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칼럼] 정의연도, 박유하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김윤덕 칼럼 정의연도, 박유하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제국의 위안부는 無罪였지만 박유하 주장이 옳다는 건 아냐 동지애 매춘적 강간 주장 피해자에 대한 혐오 불러 정부는 정의연 독주 방관만 진정한 사과 이끌 외교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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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 칼럼] 정의연도, 박유하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 ‘제국의 위안부’는 無罪였지만
- 박유하 주장이 옳다는 건 아냐
- ‘동지애’ ‘매춘적 강간’ 주장
- 피해자에 대한 혐오 불러
- 정부는 ‘정의연 독주’ 방관만
- 진정한 사과 이끌 외교 절실
김윤덕 선임기자
입력 2023.11.07.
조선일보
일본 저널리스트 도이 도시쿠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의 일생을 추적한 책 ‘기억과 살다’에는 매우 논쟁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도야마의 군수 공장을 탈출한 자신을 붙잡아 강간한 뒤 군 위안소로 끌고 간 고바야시 헌병에 대한 강덕경의 증언이다. 고바야시는 15세 소녀를 지옥 구덩이로 던져 넣은 악마지만, “가끔 주먹밥과 건빵을 갖다주고 뱃놀이도 데려가 준 사람이었다”고 강덕경은 회고한다. “고바야시에게서만 그런 일을 당했다면 위안부로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가해자를 향한 증오와 애착의 공존에 저자는 범죄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한다. 매 맞는 아내가 남편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듯, 물리적·심리적 감금 상태에 있던 위안부들은 생사여탈권을 쥔 일본군이 사소한 자비를 베풀 때 과도한 애착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의 해석은 달랐다. 그는 강덕경 같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 군인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 또는 ‘동지애’일 수 있다고 해서 논란을 불렀다. 황국신민으로 애국자 역할도 담당해야 했던 조선인 위안부에겐 일본군과의 동지적 관계가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고, 일본군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웃던 기억을 은폐하는 건 그들을 또 한번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박유하의 문제적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사법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책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루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여성들에게 ‘동지애’란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이는 여성 폭력에 대한 무지이자, 피해자가 아닌 ‘제국의 시각’에서 위안부를 바라본 ‘인간에 대한 몰이해’다.
일본의 국가적 책임 유무를 결정하는 두 요소 ‘강제 연행’과 ‘위안소의 매춘적 성격’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여성을 직접 끌고 간 주체는 포주나 업자이지 일본군이었던 경우는 적어 국가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매춘적 강간’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통해 매춘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 위안부도 적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군 위안부 제도는 그것이 강제 연행이든 사기든, 성폭력이든 성매매든, 일본군과 사랑을 했든 안 했든, 국가 조직인 군대가 여성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 군 당국과 행정기관의 비호와 묵인 없이 위안부 동원이 불가능했다는 건 일본 학자들도 동의하는 바다. 박유하가 주요 근거로 삼은 센다 가코의 책 ‘종군 위안부’조차 ‘군의 명령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가 제1선 장병들의 성욕 처리 용구로 이용됐던 여성’으로 위안부를 정의한다.
‘제국의 위안부’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윤명숙의 일본 박사 학위 저술 ‘조선인 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언이 빼곡하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는 과도한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위안부 담론을 독점한 채 일본 정부에 강경 일변도로 대응해 온 정대협(정의연)의 운동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본 정부가 왜 그토록 법적 배상 책임을 거부하는지도 소상히 밝힌다.
문제는 박 교수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썼다”는 이 책이 아베 정권과 일본 극우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조차 “매춘이 자랑이냐” “가짜 위안부 색출하라”는 모욕과 멸시가 쏟아졌고, 좌파와 정의연은 이를 반일 선동에 이용했다. 박 교수는 “좌우 모두 내 책을 오독했다”고 했지만, 누구를 위한 화해인지 오독하게끔 글을 쓴 건 저자의 책임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 흘렀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일차적 책임은 정의연의 독주를 수수방관한 정부에 있다. 박근혜 정부가 아베 정권과 우여곡절 끝에 타결한 합의마저 문재인 정부가 휴지 조각으로 만든 뒤로는 단 한 걸음의 진전도 없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챙겼다”는 이용수의 분노처럼 한일 양국 간 협상에서도, 정의연과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할머니들은 언제고 소외됐다.
이제라도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본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는 주장에 분노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했던 강덕경은 “일본 정부가 진상을 밝혀준다면 배상을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대구에서 만난 이용수 할머니는 “돈을 바라는 게 아니라 죽기 전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외교로 풀어야 한다. 일본 총리가 고개 숙여 할머니들 손을 잡아드리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 그건 대통령과 정부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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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눈물이 나를 암과 싸우게 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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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섭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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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눈물이 나를 암과 싸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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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나는 2015년 3월 23일 출근길에 39도가 넘는 고열로 병원에 입원하여 엑스레이, 엠알아이, 시티, 패트, 피검사, 심전도 등 고열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수많은 검사를 받았다. 해열제로 열을 강제로 떨어뜨리면 발열 원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의사가 발열의 진원이 위에서 발견된 악성종양이라는 사실을 찾아낼 때까지 약 보름간을 온몸을 휘감고 있는 불덩이같이 뜨거운 열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 당시 나는 오십견으로 어깨가 마비되어서 일단 침대에 누우면 39도의 뜨거운 등과 매트리스가 밀착된 상태에서 몸을 뒤척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붉은 불길 속에 갇힌 몸뚱이가 불길에 타들어 가는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려워서 휠체어에 앉아서 날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의사와 집사람이 억지로라도 잠을 자지 않으면 병이 악화할 것이라고 주의를 시키면서 침대에 누우라고 요구할 때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침대에 누워있는 또 다른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환각에 빠져들곤 했다.
각종 검사를 한 후에 고열의 원인이 위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설사 내가 지금 죽는다 해도 이 뜨거운 불길 속에서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혹독한 고통을 겪은 암 환자들은 통증이 죽음보다 무섭다는 것을 깨닫는다. 암 병동에서는 치료를 포기하고 죽기로 했다가 통증 때문에 입원한 환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나는 2015년 4월 8일 위 절제 수술을 받은 후에 약 1년간 암과의 처절한 싸움을 치러야만 했다. 첫 번째 닥친 위기는 수술 후유증으로 폐에 물이 고여서 유발된 호흡 장애였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나는 폐에 고인 물에 두 개의 호수를 연결하여 물을 몸 밖 물통으로 받아내는 포크테 일(PORK TALE)이라는 시술을 받았다. 부분 마취를 하고 갈비뼈 사이를 펀치로 구멍을 내듯이 공간을 만들 때마다 전신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고 두려웠다. 나는 퇴원 후에도 폐에 물이 차서 또 한 번 포크테일(PORK TALE)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두 번째는 심장약 복용으로 인해 혈압이 65로 급격하게 내려가 화장실을 가다가 낡은 집채가 무너지듯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입원하여 심장약을 반으로 줄이고 나서야 증상은 많이 호전되었다
암 병동의 분위기는 생각보다는 비교적 밝고 활기찼다. 신병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과 교관을 연상케 했다. 팀장 의사를 필두로 2~3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오전 오후 한 차례씩 회진하는데, 그들의 눈은 상방 15도를 향했고 걸음걸이는 아주 힘차고 빨랐다. 자유롭게 살던 젊은이가 군대라는 규율이 엄격한 조직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두렵고 벅차지만, 교관이 시행하는 혹독한 훈련과정을 통하여 적을 무찌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사기로 충만한 병사로 새로 태어나듯이 악성종양으로 죽음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젖어있던 환자들은 의사의 과학적인 치료과정을 통하여 암을 퇴치하고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거나 설사 악성종양을 원천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 해도 종양으로 발생한 부작용을 치료하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낙천가로 다시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암을 앓고 있는 암 환자 아닌가? 다만 그 운명의 날을 알지 못할 뿐이지.
나는 환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부분 암 환자는 나처럼 마음이 여리고 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착한 사람들일까?
볼프강 슈미츠 바우어(Wolfgang Schmidbauer)는 조력자에 대한 이상적인 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취지로 쓴 문제작 ‘무력한 조력자’에서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남을 돕다가 급기야 조직활동에 중독되는 조력자들의 독특한 정신구조를 가리켜 조력자 증후군(helper syndrome)이라고 정의했다. 성직자,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심리사, 언어치료사, 교사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대부분 남을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조력자 증후군의 특징은 개인적 감정과 특성 때문이 아니라 관련 인물의 이상화된 상에 적응하려는 행동방식 때문에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의 이면에는, 억압되었기에 허기져서 거대한 자기애적 욕구를 일으키는, 깊은 자기애적 상처가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채기화 교수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부단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살피고 스스로 위로하는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 충고한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남을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조력자 증후군’이라는 정신구조를 가진 ‘약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비록 가난하지만 착하고 정의롭게 살았다고 자부하고 살았다. 적자에 허덕이는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대표이사의 경영방침에 맞서기도 하였고 경영실적을 배가시키기 위하여 매일 날밤을 지새웠다. 또한, 박봉을 불평하는 능력 있는 직원을 데리고 있고 싶은 욕심에 내 월급의 일부를 사용하기도 했다. 문제는 나의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머리는 수긍하는데 가슴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소위 말하는 스트레스로 이어져 위암이라는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 차체를 감당하기에 차량의 엔진 용량이 작어서 차량 자체가 파손된 격이 된 셈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최소공배수는 착할 선(善)의 사전적 의미인 ‘어질다 플러스 좋다’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성적(理性的)으로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고자 세상과 맞서지만, 감정적(感情的)으로는 이를 거부하여 발생하는 가슴앓이를 ‘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이라 부르고자 한다. 나는 나이 육십 대 중반이 돼서야 나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어인 증후군에 걸린 환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증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병원 수술대에 누워서 몸이 내게 수차례 보낸 위암 전조증상을 무시한 것에 대하여 뼈저린 후회를 했었다. 몸은 몇 번이고 면도날로 왼쪽과 오른쪽 가슴을 찔리는 듯한 격한 통증을 가하면서 내게 대화를 요청했지만 나는 이를 무시하고 약국에서 담에 바르는 파스를 사서 붙이고 동네 한의원에서 침과 뜸질 치료 만을 받는 등 종합검진을 외면하고 통증 완화를 위한 임시방편적인 치료만 받았다.
이제 나는 몸에 말을 건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지난밤 늦게 과식을 한 경우에는 “밤새도록 그 많은 음식물을 소화하느라고 고생 많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정신 놓고 잠이 들었었구나. 몸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앞으로 주의할게!”라고 몸에 사과한다.
두 번째는 마음과의 대화이다. 몸이 많이 회복되어서 사회생활을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백방으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60대 중반 나이에 직장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워 세상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텔레비전으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보도를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몇 날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어두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망상! 망상! 망상!” 이라고 속으로 크게 세 번을 외친 후에 정신을 차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망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탐진치(貪瞋癡,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 같은 망상이 발생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시냇가에 흙탕물같이 망상은 항상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흙탕물이 잤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흙탕물 속에 빠져서 허우덕 대는 사람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깨끗한 정신으로 진상과 망상을 분별하면서 마음을 바라보고자 노력한다면 망상에 빠져들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세 번째는 매일 새벽에 ‘자존감(自尊感)’을 화두로 명상에 젖는 것이다. 행복이란 이웃집 담장에 올라가서 화려하고 부유한 친구의 위인전을 집필하는 것이 아니라 초라하고 가난한 내 인생의 자서전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끝으로 나의 졸작이 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 때문에 고통받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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