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고 시달리는 학술출판...“미래가 없다”
김재호
승인 2025.04.24
인터뷰_‘학술출판의 미래를 진단하다’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양질의 학술서가
‘예산 문제’로
도서관에서 제대로
구입되지 못하고 있다.
‘학술’ 정책만 있지
그 최종결과물인 책에 대한
‘학술출판’ 정책은 없다.
연구재단 관계자·연구자에게도
출판·편집에 대한 인식 제고가
요구돼야 한다.
‘8.9%’. 최근 우리나라 도서관의 자료구입비 비율이다. 전체 예산 중 인건비와 운영비가 대부분이고, 나머지가 자료구입비이다. 심지어 연도별 비중도 계속 낮아지고 있다. “자료구입비가 공공도서관 예산 배분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현실이다.”(「도서관 자료구입비 적정성 산출 및 증액 방안 연구」(대한출판문화협회, 2023.2)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현행 법령에는 도서관 자료구입비 기준에 대한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 가도 읽을 만한 양서가 없다.
학술출판의 미래가 절망적이다. 공공도서관에서는 양질의 자료를 제대로 구입하지 않고, 시민들 역시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심지어 국가 차원에서 학술도서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왜 그럴까? 지난 4일, <교수신문>에서 만난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은 세 가지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첫째, 앞에서 언급된 도서관 정책 때문이다. 둘째, 한국연구재단에 학술연구의 최종결과물인 출판을 전담하는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 셋째, 인문학의 산실이라고 하는 대학 차원에서조차 학술출판 조성비가 없다.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은 1968년생으로 성균관대 유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길사에서 기획실 차장을 역임했다. 그동안 ‘한길그레이트북스’·‘한길신인문총서’와 ‘코기토 총서: 세계사상의 고전’·‘인문정신의 탐구’ 등을 기획·편집했다. 제1회 한국출판편집자상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김재호“5만 원 이상 도서,
신청 불가”
지역의 한 시립도서관은 희망도서 신청 시 유의사항에 “고가(5만 원 초과) 도서는 신청 불가”라고 명시했다. 비슷한 안내는 여러 다른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실장은 “양질의 학술서가 도서관에서 제대로 구입되지 못하는 이유는 ‘예산 문제’가 가장 크다”라고 토로했다. 도서관 사서는 독자들의 요청을 반영해야 좋은 평가를 받기 때문에 소설류나 자기계발서 위주로 책을 구입한다. 또한 좋은 책을 구입하려 해도 한정된 예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학술전문 출판사들은 500∼700부 정도만 인쇄하며 생존을 위한 적응을 하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도서출판 길이 최근 출간한 김상봉 전남대 명예교수(서양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전 2권)도 700질만 인쇄했다. 김 교수는 이 책을 위해 오롯이 5년을 연구에 매진했다. 편집에만 1년이 넘게 걸렸다. 2권의 분량만 1천932쪽이다.
이 실장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이 책에 들인 인건비와 제작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책값을 20만 원으로 책정했다”라며 “이 책은 누가 봐도, 아니 인문학 전공자 영역에서 국내 수준으로 이런 연구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책은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도 어려워 대부분을 일반독자에게 판매해야 한다. 출간 후 3개월이 지났는데, 현재 200질 정도가 판매됐다. “이런 고가의 학술서야말로 전형적으로 도서관에서 구비해 두어야 할 성격의 책이다. 즉, 일반인들이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는 전형적인 학술서인 것이다.” 우리나라 도서관이 1천 개가 넘는데도 학술출판의 사정이 이렇다.
그렇다면 출판강국인 일본과 독일은 어떨까? 일본도 출판계가 위축돼 있지만, 대학 차원에서 학술출판을 지원하는 사례가 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가 책을 출판할 경우, 원고를 심사해 출판 적격 판정을 받으면 그 책을 펴낼 출판사에 출판비 약 100만 엔(1천만 원)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출판할 ‘출판사’에 직접적인 재정을 투입하는 점”이라며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교수들에게 연구지원비 등을 책정해 지급하는 제도가 있지만, 그 결과물인 책을 펴낼 ‘출판사’에 직접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라고 지적했다.
독일의 경우는 좀 더 체계적이다. 먼저 학술적 가치가 있는 책을 고가(高價)의 양장본으로 출판한다. 이 책들은 대부분 도서관에서 구입한다. 책이 소진되면 일반인들이 값싼 가격에 사볼 수 있는 페이퍼백(부드럽고 얇은 종이로 된 표지를 가진 책)으로 출판한다. 즉 이중적 구조의 출판이다. 양장본 출판을 통해 우선 일정 정도 수익을 보장받고, 페이퍼백 출판을 통해 상업적 성과를 낸다. 이 실장은 “학술출판사들이 최소한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다”라고 강조했다.
학술출판은 도서관 예산 축소, 연구재단의 출판 경시, 대학의 지원 부재 등 삼중고에 시달리며 존립 위기에 처해 있다. 양질의 학술서는 고가라는 이유로 외면받고, 출판사는 최소 생존을 위한 소량 인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사진=김재호“출판전담 인력,
1명이라도 채용해야”
한국연구재단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바로 출판전담 인력을 1명이라도 채용하는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술정책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책’을 소홀히 한다는 점이다. 연구재단은 각 연구자에게 기획이나 과정 등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히 관리·감독한다. 하지만 그 최종 결과물인 ‘책’(구체적으로 ‘편집’)에 대한 검증장치 내지 사후평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즉 출판 영역 역시 ‘전문’인력에 의한 관리·감독이 필요한데 이 부분이 빠져 있다.” 그 결과 한국연구재단에서는 예전 민음사의 ‘대우학술총서’보다 더 오랜 시간과 더 많은 국민 세금을 들여 ‘동서양고전명저번역사업’을 벌여오고 있지만, 이 ‘사업’에 대한 학계와 인문 독자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매우 박한 편이다.
이 실장은 “출판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라며 “예산을 별도 항목으로 지정해 출판사에 지원하지 않는 국가 프로젝트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그는 “인문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한 사회의 정신적 토대”이기에 “충분한 재정 지원 없이 문화 강국은 공염불”이라고 말했다.
대학과 교수사회도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30년 동안 인문 학술출판계에서 몸담아온 이 실장은 “우리 학계의 연구자분들은 출판의 고유한 영역과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이 거의 없는 편”이라며, “특히 ‘편집’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다”라고 토로했다. “출판과 편집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 즉 이에 대한 합당한 고려가 있어야만 우리 학문이 튼실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힙은 유행인데, 학술서는 소외”
출판 통계로 살펴본 학술출판의 미래

지식의 미래는
누가 쓰나
책 줄고, 독자는 외면…
학문은 어디로?
최근 대한출판문화협회의 「2024년 출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신간 발행 종수는 2.3% 늘어난 64,306종이었다. 소폭 증가한 것이다. 신간 발행 부수를 보면, 2.7% 늘어 72,125,640권이었다. 그런데 종교(1.8%), 예술(1.8%), 문학(7.8%), 사회과학(9%), 자연과학(10.2%), 역사(15.3%), 아동(2.8%), 만화(2.9%)는 감소했다.
언어는 25.8%나 줄었다. 반면, 학습참고 분야의 종수는 11.2% 축소됐는데, 부수는 47.2%가 상승했다. 특정 학습용 참고서가 많이 팔린 셈이다. 이 통계를 두고 학술출판이 감소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분야별 발행 종수와 부수에서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자료는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납본된 자료를 근거로 집계됐다.
「2023년 출판시장 통계Ⅱ」에서는 학술·전문 출판사의 감소세가 뚜렷했다. 42개사의 평균 매출은 8억4천4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10% 감소했다. 특히 학술·전문 부문 38개사의 평균 영업이익은 약 9천2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23.7% 감소해 출판 부문 중 가장 큰 감소 폭을 보였다. 그 원인으로 학술서적에 대한 불법 복제 스캔, 도서관의 구입 예산 감소 등이 지목된 바 있다. 특히 297개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학술·전문 부문이 현재 운영 상황과 향후 전망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 때문에 저작권 보호 강화, 공공기관의 학술 도서 구매 확대 등 다양한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책을 잘 안 읽는 문화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6명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으니, 책 구매는 더욱 줄어든다. 노벨문학상 수상 등으로 텍스트힙(Text hip: 글을 읽는 것이 멋지다)이 젊은 세대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MZ세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결과, 소설이 약 절반을 차지했다. 학술서적은 3.8% 수준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학술출판을 지원하는 양대 산맥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지원사업(이하 우수학술도서)과 세종도서 지원사업이다. 그런데 각각의 사업예산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우수학술도서는 2020년 26억 원에서 2025년 22억 원으로 감소했다. 공공재인 학술출판에 대한 지원이 오히려 삭감된 것이다.
세종도서는 2020년 87억500만 원에서 2024년 75억2천900만 원으로 줄었다. 이때 교양부문 문학은 ‘문학나눔’ 사업과 통합 운영되면서 대폭 감소했다. 2025년은 83억2천900만 원인데, 2016년 140억8천400만 원(문학나눔 포함)에 비하면, 약 60%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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