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7

기독교 사상의 현대적 의미1 > 종교친우회 | 바보새함석헌

기독교 사상의 현대적 의미1 > 종교친우회 | 바보새함석헌





| 기독교 사상의 현대적 의미1
작성자 바보새 14-06-04 00:01 조회6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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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기독교 사상의 현대적 의미1
-주기도문에 대한 풀이-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감시화천루 한별조경심(感時花濺淚 恨別鳥警心)
봉화연삼월 가서저만금(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백두소갱단 혼욕불승잠(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제 시가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남의 시라도 읽어 봐야지요. 이건 두보(712~770ᅳ 46세 때인 757 년의 작품)의 시인데, 두보란 사람 맘이 참 알뜰한 이야요. 옛날부터 이름 있는 시인이지만, 몇 자 안되는 글인데도 잘 의사를 나타냈어.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는 깨지고 산과 물만 남았다.’
나라가 깨진 모양을 이러구 저러구 형용하는 것보다, 말을 많이 안하면서도 ‘산하만 남았다’ 그랬는데, 이거 나라가 깨진 모양이 잘 표현이 됐어. 사람이 보통으로 못하는 말을 산천이 말을 해줘. 두보가 안록산(安祿山)의 난리를 겪고 소감을 말한 거야.

‘성춘초목심(城春草木心);도성에 봄이 오니까 풀과 나무만 자욱하게 자랐다.’
풀과 나무만 우거졌다는 것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없다는 말. ‘만호장안(萬戶長安)’이라 그랬는데 전쟁이 나니까 다 도망가고, 죽고 그래서 사람은 없고 풀만 우거졌어. 그러니까 그전의 참혹했던 걸 볼 수가 있어. 봄이 되니까 만물은 다 소생하는데도 나라가 깨지고 나니 사람만 없어. 여기 저기 둘러보니까 그 전날 질탕하게 놀던 자리도 다 깨지고 없어. 있다는 건 그저 풀과 나무만 무연해.

‘감시화천루(感時花濺淚);때에 느껴서 꽃에도 눈물 뿌리고,’
때를 생각하니까 꽃이 피는 봄이지만, 나라가 이꼴이 됐구나 생각하니, 꽃은 예쁜 건데도 꽃을 봐도 눈물만 나.

‘한별조경심(恨別鳥驚心);우리 다 흩어져서 그 한스러운 걸 생각하니까 새가 우는 소리를 들어도 가슴이 덜컥덜컥.’
가족끼리도, 사랑하는 벗들끼리도 다 헤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니까 그게 한스러운 생각에 새 소리에도 가슴이 덜컥덜컥, 또 무슨 일이 있나!

‘봉화연삼월(烽火連三月);봉화가 석달을 끊치지 않고 이어져.’
옛날엔, 전신전화가 없었으니까 여기 저기 산꼭대기에 봉수대(烽燧臺)란 걸 만들어 놓고, 무슨 일이 나면 낮엔 연기로 밤엔 불꽃으로 서로 연락을 했어. 그런데 그 '봉화가 석달을 끊치지 않고 이어져.’ 그러니 그 참혹한 걸 짐작할 수가 있잖아?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집안 소식를 알려면 만냥이나 줘야 편지 소식을 받을 수가 있어.’
집에서 서울에 있는 가족은 어떻게 됐나, 고향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됐나 그 안부를 알려면 만냥이나 줘야 편지 소식을 받을 수가 있어. 편지 한 장이 만금이나 될 만큼 서로 소식을 전하기조차 어렵단 말이야.

‘백두소갱단(白頭搔更短) ;흰머리를 긁어서 긁어서 다 부스러져서.’
옳게 빗질은 못 하고 안타까워서-안타까우면 자꾸 손으로 머리를 긁게 되잖아? 그래 자꾸 긁어서 흰머리가 다 부스러져 다시금 더 더욱 짧아져.

'혼욕불승잠(渾欲不勝簪);혼욕은 왼통, 왼통 비녀를 끼울 나위가 없어.’
비녀를 갖다 끼워도 비녀가 붙어 있지를 않아. 비녀는 관(冠) 밖에서 상투에 꽃아 관을 고정시키는 것인데, 그걸 끼워도 붙어 있게 할 상투를 쫓을 머리털조차 없어. 그러니까 거 얼마나 지독한 걸, 맘이 아픈 걸 잘 표시한 거야!

‘사랑과 창조로 이루는 「公有의 場」
그건 그렇고, 요새 달라진 것은, 요 몇 달 사인데, 이리로 해서 청주로 다녀왔는데, 이리를 가 봐도 거의 서울과 같이 거리에 사람들이 꽉 메웠어. 청주 가도 또 꽉 메웠어.
청주는 썩 들어가니까 거기선 아주 축제 기분이야요. 거리마다 청사초롱 매달았어. 국제공항이 들어선다니까, 그 공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그게 좋은 줄 알고 그러지만…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나 혼자 생각으로 ‘야, 청주(淸酒)라 그러더니 탁주(濁酒)도 못되겠구나’ 그랬어. 이제 거기도 제주도 같아질 거야요. 제주도는 벌써 못쓰게 됐어요. 거기 사람들 얘길 들으니까 어린애들 귀에다 솜을 틀어막지 않고는 잠을 재울 수가 없대요. 거기 군사기지 있잖아요? 그 비행기 뜨고 내리고 하는 소리가 지독하대요. 그거 본래는 오끼나와에 있던 건데, 하나를 가져왔는데, 얼마나 큰걸 가져왔는지 그 엔진 소리가 그랬대요.

전에, 오끼나와에서 일하던 미국 선교사가 와서 한 얘길 들었는데, 거기 비행장에서 한국으로 오느라고 뜨는 비행기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사람이 살 수가 없대요. 그래 '그거 참 안됐다. 우리가 그걸 몰랐다’ 싶어서 한번 거길 갈 생각을 했었고, 그래 지난해는 거길 다녀왔어요.
아직은 사람들이 몰라서 국제공항 생긴다니까 기분들이 들떠있겠지만 거기도 멀잖아 그런 걸 알게 될 거야요. 그런 거 들어서고 그러면 요만큼이나마 남아있던 사람의 마음 부스러기나마 다 없어지고 말거야요.
엊저녁, 청주에서 애기할 때는 이걸 읽고 했어요. 동아일보에 연세대 은준관(殷俊寬) 교수가 참 좋은 말을 썼어요. . ‘「제삼지대」밝아온다’ 란 글인데, 이이를 난 만나본 적은 없어. 다보고 나니까 가르치는 과목이 ‘기독교 교육학’이라 그랬어. 그래 기독교 교육학을 공부한 이니까 참 그럴 만하다 그랬어.
이 얘기의 결론이 나온다면 - 이이는 꼭 그렇게는 결론을 안 했지만 - 만약 결론이 나온다면〈신앙〉밖에 없지.

“「프란츠 카프카」가 쓴「재판」에 등장하는 주인공「요셉 케이」가 경험한 처절한 운명의 얘기 속에는 오늘의 인간가족 모두가 경험하는 운명의 수수께끼가 깔려있는 듯하다. 은행원이었던「요셉 케이」는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생일 아침, 아무런 죄목도 없이 낯모를 관헌에게 체포된 후 낯모를 집에서 낯모를 재판관에 의하여 수시로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31세가 되기 전날 밤 그는 이름모를 땅으로 끌려가 개처럼 죽는다. 왜 죽어야하는지의 이유조차 모른 채 ……”

「재판」이란 소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못 읽었는데, 소설 쓰는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쓴 모양이요. 30살 되던 생일날 아침에 잡혀가 아주 한 해가 다 되도록 까닭도 모르고 재판을 받다가, 죽는 까닭도 모르고 처형이 되도록.

“어떤이는 이 글을 두고「카프카」자신의 비극적 삶을「요셉 케이」를 상징으로 투사해버린 것이라고 보지만 이 비극적 얘기는 오히려 주인공의 무죄를 변명해줄 그 누구도, 그 어떤 조직도 존재하고 있지 않는 사회전체의 냉혹함과 무관심의 표출이라고 생각해본다. 결국 우리는「요셉 케이」를 직접 재판하고 또 그를 살인한 범인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침묵과 무관심으로 그의 죽음을 허용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자기 사는 모양이 슬픈 것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사는 모양이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잡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재판관에게 어째서 재판을 받는지도 모르다가 죽는 줄도 모르게 죽어버려도 그걸 누가 그런 일이 있나 없나 알지도 못해. 이런데 대해서 무관심해버린 이사회야 말로 문제 아니냐 그거야요, 이 사람은.
대학생들이 데모를 했다고 해서 강제로 군에 끌려가고, 그 가운데 여섯 명이 죽게 된 것은 우리가 죽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으니 결국은 우리가 죽인 거 아니냐 그런 논리지요.
확실히 3,4년 이래, 80년 이래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아주 무관심해졌어. 5.16 후엔, 박정희 때만해도 이렇게 무관심하진 않았어. 물론 그때부터 차차 이렇게 돼 오기는 했지만.

“바로 이 자리,「요셉 케이」가 죽어간 자리를 무관심의 지대라고 불러본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이 무관심의 지대를 만들어냈고 또 지금도 만들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이 질문을 안고 우리는 이 역사를 꿰뚫고 흘러온 두개의 정치철학적 이념에서 문제의 소재를 추적하여본다. 하나의 정치철학적 이념은「플라톤」「보산퀘스트」「브래들리」로 이어져온 소위 「국가중심주의」이념인 것이다.
「국가의 이익은 개개인의 이익에 우선하며…… 개인의 복지는 국가의 복지에 항시 예속되어야 한다」는 정치이념인 것이다. 여기서 국가는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전능자로서 이해한다.”

이것은 내가 요즘 비판해서 말하는 소위 「국가지상주의(國家至上主義)」와 같은 정치 철학인데, 국가가 개인을 보고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개인을 보고 '국가를 위해 살라’ 그런다 그말이야요.

“그러나 이 역사의 흐름 속에는 국가중심주의에 대응하는 또 다른 정치이념이 역사의 맥을 치받치고 이어온 것이다. 그것은「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루소」「마리탄」으로 이어지면서 내려온 소위 「개인중심주의」이념인 것이다. 「개인의 이익과 복지는 국가의 것보다 우월하며 또 우선한다… 국가란 전능자가 아니라 개개인의 행복을 봉사하는 것 ……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국가가 추구하는 이익과 개인이 추구하는 이익사이에는 필연처럼 뒤따르는 긴장과 갈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익이 우선하는 곳에는 어쩔 수없이 개인의 이익은 위축되고 또 제한되게 마련이고 반대로 개인의 이익이 우선하는 곳에는 무정부 상태 내지는 혼란이 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이 있다면 그것은 이 두 이념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에서 오는 것이다.”

‘버려진데 뛰어들어 「고통」을 함께’
“그렇지만 오늘을 어둡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엄밀히 말해서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긴장과 갈등을 제3의 차원(국가와 개인이 함께 공유하는)으로 승화시켜 나갈 그 어떤 창조의 힘이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데서 오는「진공지대」혹은「공백지대」의 편만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나의 무관심과 너의 무관심이 함께 만들어내고 있는「버려진 지대」인 것이다.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서로 자기의 것만을 추구하는 동안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침묵의 지대」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온갖 잡것들이 이 버려진 지대에서 난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갑자기 아파하는 불신 범죄 살인 그리고 갖가지 반항의 광란들은「버려진 지대」를 틈타 기생하기 시작한 곰팡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국가의 이익 앞에 충실히 추구했는가, 혹은 내가 얼마나 개인의 이익추구 앞에 성실했는가가 궁극적인 질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한 가지 이익만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공백지대」는 더욱 넓어져만 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 공백지대를 무엇인가 새로운 것으로 메워보려는 이상향의 약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초「런던」탑에서 비운으로 간「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재산의 공유」「평등한 교육」그리고「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한 꿈의 섬을 상상한 것이었으며 미국의 교육철학자「데오도르 부라엘드」의 인간가족은「모든 사람의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힘의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무료로 교육하는 사회」그리고「노후가 보장되는 사회」임을 꿈꾸었다. 분명히 이러한 유토피아의 추구는 오랜 세월 국가중심과 개인중심의 이념사이에서 생겨난 갈등내지는 공백을 극복해보려는 꿈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 앞에 우리는 근원적인 물음 하나를 물어야 할 것이다.
유토피아의 화려한 꿈과 약속과는 달리 오늘의 이지구촌의 역사는 어찌하여 끝간 줄 모르는 힘과 힘의 대결, 이념과 이념의 갈등으로만 줄달음치고 있는 것인가, 버려진 지대는 점차 확산되어 가는 것인가. 유토피아론자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망각해온데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 깃든다.
국가와 개인사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공백을 새로운 이상향으로 바꾸어갈 수 있는 것은「약속」이 아니라「오늘」과「지금」에서 심어가는「창조」이어야 한다는 가장 소박한, 그러나 고통스러운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
창조란 너와 나의 공통적인 작업이며 고통이며 사랑이며 과장이며 또한 기쁨인 것이다. 미래는 오늘의 창조에서 오는 것이지 약속의 꿈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과 창조의 고통을 거쳐서만 생겨날 수 있는 제3의 지대, 나는 그것의 출현을 초기 「이스라엘」민족속에 자리했던「도피성」에서 찾는다.”

이런 것들 다 참 좋은 말이야요. “사랑과 창조의 고통”을 지나야만 ‘제3의 지대’가 올 수 있다는 얘기 같은 건, 그리고「이스라엘」민족의 「도피성」은 모세가 만든 거.

“살인의 의도 없이 실수로 짐짓 사람을 죽였을 경우 법으로는 그를 죽여야 하지만, 그를 도피성에 도망하게 하여 정당한 재판을 거쳐 살인의 의도가 없었던 것이 판명되면, 그를 자유케 하였던 도피성, 그것은 정녕 「이스라엘」의 제3지대였으리라.
초대 기독교공동체가 예배 때마다 함께 나누었던 공동식사에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함께 떡을 떼는 사랑을 나누었으며 바로 그 사랑의 애찬에서 계급과 신분을 넘어서 함께 향유하는 제삼의 지대를 살았던 것이다.
「뉴욕」흑인가를 거닐면서 흑인들의 문제를 듣고 함께 아파하고 집무실에서는 최선을 기울여 문제해결에 힘썼던「뉴욕」의 신화「린지」시장에게서 제3지대의 비밀을 읽는다.
난지도 한구석에 찢어진 천막을 세워놓고 쓰레기 일터로 떠난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어린이 2백여 명을 모아 매일 돌보아주는 선생에게서, 도시로 떠나버렸던 농촌젊은이 7 명을 붙잡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면서 그곳에 청소년 공동농장을 시작한 충북 산골짜기의 참 전도사에게서 제3지대가 서서히 출현하는 한가닥 빛을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땅 구석구석 버려진 지대에 뛰어들어 사랑을 나누고 삶을 창조하는 숨은이들의 고통 속에서 우리들이 잃어버렸던 제3지대가 다시 되살아나는 여명을 본다.
「요셉 케이」같은 이들이 용납되고 보호되는 사랑의 지대에 대한 소망 같은 것이다.”

대체로 좋은 글이야요. 여기 예를 든 두 L씨 같은 경우, 이건 참 좋은 일이지요. 글을 쓴 이도 지금의 우리 문제를 상당히 깊이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이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면서 우리 피차 다 생각을 해봐서, 생각만 해보는 게 아니라, 아닌게 아니라 사실 그렇지요, 이분 말대로 우리가 이 사회에 문제를 느끼고 그걸 고쳐보려고 한다면 뭘 하는게 있어야 돼. 몇이서라도 자기네 공동체를 해나가는 게 있어야 돼. 반드시 커다란 걸 만들 생각을 말고 가능한 대로 그저 해보는 거야요. 그게 점점 자라면 희망이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는 못되면 또 거기서 마는 거고- 일의 결과를 미리 생각해서 이것 저것 재고 어쩌고 하는 것은 진짜가 아니야- 결과야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내 할일로 알았으니 한다하는 그게 참이야.
하여간 여기 은준관 교수는 ‘국가지상주의’와 ‘개인지상주의’의 서로 반대되는 이 둘이 있어서 문제가 생긴 걸 ‘신앙적인 창조’로서 해결해보려고 한 거야요.
주기도문의 얼개
어제 청주에서는 말할 때 이 글을 읽고, 이걸 주기도문을 가지고 생각을 해봤어요. 물론 주기도문에 대해서는 그전에도 이미 말한 게 있지만.
주기도의 특색은 이것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 무엇을 하겠다’ 는 건 한 마디도 없어요. '이렇게 이렇게 하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를 이렇게 이렇게 해주십시오’ 그러지요. 결코 내가 뭘 어쩌겠다는 건 없어.
먼저 주기도문의 얼개를 보면, ‘십계명’도 열 가지 조건으로 됐지만, 주기도문도 그래요. 물론 생각에 따라선 다르게 헬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봐요.
1,아버지 (파텔:Πάτερ)
2, 우리 (헤몬:ἡμῶν)
3, 하늘(오우라노이즈:οὐρανοῖς)
4,거룩(하기야스테토:ἁγιασθήτω)
5,나라(바시레이아:βασιλεία)
6, 뜻(테레마:θέλημά)
7, 오늘양식 (알톤 톤 에피오우시온: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8, 죄를 용서 (아페즈 오페이레마타:ἄφες ὀφειλήματα)
9, 시험에 들지 말게 (메 에이세낵케이즈 페이라스몬: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πειρασμόν)
10, 악에서 건져 주심 (르후사이 아포 토우 포네로우: ῥῦσαι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첫째, 주기도에서 맨 처음 나오는 건 ‘아버지 Πάτερ’ 야요- 우리말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됐지만, 본래 원문에는 ‘Πάτερ 아버지’ 야요.
둘째로 나오는 게 이제 ‘ἡμῶν 우리’
셋째는 ‘οὐρανοῖς 하늘.’ 그래서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돼요.
네째, ‘ἁγιασθήτω 거룩’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길 바랍니다.: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영어로 하면 곧 ‘hallowed be thy name’
다섯째,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나라가 임하옵시며,’
여섯째,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일곱째,‘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 할 양식을 주시고,’
여덟째,‘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홉째,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열째,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렇게 열 가지로 나눠서 봅니다. 물론 몇 가지를 합해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나눠 봅니다.
그래 이렇게 해가지고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좀 생각을 해볼까 하는 거야요, 오늘 내 말의 요점은.

민주주의의 정착은 일시적 시혜로선 불가능
아까 읽은 은준관씨의 글에서 ‘창조적 활동’ 이라 그랬는데, 그건 말하자면 오늘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을 풀어가자면 우리 하는 일이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올라가야만 한다는 말일 거야요.
그리고 우리들 살림살이 전체의 문제가 개인의 이익을 주장하는 것과 국가의 이익을 주장하는 것과 둘로 나눠서, 이 둘이 서로 충돌하고 있어서 문제가 생긴다고 보고 있는 거지요. 물론 문제를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문제를 그렇게만 본다면, 우리 살림에서 개인이 근본이냐, 아니면 국가가 정말 우리의 주인이냐 그렇게만 본다면 문제를 보는 깊이가 어딘가 좀 옅은 생각이 나.
나는 그래요. ‘개인’ 이라 그러면 그 개인의 ‘자유’를 - ‘내 정신의 자유’ 를-강조하고 싶지, ‘이기심’을 말하고 싶진 않아요. 또 ‘국가’ 라 그래도 ‘국가의 이익’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국가 안에 있는 ‘독재’가 문제야요. 한 동안은 헌법이란 게 모든 국가의 근본이라는 가치관이 마치 유행성 열병처럼 일어나서 너도 나도 다퉈서 헌법들을 만들고 그랬어. 그래 군주국에서조차도 입헌군주제라 그러지들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임금’이란 이름이 있건 없건 간에 사실에 있어선 지금 ‘정부’란 것들은 다 독재하는 정부야요. 미국이란 나라 같은 데는 그래도 비교적 아직은 ‘데모크라시’라는 게 좀 남아있기는 남아있지요. 하지만 이대로 가면 미국도 독재 안하고는 못 견딜 거야요.
요 얼마전, 그러니까 4월 19일에는 미국 하원의원 26사람이 공동으로 우리나라 대통령한테다 편지를 보내 왔어요. 거기 편지에 보면,

“귀하의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투옥된 많은 학생들을 석방하고 정치적 참여가 금지된 수백 명의 인사에 대하여 해금을 단행한 최근의 소식을 전해 듣고 우리는 대단히 반가워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지난 3년간 정치적 행동으로 인하여 대학으로부터 추방된 1,400 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학업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귀하의 정부가 행한 이러한 화해의 신호를 지지합니다. 또한 학문의 자유를 회복하는 조치가 곧 뒤따를 것을 믿습니다.”

라고 했어. 근래에 학생들 감옥에서 나준 거, 그리고 정치해금을 한 거 그런 건 환영합니다. 그런 건 좋습니다, 그런 뜻이야. 그리고 곧 이어서,

“그러나 우리는 민주적 권리를 부당히 규제하는 법률이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우리는 특히 뉴스를 취재, 보도하는 독립적 기능을 억압하는 언론기본법과 종교적 집회나 평화적 대학시위를 포함한 어떠한 집회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관권이 개입할 수 있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제로 이러한 법률이 집행됨으로 인하여 출판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기본적인 장치가 사라졌습니다. 또 우리는 수많은 학생들이 처벌 및 징계를 목적으로 강제로 군에 징집되었고 더욱이 그러한 학생 중 최소한 6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는 보고에 접하여 깊은 우려를 가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저 이렇게 일시적인 기분적으로 또는 독재적으로 하는 인정 쓰는 거 같은 걸로는 안 된다는 거야요. 아주 법을 고쳐서, 언론의 자유-가령 취재를 자유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법으로 보장을 해야지, 잘못된 법은 그대로 놔두고, 그저 기분적으로 더러 풀어주고 하는 걸로는 민주주의 제대로 할 수 없단 말이야요.

“대통령 각하, 귀하의 독단적인 시혜조치는 정의도 아니며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의 발걸음도 될 수 없습니다. 민주적 정치제도의 발전을 향한 보다 확실한 조치는 앞에서 언급된 제법률이 폐기되는 것입니다. 모든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 성취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우리는 귀하에게 이러한 개혁 조치들을 실행할 것을 촉구 합니다.”

26 사람이라고 하니까 의회 전체가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간곡한 말로 민주주의란 것은 제도적으로 보장이 돼야지 일시적 시혜를 베풀기라도 하는 듯이 해서는 안 된단 거야요.
그건 옳은 말이야요. 미국은 레이건이 물론 자기 생각대로 해나가긴 하지만, 레이건의 생각이 반드시 다 옳은 것만은 아니니까 그걸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아요. 그의 정책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을 한다든지, 혹은 조언을 한다든지 그래요.
그렇지만 거기도 또 문제가 영 없는 건 아니지요. 그래 그걸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걱정들을 하고 그러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사회문제를 풀기 위해서 한참 열심으로 투쟁을 하고 있는 삼십대 들은 6.25 이후에 났으니까 6.25 때 미국이 우리에게 어떻게 했나를 잘 모르지요.
그때 미국은 지금의 미국과는 다분으로 다르게, 비교적 그래도 호의를 갖고 UN군의 주동이 돼서 여길 왔어요. 물론 그런 속에는 미국의 자기네 국력이라든지 경제력 따위 그런 걸 다 생각을 해서 미국의 이익이 있어서 했지, 그런 것 영 없이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미국이 자기네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모크라시”를 위해서 한 거라고 인정을 할 수가 있어요.

젊은 세대의 반미 감정-독재의 후원에 대한 저항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은 미국이 그때 그랬단 것을 잘 모르지요.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지금 젊은이 사이엔 아주 저 반미감정이 상당히 강해요.
그럼 왜 젊은이들이 미국에 대해 안 좋게 생각을 하나? 어째서 반미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나? 그건 바로 이 독재하는 전두환 정권을 미국이 왜 전적으로 지지를 하느냐 하는 것 때문이야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 알 거는 미국 사람들 가운데서도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왜 반미 감정이 생겨났나 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 거.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젊은이들이 반미감정을 갖게 됐다고 하는 그런 말이 미국에도 있고,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생각을 다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미국이라 그러면, 뭐 미군으로 와있다는 군사령관이라든지, 대사라든지, 레이건 정부라든지 하는 그 사람만이 미국의 다가 아니야요. 민간으로 한다면, 거긴 또 상당히 데모크라시의 나라인 만큼, 정당한 의견도 있고 그렇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두 개의 미국이 있다고 하는 건 내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이런 면은 또 어느 나라나 다 그렇지요. 우리나라야 뭐 그것도 거의 없다고 그래야 되겠지만. 왜냐면 일반의 의사가 어디 뭐 발표나 되나요?
그런데 미국도 옛날, 건국될 때에 비긴다면 참 많이 달라졌어요. 이건 앞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질 거야.
지금이야 미국도 다분으로 금력으로 재벌들하고 군부하고 이렇게 결탁을 해서 국가의 큰 외교의 기본이 되는 문제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외교의 기본이 되는 게 다 그들의 의견대로 돼 가거든요. 뭐 그런 건 벌써 케네디 죽으면서부터 그랬어.
그때 젊은 기자 한 분이 왔었는데, 퀘이커였어요. 그래 그를 보고 케네디를 누가 죽였지 그랬더니만 아주 퉁명스럽게 하는 말이 “뭘 그래요. 돈 많은 놈들이 죽였지” 그랬어. 그래 나도 그거 참 옳다 그랬는데, 죽인 사람 이름이야 누군지 모르지만 좌우간 재벌들이 죽인 것만은 사실이야.
재벌들이 그럼 왜 죽였나? 그건 케네디가 재벌들이 하는 정치를 반대를 하니까…. 또 케네디는 그럼 어떻게 재벌들에 대항을 해서 그렇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건 자기도 돈이 좀 있으니까 그랬단 말이야. 그래 카터 당선된 담에 그랬어요. “카터 저 사람 도덕 얘기를 하긴 하지만, 카터 가지고는 안 된다.”그랬어. 왜 그런고 하니 카터가 자기 돈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니까. 케네디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재벌들에 맞서서 그럴 수 있었던 건 자기도 재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어. 그래 재벌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정치를 조금 취했는데, 그랬다고 해서 그만 그를 죽였단 말이야.
그런데, 딴 얘기지만, 그 동생의 아들이 나이 불과 30살인데 얼마 전에 또 어떻게 죽었다 그랬나? 거 집안이 참 아까운데…. 로버트란 사람 나도 보려다가 못 봤어.
그때 우리가 삼선개헌 하려고 하던 그때였는데,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짓이었는데, 국회의원들 좀 만나서 우리 사정을 얘기를 해볼까 하고 부탁을 했더니 누가 열심히 주선을 해 줬어. 그래 그때 주선을 하는 이가 로버트에 대해 하는 말이 “이사람 꼭 보고 가라. 이 사람 아무 때 대통령이 돼도 대통령이 한번 될거니까 이사람 꼭 뵈둬라”그랬어요.
그래 그때 로버트는 못 만났지만, 다른 국희의원들 만나서 우리 실정을 얘길 했는데, 만나는 이마다 하는 애기가 뭔고 하니 “뭐, 정치란 게 본래 그런 거 아니요?”그래. 아닌게 아니라 정치란 게 그런 꼴이고 보니 로버트도 결국은 죽여 버리고야 말았지. 재벌과 군부가 서로 합해가지고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게 미국에는 아주 뿌리가 깊이 내렸어. 그런 것들이 이 시대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거야요. 뭐 소련 같은 나라도 형편은 거의 마찬가지고, 이제 중공이 점점 커가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또 그렇게 되고야 말 겁니다. 어디 이론적으로 순수하게 되는 정치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앞으로의 세계가 이렇게 국가주의로만 나가고 보면 어느 놈의 나라고 간에 독재 정치를 안 하고는 안 될거야요. “데모크라시”는 지금까지가 아주 절정을 지낸거야. 이제 앞으로는 달라지지 않고는 아마 안 될 거야요.

종교- ‘논리’ 가 아닌 ‘믿음’ 으로만 이해가 가능
그런데 우리는 뭐 이정치가 어떻게 어찌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국가지상주의와 개인 우선주의의 대립된 두 세계관 가운데 나는 개인적인 그편에 서고 싶어요.
사람의 “사상의 자유” 이거야 말로 가장 근본이 되는 거야요. 이건 뭐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건 아니야요. 개인 어느 누구가 특별히 잘나서 주창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야요. 인간의 가슴 속에 사상의 자유 ᅳ 사람에 따라서는 천재적으로 아주 썩 잘난 것도 있고 또 바보처럼 못난 것도 있지만, 아무리 못난 것도 저는 저대로의 제 생각을 자기의 자유로 한다는 그 “자유”-가 다 있어요. 이런 “사상의 자유”가 기본이 돼서, 보기에 따라, 인간의 진화는 그 과정이 아래서 위로 떠받쳐 올렸다고 한다면 떠받쳐 올렸다고 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위에서 끌어 올렸다면 끌어 올렸다고 할 수도 있어요.
아무튼 말이야 어디서 하던지 간에 사람들 속에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누가 지어낸 것도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니야요. 이건 본래부터 그런 거라고 글 수밖에 없어. 이걸 종교적으로 한다면 사람이란 본래 하나님의 모습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그 성격 곧 하나님의 형상이 개인이라고 하는 것 속에 깃들어 있어요. 사회조직이라고 하는 속에는 그게 깃들어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은 산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있는 생명체 속에 깃들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깊이 해보면 이 세상이란 것은 쌍둥이야요. 그게 아닌 것이긴 한데 꼭 그것처럼 보이는 게 또 하나 있어.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란 거 그게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그것일 수는 없는데도 겉보기엔 아주 그럴듯하게 닮아 있어요. 본래는 ‘하나님 나라’ 인데도 어쩐지 이 땅에도 그것과 비슷한 게 있잖아요? 그러니 이거 참 파라독스지요. 역리(逆理)긴 분명 역리지만 확실히 ‘닮은’게 있어요. 그러니 이거 이원론(二元論)이지요. 이원론이 안 되려고 애를 쓰지만. 이걸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영원한 문제야요. 어떻게 하면 이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일원론으로 풀어낼 수가 있을까? 그래 예수님 말씀으로 하면 ‘새로 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고는 안 된다(요 3:3)그랬어.
이번에 학생들 보고 두 곳에서 말을 한 것도 요점은 거기 있어요. 우리 젊은 학생들이 이만하면 아주 큰 자랑이라면 자랑이지. 수십 년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데모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거다, 좋은 거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하는 걸 말해주려고 그런 말을 했어요. 그래,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중요한 줄 알지만, 하나 또 알 것은 이 세상에는 분명 그건 아닌데도 그것과 같은 쌍둥이- 꼭 쌍둥이야 아니겠지. 하지만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나의 뱃속에서 어째서 야곱이 나오고 에서가 나왔나, 또 천지창조설부터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었다는데 왜 거기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그렇게 될 수 있었나 하는 것들부터가 한 마디로 설명을 하기 어려운 거잖아요? 이련 모양으로 이 세상에는 쌍둥이 ᅳ 같은 게 있는 거다 그말이야요.
이거, 세상엔 쌍둥이가 있다 하는 건 기독교의 독특한 인생철학이야요.
물론 이런 건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면 불교, 힌두교면 힌두교도 그 구경에는 다 같다고 그래야지요.
그렇지만 보통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해서도 누구든지 가장 알기 쉽게 신화처럼 돼 있는 얘기로는 기독교의 그 얘기야요.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 꼭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어졌다고 하면서도 다시 한 번 더 나야지, 처음 몸으로 난대로 있는 ‘이 사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는 게 기독교에서 늘 강조하는 점이란 거야요. 물론 이런 점으로 해서 다른데서로부터 비난도 받고, 또 늘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이기도 해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까도 조금 얘길했지만, 그럼 세상은 이원적으로 됐단 말이냐 하는 거야요. 그래 그럼 사탄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냐,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있는 것이냐? 사탄도 실제하는 것이냐? 만일 사탄도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그건 자체 내에 이미 모순이니까 안 되고, 또 안 만들었는데 사탄은 사탄대로 있다 그런다면 그럼 또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할 나위도 없고, 이걸 해결짓자면 참 어려운 문제야요- 소위 논리로는 이걸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종교란 논리로서는 밝히 해명을 한다든지 할 수 없는 것들을 믿음으로 그걸 극복하게 해주는 거야요. 그래 예수님이 다시 나야 한다고 한 것은 그래서 한 말이야요. 그런데 그걸 니고데모도 이해를 못해서 이 현실 세계에서는 나서 자라고 늙고 죽는 게 철칙으로 돼 있는데, 사람이 이미 다 자랐으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 갈 수야 없잖습니까 그랬어. 물론 그가 이렇게 반문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이 곧 어린애가 나는 것처럼 그런 걸 말하지 않는다는 걸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니야요. 그는 이 현실세계를 아직도 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니까, 이 현실세계의 눈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어서 그랬지. 그러니 니고데모는 또 니고데모대로 역사는 거꾸로 흘러갈 수가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요. 그의 말은 현실의 인간으로는 되는 말이야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지금 혼동하는 거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인데 그걸 혼동하고 있는 거다(요 3:6)라고 한 거야요.
그럼 이거는 이원론이야요. 그러나 이원론은 이원론이지만 또 이원론이 이원론 그대로만 있어가지고는 종내 마지막까지 가도 해결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종교란 거는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거야요. 논리로 해서 철학으로 하려면 아마 토론이 그칠 날이 없을 거야.
그런데 그걸 인정을 하는데 있어, 또 예수님이 ‘고쳐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볼 수가 없다. 고쳐나는 건 죽어야 한다는 것, 곧 죽어가지고야 고쳐날 수가 있다’ 하고 설명을 했는데, 이런 것들이 젊은 마음에는 지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말이야. 그러나 어렵지마는 바로 이점이 속에서 해결되지 않고는 우리가 지금 현실에 맡은 이 문제, 이 혼란을 극복할 길이 없어요.
젊은 마음에는 목숨을 내걸고 수단 방법을 가릴 것 없이 폭력으로라도 죽일 놈은 죽여치우고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만, 그럼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이 되냐 하면 안 된단 말야.
이제는 이런 점을 이해를 시켜야만 하는데 그걸 논리적으로 해서는 납득을 시킬 수 없고 신앙적인 말로 해서 어느 때 가서라도 이런 게 미음 속에서 깨달아지게 하는데, 깨닫는데 도움이 될까해서 그런 얘기를 그래 그런 걸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명을 했었지요.

하나님 아버지-모두의 뿌리는 ‘하나’ 란 선언
주기도문에 첫째로 나오는 건 ‘아버지Πάτερ’ 야요. 아버지라고 하면, 어쨌거나 사람은 어느 한 뿌리에서 나왔다. 어느 한 뿌리다, 뭐 사람만이 아니라 일체 모든 것이 나온 데가 다 한 뿌리에서다. 그 뿌리, 모든 것이 나온 그 뿌리를 예수님은 ‘아버지’라 칭했어.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인 한 뿌리에서 나온 게 ‘우리 ἡμῶν’ 이야요.
‘우리’라고 그랬으니까 이건 모든 민족은 하나다. 본래 근본이 하나다 하는 사상이야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할만한 말이 하나 있어요. 뭐냐하면 ‘나’ 라고 하는 거 우리가 기도할 때는 간절히 하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 그러고 또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막15:34)’하고 ‘나’자로 썼어요. 또 나는 내 임의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고 아버지에게서 보고들은 것을 말할 뿐이다. (요 5:30) 나는 내 영광을 취하려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끼리 영광을 취하려고 한다. (요 5:41~44)하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를 말하면 본래 하나야요. 그건 왜 그런가?
예수님이 쓴 ‘나’란 말은 우리가 보통으로 쓰는 ‘나’란 말과 말로서는 같지만 그 뜻은 아주 달라요. 우리가 보통으로 쓰는 ‘나’란 말에는 이기주의가 잔뜩 들어있는 ‘나’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쓴 말에는 이기심 따위는 티끌만큼도 들어있지 않는 순수한 ‘나’예요. 그래 쓰는 말은 같이 다 ‘나’라 그러지만 뜻은 아주 달라요. 일반 우리가 쓰는 말인 ‘나’ 속에는, 철학자처럼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조리있게 하는 말은 아니지만, 다 이기주의가 깊이 들어있는 거야요. 그러니 우리 속에 들어있는 이런 것들이 청산되기 전에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 그말이야.
그런데 세상에서 ‘열심’이란 것이 우리 감정에서 나오는 거니까 우리가 일반 보통으로 쓰는 ‘나’란 말은 청산되어야만 한다는 걸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이리는 가보니까 거긴 뭐 청주만도 못해요. 청주는 그래도 학생들이 많으니까 열심인데, 그래 이리는 청주하고는 분위기가 아주 달라요.
그래 내가 오면서 조언을 하길 “이거 저 이리 사람들이 청주와서 좀 보고 또 청주 사람들이 이리 가서 보고 그랬으면 좋겠다. 자기네들끼리만 모여서 그럴려 그지 말고 같은 EYC 모임이라도 서로 왔다 갔다 해서, 하는 걸 서로 좀 보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랬어.
다른 덴 모르지만 둘 가운데선 청주가 이리보단 훨씬 훈련이 앞서 있어요.
그런데 훈련이 주로 뭔고 하니 역시 감정적인 훈련일 뿐이지, 다른 건 없어요. 노래 자꾸 부르고. 노래 부르는 거 그건 확실히 감정적인 훈련에는 효과가 있거든. 참 북은 같은 악기라 해도 거 아주 다르던대요. 그전에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가령 피리나 바이올린도 다 같이 악기지만 그 소리가 북소리와는 달라. 북은 아주 딴거야. 다른 거야 귀청을 울리지만 북은 가슴을 울려요. 고무한다 글 때 ‘고’ 자를 북고(鼓)로 쓰는 건 그래서야요. 옛날에 전쟁터에서 나가라고 할 때는 북을, 걷어 들이려고 할 때 는 징을 치고 그랬는데, 거기 이유가 다 없잖아 있어. 북소리는 뭔지 모르게 가슴을 그냥 안 둬. 더구나 북채질을 썩 잘하는 사람이 방법적으로 시위를 하면 훨씬 더 낫게 될 수가 있어.
그렇지만 그 감정훈련만 가지고는 역시 안 돼. 그건 그러다가도 아무 때 가서는 끝이 나는 때가 있지.
정말 참된 ‘고무(鼓舞)’ 는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어야 돼.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 받았다는 건 바로 그걸 말하는 거야.
그런데 성령 받는다는 것도 잘못되면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 밖에 안 되고 말아, 순복음교회가 서대문에 있을 적인데, 그때는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어. 그때 어느 날 저녁에 한 교회에서 같이 말을 하게 됐어. 그래 그 사람이 먼저 나가서 말을 하는데 가만 들어보니까 ‘아, 저 사람 심리학을 상당히 이용을 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랬는데, 아닌 게 아니라 ‘성령’이라는 이름 아래 심리학을 이용하는 거야요. 그렇게 하면 상당히 효과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어. 하지만 그것도 오래는 못가. 그러니까 이게 속에서 살아 일어나야 하는데, 인생의 깊은 데서부터 고쳐나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는 건 역시 기독교야.

기독교의 ‘원죄론’ - ‘새인간’ 형성의 철학적 근거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서 보면 기독교를 반대하고 싶을 거야. 거, 뭐, 왜 ‘원죄’가 있다고 그러냐? 그놈의 원죄란 게 도대체 뭐냐 하고 말이오. 본래 원죄란 소리는 이때까지는 나도 아니 했어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첨으로 ‘기독교에 독특한 인생관이 있다 그런다면 그건 원죄란 거다’ 하고 내편에서 강조하여 말했어요.
‘원죄’란 무슨 소린고하면 사람이란 반드시 고쳐나야만 한다는 말이야요. 사람이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째서 왜 뭣 때문에 그런진 모르지만 이건 아주 첨부터 고장이 있어. 그러니까 그 고장이 있는 그걸 고치자면 난대로 있는 이 사람이 아주 죽어서 새로 나기 전에는 ᅳ 육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새로 나지 않고는 안된다 하는 게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야요.
그런데 오늘 우리 대부분의 신앙은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소리만 하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로 나야 한다’는 소리는 또 별로 하질 않아. 이따금 말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부활’에 대해서도 거의 그 말의 뜻을 모르고 있다시피 해. 뭐냐하면 죽었던 게 다시 살아난다고 하니까 그거 좋은 줄만 생각을 하지 그 말뜻이 우리가 ‘질이 다르게’,또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대로 있는 이건 죽여 버리고, 새사람으로 나야’ 한다는 건 강조도 않는단 말이야.
그래나는 몇 년 전부터 하는 얘기지만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 먼저 해 가지고 십자가에 달렸다 그래요.
우리 믿음이 이렇게까지 건성으로 돌고 있는 건 참 문제야요. 더구나 젊은 시절에는 착각을 하기 쉬운 게 뭔고 하면 내 속에 살아있는 믿음이 뿌리가 박혔든 어쨌든 간에 그저 사회문제에 대해서 열심으로 싸우기만 하면 우리도 기독교인이다 하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나 천만에. 절대 그런 건 아니야요. 내 속에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해놓으면 아무것도 안 돼요. 물론 겉보기엔 건들건들 믿는 것 같아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속에 살아있는 게 있으니까 사회문제를 놓고 싸우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걸 분명하게 해놓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앞으로 우리에게 닥아올 문제들에 대해선 손도 못 댈거야요.
불의에 대해서 싸우고자 하는 맘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인 담에는 누구나 다 갖고 있어요. 불의를 보고도 저항할 줄도 모르고 반항심도 없다면, 좀 지나친 말이긴 하지만, 그게 어디 사람이겠어요?
이런 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깊은 생각을 해왔었다 글 수 있어요. 우리 스스로도 그런 걸 퍽 고맙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역사의 그 ‘바통’ 받아가지고 또 뛰는 셈이야요.
그래 나는 정치당국이 무슨 말을 하거나 무조건 학생들편에, 젊은이들 편에 서고 싶고, 또 그들이 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지, 조금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그저 이때까지처럼 그렇게만 해선 안 된다고 봐요. 그래 그걸 여러 번 여러 번 강조했어. 기독교를 안 믿겠다면 모르지만, 만약 믿겠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어느 것이 주냐, -사회문제에 대해서 싸움하자는 것이 주냐, 아니면 믿는 것이 주가 돼서 제대로 믿을려니까 싸우게 됐냐, 둘 가운데서 내놓고 얘길 해봐라 그랬댔어요. 대답이야 구체적으로 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네 마음 가운데 당장 대답을 해봐.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냐, 예수가 문제가 돼서 예수를 믿기 위해서 민주주의 싸움을 하는 것이냐, 지금 너에게 어느 것이 주냐?
그게 다 기연미연하게 미해결로 있을지 모르지만 그 생각이 분명해져야 된다는 걸 설명해 주려고 그랬던 거야요.

주기도문의 ‘우리 ἡμῶν’- ‘평화’의 이론적 배경
아무래도 이 앞으로의 문제가 그래요.
그럼 어떻게 내 속에다 살아있는 믿음의 뿌리를 밖을 수가 있나? 그건 훈련을 해야 돼. 훈련이 필요해. 훈련이 안 돼가지고는 안 돼 훈련이 안 된 건 나한테도 잘못이 있긴 해요. 훈련 없이는 안 된다는 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못한 건 내 잘못이야요. ‘비폭력’이라니까 덮어놓고 하라는 말은 아니야. 그걸 할 생각이 있거든 공부를 해가지고 해야지, 공부도 안하고 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건 아니야요. 그건 맹자가 잘 말한 게 있어.
“인이 불인을 이기는 것은 〔마치〕물이 불을 이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오늘날의 인을 행함은 마치 한 잔의 물로 한 수레에 실린 섶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하고는 꺼지지 않으면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거야 말로 인을 헤침이 극심한 것이다. (仁之勝不仁也, 猶水勝火. 今之爲仁者 猶以一杯水救一車薪之火也 不熄則謂之水不勝火, 此又與於不仁之甚者也)
무슨 소린고 하면 ‘인’이라고 해도 키워가지고 해야지, 한 컵의 물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인을 가지고 한 수레 가득한 섶에 불은 불처럼 커다란 악에 대적을 하다가는, 인이 없는 거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약하니까 실패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실패한 뒤 자기 인이 적었던 건 생각도 않고 인이 악을 이길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인을 헤치는 짓이란 말이야요. 마찬가지로 ‘믿음’이란 것도 그래요. 자기 믿음이 훈련이 없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건 생각도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고 또 남이 볼 때도 ‘저 사람,믿는 사람이라던 데도 실패만 하는 걸 보면 역시 하나님이란 건 하나의 미신에 불과하구만 그래’ 하고 생각을 하게 된단 말이야.
그래, 하나님은 미신이다란 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 교회가 증명을 해준 꼴이 됐어.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저렇게 독재를 하고는 할 짓 못할 짓 마구 하게 된 거야. 아, 생각을 해보세요. 이거 뭣이 어떻게 돼서 백주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도 ‘아,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하는 얼굴로 대로를 활보하게 됐겠어? 그건 곧 저 사람들 마음에 무서운 게 없어서 그래. 그러니 그렇게 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하는 식으로 됐단 말이야.
그럼,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겠어! 하나님은 사람의 얼굴에 있어. ‘아, 저사람 얼굴 보니 하나님 있더라’하고, 있어도 그 얼굴로 증명이 되고 없어도 그 얼굴로 또 증명이 되는 거지. 푸른 하늘 암만 바라봐도 거기 하나님의 증거 될 만한 거 하나도 없어! 다른 짐승들이야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이 인간에게는 인간을 통해서 그게 증거가 되는 거지, 다른 거 어디 있어요? 없어요.
그러니 세상에 있는 종교가 하나님이 있는 걸 증명하냐, 하나님이 없는 걸 증명하냐 그게 문제야요.
그래, 세상이 이런 걸 아시니까 예수님은 그 기도의 첫머리에 ‘Πάτερ 아버지’ 하고 부르신 거야요. 그리고 이 말은 곧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근본이 있다고 본다 하는 말이야요. 그럼 그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그건 바로 하나님에게 있다, 거기서 모두 나온 거다 그런 말이야요.
주기도문을 첨에서 끝까지 한 마디로 한다면 그저 ‘하나님, 한 마디면 돼. 다르게 표시하면 ‘Πάτερ 아버지’ 하는 한 마디. 아버지가 있으니까 그담엔 ‘우리 ἡμῶν’ “
이 ‘우리’ 란 거는 유대민족만을 가르키는 우리가 아니지. 사람이라면 다 ‘우리’ 그러는 거니까 모든 민족은 다 하나다. 그러니까 ‘평화요 인류의 장래에 화합해 살 수 있는 그 무슨 이론이 여기서 갈라져 나온다 하는 말. 근본이 원래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니까 우리는 합할 수 있는 거고ᅳ 또 합해야만 하는 거 아니냐 하는 말이야. 네 아버지, 내 아버지가 따로 있는 거 아니다. 하나다. 그래 둘째로 ‘우리’ 라고 한 거.
그런데 ‘우리’란 것 틈에 있어서 제일 말썽이 되는 거는 ‘국가’ 야요. 국가는 ‘우리 국가’ 그러지, ‘우리’ 라고는 안 그래요. 국가와 국가 간에는, 그것들이 처음 생겨날 때부터 배타적인 거야요. 저거는 있어선 안 된다. 오직 우리만 있어야지, 이 국가만 있어야지 그래요. 그러니까 가장 잘했다고 그러는 국가가 가장 잔인했던 거고, 자기들 외에 다른 것들은 다 무시하고 용납을 안 하려고 그랬어. 또 그렇게 해야만 잘하는 걸로 알았어.
그러나 개인에서 안 그랬어. 개인에 있어 훌륭한 인격이라 그러면 될수록은 다른 사람을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고, 나와 너의 차이가 없는 걸로 대해준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런데 국가란 차원에서는 ‘그렇게 하면 못쓴다, 제 민족을 자랑할 줄 모르는 건 애국자가 아니다’ 하고 공공연히 말해요.
그럼 그런 국가가 어째서 있게 됐나? 그건 인류의 정신이 아직 어려서 미숙한 시절에 인류의 성장을 위한 울타리로서, 하늘나라의 그걸 본받아서 하려고 하니까-아직 정신이 어린 개인들끼리 서로 남을 위할 줄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자기만 제일인 줄 알았던 까닭에 서로가 평화를 이루질 못해. 그래 일찍 먼저 깨달은 이가 그건 그런 것 아니다 하고 가르치려다보니 국가란 게 생긴 거야. 그래 어릴 때는 국가란 게 사람들에게 집단의 도덕을 심어주기 위해 그럴 수가 있지만, 장성한 담에는 그럴 수가 없어요. 지금은 인류가 다 장성한 때니까 개인도덕 다르고 단체도덕 다르고가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거 국가란 걸 해보니 거기 지배하는 것들은 재미가 있거든. 그래 그런 면에서 보면 국가의 모순이 참 많아요.
그래서 나는 자꾸-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걸로 들릴지 모르지만-지금의 이 국가는 벗어버려야 된다고 그래요.

(계속)








기독교 사상의 현대적 의미2
작성자 바보새 14-06-04 00:03 조회5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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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의 현대적 의미2
-주기도문에 대한 풀이-



독재에 대한 저항-지금의 이 국가는 벗어버려야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게 ‘하기야스데토 토 오노마 소우(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하는 말이야요.
‘거룩’이라 그랬는데, 그럼 거룩이 뭐냐? 그건 바로 ‘신성’이야요. 신성이라고 그러면 거기 이러구 저러구 말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독재자야요.
세상 정치에서는 독재를 미워하고 반대하지만, 종교에서는 하나님의 독재를 아주 원하는 거야요. 그건 왜? 그건 그 독재는 권력으로 하는 독재가 아니라 사랑해서 좋게 보아하는 독재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그걸 마땅히 다른 말로 표시를 해야겠지만, 다른 말이 없으니까 세상정치에서 하는 독재를 그 유형만을 보고 그 이름을 빌려서 이렇게 표시해본 거야요.
아무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민주주의란 건 없어요. 그래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그 한계 안에서 우리에게 십이분 자유를 준거야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섭은 안 해요. 내가 자진하여 알아차려서 하길 바라지. 어느 무슨 순간에 우리가 나쁜 생각을 해도 하나님이 곧 눌러서 ‘이자식아, 왜 그런 나쁜 생각을 하냐?’ 그러는 법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잘못 증거를 하는 걸 보고도 그저 아직은 미흡한 걸로 뒤 뒀지. 그때 벌을 한다든지 강제를 해서 어떻게 하진 않았어요. 왜냐 하면 그건 어느 땐가는 가면 제가 자라서 그걸 깨달을테니까 그때까지 가길, 제가 스스로 하길 허락해 두는 거지, 세상 군주들이 하는 모양으로 강제로 하거나 계획으로 또는 상벌이나 무슨 꾀를 써서 자기 권력 방향에 만족토록 하는 방법은 안 써.
세상에 있는 독재주의를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에게 우리가 충성을 해야 하니까, 거기에 우리 전체를 바쳐야 하니까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도 있어서는 안 돼.
그럼 세상의 독재자 그것들이 어디서 그걸 배웠나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한테서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내셨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있도록 만드셨어. 그걸 세상 독재하는 것들이 모방을 해서 그렇게 해요. 그래 기독교에선 그걸 ‘사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인데, 이 사탄인 세상 독재와의 대결은 아마도 마지막 날까지 갈 겁니다. 이제 역사의 이 시대에서 우리가 몸으로 그걸 당하고 있어요.
‘거룩’은 곧 ‘신성’인데, 신성은 불가침한 거야. 그러니 거기에 우리가 이러구 저러구 입을 열 수가 없어. 무조건 온전하게 철저히 순종하는 맘이 있어야 돼. 그래야만 여기 이 땅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실 그 독재를 내가 하려고 하는-사이비한-잘못된 것, 그것이 바로 독재주의가 나오는 원천이야요. 그렇기 때문에 열심이 있는 혁명가가 혁명 후에는 또 독재를 하게 돼. 혁명을 하는 동안은 그가 다 구세주란 말을 들었지만, 혁명을 하고 나면 이제는 또 그 혁명가에서 해방이 돼 나와야 돼. 그래 내가 늘 말하는 말에 ‘이 세상에선 혁명을 해야겠지만 그러나 혁명을 할 수 없다’는 건 바로 그런 까닭에서야요. 모순된 논리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우리는 완전치도 못한 ‘사람’들 아니야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선하신 분이라고 하니까 ‘네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건 아버지 하나뿐이다 (막 10:18)하고 예수님 자신조차도 그 자리엔 서지 않으시려고 했어. 세상 철학으로부터 시비 제일 많이 들을 말이지만, 우리는 다 죄인이야요. 다 ‘원죄’를 가지고 있어.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원죄란 소리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아주 듣기 싫은 소리야요. 말이 좀 빗나가긴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 까닭의 하나는 바로 이 ‘원죄’란 말 때문이야요. 공산주의자들의 말로는 기독교가 원죄론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위협감을 줘서는 자본주의자들의 그 체제 밑에, 폭군들의 억압 아래, 세상 기존 독재체제 아래 사람들을 영구히 묶어 두려고 고의로 하는 짓이 다 그래요, 물론 이런 논리야 말로 기독교를 잘못 알아서, 기독교를 적으로 생각하여 왜곡한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언뜻 듣기에는 참 그럴싸한 말이거든. 그리고 현실적인 역사에서 볼 때는 또 그런 면이 노상 없었던 것도 아니고 했으니까, 젊었을 때는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것 참 그렇구나 하고 속기가 참 쉬워요. 그러니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가 젊었을 때는 참 어려워요.
그럼 어떻게 이걸 극복을 할 것이냐? 그건 아까도 말했지만 훈련을 해야 돼-간디를 보면 간디도 거저 한 거 아니야요. 남아프리카에 갔을 때, 그때부터 공동살림을 시작을 한 거야요. 남아프리카에 가서 얼마 있다가 독일계 유태인인 칼릴바하가 간디의 하는 일을 보고는 거기 찬동을 해서 땅을 내놓아 〈톨스토이 농장〉을 해가면서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자기네 손으로 직접 윤전기를 돌려서 ‘보이스 오보 인디아 Voice of India’를 내고 했던 게 있었으니까 그 뒤 인도에 돌아와서 했던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거야요.
그래 우리도 우리 문제를 풀기 위해서 간디가 훌륭하다고 하니까 그의 책만 보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 한다고 해서 그게 되냐 하면, 그렇게는 안 돼요. 더구나 지금 우리는 간디가 영국사람을 대하던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요. 우리의 이 역사는 이미 병이 들대로 다 들었지. 또 미국, 일본, 소련, 중공이 얽혀 있지. 우리 자신을 보면 밑천이라고는 병든 이 역사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거 없어요. 훈련을 해야 돼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의분심이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참여를 하는 것은 고맙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절대 안 돼. 우리가 우리에게 놓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어디 가서 뭣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뿌리를 박아야 하고, 그 뿌리 밖을 데를 찾아야 해요. 그건 훈련이 없이는 안 되는 거야요. 맹자의 유명한 말이 있어요.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 선생님께 정권을 갖다 맡기면 맘이 움직이겠습니까 안 움직이겠습니까(부자가제지경상 득행도언 수유차패왕불이의 여차 칙동심부호; 夫子加齊之相 得行道焉 雖由此覇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그러니까 맹자 대답이 “아니다. 내 나이 사십이다. 안 움직인다(부. 아사십부동심;否. 我四十不動心)” 그랬어. 그래 또 제자들이 이름있는 몇몇 사람을 들어서 인물평을 구한 뒤, 그럼 선생님께선 무엇을 잘 합니까 물으니까 “나는 말의 뜻을 알며 호연지기를 기른다(아지언 아선양오호연지기;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그랬어. 그럼 그건 어떻게 길러지느냐를 설명하는 말이 “그 기는 의와 더불어 도로서 짝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기위기야 배의여도 무시뇌야;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라면서 “이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 의가 모여서 되는 것이지, 저 멀리 어디 동떨어져 있는 의를 움켜다 갖는 것은 아니다(시집의소생자, 비의습이취지야;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라 그랬어. 맹자의 말 가운데 특히 ‘집의소생(集義所生)’이라고 하는 건 거저 슬쩍 넘어가선 안 돼. 호연지기는 의를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고심면려(苦心勉勵)해서 실패하면서도 또 하고 또 하고 해서야만 길러진다는 거, 이거는 꼭 알아 뒤야 돼요.
속에 이렇게 기르는 것이 없으면-가령 데모를 한다고 해도 할 때는 여럿이서 하니까 서로 힘도 돼 주고 해서 용기를 얻고 하지만 그러나 잡혀가면 그때는 나 혼자야. 모든 걸 혼자서 당해내야 하는데, 이때는 속에 기른 것이 없으면 당해내기 어려울 거야요.
그런데 우리 형편을 보면 이렇게 지독한 탄압 밑에 있으면서도 데모가 수십 년을 두고 죽지 않고 계속돼 내려온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나 이런 정도만 가지고는 우리 앞에 가로 놓인 문제를 감당하기 어렵단 말이야. 그래, 그때 내가 쓰면서도 채 분명하게 모르면서 썼는데, 그때 ‘4.19는 헛총이다. 이담엔 다시 써먹지 못한다’ 그랬어.
그걸 물론 그때 왜 그런가를 쓰기는 썼지만 설명을 하면서도 내 속으로 “글쎄. 설명이 좀 부족하지 않는가” 그랬어. 4.19는 비폭력은 비폭력인데 순수한 비폭력은 못됐어.

민중은 발가벗은 양심의 자기 희생만 지지해
‘헛총’ 이란 말은 정말 사람을 쏘자는 것은 아니고 총알이 없는 빈 총만 왔단 말이야요. 그래 대체로 비폭력적이었으니까 4.19가 성공이 됐지, 만일 각목이라도 들고 나와 야단을 하고 그랬다면 그만큼 성공했을 리가 없거든. 왜 그런고 하니 민중이 와서 떠받들고 지지하게 되는 것은 무장한 게 아무것도 없는-제 맘속에 있는 양심 하나만 알고- 발가벗은 몸으로 자기희생을 각오를 하고 불의에 맞서는 걸 볼 때만 그래요. 조금이라도 등을 대고 하는 것이 있으면 민중이 구경이나 하려 그러지, 거기 절대로 지지를 할 줄 아세요?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호소를 해서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될수록은 내가 순수하게, 흐리터분한 것 없이 철저하고 깨끗하게 희생이 되는 걸 보여줘서 그들의 양심을 때리게 돼야만 돼요. 그렇지 못하고 내게 무슨 변명거리라도 있거나 약간의 의심스러운 데가 있거나 그러면 민중은 곧 물러서고 만단 말이야. 그런 위기가 지금 자꾸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하는 이 운동, 이것이 참 속 깊은 데서부터 훈련을 하여 깊이 뿌리가 박혀서 나오는 운동이어야지, 일시적인 그때 그때의 감정이 위주가 돼서 되는 운동으로는 절대 안 돼요.
아마 불원간에 그게 판명이 되는 때가 오겠지……
그런 걸 보면 뭐 우리 이것만이겠어요? 세상에 있는 혁명이란게 다 그런 거야요. 그래 모두 다 실패작이지. 겉보기론 어느 정도 힘 있는 거 같아 보였어도 가다가 마지막에는 다 실패작으로 그치고 그랬어. 그러니 우리는 전에 있었던 게 다 실패가 된 것일수록 우리는 또 그렇게는 안 밟도록 하는 게 옳은 일이야.
그러니까 참 말하기 힘들어요. 더구나 일이란 게 ‘내’가 하고자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말도 내가 하는 거 아니고 어느 알 수 없는 이의 기계가 돼서 말이 나와야 되는데…… 그건 나만 아니라 누가 말을 해도 그래야겠는데 그 지경에 가기가 또 어디 그리 쉬워요?
그래 나는 될수록은 내가 손을 내밀어 그럴려고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어느 정도 안 할 수가 없고 그래서 말하기는 하지만, 그러는 거기에 내 속에 고민이 있는 데가 있어요.
이제는 정말 위기가 우리 앞에 닥쳐오고 있으니까 부족한 나로서도 말을 안 할 수가 없어 하는데, 그전 같으면 아주 냄새나는 기독교는 믿고 싶은 생각 본래 없었어요. 고 ‘예수’라고 하는 거는 아주 냄새가 나는 거야요. 첫마디에도 하나님, 마지막에도 하나님. 거 다 하나님 하나님 하는 소리. 그러면 제법 진실한 것 같은데, 거, 어딘지 냄새가 나는 종교가 됐어.
종교란 그것보다는 인간미가 있어야 돼. 인간미가 있다는 거는 상식에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거야. 상식적인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아야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어. 그래 될수록은 냄새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이젠 부득이 해서 ‘데모가 주냐, 기독교 믿는 게 주냐? 어느 게 기냐? 둘을 걸쳐놓고 그러지 말고, 분명하게 해야 된다’하고 대단히 보수적이란 말을 들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말했어요. 될수록은 사이비한 것이 떨어져 나가고 순전한 것, 참인 것이 있어야 돼. 수가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야. 마지막에는 예수님도 혼자서 십자가에 달렸지, 몇몇이 동정을 해서 공동으로 달리진 않았어! 열 둘 가운데 누구 하나 대신했다는 게 아니라, 엄중하게 길 가다 잡힌 구레네의 시몬이 대신 멨다는 걸 보면 예수님 참 외로우신 분이야요. 야아, 삼 년 동안 그렇게 다니며 가르쳤는데 겨우 그런 사람도 하나 없었느냐! 그래 그런 걸 다 아시니까 목자를 때리면 양떼들이 다 흘어진다(마26:31) 그랬던 것처럼 내가 이제 당하면 너희가 다 흩어질 줄 안다(요16:32)그러셨잖아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속에 들어간 씨가 있는 걸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가셨어. 그래 그 씨가, 돌아가신 후에, 발아가 돼 나와서 기독교 교회가 나오게 된 거야.
이제 이런 걸 그거야 종교니까 그렇지 하고 생각하지만 말고 우리의 사회문제 싸움하는데다가 실제 적용을 해서 이걸 정말 진지하게 생각을 해서, 남이하는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 자신 속에서 얻은 게 있어, 그 솟구쳐 나오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솟구치는 게 비록 가늘기는 실낱같이 가늘더라도 그게 힘이 있는 거지, 속에 살아 있는 게 없는 것을 아무리 단으로 묶어 놓으면 그게 굵어는 보이지만 거기서 힘이 올 리는 없어요.

하늘나라-세속정치에 지배된 국가주의를 초월
그런 걸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볼 때는 한 마디 한 마디 다 생각을 해봐야 돼. ‘파테르 헤몬 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우라노이스(οὐρανοῖς)는 순전히 정신계인데, 이 οὐρανοῖς 에서 Πάτερ 의 첫째 조건은 곧 ‘하기야스테토 토 오우노마 소우(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그래 천하 어느 한낱도 거기 반역자가 없어야 돼.
그러고는 ‘나라가 임하소서 엘타토 헤 바실레이아 소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이제 ‘나라’ 얘기가 나와요.
사람이란 아무래도 생각하는 주체는 ‘나’인데, 이 ‘나’ 를 모아서 '나라’를 이루어야 돼. 우리 이 현실 역사에도 그거 아니오? 인간이 있은 지는 오래지만 나라는 그 뒤 훨씬 내려와서야 된 거야요. 나라가 될려면 우선 말할 줄도 알아야지, 글도 있어야지, 제도도 만들고 협동도 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된 담에 조직을 해야 나라가 되는 거지. 그 자리에 못가 가지고는 인간으로서의 내 사명을 할 수가 없어.
그런데 그게 곧 ‘하늘나라’는 아니지. 아니지만 또 땅에 있는 그 나라 없이는 하늘나라를 드러낼 수 없어. 땅에 있는 나라는 그러니까 정신적인 걸 드러내는 그 기구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니 그 나라라고 하는 게 자기 자체 속에 제가 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주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이야.
인류 역사에 있어, 이날까지는 사람들이 아직 어려서 정치 없이는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었지만, 이젠 이만하면 정치에서 해방이 돼가지고 마지막엔 정치를 초월할 수가 있어야 참 인간이라 글 수 있지,아직도 정치에 매어있다 한다면 그건 상기도 어린이를 면치 못한 인간 아니오? 왜? 정치의 속성엔 건 아무래도 ‘강요’가 있어. 어떤 일을 내 맘과는 관계없이 내게 강제를 해.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나라를 자랑해 왔지만 나라가 전부도 아니고 또 참도 아니야요. 인류가 나라가 필요 없는 지경까지 가기 전에는 그 밑에서 자라야 하늘나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니까 필요해서 오늘까지 온 국가주의인데, 이젠 없어질 때가 됐는데 이게 지배하는 재미에 맛을 붙여가지고 안 물러서려고 그래.
세상 모든 게 다 그 모양이지요. 지식도 사람에게는 있어야지만, 또 그것 때문에 잘못이야. 안다는 건 좋은데, 지식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고하면 자기 아는 길 뽐내려고 해. 학자치고 뽐내지 않는 사람 없어. 그래 일반으로 있는 사람들이 배운사람을 자기 친구로 알아주지도 않아. 그건 이때까지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공부 못한 사람을 보고 “아, 저 무식한 것들” 하고 멸시를 해왔던 바람에, 이젠 배운 사람 개인으로야 뽐낼 생각이 전혀 없더라도 이때까지 지내온 문화의 그런 전통 때문에 그만 틈이 가요. 그게 바로 성경에 기록된 에덴동산에서 지혜, 시비를 알 줄 아는 마음이 있으면 너는 죽는다(창3:1-19,22-24) 그 말 했던 거 아닐까? 그런데 사실은 지식 없이는 문명이 없잖아요? 어느 편으로 보면 그 지식이란 거 참 좋은 것 같고 또 어느 편으로 보면 그것이 본래 싸움을 붙인 거. 심지어는 점잖은 덕행이 있다고 해도 “아유, 그이야 뭐” 하고 간격이 있는 것처럼 대해요.
그래, 이런 점으로 보면 노자, 장자의 생각은 참 놀라운 거야요. 그이들은 덕이나 지식이 있어도 일부러 꾸며서 없는 척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런 게 자기에게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아주 어리석어진다면 덕에 가깝다고 그랬어. 이건 예수님 말씀과도 통하는 말이야요. 가난한 사람 복이 있다. 겸손한 사람 복이 있다(마 5:3-12).
어쨌거나 이 세상에 정치라는 게 있지만 정치 가지고는 안 되는 건 이때껏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일반으로 있는 씨들을 지배하고 속여서라도 강제하려던 그런 것 때문에 일반 씨들과 틈이 생겨서 병이 들게 된 탓이야요. 그리니 이 껍데기로 있는 세상 정치를 청산해야 하니까 ‘엘다토 헤 바실레이아 소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영어로는 ‘다이 킹덤 컴 (Thy Kingdom come)’ ‘나라가 임하옵소서’ 한 거야. 우리가 당신의 나라 세울랍니다가 아니라, 임하옵소서야. ‘우리’가 들어가면 그건 결국 바벨탑이 되고 말아.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 정치에서 그래도 비교적 ‘우리’가 덜 들어갔던 게 서양의 중세시대인데, 그만 거기 또 잘못이 돼서 종교개혁을 하게 됐어.
그런데 종교개혁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됐냐면 하나님을 아주 내팽개치고 배반을 하기 시작했어. 교회가 잘못됐기 때문에 제도로 된 교회를 내쫓자는 건 옳은 말 인데 교회의 잘못을 마치 하나님이 잘못인 것처럼 착각을 해가지고는, 사람이 어려서 미개했을 적에야 하나님이 있지 이젠 하나님 없다, 종교 필요 없다 하고 생각하게 된 거야.
물론 미개하던 때 알았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은 아니지. 우리가 잘못 본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지. 그건 잘못 본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지. 그런 잘못 본 하나님은 물론 우리 생각에서 나가버려야지. 다분히 냄새나던 거,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종교 같지 않은 것들이 많이 없어지잖고는 일반사람들이 알아듣기엔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하나님과 아주 인연을 끊을 수야 없지.
이런 의미에서도 종교가 고쳐나지 않고는 아까 은준관 교수가 말했던 개인대 국가 간의 싸움이 없어지지 않을 거야요.
옛날에는 나라라고 하는 거는 “아이구, 그거야 크신 분들이나 하는 거지”하고 생각을 했어.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들 크긴 뭐가 커요? 마음이, 생각하는 게 조그맣게 생긴 것들이 정치하려고 그러지, 맘이 크게 생긴 사람들이 어디 정치하려고 그래? 그러니까 역사상에서 사람으로서 제일인으로 낳던 이, 인간으로서 높다고 하던 이들은 하나도 정치 안했어. 공자, 맹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 이런 사람들은 하나도 정치 안했어.
이 앞으로 지금 있는 이 인류가 만일 망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더 발달을 하려면 이때까지 있었던 어느 변동보다도 큰 굉장한 변화가 있어서 참으로 한 꺼풀 벗는 일이 있지 않고는 안 될 거야요. 그게 무슨 형식으로 어느 때 가서 될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특색은 이런 인류의 장래에 대해 놀라운 생각을 해내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이 앞으로 어떤 길이 있어야 할지 잘 몰라요.
아무튼, 사람들이 종교 필요 없다고 한다고 해서 속단하지는 마시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걸로는 종교를 미신이라고 내버릴 하등의 이유도 없어요. 세속주의의 말에 겁이 나서 우리도 그만 그런가 보다 그럴 건 없어. 자기 맘에 생각을 해서 할 일이지. 자기 맘이 모르는 건 또 알 날이 있을 테니까 착각을 한 건 도리어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데, 친구들의 말이 겁이 나서 믿으면서도 안 믿는 척, 또 안 믿으면서도 믿는 척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다 못쓸 것이야요. 자기 속에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분명하게 명시를 해가지고 정성되게 해야만 만약 일이 잘못될지라도 나중에 자동적으로 고쳐질 시기가 와요.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지금 우리 학생운동이 겉으로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대로 현상 유지를 하려면 그건 해나갈 수 있겠지만, 속으로 보기엔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현상 유지를 해나가면 해나갈수록 점점 딜레마가 깊어 갈 거야요. 그러니 이게 바로 ‘호미난방(虎尾難放)’이야. 호랑이 꼬리를 애초에 잡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걸 쥔 다음에는 놀 수도 없고 쥐고 있을 수도 없고 난처해져. 아마 우리가 분명한 결단, 믿음에 대한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 동안에 큰 무리가 턱 부딪쳐 오면 그만 망하고 말거야. 그래 변동되는 시대엔 그래서 어려운 거야요.

오늘 양식-자본주의의 경쟁논리에 대한 극복
이런 어려운 시대에 이 문제에 대한 최고의 가르침이 바로 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 ‘게네테토 토 테레마 소우, 호스 엔 오우라노 카이 에피 겐스(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 뜻이야 물론 하나님의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까 우리도 뜻에서 사는 거야. 나는 자꾸 하는 말이지만 멋에 사는 게 아니라 뜻에 산다고 합니다. 멋은 피상적인 거야요.
요즘 소위 전통문화니 뭐니 해서 옛날 탈춤 같은 걸 많이 들먹이는데, 거기 뭐 망나니나 악한이 있고 그러는데, 거기 망나니나 악한 노릇에도 뜻이 있으면 맛이 있지만, 뜻이 없으면 그거 다 소용없잖아요?
나는 ‘뜻’ 이란 말을 어떤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 씁니다. 그건 왠고하니, 될수록은 아니 믿는 사람을 믿음으로 끌어들일까 해서 한 겁니다. 하나님이라 그러면 안 믿을는진 몰라도 뜻이라 그러면- “뜻이 있다. 사람들은 다 뜻에서 산다” 그러면 거기 대해선 누구나 다 “그렇지요. 뜻이 없는 법이 없지요” 그래요. 그럼 그때 “그 뜻이 바로 하나님이요,” 그러면ᅳ 그건 쉽게 받아들일 거 아니야요?
이제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뜻이야 땅에 이루어졌건 안 이루어졌건 간에 본래부터 있는 뜻이야요. 이제 그 본래부터 있는 뜻-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이 땅에서 실현이 돼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것도 ‘내가 해보겠습니다, 또는 ‘내가 세우렵니다’ 이루렵니다’ 하지 않았어. 그냥 ‘되게’ 해달라고 그랬지.
이렇게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기본적인 근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이번에는 경제적인 조건으로 넘어 와요. 그게 바로 ‘일용할 양식 톤 알톤 헤몬 톤 에피오우시온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이야요. 톤 알톤 헤몬 톤 에피오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런데 ‘오늘 양식’이란다고 농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야요. 농사하지 말고 곡간에 쌓지도 말라는 말이 아니라 농사를 해서 곡간에 쌓더라도 “이건 내 곡식이다. 그러니 먹으려면 먹고, 팔아먹고 싶으면 팔아먹고, 내 맘대로 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단 말이야요. 왜 그런고 하니 오늘 내 곡간에 있는 양식이라도 그게 내 소유가 아니야. 물론 농사를 내가 안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손으로 농사를 해서, 내 곡간에 쌓았다고 그래도 그건 내 소유일 수가 없어. 소유자는 하나님이야. 아무리 내 곡간에 쌓였다 해도 오늘 저녁에 하나님이 내게 주시길 허락하면 내가 먹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못 먹는 거야. 하나님이 그걸 내게서 빼앗아가려면 얼마든지 당장이라도 빼앗아 갈 수가 있어.
뭐, 이런 거야 어디 나 한 농사만 이겠으며, 또 어디 농사만 그렇겠어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 목숨까지 포함해서 모든 게 그렇지.
사람들의 경제관념은 오늘 먹고 남은 걸이 다음을 위해서 저축을 하는데서부터 발달을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대신 인류가 망할 원인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란 말이야. 경제란 관념 속에는 이미 경쟁의식이 꽉 들어있는 거야요.
그리고 물론 ‘사람이란 경제적 동물이다’ 하는 건 이 세상 생물 가운데 사람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지요. 다른 버러지들 가운데 개미나 벌이 경제에 대한 본능이 다소 조금 있기는 있어요. 그러나 그건 사람과는 달라. 그것들은 그저 본능대로만 하는 거야요. 의식을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요.
그런데 거기, 그 벌한테 배울 점이 하나 있어요. 벌이란 놈은 힘이 센 놈과 힘이 약한 놈의 구별이 없어. 힘이 세다고 해서 약한 놈보다 특권을 누린다든지 하는 게 없단 말이야. 가령 겨울을 당해서 통속에 식량이 모자란다면 모자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나눠 먹다가 나중에는 온 통이 고스라니 그대로 굶어 죽어요. 힘센 놈이 약한 놈을 통 밖으로 몰아낸다든지, 물어 죽인다든지 하는 법은 절대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안 그래. 사람의 경제관념 속에는 꾀가 있어 가지고 둘이 있다가 한 놈 없어지면 제 것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걸 알아. 열 놈이 있으면 그 가운데서 다른 놈 다 없어지면 열 배로 제가 더 잘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세상 정치하고 경제가 딱 맞붙어가지고 저희 놈들 뱃속만 차리려고 그래. 그래 세상이 더 어지러워요 옛날 농사를 주업으로 할 때는 그래도 덜 했어. 세상 꼴 보기 싫으면 산속에 들어가 내 손으로 내 밭 일구어 내 농사 내가 지어 먹고 그러면서 세상과 떨어져 살 수도 있었어. 그리고 실제로 또 그래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어요. 농사는 일일이 내 손으로 일해서 먹고 하니까, 농민들은 그래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요즘 노동자들에 비하면 좀 자유로웠다 글 수가 있어요.
그러나 요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해. 모두 기계에 매달려 있는 거니까 기계 주인 놈이 제 배짱 틀리면 가서 기계를 쑥 빼버리면 그만이야. 그렇게 되고 나면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거기 매달릴 수밖에 없어. 소위 문명이란 게 인간의 자유를 다 앗아갔어. 그러니 이 문명의 말로가 ……
사람이란 경제적인 동물이다 하는 거는 따지고 들면 ‘나’라고 하는 것 때문에 나온 거야요. ‘내’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소유욕이 뒤따라. 그리고 소유욕이 생기게 되면 경쟁이 나는 거는 또 자명한 일이고,
자본주의가 처음 나올 때는 그건 그래도 제법 좋은 점도 없잖아 있었어. ‘이건 내 자본이다. 내 것이다. 우리 서로 남의 것을 침범하지 말자’ 그래서 나온 거야요. 그러니 이게 대단히 발달한 거야. 적어도 힘센 놈이 남의 것을 약하다고 막으로 빼앗던 것과 비교를 한다면.
사람이 짐승과 다른 거는 바로 그런 점이야요. 짐승들이야 그저 본능대로만 하니까 거기 죄라는 걸 갖다 붙일 수가 없어. 어미가 새끼 먹는 걸 빼앗아 먹어도 “이 나쁜 놈의 개야” 그러지 않고, 또 새끼가 자라서 제 어미에게 붙어도 “이 음란한 놈아” 그러지도 않아. 거긴 죄가 없지만, 적어도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안 그래요. 딴 세계가 열린거야요. 철두철미 도덕세계가 열린 거야. 그래, 도덕이란 것에 복종을 안 할 수가 없어. 그러니 힘센 놈이 제일로 알던 그 시절에 비하면 자본주의는 대단히 발달한 세계야요.
그런데 거기, 그 자본주의가 타락을 하게 된 데는 바로 소유욕 때문이야요. 도덕에 복종해서 살려고 하면 거기 제일 방해가 되는 게 소유욕이야. 이건 끝이 있을 리가 없어. 여기 길거리에도 나가보면 다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나왔을 텐데도 또 뭘 사서 먹고 그 야단이 아니오? 그건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야. 장난으로 먹는 거지. 그거 안 먹으면 죽을까봐 그러는 건 아니야요. 그런가 하면 이 지구상에는 또 굶어죽는 사람이 하루엔가 한 시간엔가 오만 명씩이나 된다 그러잖아요? 또 우리나라 첫 퀘이커인 이윤구씨가 지금 UN에서 어린이 영양 문제 일을 하는 데, 모유장려를 했더니 세계 우유업자들한테서 “이 자식 죽여 버리겠다.”며 협박을 당한다니 참…… 그러니 세상이 문명해졌다 그러지만, 사람이 살아야 되는 그 근본 윤리에는 참 멀어졌어. 자본주의의 이 소유관념이 참 문제는 문제야요. 이런 걸 보면 자본주의는 이제 틀린 거야요.
그래 모든 종교의 첫째 교훈이 버리라고 하는 거야요. 무소유가 되야 한다. 버리고 버려서 마지막에는 나 자신까지도 버려야 한다 그래요. 어떤 이들은 사랑조차도 소유욕의 변태라고 하는 이들도 있잖아요.
예수님은 그걸 실행하다 간 분이야. 가정이라고 가진 것도 없고, 내 집이라고 고정 된 것도 없고, 그저 오늘 허락이 되면 되는 대로 살아간 분이야요.

용서-상대세계에서 평화를 위한 기본적 윤리
이렇게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것들을 말하고 나서 이제 윤리적인 데로 가 이제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이레마타 헤몬(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야요.
사람이란 아무리 잘 믿는다고 그러지만 잘못을, 죄를 짓는 거야요. 그건 면할 수가 없어요. 본래 날 때부터가 그거니까. 그걸 하나님에 하나님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반문을 하고 싶겠지만 그럴 순 없지요. 그건 바울의 말마따나 만들어진 토기가 토기장이를 보고나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러면 되겠어요? 토기가 그런 모양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반문할 수가 없지요. 그건, 참 말하기 어려운 거야요. 우리들로서야 왜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사람은 잘못이 없는 사람이 없지.
그러니까 우리 서로 잘못한 것을 용서할 줄 알아야 돼. 만약 서로 용서할 줄 모른다면, 저 사람의 것을 내가 용서할 수 없고 또 내 잘못을 저 사람이 용서할 수 없으면 옛날 무식했던 때 그랬던 모양으로 서로 죽여 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돼. 옛날에는 그래도 무식하니까 죽어도 말 못하고 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반지빠르게 라도 알았으니, 왜 죽이는 거요, 죽으면서도 반항하잖아요?
그러니까 죽일 수도 없어. 그래 서로 피차간의 불화만 쌓여가게 마련이야. 그래 이제 세계평화가 불가피해졌어. 그러나 평화가 어디 오게 됐어요? 반지빠른 지식 때문에, 소유란 거 때문에 법이란 거 때문에 서로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병이 골수에까지 파고들어서 이젠 이걸 고칠 수가 참 없어졌어. 이런 걸 어떻하지?
이제 그런 걸 생각을 한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대로 피차 서로 용서하는 길 밖에는 다른 게 없어. 그래야만 우리 잘못을 하나님한테 용서받을 수가 있지, 그러잖으면 이 세계 온전할 수가 없을 겁니다.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이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 토이스 오페이레타이스 헤몬(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고 가르치신 것은 그래서야요.
평화를 하자면 지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은 있다가 할 셈치고, 우선 첫째로 해야 될 것은 서로 “피차간에 이거 잘못됐습니다. 미안하게 됐으니 우리 서로 맺힌 걸랑은 깨끗이 풀어버립시다” 하고 서로의 유감을 서로가 풀고, 풀어 줄 일이야요.
그런데 또 사람이란 약한 존재들이니까 이렇게 일껏 풀어놓고도 또 새로 잘못을 저지르게 돼요. 그리고 내 맘에서,속에서 잘못이 나와 가지고 시험에 빠지게 돼요, 그래 그런 걸 아시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르치신 기도에 이걸 넣으셔서 가르치셨어. ‘카이 메 에이세넥케이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드몬(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고 가르치신 건 다 우리의 약한 걸 아시니까 그런 거고, 또 우리는 언제나 이런 걸 -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내 스스로 내 맘을 다스려야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다 약하잖아요?
그래 시험에 빠지고 나면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빠지고 말아. 그래, 이제 마지 막으로 ‘아까 르후사이 헤마스 아포 토우 포네로우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신 거야요. 사람이란 이 몸뚱이를 쓰고 있는 담에는 아무리 나는 안 그러려고 그러지만 악에 빠지고 말곤 해요. 이 세상이란 누가 뭐래도 꽉 악이란 세력이 자릴 잡고 있어서 인간에게 대적을 하고 있어요. 그래, 이런 가운데서 해방이 되게 해달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거지요. 뭐 용기있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내가 이놈의 악한 세력을 한 번 두들겨 깨버릴 랍니다.” 그래도 그거 용기는 한 번 좋은지 모르지만 소용없는 거야요. 내가 뭔데 이 악한 세력을 깰 수가 있겠어요. 거기서 우릴 풀려나게 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뿐이야요. 그래 우릴 위해서 그걸 풀어 주십시오 했어.
이렇게 해서 주기도문은 다 끝난 거야요.
그런데 그담에 나오는 구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있습니다’ 하는 말이 문제가 되고 있어요. 그전에는 별말 없이 했던 건데 근래에 와서 학자들이 연구한 걸로는 오래 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다고 그래요. 그래 지금은 이 구절을 그대로 하는 사람도 있고, 생략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은 좋은 말이야요. 뭐 주기도문에서 새로운 말은 아니지요. 위에서 다 나온 걸 다시 한 번 결말 지으는 말이야요.
그래 거기 호티(ὀτὶ)라는 말이 있어요. 호티는 영어로 하면 ‘포(For) 왜 그런고 하니’하는 말이야요.
주기도문을 첨부터 보면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고 다 우리를 위한 걸 구한 거야요. 그렇하고는 이제 마지막 결말로서 송영을 드려야겠는데 그게 바로 왜 그런고 하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하고 결론을 내린 거야.
그래 이걸 생략하기도 하더니만 또 얼마 전부터는 이건 참 중요한 말이다 그래요.
왜 그런고 하니 이 지구의 제일 문제가 되는 건 ‘나라’ 때문이야요 나라. 그럼 나라가 뭣 때문에? 그건 권력 때문이야요. 그럼 권력은 뭘 낳지? 그건 영광이야.
참말 우스운 말이지만, 예수님 참 겸손한 분이야요.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으신 분이야요. 요한복음을 보면 거기 그러잖았어요? 거기에 세상 사람을 보고 ‘한 마디로 해서 너희는 너희 영광을 취하지만, 나는 내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들끼리 이놈이 저놈을 칭찬해주고 또 저놈은 이놈을 칭찬해 주고 서로서로 주고 받는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지 인간들이 받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거야요.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미래국가의 모델
그러니까 나라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지, 우리가 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또 권력이란 것도 하나님이 가지실 것이고, 그 결과 권력이 잘해서 생기는 영광도 마땅히 하나님이 누리실 것이다. 내가 가질 것이, 우리가 누릴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이 바로 이 마지막 귀절이야요. 이건 하나님께 감사하는 걸로 마무리를 지은 것인데, 그게 곧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세 가지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 거야.
만일 이 말의 참뜻을 우리가 안다면, 그래서 그걸 정치가들에게 가르쳐 준다면, 그리고 정치가들이 이걸 알게 된다면 정치가들이 좀 달라지게 돼서 이놈의 정치도 달라질 거야요.
정치가들의 생각이 ‘본래 나라는 우리가 할 것이 아니다. 우리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우리가 그 직책을 여기 있는 동안 맡아서 할 뿐이다. 그러므로 권세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우리에게 어느 정도 허락해서 한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연히 권력의 결과로-잘됐으면-오는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지, 그걸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라면 지금 일이 왜 이렇게 됐겠어요? 지금 보다야 훨씬 좋아졌지.
하지만 사람이란 기어이 내가 하겠다는 생각이 있어. 나라를 내 맘대로 한 번 해 봐야겠다. 권력을 한 번 잡아봐야겠다. 영광을, 명예를 내게 돌아오도록 만들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어.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 영원히 있습니다 그랬어.
그래 이런 생각이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는 데에 커다란 가르침이 되는 거야요.
물론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지금 데모하는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해서 했던 말이야요. 데모를 하는 거야 첨부터 지지하는 거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에는 지금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지금까지는 거의 자연적인 감정 -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줬던 자연 그대로의 감정 - 인 의분심과 이상주의가 데모하는 그 마음에 우러나와서 그랬어요. 그러나 이제 이만큼 해왔으면 앞으로 올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게 있어야 돼. 그렇지 않고는 잘 못되기 쉬워.
그래 그걸 아까 은준관 교수는 개인대 국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느냐, 국가지상주의냐 하는 이 둘이 서로 싸워서 이러는 것이니까 이제 ‘제삼의 지대’ 제삼의 것이 나와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그럼 제삼의 것이 뭐야요. 그건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지, 별거 아니야요.
이제 이걸 우리의 현실로 사는 걸 좀 규모를 크게 해서 본다면 자본주의와 공산진영의 대립이야요.
그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왜 나왔느냐? 공산주의 처음 나올 때는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그런데 마침내는 미국과 둘이서 세계를 둘로 갈라 차지하게 됐거든.
그런데 이건 우연이 아니야요. 나는 늘 하는 말입니다만, 역사상에 미국과 소련은 본래 날 때부터 다른 나라하고는 달라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생각을 해가지고- 그저 자연발생적으로 된 나라가 아니라-적어도 이성을 써가지고 연구를 해서 만든 ‘이성적 나라’니까 그 의미가 달라요.
그럼 이 대결이 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건 물을 것도 없어요. 그건 깊이 생각지 않아도 분명해. 둘이 대결을 하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기고 한 쪽은 완전히 패망할 거다 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만약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어느 한 쪽이 힘이 강해서 상대방을 이길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어서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야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완전히 때려 엎을 거다, 아니면 공산주의가 그 야단하는 걸 보니 자본주의를 깡그리 땅에서 몰아내고 공산주의 천하를 만들 것이다 하는 것도 역시 망상이야요. 그렇게는 안 될 꺼야요. 또 끝이 그렇게만 난다면 역사가 맛이 없어. 싸움이란 거는 그 싸움이 해결이 되려면 둘이 싸우고 있는 것 보다는 한층 더 높이 올라가야 되는 거야요. 보다 높은 층에서 보면 이때껏 싸웠던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군 하고 생각하게 돼요. 문제가 없이 돼서 싸움이 해결이 되어야지, 문제를 그대로 두고도 씨움을 그쳤다고 해보아야 그건 일시적인 중지일 뿐이야요.
그래 둘이 맞붙은 이 싸움을 해결하고 인류의 앞길을 밝히기 위해서는 제삼의 뭣이 나와야하지 않을까 그러는 것인데, 여기 은교수의 ‘제삼의 지대가 밝아온다’하는 소리는 대단히 좋은 소리야요. 현실의 이 잘못된 여기 있으면서도 두 분의 L씨를 예로 들어서, 지극히 소수이고 작은 것이지만 이제 거기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한 것은 참 뜻이 있는 말이지요.
이론적으로 해서 미래의 꿈을 그려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보다도 적으면 적은대로 이렇게 두 L씨들 모양으로 실천을 해보는 게 더 좋아요.
이런 문제는 두고 두고 생각을 해보고 또 생각만 해보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훈련을 해가도록 해야 돼. 실천이 곧 훈련이야요.
이런 건 뭐 꼭 예수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1984. 4 .21 문책:한해수


친우회보 1987년 봄호(14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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