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7

믿음의 내면화 > 종교친우회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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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내면화



작성자 바보새 14-06-03 23:54 조회6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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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내면화

이 말씀은 해마다 갖는 ‘퀘이커 서울모임’ 및 ‘부산모임’이 갖는 하기 수양회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년 수양회는 1982년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부산모임’주최로 부산시 해운구 1072의 우2동 54에 소재한 ‘성공회 연수원’에서 있었고, 이 말씀은 1982년 7월 26일 오전9시에 하신 말씀입니다.(편집자주)


조용하게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갔나, 5분 됐을까, 10분 됐을까, 언제 끝날까 그런 생각이 자꾸 나요. 그러나 그런 생각을 아니해야 돼요. 그런 생각이 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꺾어버려야 돼. 시간이 얼마나 갔나 그런 생각을 하면 도대체 명상이 안되니까. 명상을 하는데 시간을 작정하고 한다는 것은 본래 우스운 일이지요. 5분 동안 합시다, 3분 동안 합시다, 하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지요. 명상을 참 잘하는 분들은 턱 바로 들어가면 모른대요. 옛날 석가는 명상에 들어가서, 그 앞으로 수레가 500 틀이나 지나갔는데도 몰랐다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또 몇 시간씩을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대요. 이런 것은 자기가 그런 경험이 있어야지, 남이 하는 걸 상상으로는 안돼요.
좌우간 명상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건 이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제목이 그런 것이니까 말할 것도 없는 거고…… ‘믿음의 내 면화’, 자세히 말하면 예수와의 내면적 일체란 말인데……
시간은 얼마간 하고 그건 내가 알려 드릴테니까 염려마시고.(한동안 전체가 명상 한다.)
나는 내 경험을 말한다면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지요. 내가 다녔던 학교가 예수교식대로 기도하고 성경 가르치고 그랬으니까 자연히 교회에 나가게 됐고, 그랬다가 뒤에 어느 정도 생각이 시작된 것은 나이 20이 넘어서, 우치무라 선생의 무교회에 가서야 그렇게 됐어요. 믿는다는 것은 이런 건가, 성경은 이렇게 보는 건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그 때에 가서야 된 것이지요.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려서부터 교회 나가고, 또 충실하다고까지야 할 수 없지만 허튼 장난이야 비교적 하지 않는 편이니까 그런대로 그렇게 왔지요. 그때까지도 아직 몰랐어. 또 무슨 의심도 각별히 이거다 하고 그렇게 난 것도 없고, 크게 의심이 나기 시작해야 깨침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때에는 어른들이 말하고 생각하던 제일 주되는 문제는 이제 나라가 망하게 됐다 하는 거였어요. 그러다가 세는 나이로 10살 때 나라 망했으니까 그 다음 학교 다닐 때는 그런 공기 속에서 보냈지요. 요새 비긴다면 그래도 그렇게 소란 안한 편이지요. 지금은 너무 이렇게 어지러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잖아요. 그때는 나라가 망했다 그래도, 워낙 살림이 요즘처럼 이런 복잡한 살림이 아니니까 다 그런 대로 그저 지났어요. 굉장히 들뜬다든지, 낙심을 한다든지 그러지도 않고 살았지요. 그건 왜 그랬던고 하면 내가 자랐던 데가 아주 시골이고 하니까 그랬어요. 서울 같았으면 아마 안 그랬을 거예요.

해방 후의 일은 여러분들도 다 경험했을 거예요. 해방 후에도 시골에선 그래도 비교적 괜찮았어요. 서울이란 데는 소란했어요. 지금 그러니까, 물론 시골에도 죄가 없는 거는 아니지만, 모든 잘못은 서울에 다 모여 있고, 또 세상의 뭐라 하는 것도 다 서울에 몰려 있고 그래요. 시골에 살다 보면 나라 망한다는 게 어느 의미로는 그리 큰일이 아니에요. 왜 그런고 하면 본래 시골 변자리란 데가 나라의 덕택을 입은 것도 아니고, 또 지독하게 원수같이 여긴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하니까. 그래 또 그런 것이 시골의 낮춰 사는 사람들의 좋은 점이 거기 있어요. 그런데 서울이라는 데는 어느 의미로는 나무의 맨 꼭대기라 그럴 수 있고, 또 제일 밑둥이라 그럴 수도 있고. 그러니까 문제가 난다면 거기에 늘 있잖아요. 좋은 것도 거기 다 모아놓고, 잘난 사람들도 다 거기 모여 있고, 또 잘산다는 것도 거기 가야 잘산다 그러고. 그러니 일단 일이 날 때는 그럴 수밖에.
바람이 불면 제일 흔들리는 게 윗가지야. 또 가지가 흔들리면 그 다음엔 밑둥이 걱정스러워져. 그러다가 마지막엔 거꾸러져. 살림이란 게 그런 것인데, 그 살림을 주장하는 게 정치니까 정치에 관계되는 사람,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수록 좋을 때는 끝까지 올라간 것 같아서 좋다 그러고, 떨어질 때는 아주 망했다 그러고. 밑의 살림이 좋은 거는 화나 복이나 간에 그렇게는 안 와. 도무지 안 오는 것은 아니지만 심히는 안 와요. 그래 낮은 살림 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낮으니까 낮으니 만큼 본래 근본에 가까워요. 근본에서 잘 떨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잘살자는 사람, 문명하자는 사람일수록 높이 올라가는 것이니까 같은 바람이라도 거기서는 더 많고, 흔들림도 더 많아요. 꺾어질 때는 거기가 크게 꺾어지는 것이고, 바닥살림 하는 사람은 나무의 뿌리에 있는 것과 한가지니까 문제가 없지요. 아무리 밑둥이라 그래도 바람이 아주 심히 불면 밑둥에서부터 꺾어지지만 뿌리는 꺾어지는 법이 없어요.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내면적 일체라는 것과 같이 볼 수 있어요. ‘내면적 일체’ 라 그러면 중요한 것은 ‘내면’ 이란 말이에요. 요점이 거기 있어요. 이건 옛날 사람들도 아는 이는 다 알았어요. 겉의 걸로 하면 지금은 아주 발달을 하고 옛날 사람들은 뒤떨어졌다 그러지만, 근본이 되는 데는 옛날에도 벌써 알 것은 알고 있었어. 지금이 아무리 발달을 했다고 그러지만 모르는데 있어서는 역시 지금도 모르고 있고.
세상에, 요새 사람들 가운데서 무식하기는 우리나라의 정치한다는 사람들보다 무식한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인생이 뭔지, 역사가 뭔지, 살아가는 것이 뭔지 하는 그런 방면에 대해서 도대체 무식하지 않고서야 누가 주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나서서 맡아 하겠다 그래요. 또 어디 맡아 하겠다고만 그래요? 막 빼앗는 거지. 그건 어느 의미로는 화(禍)에요. 화. 주지도 않는 것을 빼앗아 하자니 자연 남에게 못할 짓을 하게 돼. 그러노라면 남만 못살게 되는 게 아니라 자신까지도 망쳐버려. 그러니 그거 화가 아니고 뭐에요. 이런 데 있어서 이런 화를 입지 않는 사람은 일반 사람, 밑바닥에 있는 사람, 내가 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본래 내가 요샛말로 ‘민중’ 이라고 하는 거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오래에요.『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쓸 무렵인 데, 그때 마치니(Mazzini)를 읽고 나서 그랬어요. 이탈리아를 보면 그 나라가 찢어져 있다가 민족이 통일되어 근대국가가 된 것은 마치니의 덕이 크지요. 유럽에서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는 비교적 일찍 근대 국가가 됐지만, 로마가 멸망한 이후의 이탈리아는 형편이 없었단 말이야. 최근까지 서양 사람들은 이탈리아라면 도둑놈(robber)을 연상한다고 그래. 그리고 욕하느라고 이탈리아라고 그러면 토끼(rabbit)를 생각한다고 그래. 토끼는 다른 하는 것은 없고 새끼만 자꾸 치는 거야. 그래 이탈리아 놈들은 그렇다 그런다는 거야. 그래서 R자만 보면 robber, rabbit 생각만 한다는 거에요. 모욕이라도 아주 그런 모욕이 없지요.

그랬는데, 그러던 이탈리아가 그래도 하나의 이탈리아로 토대가 잡혔다면 그건 다 마치니의 덕택으로 그렇게 됐단 말이야. 우리 어릴 적에는 온통 나라가 어지러워서 형편없이 됐는데, 그때 우리도 이제 이탈리아를 본받아 나라를 바로 잡아보자 해서『이태리 건국 삼걸전』이란 책이 돌아다녔어. 삼걸이란 바로 마치니, 카부르, 가리발디 이렇게 삼걸 인데, 어릴 적에는 멋모르고 그랬지만 그 다음에 커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중에 제일 훌륭한 이가 마치니지요. 마치니는 철저한 민주주의자에요. 이탈리아를 정신적으로 그렇게까지 깨워놓고도 그 사람은 정치에 한 자리를 못했댔어. 뭐 그럴 욕심이 없었으니까 그랬겠지만, 하여간 오랫동안 영국에 가서 피해 있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의 표어가 ‘하나님과 민중(God and People)’이야. 중요한 것은 이 둘밖에 없다 그랬어.
우리나라는 이때껏 그저 남이 하면 하는 그대로, 서양에서 오면 오는 그대로만 따라해 왔어. 믿는 데 있어서도 그러다가, 그래 기독교 들어온 지 100년이 됐는데 그 동안 토착화됐느니 못됐느니 하다가, 이제 처음으로 우리 속에서 무슨 소리 나오기 시작했다면 ‘민중신학’이라는 소리에요 이 ‘민중신학’도 다 성경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제 앞으로 이것을 우리가 얼마나 발전을 시킬는지 아직 모르지만, 그래도 상당히 알려져서 유럽에 전파돼가지고 그쪽 신학계에서도 많이 토론이 되고 그러나 봐요. 그런데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애비 죽인 큰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저러고 있는데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그래 그 마치니가『청년 이탈리아』란 잡지를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옛날 로마의 역사를 가르치고 청년들을 교육하고 그랬어. 그 나라 아직도 한심하다면 한심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럼 민중이란 말이 현대인에만 있느냐 하면 그건 그렇지 않아. 옛날에도 생각을 옳게 하는 분들은 다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 지위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사람들이 근본이라는 그 말을 했어. 벌써 수천 년 전에 공자님도 그 말 했고, 맹자도 그렇게 했어. 공자도 그 말을 하긴 했지만 맹자가 그 말을 좀 더 발전시켜 분명히 하고 그랬어요. 내가 맹자를 좋아해서 읽어보고 중요하다, 이다음에 또 볼 필요가 있다 해서 빨간 줄을 쳐뒀었는데, 요새『중앙일보』에서 맹자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읽다가 새삼 발견한 거예요.
뭐냐 하면 맹자 말씀이 ‘민위귀’ (民爲貴)라고 했어. ‘민’이라고 하는 것은 ‘백성 민(民)’자로서, 그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 말이야. 지금은 ‘民’자로 쓰지만 옛날에는 로 썼어. 어미 모(母)자에다 한 획을 더한 글자야. 그러니까 어머니가 낳은 그대로 있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란 뜻이야. 임금이라면 ‘임금’이라기도 하고 ‘왕’이라고도 하지. 또 관리들은 ‘대부’ 라기도 하고 ‘신하’ 라고도 하지. 그런데 이건 뭐 갖다가 붙일 게 없어. 어떤 지위도 없고, 돈도 없고, 뭐 이렇다 할 이름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어머니가 낳은 사람’이라고 해서 글자도 이렇게 썼다는 거야.

그런데 옛날에는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사람을 계급을 뒤서 높고 낮고 구별을 뒀어요. 맨 위에 임금, 그다음 귀족, 그 다음엔 대부(大夫), 그 다음에 선비. 민이라 그러면 맨 아랫사람이다 그랬어. 사회가 그렇게 되고 보니 위에 있는 사람들은 보기를 ‘민’이란 사람으로도 안 봤어. 저것들은 그저 일이나 해주는 것들, 농사나 해서 먹을 것이나 해 바치고, 기술 있으면 그 기술대로 해다가 바치고 하는 자기들과는 아주 딴 사람 들로 생각하고 그러지 않았어? 그래 놓으니 밑에 있는 사람들도 스스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지 하고 자처했어. 공자님이『대학』이란 책에서 중용을 가지고 얘기했다고 그러지만, 그래도 그건 다 선비들보고 나라를 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다 하고 정치하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지, 일반 백성을 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에요. 그 책 안에 수신하는 얘기도 나오고 하지만 이것도 다 선비들에게 하는 소리지. 목적이 지금과는 달랐어요. 그러다가 차차 발달이 돼서 일반백성을 보고도 “저것도 사람이지, 가르쳐야 되지” 해서 초등교육이니 뭐니 하여 일반 서민교육이 시작된 것은 나폴레옹 때부터야. 나폴레옹은 나쁜 점도 많지만, 좋은 점도 있어요.『나폴레옹 법전』이라 해서 법전도 만들고 학자들을 시켜서 군인들이 쓰기 쉽고 가벼운 그릇을 만들라고 해서 나온 게 바로 알루미늄 그릇이고, 또 우리들이 잘 먹는 감자도 나폴레옹이 전해준 거예요.
얘기를 하다 보니, 다 잊었던 것인데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 감자를 어떻게 해서 먹게 되었나 하는 그 얘기, 감자를 일본 사람들은 장아이모 (じゃがいも)라 그러잖아요. 이 말은 자바 섬에서 왔다 그 말이야. 그래 자바이모가 장아이모로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마 그것도 본래 기원대로 하면 신대륙인지도 몰라요. 나폴레옹이 황제 노릇하면서 독재정치를 하고 그랬지만, 그 노릇도 백성이 있어야 할 수 있잖아요? 그러므로 이제 나라를 어떻게 하느냐 그 생각은 있었던 사람이지요. 그래 나폴레옹이 감자를 처음 보고서는 이놈을 보급을 시키면 양식이 되겠다 해서 보급을 시켜야겠는데, 어떻게 보급을 시키지 하고 생각하다가 사람들의 나쁜 점을 이용을 했어. 감자를 가져온 다음에 그걸 보고는 좋다 싶어서, 연회를 하겠다고 신하들을 다 모았어. 그리고는 그걸 잘 삶아서 그릇에 내다놓고는 참 좋은 거라 하면서, 자기만 먹고는 남들에게는 주지 않는단 말야. 그리고 자기 옆에 있는 아주 중요한 신하 딱 한 사람에게 만 그걸 주면서, 참 좋은 것이니 먹어보라 그랬어. 그러고 나서 그걸 궁성 안에다 재배를 하는데, 돌담을 쌓아놓고는 어느 놈이라도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했어. 신하에게도 종자로 딱 한 알 정도 주고 심어보라면서 “당신도 남을 주면 안돼. 참 귀한 것이니까 도둑놈이 못 들어오게 당신도 나처럼 돌담을 쌓고 재배해보라” 그랬단 말이야. 그랬는데 그 신 하의 친한 친구가 있다가는 “저렇게 귀한 것이라면” 친한 생각에 “나야 한 알쯤 가져가도 도둑질이 아니겠지” 하고는 슬쩍해갔어. 그리고 또 그놈의 친구가 그러고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귀한 것이라면 도둑질이라도 해서 가지려많아요. 그리고 어떤 좋은 것도 하라면 안해. 하던 지랄도 멍석 펴주면 안한다고 말이지. 나도 이 얘기가 어느 정도 사실인지 몰라. 학교 다닐 때 박물선생한테서 들은 얘기야. 아무튼 이렇게 해서 그것이 단시일에 좌악 퍼졌다는 거야. 유럽사람 감자 먹고 살았지, 감자 없었더라면 살았겠어요. 지금도 러시아사람들은 감자 먹고 살지, 다른 식량이 어디 있어요?
그건 그렇고 ‘민’ 이란 그렇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맹자가 수천 년 전에 그런 생각한 것은 놀라운 거에요. 민이 제일 귀하고 사직이 다음으로 귀하며 임금이 제일 가벼운 것이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그때 당시는 나라에서 귀한 것은 사직이었어. 누가 혁명을 해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면 제일 첫째로 하는 게 사직을 세우는 거였어. 사직이란 나라의 텃신을 사(社)라 그러고, 직(稷)이란 곡식 신을 말하는 것인데, 사직이란 이 두 신을 한곳에 모셔 세우는 것으로 큰 나무를 세워요. 우리나라에서도 지금까지 사직동, 사직골 하는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옛날에 사직을 세웠던 곳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에요. 내가 젊어서 유영모 선생님을 따라가서 구경하고 그럴 때도 팔도송(八道松)이란 게 있었어. 스물 대여섯 살 무렵이었지요.

그런데 왜 팔도송이라 그랬는가 하면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평안, 함경, 황해도 따위 팔도로 나눴어요. 그래 한도에 한 가지씩 배정을 해서 그 가지가 어느 만큼 성하나 하는 걸 봐서 그 도의 운세를 판단할 수 있다고 그랬어. 그 가지를 보면 그 도에서 농사가 잘 돼가는지, 사람 살기가 편안해졌는지 어떤지 안다고 그랬어. 그래 팔도송이라 그랬는데, 죽었는지 어쨌는지 지금은 없어졌어.
사직이란 이런 것인데 “사직을 지켜야 한다”느니 “사직이 없어졌다” 하면, 곧 나라라는 이름으로 통용이 됐지요. 그러나 본래는 나라의 텃신과 곡식신을 제사하는 것을 사직이라 그래요. 그러니 사직이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옛날 사람들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2,200년이나 전쯤에 맹자가 민이 제일 귀하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돼요. 더구나 그 시절, 사람이란 것을 뭐 인생같이 알지도 않고 마구 잡아다가 군인을 만들고 그랬던 그 전국시절, 장군이란 것들은 임금이 벼슬을 주니까 사람들을 마구 잡아다가 닭이나 개 몰듯 전쟁을 하고 그랬지요. 그러니 일반 씨들이야 뭐 애국심이고 뭐고가 있겠어요? 죽지 못해서 싸웠지. 그렇게 하고 공로는 또 저희들끼리 다 나뉘 먹어. 실제로 죽은 백성들에게는 뭐가 있어요?
그래 옛날사람 글에도 있잖아요? 당나라 사람 조송(曹松)의 글입니다. 전쟁을 하고 나니까 뭐 널편한 평야고 산골짜기고 따로 없어. 모두 전쟁터 다 됐지. 그래 택국강산입전도(澤國江山入戰圖), 산이고 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싸움마당 됐구나, 생민하계악초소(生民何計樂瞧蘇). 일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 뭐 풀 베러 갈 수도 없고 밭 갈러 갈 수도 없고
그리고 다음 구절이 많이 얘기하는 거야. 빙군막화봉후사(憑君莫話封侯事) 그대에게 말하지만 전쟁해서 장군 됐다 훈장 탔다 봉후 됐다 말하지 말게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장군 하나 되려면 뼈다귀가 만 개나 말라야 돼. 군인이 만 명이나 죽어야 된다 그 말이야. 그러니 옛적에도 이런걸 아니까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전쟁 반대 하고 그랬어. 그러나 생각이 별로 없는 것들이야 어디 그랬어요? 백성을 어디 대접이나 해요? 그러니 공자님께서도 가르치지도 않고 전쟁 시키는 것은 백성을 내다버리는 거다(不敎而戰 民之棄也)라고 그랬어. 그런데 요새는 또 가르쳐줬더니 잘못 배워가지고 제가 하겠다고 그래서 그게 또 걱정이야. 물론 장성이나 그러지, 그 아래에 있는 군인이야 졸병 노릇이나 하며 심부름이나 해주고 이용이나 실컷 당하지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러던 시대, 그 전국시대에 맹자가 민이 제일 귀하고, 사직도 그 다음이요, 임금이란 아주 가벼운 것이라고 한 그런 놀라운 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지금은 ‘임금’ 소리를 안해도 제일 높은 것은 임금이고, 지위라도 가진 사람은 큰집이라도 가지고 살아야 하고 아랫놈들은 굶주리면서도 나라를 위해 바쳐야한다 그러는데, 이때 이미 맹자가 그런 말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맹자의 생각에서 보면 누가 천자가 되느냐 그러면 그것은 바로 인심을 얻은 사람이 천자가 된다고 그랬어. 是故 得乎丘民 而爲天子, 得乎天子 爲諸侯, 得乎諸 爲大夫(시고 득호구민 이위천자, 득호천자 위제후, 득호제 위대부)라 그러므로 농사하는 사람들의 인심을 얻은 이가 천자가 되고, 천자의 눈에 잘 보인 자가 제후가 되며, 제후의 눈에 잘 보인자가 대부가 된다. 보통 천자라 그러면 하늘의 아들이라 그래서 아주 높은 사람 같지만 사실은 민심을 얻은 사람이 천자가 되는 것이고, 천자가 저놈 그래도 괜찮다 싶으면 그 사람은 또 제후가 되며, 제후의 눈에 또 좋게 든 사람이 대부, 요샛말로 하면 관리가 된다는 사실을 말한 거지요. 그러기에 그 다음 말이 뭔고 하니 제후가 危社稷則變置(위사직칙변치-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곧장 갈아치워라)하라 제후의 하는 일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뭔고 하니, 제후의 정치 가운데서 사직을 지키는 일 곧 나라의 텃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그걸 지키는 일이야. 나라의 신에 제사하는 일이니까 요즘 말로 한다면 아마 교회가 하는 일이라 그럴 수 있을 거예요. 하여간 이렇게 사(社)와 직(稷)의 신을 잘 섬겨서 짐승이 번식하고 곡식이 깨끗하게 잘 여물도록 해서 제사하고 하는 게 중요한 일인데, 제후가 그 노릇을 잘못하면 갈아치우라는 말이지요.

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탕(湯)임금이 걸(菜)을 치고, 무(武)왕이 주(衬)를 멸했다고 했는데, 신하로서 그럴 수 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맹자의 대답이 賊仁者 謂之賊, 賊義者 謂之殘, 殘賊之人 謂之一夫, 閲誅一夫封矣, 未聞試君也(적인자 위지적, 적의자 위지잔, 잔적지인 위지일부, 열주일부봉의, 미문시군야)라 어진 것을 해치는 것을 도적이라 그러고 옳은 것을 어지럽히는 것을 잔인하다고 한다, 도적과 잔인한 자를 한 지아비라 할 따름이며 듣기에 한 지아비에 지나지 않는 주를 벤 것이지, 임금을 죽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랬어. 이 말은 주가 아무리 천자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인물이 흉포해서 천자 자격이 없단 뜻이야. 그러니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게 아니라, 한 어리석고 잔인한 사람을 어진 사람이 벌을 주었을 뿐이란 소리에요. 그러니 천자도 이렇거늘 하물며 제후이겠어? 제후가 제후 노릇을 못하고 엉뚱한 짓을 하면 곧장 갈아치워 버리는 게 잘못이 아니란 소리에요.
사직이라 그러면 참 대단한 것으로 알고 그랬지만 맹자에게는 사직도 마찬가지야. 犧牲旣成 栥盛旣潔 祭祀以時, 然而旱乾水 益則變置社後(희생기성 자성기결 제사이시, 연이한건수 익칙변치사후)하라 희생에 쓸 제물이 이미 준비되어 있고, 신전에 바칠 피를 담을 그릇인 자성이 깨끗하여 때에 맞게 제사를 지내도 가물 들어 땅이 메마르고 홍수져서 범람하면 사직을 곧장 바꾸어라. 사직이란 것은 나라의 제사를 받아먹으니 나라를 돌보고 살펴서 나라 살림이 잘되게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제사나 받아먹고 천재지변이 그치지 아니하면 이미 그놈의 사직은 사직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이야. 그러니 갈아치우라는 것이지. 혁명하란 소리야.
이만하면, 그때 그 옛날에 이만하게 그랬으면 맹자의 그 사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래 옛날이나 지금이나 옳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바닥에 사는 사람들이 근본이라 그랬어요.
그건 그렇고 오늘 우리가 얘기하려는 데 있어서 근본 되는 얘기는 내면적 일체, 내면화라는 그 문제인데, 내면화니 뭐니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믿는데 있어서 어떻게 그 근본되는 자리에까지 가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것은 또 달리 말하면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말로도 할 수가 있어요. 성령에 관한 얘기는 성경의 여기저기에 참 많이 나와요. 오늘 아침에 노선생님이 말씀하신「로마서」같은 것도 물론 좋아요. 하여간 성령에 관한 그런 데를 보시려면「사도행전」19장에 있는 바울의 얘기 같은 것도 좋아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신도들에게 “당신들은 신도가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럴 때 그들의 대답이 성령에 관해서는 말조차 들은 일이 없다고 하니까, 그럼 세례는 받았느냐고 하니까 “요한은 죄를 회개한 사람들에게 그 표시로써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줬다고 그 러잖았어요. 그래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바울이 손을 그들에게 얹자 성령이 내려서 이상한 말 즉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그러잖아요. 그럼 이건 뭐냐? 우리가 예수님과 일체가 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 말이에요. 성령을 받아서 우리가 변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이제「로마서」12장에 있는 말씀, 이 말씀은 우리가 오늘 얘기의 마지막에 가서 결론으로 생각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서 12:1)
‘내면화’란 그 말은 결국 이걸 말하는 겁니다. 예수와 내가 내면적 일체가 되려고 한다면, 성경에 있는 말로 하면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고 비유로 말씀하신 걸 들으려면「누가복음」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가 그거에요. 물론 그건 개인적으로 사람이 죄를 범했다가 돌아오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이란 전체 따로 개인 따로 구별을 지어서 개인 혼자만 갈라서 생각하지 않아요. 전체를 다 두고 하는거야.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아들이 아버지보고 “아버지, 제게 줄 분깃을 주시오” 하고 말했잖아요. 아들이니까 으례 가산을 나누어 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에게 줄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나도 사람이니까 사람 노릇해보겠습니다” 하고, 아들이니까 받을 권리가 있는 줄을 알고 아주 당당히 달라고 그랬어. 그런데 옳으면서 틀려먹은 생각이야. 왜 그런고 하니, 우선 내가 내 노릇 해야지 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지만 그러나 내가 스스로 나서서 노력해서 내 노릇 해야지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면서도 잘못된 거야.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왜 하나님께서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지 하고 알려고 하는 생각은 좋은 생각이지 나쁜 생각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이걸 먹으면 선악을 알고 하나님과 같아질까봐 그랬다. 이걸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거다” 하는 것은 잘못이라 그럴 수 있어. 물론 우리가 가기는 하나님께로 가야지요. 그러니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것은 잘못이랄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거길 가고, 하나님과 같아지고 하는 데 있어 우리가 무슨 제가 제 노릇해서 그렇게 된다는 그건, 거기에 잘못이 있어요. 그걸 표시한 게 둘째아들이에요.
그래 그렇게 해서 나간 그 결과가 어찌 됐어? 잘살겠다고, 저는 제 노릇 하겠다고 나가서 실컷 했던 게 있던 것 다 털어먹고 말았잖아요. 그래 할 수 없어서 남의 돼지치는 것을 맡아 했다는 것 아니야. 이제 이걸 요샛말로 한다면 소위 현대의 정치란 것이 뭐냐? 남의 집 돼지 쳐주는 것 아니냐. 제가 했으면서도 제가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돼지란 것은 쳐서는 언제라도 잡아서 팔아먹으려면 팔아먹고 잡아먹으려면 잡아먹고 그러는 것인데, 이건 남의 돼지를 쳐준 것이니 실컷 쳐주고도 저는 그럴 수가 없어. 현대의 우리 살림이 그렇게 되지 않았나.
그러니 여기 비유에서 나도 내 노릇 해야겠으니 내 것을 주시오 해서 타가지고 나갔던 탕자의 모양이 본래 하나님에게서 받았던 자기 밑천 다 털어먹고는 살 수가 없으니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껍질이라도 먹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 살림이 꼭 그렇다는 거야. 그래 이 탕자가 그런 극점에 가서야 비로소 지난날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어땠었지 하는 인간의 새싹이 돋아나오는 거에요. 돌이켜서, 속으로 찾을 때, “그전 내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아버지 집에는 무한한 것이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하는 그런 회개하는 마음이 나가지고 “아들로서 자격이 없으니 그저 문간에 두는 종으로라도 있게 해달래야지” 해서 이제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리고 집에서 아버지 심부름을 잘하고 있던 맏아들은 하기는 하면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야. 나가서 다 털어먹어서 된 잘못이나, 집에 있으면서도 “나는 이게 뭐냐? 그저 아버지 심부름이나 하고 있지” 그러는 것이나, 비록 겉에 드러난 잘잘못은 서로 정반대되는 것 같지만 잘못 하긴 마찬가지. 그래 아버지가 동생을 맞아들이는 것에 불평을 품게 되는 거야.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은 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야. 일체가 되려면 내면화가 되어야 하는데 그걸 그렇게 알기가 어려워요. 우리 세상에 있는 얘기들, 잘못 알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다 그런 얘기들 아니오?
이런 것은 기독교에서만 그런가 하면 그건 그렇지가 않아. 공자의 ‘예의’도 따지고 보면 다 이거야요. 그래 군자는 근본을 힘쓴다(君子務本)고 그러잖아요? 근본이란 요샛말로 하면 밑뿌리, 뿌리야. 그럼 그 밑뿌리가 누구겠어? 그걸 생각해보면 누군 누구겠어. 바로 하나님이지. 하나님이 아닌 뿌리가 어디 있어? 그래 그걸 옛날에는 이걸로도 보고 저걸로도 보고 그랬는데, 좌우간 어떻게 봤든 우리 뿌리가 되는 걸 찾아야 돼.
요즘 한참 읽혔다던 책, 그『뿌리』라는 책도 보니까 거 놀랍던데. 그 사람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던데. 그 사람들은 글자도 없고, 우리나라는 그래도 글자라도 있는 민족이지만, 여기 있는 것 거기도 있고, 또 생각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야. 그 사람들, 아프리카에서 붙들려 와서 몇 대를 두고 내려오면서 종살이를 하고 그랬지만, 그래도 나도 난데가 있을 게 아니냐 해서 몇 해를 두고 연구를 해서 가봤다는 거. 그것도 찾아서 돌아가는 데는 마찬가지, 뿌리 되는 곳이야. 그런데 그 자릴 찾아간다는 게 그렇게도 어려워요. 제딴에는 잘한다고 하는 노릇이 헤매어 나왔어요.
이것 말고도 훌륭한 글이 있어요. 옛날 당나라 때 났던 훌륭한 중이 에요. 한산(寒山)이라는 중인데 사람이 나기는 참 훌륭하게 났어. 그런데 이 사람이 겉의 살림 그런 것은 뭐 그리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잘난 척도 안하고 절간에 가서 그저 불이나 때주고 그러니 사람들 모두 바보로 알고 그랬어. 또 사람들이 그러면 그냥 바보인 척 그랬어. 그러면서 혼자서 자꾸 생각을 했어. 그러다가 속에서 솟아나는 뭐가 있으면 길을 가다가도 글을 지어서는 바위에도 쓰고 나뭇가지에도 써서 붙이고 뭐 차곡차곡 모아두는 법이 없어. 그래 다 없어지고 그랬는데,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주워 모아『한산시집』이란 것이 전해 내려와요. 일본 사람들이 그를 좋아해서 번역을 하고 그랬는데,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이 나왔는데, 보니까 아마 일본 번역을 보고 번역한 것 같아요.
지금 얘기하려고 하는 시도 결국 우리가 뿌리를 찾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나무가 있는데 숲보다 앞서서 났더라(有樹先林生 유수선림생). 숲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것보다 굉장히 쑥 자란 나무가 있더라. 만일 우리가 이걸 사람에 비겨본다면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이 말과 꼭 맞아요. 숲에서 숲보다 먼저 난 나무처럼 사람들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난 사람들이 있더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에요. 나이를 계산해보니 일배가 넘어 (計年逾一倍 계년유일배). 사람으로 치면 한 100년 산다면 이이는 100년도 더 넘어. 그러니 언제 났는지도 몰라. 영원 전에 나신 그런 분이야. 뿌리는 능곡의 변을 만났더라(根遭陵谷變 근조릉곡변). 비가 와서 등성이가 패어 골짜기로 되기도 하고 그랬어. 가지에 붙은 잎은 바람과 서리를 입어서 이미 다 달라졌어(葉被風霜改 엽피풍상개). 나무가 여러 천년 살면서 바람 맞지 비를 맞지, 그러다 보니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찢어지고, 꼴이 영 말이 아니야. 말하자면 별별 가지 다 겪었어. 이걸 생각해보면 사람의 일생, 혹은 인간의 역사가 오늘까지 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변동이 있었다고 하는 거, 나긴 참 훌륭히 잘난 나무인데 이제 겉이 다 상처가 났어. 바깥에 드러난 떨어지고 부러지고 한 것을 보고 조롱하며 웃을 뿐이야(咸笑外调零 함소외조령) 나이 늙으면 사람들도 다 이 꼴이 돼. 지식이 있다 해도 그것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이 돼. 한민족도 옛날에는 훌륭하다고 했지만 역사가 내려오는 동안에 꼴이 말이 아니게 됐어. 겉에 드러난 형편없는 꼴을 보고는 웃기만 할뿐 속에 있는 문채를 사랑할 줄은 몰라(不憐內紋彩 불련내문채). 겉으로 보기에는 가지 다 부러지고 잎도 다 떨어지고 볼 것도 없고 그렇지만, 그 속을 보면, 켜보면 그 속에 나뭇결이 아주 훌륭해. 사람들이 그걸 아낄 줄은 도대체 몰라. 겉만 보고는 하는 소리가 그 나무 덩치만 덩그렇게 컸지, 벼락맞아 다 못쓰게 됐구나 하고 흉만 보지 그 속에 문채가 있는 줄은 몰라. 이건 물론 사람을 두고 보면 개인으로 보면 일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거에요. 한민족의 역사도 그렇고. 겉의 가죽과 살은 다 떨어져 나가고(皮膚脫落盡 피부탈락진) 속에는 오직 진실한 그것만 있다(唯有眞實存 유유진실존). 이 시는 결국 이걸 말하려고 한 거야. 피부는 탈락진이나 유유진실존이라. 나무는 큰 나무인데 걸의 훌륭하던 잎사귀나 꽃은 이제 다 떨어져나가 고요 속에 있는 고갱이, 속에 있는 진실 그것만 남았어. 그러니까 안을 못보고 사람들은 겉의 것만 보고 웃으면서 속의 것은 모르는구나. 이건 물론 속에 있는 무늬라는 걸 비유해서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걸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 믿는 살림도 그런 것 아닌가.

이런 걸 골라보려면 많아요.「사도행전」17장에도 보면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하는 유명한 연설 가운데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온 그분에 관해서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는 사시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 부족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세계 온 인류를 만드셔서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해주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찾아 더듬어서 당신을 만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그레샤 시인마저도 “우리 또한 그분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의 기술과 재간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낸 우상에 비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3~29)
이것도 같은 뜻에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내면화에 대한 얘길 하려면 사람에게는 습관성이란 것이 있다는 걸 알아야 돼. 습관성, 말하자면 버릇인데 그거는 생명의 신비지요. 왜 그런가는 알 수 없고,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짐승에게도 있어요. 이건 생명의 법칙의 하나예요.
심리학자들이 개를 가지고 한 실험으로 그걸 잘 표현해 주잖아요 개란 놈에게 종을 치면서 먹이를 줘 버릇을 하면 나중에는 먹이도 없이 종소리를 울리면 그래도 침을 흘린대요. 그건 버릇이 돼서 그런 것인데 이 버릇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습관, 습관이 있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나쁜 점이 또 있어요. 우리가 ‘내면화’ 소리도 그래서 나오는 거에요. 버릇이 돼서 하는 것 그것은 밖이에요. 안이 아니에요. 그래서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이것의 좋은 점은 한두 번 해보면 그담에는 자연히 내가 머리를 쓰지 않아도 그걸 해낼 수가 있어. 그러니까 퍽 경제적이지요. 사람이 발달할 수가 있었던 것도 이것이 있었으니까 됐지, 없었으면 안 됐을 거야. 가령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우리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습관성이 없었다면 안될거에요. 아마 지금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이것을 가르칠 것인데, 그게 습관적으로 기억되지 않고 그게 필요할 때마다 아르키메데스처럼 연구해야만 된다면 아마 아무것도 못하고 말거에요. 아르키메데스가 그걸 찾아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어요. 임금의 명령으로 왕관을 만들었는데, 그 왕관에 든 금이 임금이 내려준 그대로인지 아니면 다른 잡것을 섞어서 무게만 같게 만들고 나머지는 어쨌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참 어렵단 말이야. 녹여서 알아내라면 쉽지만 그럴 수는 없고. 그래 고민하는데 목욕탕에 목욕하러 들어갔다가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왜 그렇지 하다가 마침내 발견한 것이 아르키메데스 의 원리라 그러잖아요. 비중의 법칙, 모든 물체는 그 물체만이 갖는 고유한 비중이 있다. 그래 그걸 알아내고는 너무도 기뻐서 옷도 입지 않은 채 왕궁으로 달려가면서 “발견했다! 발견했다!” 하고 외쳤다잖아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지만 말고 진리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하는 걸 알아야 돼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이걸 모르고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 가령 큰 다리를 놓는다고 하더라도 이걸 알아야만 공사를 할 수가 있어. 그런데 이걸 우리더러 연구해서 다리를 놓아라 그러면 다리는 고사하고 이것 알아내려고 하다가 세월이 다 가버리고 말거야. 그 사람은 그래도 천재니까 그랬지 우리 보통 사람들로서야 연구하다가, 찾아내지도 못하고 그만 늙어죽고 말거야. 그래 이런 것인데도 우리가 학교에 가서 그걸 한번 배우면, 그게 어느 만큼 귀한 것인지도 모른 채 우리의 버릇에 의해서 내것이 되고 말잖아요. 그래서『논어』첫머리에 배우고 익히면 참 좋잖아(學而時習之 不亦悅乎) 그랬어. 이거는 글을 따라 외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거야. 좋은 글을 배워서 외어보려고 할 때, 가령 유수선림생 계년유일배(有樹先林生 計年逾一倍)라 그러면 내가 여기 이렇게 척척 써놓으니 “야 잘 쓴다” 그럴는지 모르지만, 이걸 외려고 내가 몇 번이나 애썼는지는 모를 거예요.
습관이란 이런 것인데 이게 처음 버릇이 붙을 때는 몇 번 하면 곧잘 버릇이 되지만, 어쩌다가 한번 든 버릇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방해물이 될 때 그걸 나가게 하려면 그게 또 그렇게 잘 나가지지 않아.
우리가 종교생활 하는 데도 그래요. 믿는다는 것도 몇 번을 하고 나면 그만 이젠 버릇이 돼버려. 내 귀로도 들은 소리지만, 김활란 박사가 살아계실 적에 예배시간에도 출석을 불렀다는 거야. 그것도 그이는 생각이 있어서 한 거야. 뭔고 하니 학생들이 학문은 하겠다고 그러지만 예배를 보자면 싫어하거든. 그래 학생들이 예배시간에 수선거리고 빠지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야. 그래서 김박사가 학생들에게 예배보는 습관을 길러주려고 그랬다는 거야. 그래 이건 좋긴 좋은데 또 거기에 문제가 있잖아요. 믿음이 습관이 돼서는 안돼. 옛날 초기에는 교회에서 출석을 불렀어요. 아마 서양 목사들이 “아직도 잘 모르는 민족이니까 가르쳐야지”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냥 습관화되어서 주일날 예배당에 나가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러지만 속으로 만 생각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해야 그건 잘못이야. 습관화돼서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은 고마운데, 그저 멍하니 앉아 있어 “저 사람도 믿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생활한다면 교회 열심히 나가니 우선 겉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건 차라리 안 나오기만 못해요. 차라리 싫으면 싫다고 한다면 목사님들이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이라도 하겠는데, 그 사람들 데리고 무슨 일을 하겠나. 이런 뜻을 깊이 생각을 하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게 아니다” 하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해가 될 거예요. 믿는 내 마음이 자나깨나 예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 마음으로 해서 구원을 얻지, 교회에 나오는 그 습관적인 행동으로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거에요. 뭐 교회 나오는 걸로 한다면 “누구보다 빠지지 않고 나왔습니다. 또 헌금도 했습니다. 목사님 심방 다닐 때 누구보다 잘 대접했습니다” 하면서 속으로 딴 생각 하고 있으면 결국 잘못이 생기잖아요.
내면화란 소리가 나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래서 나온 거에요. 신앙이라 그러면 그건 벌써 정신적인 것이지 행동이 아니에요. 무슨 돈을 낸다든지, 뭘 줬다든지, 뭐 절을 한다든지 그러면 이건 이 육체로 하는 걸 말하는데, 그걸 해야 한다고 하면 그건 또 잘하지. 하지만 그것도 습관이 돼서 돼. 그러니까 행동으로만 돼, 행동이란 내 마음과 유리돼서도 곧잘 해낼 수 있어.

언행일치라고 그러는데 언행이야말로 일치되기가 어려워요. 이제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중국의 손문(孫文)이라는 사람. 중국의 오늘이 저렇게 혁명하고 저런 것이 다 손문에게서 나온 거잖아요? 이 사람은 배우기는 의사 노릇을 배운 사람인데 의사 노릇보다도 어떻게 하면 이 뒤떨어진 중국을 고쳐보느냐 하는 데 힘을 많이 쓴 사람이야. 이 사람의 말 가운데 중요한 게 행하기는 쉽고 알기는 어렵다(行易知難 행이지난)는 말이야. 우리가 보통 말로 하면 알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다(知易行難 지역행난) 하고 하는데, 이 사람은 이 말을 뒤집었어. 그래 실례를 들어서 두부를 만들어먹는 얘기를 했어. 인류가 두부를 만들어먹을 줄 알게 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이야. 몇천 년이 됐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 이치는 아무나 잘 몰라요. 처음에는 아무도 그 이치를 몰랐을 것이고, 요즘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처음엔 우연히 그랬을 거에요. 콩을 삶아 놓으니 시어버리기도 해서 갈아먹었더니 그런대로 또 괜찮아. 그래 차차 지내오면서 두부가 나왔겠는데, 단백질이 어떻게 어떻고 하는 것은 모르면서도 두부는 곧 잘 해먹잖아요. 그래 행이지난(行易知難)이라 그랬어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그렇잖아요. 살아가기는 옛날부터 잘 알고 그렇지만 그 이치를 알고 하게 돼야 정말 할 수 있고 발달도 할 수 있고 그래. 우리가 모르고도 할 수 있지만, 법칙을 알고 해야 바로 될 수 있다. 그러니 혁명을 하려거든 혁명의식, 그 이치를 가르쳐줘야하지 그랬어요. 참 놀라운 사람이에요. 그저 한자리 해먹으려는 욕심만 있는 사람에게는 무식한 놈이 더 좋을는지 몰라요.
우리나라 군대를 보면 군대 간 다음에는 공부한 것을 잊어버려야 돼요. 대학생이 군에 간다면 “이 새끼 너 대학 졸업했다고 해서 우리 다 깔보고 있지” 하면서 때린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냥은 때릴 수 없고, 또 이치로 한다면 맞지 않을 테니까 될수록은 이치에 안 맞는 것을 하라고 해가지고는 그걸 거역하면 그대로 때린다고 해요. 그래서 무조건 복종하게 돼야 이제 됐다 그런단 말이야. 그것도 다 일본 사람들한테 배운거에요. 그러니 처음의 그때를 못 벗어서 “몽구라시”(モンクナツ:文句無, 이유 없다) 하면서 때려요. 해도 번역이라도 해서 그러면 그나마 좋겠는데, 번역도 안하고 그대로 쓰잖아요. 또 그냥 쓰는 말이 있잖아요. 자동차를 “싹 꺾어라” 할 때 “잇빠이 꺾어라” 그러잖아요.
“한껏”이라든지 “힘껏” 하면 될 것을 그저 “잇빠이, 잇빠이” 그러잖아요. 그러니 이거 정신이 없는 민족 아니오?
얘기가 딴 얘기로 갔습니다만, 행이지난(行易知難)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알기를 바로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고도 모방이야 할 수 있지만, 참말로는 못한다” 그 말이에요. 그래 자기가 알지 못하니까 “뭣을 하더라” 또는 “뭣을 한다”가 아니고 “뭣을 하더란다” “뭣을 한다더라” 하잖아요. 무슨 일을 하면 “천당 간다더라” 하는 꼴이니까, 연보만 잘 내면 꾸벅꾸벅 졸아도 다 되는 줄 알아.
물론 무조건 하는 것도 좋아요. 안하는 것보다는 좋아요. 좋긴 좋지만 또 그것 때문에 잘못되는 점이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좀 깊이 생각했더라면 좀 달라졌을 거에요. 그저 “한다더라. 세상에 그렇게 하는 게 좋다더라” 해요. 그러니 좋아서 하는 것이지 옳아서 하는 것은 아니야. 믿는다는 것은 그 믿는 것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좋다거나 복 받는다 해서 믿는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는 아직도 어떻게 하면 상을 받는다라는 그런 정도를 초월하지 못했어.

그럼 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복이 있다. 복이 있다” 그랬습니까 할는지 모르지만 그걸 주의해서 보면 그건 뭐 세상에서 그리 신통한 복은 아니에요. 뭐, 세상에서 ‘가난한 자’ ‘주린 자’ ‘목마르고’ ‘애통하는’ 게 어디 복이겠어요? 세상에서 복이라 그러면 그저 맨날 허허허 웃고, 세상이 이런 거다 하며 장단을 치는 것, 그런 것이 복이지.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과는 정반대로 복을 말했어요. 세상에서는 웃고 즐기는 게 복인 줄 알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이다 그랬어요. 물론 그런 면도 있긴 하지요. 선한 사람에 비를 주듯 악인의 밭에도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이렇게 알아가지고는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리에는 갈 수가 없어요. 그래 예수님은 그런 것을 가르쳐주자는 뜻이었어요. 이제 십자가의 공로로 내가 구원 얻는다고 할 때, 그게 어째서 그런 것인가 하는 참 이치를 알아야 하겠는데 모르고 그냥 말로만 그러는 수가 많아요. 또 가르쳐달라면 그건 뭐 말하기 어려운 거지 하면서 목사님들이 피하는 수도 있어요. 우치무라 선생님도 그런 면은 있어요. 선생님도 어느 면에서 감정이 퍽 강하고 그런 분이니까. 하긴 또 그것이 이치로 다 설명이 되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러니까 비약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치로 되는 게 아니다 하는 걸 강조해놓으면 나중에 문제가 날 때는 감당해내기 어려워요. 그래 결국은 ‘속죄표’ 속여 팔아먹게까지 되는 거에요. 루터가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라 신앙만으로 된다” 그러면서 ‘만’자를 강조한 것은 그런 마음을 깨우자고 해서 그랬던 거에요.
사람이 “좋다” 싶어서 그걸 늘 해오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이미 껍데기가 돼버려요. 그래 ‘내면화’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거에요. 습관은 본래는 죄라고까진 할 수 없을는지는 몰라도 별 생각도 없이 습관적으로 되면, 믿기를 어디 나만 믿나, 애들도 있는데. 애들은 어릴 땐 무심코 따라오지요, 그러나 좀 자라서 뭘 좀 알게 되면 반발을 해요. 습관화된 신앙에 대한 반발은 지식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 심해져요. 뭐 온순해서 어른들 말에 고분고분한 애들은 안 그렇겠지만,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데는 고분고분만 해서 되냐 하면 안 그래요. 그래서 안다는 게 중요한데, 안다는 것은 ‘내면’이지 껍데기가 아니야. 겉에 나타나는, 돼가는, 이렇게 하는 일이 아니야. 내면적 일체라는 말은 겉으로 일체해도 소용없단 뜻이야.
겉으로 본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 그러는 것은 그렇지요. 그리고 겉으로는 해방이후 교회도 늘고 신도도 늘어서 “다른 종교는 문제도 안된다” 하리만큼 커졌는데, 이게 다 사회적으로 반드시 좋은 이익을 끼치고 있냐 하면 그렇지 못한 점이 많이 있어요. 습관이 생명의 본래의 생명 되기 위한 것이지만, 이것이 겉껍데기로 기울기가 참 쉬워요. 그래서 해방 이후 우리 교회에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서 생각이 깊은 사람들에게서 이거 교회에 무슨 개혁이 있어야 하겠는데 하는 말이 나오게 된 거에요.
습관성이란 거, 이건 생명이 생명 되기 위해서 본래부터 있는 거야. 한데 문제는 어디 있느냐 하면 생명이 어떤 걸 몇 번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되는 그런 것이 없으면 생명이 생명으로 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럼 이렇게 되면 그게 곧 생명이 되느냐 하면 그렇게는 또 안돼. 한번 습관화되고 나면 그담에는 또 그걸로 인해서 반드시 폐단이 오는 게 있어. 그러니까 기독교, 우리 피차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놓고 봐도 다분히 이것이 굳어져서, 하나의 형식화해서 속에 산 생명이 살아 있지 못해. 그런 점들이 교계가 오늘날 이렇게 잘못돼가는 원인들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 퀘이커들이 침묵을 자꾸 강조하는 거는 그 때문이에요. 될수록은 형식을 없애고 이미 제도란 게 있으면, 목사란 직이 있고 장로란 직이 있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목사 노릇 하나의 노릇이지, 목사 노릇 을 하고 그러다 보면 이제 굳어져요. ‘목사 노릇은 이러는 거다’하게 되면 벌써 내부, 속과 밖이 달라지게 돼. 하나라도 달라지게 되면 어느 날 가서는 그 밖에 있는 것들을 크게 해를 입히고 만단 말이야.
이건 기독교만이 아니고 모든 종교의 역사가 다 증명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유교적인 그 풍이 아직도 남아있어. 가령 관혼상제 (冠婚喪祭) 같은 거. 이제 관(冠)은 없어졌지만, 옛날엔 나이 열 다섯이 되면 장가를 갔거나 어쨌거나간에 이제 어른이고 대장부이니까 너도 하나의 사나이로서 책임을 해야 된다 해서 성관례(成冠禮)를 했어요. 그리고 혼(婚)은 결혼하는 것, 상(喪)은 부모 죽은 뒤 장례 지내는 것, 제(祭) 는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게 다 뜻이 그 속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뜻은 소용도 없어지고,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졌어. 그러니 가다가는 심지어 정치권을 발동해가지고 상제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한다든지 입지 말아야 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걸 기독교와 관계된 것을 가지고 말해본다면 기독교는 종교인데, 종교라면 종교대로 알아서 할 것이지, 그런데도 국가에서 무슨 간섭을 해요. 그럼 이게 왜 이렇게 됐냐 하면 다른 게 아니고 믿음이 하나의 형식화되고 습관화돼서 그래요. 믿음이, 믿는 일이 참 내 마음에서 내 영혼이 살고 죽는 일이 돼서 믿을 때는 국가에서 무슨 간섭을 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설사 간섭을 한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 순교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거에요. 믿는 일이 참으로 살아 있는 때는 이 몸이 죽으면서까지도 믿으려고 할 때야. 그래야 산 신앙이 돼. 그러니 어면 면에서 본다면 신교의 자유를 허락해놓으니까 믿는 일에 잘못이 되기 시작해요. 기독교가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콘스 탄틴 대제 때부터야. 처음 기독교를 못 믿게 해서 자꾸 핍박을 할 때는 탄압을 뚫고 나가려니까 죽음도 안 두려워하는 생생한 믿음이 있었는데, 이젠 맘대로 믿어도 좋다 그래 놓으니까 잘못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까 정치로서는 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는 대신에 나중에는 종교를 문제 속으로 잡아넣고 만 꼴이 돼버렸어. 그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야.

한 10년 전입니다만, 춘천에 가서 얘기를 할 땐데, 젊은 학생들이 뭐 선생님 지금 우리 정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해서 묻고 대답하다가 나오게 된 말인데, 그때 난 그랬어요. 국가 있고야 종교 있지 않습니까 하는 그런 따위 기독교 난 안 믿는다. 그런 소리가 다 어디 있을 수 있나. 국가야말로 종교가 있은 뒤에 있는 것이지 그랬어요. 그런데 이런 점에 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분들이 있어요. 국가라는 게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양심을 사랑하는 사람은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이 몸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야. 왠고 하니 사람이란 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거니까. 어디까지나 우리들 정신에 있는 것이니까. 사람이란 동물들 가운데서 물건의 지경에서 초월하여 정신의 살림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다운 데에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야 일어서는 게 좀 다르고, 털이 좀 빠져서 없고, 옷이란 걸 입었을 뿐이지 다른 점에서는 다를 게 없어. 먹는 거, 자는 거, 새끼치는 거 따위는 다른 짐승들과 다 같이 하니까, 별다른 게 없어. 하지만 사람이 사람다운 점은 속에 뭘 좀 알아가지고, 손문의 말대로 ‘행이지난’ ―행하는 건 쉽고 아는 게 어렵다고 을 알게 된 점에 있는 거에요.
그래 생명이 중요하지만 생명이 하나의 습관적인 행동으로 돼버리면 안 돼. 종교는 더구나 그래서는 안 돼. 그러니까 이제 ‘내면’ 이라고 그래. 그런 점에서 말하면 예수님은 참 크게 깨우침을 주신 거야. “하늘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 하신 말씀은 바로 이걸 가르치시기 위한 말씀이야.
보세요. 오늘날 유대인들의 하는 걸. 나는 물론 개인적으로는 유대 민족을 미워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들을 한 번 보세요.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해를 하고 그러잖아요?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야. 다른 분들도 그건 그럴 겁니다만, 난 아주 그건 싫은 사람이에요. 뭐 그건 그렇고, 이스라엘 민족 그 사람들 아직도 못 고치고 있는 게 있잖아요? 세계에서 자기들이 제일 우수한 백성들이다 해서 모든 걸 자기들 식으로만 하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미국에를 가보니 만나는 교포들 얘기로는 유대 민족들 아주 대단하대요. 유대 여자가 다른 민족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 때는 그 남자가 반드시 유대식으로 개종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야 한다는 거에요. 할례를 받고, 성을 유대식으로 고치고. 시집가서도 다른 민족이 되는 법이 없다고 그래요.
그래 이건 왜 그런고 하니 유대 민족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는 하나님의 뺀 백성이다” 하는 생각에서 나오게 된 것들이에요. 하나님의 뺀 백성이란 것, 그건 좋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뺐다고 할 때 어디 그런 의미로 그러셨나요? 그런데 그 말의 의미는 생각지 않고, 그냥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또 손자에게 하는 식으로 말만 전해 줬어. 이렇게 되지만 않았던들, 그 말의 속뜻을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던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렇게 나쁜 죄는 짓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래 바울이 그걸, 그 말을 타파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어요? “너희는 하나님의 뺀 백성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지 말아라” 그랬어. 그러니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났다는 게 뭐 그리 대견스러운 거 아니다. 그것보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떻게 해서 됐느냐 하는 그걸 내 속에서 아는 것이 중요하지, 그 자손으로 났다는 게 뭐 그리 큰 자랑거리냐 그 말이야.
그래 마음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란 말이에요. 할례란 것은 하나의 약속의 표적이야. 처음 하나님이 유대 민족,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면서 주신 표적인데, 이게 내려오면서 약속으로서의 의미, 또 약속하는 그 약속의 뜻은 잊어먹고 그 할례하는 일만 남았어. 그래 그걸 했느냐 안했느냐로 인종차별을 해서 그걸 받지 않은 남자는 모조리 죽여 버려라 그러기도 했어. 심지어는 전쟁이 났을 때 상대방에게 너희가 만약 할례를 받는다면 우리는 이유 없이 친하겠다 하고 약속을 해 놓고는 그들이 할례를 받고 미처 아물기도 전에 가장 아플 때인 사흘 만에 습격을 해가지고 다 죽이고 그래요. 그래 악독해도 세상에 이런 악독한 일이 어디 있어요? 이건 성경에 있기도 한일이지만, 성경이야 물론 하나님에게서 나왔지만 성경에도 순리대로 된 것만 아니라 나쁘게 된 것도 있어요. 진리야 참 좋은 진리인데, 그걸 악용하면 이렇게 나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악용하면 이렇게 역사를 그르칠 수도 있다 하는 단적인 실례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뺀다고 그러고, 그 약속으로 할례를 받으라 한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한 것이에요. 그것이 결코 너만이 높은 백성이고, 내가 너만을 특별히 사랑하겠다고 다른 것들은 다 짐승으로 여기겠다 그런 뜻은 절대 아니에요. 사람으로서야 블레셋 민족이나 유대 민족이나 하나님이 다 똑같은 인간으로 냈지, 어느 하나를 보고 너는 죽어도 좋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건, 그들을 특별히 뺀 것은 산 그들을 통해서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빼고 한 것인데, 그걸 잘못 알아가지고 그냥 자자손손 반드시 전해주라면서도, 그 속뜻은 전해주지 못하고 말았어. 그래 지금도 유대 사람들을 보고 물으면 자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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