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2

김대호 - 작년 8월 이후 공부와 독서의 주제가 핵공학과 핵발전(원리, 역사, 과제 등), 대덕연구단지에서 성장한... | Facebook

(4) 김대호 - 작년 8월 이후 공부와 독서의 주제가 핵공학과 핵발전(원리, 역사, 과제 등), 대덕연구단지에서 성장한... | Facebook

작년 8월 이후 공부와 독서의 주제가 핵공학과 핵발전(원리, 역사, 과제 등), 대덕연구단지에서 성장한 과학기술과 한국 중화학공업 발전사, 그리고 현대중국(중공)의 과거와 현재(도전) 등이 되었다.
최형섭, 전상근, 김재관, 오원철 등을 통해 참 많은 것을 새롭게 알았는데, 그 중에 KIST 탄생과 발전 비사도 있다. 미국 존슨 대통령이 미국 방문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월남 파병 대가로) 주려고 준비한 선물 리스트의 하나였다. 정상회담 며칠 전에 추가된 것이었다.
이 발상은 존슨의 과학기술 자문 교수에게서 나왔다. 미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참으로 똑똑한데, 한국에는 갈 자리(연구기관, 기업, 대학 등) 없어서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받아 한국 산업 과학기술 발전의 견인차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획은 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인 전상근이 하고, 초대 소장은 최형섭이하고, (박정희가 뮌헨에서 만난 인연으로 직접 찍은) 제1호 유치과학자가 김재관이었다. 최형섭이 미국 전역을 누벼 스카우트한 인원은 총 17명이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의 경제, 산업, 과학기술 발전은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한 인재들을 데려와 활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과학기술 인재들에게 너무나 매력없는 땅이 되었다. KAIST에서 AI 관련 교수의 줌 특강에서 알려주던데, KAIST 관련 전공 졸업자가 한국에서 취업하면 연봉 7천만원, 미국가면 50만불부터 시작한단다. 그런데 돈이 전부 아니란다. 같이 일할 동료연구원과 시설장비 등도 돈 못지 않은 큰 유인이란다. 물론 한국은 이것도 돈 못지 않게 비매력일 것이다.
국가 연구 예산 분배 과정이나, 세대 약탈형 연금제도나 고소득자에 무식하게 많이 때리는 건보료(세금)이나, 고비용 고스트레스 저효율의 초중등 교육까지 알아버리면 ,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을 규율하고 조정하는 정치와 사법과 행정의 지독한 후진성을 알아 버리면 한국은 (글로벌 인재에게는) 조기 탈출이 최상의 선택이 될 것 같아 걱정이다.
한국은 초저출산에 따른 역삼각형 인구 구조 하나만으로도 쇠락이 예정된 나라인데, 이공계 인재의 유출 구조도 보고, 또 무섭게 추격하다가 멀찌감치 추월해 버린 중국의 산업과학기술과 보수우파의 비겁•무능과 진보좌파의 독주•폭거가 만들어낸 상상초월한 K정치까지 같이 보면 폭망이 예정된 나라다.
나는 12.3이후 모든 판단의 기준은 이 준엄한 위기를 완화시키는 쪽인가 아니면 악화시키는 쪽인가 였다. 그 결론이 계엄 반대, 탄핵 반대, 정치와 통치의 환골탈태 였다.
이춘근의 이 책을 보다가 알았는데 중국은 1956년 말 기준 총 1805명을 유치했다.
많이 밀리긴 했지만 강대한 일본과 장기간 전쟁을 치를 정도로 산업 과학기술력이 있던 대국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한국과는 출발선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대약진과 문혁 등으로 15년 동안 닭질하는 동안 우리가 냅다뛰어서 단군이래 최고 번영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가 2017년 이후 K문혁으로 개 ㅈ ㄹ 하고 있다. 윤통은 그 퇴행•반동•반역적 불길을 진화하기는 커녕, 미숙한 대응으로 기름을 퍼 부어 버렸다.
어제 동십자각 앞에서 내란세력 청산과 사회대개혁 운운 집회를 한 것 같은데, 이 내용을 제법 아는 사람으로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나!!
12.3 이후 며칠 간 밤잠을 설쳤는데, 다시 4.4 이후 연 이틀 밤잠을 설친다. 혈당도 고공행진이다.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다. 덕분에 책은 더 많이 보게 된다.
2004년 7월에 쓴 중국 기행문이 생각나서 파일 뒤져 보니 있다. 이 원고를 약간 줄여 월간조선 2004년 9월호에 실었다. 사회디자인연구소를 하기 전이라 직함이 (한386의 사상혁명 저자)로 되어있다.
내가 붙인 제목은 <땡빚을 내서라도 중국 가봐라>이다. 최근에 다녀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여전히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모양!! 정말 가기 싫은 나라인데 기회만 있으면 가 보고 싶다. 관광이 아니라 원자력 관련 시설을!! 5시54분 서울역발 신탄진행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잠을 못자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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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7월 4일부터 11일까지 전경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 주요 도시 몇 곳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여러 시민단체 간부들과 전경련 관계자들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북경,상해,심천,홍콩을 7박 8일의 일정으로 주마간산하는 이 여정에는 SK,LG,삼성,현대의 주요계열사 방문도 있었고,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북경지사(중국에 진출하는 한국의 소프트웨어 기업에대한 각종 자문 기관으로 사실상 정보통신부 외곽 기관이다), 상해 포동,임강(신항만) 개발위원회 방문, 중국 공산당 간부학교 C교수 강연과 약간의 관광 일정도 있었다.
나의 중국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초반 학번들이 그렇듯이, 이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전환시대 논리'로 출발했다. 그 이후 후미진 자취방을 떠돌던 모택동의 '모순론' '실천론'(일본어판)을 거치고, 김산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중국에 대한 정서적 친화감은 성장하였다. 그런데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보면서 중국에 대한 믿음은 뿌리채 흔들렸다. 천안문 사태시 나는 세 번 놀랐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축소 모형이 시위대에 등장한 것을 보고 놀랐고(미국식 민주주의에 대단히 비판적이던 시절 중국 시위대들의 이상이 미국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북경 한 도시에만도 수십만명은 족이 있을 것 같은 민간인 공산당원들이 이 반동적 시위대를 제지.만류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고, 마지막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상상을 뛰어넘은 잔혹한 유혈 진압을 자행하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뒤이어 개혁.개방으로 인해 온통 돈독이 오른 중국인들의 군상에 대한 보도가 쏟아지면서 약간 남아있던 기대섞인 관심은 깡그리 날아가버렸다. 이로써 이영희 교수가 은연중에 심어준, 새로운 문명의 실험 모델로서의 중국에 대한 기대섞인 관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중국은 아프리카.아시아에 흔해 빠진 총체적으로 후진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이후에는 가까운 지인들 중에서 중국을 갔다왔거나 중국 기업과 사업을 같이 해본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다시금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한편 그 비슷한 시기에 나는 논어,노자,사기 같은 중국 고전들을 읽으면서 그 깊은 지혜에 감탄하기 시작하였다. 이 엄청난 사상적 내공이야말로 중국이 소련.북한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걷도록 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을 들게 하였다. 이는 지금도 내가 중국을 떠올릴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다.
1990년대 후반들어서는 일취월장하는 중국 경제의 후폭풍; 제조업 공동화를 비롯한 일자리 문제,석유.식량.철강.시멘트등 자원 부족 문제,온실효과를 비롯한 환경오염 문제등에 관한 얘기를 잠시라도 듣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보도와 저작이 넘쳐났다. 나는 이 같은 보도와 저작들을 꽤 열심히 읽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라는 개발(문명) 모델 자체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한반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너무나 심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만해도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이 101만명이 넘었다. 몇 년째 거주하고 있는 주재원과 유학생들도 10만명은 족히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에서 중국에 대해 얘기하려면 최소 몇 년간 중국 사업을 책임지고 해본 경험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겨우 7박8일의 짧은 일정으로 중국을 주마간산한 사람이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주제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감히 이런 글을 쓰는 것은 필자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오래되었고, 읽고 생각한 바가 그리 얄팍하지 않아 은근히 알건 다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이번 방문으로 깨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동안 문헌자료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 어디를 가나 현지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경청한다. 여행자나 유학생으로서는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결코 알 수 없는 그 사회의 깊숙한 속살을 사업하는 사람들은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방문하는 곳마다 주재원들로부터 몇 년 동안의 사업 얘기를 집약적으로 들었고, 적지 않은 질의.응답 기회를 가졌다. 사실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중국을 관광차 100번 왔다갔다해도 감히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중국방문은 근 20여년 동안 숙성된 의문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동시에 한국과 한민족 전체의 미래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 의식을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내가 확인한 새로운 사실들을 먼저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북경현대기차(자동차)의 경우 임금은 1/7(이는 어느 공장을 가나 마찬가지였다), 평균연령은 25세 전후(현대 울산 공장은 30대 후반), 각종 공장 품질 및 생산성 지수는 울산 공장보다 나았다. 게다가 중국 진출 기업을 괴롭히는 지독한 이직율도 거의 없었다. 나는 솔직히 다른 것은 몰라도 공장 품질 및 생산성 지수는 그래도 한국이 낫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다. 그런데 울산 공장에서 20여년 품질 일을 하신 주재원의 솔직한 평가는 그것이 아니었다. GM,포드,토요타,혼다,폭스바겐(북경 현대를 포함해서)등의 중국 현지 공장,부품공장이 규모의 경제를 갖추고 본격 가동되고, 부품 국산화 비율이 높아지거나 부품 수입 관세가 낮아지면, 유명 브랜드를 단 중국산 저가차는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흔들어 놓을 것이고, 이는 무엇보다도 브랜드 파워가 약한 현대.기아을 사정없이 때릴 수 밖에 없다. 한국의 몇 안되는 생명줄에 달려드는 칼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보니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었다.
2.북경현대를 포함하여 내가 방문한 모든 곳에서 나는 중국의 젊음을 보았다. 1970년대 구로공단에서 보았던 풋풋한 젊음이 내가 방문한 모든 곳(공장,공공기관,식당,발마사지 업소,택시…)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원래 젊음의 위력은 10년 20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지는 법이다.
3.토지가 국유화되어 있었고, 개인이나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50년 혹은 70년의 점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이 토지의 사유화로 인해 겪는 엄청난 비효율(불로소득, 비생산적 투기심리의 만연, 과도한 토지 개발 비용...)을 절감하는 사람으로서 중국은 너무 부러웠다. 원래 이용하기 좋은 평지가 많은데다가 그나마 국유로 되어있으니 세계 최고 수준의 효율적 토지이용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1948년 중국공산당이 이룩한 혁명의 빛나는 유산이기에 대부분의 나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것이다. 어쨌든 중국은 인류가 수천년 동안 발전시킨 도시공학의 정수들을 총화한 도시들을 많이 건설할 것이다.
4.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은 진작 알았지만 관광문화산업의 경쟁력을 알게 되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심천,상해에서 본 징키스칸 쇼(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수십명의 기수들의 마상 전투 시범을 핵심으로 한 쇼), 소수민족 쇼, 소인국(중국의 주요 문화 유적을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심천의 징키스칸 쇼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징키스칸을 元제국의 창립자처럼 묘사하고, 몽골 기마군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심천에서(차라리 제주도과 몽골 기마군단과 훨씬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마쇼를 하여 대단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개토대왕이 인기가 있으면 심천같이 광개토대왕과 전혀 관계없는 장소에서 무협극 요소를 듬뿍 가미한 ‘쇼’를 만들 것 같았다.
필자는 한국에서 최상급 쇼에 속한다고 평가받는 '워커힐 쇼'를 본적이 있다. 이것과 '소수민족 쇼'를 비교해 보니 56개 소수민족의 의상.풍습이라는 원천적 다양성은 접어두고라도 그 표현기법 측면에서도 더 세련되고 더 현대적인 것처럼 보였다.
소인국은 한국이나 일본도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는 문화 상품이다. 자본이 있는 한국,일본,대만,홍콩이 축소 모형으로 한.중.일.유럽.미국등의 관광지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는 발상을 왜 못했는지 모르겠다.
문자로 기록된 3천년의 단절없는 역사, 56개 소수민족이라는 원초적 다양성, 거대한 국토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부한 문화컨텐츠야 중국의 배타적 경쟁력 일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한류처럼 그야말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만 있으면 만들어 낼수 있는 문화상품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거의 같은 놀이기구들이 널려있는 에버랜드,서울랜드,대구우방랜드등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났다. 지금도 심각하지만 우리 자식 세대가 일자리 부족으로 겪을 극심한 고통이 자꾸 보였기 때문이다.
5. 고구려사 재해석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동북공정은 기본적으로 통일 한국의 강한 흡인력이 압록강 두만강 너머 조선족 사회에 미치는 것을 차단하려는 방어적 움직임으로 보였다.사실 이는 6.25 참전의 핵심 동기이기도 하였다. 다시말해 동북공정은 북한을 중국령으로 하려는 음험한 영토적 야심의 발로가 아니라, 통일한국의 흡인력이 압록강.두만강 너머 중국 땅에 미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시도인 것처럼 보였다. 중국 내부 문제(지역간 발전 격차 문제, 민주주의 문제, 농촌문제,부실 국공유기업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공세적 패권주의를 발휘할 처지가 못된다는 C교수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오랫동안 대만 독립 얘기만 나오면 전쟁 불사론을 내비치는 중국의 과민 반응은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의 중국 분열에 대한 위기의식을 감안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봐도 현재 중국은 대단히 과잉팽창되고, 내부 모순이 심각해서 분열되기 쉬운 나라인데 장구한 중국역사를 아는 공산당이 이를 모를리 없다. 중국 공산당의 눈으로 보면, 故土회복 정서(만주땅은 우리 땅)가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고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 통일 한국은 커다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C교수에 의하면 몇 년 전 백두산 영유권 문제를 제기한 국회의원 34명의 움직임은 중국(특히 군부)를 엄청나게 자극했다고 한다. 이 결의안이 국회상임위를 통과했다면 중국 군부는 이를 거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였을 것이라 하였다. 그는 중국 군부 인사들은 분단 상태로 인해 압록강 두만강 너머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행사할수 없는 열악한 처지에서도 남한 지도층이 영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남한 주도의 통일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 지극히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백두산 영유권 문제를 제기한 국회의원들, 만주 땅을 되찾겠다는 저의를 가지고 고구려 유적을 들먹이는 志士(?)들, 조선족의 국적 요구 시위에 뜨떳미지근하게 처신한 정부와 조선족 교회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등은 하나 같이 큰 악수를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로 인해 조선족 사회의 구심이 될 만한 인물들은 직위상 영전이지만, 실제 권한은 적은 중앙의 한직으로 배치하고, 그나마 조선족 자치주에 오래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물론 조선족 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파괴력은 중국 공산당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저임금 노동력 수요로 인한 조선족 젊은이들의 대거 이탈로부터 오겠지만...)
6. 중국의 젊은 공산당원들(주로 노조=공회 관련자)과 통역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좀 나누면서 느꼈는데, 이들은 정치력을 타고 난 것 같았다. 이들의 수사법은 한국의 노회한 늙은 정치인만큼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이들의 이런 태도가 문화혁명의 피해의식의 산물처럼 얘기했는데, 내가 보기엔 중국인의 商術처럼 상당부분 타고난 것 같았다.
C교수는 한국인의 총명,투명,솔직하고,격한 성격을 언제든지 풍부한 맑은 물을 접하고 마실 수 있는 한국山河와 부족하고도 혼탁한 물을 끓여먹을 수 밖에 없는 중국山河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기질적 차이를 나타내는 수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주요한 것은 사회.역사적인 요인이지 자연환경적 요인은 아닐 것이다.
7.문화혁명 경험이 철저히 반성되고 공유되면서 지금 한국의 진보세력과 달리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사회주의,자력갱생주의,반시장주의/자유주의,반개방주의등에 경도되지 않는 것 같았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나는 곳곳에서 문화혁명시 창궐한 철학과 지향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 분위기를 느꼈다.
문화혁명의 교훈은 무수히 많지만 그 핵심은 무엇보다도 '거대한 현대 국가는 젊은 사람들의 혁명적 열정으로 끌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관념이 아닐까? 두 번째로는 '어떤 위대한 사상(문혁기에는 마오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동=유소기,등소평류의 주자파들을 쓸어버리면 국가.사회의 명운이 형통하리라'는 관념이 아닐까? 세 번째로는 ’교육과 문화를 통해 인간성을 개조할 수 있다‘는 신념이 아닐까?
그런데 내가 본 중국에서는 과거 전 세계 진보세력에게 맹위를 떨쳤던 이러한 정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철지난 진보세력은 외세,초국적 자본,독점재벌을 민중투쟁으로 이겨내고 그 지도자들이 친민중적, 반외세적,반재벌적 계획을 세워서 시장과 외세를 컨트롤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정서가 있다.
이는 남한 진보 세력의 상당수가 북한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북한을 철저하게 연구한 과거 주사파의 핵심들은 중국공산당이 문화혁명으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얻었듯이, 북한의 경험으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유주의적(시장친화적) 개혁과 세계화,지식사회화,북한 민주화를 포함한 세계민주화에 대단히 적극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8. 고용계약이 기본적으로 1년이었다. 이것이 큰 무리없이 대중적으로 수용된다면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이렇게 되면 노동운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폐업/자본철수등에 대항하는 집단 소요는 가능하지만, 노동운동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결.투쟁에 입각한 근로조건 개선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 내가 본 중국의 노조(공회)는 사실상 노사협력부나 노무관리부서처럼 되어있었다. 이는 공산당의 공작이나 탄압의 산물도, 자본의 매수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고용계약이 1년으로 된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당연히 한국.일본 직장인들에 비해 애사심이 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근로계약을 1년 단위로 맺으면 논리적으로는 소리없는 대량해고나 대량이직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평생고용을 보장하는 한국 기업 수준의 이직율을 기록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내가 방문한 공장들은 처우가 최상급이어서 그런지 이직율은 매우 낮았다.
어쨌든 중국은 단순기능공조차 개인사업자나 전문가(한국의 학원강사,변호사,컨설턴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개인사업자나 전문가는 단결투쟁으로 자기의 처지를 개선해 나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오로지 시장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 나간다. 이런 환경에서는 얼마든지 대치가능한 단순기능공들은 참으로 불안하고 피곤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의 절대다수(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됐다가 실각한 화국봉 같은 이는 아니겠지만...)는 이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아마 이 역시 사회주의 붕괴나 문화혁명 경험에 대한 반성의 결과 일 것이다.
어쨌든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근로조건은 거의 시장원리에 의해 결정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형성된 근로조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업은 직업훈련소 신세를 면치못하다가 망해버릴 수 밖에 없다. 실로 회사가 직업훈련소로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국 진출기업들의 노무관리의 핵심인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고용.임금 시스템은 능력(숙련)향상에 따라 임금 격차가 엄청나게 커지게 마련이다. 능력(숙련)의 향상에 따라 보상이 큰 폭으로 커지지 않으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직을 감행하는 행렬을 막을 재간이 없다. 실제 고졸 단순직이 월 1000RMB 미만인데 대졸 부장급은 1만RMB이상이었다. 1:10의 차이인 것이다. 한국은 아마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1:5 수준의 격차를 보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주어진 기회를 철저히, 염치없이 활용하려는 중국인의 기질로 보면 이 같은 임금.고용시스템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시장이나 도로에서 보여지는 중국인의 낮은 질서의식을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일본이나 한국처럼 평생고용을 보장하면 고용된 중국인 대다수는 철저하게 몰염치하게 행동해서 나태해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정'이나 '의리'='염치'를 중국인 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가진 일본이나 한국은 오히려 그에 감사하면서 직장을 가정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나 미국식 고용시스템을 일본이나 한국이 전면적으로 채택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지만 이 역시 고정 불변할 것 같지가 않다. 개인주의의 확산에 따라 '정'이나 '의리'나 '염치'가 냉철한 이해타산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을 너무나 자주 보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터진 대표적인 高임금(高기술은 결코 아니다)사업장의 과도한 임금인상 투쟁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평생고용보장이 가져다 주는 안정감.애사심를 바탕으로 한 생산성'VS '1년 단위 계약이 가져다 주는 위기의식에 입각한 생산성'의 대결에서 많은 나라들은 후자가 전자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물론 지금의 한국이나 일본은 이와 다르게 나올 가능성이 있겠지만,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어디 외계에서 우주선 타고 온 인종이 아닌 이상, 큰 시차를 두지 않고 미국이나 중국등의 추세를 뒤쫒아 가리라 생각한다. 생산성(효율성)을 담보하지 않는 연대성은 오뉴월의 태양아래 놓인 얼음일 뿐이다.
중국식 고용시스템도 과거 70~80년대 일본에 밀리던 미국이 보여주었듯이 약점이 많은 시스템이다. 그러나 세계화.지식정보화로 인해 변화.부침이 극심한 시장환경을 감안하면 지금은 약점보다 강점이 더 많은 시스템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마도 이 지나치게 유연한 고용 시스템은 수십년후 중국의 경제 공황으로 인해 수백 수천만명 규모의 대량해고 사태가 도래하여 중국공산당이 노동법령으로 규제하기 전까지는 유지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때가서 개선이 되더라도 현재 한국처럼 지나치게 경직된 시스템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간 중국식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지도층의 도덕성과 전문성이 높고, 정부 자체가 민간 기업,금융,노동이 요구받는 수준의 고용.임금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술력이나 부가창출 능력이 떨어지는 노동력은 유순해야 한다. 또한 최하층 노동력일지라도 자신이 노력하면 시장가치=부가가치 창출 능력을 얼마든지 올릴 수 있는 열린 구조가 되어야 한다. 즉 민족,자격증,학력등 시장(능력)외적 장벽이 낮아야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본 중국은 이런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유산도 있고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겠지만 최상층 권력층이 깨끗하고, 공정 경쟁과 법치주의가 흐르는 자유 시장 경제를 밀어붙이고, 사회 전반적으로 공평성(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창출한 만큼, 시장 원리가 인정하는만큼 먹는다) 관념이 철저하다면 이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빠른 속도로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한국은 어느 하나라도 갖추고 있는 조건이 없다. 특히 경제.사회의 강자들에게 공정성과 공평성 관념이 희박하다. 다시말해 단결투쟁력=떼법, 인허가권, 로비력, 학벌이나 학위, 과도하게 높은 진입장벽을 친 자격증등으로 가치나 자원을 분배 받으려 하니 앞날이 어두울 수 밖에 없다.
9. 중국의 정치체제가 상당기간 안정을 이룰 것 같았다. 솔직히 필자는 중국을 둘러보기 전에는 오래지 않아 중국에 심각한 정치불안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생각을 수정해야겠다고 맘 먹었다.
그 이유는 첫째 중국공산당이 자본주의와 정보화가 필연적으로 불러들이는 리스크(민주화, 다원화, 부정부패, 지역.계층간 격차와 갈등등)가 무엇인지,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C교수와의 대화에서 느껴진 것인데, 정말 중국 공산당의 중국 분열에 대한 두려움은 북한의 미제침공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거의 병적으로 강한 것 같았다. 북한이 보여주듯이 엘리트들에 만연한 피해의식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체제조차도 엄청난 내구력을 가지도록 해준다.
나는 중국 공산당의 이런 피해의식을 보고, 중국 당국의 '파룬궁'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중국의 ‘종교와 결합한 농민 반란의 역사’에 입각해서 보면 파룬궁이 공산당에 도전할 수 있는 전중국적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파룬궁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공산당의 과민반응이자 커다란 실수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중국의 엘리트들이 중국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공산당과 확고한 컨센서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국가나 정치(공산당)에 무관심하다. 관심있는 소수는 거대하고도 쪼개지기 쉬운 중국을 끌어가기 위해서는 서구식 다당제, 거주이전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등이 유보되어야 한다는데 대해 동의를 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땅, 긴 국경선, 소수 민족 문제, 빈부-지역간 격차, 외세와의 갈등등 누가 보아도 중국의 취약성이 아닐 수 없다. 이 명백한 분열 요인들이 오히려 엘리트들에게 위기의식을 강하게 심어주었고 따라서 이들을 단결하게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북한 엘리트들의 외세에 대한 피해의식과 위기의식이 엘리트들의 분열을 막아주듯이...
셋째로 중국공산당이 놀라울 정도로 시장친화적이고 능력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한국의 소프트웨어 진흥원 북경사무소 같은 조직(이는 각종 국책연구기관, 교육원,진흥원등 수백개가 될 것이다)이 필요하다면, 처음에는 중국 정부도 한국처럼 세금으로 이를 설립한다. 하지만 중국은 곧 바로 지원금을 줄여, 스스로 시장이 요구하는 지적(컨설팅)서비스를 생산해서 죽든지 살든지 맘대로 하라고 내몬다. 그런데 한국은 10년이 지나도 세금으로 월급주면서 기업이 별로 돈 주고 싶지 않은 수준의 지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므로서 애초 설립을 주도한 행정부서(정보통신부,산업자원부....)의 생색내기 소재로 되고, 변칙적 영향력 확대나 이권 접근 수단이 되고, 퇴임한 관료들의 놀이터가 된다. 더군다나 이런 사업은 '컨설팅 서비스'는 공짜라는 의식을 심어주어 지식정보 시대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할 컨설팅 산업의 싹을 말려 죽이고 있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게 운영하는 것이다.
넷째 중국 공산당은 애초부터 맑스레닌주의당이 아니었고 지금은 더 더욱 아닌 것 같았다.
중국의 외래 문물.사조에 대한 수용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맑스레닌주의 역시 마오와 중국공산당에 의해 왜곡되었다. 그러니 수정주의니 뭐니 하면서 중-소 논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요컨대 뿌리깊은 실용주의적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념의 노예가 된다든지 교조에 빠져들지 않는 것 같았다. 따라서 중국은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지금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상당부분 자기들 식대로 왜곡.창조하여 수용할 것이 틀림없다.
강택민의 3개 대표이론에 따르면, 선진생산력을 대표한다는 것은 곧 기업가(자본가가 아니다)와 전문가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선진문화를 대표한다는 것은 일종의 철인이나 군자를 대표한다는 것이다.이는 자동으로 광범위한 인민대중의 이익을 대표하기 마련이다. 결국 공산당은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최고 엘리트들을 대표하는 정당인 것이다.
다섯째 중국 공산당은 3천년 역사에서 축적된 통치의 지혜를 체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교수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도가,한비자,묵가(추앙받는 황제의 통치술을 포함해서...)계열이지 儒家계열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념이나 전략의 애매모호성을 유지하는 것도(단적으로 중국이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정책 실패에 따른 怨聲이 최고 권력자로 직행하지 않도록 권능이 동일한 부장-부부장제도(이는 좌시랑-우시랑 제도의 변형이라고 하였다)를 두어 아래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이 같은 중국적 통치술의 소산이라고 하였다.
사실 권력은 권위로부터, 권위는 신비로부터, 신비는 애매모호성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오랜 동양적 지혜이다. 이같은 전략적 애매모호성은 확실히 중국과 같이 거대한 나라를 통치하는데는 매우 유용한 술수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둘러싼 시시비비에서 보듯, 최고 통치자가 뭔가 선명하게 밝히면 이로인해 사회적으로 반목과 질시, 분열과 갈등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의 투신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이다. 그러므로 너무나 다양한 요소들이 얽히고 설킨 중국에서는 뭔가 선명하게 밝히는 위험성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매모호성’이 가지는 힘은 노무현 대통령이 배울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섯째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 농민의 계급 이익을 대표하는 투사들의 집합체라기보다는 '과거제도'의 후신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았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거의 모든 엘리트들에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고, 또 이들을 통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 청나라가 그랬듯이 민족적,지역적,출신성분의 차별이 정말로 적은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이같은 개방성이야말로 조선로동당과 중국공산당의 큰 차이중의 하나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째 중국공산당의 최상층 엘리트들의 도덕성과 전문성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있는 것 같았다. LG그룹의 대표적인 중국통이라는 노용악사장은 그런 신뢰를 표현했는데, 이런 신뢰는 단지 노사장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은 일당독재라는 한계가 분명히 있지만 당내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잘 유지되는 것 같았다. 노사장은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의사결정 구조는 대단히 민주적이라고 강조했다.
빈부 격차,지역간 격차, 도농간 격차는 커지지만 부의 총량, 자유의 총량이 커지면서 전반적으로 모든 지역,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개선된다면 이 신뢰는 계속 유지될 수 밖에 없다. 내가 볼때 중국은 부의 총량이 급격히 커지면서 절대적 생활수준이 개선되는 추세는 20~30년은 계속될 것 같았다.
여덟째 과거 공산당의 무책임성이나 유연성이 지금은 큰 복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중국은 문화혁명 시절조차도 개인의 생활/복지에 대한 중앙의 책임성은 원래 너무 취약하였다. 자원 분배는 상당부분 省이나 그 아래 행정단위의 자율권에 큰 폭으로 맡겨져있었고, 상당부분은 시장에 맡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활 보장을 당 중앙에 요구하지 않았다. 구소련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인민에 대해 너무나 무책임하다 보니 공산당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의미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주요한 측면이 중국 인민들에게는 침투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 맑스레닌주의의 교조가 대중들에게 깊숙이 침투했더라면, 중국은 국가를 이용해 먹으려는 기회주의적 개인들을 엄청나게 양산했을 텐데.... 어쨌든 중국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주로 개인적 능력(적어도 지금은 시장에서의 경쟁력)에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10. 지역간 격차, 국유기업의 부실채권, 과열경기등 일시적으로 중국의 경제적 일취월장을 가로막을 요소들은 있겠지만 정치불안에 의한 중국의 분열과 내전이 일어나지않는다면 중국의 급격한 비상을 막을 요인은 없어 보였다. 이 역시 필자가 이번 중국 방문을 계기로 바꾼 생각이다.
11. 실로 중국이 남미나 아프리카 쯤에 있었다면 한국이 이토록 떨지 않겠지만 중국은 한국에 너무 가까이있다. 또한 역시 엄청난 저력을 가진 일본도 한국에 너무 가까이 있다. 물론 이 사실은 한국으로서는 엄청난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은 위기적 측면이 너무나 커 보인다. 중국 내륙지방 사람들은 심천,천진,상해,북경등이 축적한 부가 조만간 자신들에게 흘러넘칠 것으로 기대한다. 조만간 실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 동부 해안에서 흘러넘치는 부를 받아 먹기에는 그릇이 너무 취약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공공(정치.행정)서비스, 지극히 경직된 고용시스템, 고비용 저효율의 전형인 교육시스템(이는 평준화만 문제가 아니다), 반시장적 문화와 정서...등등이 기회를 위기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이 악착스럽고 유능한 인간들이 많은 한 한국이 아르헨티나나 필리핀처럼이야 되지 않겠지만, 향후 10년 이상은 참혹한 고통의 나날이 계속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청년들, 제조업 종사자, 노인들, 기타 사회적 약자들은 죽음의 고통을 겪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2. 정말 우리 사회의 모든 엘리트들;정치인들,관료들,언론인들,노조지도자들,NGO지도자등은 기업인들처럼 정말 땡빚을 내서라도 중국을 배우러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정치.경제적 비상이 한반도에 미치는 일파만파의 영향을 분석하고, 우리의 특장점을 감안하여 중국을 극복하는 전략 혹은 중국과 공존공영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세기 말 일본이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지고 서구로부터 배웠듯이 21세기 한국은 그 정도의 위기의식을 가지고 중국의 비상이 한반도에 미치는 일파만파의 영향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
**중국을 보고 오니 개인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하고 싶은 사업이 몇 있었다.
첫째, 공공서비스 개혁운동(최대한의 시장화= 관료의 손아귀에서 시장의 손아귀로, 보수의 현실화와 공무원 신분보장의 철폐, 기업.금융.노동이 요구받은 수준의 유연성을 공무원 사회에 실현)
둘째, 한국판 케네디 스쿨 설립(관료,정치인,군인 뿐 아니라 제3의 길을 추구하는 노조간부, 시민사회단체 간부들도 입교)
셋째,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노인들을 그룹핑하여 그들의 지식.지혜를 활용하는 기구.기관(elder's wisdom bank)
네째,주로 노조,교사,정치인 대상으로 중국 산업.사회 시찰단 조직
다섯째, 중소기업과 개인 투자자. 이민자를 위한 중국,중앙아시아,연해주,동남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투자.이주 자문 센터. 즉 중소기업.개인들의 글로벌 비즈니스 지원을 위한 정보를 총괄하는 안기부 같은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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