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건록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비록
무쓰 무네미쓰 저자(글) · 이용수 번역
논형 · 2021년 08월 20일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역사/문화 > 동양사 > 일본사 > 일본근현대사
수상내역/미디어추천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동아일보 > 2021년 9월 3주 선정
청일전쟁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청일전쟁의 본질은 “일본이 청국과 벌인 조선침략 전쟁”이다.
그 시작은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이다.
『건건록蹇蹇錄』은 청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가 동학농민운동의 발발부터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 일청강화조약까지의 외교사안을 서술한 책이다. 무쓰 무네미쓰는 ‘외무성의 공문기록을 기초로 하면서도 공식 문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진의를 드러내어 외교의 진면목을 다시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으나 일본과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삭제했다. 새로운 번역과 청일전쟁연구의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를 통해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최종목적과 청일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작가정보
저자(글) 무쓰 무네미쓰
인물정보
정치가/정당인
陸奧宗光(1844~1897)
에도江戸 막부 말기 기슈번紀州藩(와카야마현和歌山県) 출신 무사武士. 메이지明治 시대 외교관, 정치가. 메이지 초의 판적봉환, 폐번치현, 징병령, 지조개정 등에 큰 영항을 끼쳤다.
10대 중반에 에도에 유학, 야쓰이 솟켄安井息軒, 미즈모토 나루미水本成美 등에게 배우면서 도사土佐의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죠슈長州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교유했다. 1863년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고베神戸 해군조련소에 들어갔고, 1867년 이후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海援隊에서 활동하며 시종일관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료마가 암살된 후 복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덴만야天満屋사건).
메이지 신정부에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천거로 외국사무국에서 관직을 처음 맡았다. 그 후 효고현兵庫県 지사(1869),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지사(1871)를 지냈으나 삿쵸薩長의 번벌 정치에 격분, 사직하고 와카야마로 낙향했다. 1877년 고치현高知県 도사의 자유민권운동 정치단체 릿시샤立志社의 정부전복기도에 연루되어 금고 5년형으로 투옥된다. 1883년 1월 특사로 출옥한 뒤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유럽에 유학, 런던과 빈에서 내각제도, 의회, 민주정치 등에 관해 공부했다.
1886년 귀국, 변리공사 직책으로 외무성에 들어간 후 주미 공사, 농상대신을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된다. 1892년 이토 히로부미 제2차 내각의 외무대신(제5대)에 취임, 청일전쟁 개전 직전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 막말 이래 불평등조약인 영사재판권 철폐에 성공한다. 이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도 조약을 개정. 그해 7월 25일 발발한 청일전쟁의 전후 과정 및 삼국간섭의 외교를 주도하여 ‘무쓰외교’라는 말이 생겼다.‘면도칼 대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일본 외무성 구내에 유일하게 그의 동상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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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
번역 이용수
인물정보
유학/동양철학자 번역가/통역사>일본어
李龍守
연세대학교 및 동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일본근세사상 전공). 공직에 있으면서 우연히 일본을 만난 뒤 에도시대 일본사상에 주목하여, 일본근세ㆍ근대사상의 본질과 근대화의 관계에 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연세대ㆍ한국항공대ㆍ경희대에서 동양철학과 일본의 사상ㆍ문화를 가르쳤다. 현재 아시아문화사상연구소장,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다산 정약용과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실학관 비교」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역서에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源了圓, 『德川思想小史』), 『일본사상으로 본 일본의 본질』(前田勉, 『兵学と朱子学ㆍ蘭学ㆍ国学-近世日本思想史の構図』), 『에도 후기의 사상공간』(前田勉, 『江戸後期の思想空間』)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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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의 세계
목차
서언
제1장 동학당의 난
동학당의 난 ■ 조선국 파병의 내각 회의 결정 ■ 일청 양국의 조선에서의 권력다툼 ■ 위안스카이袁世凱, 왕봉조汪鳳藻 등의 오판 ■ 조선 국왕, 청국에 원병을 청함
제2장 일청 양국 군대의 조선 파견
톈진조약 ■ 청국 정부가 조선국에 파병함을 우리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청국 정부의 공문에 있는 ‘보호속방’이라는 말에 대한 제국 정부의 항의 ■ 제국 정부가 청국 정부에 대해 조선국에 파병한다는 공문 통보
제3장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및 취임 후 조선의 형세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 오토리 공사, 해병을 인솔하여 경성에 들어가다 ■ 조선에서의 구미 각국 관민官民의 정황
제4장 조선국 내정 개혁을 위한 일청 양국 공동위원 파견 제안
일청 양국 공동위원의 조선 파견에 관한 각의 ■ 일청 양국 공동위원회의 조선국 파견에 대해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를 거쳐 동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일청 공동위원설립 제안에 대한 청국 정부로부터의 이의 ■ 청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1차 절교서
제5장 조선 개혁과 청한 종속 문제에 관한 개설
서구적 신문명과 동아적 구문명의 충돌 ■ 조선 내정 개혁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朝野의 여론 ■ 조선 문제에 관한 주제와 객제의 관계
제6장 조선 내정 개혁 제1기
청장淸? 섭지초葉志超가 위안스카이에 보낸 전보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기밀 훈령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오토리 공사의 건의 ■ 조선 국왕, 스스로 죄가 있다는 조서를 발포?布함 ■ 오토리 공사에게 최종 수단을 취하라는 전훈電訓 ■ 오토리 공사, 조선 정부에 최종 공문을 보냄 ■ 위안스카이, 돌연 귀국 ■ 용산 주둔 제국군대가 경성에 들어감 ■ 원군의 입궐 ■ 조선 국왕, 오토리 공사의 참내參內 요청 ■ 선전宣戰의 조칙
제7장 구미 각국의 간섭
러시아의 권고
이홍장과 카시니 백작의 담판 ■ 러시아 정부의 권고 ■ 러시아 정부의 권고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러시아 정부, 일청 양국 군대가 함께 철수하라는 권고 ■ 러시아의 권고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일본 정부의 회답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공문 ■ 러시아 정부로부터 일본 제국의 조선에 대한 요구 중 적어도 조선과 열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을 위배하는 조건이 있을 경우 러시아 정부는 결코 이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의注意
영국의 중재
베이징 주재 영국 특명전권공사 오코너와 총리아문의 협의 ■ 영국의 중재 ■ 오코너의 거중居中 주선에 따라 고무라小村 대리공사가 총리아문을 방문하였으나 청국 정부는 어떤 새로운 안을 제시하지 않음 ■ 제국 정부, 고무라 대리공사에게 전훈하여 청국에게 일본 정부의 제2차 절교서를 선언하게 함 ■ 청국 정부가 러시아의 중재에 중점을 두었던 이유 ■ 영국 정부의 2차 중재 ■ 영국의 2차 중재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 일본 정부의 금번 청국 정부에 대한 요구는 일찍이 담판의 기초로 삼겠다고 확언한 바와 모순되고 또 그 범위를 벗어났으므로, 만약 이런 정략을 고집하여 일청 양국이 개전하게 되면 일본 정부는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선언 ■ 이에 대한 제국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 향후 일청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져도, 청국의 상하이 및 그 근방에서 전쟁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두고 싶다는 공문 통보 ■ 영국 정부, 일청 양국 군대가 각각 조선을 점령하고 서서히 양국이 협의할 것을 권고
미국의 충고
미국의 충고 ■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회답
다른 열국과의 관계
구미 각국의 국외 중립
제8장 6월 22일 이후 개전까지의 이홍장의 위치
이홍장의 외교 방책과 군사 전략 ■ 이홍장의 출신과 경력 ■ 장발적長髮賊 ■ 염비捻匪 ■ 톈진 소동 ■ 청국 황제, 이홍장의 실책을 문책하여 그 득실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설치를 명함
제9장 조선 사건과 일영조약 개정
조약개정의 역사 ■ 조약개정안 조사위원에게 내린 조칙 ■ 반면적 대등조약안 계통의 변경 ■ 우리 정부, 영국 정부와 조약개정의 담판을 재개 ■ 양이적攘夷的 보수론의 유행 ■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정부가 고용한 칼드웰 건 및 일본 군용 전신이 인천의 외국인 거류지를 관통하여 가설된 사건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기까지 신조약의 조인을 거절한다는 통첩 ■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일영조약의 조인 ■ 여순旅順 학살사건과 일미조약과의 관계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청한 종속 관계에 관하여 조선 정부가 구미 각국에 보낸 공문 ■ 거문도巨文島 사건 ■ 아산 전투 개시 전의 관련된 대한?韓 정략 ■ 고승호高陞號 사건 ■ 위 사건과 관련한 아오키?木 공사의 전보 ■ 위 사건과 관련한 영국 정부의 공문 ■ 위 사건에 관한 법제국 장관 스에마쓰 겐쵸末松謙澄의 보고 ■ 홀랜드 및 웨스트레이크 두 박사의 의견
제11장 조선 내정 개혁 제2기
잠정 합동 조관條款 ■ 일한 공수攻守동맹조약 ■ 대원군의 복수 정략 ■ 김金, 어魚 내각 ■ 정혁파와 군국기무처 ■ 대원군 및 조선 내각 각료들이 평양 주재 청국 장수와 내통한 밀서의 탄로 ■ 조선 국토를 일청 양국 군대가 각각 그 절반을 점령한 상태 ■ 대한?韓 정략 관련 각의 ■ 조선에서의 철도 및 전신 문제 ■ 오토리 공사의 소환과 이노우에井上 백작의 부임
제12장 평양 및 황해 전승의 결과
평양, 황해 전승에 대한 구주 각국의 여론 ■ 평양, 황해 전승 후 우리 국민의 희망 ■ 내외 사정의 충돌
제13장 영사재판제도와 전쟁과의 관계
치외법권과 영사재판제도의 구별 ■ 영국인 피고트의 영사재판론 ■ 미국인 죠지 카메론과 존 와일드 사건 ■ 이 사건에 관한 영국 공사의 항의 ■ 위 사건에 관한 일본ㆍ프랑스 양국 정부의 쟁의 ■ 이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의 항의 ■ 사세보佐世保 포획심검소에서 영국 상선 익생호益生?를 재판하다 ■ 장발적난長髮賊? 시대에 청국에서의 구미 각국의 영사재판권 남용
제14장 강화 담판 개시 전 청국 및 구주 여러 강국의 거동
청국 각 성의 총독 및 순무巡撫가 강화의 득실에 관해 상주上奏한 의견 ■ 데트링, 고베에 오다 ■ 데트링 사명의 목적 ■ 영국 정부가 시도한 구주 제 강국의 연합 중재 ■ 영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대해, 조선의 독립과 군비상환의 두 조건으로 다시 중재를 요청함 ■ 영국의 제의에 대한 회답안 ■ 영국 정부의 제의에 대한 제국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의 연합중재설의 실패 ■ 영러 양국이 일청 양국에 대한 상태에 관한 독일 황제의 혹평
제15장 일청 강화의 발단
미국 정부가 우의적 중재를 하겠다고 제의해 옴 ■ 위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청국 정부, 베이징ㆍ도쿄 주재 미국 공사를 거쳐 우리 정부에게 강화 회담을 열 것을 제의해 옴 ■ 청국 정부, 장張ㆍ소邵 두 사절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한다는 뜻을 통첩해 옴 ■ 강화 조건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의 희망 ■ 우리 정부가 청국에 요구한 강화 조건을 구미 각국에 예고할 것인가에 관한 각의 ■ 강화조약에 관한 히로시마 대본영에서의 어전회의 ■ 이토 내각총리대신의 주언奏言 ■ 이토 내각총리대신과 내가 전권변리대신에 임명되다
제16장 히로시마 담판
청국의 장張ㆍ소邵 두 사신의 도착 ■ 제1차 히로시마 담판 ■ 2차 히로시마 담판 ■ 이토 전권변리대사의 연설 ■ 이토 전권대사가 오정방에게 한 사담 ■ 장ㆍ소 두 사절의 귀국
제17장 시모노세키 담판(상)
청국 두등대신頭等大臣 이홍장이 찾아 옴
청국 정부, 미국 공사를 경유하여 이홍장을 두등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한다는 뜻을 통지해 오다 ■ 이홍장,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다 ■ 제1차 시모노세키 담판 ■ 청국 전권대신, 휴전을 제의하다 ■ 제2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휴전 제의에 관한 우리나라 전권대신의 회답 ■ 제3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휴전문제 철회
이홍장의 조난遭難 및 휴전조약
이홍장의 조난 ■ 이토 전권대신, 히로시마로 가다 ■ 제4차 시모노세키 담판 ■ 이토 전권대신, 시모노세키에 돌아와 휴전조약에 조인
제18장 시모노세키 담판(하)
강화조약의 조인
우리의 강화조약안을 청국 사신에게 송달하다 ■ 이에 대한 청국 전권대신의 회답 ■ 청국 전권대신의 회답에 대한 우리 전권대신의 반론 ■ 이경방李?方, 흠차 전권대신에 임명되다 ■ 청국 전권대신이 일본의 강화조약안에 대해 수정안을 제출하다 ■ 제5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수정안에 대한 일본 전권대신의 재수정안 제출 ■ 제6차 시모노세키 담판 ■ 제7차 시모노세키 담판 ■ 강화조약의 조인 ■ 청국 전권대신의 귀국 ■ 우리 전권대신, 히로시마로 돌아간 즉시 행재소를 참내하여 조약조인 결과를 복명하다 ■ 강화조약 및 별약의 비준과 내각 서기관장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전권대신으로 지부芝?에 파견되다 ■ 강화조약 비준교환을 완료함
제19장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상)
3국간섭에 대한 정부의 조치
러시아의 충고 ■ 히로시마 행재소에서의 어전회의 ■ 마이코舞子 회의 ■ 3국간섭에 관해 니시西 공사에게 보낸 1차 전훈 ■ 위 사건에 관해 가토加藤 공사에게 보낸 전훈 ■ 위 사건에 관해 구리노栗野 공사에게 보낸 전훈 ■ 니시 공사의 답전 ■ 가토 공사의 1차 회신 ■ 가토 공사의 2차 회신 ■ 구리노 공사의 회신 ■ 다카히라高平 공사의 전보 ■ 니시 공사에게 보낸 2차 전훈 ■ 니시 공사의 회신 전보 ■ 교토의 회의 ■ 제국 정부, 러ㆍ독ㆍ프 3국 정부에게 봉천반도 포기를 약속함
제20장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중)
3국간섭의 유래
3국간섭 전후 러시아의 형세 ■ 러시아 정부가 일ㆍ러 양국 정부 사이에 상호 의견 교환을 권유 ■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가 재차 일ㆍ러 양국이 의견을 교환할 것을 제의 ■ 니시 공사의 기밀 서신 ■ 3국간섭 전후의 독일의 형세 ■ 독일의 표변에 대한 아오키 공사의 전신 보고 ■ 독일이 러시아ㆍ프랑스와 동맹한 것에 관한 다카히라高平 공사의 전신 ■ 영국 주재 독일대사와 가토 공사의 담판에 관한 동 공사의 전신 보고 ■ 3국간섭 전후의 프랑스의 형세
제21장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하)
결론
요동반도 반환 후 국민의 불평 ■ 당시 내외의 형세 ■ 산 스테파노San Stafano 조약
해설: 『건건록』 간행 사정/ 교주校注/ 역자해제/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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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건건록』과 무쓰 무네미쓰
『건건록』의 저자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 역사와 메이지시대 일본 정치외교사에 밝지 않은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낯설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일본 외교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청일전쟁(1894~1895)’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다. 무쓰가 청일전쟁 발발과 경과, 그리고 삼국간섭 등의 수습을 외교적으로 ‘지도指導’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 이 책 『건건록』이다.
건蹇은 ‘한 쪽 다리를 절름거린다, 즉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다. ‘건건蹇蹇’은 『역경易經』의 제39괘인 「건괘蹇卦」의 “왕신건건, 비궁지고王臣蹇蹇, 匪躬之故[임금과 신하가 험난한(절름거리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이유를 두지 않음이다(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에서 따 온 것이다. 즉 이 책의 제목은 청일전쟁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이익을 위해 군주와 나라에 충성을 다한 과정을 기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쓰 무네미쓰는 근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로 평가 받는다. 일본 외무성 구내에는 일본 역대 외무대신 중 무쓰 무네미쓰만 유일하게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쓰는 조선멸시·낙후·정체론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무쓰 외교’의 핵심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주권과 인권 침해는 조금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반국제적·반평화적·반인도적·반민족적 인식의 현실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 사회는 여전히 무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묻고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의 본질: “경복궁을 점령하라”
일본 정부와 군부는 『메이지27년일청전사明治二十七年日淸?史』를 통해 “조선의 독립 실현을 방해하는 청국세력을 조선에서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청국과 싸웠다”고 청일전쟁의 목적을 밝혔다. 과연 그러한가.
무쓰 무네미쓰는 이 책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첫머리에서 “청일전쟁에서는 육지와 해상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오직 ‘아산 전투’만 외교가 앞서서 전쟁의 발단을 열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무쓰는 이 책에서 스스로 청일전쟁의 목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책의 행간과 교주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철저한 교주 및 해설에서 우리는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청일전쟁의 최초 무력충돌이 1894년 7월 25일의 ‘풍도해전’이라고 소개하며 대부분의 일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무쓰의 지휘 아래 오토리 조선 주재 일본공사가 실행한,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의 ‘경복궁 무력점령’이 최초의 무력충돌이다. 이른바 7·23 사변, 즉 경복궁 점령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청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각본에 따라 수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이 책에서 무쓰는 이를 시인한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먼저 조선 국왕을 우리 수중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본서 141~142쪽)”고 했다.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조선 국왕을 ‘포로’로 삼은 뒤 조선 정부로부터 “아산의 청국 군대를 몰아내는 위탁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받아내게 된 것”(본서 140쪽), 바로 그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일본의 실질적인 조선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의 승리는 곧 조선의 망국이었다.
청일전쟁의 최고 권위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
『건건록』은 일본 외무성에서 처음 인쇄하여 1896년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외교 기밀에 관련된 비밀문서로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1929년 1월 이와나미 출판사가 『백작 무쓰 무네미쓰 유고』를 전문과 함께 출판하면서 비로소 대중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는 칭송받으며 읽히는 명저이다.
한국에서는 두 차례 번역되었으나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번역에서는 선행 서적에서 일부 오역과 오류, 오식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바로 잡고 청일전쟁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상세한 해설과 교주를 추가했다. 따라서 이 책은 제대로 된 한국어판이라 할 수 있다. 나카쓰카 아키라는 『건건록』 출판과정 및 초고와 간행본 사이의 차이를 세밀하게 비교하여 청일전쟁의 본질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았다고 평가받는다. 외교의 진면목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무쓰 스스로 서언에서 밝히기도 했으며, 후대의 연구에서도 무쓰가 청일전쟁의 외교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다른 외교기록 문서와 비교하면 무쓰는 일본에 불리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은 삭제했다. 나카쓰카 아키라의 교주는 『건건록』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서 삭제되었고 개변된 부분의 원 문장을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해설 또한 80년대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대폭 수정되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무쓰의 퇴고의 흔적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무쓰의 심정을 추적하고, 청일전쟁기에 일본외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망국의 원인을 되새기고 반성하다
‘청일전쟁’ 그 자체를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전쟁을 먼 옛날 중국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두 나라만의 싸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19세기 말 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영유하기 위해 싸웠다는 사실, 그 전쟁이 이 나라와 민중의 삶을 짓밟고, 민중의 재산과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한 결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기반을 구축한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문제다. ‘청일전쟁’의 가장 큰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반성하지 않는 것 역시 오늘날 다시 되짚어 보아야 할 정치외교적 이슈가 아닌가 생각한다.
국가 존립의 근거는 국토를 보전하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국익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유,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에 다시 되새겨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건건록』을 다시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읽는 내내 뼈아플 것이지만, 역사를 바로 알고 그 맥락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해야 미래를 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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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ISBN 9788963572512
발행(출시)일자 2021년 08월 20일
쪽수 474쪽
건건록은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이란 조선 국권 침탈이 어떤 연유로 일어나게 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묘미는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전략입니다. 이 책은 특히 외교관이나 앞으로 외교관의 꿈을 가진 젊은이들 혹은 세계정세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읽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쓰는 뼛속 깊이 국익만을 생각한 인물입니다. 열강의 무분별한 침략 행위를 보면서 그리고 일본이 지난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과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조선을 발판 삼아 북진정책의 꿈을 현실화한 숨은 전략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소름 돋았던 이유는 일본의 꽤 능력 있는 정부 관리가 냉정하게 국제 정세를 읽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자국의 득실에 있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었다는 점 등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더군요.
일본은 동학의 난 이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과의 강제 수교를 맺습니다. 이때 국내 정세는 반외세. 봉건사상 혹은 개혁 바람으로 말 그대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근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조선은 신식 군대를 세우게 되고 이로 인해 구식 군대가 차별 당했다 여긴 구식군대는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을 해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일로 흥선대원군이 청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동학농민운동까지 일어나면서 조선은 청에 의존도를 높이게되죠. 더불어 청의 조선 정치 개입은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책 도입부부터 냉정하게 바라보기 힘들어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던 사건들을 하나씩 찾아 읽음으로써 그리고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파란만장한 일련의 사건들을 알아가게 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책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눈에 밟혔던 장은 제1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사재판제도와 전쟁과의 관계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바로 치외법권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서구 열강들이 약소국을 어떤 거점으로 서서히 식민지화 했는지를 무쓰는 외교의 관점에서 기록해 놓았더군요. 사실 소름 돋은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일본도 일찍이 경험한 치외법권을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법에는 득과 실이 있고 자국에 득으로 작동되게끔 어떻게 사고하느냐?라는 그의 생각이 무서웠다고나 할까요?
"치외법권이라 부르는 제도의 근원을 찾아보면, 구미 각국 정부가 이른바 기독교 국가 이외 나라의 제도와 법률은 신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나라와 처음에 조약을 체결할때 반드시 그 조약 안에서 자국민을 위한 영사재판관할을 시행한다는 조항을 만들고, 결국 어떤 나라의 영토 안에 다른 나라의 작은 식민지를 두는 것과 같은 일종의 변형체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189쪽
아무튼 다시 한번 건건록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고종 31년에, 동학당이 난을 일으키자(한국에서는 동학혁명·동학농민운동·동학운동 또는 동학 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이라 한다. 동학교도들이 스스로를 '동학당'이라 칭한 역사적 사실은 없다... 역서의 성격상 원저자의 '동학당의 난'을 그대로 인용하여 쓰기로 했다. 17쪽 주석 참고) 조선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게 되고 일본은 북진정책을 펼치며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로 삼으려했던 조선이 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자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지요.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승전국 일본이 중국의 요동반도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남하정책을 추진했던 러시아와 대립하게 되고 이로써 일본은 삼국간섭을 받게 됩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힘에 의해 승전국 일본은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죠. 이 이후에 벌어진 을미사변부터 을미개혁까지(청일전쟁시 일어난 갑오개혁이 중간에 중단되었다가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전국이 되면서 다시 재개된 3차 갑오개혁)의 이야기는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시하게 다루는 내용은 역시 청일전쟁이죠.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이 일본 침략을 두고 일제가 조선을 돕기 위해 펼친 정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분들께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께 이 책을 읽고도 변함없으실지 여쭤보고 싶더라고요. 이 책은 꽤 조선을 걱정하는 척, 위하는 척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의 검은 속내가 그대로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기록이 훗날 외교 문제가 될까 싶어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듯 교묘히 그들의 지략을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듯한 인상도 받게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 아팠던 점은 조선이 외교 정세에 무지했다는 점... (사실 청과 아라사(현 러시아) 또한 국제 정세에 엄청나게 무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무조건 외세의 힘에 의탁하려 했었다는 점(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남하정책과 북진정책의 충돌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 진정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신하들이 많이 없었다는 점, 조선이 침탈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목숨 걸고 이를 저지할 인물이 없었다는 점 등등 당시 풍전등화에 놓여있던 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읽는 동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냉정하게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은 외교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굴거나 외세의 힘에 무조건 의탁하려고자 한다면 어떤 사단이 나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도 역사의 굴레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죠.
해당 게시물은 논형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무쓰 무네미쓰(지음) | 이용수(옮김) | 논형
책을 읽기 전에 무쓰 무네미쓰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 청일 전쟁의 발발 이유부터 청일 양국의 외교교섭, 조선 내정 개혁문제, 삼국간섭의 내용까지 기록한 공문서를 기록했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건건' 무쓰는 이 책 『건건록』에서 자신의 공적을 서술했으나 청일전쟁 직후 사건의 당사자가 직접 쓴 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무쓰 무네미쓰는 철저히 일본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았고 계획했을 것이다. 이 책은 무쓰 무네미쓰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빠진 내용을 덧붙였고 철저히 일본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난 나카쓰카 아키라가 건건록을 풀이한 책이다. 일본 외무성 구내에 유일하게 서있는 외무대신의 동상 바로 무쓰 무네미쓰다. 무쓰의 외교는 자국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다른 나라의 희생에는 관심도 없었다. 도의적으로 볼 때 전혀 합당치 않은 이 인물을 일본인들은 높이 평가한다. 책의 나카쓰카 아키라의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에서 청일전쟁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며 일본의 원로 역사가이다. 이 분은 111주년 일사 늑약 당시 강연에서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이유는 애코부터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관심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일왕과 지배계급이 철저히 빼돌린 문서를 발견해냈고 그들의 책임을 드러냈다. 무쓰 내각의 자료를 찾던 중 경복궁의 무력 점령을 명령한 문서를 발견했다.
1장은 동학당의 난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동학 농민혁명'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무쓰는 조선의 동학당에 대해 단순히 질서를 어지럽히는 흉악한 무리들의 집단으로 규정하며 더 나아가 이들이 어떤 성격을 띤 무리인지 관심조차 없다. 단지 그가 동학 농민혁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조선을 핑계로 청에 진출하고자 하는 야욕때문이었다. 내각 회의를 열어 바로 조선국 파병을 결정한다. 무쓰의 저서에서 조선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청나라 양국이 권력 다툼을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텐진 조약에 앞서 왜 일본이 조선의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모든 책임을 그 나라 정부에 세우려고 했는지 이유는 뻔하다. 청의 속국으로써의 조선의 지위를 따돌려야 조선을 꿀꺽 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청일전쟁'의 시점을 일본의 경복궁 점령한 날로 본다. 그 시점이 뭐가 중요하며 단지 청나라와 일본의 싸움 정도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청일 전쟁을 발판으로 일본은 그 침략의 야욕을 차근차근 실행했다. 무쓰의 외교 비록에서 놀라운 점은 너무나 치밀하게 계산된 점이었다. 외교에 있어서 이렇게 치밀하게 구상하고 연구하는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었더나면 우리가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일본이 이렇게 한반도 침략과 나아가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실현하는 동안 조선은 과연 뭘 했는가? 싶은 생각에 참담한 심정이었다. 읽는 내내 뼈아픈 심정일 것이라는 출판사의 글귀가 와닿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왜곡에 헛웃음 나는 장면이 정말 많다. P101의 내용도 기가 막혀서 적어본다. 『조선의 내란이 외면적으로 진정된 것 같아도 화근은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청국은 상습적으로 속임수와 음험한 수단을 쓰기 때문에, 장래의 형세가 어떠할 것인지를 살피지 않고 일본 정부가 그냥 그 군대를 철구하는 것은 도리어 동양의 평화를 보로하혀는 까닭이 아니다』 미국과는 우호적인 관계였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외의 나라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부분도 언급되어 있다.
고종 사후 조선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불쾌했다. 하늘은 불현듯이 쾌청한데도 집안은 아직 풍비박산이 극에 달한 것과 같은 조선의 모습이라고 묘사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일본 메이지 영광론의 민낯과 무쓰 외교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일본에서도 무쓰 외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하다. 근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로 칭송한다. 일본은 어릴 때부터 이런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는다. 우리가 아는 일본의 인물들 이토 히로부미 이하 지배층은 조선 낙후, 정체관 혹은 조선 멸시관을 갖고 있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 무쓰같은 인물이 일본 외교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인물이라니! 그의 외교의 밑바탕에는 타국의 주권, 인권 침해는 조금도 고여할 가치가 없다는 반국제적, 반평화적, 반인도적, 반 민족적 외교 의식이 깔려있다. 이런 인물이 존경받고 이런 왜곡된 가치관을 접하며 자라나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거꾸로 불쌍하기까지 하다.
명분뿐인 전쟁이었다. 동아시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한다던 일본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함으로써 그들의 애욕을 실행시킨다. 일본 국익을 위해 청국과 싸운 조선 침략전쟁이라는 역자의 말에 주목해야 한다. 건건록 해설을 쓴 나카쓰카 교수님은 일본의 근대사 왜곡 및 잘못된 인식의 출발을 동학농민운동의 부당한 개입과 청일전쟁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지적했으며 이 분은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전남도립 도서관에 기증한 분이다. 읽다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에 분노하고 혀를 끌끌 차고 책을 덮었다 폈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역사는 왜곡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나라라도 후대에 진실을 전하고 교훈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건록은 우리 한국의 청소년들, 성인 독자들이 꼭 읽고 알아야 할 유산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책임이 틀림없다.
출판사 지원도서를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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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lo***|2021.09.22|신고/차단
/추천해요
사실 청일전쟁이라 함은 근현대사 시간에 수능만을 위해 배웠기에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였다.��
그러나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으로 전해지는 “건건록”이 새 번역으로 출간되어 다시금 읽게 되었다.
일본의 외교관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정책 대한 서술이라 일본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는데, 읽으며 각주에 한국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설명이 함께 나와있어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서로의 입장에서 어렵고 딱딱한 부분을 조금이나마 쉽게 풀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잘못 기록된 사실도 있어 사실이 아님을 명시해 두었기에 실제 역사를 알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고 각주의와 해설, 교주 범례의 상세한 인물 설명도 정말 좋았다.
마치 최근 방영되고 있는 벌거벗은 세계사의 강연을 듣는 것 같기도 하여 역사를 논하는 저서임에도 읽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조선과 청과 일본의 관계뿐만 아니라 구미 각국의 입장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다.
읽는 동안 애국심이 솟아나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 난무해 화가 나기도 하고 정말 뻔뻔하다는 생각 등 만감이 교차했다.��
조선에게는 자주적으로 국치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어 절대적으로 침략의 목적이 아니라 안정화를 위한 결정이라는 언급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이후 결론을 알기에 결코 중립적으로는 읽을 수 없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기에 그들은 이러한 입장이었구나 답답하기도 하고 부들부들 화가 나는 것을 참아가며���� 읽었다.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읽었기에 단순히 청일전쟁이라고 하여 중국과 일본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실은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까지 엮여 있어 몰랐던 영국이나 러시아, 미국 등과의 눈치 싸움, 속 사정까지 알 수 있게 되어 흥미로웠다.
백여 년 전의 기록이며 역사적 사실, 타국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긴 하지만 많은 역사적 인물, 사건들을 정리해 다시금 역사를 이해하고 알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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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je*******|2021.09.21|신고/차단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불법 점거가 계속되고 있다.”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일본의 외교를 총괄하는 기구인 외무성의 공식 입장입니다. 이 외무성 앞에는 어느 한 사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청일전쟁 시기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성에 서 있는 유일한 동상입니다. 이는 그가 일본의 외교사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책은 그가 남긴 시대의 기록, 바로 <건건록>입니다.
무쓰가 외무대신이었던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에 대단히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이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무쓰는 톈진 조약을 들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p.20-21)
<건건록>은 ‘동학당의 난(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무쓰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이나 본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일본이 이 사건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였습니다.
사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치닫기까지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무쓰는 청과 대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p.49)
무쓰의 주장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과 조선 조정은 서둘러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군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함께 군대를 철수하자고 일본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무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p.55)
조선의 내정이 어지러우니 개혁하기 전까지는 결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과 청나라의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게 됩니다. 이를 반영하듯, 각국에 주재하는 일본과 청나라 외교관들이 본국과 주고받는 교신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무쓰는 이미 감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보다 먼저 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치밀한 외교 활동을 통해 서양 국가들은 여기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
라고도 판단합니다. 과연 무쓰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p.142)
무쓰가 작성한 이 전문을 통해, 우리는 외교라는 것은 때로는 교섭을 통해 평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관계를 파탄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전문에 따라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p.76)
무쓰는 어떤 방법으로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감청했을까요? 이번에 번역된 <건건록>의 주석에 자세한 사정이 밝혀집니다. 지금 소개하는 <건건록>은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가 교정을 보고 주석을 단 책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교토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여자대학의 교수로 강의를 했던 분입니다. 그는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논문과 책으로 공개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업적을 소개하자면, 일본이 청일전쟁을 앞둔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기습 공격을 했다는 공식 기록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일본 측의 왜곡 때문에 조선군이 선제 공격하여 일본이 반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바로 잡은 것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이를 ‘조일전쟁’이라 부를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청일전쟁의 목적도 조선 침략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 나카쓰카 교수가 <건건록>을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그에 따라 무쓰의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의도느 더욱 분명해집니다. 또한 무쓰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해 수많은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그 내용을 바로잡고 보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이틀 뒤인 1894년 7월 25일, 아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합니다. 이렇게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군인들의 몫으로 넘어갔을까요? 아니, 여기서부터 무쓰의 또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개전 직후, 영국 국기를 게양한 채 아산으로 향하던 청나라 함선, 고승호가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됩니다. 바로 고승호 사건입니다. 고승호가 영국 국적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금방 국제 문제로 치달았습니다. 영국은 일찍이 비슷한 사건으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었지요(제2차 아편전쟁). 무쓰는 외교 라인을 총동원하여, 고승호 격침이 정당한 행위였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또, 랴오둥 반도의 여순구를 점령한 일본군이 청나라 민간인을 학살하는 여순구 학살이 보도되어, 일본에 대한 여론은 물론, 당시 진행되던 미구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에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 때 무쓰는 평소 일본군이 군기가 엄정했다고 주장하며 여순구 학살을 부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에 관여합니다.
한편, 조선과는 ‘일한양국맹약’이라는, 일시적인 군사 동맹을 맺도록 합니다. 이 동맹으로 일본은 조선을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무쓰의 치밀한 기획에 따라 이뤄진 일입니다.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니 당연히 동맹을 맺을 권리가 있다고 국제 사회에 선전하는 한편, 실제로는 조선을 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동맹을 과연 동맹이라 할 수 있을 것일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결과는 동맹을 맺은 나라 백성들의 떼죽음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공주, 그리고 장흥에서 섬멸했고, 그 잔당을 철저하게 추적해 살해했습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동학농민운동을 일본이 저지른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석연치 않은 군사 동맹과 동맹국 백성의 대량 학살. 그 의미는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쓰는 청과 전쟁을 벌이려고 조선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무쓰가 조선에 이와 같은 외교 정책을 실시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건건록> 전반에 걸쳐 조선에 대한 온갖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번역자인 이용수 연구원이 해제에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책을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무쓰는 안으로는 전쟁에 대한 일본 국내의 여론을, 그리고 밖으로는 열강의 동향을 살피며 전쟁 지도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이 시기 일본 국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지지와 청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예상치 못하게 일본이 선전을 거두자, 일본에 대한 인식을 크게 전환하게 됩니다.
무쓰는 이러한 상황에 편승해,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해 국민들의 욕망을 채우는 한편, 자칫하면 국민들의 감정이 교만으로 변하지 않을지 예의주시합니다. 한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데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는 전세가 유리한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유럽 국가들과 교섭하여,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숙원이었던 불평등조약 개정 작업을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쓰는 외국이 점차 일본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우세한 상황에서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긴박한 전쟁 외교를 개인의 내면은 물론 세계적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조야의 엇갈린 요구들이 사방에서 쏟아집니다. 이에 무쓰는 강화 조약을 준비하여 청에 강요했습니다. 청나라가 당시 국제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전권대사를 파견하자 이를 돌려보내는 등으로 외교상의 기선을 제압했으며, 이를 예상해 미리 각서까지 준비해 둔 것은 무쓰의 주도면밀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마침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회담이 열렸고, 청나라의 대신 이홍장이 왔습니다. 무쓰는 이홍장을 상대로 능수능란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 때 이홍장의 외모에 대한 감상이나, 만날 때 느낀 바를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외교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교섭에 활용하려는 태도는 한편으로는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이홍장은 강화회담이 패전에 따른 배상이 아니라, 청일 양국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역으로 청일 동맹을 주장하는 등 강화 회담의 프레임을 전환하고자 하는 노회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시에 청나라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휴전을 주장합니다. 무쓰는 이에 대해 휴전 조건을 가혹하게 내세우는 식으로 이홍장의 시도를 저지합니다.
그러던 중, 이홍장은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몸을 내던져 강화 회담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홍장을 마구 비웃던 국내 인심마저도 그를 동정할 정도였으며, 국제 여론도 청나라에 동정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홍장이 주장했던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피를 덜 흘리게 된 것입니다.
강화 조약 체결을 앞두고, 이홍장은 무쓰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p.286)
이는 일본의 앞날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쓰는 <건건록>에 이홍장의 이 말을 기록하면서, 자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을 침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영토를 일본에 할양합니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합니다. 그 유명한 3국간섭입니다. 무쓰는 이 사건이 일본 육해군을 비롯해, 국민 일반에게 미칠 영향을 경계하는 한편, 3국에 맞서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자칫하면 시모노세키 조약 전체가 파탄될 수도 있는 상황.
무쓰는 러시아를 비롯한 3국은 처음에 이와 같은 간섭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예상 외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탓에 간섭이 이뤄졌다고 판단합니다. 마냥 승리하는 것이 오히려 훗날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외교의 곤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편, 서로 민족 감정으로 강렬하게 충돌했던 프랑스와 독일마저 한 편을 이루었을 만큼 상황은 중대했습니다.
전쟁은 전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진정한 싸움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라는 것임을, 그것이야말로 전쟁이고, 또 외교임을 <건건록>은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일본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의 군함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는 등 상황은 일촉즉발. 막상 실제 위협을 받자 강경하던 언론까지도 겁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p.365)
마침내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합니다.
불과 2주 동안 일본을 뒤흔들었던 3국 간섭은 청일 전쟁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습니다. 이는 각국의 지략이 총동원된 또다른 전쟁이었으며, 그 한가운데 무쓰 무네미쓰가 있었습니다.
이 때 무쓰는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굴욕감과 불만이 점차 커져 가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훗날 이 감정은 무쓰가 죽은 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치닫도록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은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에는 패망하게 됩니다만 이는 과연 무쓰의 계산에 있었던 것일까요.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전쟁은 무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쓰 무네미쓰는 이렇게 청일 간의 갈등을 유도했고,
청일 전쟁의 승리에 외교적으로 기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3국 간섭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방어하며 전쟁으로 얻은 이익의 손실을 최소화합니다.
일본의,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운명을 세 번이나 결정지은 것입니다.
<건건록>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외교관들의 사고방식 전반, 곧 그의 내면과 계산, 정책 결정 과정을 보여 주는 긴요한 자료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침략과 전쟁을 기획한 자의 기록.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고, 동아시아는 수십 년에 걸쳐 전쟁에 휘말렸였으니, 이 중대한 기록을 읽을 필요는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비록
무쓰 무네미쓰 저자(글) · 이용수 번역
논형 · 2021년 08월 20일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역사/문화 > 동양사 > 일본사 > 일본근현대사
수상내역/미디어추천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동아일보 > 2021년 9월 3주 선정
청일전쟁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청일전쟁의 본질은 “일본이 청국과 벌인 조선침략 전쟁”이다.
그 시작은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이다.
『건건록蹇蹇錄』은 청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가 동학농민운동의 발발부터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 일청강화조약까지의 외교사안을 서술한 책이다. 무쓰 무네미쓰는 ‘외무성의 공문기록을 기초로 하면서도 공식 문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진의를 드러내어 외교의 진면목을 다시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으나 일본과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삭제했다. 새로운 번역과 청일전쟁연구의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를 통해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최종목적과 청일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작가정보
저자(글) 무쓰 무네미쓰
인물정보
정치가/정당인
陸奧宗光(1844~1897)
에도江戸 막부 말기 기슈번紀州藩(와카야마현和歌山県) 출신 무사武士. 메이지明治 시대 외교관, 정치가. 메이지 초의 판적봉환, 폐번치현, 징병령, 지조개정 등에 큰 영항을 끼쳤다.
10대 중반에 에도에 유학, 야쓰이 솟켄安井息軒, 미즈모토 나루미水本成美 등에게 배우면서 도사土佐의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죠슈長州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교유했다. 1863년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고베神戸 해군조련소에 들어갔고, 1867년 이후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海援隊에서 활동하며 시종일관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료마가 암살된 후 복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덴만야天満屋사건).
메이지 신정부에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천거로 외국사무국에서 관직을 처음 맡았다. 그 후 효고현兵庫県 지사(1869),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지사(1871)를 지냈으나 삿쵸薩長의 번벌 정치에 격분, 사직하고 와카야마로 낙향했다. 1877년 고치현高知県 도사의 자유민권운동 정치단체 릿시샤立志社의 정부전복기도에 연루되어 금고 5년형으로 투옥된다. 1883년 1월 특사로 출옥한 뒤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유럽에 유학, 런던과 빈에서 내각제도, 의회, 민주정치 등에 관해 공부했다.
1886년 귀국, 변리공사 직책으로 외무성에 들어간 후 주미 공사, 농상대신을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된다. 1892년 이토 히로부미 제2차 내각의 외무대신(제5대)에 취임, 청일전쟁 개전 직전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 막말 이래 불평등조약인 영사재판권 철폐에 성공한다. 이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도 조약을 개정. 그해 7월 25일 발발한 청일전쟁의 전후 과정 및 삼국간섭의 외교를 주도하여 ‘무쓰외교’라는 말이 생겼다.‘면도칼 대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일본 외무성 구내에 유일하게 그의 동상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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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
번역 이용수
인물정보
유학/동양철학자 번역가/통역사>일본어
李龍守
연세대학교 및 동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일본근세사상 전공). 공직에 있으면서 우연히 일본을 만난 뒤 에도시대 일본사상에 주목하여, 일본근세ㆍ근대사상의 본질과 근대화의 관계에 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연세대ㆍ한국항공대ㆍ경희대에서 동양철학과 일본의 사상ㆍ문화를 가르쳤다. 현재 아시아문화사상연구소장,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다산 정약용과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실학관 비교」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역서에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源了圓, 『德川思想小史』), 『일본사상으로 본 일본의 본질』(前田勉, 『兵学と朱子学ㆍ蘭学ㆍ国学-近世日本思想史の構図』), 『에도 후기의 사상공간』(前田勉, 『江戸後期の思想空間』)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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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의 세계
목차
서언
제1장 동학당의 난
동학당의 난 ■ 조선국 파병의 내각 회의 결정 ■ 일청 양국의 조선에서의 권력다툼 ■ 위안스카이袁世凱, 왕봉조汪鳳藻 등의 오판 ■ 조선 국왕, 청국에 원병을 청함
제2장 일청 양국 군대의 조선 파견
톈진조약 ■ 청국 정부가 조선국에 파병함을 우리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청국 정부의 공문에 있는 ‘보호속방’이라는 말에 대한 제국 정부의 항의 ■ 제국 정부가 청국 정부에 대해 조선국에 파병한다는 공문 통보
제3장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및 취임 후 조선의 형세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 오토리 공사, 해병을 인솔하여 경성에 들어가다 ■ 조선에서의 구미 각국 관민官民의 정황
제4장 조선국 내정 개혁을 위한 일청 양국 공동위원 파견 제안
일청 양국 공동위원의 조선 파견에 관한 각의 ■ 일청 양국 공동위원회의 조선국 파견에 대해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를 거쳐 동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일청 공동위원설립 제안에 대한 청국 정부로부터의 이의 ■ 청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1차 절교서
제5장 조선 개혁과 청한 종속 문제에 관한 개설
서구적 신문명과 동아적 구문명의 충돌 ■ 조선 내정 개혁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朝野의 여론 ■ 조선 문제에 관한 주제와 객제의 관계
제6장 조선 내정 개혁 제1기
청장淸? 섭지초葉志超가 위안스카이에 보낸 전보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기밀 훈령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오토리 공사의 건의 ■ 조선 국왕, 스스로 죄가 있다는 조서를 발포?布함 ■ 오토리 공사에게 최종 수단을 취하라는 전훈電訓 ■ 오토리 공사, 조선 정부에 최종 공문을 보냄 ■ 위안스카이, 돌연 귀국 ■ 용산 주둔 제국군대가 경성에 들어감 ■ 원군의 입궐 ■ 조선 국왕, 오토리 공사의 참내參內 요청 ■ 선전宣戰의 조칙
제7장 구미 각국의 간섭
러시아의 권고
이홍장과 카시니 백작의 담판 ■ 러시아 정부의 권고 ■ 러시아 정부의 권고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러시아 정부, 일청 양국 군대가 함께 철수하라는 권고 ■ 러시아의 권고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일본 정부의 회답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공문 ■ 러시아 정부로부터 일본 제국의 조선에 대한 요구 중 적어도 조선과 열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을 위배하는 조건이 있을 경우 러시아 정부는 결코 이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의注意
영국의 중재
베이징 주재 영국 특명전권공사 오코너와 총리아문의 협의 ■ 영국의 중재 ■ 오코너의 거중居中 주선에 따라 고무라小村 대리공사가 총리아문을 방문하였으나 청국 정부는 어떤 새로운 안을 제시하지 않음 ■ 제국 정부, 고무라 대리공사에게 전훈하여 청국에게 일본 정부의 제2차 절교서를 선언하게 함 ■ 청국 정부가 러시아의 중재에 중점을 두었던 이유 ■ 영국 정부의 2차 중재 ■ 영국의 2차 중재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 일본 정부의 금번 청국 정부에 대한 요구는 일찍이 담판의 기초로 삼겠다고 확언한 바와 모순되고 또 그 범위를 벗어났으므로, 만약 이런 정략을 고집하여 일청 양국이 개전하게 되면 일본 정부는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선언 ■ 이에 대한 제국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 향후 일청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져도, 청국의 상하이 및 그 근방에서 전쟁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두고 싶다는 공문 통보 ■ 영국 정부, 일청 양국 군대가 각각 조선을 점령하고 서서히 양국이 협의할 것을 권고
미국의 충고
미국의 충고 ■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회답
다른 열국과의 관계
구미 각국의 국외 중립
제8장 6월 22일 이후 개전까지의 이홍장의 위치
이홍장의 외교 방책과 군사 전략 ■ 이홍장의 출신과 경력 ■ 장발적長髮賊 ■ 염비捻匪 ■ 톈진 소동 ■ 청국 황제, 이홍장의 실책을 문책하여 그 득실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설치를 명함
제9장 조선 사건과 일영조약 개정
조약개정의 역사 ■ 조약개정안 조사위원에게 내린 조칙 ■ 반면적 대등조약안 계통의 변경 ■ 우리 정부, 영국 정부와 조약개정의 담판을 재개 ■ 양이적攘夷的 보수론의 유행 ■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정부가 고용한 칼드웰 건 및 일본 군용 전신이 인천의 외국인 거류지를 관통하여 가설된 사건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기까지 신조약의 조인을 거절한다는 통첩 ■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일영조약의 조인 ■ 여순旅順 학살사건과 일미조약과의 관계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청한 종속 관계에 관하여 조선 정부가 구미 각국에 보낸 공문 ■ 거문도巨文島 사건 ■ 아산 전투 개시 전의 관련된 대한?韓 정략 ■ 고승호高陞號 사건 ■ 위 사건과 관련한 아오키?木 공사의 전보 ■ 위 사건과 관련한 영국 정부의 공문 ■ 위 사건에 관한 법제국 장관 스에마쓰 겐쵸末松謙澄의 보고 ■ 홀랜드 및 웨스트레이크 두 박사의 의견
제11장 조선 내정 개혁 제2기
잠정 합동 조관條款 ■ 일한 공수攻守동맹조약 ■ 대원군의 복수 정략 ■ 김金, 어魚 내각 ■ 정혁파와 군국기무처 ■ 대원군 및 조선 내각 각료들이 평양 주재 청국 장수와 내통한 밀서의 탄로 ■ 조선 국토를 일청 양국 군대가 각각 그 절반을 점령한 상태 ■ 대한?韓 정략 관련 각의 ■ 조선에서의 철도 및 전신 문제 ■ 오토리 공사의 소환과 이노우에井上 백작의 부임
제12장 평양 및 황해 전승의 결과
평양, 황해 전승에 대한 구주 각국의 여론 ■ 평양, 황해 전승 후 우리 국민의 희망 ■ 내외 사정의 충돌
제13장 영사재판제도와 전쟁과의 관계
치외법권과 영사재판제도의 구별 ■ 영국인 피고트의 영사재판론 ■ 미국인 죠지 카메론과 존 와일드 사건 ■ 이 사건에 관한 영국 공사의 항의 ■ 위 사건에 관한 일본ㆍ프랑스 양국 정부의 쟁의 ■ 이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의 항의 ■ 사세보佐世保 포획심검소에서 영국 상선 익생호益生?를 재판하다 ■ 장발적난長髮賊? 시대에 청국에서의 구미 각국의 영사재판권 남용
제14장 강화 담판 개시 전 청국 및 구주 여러 강국의 거동
청국 각 성의 총독 및 순무巡撫가 강화의 득실에 관해 상주上奏한 의견 ■ 데트링, 고베에 오다 ■ 데트링 사명의 목적 ■ 영국 정부가 시도한 구주 제 강국의 연합 중재 ■ 영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대해, 조선의 독립과 군비상환의 두 조건으로 다시 중재를 요청함 ■ 영국의 제의에 대한 회답안 ■ 영국 정부의 제의에 대한 제국 정부의 회답 ■ 영국 정부의 연합중재설의 실패 ■ 영러 양국이 일청 양국에 대한 상태에 관한 독일 황제의 혹평
제15장 일청 강화의 발단
미국 정부가 우의적 중재를 하겠다고 제의해 옴 ■ 위에 대한 우리 정부의 회답 ■ 청국 정부, 베이징ㆍ도쿄 주재 미국 공사를 거쳐 우리 정부에게 강화 회담을 열 것을 제의해 옴 ■ 청국 정부, 장張ㆍ소邵 두 사절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한다는 뜻을 통첩해 옴 ■ 강화 조건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의 희망 ■ 우리 정부가 청국에 요구한 강화 조건을 구미 각국에 예고할 것인가에 관한 각의 ■ 강화조약에 관한 히로시마 대본영에서의 어전회의 ■ 이토 내각총리대신의 주언奏言 ■ 이토 내각총리대신과 내가 전권변리대신에 임명되다
제16장 히로시마 담판
청국의 장張ㆍ소邵 두 사신의 도착 ■ 제1차 히로시마 담판 ■ 2차 히로시마 담판 ■ 이토 전권변리대사의 연설 ■ 이토 전권대사가 오정방에게 한 사담 ■ 장ㆍ소 두 사절의 귀국
제17장 시모노세키 담판(상)
청국 두등대신頭等大臣 이홍장이 찾아 옴
청국 정부, 미국 공사를 경유하여 이홍장을 두등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한다는 뜻을 통지해 오다 ■ 이홍장,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다 ■ 제1차 시모노세키 담판 ■ 청국 전권대신, 휴전을 제의하다 ■ 제2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휴전 제의에 관한 우리나라 전권대신의 회답 ■ 제3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휴전문제 철회
이홍장의 조난遭難 및 휴전조약
이홍장의 조난 ■ 이토 전권대신, 히로시마로 가다 ■ 제4차 시모노세키 담판 ■ 이토 전권대신, 시모노세키에 돌아와 휴전조약에 조인
제18장 시모노세키 담판(하)
강화조약의 조인
우리의 강화조약안을 청국 사신에게 송달하다 ■ 이에 대한 청국 전권대신의 회답 ■ 청국 전권대신의 회답에 대한 우리 전권대신의 반론 ■ 이경방李?方, 흠차 전권대신에 임명되다 ■ 청국 전권대신이 일본의 강화조약안에 대해 수정안을 제출하다 ■ 제5차 시모노세키 담판과 청국 전권대신의 수정안에 대한 일본 전권대신의 재수정안 제출 ■ 제6차 시모노세키 담판 ■ 제7차 시모노세키 담판 ■ 강화조약의 조인 ■ 청국 전권대신의 귀국 ■ 우리 전권대신, 히로시마로 돌아간 즉시 행재소를 참내하여 조약조인 결과를 복명하다 ■ 강화조약 및 별약의 비준과 내각 서기관장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전권대신으로 지부芝?에 파견되다 ■ 강화조약 비준교환을 완료함
제19장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상)
3국간섭에 대한 정부의 조치
러시아의 충고 ■ 히로시마 행재소에서의 어전회의 ■ 마이코舞子 회의 ■ 3국간섭에 관해 니시西 공사에게 보낸 1차 전훈 ■ 위 사건에 관해 가토加藤 공사에게 보낸 전훈 ■ 위 사건에 관해 구리노栗野 공사에게 보낸 전훈 ■ 니시 공사의 답전 ■ 가토 공사의 1차 회신 ■ 가토 공사의 2차 회신 ■ 구리노 공사의 회신 ■ 다카히라高平 공사의 전보 ■ 니시 공사에게 보낸 2차 전훈 ■ 니시 공사의 회신 전보 ■ 교토의 회의 ■ 제국 정부, 러ㆍ독ㆍ프 3국 정부에게 봉천반도 포기를 약속함
제20장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중)
3국간섭의 유래
3국간섭 전후 러시아의 형세 ■ 러시아 정부가 일ㆍ러 양국 정부 사이에 상호 의견 교환을 권유 ■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가 재차 일ㆍ러 양국이 의견을 교환할 것을 제의 ■ 니시 공사의 기밀 서신 ■ 3국간섭 전후의 독일의 형세 ■ 독일의 표변에 대한 아오키 공사의 전신 보고 ■ 독일이 러시아ㆍ프랑스와 동맹한 것에 관한 다카히라高平 공사의 전신 ■ 영국 주재 독일대사와 가토 공사의 담판에 관한 동 공사의 전신 보고 ■ 3국간섭 전후의 프랑스의 형세
제21장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의 3국간섭(하)
결론
요동반도 반환 후 국민의 불평 ■ 당시 내외의 형세 ■ 산 스테파노San Stafano 조약
해설: 『건건록』 간행 사정/ 교주校注/ 역자해제/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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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건건록』과 무쓰 무네미쓰
『건건록』의 저자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 역사와 메이지시대 일본 정치외교사에 밝지 않은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낯설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일본 외교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청일전쟁(1894~1895)’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다. 무쓰가 청일전쟁 발발과 경과, 그리고 삼국간섭 등의 수습을 외교적으로 ‘지도指導’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 이 책 『건건록』이다.
건蹇은 ‘한 쪽 다리를 절름거린다, 즉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다. ‘건건蹇蹇’은 『역경易經』의 제39괘인 「건괘蹇卦」의 “왕신건건, 비궁지고王臣蹇蹇, 匪躬之故[임금과 신하가 험난한(절름거리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이유를 두지 않음이다(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에서 따 온 것이다. 즉 이 책의 제목은 청일전쟁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이익을 위해 군주와 나라에 충성을 다한 과정을 기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쓰 무네미쓰는 근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로 평가 받는다. 일본 외무성 구내에는 일본 역대 외무대신 중 무쓰 무네미쓰만 유일하게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쓰는 조선멸시·낙후·정체론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무쓰 외교’의 핵심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주권과 인권 침해는 조금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반국제적·반평화적·반인도적·반민족적 인식의 현실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 사회는 여전히 무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묻고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의 본질: “경복궁을 점령하라”
일본 정부와 군부는 『메이지27년일청전사明治二十七年日淸?史』를 통해 “조선의 독립 실현을 방해하는 청국세력을 조선에서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청국과 싸웠다”고 청일전쟁의 목적을 밝혔다. 과연 그러한가.
무쓰 무네미쓰는 이 책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첫머리에서 “청일전쟁에서는 육지와 해상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오직 ‘아산 전투’만 외교가 앞서서 전쟁의 발단을 열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무쓰는 이 책에서 스스로 청일전쟁의 목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책의 행간과 교주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철저한 교주 및 해설에서 우리는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청일전쟁의 최초 무력충돌이 1894년 7월 25일의 ‘풍도해전’이라고 소개하며 대부분의 일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무쓰의 지휘 아래 오토리 조선 주재 일본공사가 실행한,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의 ‘경복궁 무력점령’이 최초의 무력충돌이다. 이른바 7·23 사변, 즉 경복궁 점령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청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각본에 따라 수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이 책에서 무쓰는 이를 시인한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먼저 조선 국왕을 우리 수중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본서 141~142쪽)”고 했다.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조선 국왕을 ‘포로’로 삼은 뒤 조선 정부로부터 “아산의 청국 군대를 몰아내는 위탁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받아내게 된 것”(본서 140쪽), 바로 그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일본의 실질적인 조선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의 승리는 곧 조선의 망국이었다.
청일전쟁의 최고 권위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
『건건록』은 일본 외무성에서 처음 인쇄하여 1896년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외교 기밀에 관련된 비밀문서로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1929년 1월 이와나미 출판사가 『백작 무쓰 무네미쓰 유고』를 전문과 함께 출판하면서 비로소 대중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는 칭송받으며 읽히는 명저이다.
한국에서는 두 차례 번역되었으나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번역에서는 선행 서적에서 일부 오역과 오류, 오식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바로 잡고 청일전쟁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상세한 해설과 교주를 추가했다. 따라서 이 책은 제대로 된 한국어판이라 할 수 있다. 나카쓰카 아키라는 『건건록』 출판과정 및 초고와 간행본 사이의 차이를 세밀하게 비교하여 청일전쟁의 본질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았다고 평가받는다. 외교의 진면목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무쓰 스스로 서언에서 밝히기도 했으며, 후대의 연구에서도 무쓰가 청일전쟁의 외교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다른 외교기록 문서와 비교하면 무쓰는 일본에 불리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은 삭제했다. 나카쓰카 아키라의 교주는 『건건록』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서 삭제되었고 개변된 부분의 원 문장을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해설 또한 80년대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대폭 수정되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무쓰의 퇴고의 흔적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무쓰의 심정을 추적하고, 청일전쟁기에 일본외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망국의 원인을 되새기고 반성하다
‘청일전쟁’ 그 자체를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전쟁을 먼 옛날 중국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두 나라만의 싸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19세기 말 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영유하기 위해 싸웠다는 사실, 그 전쟁이 이 나라와 민중의 삶을 짓밟고, 민중의 재산과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한 결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기반을 구축한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문제다. ‘청일전쟁’의 가장 큰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반성하지 않는 것 역시 오늘날 다시 되짚어 보아야 할 정치외교적 이슈가 아닌가 생각한다.
국가 존립의 근거는 국토를 보전하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국익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유,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에 다시 되새겨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건건록』을 다시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읽는 내내 뼈아플 것이지만, 역사를 바로 알고 그 맥락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해야 미래를 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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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ISBN 9788963572512
발행(출시)일자 2021년 08월 20일
쪽수 474쪽
건건록은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이란 조선 국권 침탈이 어떤 연유로 일어나게 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묘미는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전략입니다. 이 책은 특히 외교관이나 앞으로 외교관의 꿈을 가진 젊은이들 혹은 세계정세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읽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쓰는 뼛속 깊이 국익만을 생각한 인물입니다. 열강의 무분별한 침략 행위를 보면서 그리고 일본이 지난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과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조선을 발판 삼아 북진정책의 꿈을 현실화한 숨은 전략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소름 돋았던 이유는 일본의 꽤 능력 있는 정부 관리가 냉정하게 국제 정세를 읽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자국의 득실에 있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었다는 점 등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더군요.
일본은 동학의 난 이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과의 강제 수교를 맺습니다. 이때 국내 정세는 반외세. 봉건사상 혹은 개혁 바람으로 말 그대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근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조선은 신식 군대를 세우게 되고 이로 인해 구식 군대가 차별 당했다 여긴 구식군대는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을 해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일로 흥선대원군이 청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동학농민운동까지 일어나면서 조선은 청에 의존도를 높이게되죠. 더불어 청의 조선 정치 개입은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책 도입부부터 냉정하게 바라보기 힘들어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던 사건들을 하나씩 찾아 읽음으로써 그리고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파란만장한 일련의 사건들을 알아가게 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책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눈에 밟혔던 장은 제1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사재판제도와 전쟁과의 관계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바로 치외법권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서구 열강들이 약소국을 어떤 거점으로 서서히 식민지화 했는지를 무쓰는 외교의 관점에서 기록해 놓았더군요. 사실 소름 돋은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일본도 일찍이 경험한 치외법권을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법에는 득과 실이 있고 자국에 득으로 작동되게끔 어떻게 사고하느냐?라는 그의 생각이 무서웠다고나 할까요?
"치외법권이라 부르는 제도의 근원을 찾아보면, 구미 각국 정부가 이른바 기독교 국가 이외 나라의 제도와 법률은 신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나라와 처음에 조약을 체결할때 반드시 그 조약 안에서 자국민을 위한 영사재판관할을 시행한다는 조항을 만들고, 결국 어떤 나라의 영토 안에 다른 나라의 작은 식민지를 두는 것과 같은 일종의 변형체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189쪽
아무튼 다시 한번 건건록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고종 31년에, 동학당이 난을 일으키자(한국에서는 동학혁명·동학농민운동·동학운동 또는 동학 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이라 한다. 동학교도들이 스스로를 '동학당'이라 칭한 역사적 사실은 없다... 역서의 성격상 원저자의 '동학당의 난'을 그대로 인용하여 쓰기로 했다. 17쪽 주석 참고) 조선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게 되고 일본은 북진정책을 펼치며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로 삼으려했던 조선이 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자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지요.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승전국 일본이 중국의 요동반도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남하정책을 추진했던 러시아와 대립하게 되고 이로써 일본은 삼국간섭을 받게 됩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힘에 의해 승전국 일본은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죠. 이 이후에 벌어진 을미사변부터 을미개혁까지(청일전쟁시 일어난 갑오개혁이 중간에 중단되었다가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전국이 되면서 다시 재개된 3차 갑오개혁)의 이야기는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시하게 다루는 내용은 역시 청일전쟁이죠.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이 일본 침략을 두고 일제가 조선을 돕기 위해 펼친 정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분들께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께 이 책을 읽고도 변함없으실지 여쭤보고 싶더라고요. 이 책은 꽤 조선을 걱정하는 척, 위하는 척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의 검은 속내가 그대로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기록이 훗날 외교 문제가 될까 싶어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듯 교묘히 그들의 지략을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듯한 인상도 받게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 아팠던 점은 조선이 외교 정세에 무지했다는 점... (사실 청과 아라사(현 러시아) 또한 국제 정세에 엄청나게 무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무조건 외세의 힘에 의탁하려 했었다는 점(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남하정책과 북진정책의 충돌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 진정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신하들이 많이 없었다는 점, 조선이 침탈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목숨 걸고 이를 저지할 인물이 없었다는 점 등등 당시 풍전등화에 놓여있던 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읽는 동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냉정하게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은 외교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굴거나 외세의 힘에 무조건 의탁하려고자 한다면 어떤 사단이 나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도 역사의 굴레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죠.
해당 게시물은 논형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무쓰 무네미쓰(지음) | 이용수(옮김) | 논형
책을 읽기 전에 무쓰 무네미쓰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 청일 전쟁의 발발 이유부터 청일 양국의 외교교섭, 조선 내정 개혁문제, 삼국간섭의 내용까지 기록한 공문서를 기록했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건건' 무쓰는 이 책 『건건록』에서 자신의 공적을 서술했으나 청일전쟁 직후 사건의 당사자가 직접 쓴 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무쓰 무네미쓰는 철저히 일본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았고 계획했을 것이다. 이 책은 무쓰 무네미쓰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빠진 내용을 덧붙였고 철저히 일본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난 나카쓰카 아키라가 건건록을 풀이한 책이다. 일본 외무성 구내에 유일하게 서있는 외무대신의 동상 바로 무쓰 무네미쓰다. 무쓰의 외교는 자국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다른 나라의 희생에는 관심도 없었다. 도의적으로 볼 때 전혀 합당치 않은 이 인물을 일본인들은 높이 평가한다. 책의 나카쓰카 아키라의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에서 청일전쟁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며 일본의 원로 역사가이다. 이 분은 111주년 일사 늑약 당시 강연에서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이유는 애코부터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관심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일왕과 지배계급이 철저히 빼돌린 문서를 발견해냈고 그들의 책임을 드러냈다. 무쓰 내각의 자료를 찾던 중 경복궁의 무력 점령을 명령한 문서를 발견했다.
1장은 동학당의 난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동학 농민혁명'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무쓰는 조선의 동학당에 대해 단순히 질서를 어지럽히는 흉악한 무리들의 집단으로 규정하며 더 나아가 이들이 어떤 성격을 띤 무리인지 관심조차 없다. 단지 그가 동학 농민혁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조선을 핑계로 청에 진출하고자 하는 야욕때문이었다. 내각 회의를 열어 바로 조선국 파병을 결정한다. 무쓰의 저서에서 조선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청나라 양국이 권력 다툼을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텐진 조약에 앞서 왜 일본이 조선의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모든 책임을 그 나라 정부에 세우려고 했는지 이유는 뻔하다. 청의 속국으로써의 조선의 지위를 따돌려야 조선을 꿀꺽 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청일전쟁'의 시점을 일본의 경복궁 점령한 날로 본다. 그 시점이 뭐가 중요하며 단지 청나라와 일본의 싸움 정도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청일 전쟁을 발판으로 일본은 그 침략의 야욕을 차근차근 실행했다. 무쓰의 외교 비록에서 놀라운 점은 너무나 치밀하게 계산된 점이었다. 외교에 있어서 이렇게 치밀하게 구상하고 연구하는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었더나면 우리가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일본이 이렇게 한반도 침략과 나아가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실현하는 동안 조선은 과연 뭘 했는가? 싶은 생각에 참담한 심정이었다. 읽는 내내 뼈아픈 심정일 것이라는 출판사의 글귀가 와닿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왜곡에 헛웃음 나는 장면이 정말 많다. P101의 내용도 기가 막혀서 적어본다. 『조선의 내란이 외면적으로 진정된 것 같아도 화근은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청국은 상습적으로 속임수와 음험한 수단을 쓰기 때문에, 장래의 형세가 어떠할 것인지를 살피지 않고 일본 정부가 그냥 그 군대를 철구하는 것은 도리어 동양의 평화를 보로하혀는 까닭이 아니다』 미국과는 우호적인 관계였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외의 나라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부분도 언급되어 있다.
고종 사후 조선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불쾌했다. 하늘은 불현듯이 쾌청한데도 집안은 아직 풍비박산이 극에 달한 것과 같은 조선의 모습이라고 묘사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일본 메이지 영광론의 민낯과 무쓰 외교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일본에서도 무쓰 외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하다. 근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로 칭송한다. 일본은 어릴 때부터 이런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는다. 우리가 아는 일본의 인물들 이토 히로부미 이하 지배층은 조선 낙후, 정체관 혹은 조선 멸시관을 갖고 있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 무쓰같은 인물이 일본 외교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인물이라니! 그의 외교의 밑바탕에는 타국의 주권, 인권 침해는 조금도 고여할 가치가 없다는 반국제적, 반평화적, 반인도적, 반 민족적 외교 의식이 깔려있다. 이런 인물이 존경받고 이런 왜곡된 가치관을 접하며 자라나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거꾸로 불쌍하기까지 하다.
명분뿐인 전쟁이었다. 동아시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한다던 일본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함으로써 그들의 애욕을 실행시킨다. 일본 국익을 위해 청국과 싸운 조선 침략전쟁이라는 역자의 말에 주목해야 한다. 건건록 해설을 쓴 나카쓰카 교수님은 일본의 근대사 왜곡 및 잘못된 인식의 출발을 동학농민운동의 부당한 개입과 청일전쟁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지적했으며 이 분은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전남도립 도서관에 기증한 분이다. 읽다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에 분노하고 혀를 끌끌 차고 책을 덮었다 폈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역사는 왜곡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나라라도 후대에 진실을 전하고 교훈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건록은 우리 한국의 청소년들, 성인 독자들이 꼭 읽고 알아야 할 유산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책임이 틀림없다.
출판사 지원도서를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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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lo***|2021.09.22|신고/차단
/추천해요
사실 청일전쟁이라 함은 근현대사 시간에 수능만을 위해 배웠기에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였다.��
그러나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으로 전해지는 “건건록”이 새 번역으로 출간되어 다시금 읽게 되었다.
일본의 외교관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정책 대한 서술이라 일본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는데, 읽으며 각주에 한국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설명이 함께 나와있어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서로의 입장에서 어렵고 딱딱한 부분을 조금이나마 쉽게 풀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잘못 기록된 사실도 있어 사실이 아님을 명시해 두었기에 실제 역사를 알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고 각주의와 해설, 교주 범례의 상세한 인물 설명도 정말 좋았다.
마치 최근 방영되고 있는 벌거벗은 세계사의 강연을 듣는 것 같기도 하여 역사를 논하는 저서임에도 읽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조선과 청과 일본의 관계뿐만 아니라 구미 각국의 입장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다.
읽는 동안 애국심이 솟아나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 난무해 화가 나기도 하고 정말 뻔뻔하다는 생각 등 만감이 교차했다.��
조선에게는 자주적으로 국치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어 절대적으로 침략의 목적이 아니라 안정화를 위한 결정이라는 언급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이후 결론을 알기에 결코 중립적으로는 읽을 수 없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기에 그들은 이러한 입장이었구나 답답하기도 하고 부들부들 화가 나는 것을 참아가며���� 읽었다.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읽었기에 단순히 청일전쟁이라고 하여 중국과 일본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실은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까지 엮여 있어 몰랐던 영국이나 러시아, 미국 등과의 눈치 싸움, 속 사정까지 알 수 있게 되어 흥미로웠다.
백여 년 전의 기록이며 역사적 사실, 타국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긴 하지만 많은 역사적 인물, 사건들을 정리해 다시금 역사를 이해하고 알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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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je*******|2021.09.21|신고/차단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불법 점거가 계속되고 있다.”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일본의 외교를 총괄하는 기구인 외무성의 공식 입장입니다. 이 외무성 앞에는 어느 한 사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청일전쟁 시기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성에 서 있는 유일한 동상입니다. 이는 그가 일본의 외교사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책은 그가 남긴 시대의 기록, 바로 <건건록>입니다.
무쓰가 외무대신이었던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에 대단히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이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무쓰는 톈진 조약을 들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p.20-21)
<건건록>은 ‘동학당의 난(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무쓰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이나 본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일본이 이 사건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였습니다.
사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치닫기까지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무쓰는 청과 대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p.49)
무쓰의 주장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과 조선 조정은 서둘러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군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함께 군대를 철수하자고 일본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무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p.55)
조선의 내정이 어지러우니 개혁하기 전까지는 결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과 청나라의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게 됩니다. 이를 반영하듯, 각국에 주재하는 일본과 청나라 외교관들이 본국과 주고받는 교신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무쓰는 이미 감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보다 먼저 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치밀한 외교 활동을 통해 서양 국가들은 여기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
라고도 판단합니다. 과연 무쓰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p.142)
무쓰가 작성한 이 전문을 통해, 우리는 외교라는 것은 때로는 교섭을 통해 평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관계를 파탄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전문에 따라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p.76)
무쓰는 어떤 방법으로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감청했을까요? 이번에 번역된 <건건록>의 주석에 자세한 사정이 밝혀집니다. 지금 소개하는 <건건록>은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가 교정을 보고 주석을 단 책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교토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여자대학의 교수로 강의를 했던 분입니다. 그는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논문과 책으로 공개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업적을 소개하자면, 일본이 청일전쟁을 앞둔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기습 공격을 했다는 공식 기록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일본 측의 왜곡 때문에 조선군이 선제 공격하여 일본이 반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바로 잡은 것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이를 ‘조일전쟁’이라 부를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청일전쟁의 목적도 조선 침략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 나카쓰카 교수가 <건건록>을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그에 따라 무쓰의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의도느 더욱 분명해집니다. 또한 무쓰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해 수많은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그 내용을 바로잡고 보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이틀 뒤인 1894년 7월 25일, 아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합니다. 이렇게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군인들의 몫으로 넘어갔을까요? 아니, 여기서부터 무쓰의 또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개전 직후, 영국 국기를 게양한 채 아산으로 향하던 청나라 함선, 고승호가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됩니다. 바로 고승호 사건입니다. 고승호가 영국 국적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금방 국제 문제로 치달았습니다. 영국은 일찍이 비슷한 사건으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었지요(제2차 아편전쟁). 무쓰는 외교 라인을 총동원하여, 고승호 격침이 정당한 행위였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또, 랴오둥 반도의 여순구를 점령한 일본군이 청나라 민간인을 학살하는 여순구 학살이 보도되어, 일본에 대한 여론은 물론, 당시 진행되던 미구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에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 때 무쓰는 평소 일본군이 군기가 엄정했다고 주장하며 여순구 학살을 부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에 관여합니다.
한편, 조선과는 ‘일한양국맹약’이라는, 일시적인 군사 동맹을 맺도록 합니다. 이 동맹으로 일본은 조선을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무쓰의 치밀한 기획에 따라 이뤄진 일입니다.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니 당연히 동맹을 맺을 권리가 있다고 국제 사회에 선전하는 한편, 실제로는 조선을 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동맹을 과연 동맹이라 할 수 있을 것일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결과는 동맹을 맺은 나라 백성들의 떼죽음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공주, 그리고 장흥에서 섬멸했고, 그 잔당을 철저하게 추적해 살해했습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동학농민운동을 일본이 저지른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석연치 않은 군사 동맹과 동맹국 백성의 대량 학살. 그 의미는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쓰는 청과 전쟁을 벌이려고 조선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무쓰가 조선에 이와 같은 외교 정책을 실시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건건록> 전반에 걸쳐 조선에 대한 온갖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번역자인 이용수 연구원이 해제에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책을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무쓰는 안으로는 전쟁에 대한 일본 국내의 여론을, 그리고 밖으로는 열강의 동향을 살피며 전쟁 지도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이 시기 일본 국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지지와 청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예상치 못하게 일본이 선전을 거두자, 일본에 대한 인식을 크게 전환하게 됩니다.
무쓰는 이러한 상황에 편승해,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해 국민들의 욕망을 채우는 한편, 자칫하면 국민들의 감정이 교만으로 변하지 않을지 예의주시합니다. 한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데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는 전세가 유리한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유럽 국가들과 교섭하여,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숙원이었던 불평등조약 개정 작업을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쓰는 외국이 점차 일본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우세한 상황에서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긴박한 전쟁 외교를 개인의 내면은 물론 세계적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조야의 엇갈린 요구들이 사방에서 쏟아집니다. 이에 무쓰는 강화 조약을 준비하여 청에 강요했습니다. 청나라가 당시 국제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전권대사를 파견하자 이를 돌려보내는 등으로 외교상의 기선을 제압했으며, 이를 예상해 미리 각서까지 준비해 둔 것은 무쓰의 주도면밀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마침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회담이 열렸고, 청나라의 대신 이홍장이 왔습니다. 무쓰는 이홍장을 상대로 능수능란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 때 이홍장의 외모에 대한 감상이나, 만날 때 느낀 바를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외교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교섭에 활용하려는 태도는 한편으로는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이홍장은 강화회담이 패전에 따른 배상이 아니라, 청일 양국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역으로 청일 동맹을 주장하는 등 강화 회담의 프레임을 전환하고자 하는 노회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시에 청나라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휴전을 주장합니다. 무쓰는 이에 대해 휴전 조건을 가혹하게 내세우는 식으로 이홍장의 시도를 저지합니다.
그러던 중, 이홍장은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몸을 내던져 강화 회담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홍장을 마구 비웃던 국내 인심마저도 그를 동정할 정도였으며, 국제 여론도 청나라에 동정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홍장이 주장했던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피를 덜 흘리게 된 것입니다.
강화 조약 체결을 앞두고, 이홍장은 무쓰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p.286)
이는 일본의 앞날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쓰는 <건건록>에 이홍장의 이 말을 기록하면서, 자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을 침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영토를 일본에 할양합니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합니다. 그 유명한 3국간섭입니다. 무쓰는 이 사건이 일본 육해군을 비롯해, 국민 일반에게 미칠 영향을 경계하는 한편, 3국에 맞서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자칫하면 시모노세키 조약 전체가 파탄될 수도 있는 상황.
무쓰는 러시아를 비롯한 3국은 처음에 이와 같은 간섭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예상 외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탓에 간섭이 이뤄졌다고 판단합니다. 마냥 승리하는 것이 오히려 훗날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외교의 곤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편, 서로 민족 감정으로 강렬하게 충돌했던 프랑스와 독일마저 한 편을 이루었을 만큼 상황은 중대했습니다.
전쟁은 전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진정한 싸움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라는 것임을, 그것이야말로 전쟁이고, 또 외교임을 <건건록>은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일본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의 군함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는 등 상황은 일촉즉발. 막상 실제 위협을 받자 강경하던 언론까지도 겁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p.365)
마침내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합니다.
불과 2주 동안 일본을 뒤흔들었던 3국 간섭은 청일 전쟁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습니다. 이는 각국의 지략이 총동원된 또다른 전쟁이었으며, 그 한가운데 무쓰 무네미쓰가 있었습니다.
이 때 무쓰는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굴욕감과 불만이 점차 커져 가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훗날 이 감정은 무쓰가 죽은 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치닫도록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은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에는 패망하게 됩니다만 이는 과연 무쓰의 계산에 있었던 것일까요.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전쟁은 무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쓰 무네미쓰는 이렇게 청일 간의 갈등을 유도했고,
청일 전쟁의 승리에 외교적으로 기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3국 간섭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방어하며 전쟁으로 얻은 이익의 손실을 최소화합니다.
일본의,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운명을 세 번이나 결정지은 것입니다.
<건건록>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외교관들의 사고방식 전반, 곧 그의 내면과 계산, 정책 결정 과정을 보여 주는 긴요한 자료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침략과 전쟁을 기획한 자의 기록.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고, 동아시아는 수십 년에 걸쳐 전쟁에 휘말렸였으니, 이 중대한 기록을 읽을 필요는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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