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8

朝鮮共産党 조선공산당 - Wikipedia



조선공산당 - Wikipedia

조선공산당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대일본 제국의 국기 일본 통치하 조선 의 정당
조선 공산당
조선공산당
지도자
김재봉 강 달영 (조선 판 )
박헌영
성립년월일1925년 4월 17일
해산년월일1946년 11월 23일
후계정당 조선노동당
본부 소재지경성부
정치적 사상·입장공산주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극좌
국제조직코민테른
템플릿 보기
조선공산당
각종 표기
한글 :조선공산당
한자 :조선공산회
발음 :초성 콘산단
일본어 읽기:쵸센쿄 씨
RR 공식 :Joseon Gongsandang
MR식 :Chosŏn Kongsantang
영어 표기:커뮤니티 파티 오브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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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공산당 ( 조선 교토 씨 은 한때 조선 에 존재 했던 공산주의 정당 .

1920년대 조선공산당은 일본 관헌 의 탄압으로 당 중앙 의 괴멸과 재건을 반복하고 있으며, 3년여의 존속기간은 제1차 ~ 제4차 조선공산당으로 구분된다. 를 취소되었으나 조선에서 재건운동이 계속됐다. 또한 당은 일본 과 만주 ( 중국동북부 ) 거주한 조선인들 사이에도 조직적인 확산을 가져 이들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9  에 조선공산당은 재건되어 1946년 남북 두 개의 '노동당 으로 재편 됐다 . 바였지만, 현재의 북한 당국(조선노동당)에 의한 '정사'는 김일성이 지도한 항일 파르티잔에게 혁명의 전통과 정통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1920년대 조선공산당에 대해서는 '분파집단'으로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 1 ] .

전사

편집 ]
첫 '공산당'을 만든 이동휘

조선인 의 사회주의운동은 러시아 혁명 후에 시베리아 에 거주한 조선인에 의해 시작 됐다 .

두 고려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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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6 월 이동휘 · 박진순 ( 조선어판 ) 등이 하바롭스크에서 한인 사회당 (조선어 판  결성 . 집행위원으로도 선정돼 있다. 이동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결성 ) 에 참가한 점에서 한인사회당은 거점을 상하이 로 옮겨 1921 년 ' 고려 공산당 ' 을 칭했다. 라고 불린다.

이와 전후해 [ 2 ] 에 볼리셰비키 당원의 남만춘 · 김철훈 · 우하묵 조선어 판 ) 등 이 이르쿠츠크 에서 러시아 공산당 한족부 [ 3 ]를 결성 . 라고 불리며 상하이에도 지부를 두었다 .

‘상하이파’는 민족해방을 우선과제로, ‘일쿠츠크파’는 사회주의 혁명 을 우선 과제 로 삼았다 .

1922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제민족대회 (극동근로자대회)에는 조선인 대표단이 참가해 동대회 참가자 148명 중 약 3분의 1(54명) 을 차지 했다 의진영 인사도 참가했으나 사회주의계의 각파에서도 이동휘·박진순·박헌영·김 탄야 조선어판 ) 등이 참가했다.

1922년 12월 코민테른은 코리아 뷰로 한국어판 ) (「고려국」이라고도 번역된다. 나중에 오르그뷰로)를 설치해 상하이·일쿠츠크 양파의 대립해소에 나서는 것과 동시에 조선내에 지부(공산당)를 창립하기 위한 공작을 실시 했다 ] .

일본에서의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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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 있어서의 조선인 유학생에게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 도 드러나 1921년 11월에 흑도 회 조선어판 )  발족 했다 .

흑황회는 1922년에 분열해 박열등 실행파( 아나키스트 파)가 풍뢰회(뒤 흑우회)를, 김청수·김종범 등 논의파(보리셰비키파)가 북성회를 결성했다.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공산당 결성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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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삼 ·일독립운동 후 조선에서는 민족운동의 고양에 더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조선총독부 당국이 민족운동의 억압을 일정 정도 완화한 것도 함께 노동운동·농민운동도 활발화했다.

1920년 4월 장덕수 · 차금봉 ( 조선어 판 ) 등에 의해 조선 노동 공제회 가 결성됐다 . 1922년에는 조선 노동 공제회에서 이탈하는 형태로 강달영 조선어 판 ) 등에 의한 조선 노동연맹회  결성 됐다 . 1924년에는 167개의 노동단체와 약 4만5000명의 가입자를 안은 조선노동총동맹이 발족했다.

후년(1929년), 모스크바의 국제 레닌 학교 에서 촬영된 공산주의자 들 .

인텔리층 사이에서도 사상단체가 결성되었다. 주요한 것으로 서울 청년회 조선어판 ) , 북풍회 조선어판 ) , 화요회 조선어판 ) 를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의 섹트가 되었다.

서울 청년회 (서울 파 )는 1921년 결성된 청년운동단체로 김사국 이영 조선어  ) 장덕수 등이 주요 멤버이다. 924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고 있다. 서울파는 그 후의 조선공산당의 역사 속에서 주류가 되지 않았지만, 활동가 중 최창익이 중국 망명을 거쳐 전후에 북한의 고관이 되고 있다(후 숙청).

북풍회 (북풍파)는 1922년 조선으로 귀국한 김청수가 북성회를 기반으로 만든 조직 이다 .

화요일회 (화요파)는 1923년에 「신사상연구회」로서 발족한 것으로, 1924년에 「화요회」로 개칭했다. 모임 에 가입 하고 있다. 또한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조봉암  참가 하고 있다 .

1920년대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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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원의 재판을 보도하는 『동아일보』(1927년 9월 13일자).

제1차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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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월 17일 경성부 (현 서울 ) 중화요리점 '아서원'에서 김재봉 등 18 명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책임비서( 서기장 에 해당)에 김재봉을 선출했다(제1차 조선공산당) 또 다음 4월 18일에는 박헌영 · 조봉암 등에 의해 청년조직으로 ' 고려공산청년회 '(약칭 '고려공청' 또는 '공청')가 결성됐다.

조선공산당(제1차)
고려공산청년회(제1차)
  • 책임 비서 - 박헌영
  • 각부 책임자 - 권고  (조직부), 하야시 모토 네 ( 조선어  ) (선전교양부), 김 탄야 조선어 판 ) (정치부 겸 연락부), 홍증식 ( 조사부), 조봉암(국제부)

조선공산당은 화요일파가 주도해 북풍회파가 합류해 결성됐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봄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정식 공산당(코민테른 지부)이 됐다. 원이 중조 국경의 신의주 에서 트러블을 일으켜 상하이 경유로 모스크바에 보내려고 한 공청의 사업 보고서가 관헌에 몰수되었기 때문에 당의 활동이 노견( 신의주 사건 조선어판 ) 박헌영·김재봉·김청수 등 주요 당원·간부들의 일제적발·검거가 이루어져 검거를 피한 간부도 국외로 망명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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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등이 검거된 뒤 강달영 ( 당시 조선일보 진주 지국장 ) 을 중심으로 1926년 2월 조직이 재건됐다(제2차 조선공산당) 공청책임비서에는 권5원이 취임했다 .

제2차 조선공산당은 해외 거주의 동포 사이에 조직을 넓히기 위해 일본에 '일본부'(나중에 일본 총국), 만주에 '만주 총국'을 설치 했다 .

강은 노농단체의 지도를 받고 또 민족주의자와의 공동전선을 목표로 했다. 1926년 4월 26일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순종이 사망 하자 제2의 3·1독립운동을 전개하려 천도교 에 접근, 학생을 동원해 빌라 10만장을 배포하려고 했다( 6·10만세운동 ).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어 강달영·권五卨 등 간부가 검거, 탄압됐다(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제1차·제2차 공산당을 주도한 화요일파는 대부분이 괴멸해 고문에 의한 죽은 자를 비롯한 많은 희생을 냈다 [ 7 ] .

제3차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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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보석된 박헌영(1927년) 이 이후 박은 소련으로 탈출한다.

제2차 조선공산당의 탄압 후, 북성회계의 안광천 조선어판) 과 서울 청년회(서울파)의 금종수(조선어판 ) 등에 의해 사회주의 진영 의 통일이 도모되고, 1926년 12월 에 조선공산당이 재건됐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에는 김종수가 맡았고, 공청의 책임비서에 고광수가 맡았다 . ML당 '이라고도 불린다 청년운동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서울파의 합류는 사회주의계의 청년운동 강화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 7 ] .

'ML당'에 참가한 주요 멤버 중 안광천은 도쿄에서 1월회(북성회가 개칭)에서 활동했지만 조선으로 귀국한 것이며, 그 외  강원 , 김준연 최익봉 등도 이 그룹 에 속한다 .

제3차 조선공산당은 내부에 파벌대립을 안고 1년여의 존속기간 동안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는 금종수→안광천→김준연→김세연, 공청의 책임비서는 고광수→梁明→하弼源→金哲과 눈 깜짝 놀랐다 당 내부에 이런 어려움을 안고도, 신간회 · 간우회 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민족주의자와의 통일 전선 의 결성을 도모했다. 1928년 2월 에 관헌의 탄압에 의해 조직이 다시 괴멸했다(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또한 ML당에서 배제된 이영 조선어판)  은 1927년 12월 서울 춘경원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이 그룹은 '춘경원 공산당'으로 불리지만 관헌의 탄압으로 1928년 6월 괴멸했다.

제4차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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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직후인 1928 년 2 월 차지 금봉 을 책임비서로 공산당  재건됐다. 그러나 같은  7월에 관헌의 탄압을 받고 괴멸(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 .

조선공산당 재외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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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조직하기 위해 조선공산당에는 두 개의 재외총국이 설치됐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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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노동운동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당일본총국책임비서를 맡은 김천해.

김청수 등의 북성회(1925년 1월, 1월회 개편)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는 조선인 유학생의 사회주의운동조직이 만들어졌다.

1922년 시나노 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 발각 은 저임금이나 가혹한 환경에서의 노동( 낙지방 노동 )을 강요받은 재일조선인 노동자의 상황에 대한 조선인·일본인 사회주의자의 관심 를 모았다. 1922년 도쿄조선노동동맹회가 결성 된다 .

제2차 조선공산당은 1926년 4월에 '일본부'의 결성을 시도했지만 탄압에 의해 좌절 했다 . ,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 박경종)와 고려공산청년동맹일본부(책임비서: 한림)가 결성됐다.

당일본총국책임비서는 나중에 김천해가 맡아 공청 일본부 책임비서를 한때 인정식(조선어판  맡고 있다 .

사회주의자들은 재일조선인운동의 주류를 차지하고 일본 민중과의 연대를 중요시 했다 . 선인조직은 일본인조직에 흡수되게 됐으며, 이는 재일조선인운동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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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5월, 길림성  안현 령고탑 (현 : 흑룡강 성 모란강 녕안 ) 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책임비서 : 조봉암)이 설립됐다. 많은 사는 간도 에 영사관 을 두고 재외조선인의 항일운동 단속을 하고 있던 일본 관헌은 '간도공산당'의 동향을 경계하고 1927년 1월, 1928년 5월, 1930년 4월 3차에 걸쳐 대규모 탄압을 실시했다.

1930 년 에는 간도 공산당 폭동이 발발했다 .

당시 만주에서 좌파계 조선인 군사조직에 참여하던 김일성도 당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지만 1932년부터 1933년 중국 공산당 에 입당해 동당지도하의 동북항일련군 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조선공산당 소멸과 재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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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취소 및 일국 일당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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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당 중앙이 검거되었을 때, 코민테른에서는 제6회 대회(1928년 7월~9월)가 열렸다. 승인을 취소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조선위원회는 “조선혁명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조선문제에 관한 결의”라고도 한다. 통칭 “12월 테제”)를 채택 12월 테제에서는 당이 인텔리·학생 중심에서 노동자와 몰협상이었던 것, 분파 싸움 때문에 일본의 스파이나 선동자의 잠입을 막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고, 노동자·농민을 획득한다 이를 지시, 계급투쟁운동을 강조했다. 이는 민족주의자와의 공투에 부정적인 견해를 시사한 것이었다 . 8 ] .

조선공산당의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외에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만주총국과 일본총국 은 해산 했다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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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1948년)
이재유

조선에서 '12월 테제'에 근거한 당 재건운동은 종종 시도되었지만, 어느 그룹도 코민테른에 의한 승인을 얻지 못했다. 당국에 의한 탄압 속에서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이 어려워졌고, 많은 인사들이 공산당의 활동에서 벗어나 민족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했다.

전산 제네스트 후인 1929년 6월 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이 공산당 재건을 도모하는 것으로 탄압됐다(제5차 조선 공산당 사건 ) .

1934년부터 1936년에 걸쳐 이재유 · 이현상 조선어  ) 등에 의한 '당 재건 서울준비그룹'이 활동했다.

1939년 석방된 박헌영은 잔존하는 사회주의자의 제당파를 규합해 당의 재건을 계속 모색했으나(서울컴 그룹 1941 년 대부분이 검거됐다. 박헌영은 광주 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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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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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1946년)

1945년 8 월 15일 , 일본  패전 에 의해 조선 해방 맞이 했다 . 8월 16일 서울시내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 결성  선언하고 이영을 책임비서로 삼았다. 이 그룹은 ' 장안 파 ' 로 불린다 .

전시기에 광주 에 잠복하고 있던 박헌영 은 같은 해 8월 20일 서울 에 모습을 드러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 했다 . 박헌영을 지도자로 맞이하려고 했지만 박헌영은 거절, 장안파 공산당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해산을 요구했다. 에 합류하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박헌영 아래 재건되어 서울에 본부를 두고 박헌영이 당 총비서가 됐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명목상 조선 전역에 걸친 조직이며 조선인 공산주의자를 지도하는 유일한 전위정당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외에서 활동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이 차례로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으로 사태는 복잡해졌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고 있던 ' 연안파 ', 소련 공산당의 당적을 가지고 소련군과 함께 들어온 ' 소련파 ', 그리고 김일성 만주 중국 공산당의 항일 파르티잔 에서 후 소련군에 편입된 만주파 ' 등이다. 이에 대해 일본 통치하의 조선에 머물렀던 박헌영 등을 '국내파'라고 한다. 북반부를 점령 통치하는 소련의 의향도 마주치고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항쟁이 이후 펼쳐지게 된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당면의 혁명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해 민족통일전선을 지향해 조선 인민 공화국 등  운동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 10 ] .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미국·영국·소련)에서 조선의 신탁통치안이 밝혀지면 김구 (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룹) 다른 제당 파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반탁 ) 로 일치하지만 1946년 1월 2일에 조선공산당  , 3일에 삼국외상회의 결정 지지대회를 개최해, 반탁의 기운 속에서 혼란과 실망을 가져왔다.

조선공산당 북부 조선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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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1946년)

한반도 북부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사회주의자를 이용한 점령통치를 실시했다. 오리가 필요로 하는 주장이 태어났다. 국내파가 남북 일체의 조직 유지를 주장한 것에 대해, 소련파·만주파 및 소련군 정당국이 북부 독자 조직의 설립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 12 ] 1945년 10월 13일(10일과의 설도 있다)에 개최된 「서북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 주석 1 ] 에 있어서 「조선공산당 북부 조선분국」(제1서기:김배범.  북한분국」이라고 적혀지는 경우도 있음)의 설치가 결의되었다.

덧붙여 현재의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1945년 10월 10일을 창건기념일로 하고 있다.

조선공산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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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세력의 지도자들. 허헌·박헌영 · 홍명창

북반부에서는 1946년 5월에 북부 조선분국이 북한 공산당으로 개칭 [ 13 ] , 1946년 8월에 조선 신민당 (연안파계의 좌파정당)과 합동  북한 노동당 위원장 : 김정봉  되었다 .

그 후 한반도 남반부 에서는 반공 주의에서 공산주의자의 활동 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고, 조선노동당의 활동 은 어려워 졌다 . 1949년 6월 30일 에 남조선노동당과 북한노동당은 합동(실질적으로 북한노동당에 의한 남조선노동당의 흡수), 조선노동당 (위원장 : 김일성)  결성된다.

남북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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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기원을 가진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 은 일본 통치하의 조선에서 긴 활동력을 가진 지도자  북한으로의 합류 후에도 넘버 2로 김일성에 이은 영향력을 유지했다 .

오랫동안 반공을 국시로 삼은 한국에서 사회주의자 들의 활동이 공적으로 고민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도 민족독립운동의 일조류로 공인되자 독립유공자 로 표창되는 인물도 나타나게 됐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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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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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편집 ]
  1.  개최일에 대해서, 미즈노 나오키 「서북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이와나미 소사전 현대 한국·조선」)는 13일 개최로 하지만, 일정에는 「10일부터 13일까지」개최의 설, 「10일 준비 회의에 이어 13일에 대회가 열린 설」 등 여러 설이 있는 것을 병행한다.

출처

편집 ]
  1.  강(1994), pp.225-226
  2. ^ 미즈노(1996)는 「20년(19년설도 있다)」라고 병기.
  3.  「러시아 공산당 한족부」는 미즈노(1996)에 의한다.
  4.  강(1994), p.221
  5. ↑ b 연못 (2010), p.140
  6. ↑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원회
  7. ↑ b 강(1994), p.223
  8. ↑ b 강(1994), p.224
  9. ↑ 요시와루 료 "1945년, 26일간의 독립"p.162
  10. ↑ b 후지이 (2002)
  11. ↑ “ 오늘의 역사(1월 2일)(연합 뉴스) ”. Yahoo! 뉴스 . 2022년 1월 1일에 확인함.
  12. ^ 미즈노 나오키 "서북 5도 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이와나미 소사전 현대 한국·조선")
  13.  후지이 타케시 “조선 공산당”, 미즈노 나오키 “서북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함께 “이와나미 소사전 현대 한국·조선”)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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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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