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0

민족과 혁명: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수용에서 러시아혁명 인식의 문제

민족과 혁명: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수용에서 러시아혁명 인식의 문제



민족과 혁명: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수용에서 러시아혁명 인식의 문제Nations and Revolutions:recognizing the Russian revolution in the context of accepting socialism in the early 1920s




민족문학사연구

약어 : 문사연

2021, vol., no.77, pp. 323-368 (46 pages)

DOI : 10.23296/minmun.2021.77.323


발행기관 : 민족문학사연구소
연구분야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최은혜 /Choi Eunhye 1


1고려대학교

초록 


본고는 192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될 때, 러시아혁명이 미친 영향을 살피고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았다. 주지하듯 1차 세계대전 중 발발한 러시아혁명은 유일하게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이자 농민‧노동자가 전제정치를 뒤엎고 선두에 선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여파는 특히 민족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식민지들에게 크게 몰아쳤는데, 조선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워싱턴 회의로까지 이어지는 베르사유 체제 속에서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형성된 러시아혁명 및 볼셰비즘에 대한 인식은 3‧1 직후 보다 더 명징하게 민족자결의 문제와 관련되었으며, 이는 민족의 자족적 운동을 넘어선 세계 혁명에 대한 잠재성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러시아혁명은 정치‧문화‧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러시아를 인류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체제의 선두에 서게 한 사건이었다. 후진으로서의 조선은 러시아혁명을 통해 역전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다. 러시아혁명이 민중에 의한 혁명이었다는 점은 사회주의자들에게 3‧1을 민중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그랬을 때 3‧1은 조선에도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은 세계사적 동시대성을 ‘실천적으로’ 확보했다.


This article explored the impact of the Russian revolution on accepting socialism in colonized Joseon during the early 1920s and went further to acknowledge the changes the Russian revolution made on the epistemological features of accepting socialism. The Russian revolution, which took place during WWI, was the only revolution that stood up against capitalism and imperialism, and a revolution led by farmers and workers revolting against autocracy. This revolution had a substantial impact on colonies yearning for self-determination, and Joseon was not an exception. National self- determination, called forward by Lenin himself, affected socialists in Joseon in various ways within the context of the Versailles system that persisted until the Washington conferenc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nception of the Russian revolution and Bolshevism led by socialists and national self-determination was more clear than that in the period following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The situation had the potential to escalate into an international revolution, over a national self-determination movement. However, socialists in Joseon considered the Russian revolution to be an event that allowed Russia to escalate from its lagging political, cultural, economic status into a nation that leads the system considered to be ideal to mankind. Joseon, in its lagged state, had a chance to change the game through the Russian revolution. The fact that the Russian revolution was led by the people led socialists to set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as a movement by the people. By doing so,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suggested that a revolution may break out in Joseon. As a result, socialists in Joseon “practically” secured their historical simultane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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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레닌,
민족자결주의,
후진성,
식민지 사회주의

The Russian revolution, Lenin, National self-determination, Backwardness, Colonial soc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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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혁명
: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수용에서 러시아혁명 인식의 문제
최은혜*48
 
목차
1. 서론: ‘식민지 사회주의’의 정신사
2. 3 ‧ 1 전후, 레닌적 민족자결주의의 잔 과 향
3. 후진성의 역전이라는 표본과 세계로의 비약
4. 결론
 
국문요약: 본고는 192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될 때, 러시아 혁명이 미친 향을 살피고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았다. 주지 하듯 1차 세계대전 중 발발한 러시아혁명은 유일하게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에 대항하 는 혁명이자 농민‧ 노동자가 전제정치를 뒤엎고 선두에 선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여파 는 특히 민족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식민지들에게 크게 몰아쳤는데, 조선에서 또한 마 찬가지 다. 워싱턴 회의로까지 이어지는 베르사유 체제 속에서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향을 미쳤다.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형 성된 러시아혁명 및 볼셰비즘에 대한 인식은 3 ‧ 1 직후 보다 더 명징하게 민족자결의 문제와 관련되었으며, 이는 민족의 자족적 운동을 넘어선 세계 혁명에 대한 잠재성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러시아혁명은 정치‧ 문화‧ 경제적 으로 낙후되었던 러시아를 인류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체제의 선두에 서게 한 사건이었 다. 후진으로서의 조선은 러시아혁명을 통해 역전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다. 러시 아혁명이 민중에 의한 혁명이었다는 점은 사회주의자들에게 3 ‧ 1을 민중 운동으로 자 리매김하게 하고, 그랬을 때 3 ‧ 1은 조선에도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은 세계사적 동시대성을 ‘실천적으로’ 확보했다.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주제어: 러시아혁명, 레닌, 민족자결주의, 후진성, 식민지 사회주의

1. 서론: ‘식민지 사회주의’의 정신사

최인훈은 1917년 10월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러시아가 식민지 조선인
들의 의식에 어떤 자취를 남겼는가 묻는다. “전 세계의 문명국가가 모두 식민지 소유주일 때, 오직 한 국가만이 공공연히 그러한 지구사회의 질 서가 인류의 정상적인 질서일 수 없고, 자신들은 그 질서의 해체를 위해 서만 존재하고, 그에 도움이 된다면 어려운 국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돈 이든 힘이든 도움이 되겠다고 할 때, 노예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다고 상상하는 것이 정당한 추리일까? 식민지 조선의 저항자들은 소련을 그런 문맥에서 인식하 다.”  본고는, 최인훈이 지적한 바로 “그런 문맥” 으로부터 식민지기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탈식민과 해방의 맥락에서 조선에 사회주의가 수용되는 데 러시아 혁명이 미친 직간접적 향의 사상사적 흔적들을 찾아 읽는 것에 궁극적 인 목적을 둔다.
러시아혁명이 사회주의 수용에 큰 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 진 바와 같지만, 정작 그 향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논증하는 연 구는 드물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끼친 향은 다대했다” 거나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사상은 대체로 소 비에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 등 해외를 통해 수용되었다” 는 등의 언급이 단편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가운데, 러시아혁명은 조선의 사회주 의 수용에 향을 미친 사건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 아로부터의 향은 주로 ‘운동사’적 설명에 기대어 이루어진 바 큰데, 예컨대 시베리아에 터를 두고 있었던 한인사회당이나 이르쿠츠크 고려 공산당에 대한 연구, 코민테른과의 향관계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설 명하는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  

운동사적 접근으로부터 벗어나, 식민지기 지식인들의 러시아혁명 인식을 살핀 연구로는 황동하의 논문 이 유일하다. 황동하는 1925년 이전, 1925년∼1928년, 1929년∼1937년으로 시기를 구분하여 합법적으로 발 간된 잡지를 대상으로 조선사회에 러시아혁명이 인식되어온 방식을 통 시적으로 살핀다. 특히 1925년 이전의 러시아혁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민족해방운동의 빛”(196면)이라는 인식 속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 거나 “인류를 물질의 노예로 만든다”(199면)는 인식 속에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을 비교해 설명했다. 나아가 양자 모두가 “지식의 식 민성”(216면)에 빠져있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조선의 사회주의 사상 수용 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논문은 러시아혁명과 관련된 사회주의적 지식이 일방향 적으로 이식되어 수용되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 자체가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을 받아들이고 이
를 ‘자기화’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듯,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 역시 조선의 특수한 상황을 반 하며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가 정 착하는 방식이 대륙이나 국가마다 달랐던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되물 어져야 하는 것은, ‘사회주의 수용에 있어 조선적 특징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다. 사회주의의 보편성과 그것이 뿌리내리는 지역적 특수성 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며 현실에서의 사회주의 수용으로 이어진다고 할 때, 그 양상은 단순히 이식을 넘어서는 측면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고는 그와 같은 ‘다른 측면’을 살핀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보편 의 사회주의가 아닌 ‘식민지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 를 진행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이는 실증에 기대어 텍스트의 표면적 의미를 살피는 것을 넘어서, 사회주의 수용의 의식적‧ 무의식적 기제를 동시에 구축해보려는 시도와 연결되어 있다. 기존의 연구 경향은 조직론이나 인적 구성 등을 설명하는 운동사적 연구로 편향되어 있는데, 그러한 집중으로 인해 사회 주의를 “멘탈리티(Mentality)의 형성원리” 로 바라보려는 시각은 거의 주 목 받지 못했다. 사상과 지식으로서의 사회주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수용의 출처를 밝힌다든가 계보를 그리는 실증 적인 연구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고는 사회주의 수용의 표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측면 을 함께 살펴보려는 시각의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즉 ‘식민지 사회주의’ 의 한 양상으로 조선의 사회주의 수용이 가지는 정신사적 의미를 찾아보 고자 하는 것이다.

러시아혁명이 조선에 사회주의가 수용되는 데 중요한 계기 중 하나
다고 한다면, 당시 조선에서 그것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 사회주 의 수용에 미친 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면 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이자 후진이었던 조선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상(理想)의 실현으로 느껴질 수 있었는데, 이와 관 련해 본고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가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세계 혁명 이라는 구상 속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전면적으로 도전했던 러시 아혁명 및 볼셰비즘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 해방 운동에 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던 민족 운동에는 세계 혁명 적 가능성이 잠재해있었다. 둘째, 차르의 전제 국가에서 민중에 의한 사 회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러시아혁명의 사례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후진적 조선의 역전 가능성을 담지한 것이었으며, 세계사적 동시성을 ‘실천적으로’ 확보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장과 3장에서는 전술한 각 각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는 한편, 이 두 가설이 만나는 지점에 대해서 도 해명해보겠다. 

2. 3 ‧ 1 전후, 레닌적 민족자결주의의 잔 과 향

러시아혁명이 제국주의 국가들 간 전면적 충돌의 결과인 1차 세계대
전 중 발발했다는 사실은, 향후 세계의 변화 중 중요한 부분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 변화는 비단 유럽이 몰락하고 그 자리를 미국과 소비에트 가 메우게 됐으며, 그로 인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체제 경쟁의 장으 로 서서히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 국한되지 않는다. 피억압민족들이 제국 주의 국가들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러시아 혁명이 그 향의 시작점에 있었다는 점은 다시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즉, 러시아혁명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다.
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대전 이후 온 세계를 휩쓸었던 ‘민족 자결주의’가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에 의해 처음 주창되었다는 것은 주 지의 사실이다. 레닌은 대전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자본주의의 여러 현상들 중 하나인 제국주의의 특징에 주목했으며   1차 세계대전의 발발 과 2차 인터내셔널의 붕괴 이후부터는 전쟁의 원인과 의미를 마르크스 주의적 이론 작업의 핵심적 테마로 다루기 시작했다.9 그 결산이라 할 수 있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 단계』에서는 당대의 자본주의를 금융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상태이자 자본주의 최고 의 단계로 분석했고  그런 한에서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사멸해가는 자 
본주의이자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있는 자본주의” 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레닌이 전개했던 혁명으로의 전략전술에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들이 민족 해방 운동을 벌이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제국주의를 “민족 문제에서의 민주주의(즉 민족자결)에 대한 ‘부정’” 으로 규정하면서 적극적으로 민족자결권을 주장했으며, 이는 러시아혁명 이 후 볼셰비키 전략전술의 주요 기조로 이어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적 향력이라는 측면에서, 그 시작점 에 있었던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매우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오히 려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대응으로 1918년 1월 제출된 윌슨의 14개조 연설,  그중 식민지 문제를 언급하는 5조와 동방에서의 민족자결문제를 전체적으로 언급한 6∼13조는 제국의 식민지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 켰다. 조선의 3 ‧ 1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3 ‧ 1의 현장에 적기(赤旗)가 휘 날리고 러시아혁명이 조선의 3 ‧ 1 민중들에게 향을 미쳤다 보고한 박 진순 과 같은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에 한껏 독립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어린 소년소녀부터 산지의 나이든 농민들에 이르 기까지, 조선인들은 윌슨을 “‘아버지처럼’ ‧ ‘하나님처럼’ 숭앙했”다. 3월 1일 서울 거리에서는 “‘윌슨 만세!’를 외쳐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15 이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기조로 하는 파리강화회의(1919)를 통한 독립에 대한 기대이기도 했던 바, 파리로 향한 김규식이 대표로 인정 받지 못하고16 조선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못한 정황에서도 민족자결주의 에 대한 믿음은 계속되어 워싱턴회의(1921)로까지 이어졌다.

파리강화회의가 종국에는 전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 음은 물론
이고 이른바 5개 강국 중의 하나 던 일본의 위상이 되레 드높아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은, 조선의 ‘민족자결’에 결정적인 분화를 가 져왔다.17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한계를 절감했던 일부 조선의 지식인 들은 또 다른 민족자결에 본격적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즉 1919년 3 ‧ 1이 일어난 직후 조선에는 서로 다른 기원을 지닌 두 개의 민족자결주 의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만의 사정은 아니어서, 이제 세계에 는 “국제연맹을 축으로 한 국제협조주의와 코민테른을 축으로 한 국제연 대주의라는 두 개의 세계주의”와 “두 개의 민족자결주의”18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갈망을 부쳤다’고 언명하 다.” 김세르게이, 「러시아 혁명이 한국사회에 미친 향: 조선에서의 혁명 러시아의 메아리(1918∼1922)」,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1215면.
15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돌베개, 2019, 65면, 144면.
16 미주 대한인국민회의 이승만과 정한경,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의 윤해와 고창일 등은 대표로서 파견이 예정되거나 실제 파리를 방문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파리 내에 서 활동한 것은 상해 신한청년당의 김규식이었다.  
17 김숭배, 「반(反)베르사유: 국제적 민족자결론과 한국적 분화의 연계성」, 『국제정치논 총』 59(2), 한국국제정치학회, 2019, 347∼354면 참조.
18 山室信一, 「世界認識の轉換と〈世界內戰〉の到來」, 山室信一 ‧ 岡田曉生 ‧ 小關隆 ‧ 藤原
辰史 編, 『第一次世界大戰 4: 遺産』, 東京:岩波書店, 2014, 85∼87면; 공임순, 『3 ‧ 1과 반탁: 한반도의 운명적 전환과 문화권력』, 앨피, 2020, 25면에서 재인용. 

볼셰비키에 의한 러시아혁명은 1917년 11월 발발하긴 했지만, 이후 1918년 볼셰비키가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1919년 6월 ‘3차 인터 내셔널(코민테른)’이 조직되기까지 공산주의 정권의 성립과 국제주의의 확립은 아직 완성 중에 있었다. 그렇기에 러시아혁명 발발 즉시 공산 정 권의 실체가 세계에 분명하게 가닿은 것은 아니었고, 이는 조선에서 또 한 마찬가지 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윌슨의 14개조 연설 이전부터 이미 민족자결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던 레닌과 볼셰비키의 입지는 언 제든 국제협조주의가 내세웠던 민족자결주의의 한계로 인한 빈틈에 틈 입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1920년 ‘민족 ‧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가 발표되었고, 이를 발판 삼아 1920년 9월 바쿠에서 제1회 동방피억압민 족대회가 열렸다. 인도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 본 등이 참가한 이 대회는 레닌적 민족자결주의가 세계화되기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워싱턴회의에 대응해 1921년 8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이어진 극동노동자대회에는 이동휘, 박진순, 여운형, 박헌
, 김단야 등 50명 안팎의 조선인들이 참가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에 실망한 김규식 역시 이 대회의 조선 대표 다.  
이렇듯 조선 내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인식의 형성과 분기는 당연하게 도 세계사적 흐름과 동궤에 있었다. 이때 질문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일 련의 흐름이 러시아혁명 및 볼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조선 내 부의 인식 변화와 어떻게 맞물려 있느냐는 데 있다. 사회주의 사상의 수 용이 본격적으로 발화(發花)하는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와 민족 해방 운동이 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 달리 말해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수용이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이미 상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사실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운동사적으로 설명하 려는 연구는 많이 축적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진 을 넘어선 범민족적인 차원에서 러시아혁명 및 사회주의가 어떻게 인식되 어 왔으며, 이와 같은 지점이 민족자결주의가 분화되는 분기점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와 관련된 ‘사상사적 연구’는 공소한 편이다. 지금부터는 3 ‧ 1을 전후한 시기, 특히 베르사유 체제가 가시화된 1920년∼1921년 사이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인식을, 당대의 매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 펴보려 한다. 
박은식은 3 ‧ 1이 일어난 이듬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그 원 인이 된 국제 정세를 분석하면서 “세계 개조의 제일 첫 번째 동기”로 러 시아혁명을 지목한다. 이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전 및 공화정의 수립, 그리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각각 “세계 개조의 서광”과 “세계 개조의 진보”라고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혁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를 새로이 ‘개조’해 나가는 첫 흐름을 만들어간 셈이다. “처음으로 붉은 기를 높이 들고 전제(專制)를 뒤엎고 큰 정의를 선포하 으며, 각 민족의 자유 ‧ 자치를 인정” 했다는 서술을 통해, 박은식을 비롯한 당대 식민지 조선인들이 러시아혁명에 대해 가진 인식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광수 역시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한 신국가 의 건설에 종사”22한 러시아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조선청년독립단의 2 ‧ 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던 이들에게 러시아혁 명은 정의의 실현태이자, 민족자결의 잠재태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의 ‘민족자결’은 당대를 풍미하던 세계개조의 차원에서 윌슨의 민족자결 주의와 결코 뚜렷하게 분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지점은 3 ‧ 1 이전, 조선 내 지식인들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이해가 본질적인 수준에서 이뤄지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러시아혁명은 차르에 의한 전제 왕권을 몰락케 하는 정 의를 실현한 사건이었을지언정, 민족 부르주아를 내몬 자리에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정부가 들어선 것을 의미하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맞바로 연결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전술했듯 레닌에게 민족자결권의 인정은 자 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인 제국주의의 타파, 그리고 세계 혁명적 비전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므로, “민족〔nation〕의 정치적 공동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국가〔state〕 간의 관계” 를 의미하는 윌슨의 민족자결과는 분명 히 맥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정리하건대 레닌의 민족자결을 제대로 이해 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될 필요가 있었 는데, 3 ‧ 1 이전의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7∼1918년 사이에도 그에 대한 이해가 분명했
던 것은 아니어서, 1905년의 혁명, 1917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혼재되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직후이자 3
‧ 1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일례로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에 실린 러시아혁명과 관련된 세 편의 은 “부 부 끓던 로서아혁명” , “지금 당하고 앉아있는 금일의 혁명” , “혁 명의 개화(開火)” 라고 언급하면서도, 러시아혁명과 관련된 인물로 반볼 셰비키파를 지목했다. 멘셰비키를 이끌었던 케렌스키가 “국민을 이해하 고 국민을 무애(撫愛)하고, 국민을 신용” 하는 자로 찬양되는가 하면 1917년 이후 오히려 미국에 망명해서 반소(反蘇)운동을 이끌었던 브레시 코프스카야가 자유의 선도자로 예찬되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이 분화되기 시작한 1920년, 러시아혁명과 볼셰비 키,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조선 내 인 식은 변모한다. 이는 민족해방을 원하는 당대의 뜨거운 열기와 맞물려 있으면서도, 러시아혁명에 대한 불명료한 인식이 얼마간 수정되기 시작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지표로서, 1919년 8월 창간되어 임시정부 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상해판 『독립신문』의 러시아혁명 및 사회주의 관련 기사의 논조가 점진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의 검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은 1920년 조선에서 창간된 『조선일보』 ‧ 『동아일보』나 『개벽』과 같은 매 체보다 더 직접적으로 민족의 독립과 관련된 지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주의 기사 역시 기탄없이 발표될 수 있었다. 뒤이어 논증하겠거니와 이는 비단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독립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도 러시아 혁명 및 사회주의가 조선의 미래를 예비하는 긍정적 가능성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1919년까지 『독립신문』은 「과격파의 진상」(1919.9.25.)이나 「과격파 의 세계적 선전 계획」(1919.9.30.) 등의 을 통해 ‘과격파’ 러시아에 대한 소식을 간간이 전할 뿐이었지만, 1920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본격적으 로 러시아혁명이나 사회주의와 관련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단적 으로 1920년 벽두에는 천재(天才)의 번역으로 「아라사 혁명기」의 연재가 시작된다.29 그 첫머리에서는 “금후의 세계의 정신적 지배자는 아라사이
 
프스카야가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의 간격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관심 밖이다. 브레슈코프스카야는 “자유종 짓기로 사명 받은 청춘 남녀” 중 한 명이었으며 그 자신 의 고행을 통해 혁명을 앞당긴 “천사와 같은 명문의 여자”일 뿐이다. 케렌스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로서아 혁명이 돌파되자 (중략) 창공의 혜성같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현황케 하는 이”로 묘사될 따름, 혁명 분파 내 복잡한 갈등은 문제되지 않는 다.” 권보드래, 앞의 책, 273∼275면. 
29 김미지는 이것을 후세 가츠지〔布施勝治〕의 『노국혁명기』(文雅堂, 1918)의 일부를 축 약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김미지, 「접경의 도시 상해와 ‘상하이 네트워크’: 주요한의 ’이동‘의 궤적과 쓰기 편력을 중심으로」, 『구보학보』 23, 구보학회, 2019, 53∼54면.
다. 금후의 사상의 세계, 쟁투의 세계는 전혀 아라사의 것이다.” 라고 밝 히고 있다. 2월 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혁명기는 “구주대전의 유일의 소득이 아라사혁명이라 하면 금후의 세계의 모든 조류를 지배하는 자 또한 그것”이고 “1919년 각국을 풍미하는 노동운동은 모두 노농정부를 동정하고 또는 그 향을 입지 않은 자 없다” 며 10월 혁명으로 마무리 된다. 조선이 받은 향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와 더불어 1920년에는 시베리아 내전과 관련된 기사를 적극적으로 
다룬다. 적군(赤軍)과 백위군의 내전을 다루면서도 기사의 초점은 백위군 과 함께 출병한 일본군에 맞춰져 있는데, 이 기사들은 주로 일본군을 격 퇴하고자 하는 적군의 활약에 집중한다. 특징적인 것은 시베리아 내전을 일본과 조선의 상황에 빗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러시아 민중들이 “아인(俄人)의 자유를 위협하는 일병(日兵)의 퇴거를 요구하고” “전국민 일치로 일병을 격퇴할 결심”을 보 다는 것을 강조하며 “아아 동포여 여 러분은 아라사 국민의 의기를 보나뇨.”라고 조선 민중을 향해 단합을 꾀 하도록 한다거나  콜착(A. Kolchak)의 사형사건을 다루면서 “코 정부를 
이완용 내각과 같이 이용하려던 일본은 크게 실망하 고 오직 아국민(俄國民)의 원한을 매(買)” 한다고 전하는 식이다. 이밖에 적군에 있는 한인 군단장을 소개하거나  러시아에 체류 중인 한인이 코자크 대회에 참가 해 조선과 러시아 공동의 적으로 일본을 지목했다는 단신을 적는가 하 면  러시아에서 일본 신민의 여권이 아니라 대한국민의 여권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시베리아 내전에서의 일본군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적어도 1921년 자유시사변이 일어나기 전인 1920년까지는 볼셰비키 군대가 일 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가로막는 일면의 시도처럼 느껴졌을 터, 러시아 혁명 및 사회주의는 민족 해방과 그 이후의 한 가능성으로 다가왔을 공 산이 크다. 1920년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가 사유재산제에 대 한 부정으로서 계급투쟁의 성격을 가지는 측면에 집중하거나 노농정부 인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담은 번역 기사를 심도 깊게 소개한다. 10회에 걸쳐 「사회주의」(1920.3.13.∼1920.4.10.)라는 표제로 제임스 엘리스 바커 (J. E. Barker)가 작성한 을 번역해 싣고  그 연재가 끝나는 시점에 맞바 로 「노농공화국 각방면 관찰」(1920.4.10.∼1920.4.15.)이라는 의 연재를 시작하면서는 소비에트 정부를 “일종의 「홍(紅)공포」요 아국의 특산물 이라 하며, 또는 이를 무정부 공산당으로 여기며 기아의 폭도라 하는 이 는 다 황류(荒謬)의 극한 언(言)” 일 뿐이라 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 직후에는 나키히라 료〔中平亮〕와 레닌을 접견한 『오카사마이니치』의 특 파원 후세 가츠지〔布施勝治〕의 기사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기자 가 본 노농공화국」(1920.4.27.∼1920.5.22.)을 싣거나 인터내셔널을 소개 하는 「국제사회당(인터나슈낼리스트)」(1920.5.1.∼1920.5.8.)를 게재한다.

러시아혁명 및 사회주의에 대한 기사는 번역 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
니어서, 그것을 조선과의 연관성 속에서 논하기 위해 손두환을 필자로 섭외하기도 한다. 이미 손두환은 1920년 4월 5일 열린 ‘재상해 유일(留
日)학우구락부’ 주최의 강연회에서 “사회주의는 정치상으로 민주주의, 경제상으로는 생산의 공유, 공 과 분배의 평균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사회주의에 대한 기존의 오해를 풀어야 함을 논함과 동시에 “국제의 침 략주의도 자본주의의 왕성에 기인한 상업 경쟁의 결과”라면서 “금일 오 인의 독립 운동이 일본의 침략주의를 반항한다는 견지로 보아 국제적 사회주의의 운동”이라고 밝힌 바 있는 인물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독립 운동과의 연결지점을 밝히고 있는 그의 주장은 『독립신문』의 필진들에게 새삼 눈길을 끄는 것이기도 했다. 사회주의를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동하는 조선 사회의 일경향으 로부터 벗어나 그 필요를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사회주의 연구」(1920.5.29.∼1920.6.17.)가 손두환에 의해 작성된 것은 그 때문이었 을 것이다.

손두환이 『독립신문』에서 사회주의 전반을 소개하는 필진이 될 수 있
었던 것은 그것을 독립 운동과의 연속선상에서 논하는 입장과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쓴 최초의  「사회주의자의 한일 전쟁관」은 국제주의적 문제와 민족 독립의 문제를 결코 다르지 않 은 것으로 본다. 이 에서 손두환은 사회주의자를 파괴자로 보거나 애 국심이 결핍한 자로 보는 기존의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사회주의자 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 평등 을 전제로한 구적 평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를 저해하는 세력과는 “방위 저항”, “즉 전쟁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 주의, 자본주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하는 그의 입장은, 그렇기에 “현 대의 침략자”인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지점으로 귀 결된다. 
한편 계봉우는 ‘뒤바보’란 필명으로 「김알렉산드라 소전」을 3회에 걸 쳐 연재했다. “혁명사상으론 대한 여자의 향도관, 사회주의로는 대한 여 자의 선봉장, 자유정신으론 대한 여자의 고문관, 해방경쟁으론 대한 여 자의 사표자(師表者)” 라고 김 알렉산드라를 칭송하며 시작하는 이 은, 그가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한인사회당에 일조했음을 언급하고, 멘셰비키에 의한 그의 죽음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나는 대한국여자라, (중략) 나의 가장 경애하는 이천만 동포도 자유의 복락, 독립의 광 (光榮) 을 속히 득향(得享)할지라” 고 말하는 모습으로 그를 형상화한다. 이동 휘가 지휘했던 한인사회당과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김 알렉산드라 를 향한 깊은 존경과 애도의 마음을 표하면서, 그것을 조선의 독립과 관 련 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3 ‧ 1 직후 1920년의 『독립신문』은 사회주의를 기조로 표방하
지는 않았어도, 점차 러시아혁명 및 볼셰비즘에 친화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는 비단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보다 더 보편적인 범위에서 민족 해방의 한 방식으로서 사회주의가 이해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 이기도 하다.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의 민족자결주의가 직접적으로 수용 되어 형성된 결과는 아니더라도 그 간접적인 향 아래에서 이러한 인식 은 가능할 수 있었다. 요컨대 초창기 조선에서의 러시아혁명 및 사회주 의에 대한 인식은 민족 해방의 한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계급 투쟁에 대한 이해와 국제주의적 시각을 견지한 인물을 필진으로 내세우 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국민국가로 볼 뿐, 세계 혁명적 구상을 견지하고 있지 못했음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1920년 7월부터 11월까지 『독립신문』이 재정 문제로 휴간된 이후로 러 시아혁명이나 볼셰비즘, 사회주의에 대한 기사의 게재는 대체로 뜸해지 다가 1921년 5월이 지나면서는 그마저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비슷한 시기 조선 내 사회주의 사상 수용의 사정은 어떠한가. 조선총 독부의 문화통치가 시작되고 언론 ‧ 출판 ‧ 결사의 자유가 일부 허용되면 서,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나 조선청년회연합회와 같은 대중 단체들이 
생겨나고 『조선일보』(1920.3.) ‧ 『동아일보』(1920.4.) 등을 비롯한 일간지
와 『개벽』(1920.6.) ‧ 『공제』(1920.9.) ‧ 『아성』(1921.3.) ‧ 『신생활』(1922.3.) 

등의 잡지가 발행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 지 『공제』와 조선청년연합회의 기관지 『아성』은 사회주의적 견지에서 노동문제와 관련된 주장을 개진하거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서문을 「유물사관요령기」(윤자 역, 『아성』, 1921.3.), 「유물사관 개요」(신백우 역, 『공제』, 1921.4.) 등의 제목으로 번역해 싣고, 크로포트킨 의 학설 등을 소개했다.44

국내의 매체에서도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관심은 지 대한 것이어서, 그와 관련된 기사나 논설이 많이 발표되었다. 주요 일간 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우, 볼셰비키를 ‘과격파’라고 지칭 하면서 조선에 미치게 될 향력의 확대를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45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이 지속적으로 
 
이 하자」 이것은 현대사상의 당연한 결론이니 전세계에 이 경제혁명의 맹염이 기(起) 할 날이 불원(不遠)하리라”며 볼셰비즘에 대해 긍정한다. “우리의 운동은 다만 단순한 일본에게서의 독립운동뿐 아니고 실로 신국가 신사회의 건설운동이니 현대의 세계의 민중을 움직이는 모든 사상을 잘 연구하여 국기(國基)를 완전한 기초 위에 전(奠)하도 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유일학우구락부의 제일회강연」, 『독립신문』 55, 1920. 3.18, 4면). 더욱이 같은 시기 『독립신문』의 편집자로 활동하던 조동호가, 이후 여운 형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설립하기도 했던 친공산주의적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도 함께 강조될 필요가 있겠다. 

44 『아성』과 『공제』과 관련된 제반 사실들을 밝히고, 해당 매체들에 실린 사회주의 관련 기사 및 번역 을 분석하며, 번역의 저본 확정 등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연구로는 박종린 연구의 다음 부분을 참고할 수 있다. 박종린, 앞의 책, 27∼41면.
45 “차(此)(사회주의-인용자)가 대두하여 노골적으로 차 세계를 지배하며 진감(震憾)케 한 것은 구 노국이 와해된 이후이로다. 전제의 노국을 일차 타파한 사회주의의 격류는 동분서류하여 독일을 석권하고 또 불국을 침범코자 하며 오흉(墺匈)을 습(襲)하고 파간(巴幹)반도의 제방을 풍미하며 이국(伊國)을 소요케 하 으며 북미에 도(渡)하
연재되었다. 「사회주의의 의의」(『동아일보』, 1920.8.15.∼1920.8.17.), 「근대 사회주의의 발생」(『조선일보』, 1920.12.15.∼1920.12.21.), 「말크쓰의 유물사 관」(1922.4.18.∼1922.5.7.) 등과 같은 사회주의 일반에 대한 기사에서부터 무려 61회에 결쳐 연재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동아일보』, 
1921.6.3.∼1921.8.31.』), 「노국혁명과 그 농민」(『조선일보』, 1921.7.7.∼1921. 
7.12.) 등 러시아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까지가 폭넓게 실렸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러시아혁명의 발발 이후 민족자결의 문 제와 사회주의의 연관성을 논하는 들이 적잖이 소개되고 있음은 주목 을 요한다. 1922년 조선의 독립과 관련해 별 소득 없이 워싱턴회의가 종결되자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 이후의 흐름이 어떻게 민족자결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하는 을 번역 소개했다. “베르사 유 강화가 학대 받는 민족에서 자결의 권리를 여(與)치 아니한 것이 명백 하게 되었을 때 차등(此等)의 민족은 솔선하여 이 권리를 획득하려 하여 전후에 발연(勃然)히 일어난 독립운동은 곧 그 불꽃이었다”면서 이집트 와 아일랜드, 인도 등 세계적인 새로운 민족운동의 전개를 논하는 가운 데, “자본주의가 고도의 발달을 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국민주의에서 출발하여 국민주의에 입각한 순수한 국민주의적 운동과 같은 외관을 정 (呈)한 독립운동도 결코 민족주의로써 시종하여 국민주의로써 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계급적 해방운동에까지 전개하지 않고는 마 지않는다”46며 사회주의와의 관련성을 논하는 식이다. 이는 비단 야마카 와 히토시〔山川均〕의 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여 미국을 위태에 빈(濱) 케하고자 하며, 동전(東轉)하여 서백리아를 침(侵)하고 중원 이 입(入)하여 중국을 농락코자 하는 도다. 오호(嗚呼)라 과격주의의 횡행하는 그 맹 위는 요원(燎原)의 화염보다도 일층 더 맹렬하며 비단폭포의 유세보다도 우심하여, 세계인류는 방금 차 격류 중에 과입(渦入)되어 곤피(困疲) 중에서 신음하는도다.”라 며 볼셰비즘의 세계적 향력 확대에 주목하며 시작한 한 논설은 조선 또한 볼셰비즘 에 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과격파 와 조선」, 『동아일보』, 1920.5.12, 1면.
46 성태 역, 「간디의 운동과 인도의 무산계급」, 『개벽』 37, 1923.7, 16면.
십구세기에 있어서 서구제국에서는 “민족주의” “민족국가”라는 정치상 의 주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폴레옹”의 세계제국건설의 정치 적 계획에 반항하여 일어난 것인데 사회적 의의보다도 정치적 의의가 농 후하 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민족운동은 이와 매우 다른 여러 가지 특징 을 가지었습니다. “아세아”나 “아프리카” 등의 약소민족이 이에 주(主)되 는 행동자로 일어나게 된 것을 제일의 특징이오, 여러 가지 민족운동이 사회주의적 욕구를 포함한 “프롤레타리아”적 운동으로 변하여 온 것이 제이의 특징이외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독립의 요구가 아니라 자기해 방의 원리로 사회주의적 국제사회의 건설의 요구를 포함하 습니다. 그 럼으로 최근 약소민족의 민족운동은 자본주의 그것이 통어력(統御力)을 잃은데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오. 동시에 자본주의의 붕괴와 필연의 관계 를 가진 것이외다. 민족운동은 재래에는 제이의적(第二義的)으로 생각하 고 그다지 주의하지 아니하 으나 금후로는 세계 역사상 더욱 중요한 의 의를 가지게 될 것이외다. 사회주의도 민족문제를 충분히 해결치 않고는 그 신사회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국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만으로는 사회주의의 실현을 기(期)하기는 분명히 불가능하외다. 국제적 “프롤레 타리아” 혁명은 약소민족간의 “프롤레타리아”와 공동적 행동을 취함으로 써 완성할 것이며 그 결과로 한 자본주의 국가 내의 사회혁명은 그 나라 노동계급의 단결과 동시에 그 나라가 지배하는 약소민족간의 혁명분자 와 악수하지 아니하면 도저히 그 목적을 달(達)하지 못할 것이외다. 

위 인용문은 『카이조〔改造〕』 6월호에 실린 사노 마나부〔佐野學〕의 
을 신태악이 번역한 것으로서, 그 첫 부분에 해당한다. 19세기적 민족운 동과 20세기적 민족운동의 차이를 논하고 있는 이 은, 강대국을 중심 으로 하는 민족국가 건설의 민족운동과 약소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사 회주의적 욕구”의 발현으로서의 민족운동에 둘 사이의 차이를 두고 있
다. 후자를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의 추세로 지목하면 서 이러한 흐름의 국제적 의의에 대해서 논하는 이 의 내용은, 레닌적 민족자결주의에 다분히 기대어 있다. 인용문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의 견지에서도, “국내 프롤레타리아 해방만으로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현 할 수 없다. 그것이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세계 혁명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약소민족과의 “공동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가 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피억압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하면서 이와 동시에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레닌의 세계 혁명적 구상에 철저히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요약건대, 워싱턴회의가 종결되고 1923년을 전후한 무렵에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민족자결주의 및 세계 혁명적 구상이 보다 직접적으로 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때, 프롤레타리아와 피억압 민족 모두에게 공통되게 작동하는 것은 “자기해방의 원리”다. 스스로를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부 터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러한 관점은, 파리 강화 회의나 워싱턴 회의와 같은 강국 주도의 회의체에 의한 민족자결주의를 기대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지적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경(警)컨대 고양이에게 육고자(肉庫子)의 직무를 맡 겨 놓고 거기서 고기 얻어먹기를 바라는 희망과 마치 한 가지”인 셈이라 는 것이다. “행복적 기득권을 가진 무리들이 아무리 백천 번에 회의를 연다 하여도 결국은 자기네의 기득권 옹호를 주장할 이외에 다른 방책” 이 없다. 그렇기에 “정의 인도의 력(力)은 소수 행복자에게 있는 것이 아 니오, 다수 무산대중의 불평적(不平的)한 정신 내용” 에 있다는 주장은 위 인용문이 지적하는 ‘자기해방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단결은 고래(古來) 그 예가 적지 아니하나 그 중에 특히 현저한 것은 대
전 이후에 세계무산대중의 단결이 그것이니 노서아혁명과 같은 것은 역사 의 혁명과 그 취(趣)가 이(異)하여 순수히 무산자 대 자본벌(閥)에 대한 이해 단결의 혁명이라 할 수 있으며 진(進)하여 세계 각국의 노동운동 사 회주의운동 무정부주의운동은 다 같이 경제적 이해상반으로 망(望)하는 무산자의 단결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략) 노서아혁명이 아무리 단순한 경제적 이해로부터 생(生)한 단결운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단(單) 히 일면의 관측일 뿐이오 타 일면에는 다수의 민중의 심리에 복재(伏在)한 부지불식적 신력(信力) 흥분이 조장케 한 것은 무의(無疑)한 사실이라. 그 러므로 사회주의를 평하는 이들이 동(同)주의가 어느 점에서 종교적 흥분 을 가졌다 함도 이러한 이면을 관파(觀破)한 명견이라 할 수 있다. 
정의와 인도를 바라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에 대한 바람은 자본가로부 터 착취 받는 무산대중의 해방 정신과 겹쳐 이해된다. 이들의 해방은 남 에게 의탁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바, 억압받고 착취 받는 이들의 단결은 중요한 요소 다. 러시아혁명은 이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세계사적 사건 이었다. 정의와 인도를 염원하는 “다수의 민중의 심리에 복재(伏在)한 부 지불식적 신력(信力) 흥분”을 조장한 러시아혁명은, 그렇기에 ‘무종교(無宗敎)’에 기반해 있었지만, “종교적 흥분”을 간직한 사상이자 운동의 결실 로 받아들여졌다. 민족 해방 운동과 계급 해방 운동은, 비록 다른 가지에 서 뻗어 나왔으나 ‘자기해방의 원리’와 ‘종교적 흥분’에 의해 민중 다수 의 단결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족 억압과 계급 착취가 이런 정신적인 부분만을 공유한다고 
이해되어온 것만은 아니어서, 그 경제적 연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레닌 의 ‘제국주의론’에 대한 논의 또한 함께 이루어진다. “자본주의가 고도의 발달을 하여 전 세계가 자본주의적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 위에 서게 된 오늘날의 서게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이미 단순하고 순수한 국민주의 에 기본한 독립운동은 불가능” 하다는 인식, 즉,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로서의 제국주의가 식민과 피식민의 관계를 양산한다는 인식이 일반적 으로 받아들여졌다. 1924년 6월 15일부터 7월 18일까지 『조선일보』에 서는 현애(玄涯)의 초역(抄譯)으로 「제국주의의 내면관」(전34회)이라는 이 실리는데, 이는 조선에서 최초로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 고 단계』 가 대중들을 대상으로 번역 소개된 것이기도 하다.

삼(三)은 각 자본주의적 선진국의 공업이 극발달(極發達)된 것을 증명 한 것이다. 산출되는 제품도 그 국내에서 완전히 소비할 수 없으며 수요 되는 원료도 그 국내에서 완전히 공급할 수 없고 또는 자본도 과잉이 된다. 그리하여 과잉한 제품을 소비할 만한 시장과 또는 원료를 공급하여 과잉한 자본을 투입할만한 지방을 획득코자 함은 소위 식민지정책이란 것을 실행하여 약소한 국가나 민족을 침략치 아니치 못할 현상이라는 것 이다. 이것을 인연하여 이 지구상을 환시할진대 각국 자본주의의 침략을 받은 반식민지적 국가가 기하(幾何)이며 전식민지적 지대가 기하인가. 본 서를 일독하면 자본주의의 침략과 자본주의의 발달과 그 필연적 결과를 알 것이다. 그와 같은 자본주의의 침략과 발달의 하에서 신음하는 국가나 민족의 자구(自救)하는 방법은 또 무엇이냐. 오직 세계 일반의 약소한 국 가나 민족을 대결합하여 국제적 자본주의를 대항할 것뿐이로다.  “현세의 누구이나 여뢰관이적(如雷慣耳的)으로 다 아는 노아서 공산 혁명의 원조 인 『레닌』씨의 저작”을 초역한다고 밝히며 시작되는 이 연재 은, 번역의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 밝힌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사회 주의적 사회제도의 가능과 필연을 증실(證實)”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 이 유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금융자본의 시기에 나아가는 것을 증명” 하기 위함이다. 세 번째 이유는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공업이 극도로 발달 한 선진국에서 소비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개척하기 위해 식민정책을 펼침을 보이려는 데 있는데, 이 대목은 특히 역자가 강조코자 하는 부분 으로 보인다. 현애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제국주의적 침략과 자본주의 발달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 뒤, 그 와중에 “민족의 자구”책은 “세계 일반의 약소한 국가나 민족을 대결합하여 국제적 자본주의를 대항할 것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경제적 인식이 뿌리내리게 되면서, 그것을 식민 문제와 연결하는 사유가 유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술했던바, 파리 강화 회의와 워싱턴 회의를 지나오면서부터는 민족 자결주의의 결정적이며 명시적인 분기점이 마련되었다. 그 기점은 ‘반 (反)베르사유’의 기치 아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레닌의 민족자결 주의가 힘을 얻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동했으며, 사회주의 수용의 확산 시기와도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형성된 러시아 혁명 및 볼셰비즘에 대한 인식은 3 ‧ 1 직후 보다 더 명징하게 민족자결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한 인식의 스펙트럼은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의 접점으로서 존재하는 ‘해방의 원리’라는 정신적 차원의 논의부터 레닌의 제국주의론에 기대어 식민과 피억압 민족의 문제를 논증하는 경 제적 차원의 논의까지를 널리 포괄했다. 민족 해방 운동으로부터 조선의 사회주의가 태동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당대 조선의 사회주의가 민족의 자족적 운동을 넘어선 세계 혁명에 대한 잠재성을 안고 있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3. 후진성의 역전이라는 표본과 세계로의 비약

주지하듯 1920년대 초반의 정신적 풍경 속에는 개조론의 도도한 흐름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 시기를 풍미하던 ‘개조(改造, Reconstruction)’가 
1차 세계대전을 지나오면서 필연적으로 품게 된 서구 문명에 대한 근본 적인 회의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는 필시 제국주의 전쟁을 가능케 했던 조건들에 대한 개조, 더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관련된 물적 ‧ 정신적 개조를 폭넓게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전(大戰)은 저 현실주의, 생존경 쟁주의의 승려들의 설교가 허위인 것을 폭로” 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1910년대를 휩쓸었던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진화 론은 1920년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심문에 부쳐졌다. 즉, 개조론의 전 개는 반(反)문명론적이며 반(反)진화론적 사유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요컨대 선진(先進)으로서의 서양과 후진(後進)으로서의 동양이라는 구 도가 위계적 선으로 연결되는 사회진화론의 사유는 발본적으로 재검토 되어야 했다. 나아가 그동안 적자(適者)의 근거로 여겨왔던 서양의 문명 이 민낯을 드러내며 더 이상 그 시효를 다할 수 없게 됐을 때, 이를 추종 하던 비(非)문명이자 미개로서의 조선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활로를 모 색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문명-미개’라는 선적 연결을 끊어내는 작 업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그 연결을 끊어내고 이상(理想)에 도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음의 은 이와 같은 질문을 담고 있다.
만일 현대의 문명이라 하는 것이 원의 진리라 할 것 같으면 미개한 자는 어느 때에든지 반개자(半開者)의 뒤를 따르게 되고 반개한 자는 개 화한 정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즉 그 계단을 밟지 아니하고는 새로운 계단에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러한 수리적 법칙을 밟 지 아니하고는 최후의 어떤 이상(理想)에 달(達)할 수단이 없을까 있을까 이것이 큰 의문이란 말이다. (중략) 가령 현대인의 최후 행복의 경애(境涯)는 인류주의(사회주의도 포함)의 실현이라 하면 그리고 그 인류주의의 실현에는 물질적으로 현대문명의 폐원(弊源)인 군국주의를 파괴함에 있다 하면 또는 자본주의를 파괴함에 있다 하면 우리 조선과 같은 반개한 나라는 본래부터 군인이 없는(창덕궁 에 소수의 군인은 있지만은) 민중의 단체인지라 다시 그것을 파괴할 염려는 없고 그리고 조선은 민중적 무산계급인지라(다소의 자본주의의 폐해가 있 음은 물론이나 피(彼)상공업이 극단의 발달을 수(遂)한 나라에 비교하여 아직 폐해가 극항(極項)에 달한 것은 아니라) 자본주의의 폐해를 교정함 에 실로 용이한 것이니 그렇다 하면 우리 조선과 같은 처지에 있어는 장 래할 사회의 행복은 조선인된 자 우(又)는 조선과 같은 경우를 가진 자가 누구보다 먼저 그 낙원에 들게 될 것이 아닌가. 
위 인용문은 진화론적 사유에 입각한 “수리적 법칙을 밟지 아니하고” “최후의 어떤 이상에 달(達)할 수단”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 으로부터 지적되어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첫째, 도달해야 할 이상이 ‘어 떤’ 것인지 우선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는 점, 둘째, 이상으로 도달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진화론을 극복 해야 하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모색하고 선택해야 할 항목이 무엇인 지를 보여준다. 문명을 통하지 않은 이상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가. 그리고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어떤 경로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인용문이 “최후의 어떤 이상”으로 예를 들고 있는 것은 사회
주의를 포함한 “인류주의”인데, 그것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요체로 하는 현대 문명을 대체하는 것이다. 평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인류주의 에 도달하기 위해 조선이 선택해야 하는 경로는, 더 이상 ‘단계적 발전’의 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조선은 미개, 혹은 반개이기 때 문에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로 부터 멀어지기에 적합하다. 따라서 “조선과 같은 경우를 가진 자가 누구 보다 먼저 그(인류주의-인용자) 낙원에 들게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인용 문의 설명이다. 개조론의 높은 파고 속에서, 후진은 ‘후진이기 때문에 되레’ 역전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상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개조론은 후진으로서의 조선이 스스로를 새로이 정립해나가 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혁명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귀감
이 되었다. “경제의 후진성, 사회형태의 원시성, 문화 수준의 낙후성” 을 사회적 특징으로 가지는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최첨단을 걷고 있고 극도 로 발달한 사회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유수의 문화를 자랑하는 유럽의 선진국보다 빨리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냈다는 사실은, 후진 민족인 조선 인들에게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러시아혁명이 야 말로 ‘후진이기 때문에 되레’ 사회 개조의 선봉장에 설 수 있었던 사건 으로 받아들여졌다. 차르의 전제군주제 하에 있었던 러시아가 단번에 농 민 노동자에 의한 민주공화국으로 변화한 것은, 세계 개조의 흐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로서아로 말하면 문화의 발달이 매우 뒤진 나라이외다. 지금에도 오히
려 어떠한 지방에는 원시적 생활을 작(作)하는 인민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리하고 다른 문명하다는 지방의 역사도 또한 그 기원이 겨우 천년내외 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그러하나 이와 같이 단기간의 역사를 가진 노서아 에서 정치와 사회의 제도와 문물이 자못 복잡한 변천을 지내 으며 종교 의 양식과 경제의 조직은 근본적으로 개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천과 개혁은 오직 노서아의 역사에서 볼 것이오, 다른 사회의 역사에서는 보지 못 할 것이외다. 서철(西哲)이 말하기를 앞선 자는 뒤지고 뒤진 자는 앞선 다 하더니 이 말은 진실로 노서아를 두고 이른 말인가 합니다. 과거에 있어서 세계 각국 가운데 제일 문화가 뒤졌던 노서아가 금일에 이르러서 는 제일 앞선 듯 하외다. 노서아에서는 공산경제와 위원정치를 행합니다. 이것은 세계인류가 총(總)히 이상(理想)하는 제도이올시다. 그러하나 역 사가 오래고 문화가 앞선 다른 나라에서 아직까지 이러한 제도를 실행치 못하고 오직 후진한 국가 즉 노서아에서만 이 인류의 이상하는 바 공산경 제 위원정치를 먼저 실행합니다. 지금 노서아에서 실행하는 것이 완전하 다고 할 수는 없지만은 불완전하나마 모든 곤란과 장애를 배척하고 위연 히 전 인류의 최선두에 립(立)하여 그 이상향으로 돌진하는 것은 과연 미 (迷)적 노서아가 아니면 있지 못할 사실이외다. 그리하여 저 노서아는 과 거의 문화권내에서 뒤졌던 위치를 초탈하고 신문화권내에서 급선봉이 되어 표연히 앞서게 된 것이외다.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역사적 진화로만 관찰하면 도저히 상상치 못할 일이외다. 그러므로 이것도 일종의 미(迷) 적 사실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흥미가 많은 문제일까 합니다.  

“앞선 자는 뒤지고 뒤진 자는 앞선다하더니 이 말은 진실로 노서아를 두고 이른” 것이라는 김명식의 비유는 당대 사회주의자 일반의 인식을 보여준다. 인용문에 따르면, 금일의 러시아는 “문화의 발달이 매우 뒤”져 있으며 “어떠한 지방에는 원시적 생활을 작(作)하”지만, “모든 곤란과 장 애를 배척하고 위연히 전 인류의 최선두에 립(立)하여 이상향으로 돌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에 다다르는 러시아의 이러한 경로는 과히 “미 (迷)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는 대전 이전을 휩쓸었던 “역사적 진화로 만 관찰하면 도저히 상상치 못할” 길로서, 단시일 내에 기존의 질서를 뒤바꿀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이 진화적 사유를 대체할 표본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이 길만이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 한 경로로 읽혀졌을 터이다.

그 경로의 끝에는 “공산경제와 위원정치”와 같은 정치 ‧ 경제상의 “세 계 인류가 총(總)히 이상하는 제도”가 놓여있다. 러시아의 “미(迷)적” 경 로를 따르고자 할 때, 공산화라는 경제적 방침, 소비에트라는 정치체로 의 개조는 필연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했듯 자본주의를 상 대화하는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이 개조론의 전개와 더불어 발화(發花)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이는 특히 물질이나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외적 개 조의 입장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다.  “현대문명의 결함을 사람의 양심 추락 즉 유심적으로 생각”한 윌슨과 다르게, 레닌은 “생산 분배 평등 등 즉 유물적으로 생각”하고 “계급쟁투와 파괴수단으로 신문명을 건설코자” 한다는 점에서 “사회혁명적” 이라며, 사회주의를 데모크라시와 변별되 는 외적 개조의 한 방향으로 인식하는 방식은 1920년 『학지광』에서부터 널리 유통된 바 있었다.
위 인용문이 실린 잡지 『신생활』은 ‘김윤식 사회장’ 논쟁을 거치면서 
국내 상해파에서 탈퇴한 김명식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발 간된 매체로,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역 할을 했다. 막스 슈티르너나 크로포트킨을 소개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을 싣는가 하면, 「국제노동운동소사」(1922.3.21.)나 「맑스 사 상의 연구: 계급투쟁설」(1922.6.1.) 등의 을 통해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이에 더해 주목해야 할 것은,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들이 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인용문이 담긴 김명 식의 「로서아의 산 문학」을 시작으로, “무산자의 문화는 생활과 예술의 분열과 갈등이 없나니 노동과 예술이 혼연히 융화하여 만인이 노동자요 동시에 예술가가 될지면 따라서 생활이 예술화하고 예술이 생활화” 했 다며 그것을 가능케 한 러시아의 문화시설을 소개하고, 「소비에트 로서 아의 근황」(1922.7.5.), 「노농노국의 노동법규」(1922.8.5.) 등을 통해 러시 아의 소년문제, 혼인문제, 부인문제, 노동법 등을 전한다. 이토록 이상적 으로 그려진 러시아 사회의 소개문에는 공산화된 경제 제도와 소비에트 정치 체제에 대한 지향의 전제가 깔려 있다. 1922년 11월 4일에 발행된 10호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볼셰비즘을 소개하고 노동계급 독재에 대 한 필요성을 역설한 유진희의 「볼셰비즘에 관한 일고찰」이나 러시아혁 명 중 레닌이 느꼈던 바를 번역한 「혁명에 대한 환멸」과 같은 이 실리 기도 했다. 

이처럼 『신생활』의 러시아혁명 및 그로 인한 러시아 사회에 대한 관심
은 지대했다. ‘필화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11호(1922.11.13.)가 ‘노국혁명 5주년 기념호’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던 것이 단적인 사례다. ‘10월 혁명’이 일어났던 11월에 맞춰  발간됐던 11호에는, 「노국혁명 오주년 기념」, 「노농노서아의 정치조직」, 「오주년 금일을 회고함」, 「노 서아혁명사 개관」, 「노서아혁명에 관계된 인물 급(及) 삽화」 등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들이 실렸던 것으로 추정된다.65 그러나 이 중 「노국혁 명오주년기념 」, 「오주년 금일을 회고함」 등이 문제가 되어, 사장 박희도 를 비롯해 기자 김명식, 유진희, 신일용이 소환‧ 구금 되거나 가택 수색을 받는 등 사법적인 처분이 이루어졌고 총 여섯 명의 피고가 징역형을 선 고받았다.  
이들에게 러시아혁명 및 볼셰비즘은 후진성의 역전 그 자체를 보여준 
산 표본이었다. 이때의 ‘역전’이 문명으로서 선진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 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문명 자체가 심문에 부쳐지고 있을 때, 러시아혁명이 문명,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와 그 최고 단계로서 의 제국주의가 파괴해놓은 가치를 정립하는 역할을 떠맡은 것으로 보 을 것이 분명하다. 그럴 때 ‘선진’이란 ‘문명-야만’의 진화론적 구도로부 터 벗어난, “현대인의 최고 행복의 경애(境涯)”인 “인류주의”의 경지에 있 을 터, 경제적으로는 평등이 실현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를 확보한 상태 를 의미하는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 경제 제도와 전제 정치로부터 공산 경제와 소비에트 정치로 단번에 상황을 뒤엎을 수 있었 던 러시아혁명을 살피는 것이야 말로,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식민지 조선 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후진의 상황을 역전할 기회를 타진하는 것과 등 가에 있는 일일 수 있었다.
한편, 그러한 역전이 일부 지식계급이 아닌, 농민 노동자를 비롯한 무
산 민중에 의해 가능했다는 점 또한 강조되었다. “역사에 새 기원이 될 이 싸움에 광 을 나타낼 자는 다만 노동계급만이 아니오, 지식계급이든 지 혹은 자본계급이든지 이 싸움에 투사가 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특 별히 역사적 사명을 가진 자는 노동계급” 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레 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혁명가가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무산계급의 수(手)에 의해 사회혁명을 완성하려는 자”, “노동자의 전제
 
(專制)를 시인하는”  자로 소개되었다. 러시아혁명은 ‘민중에 의한’ 후진 의 역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조선민중 이 세계적 무산계급” , “조선은 민중적 무산계급” 이라는 식으로 조선 민중을 곧 무산계급으로 등치하는 분위기 속에서, 계급과 민중은 어긋남 이 거의 없는 교집합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생활』이 외적 개조와 대극에 있는 내적 개조의 
연장선상에서 『개벽』에 작성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5.)을 적극 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점은 주목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좌우 지식인들 에게 대대적으로 주목을 끌며 비판 받은 바 있는 이광수의 이 은 조선 민족이 “정신상으로나 물질상으로나 피폐의 극에 달(達)”해 있고 이렇게 가다가는 “멸망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 뻔하다고 현실을 진단하며, 그렇 기에 “이 민족을 쇠퇴에서 건져 행복과 번 의 장래에 인도”하기 위해서 는 교육에 의한 점진적 도덕성의 개조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이에 『신생활』은 신상우의 「춘원의 민족개조론을 독(讀)하고」(1922.6.), 신일용의 「춘원의 민족개조론을 평(評)함」, 김제관의 「사회 문제와 중심 문제」(1922.7)를 실으며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전술했다시피 외적 개조 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도덕성 개조를 핵심으로 하는 이광수의 주장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유물론자에게 개조란 철 저히 “국가 형태, 정치 조직과 사회 급(及) 사정과 여(如)한 것의 형태나 조직을 개조한다는 의미” 에 국한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개조 하자-심성을 개조하자”는 말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이 들” 릴 뿐이었다. 그런데 『신생활』에 실린 이 세 편의 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 3 ‧ 1운동과 관련된 다음의 부분이었다는 점은 매우 특징적이다. 각 자 조금씩은 다른 입지에서 「민족개조론」을 비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이들은 모두 이광수가 3 ‧ 1운동에 대해 가치 절하하는 부분에 대해 서 한 목소리로 비판을 가한다. 
더욱이 재작년 삼월 일일 이래로 우리의 정신의 변화는 무섭게 급격하 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금후에도 한량없이 계속될 것이외 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변화외다. 또는 우연의 변화외다. 마치 자연계 에서 끊임없이 행하는 물리학적 변화나 화학적 변화와 같이 자연히,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우연히 행하는 변화외다. 또는 무지몽매한 야만 인종이 자각 없이 추이(推移)하여 가는 변화와 같은 변화외다.
문명인의 최대한 특징은 자기가 자기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달 (達)하기 위하여 계획된 진로를 밟아 노력하면서 시각마다 자기의 속도 를 측량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본능이나 충동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생활의 목적을 확립합니다. (중략) 원시시대의 민족, 또는 아직 분명한 자 각을 가지지 못한 민족의 역사는 자연현상의 변천의 기록과 같은 기록이 로되 이미 고도의 문명을 가진 민족의 역사는 그의 목적의 변천의 기록이 오, 그 목적들을 위한 계획과 노력의 기록일 것이외다. 따라서 원시 민족, 미개 민족의 목적의 변천은 오직 자연한 변천, 우연한 변천이로되 고도의 문명을 가진 민족의 목적의 변천은 의식적 개조의 과정이외다. 
위 인용문에서 이광수는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달(達)하기 위하여 
계획된 진로를 밟아” 나가는 문명인과 다르게, 조선 민족의 역사가 “자연 의 변화”, “우연의 변화”에 의지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원시 민족, 미개 민족의 목적의 변천은 오직 자연한 변천, 우연의 변천이로되” 이는 조선 민족의 원시성과 미개성에 대해 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재작년 삼월 일일”이다. 즉, 이광수에게 3 ‧ 1운동과 그로 인한 급격한 정신의 변화는 “무지몽매한 야만 인종이 자각 없이 추이(推移)하여가는” 것이다. 이광수 와 2 ‧ 8독립선언을 함께 준비했던 최원순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바 로 이 지점을 비판한다. 그는 이광수가 민족적 개성으로서의 ‘민족성’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에 “조선민족성”을 용렬한 것으로 보았다고 지적하고, 3 ‧ 1운동이 “과연 ‘계획과 노력’이 없는 일이었을까?” 를 되묻 는다. 다시 말해, 최원순에게 조선은 민족적 개성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3 ‧ 1운동을 철저한 계획과 노력 속에서 준비한 민족인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이 해당 부분을 비판하는 논리는 민족주의 진 의 최원순과 사뭇 달랐다. 민족을 궁극의 도달 지점으로 설정하며 조선의 민족성을 옹호하는 그의 논리와 다르게, 사회주의자들은 3 ‧ 1운동을 ‘민 중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광수의 3 ‧ 1운동에 대한 비 판적 평가가 단순히 ‘민족’을 겨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포착했다. “이광수가 새로 등장한 공중(‘민중’)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실제로 귀스타브 르봉(G. Le Bon)의 사회(대중) 심리학에 기대어 있는 「민족개조론」에서 민족은 ‘대중’으로서 상상되고 있는데, “사회심리학에서 ‘대중’은 계몽주의 정치학이 가정하는 ‘논의하 고 판결하는 공중’과는 다르”게 “이지적 능력을 잃기 때문에 논증하거나 추리할 수 없다는 가정”에 입각해있었다. 그렇기에 「민족개조론」에서 쓰 이고 있는 민족, 혹은 “민중”은 “선전의 목표물이자 개조의 대상”일 뿐이 었다.  민중에 의한, 또한 민중을 위한 혁명적 입지에 서 있던 사회주의 자들에게 이광수의 이러한 사회심리학적 기제는 비판되고 지양되어야 할 부르주아적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춘원군! 정복에서 번민하다가 그 해방을 절규하는 운동보다 더 거룩한 
운동이 어디 있으며 수십 년 내 악정 누습에서 신음하다가 세계적 신기운 에 투합하여 생을 욕구하던 운동을 지(指)하여 목적이 무(無)한 운동이라 판단하는 근거와 견지는 나변(那邊)에 재한가? 있다면 제시하기를 바란다.
도대체 목적 그 자체를 아마 군이 오해한 듯하다. 군은 목적이라는 것 을 무식한 사람은 알아듣지도 못할 특수한 해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거 니와 나는 목적 가운데 생을 요구하는 목적보다 더 큰 목적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의 운동을 목적이 무(無)한 운동이라 함은 분명한 망발이다. 그리고 군은 본능과 충동으로부터 일어나는 사실은 일로부터 십까지 야비하고 무가치한 것이라 하 지만은 나는 본능과 충동에서 생 의 진의와 적나라한 인간미를 발견하고 신앙코자 하는 자이다.77
그러한 오해로 인하여 민중의 총명이 미혹되는 폐해가 생(生)하는 동
시에 그 폐해가 다시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오는 현대 민중의 신흥 정신을 묵살케 하는 참상을 연출하는 결과까지 보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 조선에서는 이러한 인과적 사실을 경계치 아니할 수 없는 많은 환경을 가졌다. (중략)
피지배 계급인 무산계급에 속한 민중이 경제적 현실 생활상의 체험으 로부터 자연히 노출되는 사회사상이 계급적 자각을 촉진하게 됨을 따라 서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 사이에서 분기되는 계급쟁투는 도저히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이 곧 현재 민중이 절규하는 사회 개조의 중심 세력이오 또 유일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78
 
회, 2005, 133∼134면. 
77 신일용, 앞의 , 7∼8면.
78 김제관 앞의 , 39∼40면.
인용문을 보건대, 이 무렵의 사회주의자들에게 3 ‧ 1운동은 민족운동 의 범주보다 더 본질적 의미를 담은 사건이다. 그것은 일본의 침략과 중 세로부터 누적된 악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조선 민중이 “세계적 신기 운에 투합하여 생을 욕구하던 운동”이며,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오는 현 대 민중의 신흥 정신”을 담지하는 운동이다. 이때의 ‘민중’은 민족운동의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일민족을 훌쩍 넘어선 세계적 흐름 속의 존재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중은 「민족개조론」의 민족처럼 개조되어야 하는 것 이 아니라 세계의 외적 개조를 이끌어 나간다. 그 시작점으로서 3 ‧ 1운동 을 세계적 흐름 속의 ‘민중운동’으로 위치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민중 을 지극히 수동적인 집단으로 전제하는 이광수의 사회심리학적 관점과 도, 3 ‧ 1운동을 민족의 내부적 사건으로 머무르게 하는 최원순의 민족주 의적 관점과도 변별되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 계급 혁명의 성격을 찾을 수는 없을지라도, 사회주의자들

에게 있어 3 ‧ 1운동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혁명이 실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예증하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과거 3 ‧ 1의 민중은 “피지배 계급인 무산계급에 속한”, 계급 혁명을 예비하는 현재의 민중으로 이어진다. “사 회 개조의 중심세력”이자 “유일한 원동력”으로 지목되는 민중은 ‘인위적 으로’ 개조되어야 하는 이광수의 민족과는 다르게 “경제적 현실 생활상 의 체험으로부터 자연히 노출되는 사회사상이 계급적 자각을 촉진하”는 주체로 그려진다. “생을 요구하는” 민중의 목적은, 계도자에 의한 교육이 없이도 “본능과 충동에서 생의 진의와 적나라한 인간미”를 발산하며 혁 명을 지향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후진성을 역전으 로 이끄는 힘이 무산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민중운동으로서의 3 ‧ 1운동은 다가올 사회주의 혁명의 전사(前史)로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인식은, 아직 ‘실천적’으로는 “세계라는 지평
에 등재〔entry〕되”80지 못했던 후진으로서의 조선이 세계사적 동시성에 ‘직접’ 가닿았다는 감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때의 ‘세계’라는 것 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문명을 회의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제출된 개조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것이었으며, 사회주의라는 입지에서 더 예 각화해 보자면 러시아혁명 이후의 사회주의적 개조와 동궤에 있는 것이 었다. 후진적 러시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어내면서 세계 사상을 이끄는 선봉장이 되었듯, 조선 또한 그 궤도를 밟을 수 있다는 감각, 혹은 이미 그 궤도 위에 올라서 있다는 감각 속에서 3 ‧ 1운동은 민족운동을 넘어서는 세계적 조류 속의 민중 운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렇 듯 러시아혁명과 더불어 이루어진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은 조선이 세계 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가 세계사적 동시성을 실천적으로 획득
케 한 매개가 되었다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 시기 조선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던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은 주목을 요한다. 조선 최초의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1920.4)은 노동 문제에 대한 전사회 적 관심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1910년대부터 계속되던 소 작쟁의와 노농파업은 그 빈도와 강도가 점차 더해져 1921년 9월 최초의 대규모 총파업인 부산 부두노동자 파업으로까지 이어졌다.81 각종 매체 들에서도 노동과 관련된 을 실었는데,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사회주의 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조선노동공제회의 
 
80 김동식, 「진화(進化) ‧ 후진성(後進性) ‧ 1차 세계대전」, 『한국학연구』 37,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185면. 김동식에 따르면, 조선은 1차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하지 는 못했지만, 그러한 “세계사적 사건과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 동시대를 살고 있 다는 사실”로 인해서 “세계사적 동시성의 구조에 공속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상적으로나마, 즉 “형식적인 차원에서 세계사적 동시성을 처음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뿐인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사적 동시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상상적’이 며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세계사적 동시성의 “잠정적 ‧ 형식적 확보”일 수는 있을지언정, 직접 그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는 ‘실천적’ 차원으 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상태 던 것이다.
81 전명혁 「한국 노동자계급 형성연구」, 『역사연구』 11, 역사학연구소, 2002, 26면.
기관지인 『공제』 창간호의 들은 대체로 노자협조주의적 성격을 띠었 으며, 노동을 “부르주아 계몽주의 정치학의 이념들 혹은 그것을 표현하 는 규범어휘들에 의거해 설명” 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노동)계급 개념이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을 차지하는 만큼, 당시의 사 회주의자들은 역시 노동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 다.
노동 문제는 세계적 보편의 문제로 전제됨으로써 그것을 겪고 있는 
조선이 보편적 경험을 나누고 있다는 인식의 기반이 되었다. 노동 문제 를 “불안한 현재의 사회 상태에 입(立)하여 인류 과거의 구문명을 절실히 비판하며 항론(抗論)하여서 장래의 신문명을 시사하며 수립코자 하는 인 류 공통의 대문제”이자 “불합리한 고통의 생활로부터 탈각고자 하는 전 인류의 개조 문제” 로 바라보는 방식은 특히 사회주의자들에게 일반적 인 것이었다. 그들에게 노동 문제의 해결은 조선의 무산계급이 처한 상 황의 혁명적 해결이기 이전에 ‘인류적’ 차원의 개조와 연결된 것으로 이 해되었다. 이는 인권의 해방이라는 더 폭넓은 범주를 향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기에 “일절의 무산자를 유산자의 유린에서 해방케 하여 약탈된 어느 권리를 반환시키자는 의미에서 노동 운동은 정(正)히 인권 회복 운동” 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일부(아니 거의 전부)의 논자들은 구(口)를 개(開)하매 반 드시 우리 노동 문제가 외국의 동(同)문제와 전혀 그 취의(趣意)가 상이 하다 하며 따라서 외국의 해결법이 우리 사회에 적합지 못함을 창도(唱
 
道)한다. 여사한 소설(所說)은 역시 군자국 양반의 무(無)사려한 망단이
다. 족히 이를 경(傾)할 가치가 무(無)하거니와 대개 노동 문제는 자본주 의의 산물이므로 자본주의가 있는 곳에는 하처(何處)에든지 동일 방향의 문제가 존재한 것이다. (중략) 다만 노동 문제가 국정을 수(隨)하여 내외의 별(別)이 있다함은 노동의 직업별로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 예컨대 공업 노동이 왕성한 불란서 에서는 「생디카」적 단합의 「생디칼리즘」이 발달하고 농업 노동이 왕성 한 노서아에서는 전농(專農)주의의 색채를 대(帶)한 「볼셰비즘」이 성공 함과 여(如)한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하므로 농업국인 조선의 노동 문제 가 도회보다도 농촌에 있다는 설(說)에 대하여는 전혀 동감으로 수긍하 는 바이다. 그러나 그 농노를 해방한다는 진의는 조금도 내외의 별(別)이 없는 것이다.85
노동 문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고찰하겠다는 목적의 을 쓰고 있었지 만, 정작 1920년 당시 유진희가 가진 볼셰비즘 및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 는 그리 온전치 못했다. “공업노동이 왕성한 불란서에서는” 생디칼리즘 이, “농업노동이 왕성한 노서아에서는 전농(專農)주의의 색채를” 띤 볼셰 비즘이 성행했다고 보거나, “농노를 해방”하는 것을 사회주의 혁명의 목 적인 것처럼 서술하는 그의 설명 방식은 실제 정황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도식적이며 작위적이다. 그러나 크로포트킨(P. A. Kropotkin) 이나 슈티르 너(M. Stirner) 등의 이상에 힘입어 사회주의가 수용되었던 1920년대 초 반 조선 사상계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86 볼셰비즘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85 위의 , 16∼17면.
86 1920년대 조선에서 크로포트킨 수용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바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크로포트킨이 아나키스트 음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이론적 참조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데, 앞선 유진희의 에서도 크로포트킨이 적극적으로 인용되고 있거니와 이성태는 『신생활』에 상호부조론이나 「청년에게 소
(訴)함」(1922.6.)을 번역해 싣고 「크로포트킨 학설연구」(1922.7.)을 직접 작성해 소 개하기도 했다. 조선 내 크로포트킨의 수용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고할 수 
온전한 이해 정도를 잣대로 사상 수용의 경향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 즘 및 사회주의를 ‘자기화해서’ 이해하는 방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유진희는 외국의 노동 운동과 조선의 노동 운동에 차이 가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노동 운동 또한 국제적인 시 야에서 세계의 노동 운동과 동일한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노동 문제가 외국의 동(同)문제와 전혀 그 취의(趣意)가 상이하다 하며 따라서 외국의 해결법이 우리 사회에 적합지 못함을 창도(唱道)”함 은 “군자국 양반의 무(無)사려한 망단”인 것이다. 그에게 “자본주의의 산 물”인 노동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프랑스이든 러시아이든 조선이든 해결해야 문제이다. 그렇게 조선은 세계 문명을 선 도하는 프랑스와 사회주의 혁명의 선두에 선 러시아와 동일 선상에 설 수 있게 되고, ‘인류’의 공동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놓이게 된다. 선진과 후진은 더 이상 우열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볼셰비즘은 공업보다 농업에 기대어 있는 러시아의 상황을 대변하는 
정치체로 이해되었을 뿐이지만, 유진희는 그로부터 농업국인 조선이 세 계적인 노동 운동의 흐름과 함께하게 될 가능성을 발견했다. 사회주의적 노동 운동이 “농노를 해방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뿐이지만, 중요한 점은 “해방하는 진의”를 가지는 한 조선 또한 “내외의 별(別)이 없는” 국 제적 노동 운동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데 있다. 사회주 의에 대한 이해는 조야했을지라도, 사회주의자들은 그러한 이해에 기반 해 세계적 문제와 혁명적 이상에 조선 또한 발벗고 나설 수 있다는 감각
 
있다. 박종린, 「1920년대 크로포트킨 수용과 『청년에게 호소함』의 번역」, 『사학연구』 142, 한국사학회, 2021; 김미지, 「동아시아와 식민지 조선에서 크로포트킨 번역의 경로들과 상호참조 양상 고찰」, 『비교문화연구』, 43,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16; 박양신, 「근대 일본의 아나키즘 수용과 식민지 조선으로의 접속: 크로포트킨 사상을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35, 일본사학회, 2012. 한편, 정백은 「유일자(唯一者)와 그 중심사상」을 통해 슈티르너의 사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박종린, 『사회주 의와 맑스주의 원전 번역』, 신서원, 2018, 97면.
을 ‘실천적으로’ 확보했다. 조선의 노동 문제를 인류적인 것으로 비약해 서 사유하는 감각은 지극히 이상적이어서 “유물론적 개혁에만” 국한되지 않고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의 본능, 「톨스토이」의 인류애, 「로맨 롤 랑」의 신도덕”을 통한 “겁의 인류 공존” 을 꿈꾸는 것으로 이어졌다.
권력과 폭력으로써 하는 국가의 침략에 대하여 절대의 반대 의견을 가
졌다. 여사(如斯)한 정신은 노서아 노동운동에 일관한 이상이다. 노서아 혁명은 전일까지, 이 정신과 전연 상반한 전제 군주와 관료와 군인과 자본 가가 결합한 강대한 압제 정치가 있었으니 인도적 정신을 가진 그 운동도 그 수단은 왕왕히 극단의 혁명적이었으니 그 이상이 인류적 인도적이면 서, 그 수단이 파괴적 혁명적임은 극히 모순된 현상 같지마는, 그러한 극 단의 전제 정치 하에서는 여사한 모순은 도로혀 당연한 사(事)일까 한다. 
현금(現今) 자본가의 일군은, 이 저용(猪勇)적인 군국주의자를 자기 수 족으로 하고, 이 이대 요괴는 오는 시대의 장해를 작(作)하려 한다. 피등 (彼等)은 민중을 보호한다 하며 그 고혈을 철취(啜取)한다. 그러나 민중은 각성하려 한다. 철두철미 피등의 허위인 것을 간파하 다. 민중은 가장 현명한 해결자가 되려할 새, 노동 운동에 귀의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자(玆)에 오인은 세계 노동 운동의 개의(槪意)와 그 방향을 소개하여 독 자 제군과 같이 차(此)를 연구하려 하노니, 제군이여 자차(自此)로 오인(吾人)의 태도는 강경한 실행적인 동시에 냉정한 학구적이어야 할지라. 
이 무렵 유진희가 「노동 운동에 관하여」(1920.4.15.∼4.16.) 「노동자의 
지도와 교육」(1920.5.1.∼5.2.) 등 노동과 관련된 일련의 을 『동아일보』 에 싣는 가운데, 세계 노동 운동에 대해 일별하는  「세계 노동 운동의 방향」(1920.5.5.∼5.8)을 연재한 것도 동일한 맥락 위에 놓여있다. 세계 노 동 운동 속에 조선의 노동 운동을 기입하기 위해 세계적 흐름은 “실행적” 이면서도 “냉정”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혁명을 정점으로 하 는 러시아의 노동 운동은 “권력과 폭력으로써 하는 국가의 침략에 대하 여 절대의 반대 의견을 가”진 대표적 예로 언급된다. 수단이 폭력적일지 언정 “인류적 인도적” 이상(理想)을 가진 이상, 폭력적 혁명은 명분을 획 득할 수 있다. “전제 군주와 관료와 군인과 자본가가 결합한 강대한 압제 정치”라는 ‘후진’적 체제를 뒤엎어 버린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는 인도적 정신의 가장 앞선 사례가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지점은, 세계로의 비약을 넌지시 전
제하는 이러한 작업이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을 시작하며 유진희는 자본가계급과 군국주의를 “이대 요괴”로 지목하고, 이것이 “허위인 것을 간파”한 “현명한 해결자” 민중들에 의한 노동 운동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에게 사 회주의에 입각한 노동 운동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 운동이 자 민중 운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 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족자결로 연결되는바, 사회주의 수용 행위는 보편성의 흐름에 가닿으려는 의식적인 몸부림이기도 했지만, 기실 조선 의 사회주의는 오히려 식민지라는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그 자체로 이미 보편이 될 잠재성을 안고 있었다. 

4.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러시아혁명은 192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
의 지식인들에게 특정 표상으로 인식됨으로써 사회주의가 수용되는 데 큰 향을 미쳤으며, 보편적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와 변별되는 특유의 정신사적 흔적을 남겼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의 식민지이자 문 명 속의 후진이라는 조건 속에서 러시아혁명을 받아들이고 인식했다. 조 선 내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경합을 벌이던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는 파리 강화 회의부터 워싱턴 회의로까지 이어지는 베르사유적 세계 질서 속에서 점차 분기점을 맞이해, 사회주의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형성된 러시아혁명 및 볼셰비즘에 대한 인식은 해방의 원리라는 정신적 차원에서부터 레닌의 제국주의론에 기댄 경제 적 차원의 문제까지를 폭넓게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는 자족적 민족 운 동을 넘어서 세계 혁명을 염두에 둔 사회주의적 민족 운동으로 이어질 잠재성을 포함한 인식이기도 했다. 한편 문명에 대한 회의가 ‘개조론’을 통해 고민되고 있을 때,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 ‧ 문화 ‧ 경 제적으로 낙후되었던 러시아가 혁명을 통해 인류가 이상하는 경제제도 와 정치체를 실현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했다. 러시아혁명을 통해 혁명 의 원동력으로서 민중의 역능에 주목했으며 ‘민중 운동’으로서의 3 ‧ 1은 조선에도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민중들이 이끄는 노동 운동은 조선을 세계적 흐름 속에, 전 인류적 문제 속에 놓일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일련의 과정은 조선 사회주의자로서 주체의 (무)의식적 자기 정립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민족주의 진 에서의 민족 운동이 아닌 사회주의적(=국제주의적) 민족 운동을 지향하게 되는 것, 민족 운동 을 넘어선 민중 운동으로서 3 ‧ 1을 자리매김 하는 것, 노동 문제를 의제 화함으로써 인류-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했던 것은, 모두 식민지 이자 후진인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자가 행하는 ‘자기 조정 과정’과 다르 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지점은 러시아혁명 인식에 당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과 혁명’에 대한 멘탈리티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해방을 통해 세계에 맞바로 가닿고자 하는, 그런 비약의 멘탈리티 말이 다. 앞서 최인훈이 지적했던바, 러시아혁명은 ‘식민지 노예’들에게 탈식 민과 해방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힌 사건이었던 것이다.
Abstract
Nations and Revolutions:
recognizing the Russian revolution in the context of accepting socialism in the early 1920s
Choi, Eun-hye
This article explored the impact of the Russian revolution on accepting socialism in colonized Joseon during the early 1920s and went further to acknowledge the changes the Russian revolution made on the epistemological features of accepting socialism. The Russian revolution, which took place during WWI, was the only revolution that stood up against capitalism and imperialism, and a revolution led by farmers and workers revolting against autocracy. This revolution had a substantial impact on colonies yearning for self-determination, and Joseon was not an exception. National self- determination, called forward by Lenin himself, affected socialists in Joseon in various ways within the context of the Versailles system that persisted until the Washington conferenc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nception of the Russian revolution and Bolshevism led by socialists and national self-determination was more clear than that in the period following the 3
‧ 1 independence movement. The situation had the potential to escalate into an international revolution, over a national self-determination movement. However, socialists in Joseon considered the Russian revolution to be an event that allowed Russia to escalate from its lagging political, cultural, economic status into a nation that leads the system considered to be ideal to mankind. Joseon, in its lagged state, had a chance to change the game through the Russian revolution. The fact that the Russian revolution was led by the people led socialists to set the 3 ‧ 1 independence movement as a movement by the people. By doing so, the 3 ‧ 1 independence movement suggested that a revolution may break out in Joseon. As a result, socialists in Joseon “practically” secured their historical simultaneity.
Keywords: The Russian revolution, Lenin, National self-determination, 
Backwardness, Colonial soc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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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 2021년 10월 15일,  심사완료 : 11월 15일,  게재확정 :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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