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은이),이재만 (옮긴이)책과함께2013-09-02원제 : From The Ruins Of Empire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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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488쪽
152*224mm
695g
ISBN : 9788997735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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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세계는 격변의 20세기를 헤쳐 나왔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규정되는 20세기사가 아니라 '인도의 세포이 반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 러일전쟁, 중국의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 파리 강화회의, 일본의 군국주의 탈식민화, 식민시대 이후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를 거치며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아시아의 역사이다.
판카지 미슈라는 이 책에서 광대한 아시아 대륙 곳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상가들을 매혹적인 집단 전기 형식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회를 장악하는 서구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힘을 부러워하고 모방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근대 아시아가 처해 있던 깊은 딜레마를 드러내 보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아시아가 지적.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하는'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종속된 아시아
이집트―‘잇따른 역경의 시작’|서서히 얻어맞는 인도와 중국|세계의 새로운 위계질서
제2장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의 기이한 여정
남루한 행색의 하찮은 사람|유럽의 ‘병자’와 위험한 자가치료|이집트―떠오르는 논객|자강을 넘어서―범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의 기원|유럽에서의 막간|페르시아에서의 절정기|금으로 만든 옥사―이스탄불에서 보낸 알아프가니의 마지막 날들|기나긴 여파
제3장 량치차오의 중국과 아시아의 운명
부럽지만 모방하기 어려운 나라, 일본의 대두|개혁의 첫 충격|일본과 ‘추방당한 위험분자들’|의화단 운동―패배에서 얻은 더 많은 교훈|범아시아주의―세계주의의 기쁨|량치차오와 미국의 민주주의|전제정과 혁명의 유혹
제4장 1919년, ‘역동하는 세계사’
미국과 민족자결 약속|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인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인가|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세계 만들기|서구의 쇠퇴?
제5장 동아시아의 타고르, 망국에서 온 사람
제6장 아시아의 재형성
뜻밖의 사태―범아시아주의와 전투적 탈식민화|지적 탈식민화―신전통주의자들의 대두|이슬람 세계의 반근대인들|국민국가의 승리―기운을 되찾은 병자, 터키|“중국 인민은 일어섰다”|‘나머지’의 대두
맺음말―모호한 복수
감사의 말|옮긴이의 말|참고문헌 해제|주|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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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0 대부분의 유럽인과 미국인은 여전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와의 오랜 핵 교착 상태가 대체로 20세기의 역사를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 인구 과반수에게 지난 세기의 중심 사건은, 아시아가 지적·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일이라는 것이 이제는 한층 분명해 보인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를 오늘날 존재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구의 이미지보다는 한때 종속되었던 사람들의 염원과 열망에 맞추어 세계가 어떻게 계속 재형성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접기
P. 22 이 책은 동양의 가장 지적이고 예민한 사람들 일부가 그들의 사회를 (물리적·지적으로) 잠식하는 서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폭넓게 살펴보려 한다. 나는 이 아시아인들이 그들의 역사와 사회적 존재를 어떻게 이해했고, 잇따라 일어난 유별난 사건과 운동―인도의 세포이 반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 러일전쟁, 중국의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 파리 강화회의, 일본의 군국주의, 탈식민화, 식민 시대 이후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기술할 것이다. 이들 사건과 운동은 아시아가 오늘날의 꼴을 갖추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접기
P. 24 이 책의 형식을 일부는 역사적 에세이, 일부는 지식인의 전기로 정한 주된 이유는, 물론 개인의 삶마다 고유한 양상과 계기가 있지만, 역사의 여러 갈래들은 결국 개인의 삶으로 수렴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현대 초기의 아시아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다른 사회들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권력의 부패, 공동체의 쇠퇴, 정치적 정통성의 상실과 서구의 유혹에 대해 숙고하면서 두루 돌아다니고 글도 왕성하게 썼다. 오늘날 돌이켜볼 때, 그들의 열렬한 탐구는 겉보기에 무관한 사건과 지역들을 하나의 의미망으로 엮는 실로 보인다. 접기
P. 70-71 무엇을 했건 간에 이 아시아인들 모두는 근대 세계에서 서구가 인간 행위의 거의 모든 면을 압도적으로 좌우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마치 아시아의 방대한 제국들, 존경할 만한 전통, 유구한 관습이 목적이 분명한 유럽의 상인, 선교사, 외교관, 군인 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듯했다. 이집트인, 중국인, 인도인은 서구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근대 세계, 즉 합류하지 못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에는 허약하고 너무도 부적합하다는 것을 차례차례 드러냈다. 아시아가 유럽에 종속된 것이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차원에 그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적·도덕적·정신적 차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구의 정복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복이었다. 서구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분개하면서도 정복자들을 부러워했고, 결국에는 거의 마법처럼 보이는 그들 힘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기를 열망했다. 접기
P. 175 알아프가니는 체계적인 사상가가 아니었으며 자신의 사상을 급하게 전개한 듯하다. 그가 시종일관 견지한 유일한 입장은 반제국주의였고, 이 대의를 위해 다양한 자원을 축적했다. 그는 민족주의와 범이슬람주의를 둘 다 옹호했고, 이슬람의 불관용을 한탄했고, 과거의 위대한 영광을 상기시켰으며, 무슬림의 단결을 요청했고, 그 자신처럼 무슬림이 힌두교도, 기독교도, 유대인과 연합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서구가 이룬 과학적 성취에 경탄했으나 이슬람에도 합리성이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가 알아프가니에게서 받는 인상은 깊은 사유보다는 어마어마한 기운과 열정, 즉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데에는 실패한 활력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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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판카지 미슈라는 이 책에서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터키에서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의 사람들이 겪어온 근대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서구의 오래된 동양관을 전복시킨다. 오늘날 분노하는 아시아인의 할아버지 세대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다. 탁월하다!
- 오르한 파묵
판카지 미슈라는 지난 두 세기 동안 아시아의 비범한 지식인들이 나눈 창조적이고 대담한 대화를 면밀하고도 섬세하게 읽어내며, ‘서구와 나머지 세계’라는 진부한 이분법에 맞서 역사의식 측면에서 ‘대륙적 변화’를 발견하고 드러낸다.
- 하미드 다바시 (컬럼비아 대학 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역저 ≪오리엔탈리즘≫을 잇는 ≪제국의 폐허에서≫는 근대 세계의 역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명쾌한 관점을 제공한다. 폭넓은 학식을 갖춘 명석한 저자 판카지 미슈라는 일본, 중국, 터키, 이란, 인도, 이집트, 베트남이 뒤얽혔던 역사적 사건들을 능숙하고 매혹적인 서술로 펼쳐 보이며, 량치차오, 타고르,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쑨원 같은 아시아의 주요한 개혁가와 지식인, 혁명가 들이 나눈 생생한 대화를 들려준다.
- 왕후이 (칭화 대학 교수)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3년 9월 7일자 '새로 나온 책'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3년 9월 9일 학술·지성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판카지 미슈라 (Pankaj Mishra)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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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대학 졸업 후 히말라야의 산골 마을에 들어가 수년간 독서로 소일하던 한 젊은이가 근대 서구와 아시아의 만남을 대단히 독창적인 관점에서 제시하며 지성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공적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떠오른 인물, 판카지 미슈라다. <블룸버그 뷰>, <뉴욕 타임스 북 리뷰>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뉴요커> 등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영국 왕립문학학회 회원이며, 현재 런던에 거주하고 있다.
<분노의 시대>에서, 미슈라는 서구의 근대화가 나머지 세계, 특히 아시아에 미친 영향과 반응이라는 자신의 관심사를 더욱 깊고 세밀하게 파고든다. 이 책에서 미슈라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편집증적 증오의 원인을 이슬람 근본주의에 돌리는 서구인들의 지배적인 견해를 일축한다. 그러한 감정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사고 속에서 잉태되어 근대 유럽에서 수없이 발현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분노의 거대한 물결은 19세기 유럽이 이미 겪은 과정을 비극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미슈라에 따르면, 분노의 씨앗은 이미 계몽주의의 사고 속에 뿌려져 있었다.
주요 작품으로 <제국의 폐허에서: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From the Ruins of Empire: The Intellectuals Who Remade Asia>, <거꾸로 가는 나라들Temptations of the West: How to Be Modern in India, Pakistan, Tibet, and Beyond>, <고통의 종언: 세계 속의 부처An End of Suffering: The Buddha in the World>, <루디아나의 버터 치킨: 인도 작은 마을로의 여행Butter Chicken in Ludhiana: Travels in Small Town India>, <로맨틱한 사람들The Romantic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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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분노의 시대>,<거대한 후퇴>,<제국의 폐허에서> … 총 54종 (모두보기)
이재만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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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역사를 중심으로 인문 분야의 번역에 주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문명과 전쟁』(공역), 『몽유병자들』, 『정치철학 공부의 기초』, 『번역』, 『성서』, 『신』, 『유럽 대륙철학』, 『종교개혁』, 『정복의 조건』, 『세계제국사』, 『철학』, 『역사』,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공부하는 삶』, 『제3제국사』,『옥스퍼드 세계사』, 『백인의 취약성』,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포퓰리즘』, 『전쟁과 평화』, 『에릭 홉스봄 평전』(공역), 등이 있다.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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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모두의 민주주의>,<팔수록 더 깊어지는 발굴 이야기>,<아시아 생태설화>등 총 211종
대표분야 : 역사 11위 (브랜드 지수 348,988점), 초등 한국사 18위 (브랜드 지수 2,261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서양이 아닌 아시아의 시선으로 본 세계체제
_1905년 러일전쟁에서 2003년 이라크전쟁까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거둔 승리는, 당시 세계인들에게 중세 이래 처음으로 비유럽 국가가 주요 전쟁에서 유럽의 열강을 격파한 사건으로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시아 지식인들의 감회는 더욱 남달라서, 네루는 쓰시마 해전 소식을 듣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고 하며, 배를 타고 귀국하던 쑨원도 그를 일본인이라 착각한 아랍인 항만 노동자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1905년의 일본 승리가 한 줄기 빛이었을 만큼,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침략은 아시아 대륙을 완전히 무력화했다. 영국이 이집트와 수단, 거대한 인도 반도를 점령했고, 프랑스는 모로코와 튀니지, 알제리, 베트남을 손에 넣었다. 네덜란드는 자바와 오세아니아 섬들의 전제적 통치자가 되었고, 러시아는 투르키스탄 서부와 트란스옥시아나, 캅카스, 다게스탄의 큰 도시들을 획득했다. 미국은 필리핀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몰아내고 다시 식민지로 만들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 서구가 편협한 신경증에 빠져드는 반면에 아시아는 한층 더 외향적이고 자신만만하고 낙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십 년간 서구의 안보 우산 아래 웅크리고 있던 터키와 일본은 그 우산 밖으로 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과 그 이웃나라들 간의 해묵은 영토 분쟁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 지역에서 미국은 군사적·외교적 선택권을 여럿 가지고 있으나, 경제 동향은 이와 딴판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을 우회하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뿐 아니라 브라질의 경제도 한데 묶이고 있다. 새로운 무역협정,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을 합한 세계 최대의 시장 같은 지역경제권, 브릭스(BRICS)와 G20 같은 비공식 기구, 그리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미국과 유럽에 종속된 전제적인 통치자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 등, 이 모든 사태는 아시아에 냉전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칸막이’를 치워버리고 미국과 서유럽에 덜 의존하는 국제질서를 만들어내려는 바람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세계는 이처럼 격변의 20세기를 헤쳐 나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규정되는 20세기사가 아니라 “인도의 세포이 반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 러일전쟁, 중국의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 파리 강화회의, 일본의 군국주의 탈식민화, 식민시대 이후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를 거치며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아시아의 역사이다.
문제적 사상가들의 고민과 분투
_우리는 왜 서구에 중독되었는가
판카지 미슈라는 이 책에서 광대한 아시아 대륙 곳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상가들을 매혹적인 집단 전기 형식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회를 장악하는 서구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힘을 부러워하고 모방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근대 아시아가 처해 있던 깊은 딜레마를 드러내 보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아시아가 지적·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하는’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전통과 최초로 단절한 부류에 속했던 그들은 근대 세계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찾고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맞추어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에 직면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문명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대하고 자기충족적이었지만 이제는 활기차게 번창하는 서구 앞에서 나날이 무력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결과, 새롭고 고통스러운 역사적 상황에 다방면으로 적응하고자 했던 그들은 명백한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예를 들어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중국의 전통을 옹호하다가 배격했고, 결국에는 다시 전부 받아들였다. 알아프가니(Jamal ad-Din al-Afghani, 1838~1897)는 이슬람을 통렬하게 규탄하다가 입장을 바꿔 열정적으로 변호했다. 사이드 쿠틉은 타협을 모르는 이슬람주의자로 변모하기 전에는 열렬한 세속적 민족주의자였다.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이들―간디, 캉유웨이, 모하메드 압두―마저도 자신의 전통인 힌두교와 유교, 이슬람을 급진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삶이 저물어가던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절망했다. “팔자가 기박한 우리는 어디를 올려다보아야 하는가? 일본을 쳐다보던 시절은 끝났다.” 3년 뒤, 타고르는 죽었다. 타고르를 중국으로 초대했던 량치차오는 그에 앞서 1929년에 비교적 이른 나이인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보다 4년 전에는 캉유웨이가 죽었고, 량치차오는 옛 스승을 개혁의 선구자로 칭송하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베트남인 판보이쩌우는 프랑스에 체포되어 처형 직전까지 몰렸다가 정치적 거세를 당한 뒤, 1940년에 옛 제국의 중심지 후에에서 죽었다. 이들 대부분은 젊어서는 국내의 자강을 주창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냉철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자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처럼 량치차오, 타고르, 알아프가니 등 저자가 주목한 20세기 아시아의 문제적 지식인들은 희망과 절망, 정력적인 헌신과 허무감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식은 놀랄 만큼 일치한다. 그 이유는 이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전통주의자 혹은 인습을 타파하는 급진주의자로서 같은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란 내부의 쇠퇴와 서구화를 겪으면서 점점 움츠러드는 그들의 문명을 그들 스스로 어떻게 납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지,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백인의 관점에 서서 어떻게 다시 동등한 위치와 존엄성을 회복할 것인지였다. 결국 무분별한 서구 모방에서 벗어나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지적 탈식민지화를 향한 분투였다.
서구 중심 근대성 비판의 새로운 시각
_21세기 지적 탈식민지화의 현주소
19세기 이후 오랫동안 서구는 동양 영토에 대한 물리적 소유권을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쓰시마 해전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는 정치적 탈식민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적 탈식민화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서구의 진보와 힘을 향한 근대의 특별한 열의”에 대한 타고르의 날카로운 선견지명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방법을 찾고자 서구의 근대성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량치차오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개개인의 도덕적·정신적 변혁과 집단의 덕행이 더 큰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에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무슬림 세계만큼 근대성의 맹공에 맞서 전통주의적 이상을 완강하게 고수한 지역은 없었다. 신이 사회를 인도하고 공동선 개념을 규정한다는 이슬람 세계의 믿음은, 개인의 이익에 입각한 사회경제 질서와의 대결에서 살아남았다. 더불어 서구에서 수입된 이데올로기로서 아시아가 서구에 대항하는 데 널리 받아들인 것은 민족주의였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에 옛 제국들이 무너지고 민족자결 사상이 유행하면서 민족주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영국을 극복하려 노력한 이집트인과 인도 무슬림, 프랑스에 맞서 투쟁한 시리아인, 영국과 러시아의 계획에 저항한 이란인, 네덜란드에 맹렬히 대항한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1922년에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인을 내쫓은 터키인까지, 이들 모두가 서구의 사상과 제도라는 무기를 차용했다.
두 차례의 파멸적인 세계대전과 대공황은 서구의 정치와 경제 모델에 심각한 구조적 결함이 있음을 드러냈다. 탈식민화는 서구 국가들의 정치권력을 한층 더 약화시켰고, 그 권력을 되찾으려는 절박한 시도―1956년에 수에즈에서, 그리고 알제리와 베트남에서―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정치적·도덕적 권위마저 싹 사라졌다. 특히 2003년 영국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자 전역의 무슬림들이 급진적으로 변했다.
이처럼 서구가 도덕적 위신을 잃고 동양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최근의 현상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찍이 19세기부터 아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은 서구의 인종적·제국적 위계 질서와 국제정치의 규칙을 정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덜 불공평한 세계질서가 형성되고 있음을 감지하고서 그에 대해 논박해왔다. 때때로 폭발해서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충격을 주었던 비서구 사회들의 역사적 분노와 좌절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정치 생활에서 중심에 놓여 있었으며, 아시아인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훼손한 과거의 종교적·정치적 위엄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모든 비유럽 국가가 환호성을 울리는 와중에 한 나라만은 기뻐할 수 없었다. 같은 해에 제2차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 등으로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한국에 있어 서구 열강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로부터 5년 뒤 8월 29일 대한제국이 막을 내렸다. 이러한 이유로 문제적 지식인들 속에 한국의 근대 사상가들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점령당한 근대의 한국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5년간 유지되어온 전후체제는 냉전 붕괴와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 속에서 봉인이 풀렸다.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개혁과 안보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책무에 당면하고 있다. 21세기 지식인들의 사상지도는 20세기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의 권력과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의 전능과 위대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과거의 웅장함과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이 헤아릴 수 없는 쇠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가난과 무력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신의 약속을 의심할 수 있는가? 신은 의심을 금하셨다! 신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잃을 수 있는가? 신은 우리를 지키신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이것뿐이다. “신은 인간이 자기 조건을 바꾸기 전에는 인간의 조건을 바꾸지 아니하신다.”
―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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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아시아 지식인들의 고뇌와 분투, 그리고 우리의 역사교과서 논란
‘중국의 역사는 아무런 발전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 말하자면 중국과 인도는 세계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C.W.F.헤겔, 1820
‘유럽인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핏빛 글자로 쓰인 ‘위대한’ 역사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수억 명에 달하는 비유럽인은 그 역사에 이제 막 접어들었거나 그 역사로 되돌아오고 있다.’ -레몽 아롱, 1969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머리를 식히려고 역사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불변하고, 그 역사를 톺아보며 정중동의 자세를 되찾을 수 있으니 복잡한 세상사 역사를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뭐,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역사는 굳건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최근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을 보면 여실히 느끼게 된다. 얼마 되지도 않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둘러싸고 좌우와 진보, 보수가 서로 갈려 한 치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자세로 벌써 몇 달, 아니 몇 년 째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개인적인 호불호와 경향성의 여부를 떠나 역사를 바라보던 그동안의 인식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서로 다르다. 교학사 교과서 파동처럼 그 배경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쓴 맛이 도는 역사 인식 말고도 역사는 매우 다양한 시각을 통해 재구성된다. <제국의 폐허에서>(책과함께)는 그런 시선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제국주의 서구의 시선에서 재단한 아시아가 아닌, 그 당시 서구에 의해 핍박받거나 억압의 영향을 받던 아시아 지식인의 시각에서 본 아시아와 세계의 역사다.
이 책에는 ‘이슬람 세계의 마르틴 루터’로 불렸다는 알아프가니와 스승 캉유웨이와 중국의 무술변법을 주도했으나 100일 만에 실패한 량치차오 두 인물을 중심으로 타고르 등 근대를 살아간 다양한 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구 강국에 의해 속절없이 스러지는 조국과 아시아에 좌절하기도 하고, 그렇게 스러져가는 자국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변화를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서구를 따라 하기도, 서구에 저항하기도 하며 자신들만의 근대성을 성찰하기에 이른다.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과 영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자 판카지 미슈라는 '오늘날 아시아를 형성한 규정적 계기는 양차 대전과 냉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아니라 인도의 세포이 반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 러일전쟁, 중국의 신해혁명, 일본의 군국주의' 등이라고 지목한다. 그리고 그 파란만장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캉유웨이, 쑨원, 옌푸, 탄쓰퉁, 루쉰, 마오쩌둥, 타고르, 간디, 샤리아티, 호메이니, 오카쿠라 가쿠조, 도쿠토미 소호, 호찌민 등을 등장시킨다. 낯설다. 그만큼 아시아의 역사를 그동안 아시아의 입장에서가 아닌 서구의 입장에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식인들의 풍요로운 사상과 상상력은 지금도 근대성의 위기에 직면한 사회를 위한 자원이 되고 있다. … 사실 거의 모든 토착 엘리트들이 미래를 둘러싼 다윈주의적 투쟁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서구를 물리치기 위해(또는 따라잡기 위해) 받아들였던 것은 유럽의 신념인 민족주의와 시민적 애국주의였다. 간디처럼 정신을 중시하고 반정치적이고 근대적 국가 건설에 비판적인 사람마저도 민족주의 지도자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간디는 정치 경력 초깅 잠시나마 범이슬람주의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 지식인들은 자국의 전통주의적인 대중을 하루빨리 민족주의 쪽으로 돌려놓기 위해 2000년 역사를 지닌 유교 전통을 비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스만인은 이슬람의 칼리프 지위를 완전히 폐지하고,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포기하고, 터키를 근대 국민국가로 바꾸기 위해 이슬람 자체를 국교 자리에서 몰아내기에 이르렀다.'(제국의 폐허에서. 423p)
이 책의 미덕은 아시사의 시각에서 아시아의 근대를 재구성하는 색다른 역사 인식의 눈을 밝혀주는 것뿐만 아니다. 서구에 종속되거나 대립했던 아시아의 근대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왜곡된 역사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고, 그 왜곡은 또 다른 변주의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서아시아의 갈등은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서구와 아시아의 갈등이 다른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중국이 21세기 초반 미국을 제치고 G1에 오를 것이라는 예상은 이제 지배적인 견해가 됐다. 어떻게 보면 서기를 기준으로 1,800여 년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국력이 강했던 국가였던 중국이 다시 세계의 중심에 선다는 이야기일수도 있다. '제국의 폐허'는 이렇게 돌고 도는 모양이다. 이 독후감의 첫 머리에 인용한(이 책의 첫머리이기도 하다) 헤겔과 레이몽 아롱의 말들은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오남용을 경고하는 의미로 들린다.
그런 점에서 더 쓴 맛이 돌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역사교과서 논쟁이다. 더 다양한 관점과 더 넓은 시각이 아쉽다. 하기야 영수 중심의 입시교육에 맞추다 보니 역사 교육 시간마저 축소해야 하는 교육정책부터 바뀌어야 할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라크던, 이란이던, 심지어 파키스탄까지 '아랍'이라고 묶어 퉁 쳤던 얼마 전까지의 나 스스로의 모습도 다시 반성한다. 그리고 이 책,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사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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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2kljh 2013-10-27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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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의 이 끝과 저 끝을 오가는 근대 초기 아시아 사상가들의 지적 편력
조너선 스펜스의 <천안문>을 '범아시아 버전'으로 읽은 듯하다. 실제로 등장인물 중 중국의 상당수(캉유웨이, 량치차오, 천두슈 등)가 겹치기도 한다.
인도 출신인 저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공격과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가 서양을 이기기 위해 어떤 고민과 모색을 했는지 보여준다. 아시아 대륙의 이 끝과 저 끝을 오가는 '근대 초기 아시아 사상가들의 지적 편력'이 화려하고 또한 음울하게 전개된다. 이 지적편력기의 주인공은 크게 두 사람이다. 이슬람권에 두고두고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슬람 테러범들'로 숱하게 폄하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창시자 격인 알 아프가니가 첫번째 인물이다. 알 아프가니에 대해서는 9.11 테러가 난 뒤 -_- 공부를 좀 해보려 했으나... 안 했다. 그러다가 이제야 그의 행보에 대한 좀 상세한 설명을 읽은 셈인데, 그의 생각틀 자체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니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두번째 인물은 량치차오다. <천안문>의 세 사람 중 한 축인 캉유웨이의 제자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쑨원과 마오쩌둥, 옌푸와 탄쓰퉁을 비롯한 중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행로가 그려진다. 인도에서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모한다스 간디, 무함마드 이크발의 이름이 나온다. 사아드 자글룰, 사이드 쿠툽 같은 이집트의 지식인과 이란의 알리 샤리아티, 아야툴라 호메이니도 한 자리 차지한다. 일본의 근대를 형성한 오카쿠라 가쿠조, 미야자키 도텐, 베트남의 호치민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보여주는 '아시아 지식인들의 저항'은 모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서구라는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그들의 모색이 혼돈을 맴도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세밀화가들이 전통과 개혁,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처럼.
재미있었다. 책은 '일본의 개가에 환호하는 범아시아인들'로 시작하며, 일본이 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아무래도 '우리 조선의 후예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혹은 눈감으려 하는 역사적 진실이라 생각할 수밖에.
아시아 사상가들의 지적 궤적에는 좌절과 희망이 수시로 교차한다. 어찌 되었든, 과거는 과거다.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미 테러와의 전쟁이 금세기의 첫 10년을 망쳐놓았다. 그렇지만 미래에 되돌아보면, 그 10년은 이미 근대적인 경제는 물론이고 근대화 중인 경제에도 필요한 귀중한 자원과 원자재를 차지하기 위해 더 큰 규모로 더 많은 피를 흘린 분쟁의 전초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경제성장을 끝없이 추구하도록 부채질하는 희망- 인도와 중국의 소비자 수십억 명이 언젠가 유럽인과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은 알카에다가 꿈꾸는 공상 못지않게 터무니없고 위험한 공상이다. 이 공상은 전 세게의 환경을 더 빨리 파괴하고 있고, 수억 명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허탈한 분노와 절망의 저수지를 만들고 있다. 서구 근대성의 보편적인 승리라는 이런 씁쓸한 결과로 말미암아, 동양의 복수는 어딘지 음울하고 모호하게 변해가고 있으며, 서구가 거둔 모든 승리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로 바뀌고 있다."
저자의 맺음말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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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14-02-0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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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아시아 침탈사, '제국의 폐허에서'
홉스봄은 그의 ‘극단의 시대’에서 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는가를 반문하며 ‘모른다’라고 단정 진다. 물론 히틀러라고 단순하게 그는 표현하지만 그의 뜻은 역사를 평가할 때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얘기한 것이다. 그의 책이나 ‘세계 제국사’ 등은 서구의 관점에서 써진 것이 맞다. 즉, 제국의 팽창의 원인이든 열강을 논하든 서구의 입장, 즉, 행하는 자의 편에서의 입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의 정당성은 최소화된다.
만약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지내온 역사를 평가하라면 그 내용이 매우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20세기를 조망하는데 아시아 입장에서 조망하는 것과 한반도 입장에서 조명하는 것은 또 다를 수가 있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도 또한 천차만별일 것은 뻔하다. 역사는 그래서 평가가 역동적이고 민주적이다.
당했던 아시아의 입장에서 써진 책이 바로 ‘제국의 폐허에서’이다. 자자는 인도인인 것 같고 매우 잘 준비되고 체계적으로 자기주장을 편 수준 높은 저작이다. 머리말에 이미 그는 1905년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러일전쟁의 승리를 모든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축하해 마지않았는 것이 서구의 압제 하에 식민지를 겪는 동양의 대부분 나라들에게 아시아가 서구를 격파한 놀라운 격려의 일로서 찬사를 듣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한 우리야 그게 반가울 리는 전혀 없었을 게다. 다만 서구의 동양 침탈은 이미 오래전부터 뿌리박혀 있었다.
아시아권은 크게 중동, 인도, 극동과 동남아로 나뉘는데 이야기의 주된 소재는 짐작 가는 바와 같이 중동, 인도와 극동이다. 이집트, 오스만, 인도, 중국이 잃는 자들이고 이들이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저항하였는지 어떻게 저항의 임계점을 넘지 못했는지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행한 자인 일본은 어떻게 다른 아시아권과 달라서 전후 어느 일본 사상가가 지적했듯이 제국의 흉내를 내게 되었는지를 매우 잘 준비된 수많은 자료와 그 체계를 통해 보여준다.
느닷없이 들어온 서구의 아시아로의 침탈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인도와 이집트는 이미 종속되었고 오스만은 명목상이나마 나라이나 서구의 나쁜 기운의 영향권에 이미 들어간 지 오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서히 서구는 극동에도 발 담그는 행위로서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중국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과 일본이 교묘히 침탈을 피해 가면서 그들의 국력을 키워나가게 된 이유를 자세히 그려내는데 내가 판단하기로 중국은 적어도 18, 19세기에도 지속된 평화와 유럽보다 잘 사는 방대한 나라로서 중화라는 교만의 습성이 패착을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이게 우리들이 배운 일본 역사와 좀 다를 수 있는데 본래부터 적어도 우리보다는 경제적으로 잘 살아왔던 것 같고 중국처럼 교만에 빠질 만큼 나라가 크질 않고 더군다나 군국주의가 시작될 무렵에 자신들의 자위 방법이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고 구심점으로 천황을 내세우는 작업까지 아우른 결과가 아닌가 한다.
저자는 각 지역에서의 저항운동을 상징적 인물을 내세워 기술하는 방법을 동원하는데 중동에서의 알아프가니, 중국의 량치차오 그리고 인도의 평화주의자 타고르 등을 통해 작게는 자신의 나라 크게는 아시아권의 저항세력의 중심인물로 그리고 있다. 알아프가니는 처음 접하는 인물인데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금도 위인으로 칭송될 정도로 그 사회에서 반서구 저항 운동의 핵심 인물이라 한다. 량치차오의 개혁은 수구세력을 등에 업은 서태후에 의해 실패하게 되는데 만약 이게 성공하였다면 당시 후의 중국과 지금의 중국이 다라져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개혁성은 서구적이고 애국적이다. 1905년의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에 찬사에 찬사를 시로서 표현한 타고르는 그의 말년에는 일본의 폐쇄적, 서구 모방적 군국주의에 반기를 든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의 중국 및 동남아 침략에서 벌인 행위는 극악적으로 저자는 매우 심한 비판을 가하고 아이러니하게 일본의 항복이 아시아의 여러 식민화된 나라들이 독립을 차례로 서구로부터 쟁취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다. 그렇다. 이 책의 제목처럼 아시아는 제국이 휩쓸고 간 폐허의 주무대였을지도 모른다. 당했던 많은 나라건 행했던 한 나라건 아시아에서 잃은 것은 너무 많다.
잠깐잠깐씩 나오는 조선에 대한 얘기는 프랑스령이었던 베트남 얘기보다 적다. 한반도에서 잠깐 벗어나 아시아권에서 바라본 20세기 아시아의 역사도 그런 것이다. 단군 이래 제일 잘 산다는 작금의 우리, 과연 정신은 그만큼 따라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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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2016-05-02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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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 판카지 미슈라
19~20세기를 횡단한 서구 제국주의에 아시아가 대응한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자신들의 우월한 종교나 전통에 충실하면 섭리 혹은 순리에 따라 강성함이 돌아온다는 생각, 둘째, 전통 문화와 사회 질서를 보존하면서 그 위에 서구의 기술을 도입한다는 생각, 셋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국제 세계에서는 옛 것을 철저히 내버리고 서구 근대화를 압축 달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통과 기술을 다루는 방식이 제각각이었지만, '국민국가'라는 서구의 제도를 사고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단결만이 압도적인 서구에 맞설 수 있다는 논리는 국가별 입장과 발전 수준의 차이 앞에서 와해되어 갔다. 범이슬람주의는 사회주의가 세계대전의 파도 속에서 국가에 포섭된 것처럼 권력의 자장 안에 머물렀고, 범아시아주의는 제국 일본의 야심이 선의를 집어삼키면서 사라졌다.
서구를 완전히 배척하거나 서구에 종속되어도 좋다는 몰아(沒我)는 서로를 침식했고, 유교나 불교, 이슬람을 내세운 도덕적 전통은 새로운 사회 체제의 중심 이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아시아는 민주적 제도를 국가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국가의 권위체로서의 성격만을 받아들였는가로 지형이 나뉘었다. 개인은 내면을 규율하는 체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국가는 부단히도 다원성을 희생시키고자 했다.
주어진 것과 쟁취한 것은 같은 것이라 해도 결국에는 같지 않다. 주어진 것은 쟁취하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다시 빼앗기거나 변질되기 마련이다. 아시아는 제국의 습격에 맞서 오래된 제국을 재건하거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몰두했다. 그러나 제국이 무너져내린 폐허에는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들과, 유령처럼 그 위를 배회하는 '종교'만이 남았다. 이 인공의 들판에 자라나는 쇠사슬을 처리하는 일은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이다.
아시아 세계 어디에서든 근대화는 두 가지 가장 영속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군 장교나 정부 관료, 새로운 전문직처럼 세속적이고 서구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집단들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납세을 요구받은 일반 시민들, 서구인 때문에 영향력이 위태로워진 종교와 사회 엘리트, 당국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고유의 인종적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깨달은 소수 집단들의 반발이었다. 103)
량치차오가 갑작스레 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머문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성공은, 권위주의 국가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서 자유민주주의제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유럽 국가들이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포용하고 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초기에 도쿠토미 소호는 자유주의적 개혁론자였지만, 18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서구 국가들마저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대의제와 정당 내각"의 가치를 의심했다. 량치차오가 비스마르크의 독일에 구현된 국가주의를 갈수록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추세에 영향을 받은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249-50)
도쿠토미는 많은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믿었던 개전의 더 큰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앵글로색슨족이 동아시아를 잠식하고 강탈한 악랄한 선례를 근절하는 방법으로만 동아시아의 질서와 안녕, 평화, 자족을 성취할 수 있음을 동아시아의 인종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348)
서구화된 세속적인 탈식민 엘리트들은, 이슬람이 세속적 발전과 경제적 통합이라는 국가의 과업에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대개 이슬람 단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그런 근대화 노력이 실패했을 때, 또는 대중의 고통을 초래했을 때, 이슬람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 374)
초기에 알레 아마드(1923~1969)는 이란 학생들을 서구 대신 일본과 인도로 보내서 서구 중독증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동양에 중독된 이란인들이 서구에 중독된 이란인들과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계획에는 이슬람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1962년에 당시 신생 국민국가이던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가 국민들이 공유하는 종교에 기반을 둔 정치적 결속의 힘을 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
터키와 달리 이스라엘은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근대적인 독립국가가 되었다. 385)
공산주의적 반제국주의자뿐 아니라 무슬림조차 배척하기 어려운 서구의 관념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 거의 어디에서나 탈식민 사회의 엘리트들은 유럽의 성공으로 보증된 그 관념을 받아들였다. 너그럽게 해방을 약속한, 자강과 긍지를 위한 그 혁명적 비책은 바로 국민국가의 제도와 관행이었다.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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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5-10-1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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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타지에서 독특한 레시피로 만들어낸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한 여행이다. <제국의 페허에서>가 보여 준 책 읽는 맛이 그렇다. 그 맛은 익숙한 맛이 아니라 새로운 맛이다.
십 여 년 전일까. TV토론에서 어떤 정치인은 발언에 답답했었다. 강대국의 눈 밖에 나면 나라가 금새 혼란에 빠지거나 망할 듯 토론자에게 정신차리라는 투로 말하더라. 의존하는 사고 방식과 세계 인식에 혀를 차는 것 말고는 시청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몇 가지 차원에서 지적 호기심은 배우는 기쁨을 준다.
첫째, <제국의 폐허에서>는 19~20세기 영국, 미국이라는 서구 강대국의 시각에서 세계를 인식하도록 가르치고 배워왔던 기성세대에게 새 지평을 안내한다. 인도사람 판카지 미슈라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한다. 물질을 중시하는 서구의 시각이 아니라 정신도 중시하는 중국과 인도, 이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둘째,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로 지식정보사회를 예견한 것처럼,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량차오, 타고르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데, 선견지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말로를 예견했던 사상가들의 삶을 통해 21세기를 예견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이미 황태연의 <갑진왜란과 국민전쟁>과 같은 국내 서적에서도 언급하는, 드러내기 껄끄러운 내용을 통해 알려준다. 러일전쟁이후 일본에 대한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반응은 ‘환영’과 ‘주목’이었다. 동양이 서양을 꺾었다고 인식한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일부 지식인들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한다.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대다수 우리에겐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다.
넷째, 경제학자였던 슈펭글러가 아마추어라곤 하지만 <서구의 몰락>을 내게 된 배경에 물질주의의 만연, 1차 대전 이외에도 러일전쟁에 승리한 동양의 한나라, 일본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문화는 창조 모체인 영혼의 자기표현이며 영혼이 그 창조력을 고갈시켰을 때 쇠퇴한다는 기조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국사 교과서는 중국의 5.4운동이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운동이라고 가르친다. 대한제국의 3.1운동이 동양 강대국이었던 중국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이다. 책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중국인들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중국의 요구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의 반환 등 중국의 요구가 무시됨에 따라 실망한 것이 기폭제였음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제국의 폐허에서>는 머리말을 통해서 판카지 미슈라의 연구 개요를 파악할 수 있다. 책은 현대 세계의 모습을 1905년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그려낸다. 서구의 대표로 나선 러시아와 동양의 대표인 일본이 싸워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서구 세계가 멘붕에 빠진다. 백인종이 무지몽매한 흑인, 황인종을 가르치고 깨우쳐 문명 상태로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이며 이는 ‘백인의 짐’이란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루스벨트, 인도 총독은 놀랬고 무스타파 케말, 자와할랄 네루, 타고르, 쑨원은 기뻐했다. 일본의 승리에서 오스만 제국, 이집트, 베트남, 페르시아, 중국의 신문은 추론에 들떴다. 세계 어디서나 식민지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가 가진 심리적, 도덕적 함의를 열열히 받아들였다. 무슬림 나라의 학생들은 일본이 진보한 힘을 배우러 일본으로 향했다. 중국, 베트남, 인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판카지 미슈라의 눈으로는 유럽은 쓰시마 해전과 1차 대전에서 대학살을 자행으로 도덕적 위신을 대부분 잃어버렸다고 본다. 게다가 “2차 대전 중 아시아를 정복한 일본이 기진맥진한 유럽 제국들의 손아귀에서 아시아를 떼어내는 일에 일조했다”(p.18)고 본다.
20세기 역사를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냉전으로 규정하는 유럽인과 미국인에 반하여, 아시아가 지적,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 판카지 미슈라의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구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 아시아의 사상가,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본다.
“이 책의 두 주역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닌 사상가 겸 활동가다. 먼저 자랄 알딘 알아프가니(1838~1897)는 19세기 후반 중동과 남아시아에서 오래송안 언론 활동과 정치적 권고에 주력한 무슬림이다. 또 한 명은 현대 주국의 가장 두드러진 지식인 량치차오(1873~1929)인데, 그는 오랜 제국의 확실성을 무너뜨린 여러 사건과, 중국이 온갖 참상을 겪은 뒤에 세계의 주요 열강으로 다시 부상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현대 초기의 이 두 아시아인은 아시아 전역에서 서구와 서구의 지배를 향한 분노, 조국의 무력함과 쇠퇴를 근심하는 마음이 대중의 민족주의적 해방운동과 야심찬 건국 계획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선두에 서 있었다.”(p.23)
제1장 : 종속된 아시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은 서구인이 이슬람을 앞지르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듯, 1905년 쓰시마 해전은 동양이 서구에게 더 이상 허수아비가 아님을 암시한다. 비록 한국인의 입장은 기분 나쁘고 뼈아픈 역사일지라도.
헤겔은 중국이 세계사에서 뒤쳐진 까닭으로 해양 탐사에 무관심했음을 지적했다.
볼테르와 라이프니츠가 중국을 계몽주의의 정점으로 보았던 것과 반대로 19세기 초에 서구는 발달한 기술력과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중국을 뒤쳐진 나라로 보게 된다. 중국인은 19세기 서구로부터 당한 치욕으로 아편전쟁과 원명원파괴를 기억하고 있다.
680년 이맘인 후세인 이븐 알리가 카르발라 전투에서 순교한 일은 수니파와시아파 대립의 출발점이다.
“서구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분개하면서도 정복자들을 부러워했고, 결국 그들 힘의 비법을 전수 받기를 열망했다.” (p71)
제2장 :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의 기이한 여정
이란에서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는 이슬람 혁명의 지적 대부로 숭배받는데, 선구적인 반제국주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여긴다. “휴면기의 동양에서 처음으로 자각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다. 대대로 인도를 통치 해 온 무슬림에게 세포이 반란이 진압된 사건은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인 정신적 패배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란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으나 델리와 카불, 이스탄불, 카이로, 테헤란, 런던, 모스크바로 돌아다니며 이슬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다.
“신은 인간이 자기 조건을 바꾸지 전에는 인간의 조건을 바꾸지 아니하신다.”
다음은 여성의 권리를 강조한 알아프가니의 연설이다.
“여성이 권리를 박탈당하고 자신의 의무를 모르는 한, 어리석음에서, 치욕과 곤경의 감옥에서, 암흑과 오옥의 심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초급 교육과 기본적인 도덕을 가르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 여성의 교육이 경시될 때, 한 국가의 모든 남성이 박식하고 고매하더라도 그 국가는 한 세대 동안만 그들이 달성한 상태로 존속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어머니의 품성과 부족한 교육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그들을 배신할 것이고, 그 국가는 무지와 곤경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알아프가니는 이슬람 세계를 잠식해 오는 서구 국가들의 힘 앞에서 무슬림이 수동적으로 체념하는 태도를 버릴 것을 처음으로 역설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폭력적으로 대립하는 이항(二項)이라는 개념으로 이슬람과 서구를 사용한 최초의 주요 이슬람 사상가였다.” 무슬림 대중 사이에 아직 정치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시절에 대중운동에 참여하고 무슬림의 단결과 반란을 주장하는 등 여러모로 시대를 앞섰다.
제3장 량치차오의 중국과 아시아의 운명
메이지 유신이후 서구를 따라잡던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깔보는 경향을 갖게 됐다.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 나라들이 가망 없이 뒤떨어진 데다가 약함으로 일본은 “아시아를 탈출”해서 “서구의 문명국들“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당대 이론 엘리트들 사이에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1902년 일본과 영국의 군사협정은 유럽의 기준에서 본 국제관계에서 일본이 유럽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부러운 것은 메이지 당시 일본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근본적으로 개정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는 거다. 아직도 SOFA(한미행정협정)에서 불평등한 상황인 현재 우리를 보면 더 부러운 거다.
1895년 37세 캉유웨이와 제자인 22세 량치차오가 과거시험 보러 베이징으로 가던 기선이 동중국해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수색을 받는다. 이 기이한 우연으로 량치차오는 현대 중국에서 우상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다. 당대의 주요관심사와 미래의 많은 관심사를 예측한 명료한 글로 마오쩌둥을 비롯한 몇 세대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한다. 중국 고전에 대한 학식과 서구의 사상과 동향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옌푸(염복, 천연론)의 번역서로 서구 철학자들을 만난다.
량치차오는 파리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해중국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참담한 상태로 귀국한다. 인도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파리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1차 대전에서 인도 병사 8만 명이 중동과 유럽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고매한 이상이었을 뿐이다.(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는 하느님도 10개조뿐이었다고 농담했다고 한다) 파리강화회의는 서구의 현실정치가 아시아의 지식인들과 활동가에게 가르쳐준 교훈 가운데 가장 뼈저린 일이다.
“1917년에 권력을 장악한 레닌은 프랑스, 영국, 제정러시아가 체결한 중동 분할에 관한 비밀협약을 폭로했고, 중국에서 누리던 특수이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이러니 일제에 고통 받던 조선 지식인들의 마음이 움직일 방향은 뻔했던 것이다. 공산주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현실을 타개, 개혁할 대안, 세력, 이념이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명국, 프랑스, 미국이란 제국주의의 이익추구가 월슨의 배반과 러시아의 불평등 조약파기와 함께 아시아 민족들에게 공산주의에 눈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었다.
량치차오는 민족의 힘이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서 비롯되는데, 민주주의란 군주제의 이기심과 반대되는 “그저 공공심(公共心)”일 뿐이라고 본다
제4장 1919년, 역동하는 세계사
이탈리아-터키 전쟁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의 활동은 쓰시마 해전과 같은 충격을 아시아와 서구에 주었다. 서구의 몰락에 내재한 물질주의는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자연을 정복하고 개인과 계급, 국민 들이 서로 충돌하는 다원주의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끊임없이 새것을 원하고 끊임없이 좌절하는 서구의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은 전쟁에 지치고, 불안정한 현실에 괴로워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이 자랑하던 위대한 진보를 스스로 엄정하게 성찰하고 회의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유럽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눈에는 별안간 유럽이 멸망할 운명으로 보였고, 량치차오는 이를 감지한다.
량치차오는 “유럽인은 과학의 전능을 고대해왔다. 이제 그들은 과학의 파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근대적 사유의 대전환기다.” 서구인이 보기에도 도덕적 질서를 강조한 공자와 맹자가 더는 부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신문화 운동의 급진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과학은 더 이상 사회복지 문제에 대한 만능 해결책이 아니었다. 량치차오는 “물질적 삶은 정신적 삶을 살기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목표에 이르는 수단으로 목표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유교의 이상인 중용을 적용해서 모든 사람이 균형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느냐는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버틀란트 러셀도 “우리 문명의 뚜렷한 장점은 과학적 방법이고, 중국 문명의 뚜렷한 장점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라고 역설했다. 량수밍(1893~1988)도 “중국 문화의 근본 정신은 중용에 의거한 사상과 욕구의 조화다.”라고 말한다.
제5장 아시아의 타고르, 망국에서 온 사람
타고르는 인도의 유럽화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맹렬하게 비판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환호했던 타고르는 일본의 침략주의, 제국주의 팽창 의도를 알게 되자 “신일본은 서구의 모조품일 뿐입니다.”“당신네는 유럽 제국주의라는 병균에 감염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193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참석한 뉴욕 만찬회에서 “지금은 서구의 시대이고 인류는 여러분의 과학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여러분은 이 유감스러운 선물 때문에 무력해진 사람들과 굴욕을 당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제6장 아시아의 재형성
일본의 이익은 아시아의 이익이라던 궤변은 역풍을 맞아 탈탈 털렸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에게 깨진 프랑스 대신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5년 사이공 미대사과 옥상에서 미군헬기가 철수해야만 했다. 1965년 싱가포르 리콴유는 아시아 전쟁세대가 더 이상 제국주의 국가에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량치차오가 이루지 못한, 국민이 공유하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중국을 되살리는 일을 시작했고, 오늘날 중국 정부는 세계 곳곳에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정통 공산주의 보다 자유무역과 결합한 맹자의 공적 소유라는 경제적 이상에 기댄 듯한 원칙에 입각해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내부가 약했던 이슬람 세계는 외부 위협에 시달렸으나 신이 사회를 인도하고 공동선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이슬람의 믿음은, 개인의 이익에 입각한 사회경제 질서와의 대결에서 살아남았다. 이슬람주의 세계관에 따르면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를 만든 서구 자체도 실패한 것으로 본다. 오르한 파묵은 “서구 세계는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느끼는 이 압도적인 굴욕감을 거의 모른다며 테러리스트를 찾는 일 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에 속하지 않는 가난하고 멸시받고 ‘그릇된’ 다수를 이해하는 것이 서구가 직면한 문제다라.”라고 일갈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서구에 대한 적의를 강화했다.
“유럽의 인종들은 대개 지독한 불한당이지만, 적어도 신의 의지와 힘을 부여하고, 한동안 인류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도록 예정해 둔 듯한 불한당이다. 지구상의 그 무엇도 그들의 영향력에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1855년 알렉시스 토크빌의 예측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실이다.
아시아인들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훼손한 과거의 종교적, 정치적 위엄을 잊지 않고 있다. 더불어 21세기 위싱턴 컨센서스(미국식 시장경제 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 외국 자본에 대한 규제 철폐, 무역 자유화와 시장 경제 국가 기간 산업 민영화 등)도 무너지니 신뢰를 잃고 있다. “분명 서구의 지배는 이미 제국과 문명의 기나긴 역사에서 놀랄 만큼 단명한 또 하나의 단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폐허에서>를 읽고 공부하면서 1920년대에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세계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1판 1쇄가 ‘책과 함께’에서 2013년 8월에 본문 486쪽 분량으로 나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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