무기삼아 친북 검증 사상 공세에 나섰다. 그리고 정권 보위 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들이 과연 재기 할 수 있을까? 촛불집회에 맞서며 일어난 친박근혜 정권 집회는 어느 사이엔가 ‘태극기집
회’로, 이 우익들은 ‘태극기 세력’으로 명명되었다. 박현선의 글 「태극기집회의 대중심리와 텅 빈 신화들」은 이 우익집회에 등장한 기호들을 통해 이들의 대 중심리를 분석하고 진단한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군가와 1980년대 ‘건전가요’ 가 합창되는 이들의 집회에는 박정희 정권이 유포한 가족 로망스를 그 딸을 통 해 지키고자 하는 산업화 세대의 욕망이 투영된다. 하지만 태극기에 더해 성조 기와 이스라엘 국기, 심지어 그리스 국기까지 등장하는 잡종화에서는 이 스펙 타클이 텅 빈 신화에 지나지 않음이 폭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마냥 비정상으로 볼 수는 없다. 김성일의 글 「한
국 우익진영의 대응사회운동 전개와 정치과정」은 적어도 2000년을 지나면서 우익 대중운동이 관 주도의 수동적 참여라는 관변단체 성격을 벗어나 사회운 동의 일반 성격을 갖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고 진단한다. 요컨대 우익 대중 운동은 체제 수호를 목적으로, 사회 변화를 표방하는 특정 운동에 대응하는 일종의 저항운동인 ‘대응사회운동’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일탈, 퇴행, 비정상, 예외적 상황으로 치부할 수 없다. 어쨌든 우 리는 이 꼴을 계속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답답하다. 
그래서 답답한 사람들은 이른바 ‘합리적 보수’의 출현에 기대를 걸게 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지켜보았다면 우익 안에서도 정말 혁신을 바라는 세력 이 등장하지 않을까? 조형근의 글 「합리적 보수는 언제 올까?: 한국 우파의 혁 신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이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다. 서구 보수주의 분석 을 통해 보수주의 정치의 본령은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이 없는 정치, 유토피아 없는 정치, 즉 ‘소망 없는 정치’라는 점을 강조한다. 보수주의는 사실 실용주의 에 가깝다. 반면 하이에크를 경유한 현대의 신보수주의는 자유시장을 핵심으 로 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로 전화했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한국의 보수 혁신 을 자임한 뉴라이트 역시 자유이데올로기의 투사로 나섰다는 점에서 같은 꼴 이라는 데 있다. 이데올로기화한 우익에게는 합리화의 여지가 없다. 역설적이 게도 보수를 합리적으로 만든 힘은 강력한 진보였음을 상기시킨다. 특집의 글들은 한국의 우익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만큼 우익의 갱신에 대 한 자그마한 희망조차 앗아간다. 김건우의 문제작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학 병세대와 한국우익의 기원』을 두고 진행한 북클럽 토론에서 어쩌면 그 대안을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을까? 책은 친일하지 않은 우익들, 서북기독교에 근간을 두 고 북정권에 맞서다 월남한 민족주의 엘리트들에 주목하고 그들이 꾼 꿈을 되 짚고 있다. 북클럽에서 전개된 토론이 무척 치열하다. 이들을 과연 우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들이 과연 대한민국을 설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들이 박 정희에 치열하게 맞서다 보수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등등. 토론을 따라가다 보 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이걸 왜 자칭타칭 좌파 『문화/과학』이 따지고 있는 걸까? 여기에 오늘날한국 우익의 비극이 있다. 문화현실 분석에는 네 편의 글이 실렸다. 앞의 두 편은 문재인 정부 들어
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뜨거운 주제들을 정조준한다. 먼저 양기민의 「문재인 정부의 이미지/정치」는 이미지정치가 현대 정치의 필수 기술임을 부정하지 않 은 채 문재인 정부의 이미지 정치를 분석한다. 국민들이 만들어준 대통령임 을 자인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주장하기보다는 감정과 위로를 전달하는 캐릭 터로 재현되고 있다. 지지자와 형성하는 이 감정의 공동체는 팬덤 현상을 연 상시키지만, 과거 노사모의 팬덤이 정치적 목적으로 뭉친 운명의 결사대와 같 았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팬덤은 취향으로 모인 최근의 아이돌 팬클럽 문화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키운 캐릭터로서 문재인 대통령. 문 제는 드라마는 드라마고 정치는 현실이라는 점, 대통령 개인에 대한 과잉 기 대를 넘어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민’으로서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는 고언 이다. 
역시 문재인 정부 들어서 전면화되는 현상 중 하나가 문재인ㆍ민주당 지지 층과 진보언론 사이의 불편한 적대감이다. 윤태진의 「‘시민의 시대’와 반지성 주의」는 이 주제를 엘리트ㆍ전문가 전문가에 대한 대중의 불신, 적대감으로 확장한다. 오늘날 ‘시민의 시대’는 “네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는 말로 상징된다. 이 불신의 근저에는 전문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집단이라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반지성주의는 뿌리뽑는 것이 불가 능하고, 심지어 때로 유익할 때조차 있다고 한다. 글의 제안은? 반지성주의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주자는 것. 대신 반지성주의가 해답을 제시하려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는 점도 덧붙이면서. 참으로 어려운 주제인데, 회피할 수도 없는 문제다. 아마 또다시 다뤄질 주제일 것이다. 그때쯤이면 좀 더 나은 상태 이기를. 문화현실분석 후반의 두 편은 모두 영화와 관련되어 있다. 강정석의 「〈옥
자〉, 넷플릭스, 영화의 미래」는 한동안 세간의 여론을 달구었던 새로운 플랫폼 등장에 따른 영화산업 생태계 변화의 의미를 추적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넷플 릭스에 우호적인 것은 이미 독과점 체제가 굳어진 한국 영화산업에서 넷플릭 스가 하나의 ‘대안’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작자의 권리와 관객의 볼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문제는 넷플릭스에서 5천만 달러 를 투자받은 〈옥자〉가 저예산 독립영화 상영관을 잠식했다는 아이러니한 현실 이다. 자본-테크놀로지에 의해 장악된 우리의 미디어 환경을 재구성할 수 있는 상상과 기획 없는 플랫폼 논쟁은 허무할 것이다. 
 후쿠시마 미노리의 「〈너의 이름은〉에서 일본 청년세대의 사회성 부재를 읽 는다」는 사상 초유의 흥행을 기록한 〈너의 이름은〉에 대한 다르게 읽기를 보여 준다. 일본 청년세대들은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다음 대개 ‘눈물을 마구마 구 흘렸다’. 그 정서적 공감은 운명, 유대/끈, 인연의 소중함 등의 키워드들로 이 어졌다는데, 필자는 여기서 ‘사회’ 대신에 ‘운명’과 ‘인연’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 다고 간파한다. 영화의 스토리 구성은 과거 지향이거나 일본 전통 문화로의 회 귀라는 내셔널리즘적인 요소에 기반하고 있고, 재난의 인재성, 사회성에 대한 성찰은 부재하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아베의 자민당 이후 가속화되는 전사회 적 과거 회귀와 보수화의 한 단면으로 진단한다. 이 청년세대들이 어떻게 다시 타자와 만나고, 사회성을 구축할 수 있게 될까? 필자는 ‘친밀권의 공간에서 작 은 재잘거림이나 투덜거림’을 제안한다. 이럴 때 다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느 끼게 된다. 평가를 배제한 표현을 쓴다면, 일본답다. 
동아시아 문화연구에서는 마쓰나가 신지의 「양식화된 시뮬레이션으로서 의 초기 JRPG: 비디오 게임의 문화 간 비교연구의 관점에서」를 게재한다. 일본 의 초기 RPG 게임을 ‘양식화된 시뮬레이션’으로 파악하고, 그 특징들이 일본 문화의 특수성에서 유래한 것인지 타진하고 있다. 마을에서 마을로 여행하며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강적과의 싸움을 통해 주인공이 성장한다는 요소들은 1980년대 일본 소년만화의 특징을 반영하며, 그런 이야기에 익숙한 수용자층 과 가정용 비디오 게임 수용자층이 폭넓게 겹쳐 있었다는 데서 일본적 특수성 을 발견하고 있다. 
이번 호 이론의 재구성에서는 오지 켄타의 「필연성/우연성: 알튀세르의 루 소와 계몽주의」를 싣는다. 분량은 짧되 이론적 전망은 야심차다. 필자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강의록을 뒤적이며 알튀세르 말기의 ‘마주침의 유물론’ 의 계보학을 더듬고, 루소와 계몽주의의 사회계약론,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공백 지대에 대한 알튀세르의 사유를 탐사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는 계약을 통한 인민ㆍ주권자의 형성으로부터는 결코 연역되지 않은 입법자의 존재가 이 미 문제시되고 있었다. 알튀세르는 바로 이 ‘기적적인 존재’에게서 ‘역사의 침 입’을 본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의 고독을 통해 사유했던바, “새로운 형식의 필연성은 그 시작과 탄생의 근본적 우연성을 조건으로 한다”는 언명의 의미가 되새겨진다. 여기서 맑스주의 역사과학은 ‘역사 속에 새로운 현실’을 개 입시키기 위해 역사적 과정에서의 단절을 이론적으로 정초해야 한다는 역설적 임무를 맡게 된다. 대개의 이론이 그렇듯이 이 글도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움의 몫 대다수는 현실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결코 그렇게 매끄럽지 않다. 
그 울퉁불퉁한 현실을 우리는 살아야 한다.
2010년 11월 23일, 학회 참석차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갔던 때의 일이다. 오전 학회가 시작될 무렵 회의장에 도착해 보니 분위기가 퍽 뒤숭숭했다. 누군 가 현지 신문을 보여주는데, 1면의 대문짝만한 사진에 화염이 가득했다. 북한 이 연평도를 포격한 날이었다. 외국인 참가자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무척 걱정 해주었다. 그중에는 진심으로 “귀국할 거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한국인들 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Yes, of course, don’t worry.” 우리는 이렇게 60년을 살았 다, 이게 무슨 대수라고. 
 반도의 남쪽에서는 정권이 바뀌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은 시절인데, 반도의 북쪽에서는 수소폭탄이 터지는 시절이다. 불안이 심해 진 외국인들 중에는 잠시나마 이 나라를 떠나는 이들도 있다는 전언이다. 그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아마도 저들의 반응이 정상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수소폭탄이 터지는 이 초현실적 세계를 그럭저럭 하루하 루 버텨내왔다. 비루하고 현실적인 삶이다. 촛불은 잠시간 환할 뿐, 세상은 대 체로 어둠침침하다. 수소폭탄이 터지면 좌나 우를 따질 시간 따위는 없을 테니 우리는 평등하게 종말을 맞을 것이다. 폭탄이 터질 때 평등을 따지면 무슨 소 용이랴, 그러니 지금 평등을 따지자. 그것이 이 비루한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처세법이다. 촛불은 각자의 마음 속에 켜둔 채. 
 2017년 9월 조형근



[91호] 특집_해방 이후 우익정치의 계보학과 주체 형성_황병주

 
특집 한국 우익의 형성
황병주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
해방 이후 우익정치의 계보학과 주체 형성
1. 우익정치의 형성과 분화
해방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1945년 9월 15일 밤 유진오는 김 성수와 마주했다. 유진오는 극심해지는 좌우대립을 우려 하면서 선거를 통한 해법을 제시했다. 즉 유진오는 “정부수 립의 방법은 선거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민 주주의”라고 확신했다. “선거를 해서 진다면 공산당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김성수 는 이를 단칼에 잘랐다. 그는 “그러다가 우익이 지면 어떻 게 하게? 아무 소리 못하고 공산당 천하가 되게? 그러면 책 임은 누가 지겠소? 유 선생 지겠소?”라고 반문했다.1
훗날 헌법을 기초하고 야당 총재까지 역임하게 될 유진오의 자유민주주의 는 한민당의 거물 김성수의 노회하고 확신에 찬 신념 앞에 순진한 공상일 뿐이 었다. 유진오는 절대로 우익이 질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김성수는 그것조차 못 미더워했다. 창간 당시부터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면서 민주주의와 문화 주의를 내건 『동아일보』의 사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성수는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인 보통선거에 의한 권력구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이 일화는 해방 공간 우익정치의 형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식민지시기 에 형성된 지주이자 자본가로서 우익정치의 계급적 기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 는 김성수는 권력 장악의 가장 확실한 길로 단도직입하고자 했다. 권력은 그들 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다. 거대한 토지와 막대한 자본을 지키기 위해 권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유진오의 서생적 문제의식은 김성수의 상인적 현실 감 각을 넘어설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 바로 다음날인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정식으로 창당되었 다. 여러 갈래의 우익정당 창당 흐름을 하나로 통합한 한민당은 이후 한국 우 익정치의 본산 중 하나가 된다. 한민당 창당 과정에서 확인된 가장 중요한 사실 은 이들이 미군 진주 사실을 확인하고 창당 작업을 서둘렀다는 점과 함께 반 공주의를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공산당에 반대한다는 것 외에 거의 아무 것 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한민당의 창당은 급하고 또 반공 적이었다.2
한민당의 창당에 뒤이어 10월에 이승만이 귀국하고 연말에는 김구와 임시 정부 세력이 돌아오면서 1945년 말이 되자 주요한 우익정치세력이 모두 집결하
1 유진오, 『양호기』,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7, 159.
2 B.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상, 청사, 1986, 173.
게 된다. 이승만은 공산당도 포함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를 만들었 고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강력한 압력으로 이미 좌우 연합정부 형태를 취 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 간의 협조 분위기는 1945년 말 급전직하하게 된다. 공 교롭게도 우익세력의 집결과 함께 좌우를 결정적으로 갈라놓게 된 사건이 터지 게 되었는데, 유명한 신탁통치 파동이 그것이다.
『동아일보』의 오보로 시작된 신탁통치 파동(이하 ‘탁치 파동’)은 해방 이후 최초로 좌우 대립구도가 전면화된 사건이다. 좌우의 갈등은 이미 일제시기부 터 오래된 것이었지만, 권력 문제가 전면화된 해방 공간에서 그 강도와 범위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특히 탁치 파동은 우익세력이 해방 후 최초로 민족 주의를 매개로 좌익을 공격할 수 있게 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친일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익진영은 민족반역자라는 최악의 낙인이 찍힌 상황이었으나, 탁치 파동을 계기로 공산당을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 로 규정하며 역공을 취하게 되었다. 요컨대 우익정치가 냉전과 반공의 선구로 본격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이후 미군정의 직간접적 지원과 함께 우익세력은 좌익진영을 몰아붙였고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계기로 전국적 수준에서 좌우의 세력 판도 가 뒤바뀌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이 과정을, 1945년은 중앙 수준, 1946년은 도와 군 수준에서 그리고 1947년이면 마을 수준에서 우 익이 좌익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1948년 5ㆍ10 총선거는 이러한 정세 하에서 가능했다. 요컨대 김성수의 걱정이 완전히 해소된 상황 속에서 비로소 선거가 치러진 셈이었다. 
제주 4ㆍ3사건에 뒤이어 정부 수립 이후 10월 발생한 여순사건은 국가보안 법 제정, 숙군(肅軍) 등의 과정을 거쳐 극우 반공체제가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 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를 위시한 우익청년단체의 물리적 폭력이 중 요한 역할을 했음이 주목된다. 사실 해방 후 우익정치에서 폭력은 거의 상수처 럼 기능했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암살로 시작된 우익세력의 폭력의 정치 는 해방 공간을 넘어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폭력의 정치가 무엇인지 는 좀 더 많은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이는데, 일단 우익정치의 특성 중의 하나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익 세력이 정치공간으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사라지 게 됨으로써 보수우익 독점의 정치체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우익의 정치 독점 은 곧바로 자체 분화로 이어진다. 내각제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려던 한민당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본격 야당 생활을 시작한다. 이로부터 여야 구도라는 한국 우익정치의 독특한 구조가 형성된다. 한민당에 비해 국내 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은 월남 서북파의 조선민주당 계열과 이범석의 족청계 를 끌어들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1955년은 우익정치의 중요한 기점이 되는 해다. 공교롭게도 일본 자민당 결 성과 같은 연도인 1955년 민주당이 성립함으로써 보수 양당 체제라는 우익정치 의 제도적 기틀이 잡혔다고 하겠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 되자 당시 야당이었던 민국당과 무소속 의원 60명은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 지회라는 명칭으로 교섭단체를 등록했다.3 이것이 모체가 되어 민주당이 창당 되었다. 민주당 창당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19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보 수 양당제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승만 정권의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1951년에 창당되었으나 원외 자 유당과 원내 자유당의 갈등으로 내홍을 겪다 이승만의 지시로 1952년 9월 18 일 통합이 이루어져 60여 석을 차지하는 최대 정당이 되었다.4 통합 이후 이승 만은 족청계를 숙청하면서 자유당으로 하여금 4ㆍ19혁명까지 여당의 역할을 
3 『경향신문』, 1954. 12. 2.
4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역사비평사, 2013, 416.
담당케 했다.
1955년 민주당 창당으로 성립한 우익정치의 보수 양당 체제는 애초 철저하 게 좌익적 경향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민주당 창당은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 파 간 갈등의 산물이었다. 결국 김준연, 신익희, 조병옥 등의 자유민주파 주장 이 관철되어 민주당은 조직 요강에 “좌익 전향자와 악질 부역자를 제외한다” 고 하여 조봉암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특히 조병옥의 반대가 완강했 는데, 그는 “조봉암과 그 일파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하고 무조건 문호를 개방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5
민주당의 우익정치가 다시 한 번 표출된 사례는 이른바 ‘신익희 추모표’ 전 략이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대표로 출마한 신익희가 급서하게 되 자 야당 후보로는 조봉암만 남은 셈이 되었다. 이승만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서는 당연히 조봉암을 지지해야 했음에도 민주당은 죽은 신익희에게 투표하라 는 전대미문의 전략을 선택했다. 민주당은 1956년 5월 11일에 민주당 명의의 성 명서를 발표하여 “조봉암 씨는 그 노선 및 국제정세에 비추어 한국의 역사적 현 단계에 있어서는 지지할 수 없는 바”임을 분명히 했다.6 그 결과 신익희를 찍은 무효표가 무려 180만 표 이상 나와 전체 투표수의 20퍼센트를 넘는 초유의 사 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이 사형되는 과정에서 민주당은 별다른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편 5ㆍ16 이후 여당 역할을 하게 된 공화당은 군부와 구 정치인, 친여 지 식인들을 동원해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박정희 체제와 공화당이 1960년 대 초반에 보여준 대중정치였다. 이들은 윤보선을 사대주의적 귀족, 특권계급 으로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을 서민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자로 선전했다. 민족
5 『경향신문』 , 1955. 3. 11.
6 「민주당, 투표방향에 관하여」, 『투쟁의 족적』, 1956, 48.
중흥, 조국근대화와 함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조어가 등장했고 “전체 국민 의 1퍼센트 내외의 저 특권 지배층”에게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자는 선동이 등장했다.7
민족주의와 대중정치를 통해 경제개발 중심의 근대화 전략을 추진함으로
써 박정희 체제는 강렬한 현실타파 지향을 보여주었다. 물론 경제개발 전략은 장면 정권의 ‘경제제일주의’를 승계한 것이었지만, 보수 야당의 보수성에 비교 될 만한 전략이었다. 특히 1963년 대선 국면에서 윤보선과 야당이 터트린 박정 희의 남로당 전력 시비는 보수적 성격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기준을 동요시킬 만한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박정희 체제의 자본주의적 경제개발 전략과 근대화 담론 이 1960년대까지 확고한 헤게모니를 확보했으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과 대 안 전략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경제개발과 함께 경제가 특권화되고 발전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유효한 비판담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욱이 비판적 지식 인 진영의 진보 담론조차 보수 야당을 통해 제출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 이다. 1967년 대선부터 제출된 신민당의 대중경제 공약은 1971년 김대중의 대 중경제론으로까지 연결되었는데, 이것이 박현채를 위시해 당시 비판적 지식인 들의 대필이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즉 보수 양당제가 관철되면서 유의미한 정치적 실천과 담론이 보수 야당으로 집중된 셈이었다. 
1980년대는 우익정치에 대한 가장 강렬한 도전의 시기였다. 광주항쟁을 계 기로 폭발한 1980년대의 민중운동은 맑스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좌파 이념 을 흡수하여 기존의 보수주의 우익정치를 넘어설 수 있는 변혁적 전망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1980년대의 민중운동은 87년체제로 수렴되었고 대다수의 운동세력은 기존 우익정치의 제도적 틀로 흡수되거나 사라져갔다. 
7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지구촌, 1997[1963], 255-256.
수십 년간의 독점적 지위를 통한 우익정치의 생존력은 그리 만만치 않아 보 인다. 우익정치의 위력은 우익 독점의 정치 구도와 그 내부의 분화된 갈등 구도 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여와 야로 분할된 우익정치는 각각 지배의 역할과 저 항의 역할을 분담하면서 여타의 사회적 갈등과 적대를 그 체제 내로 수렴해내 는 연극적 효과를 십분 발휘해왔다. 달리 말하자면 좌파가 사라졌어도 좌파의 역할은 필요했기에 누군가 그것을 대리 실천해야만 했고 자유주의가 그 유력 한 대안이 된다. 
1955년 민주당 창당과 함께 정당 정치가 어느 정도 틀이 잡히고 여야 구분 이 명료해진 이후 주된 대립 기준은 자유주의였다고 보인다. 현실 정치에서는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현상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내용적으로는 자유주의가 중요했다. 노골적인 반자유주의 성향과 자유주의 친화적 구도가 최소한 1980 년대까지 유지되었다. 한쪽이 극우적 국가주의와 파시즘적 대중정치를 내걸 었다면 다른 한쪽은 자유주의적 중도 우파의 정치적 전망을 제시해왔다. 전자 가 이승만-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계선이었다면 후자는 흔히 보수 야당으 로 지칭된다. 좌파의 대리실천이란 맥락에서 후자는 전자로부터 빨갱이 소리 를 듣기도 했다.  
즉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은 과잉대표된 빨갱이이자 과소대표된 우익이라 는 기묘한 위치를 배정받았다. 이들은 그 기원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우익임 이 분명했지만, 좌파의 대리실천이라는 기능을 통해 좌파의 대리보충적 존재로 현상되었다. 요컨대 ‘기능적 좌파’로서의 자유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우익적 기 원을 망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오인 내지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익정치는 단지 그들만의 리그로 끝난 것이 아니다. 국가 
권력과 정치를 독점한 우익정치는 사회 전체를 우익의 지향으로 재구성해내고 자 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극대화된 군사주의적 질서와 문화는 군사정권의 성립과 함께 정점을 치닫게 되었고 1950년대 급속도로 확대된 공교육 제도는 우익적 가치를 내장한 주체의 사회적 재생산시스템이었다. 뒤이어 거대한사회 변화를 포함한 산업화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효율적이고 순종적 인 주체를 생산하는 권력의 미시정치가 본격화되었다. 
요컨대 학교-군대-기업으로 이어지는 국민 생산체제가 대규모로 가동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가족과 교회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역시 탑재된다. 또 다른 이데올로기 장치인 언론과 방송의 역할은 재론이 불필요할 것이다. 우 익정치의 최대 강점은 바로 이러한 대중의 국민화가 그들의 기본 토대가 된다 는 데 있다. 이하에서는 대표적인 두 주체 형식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보고 자 한다.
2. 우익의 주체 형식 I: 호모 사케르
정부 수립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통해 우익정치는 한국의 지배적 가치와 
습속을 만들어냈다. 반공주의와 발전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등 우 익정치가 활용한 담론자원들 역시 한국 사회의 상식적 가치로 관철되고 있다. 우익 내부의 다양한 갈등은 이 지배적 구도를 균열시키기도 하지만 역으로 역 동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서식 조건하에서 사람들은 아버 지보다 시대를 닮듯 국민이 되어갔다. 국민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함의를 갖는 것이겠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그것 은 주권자로 자리매김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주권자로서의 국민-주체는 저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체의 문제가 대중의 실감으로 다가오게 되고 무 엇보다 생사를 가르는 경험으로 확장된 것은 격렬한 내전을 통과하면서였다. 한국전쟁은 ‘국민’과 ‘인민’ 사이에서 목숨을 건 줄타기를 강요했고 그 선택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무수한 경험을 산출했다.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주권자라는 정치적 주체는 무엇보다 벌거벗은 생 명이다.8 주권 권력에 의해 생사여탈권이 장악된 벌거벗은 생명이야말로 정치 적 주체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 국가권력에 의해 생사여탈권이 장악된 국민이야말로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정치적 주체 형식에 다름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타자로 배치되고 구성된 것이 ‘빨갱이’였음은 주지의 사실 이다.9 따라서 빨갱이의 탄생은 국민의 탄생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한 국전쟁을 통해 국민은 법적 형식을 넘어 실질적 주체 형식으로 관철되어갔다. 
빨갱이는 그 대상의 속성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기표 효과로 설명되어야 한다. 대상의 속성, 기의의 본질 속에 빨갱이가 내장되어 있다고 규정하는 권력 자체가 곧 빨갱이 기표다. 다시 말해 기표의 화자가 기의를 규정하는 대문자 주 체가 된다. 발화된 빨갱이라는 기표는 이미 기의를 찾아 또는 만들기 위해 출발 한 화살과 같다. 발화된 다시 말해 물질화된 빨갱이 기표는 현실 그 어디에선 가 기의에 들러붙어야 한다. 따라서 빨갱이로 지목된, 빨갱이 기표와 상관된 기의로 재현된 존재는 스
스로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빨갱이는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기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에 대 상의 부정은 기표 효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방성 이 곧 빨갱이라 지목하고 모든 절차와 과정을 생략한 채 학살이 진행될 수 있 는 메커니즘을 설명해준다.
국민과 인민의 호명에 대한 응답 역시 생사를 가르는 문제이기는 했지만, 
빨갱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국민과 인민과 달리 빨갱 이는 국가는 물론 인간계로부터도 추방령을 받은 존재였다. 빨갱이는 인간이 
8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역, 새물결, 2008 참조.
9 빨갱이의 탄생은 이미 여순사건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선인, 2009 참조.
아니었기에 전향조차 불가능했고, 무제한의 폭력이 허용되는 거의 유일한 존 재였다. 국민과 인민 사이의 비식별역에 배치된 빨갱이를 통해, 나약함을 시위 하며 벌거벗은 생명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 곧 국민화 과정이었다. 국민 이 된다는 것은 곧 반공의 정치적 입장이자 생존의 절대 요건으로서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민은 곧 우익화된 주체임을 자각해 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국민과 비국민은 대칭 관계일 수 있지만 빨갱이와 우익은 비대칭적 이다. 국민이 아니면 대칭적으로 비국민이 되지만 비빨갱이가 우익은 아니다. 그 렇다면 빨갱이 기표가 비국민을 만든다면 국민임을 보장해주는 기표는 무엇인 가. 의외로 국민됨의 기표와 상징은 쉽지 않다.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뒤집 어쓴 숱한 잠재적ㆍ현재적 빨갱이들이 군대를 가거나 교회를 다녔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빨갱이 기표를 부인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국민됨 을 현시해야만 했다. 곧 자신이 우익임을 보여주어야 했다. 국민과 빨갱이 사이 의 비대칭적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우익 되기’였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폭력이다. 반공은 내러티브와 스토리, 이데올로기와 담론, 선전과 선동 이전에 근원적인 폭력이다. 조잡하고 비논리적이며 성글기 그지없는 반공 이야기가 그 어느 탁월한 내러티브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 할 수 있었던 것은 폭력 때문이다.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의 언급을 원용하 자면, 폭력에 대한 예감, 살해당한 자 옆에서의 폭력에 대한 예감이야말로 반 공의 근원이다.10 이 예감은 살해당한 자와의 연대를 통해 폭력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폭력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이중적 역
10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임성모 역, 이산, 2002 참조. 도미야마는 “살해당한 시체 옆에 있는 자 가 획득해야 할 반군투쟁의 가능성”을 강조한다(12). 즉 폭력에 대한 예감은 살해당한 자들과의 연대를 통 한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또한 폭력의 공포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할을 수행한다. 
빨갱이에 대한 폭력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는데, 잔혹한 폭력 그 자체가 빨갱이의 증거이자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역설적 효과를 산출했다고 보인다.11 즉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잔혹한 폭력의 행사는 역설적으로 폭력의 대상 에 대한 악마화를 초래했다. 즉 폭력의 강도와 잔혹함에 상응하는 폭력 대상 의 비인간화가 필요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이미 저질러진 잔혹한 폭력의 사후 적 정당화는 오직 폭력 대상을 그러한 폭력에 걸맞은 존재로 재현함으로써 가 능해진다. 
극단적 폭력의 현시는 강고한 반공 블럭을 형성케 한 것은 물론 그 내부의 경쟁 구도까지 탑재시켰다. 우익정치 내부에서도 소극적으로는 빨갱이 아님을 증거하고자, 적극적으로는 반공주의를 전유하고자 치열한 경합이 벌어지곤 했 다. 우익정치의 리버럴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보수 야당의 반공주의를 보자. 제 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은 4ㆍ19 이후 “좌경화된 데모”에 극도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역설적으로 5ㆍ16 쿠데타를 긍정하기에까지 이른다. 가장 두려운 것이 혼란해가는 사회상이요 부패상이요 공산주의자들
의 배후활동이요 또한 이러한 환경과 조건에서 국민을 위한 시책이 성취될 수 없다는 가공할 현실이었습니다. (…) 혁명정부가 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 기 시작하면서 이 나라의 일에는 각 분야에 걸쳐 많은 변혁을 가져오게 하 였습니다. 혁명공약을 내세우고, 혁신을 단행하고 준법을 강조하며, 재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 우리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길밖에는 재
11  김성례, 「국가폭력과 여성체험: 제주 4ㆍ3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102호, 1998 참조. 제주 4ㆍ3이나 한국전쟁 시기 반공주의적 폭력에 대한 많은 연구 중에서도 김성례의 글은 4ㆍ3 당시 서북청년회에 의해 자 행된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폭력성을 잘 보여준다. 
건의 성과도 민주제도의 명실상부한 실현도 더 빨리 오는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고 믿는 바입니다.12
자기가 속한 정권을 무너뜨린 군사 쿠데타를 용인하고 긍정할 정도로 윤보
선은 반공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버거(Samuel Berger)는 윤보선이 구래의 양반 지주 가문 출신으로 대부분 가난한 시골 출 신의 쿠데타 주도 세력과 거의 공통점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버거 대사 자신이 박정희와 윤보선이 서로 대화하도록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고 했을 정도였다.13 그럼에도 윤보선은 군정 초기 쿠데타 세력과 반공주의 연대를 실 천했다.
시일이 한참 흘러 1980년대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윤천지강’으로 불린 과거 
재야 운동진영의 대표적 인사들의 ‘변절’이 문제되었다. 윤보선, 천관우, 지학 순, 강원룡이 그들이었는데, 강원룡의 회고에 따르면 윤보선은 반박정희 운동 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뿌리 깊은 반공이었고 위험한 좌경세력에게 권력이 넘어 가느니 군부가 낫다는 판단이었다고 한다.14
이러한 맥락에서 야당의 반공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우익정치에 비해 박 정희의 인민주의적 대중정치가 더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기도 했다. 1963년 대 선에서 박정희 체제는 수구 대 진보, 구세대 대 신세대, 귀족 대 서민, 사대주의 대 민족주의 등의 선거 구도를 통해 윤보선을 공격했고 그 상징적 슬로건이 ‘조 국근대화’와 ‘민족중흥’ 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였다. 
12 윤보선, 「역사적인 신축년을 보내면서」, 『최고회의보』 3호, 1961, 3-4. 
13 Sent to; SECSTATE WASHINGTON(1962. 3. 19.), Political affairs and relations: prominent persons, 1962/ Berger, Samuel D, Confidential U.S. State Department Central Foreign Policy Files: Korea, 1962-1963, 
RG 84, NARA(국회도서관 해외 소재 한국관련 자료).
14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4, 『신동아』 2004년 3월호, 426-439.
그 효과는 상당했다고 보이는데, 1960년대 새로운 감수성의 상징이었던 김 승옥은 “촌티 나는 박정희의 민족주의가 낫겠다”고 여겨 박정희에게 투표했 고, 임헌영은 “휘황찬란한 단어 ‘민족적 민주주의’ 때문에 아주 황홀해서” 박 정희에게 투표한 것은 물론 주변에 운동까지 하고 다녔다고 한다.15 1963년 대 선 당시 윤보선 측이 제시한 박정희의 용공 시비 역시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고 보인다.
여기서 극우 파시즘적 우익정치를 보여주었던 박정희에 대한 약간의 이해 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주지하듯이 박정희는 일본 제국 육군의 강력한 영향하 에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했다. 사범학교를 나온 박정희의 최종 교육은 만주 군 관학교와 일본 육사 그리고 해방 후의 조선경비사관학교다. 그가 만주와 일본 에서 사관학교 생도 생활을 한 1940~43년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정점을 찍을 때였고 만주는 1930년대 이래 ‘쇼와 유신’을 내세운 황도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지역이다.
2ㆍ26사건 이후 황도파는 통제파에 헤게모니를 내주고 뒤로 물러앉았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타 잇키(北一輝)의 파시즘과도 유사한 사회경 제적 개혁방안을 내세웠는데, 이는 일종의 우파의 사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쿠데타 주도자들은 확실히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단적으로 그들은 사적 소유권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다만 사적 이 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보았고 그 결과 거대한 부가 소수 특권층 에 집적되어 전체 사회 내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되 는 것이 문제라고 파악했다. 
2ㆍ26사건의 극우 청년장교들은 자본주의를 일종의 외래적 침략으로 간주
15  김병익 외, 「4월혁명과 60년대를 다시 생각한다」(좌담), 『4월혁명과 한국문학』, 창작과비평사, 2002, 46-
48.
했다. 그것은 국체를 타락시키는 독소였으며 나아가 개인주의, 공리주의, 자유 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 헌정주의 등을 번성시켜 치명적인 정신적 악을 조 장한다고 보았다. 심지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그들이 주장한 쇼와 유신은 서구의 정치, 사회, 지적 악덕을 배격하고 신성 민족으로 서의 일본을 부활시켜 대동아와 팔굉일우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2ㆍ26사 건의 주도자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는 고도 국가주의, 고도 민족주의라 고 불렀다.16
박정희가 노골적으로 일본제국 육군의 정신을 찬양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
는데, 심지어 1961년 12월 방미길에 들른 일본 도쿄에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 등을 만나 일본 육사의 폭력적 규율 훈련을 긍정적으로 회고해 전후 민주 주의를 강조하던 일본 측 인사들을 당황시킬 정도였다.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 의 지사적 심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2ㆍ26사건의 쇼 와 유신이 그의 사고방식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이러한 극우적 사유 체계가 공산주의와도 기묘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독일의 전시 공산주의가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영향을 미쳤듯 이 사적 이익의 배제와 집단적 이익을 강조한 일본 군부의 극우 이데올로기는 맑스주의와 형태적 유사성이 적지 않다. 실제로 기타 잇키는 자신의 사상을 사 회주의라고 주장했고 2ㆍ26 주체들은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노골적 경멸의 태 도를 갖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박정희는 남로당원이었다. 그가 남로당에 가입한 이유는 여러 
갈래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철의 규율을 강조하고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극 도로 경계했던 볼셰비키 조직 노선과 당 분위기가 사관학교 이래 배양된 박정
16  Carter Eckert, Park Chung hee and Modern Korea (Cambridge; London; Harvard Univ. Press, 2016), 204210.
희의 극우적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했던 점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사적 이익과 개인적 경제집단의 탐욕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조종 과 지도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 박정희의 생각이었다. 박정희는 평생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계열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숨기지 않
았다. 멸사봉공으로 요약 가능한 그의 이러한 극우적 사유방식은 족청(族靑)의 민족지상, 국가지상 슬로건과도 통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족청 역시 전향 공산 주의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다른 우익청년단체들로부터 ‘빨갱이’ 소리까지 들 었다는 점을 보건대, 극우 파시즘 계열과 공산주의가 반자유주의라는 점에서 일정한 공통분모가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박정희의 사관학교와 군 경험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폭력적 규율화의 
경험이다. 일본은 학교와 군대를 통해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폭력을 만연화했 다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두 사람씩 마주보게 하여 서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체벌 방식은 일반 학교, 사관학교, 군대 등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 빈타(びんた, binta)로 불린 이 폭력 체벌은 개체적 신체를 무화시키고 폭력을 통한 집단적 일 체화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외부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개인의 신체는 더 이상 개인적 자아의 온전한 담지체가 되기 곤란하다. 폭력의 꼭짓점 에 위치한 절대 권력을 폭력적으로 신체에 각인시키게 된 주체가 그 신체를 회 수하는 국가와 집단의 외부를 사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즉 일본군의 전통은 개인적 욕망과 이익 추구를 금기시하며 집단적 삶의 가
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통제하에서도 자본주의는 성장했으며 시장의 자유는 승승장구했다. 박정희의 한국 역시 비슷한 궤도를 보여주었다. 박정희는 개인 의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와 민족이라는 집단으로의 환원 을 강조했다. 이러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하에서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성장을 거듭했다. 국가의 폭력을 염두에 두면서 국가가 파놓은, 발전이라는 홈 파인 수로를 거부하는 것은 곤란해진다. 
한편으로 이것이 역으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종의 금단의 사과가 된 자유주의가 해방의 상징처럼 보 였을 수 있으며 모든 악이 빨갱이로 집중된 조건하에서 이 자유의 폭은 의외로 넓었다. 공적 영역의 정치가 빨갱이를 소실점으로 하여 폐색되었다면 사적 영 역의 돈 벌 자유는 사실상 정글을 방불케 했다. 굶어 죽을 자유를 포함한 이 자 유야말로 우익정치가 제공해준 독배일 것이다. 
한국의 국민이라면 집단적 가치를 강조하는 교육을 집중적으로 이수하고 정글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으로 내던져진 셈이었다. 그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교육은 멸사봉공(滅私奉公)이었지만, 시장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멸공봉 사(滅公奉私)였다. 이 분열증적 현실로부터 한국의 우익정치가 자라난 셈이었 다. 이것이 좌익의 머리와 우익의 위장을 가진 빙공영사(憑公營私)의 주체 형식 을 조장했을 것이다. 
3. 우익의 주체 형식 II: 호모 포시덴스17
해방 공간 최초의 암살 피해자인 한민당의 수석 총무 송진우는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원고를 남겼다.
혹자는 현단계를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나 그것은 일개 공식
론에 불과하다. 현단계는 대이념하에 수행되는 사회민주주의 혁명단계라고 본다. 토지는 소작권 설정에 의한 국유제로 해야 된다. 토지의 재분배는 몇십 년 후에 또다시 토지겸병의 폐해를 야기시킬 것이니 백년지대계가 아닐 것이
17  Homo possidens는 소유적 인간의 라틴어 표기다. 
다. (…) 손문 선생의 삼민주의는 중국에 있어서보다 우리 땅에서 먼저 그 이 상적 실현을 볼 줄 믿는다.18
송진우는 『선봉』의 청탁을 받아 사망 직전에 이 글을 완성하여 송고하고 12 월 30일 암살당했다. 결국 유고가 된 이 원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토지 국유 화다. 토지 개혁과 관련해 한민당이 처음으로 자신의 구상을 밝힌 것은 1945년 9월 창당과 함께 발표된 정책에서였다. 여기에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 리’와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이라는 규정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합리적 재 편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한민당은 대표적인 지주 정당이었음에도 해방 공간의 혁명적 열기 속에서 
토지 문제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토지 국유화는 다 른 차원의 문제였다. 토지 국유화가 사적 소유 일반의 폐지도 아니고 자본주의 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생산 수단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자유주의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제강점기 이래 사적 소유권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이를 주도한 것이 사회주의 세력이었고 임시정부 세력도 조소앙의 삼균주의 영 향으로 토지 국유화를 주장하는 등 사적 소유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송진우, 장덕수 등 우파 민족주의 세력들도 영국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19 의 영향하에 사회적 자유주의 성향을 띠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물론 이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송진우나 한민당에서 토지 국유화가 주장된 적은 없었다. 
18 송진우, 「연두소감」, 『선봉』 제2권 1호, 1946 (심지연, 『한국민주당 연구』 I, 풀빛, 1982, 176).
19 20세기 초 영국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가리킨다. http://onlinelibrary.wiley.com/doi/10.1111/j.14678497.1990.tb00664.x/abstract.
토지 국유화는 조선공산당의 공식 입장이었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비 판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든 대표적 우익정당의 수뇌부 가 토지 국유화를 명시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은 해방 직후 사적 소유권이 절대적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큰 위기에 직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도 사실 이다. 요컨대 해방 직후의 정세는 사유재산제와 자유주의에 커다란 위기 국 면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1946년 이후 자유주의를 핵심적인 주장으로 내세우기 시 작하면서 사적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입장 변화를 보여주었다. 1946년 10월 9 일 좌우합작을 둘러싼 갈등 끝에 한민당 대표 원세훈이 탈당을 선언했다. 그의 탈당의 변 중에는 의미심장한 문구 하나가 나오는데, 앞으로 “사유재산제 채택 이 확정적”이라고 단언했다는 점이다.20 요컨대 1946년 하반기경이면 사적 소 유권에 입각한 체제 형성이 우익정치 내부의 확고한 대세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들어서면 더욱 분명한 형태로 자유주의와 사적 소유권이 강조된다. 1947년 미소공위가 완전 결렬되자 장덕수는 남한과 달리 북에서는 “인권과 재 산권이 아울러 무시됨으로 국민의 재산은 함부로 몰수되고” 있다고 비판했
다.21 심지어 1948년 5ㆍ10 총선을 준비하면서 한민당은 “한독당의 토지 정책이 국유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 경제정책이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고까지 주장하면서 김구를 비판하기도 했다.22
이는 물론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해방 공간의 명실상부한 지배권력은 미 군정이었고 1년 이상 진행된 군정 경험은 미국이 호락호락 한국을 포기하지 않 을 것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했다. 1946년은 미소냉전이 가시화되면서 한국의 
20 『동아일보』, 1946. 10. 10. 21  심지연, 앞의 책, 290-291.
22  『동아일보』, 1948. 5. 5.
좌우대립 구도가 급전직하로 격화되고 있었다. 신탁통치 파동에 이어 2월에는
‘냉전의 성경’이라는 케넌(George Kennan)의 장문의 전문(long telegram)이 발송 되었고 3월에는 처칠의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이 있었다. 
미국이 소유권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시점은 대략 1945년 12월경 으로 보인다. 주한미군정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은 12월 14일자 전 문에서 미국 정부가 남한 지역에 있는 일체의 일본인 사유 재산 및 동산이 장 래 한국 정부의 처분을 위해 미군정의 관리하에 놓일 것이라는 성명을 시급히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군이 미국과 협의 없이 북한 지역의 일인 재산을 처분하고 있다고 알리면서 이 문제가 결정되지 않아 한국인들이 불안 해하고 있다고 밝혔다.23
결국 1946년 2월 미국은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에게 내린 명령으로 토지, 도 시 주거지, 소규모 사업체에 한해 일인 재산 처분권을 미군정에 부여하게 된
다.24 이러한 방침에 따라 미 국무부 경제사절단은 신한공사가 관리하고 있던 귀속토지에 대해 분배 계획을 작성했다. 번스(Arthur Bunce)가 주도해 작성한 이 계획의 목적은 북한과 대비되는 사적 소유권의 확립이었다. 즉 무토지 농민 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독립적 농지 소유자(independent farm owners)로 만드 는 것이었다. 또한 광범위한 토지 소유권(ownership of the land)을 확대함으로써 일제의 착취를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6년 6월에는 미 대통령 배상 사절단을 이끌었던 폴리(Edwin Pauley)가 귀속재산에 대한 미국의 소유권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한국이 “아시아에서는 우리의 성공 전체
23 김국태, 「재한국 정치고문 대리(랭던)가 국무장관에게」(1946. 12. 14), 『해방 3년과 미국』 I, 돌베개, 
1984, 168. 
24 김국태, 「미육군 참모총장(아이젠하워)이 동경 주재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에게」(1946. 2. 23), 같은 책, 227.
가 달려 있을지도 모르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라고 주장하면서 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를 강조한 후 막대한 귀속재산이 인민위원회(공산당)에 넘어가지 않도록 미국의 소유권 혹은 청구권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25 이에 대해 트루먼도 동의를 표하고 미국의 개념에 따른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특히 트루먼은 “토지의 재분배 및 특정 산업의 국유화 조치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들을 입안하고 집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26 이러한 맥락하에서 번스는 1946년 8월 다시 한 번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반복해 “광범위한 소작 제도를 농 민 개개인에 의한 토지의 완전소유로 대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27 1947년경 이 되면서 우익세력의 토지 개혁 담론은 사적 소유권을 원칙으로 하는 것으로 정리된 듯하다. 그해 중반쯤 미군정 경제고문 번스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도 사적 소유권(the right of private ownership)의 인정, 소작인에게 판매, 최대 15년 이내 상환, 지주 보상 등을 포함한 원칙에 동 의하고 있다고 파악했다.28
그러나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일인 소유 토지는 1948년 3월에 가서야 ‘귀속농 지매각령’을 통해 분배될 수 있었다. 딘 군정장관은 소작농의 자작농화, 조선 역 사상 최초로 그들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 지주들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된 것, 세금의 책임이 없는 것과 함께 “50만 농가가 자유국가의 자유지주가 된 것” 을 분배의 의의로 꼽았다.
요컨대 1946년을 기점으로 한민당의 토지 개혁 구상과 담론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적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것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25 김국태, 「에드윈 W. 포레 대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1946 .6. 22), 같은 책, 307-308. 
26 김국태, 「트루먼 대통령이 파리에 있는 에드윈 W. 포레 대사에게」(1946. 7. 16), 같은 책, 317-318.
27 김국태, 「재한국 경제고문 번스(Bunce)가 국무장관에게」(1946. 8. 26), 같은 책, 342.
28 Land Reform in Korea(1947. 12. 12), Land reform, 1946-1949,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File 895, RG 59, NARA(국회도서관).
1945년 말 송진우의 토지 국유화 방침과는 크게 차이 나는 것이다. 송진우를 비롯해 임시정부 계열 등도 토지 국유화를 기본 방침으로 천명한 바 있다. 그 러나 1946년 이후 한민당은 사유재산을 절대적 원리로 내세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군정이라는 현실적 지배권력의 영향력을 빼놓고 설명하기 힘들다. 여 타 영역도 마찬가지였지만, 사적 소유권과 자유주의에 관해서도 미국의 범위
(American boundary)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유 국가는 물론 자유 지주들도 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곤란했다. 이것은 또한 한국 우익정치의 범위이기도 했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승만은 미국이라는 끈에 묶인 개였으며 박 정희를 위시한 그 후예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그런데 사실 미국의 직접적 영향 이전에 이미 한국은 오래전부터 사적 소유
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조선 후기 이래 경작지와 대지 등에 대한 실질적 사적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정설이다. 이는 인 근 중국, 일본 등 여타 동아시아 국가와 구별되는 독특한 사례다. 즉 조선은 동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성립된 예외적 국가였다. 이러 한 역사적 맥락하에 개항 이후 서구에서 근대적 의미의 사적 소유권 개념이 도 입되었고 당대 엘리트 지식인들은 이를 문명개화의 차원에서 수용했다. 1889 년에 탈고되어 1895년 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도 사적 소유권에 대한 분명한 관념이 나타나고 있다. 
집을 소유한 자가 주인으로서 명의와 실권을 갖추어 자기의 소유물이라 고 말하는 것도 또한 당연한 정리(正理)다. 돈을 남에게 빌려 준 사람이 약속 한 대로 이자를 요구하는 것이라든가 논이나 밭을 남에게 빌려준 사람이 그 수확을 나누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또한 당연한 정리다.29
29  유길준, 『서유견문』, 허경진 역, 서해문집, 2004, 132.
유길준은 이러한 권리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생겨나 어디에도 얽매이지않 고 독립하는 정신으로 발전하여 무리한 속박을 받지 않고 불공평한 방애를 받 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인식은 보성중학교의 윤리학 교과서를 집필한 신해영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신해영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 인의 기본권이 필요한데 그 핵심을 재산권의 보장이라고 했다. 요컨대 “소유권 의 확립은 사회의 안녕을 유지하여 행복을 증진하는 바의 일대 표준이 되어 미 개국과 문명국의 차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신해영은 “공산주의 창도 (唱道)야 재산의 사유을 공박자(者) 유(有)하며 또 부의 불평균을 비 난자 유(有)하니 차배(此輩)의 언론은 병(竝)히 유견망상(謬見妄想)에 출” 이라고 주장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공산주의 활동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힘들 었기에 이러한 반공 입장은 일종의 시대착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공 산주의를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여기는 논리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소개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부재하는 공산주의를 망상이라 비난할 정도로 사적 소유권에 대한 엘리트 지식인들의 입장은 확고부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것이 근대 이후 우익정치의 저류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사실 우익정치 최대의 자산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일 것이다. 우익정치의 
주체 형식은 산업화와 인과율적으로 관련되는데, 근대적 규율과 지식을 체화 한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그 대표적 형식이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을 내 장한 주체가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면 사적 소유권에 기반을 둔 호모 포시덴스 는 그 집약적 주체 형식이다. 전자가 근대 경제학이 가정한 대자적 주체라면 후 자는 현실 경제 속의 즉자적 주체다. 전자가 경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후자 는 즉물적 욕망을 동력으로 한다. 
 
우익 지배블록의 입장에서 경제개발은 곧 체제 경쟁이었고 노동력은 경제 적 주체이자 동시에 냉전의 전사가 되어야 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더 높은 생 산력을 달성하는 것이 곧 체제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자 더 나은 인간의 삶 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냉전체제하에서 빈곤은 다만 가난한 상태로 그치는 것 이 아니라 “빈곤 속에 도의의 퇴폐와 부패가 깃들어, 포악한 공산주의의 온상 이 조성”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32 ‘산업전사’ ‘근로인’ 등으로 호명된 노동자 들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자질을 갖출 것을 요구받았다. 오랫동안 생산성본 부를 책임졌던 이은복의 인식을 보자.33 이은복은 “경제에서 국제경쟁력이 필 요하듯이 인간에 있어서도 국제경쟁력이 필요하며, 경제개발에 앞서야 할 일” 이라는 인식하에 경제적 인간의 발견을 주문했다.34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인식 으로 요약된다.
인간생활, 기업경영, 국민경제 역시 일종의 헤엄 즉 쉴 사이 없이 경쟁적 인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이 무한전쟁이니 수년에 끝을 맺는 무력 전쟁보다도 더 길고 더 참혹하고 무서운 전쟁인지도 모른다. 이 전쟁에서는 보이지 않는 적과 소리 없는 전쟁을 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긴다 해도 그때뿐이지 그 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적이 밀려 닥쳐오고 있어 최
32 「제17회 광복절 경축사」(1962. 8. 15), 대통령비서설, 1973,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 1, 277-278.
33 생산성본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영담론과 노무 관리, 생산 전략을 세계화하는 중요 매개 역 할을 했다. 영국, 일본을 위시하여 아시아 지역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 설치된 생산성본부는 한국에서 1958 년 설립되었다. 생산성본부는 경영학회를 만들고 『기업경영』이라는 저널을 발간하는 등 한국의 초기 경영 담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황병주, 「1960년대 경제 엘리트의 진보와 주체 인식: 생산성본부 미국시찰 단을 중심으로」, 『백년 동안의 진보』, 소명출판, 2015 참조.) 
34 이은복, 「머리말」, 『인간발견』, 한국생산성본부 1968. 이 책은 생산성본부가 발간하던 『기업경영』의 권두언을 묶어 낸 것이다.
종 결승이란 찾아볼 수 없는 끝없는 전쟁이기도 한 것이다.35
여기서 냉전의 체제 경쟁은 인간, 기업, 국민경제 전체를 휘감는 “무력전쟁
보다 더 길고 더 참혹하고 무서운” ‘소리 없는 경제 전쟁’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 전쟁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영원히 끝날 수 없는 영겁회귀의 전쟁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해진다. “자 기관리를 철저히 하면 할수록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관리 능력의 소유자는 바로 위대한, 그리고 진실한 인 간”으로 평가된다.36
자기관리의 능력은 곧 돈의 문제다. 이은복은 “자본주의 이념은 인간 각자 의 돈 의식을 바탕”으로 하기에 “인간은 돈을 위해 창의를 짜내는 데 전력을 다 해 경쟁”하게 된다고 본다.37 이 경쟁의 대표 주체가 곧 기업일 것이기에 이은복 은 “기업을 하나의 자연인으로서의 인격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38 인격 화한 자본과 기업이야말로 인간조차 소유할 수 있는 대문자 호모 포시덴스일 것이다. 그의 결론은 “자본과 인간의 관계, 즉 자본이 대우를 받으면 인간은 번 영하고, 자본을 학대하면 빈곤해지는 관계”가 우리 모두의 삶을 근저에서부터 규정짓는다는 것이었다.39
1960년대 이은복의 인식은 1970년대 박완서와 비교된다. 1970년대 박완서 의 작품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돈 문제가 등장한다. 1970년대 그의 글쓰기는 돈 에 관한 매우 디테일한 묘사와 화폐 관계와 인간 삶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한 
35 「전략적인 처리사고」(1964. 10), 같은 책, 153.
36 「모든 관리에 앞선 자기관리」(1962 .4), 같은 책, 92.
37 「지도력에 대한 신뢰성과 돈」(1967. 9), 같은 책, 222.
38 「기업의 인격과 경영」(1962. 5), 같은 책, 94.
39 「본질을 본질대로」(1964. 5), 같은 책, 143.
것으로 특징된다.40
그년 머리에 잔뜩 짐을 이고도 날개달린 듯이 홀가분했고 입엔 웃음이 
함박꽃같이 헤프게 넘실댔다. 지독한 사슬에서 방금 풀려난 듯이 사지는 믿 을 수 없을 만큼 자유로웠고, 몸뚱이 살집 갈피갈피에선 몰래 기르고 있던 조 그만 악마들이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느꼈 다. 이런 전연 새로운 느낌은 그녀에게 새로운 살맛을 의미했다. (…) 비단이불 은 그냥 시작일 뿐이었다. (…) 그녀는 온갖 것을 탐냈다. (…) 탐나는 것을 찾 아내어 소유하는 기쁨을 무엇에 비길까.41
인용문은 한국전쟁 당시 텅 빈 서울 거리에서 ‘도둑질’을 시작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개체에게 각인된 기존의 소유권과 관련된 도덕과 윤리가 무화 되는 순간을 포착한 셈인데, 도둑질이 일종의 해방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소유권을 떠받치고 있던 정치-군사 권력이 혼란스럽게 교차 하는 서울은 사실상의 ‘무주’공산이었고 일종의 자연상태를 연출한 것으로 읽 힌다. 인용문은 이 무주(無主)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호모 포시덴스가 탄생하 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주체의 욕망이 도달하는 곳은 명백하다.
그것은 달러라는 신기한 화폐였다. (…) 누구나 행복해 보였다. 누구나 달 러를 가지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라한 여자들이 불행한 얼 굴을 하고 이 동네로 기어들었다 하면 며칠 안 있어 행복해졌다. 모두모두 행 복했다. 달러가 풍부한 것만큼 행복도 풍부했다. (…) 달러 모으는 재미야말로 
40 황병주, 「1970년대 중산층의 소유 욕망과 불안」 『사이』 50호, 2017 참조.
41 박완서 『도시의 흉년』 상권, 세계사, 1993, 48.
깨가 쏟아지는 인생의 진미였다.42
한국전쟁 당시 용산의 미군 상대 집창촌을 묘사한 이 대목의 핵심은 달러 라는 “신기한 화폐”다. 인생의 진미로 격상된 달러 모으는 재미는 호모 포시덴 스의 욕망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 심급으로 보인다. 전쟁이 파괴한 잿더미로부 터 새로운 욕망이 구성되는 서사는 전후 경제개발 내러티브와 묘하게 겹쳐진
다. 보편적 교환가치인 화폐에 대한 욕망에 눈뜨지 못한다면 호모 포시덴스의 탄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안보와 경제를 전적으로 의존했던 미국-달 러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한국 우익의 원초적 욕망이다.  
4. 시장과 광장의 주체
1904년 식민화의 길을 치닫고 있던 대한제국의 유력 관료이자 개화 지식인 이었던 윤치호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분명한 어조로 반대했다.43 그런 데 윤치호는 “일본인이 조선을 합병하더라도 일본인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 고도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싫어하는 것은 독점이다. 만약 일본이 조선을 가져 야만 한다면, 일본은 자유경쟁 체제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가 강 조한 것은 경쟁, 공정한 경쟁이었다. 그는 “조선인들 사이에서의 수치심과 경쟁 에 대한 완전한 몰염치한 무관심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윤치 호는 조선이 배우지 않는다면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했
42 같은 책, 50. 
43 윤치호,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5, 박미경 역, 국사편찬위원회, 2015, 43.
으며 “그렇게 명하시는 주님의 뜻도 옳다”고 단언했다.44
뉴라이트 계열의 이영훈은 한국이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세 워진 나라”이자 “개인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곧 “정치적 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국제(國制)의 기본으로 출 발”했음을 강조했다.45 그는 “분별력 있는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에게 사유재산 제도를 확립해주고 경제활동의 자유를 부여하면 시장의 경제적 성 취는 최적 상태에 이른다는 경제학의 오래된 신념 체계가 자유주의”라고 단언 했다.46  
거칠게 보자면 이렇듯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사적 소유권과 자유경쟁 원 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를 부정하는 것에 대한 반대인 반공주 의 역시 반복되고 있다. 한국의 우익은 1세기 넘게 자신들의 이상과 꿈, 욕망과 권력의지를 유감없이 발휘해왔다. 그들이 만들어낸 ‘진리효과’가 지금 이곳의 공리계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이 만들어낸 진리 체제는 다수 대중의 삶의 경험으로 이어져 세계를 해석하는 지배적이고 당연하며 상식적인 진리로 통용되고 있다. 우익은 사전에서 보수적이거나 국수적인 경향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한
국의 우익은 놀라운 혁신의 주역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계몽운동에서 산업화까지 그들이 주도한 운동과 국가 프로젝트는 오늘의 한국을 100년 전과 전혀 다른 사회로 만들어냈다. 우익의 수동혁명은 사실상 한국을 동아시아에 서도 예외적으로 과거의 전통과 급격한 단절을 초래한 사회로 만들었다. 우익 수동혁명의 핵심은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 혁신이었고 ‘개발연대’의 
44 같은 책, 50-51.
45 안병직ㆍ이영훈,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기파랑, 2008, 217-223.
46 같은 책 329-330.
경험과 추억은 흔히 돈의 흐름과 연관된다. 1970년대 이후 청와대부터 비판적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타락한 맴모니즘의 현실을 질타하는 도덕 담론이 홍수를 이루었지만, 황금 만능주의는 역설적으로 일종의 해방 기제였다. 돈이면 다 되 는 세상이란 곧 모든 사회적 차별과 억압조차 돈 하나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는 세상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돈의 위력이 세상을 집어삼킨 상황은 모든 주체를 소유권적 주체로 만들었고 삶의 거의 모든 부면(部面)은 보유 화폐량으로 결정 되기 십상이었다. 왕의 목숨을 구해야 가능할 신분 상승과 출세가 오직 돈 하 나면 다 해결되는 이 놀라운 해방의 세계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출몰할 수 있 게 된다. 모든 구체적 관계를 화폐를 통한 교환관계라는 추상의 세계로 번역할 수 있는 주체가 곧 개인일 것이다. 이 개인이 곧 소유권적 주체일 텐데, 사적 소 유권으로 무장하지 않고서 자본주의 시장의 정글전을 수행할 주체가 있겠는 가. 소유권적 주체는 좌우 구도하에서 어디에 속할까?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물론 사회관계 전체를 분절화하고 그 사이의 소통은 
오직 화폐를 매개로 한 거래에 의해 규정받게 함으로써 우익의 생태계는 정교 한 이해관계 계산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우익의 생태계는 공적 영 역의 무책임과 사적 영역의 이악함이 결합된 양상을 띠기도 한다. 양자가 충돌 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특수 이익의 보편 이익화가 오랫동안 실천되어왔 다. 문제는 이로부터 공적 이익을 둘러싼 사적 이익의 경쟁이 극심해진다는 점 이었다. 결국 정치는 사적 이익의 공적인 추구라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우익의 생태계로부터 우익의 위장과 좌익의 머리를 가진 혼종적 주체들이 자 라나기도 한다.  
우익의 발전주의는 ‘나의 발전이 국가의 발전’이라는 논리를 최소화하고 그 
대신 ‘국가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강조함으로써, 대아(大我)로 소실되 는 멸사봉공의 소아(小我)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판타지 담 론에도 불구하고 소아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시장의 자유였다. 시장
 
의 자유는 일종의 동족 식인의 카니발리즘(carnivalism)일 수 있다. 바흐친에 따 르면 민중의 전복적 행위와 의례가 집중되는 비일상적 시공간으로서의 카니발 (carnival)이 경쟁과 우승열패의 카니발리즘이 일상적으로 실천되는 시장의 자 유로 넘어가는 과정이야말로 한국의 발전과정을 압축하는 언어적 재현일지 모 른다. 우익정치가 계획하고 구성해낸 집단살림으로서의 국민경제가 모든 구성 원의 삶을 실질적으로 포섭하게 된 상황 속에서 그 결정적 조건은 이 체계의 논 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으로 체화해내는 주체의 생산 과정이다. 이는 다른 말로, 주권 국가의 카니발리즘 속에 호모 사케르가 등장했다면 시장의 카니발 리즘 속에서도 생존 가능한 주체의 전망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호모 포시덴스의 역사가 될 것이다. 
물론 우익정치의 합리적 세계는 한국에서 구현된 적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공정한 경쟁과 기회의 평등은 불가능한 기획에 가까웠고, 언제나 결핍된 욕망 처럼 뭔가가 욕망되어야 했던 것이 한국의 현대사였다. 시장의 자유경쟁 문법 을 무색하게 만든 부당 경쟁과 특권과 정치 개입과 각종 연줄망의 작동을 보 여주는 긴 목록이 작성 가능한 것이 한국 현대사다. 우익 스스로 배반한 우익 정치의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낙차를 메꾸기 위한 실천의 대표적 이름이 민주 화였다.  
1970년대 민주화의 주역 중 하나인 보수야당의 김대중은 맑스주의의 허상 과 케인스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시장경제의 핵심은 진정으로 창의적인 자 유기업인과 자유기업의 존재”임을 강조했다.47 박현채를 위시한 1960~70년대 비판적 지식인들이 집단 집필한 『대중경제론』이 미국식 자유주의로 무장한 유 종일 등에 의해 『대중참여경제론』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민주화가 곧 자유화 였음을 상징한다. 민주화조차 어쩌지 못하는 시장의 위력은 ‘권력이 시장에 넘
47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삼인, 2010, 223.
어갔다’는 민주정권 대통령의 고백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시장 바깥의 삶은 따로 없다는 깨달음 속에 우익주체형식의 위력은 배 가될 수밖에 없다. 공정성이 보장되지 못할수록 자유경쟁의 열망은 커져갔다 고 보이는데, 그 유토피아의 문법을 따르기 위한 무한대의 자기계발이야말로 한국의 우익정치가 성취한 가장 큰 업적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시장의 문법 은 자신의 실패를 통해 최대의 성과를 낸 셈이다. 좌절된 시장의 공정성이야말 로 더욱 강력한 자기계발의 주체들을 길러내는 최고의 채찍질일 것이다. 때로 시장은 광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아고라는 광장의 공적 정치
와 시장의 사적 거래가 공존하던 곳이기도 했다. 시장의 주체와 광장의 주체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 시장에서 광장으로 나아가는 열정과 광장에서 시장으로 회귀하는 욕망이 뒤엉킨 ‘시광장’ 모퉁이 어딘가에는 우리 모두의 우익적 형상 이 어른거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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