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990년대 중후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1990년대 중후반 세계화와 과거사 그리고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1990년대 중후반 세계화와 과거사 그리고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Globalization, Past History in the Mid to Late 1990s and Hong Se-hwa’s " I’m a Taxi Driver in Paris "
탐라문화

2024, vol., no.75, 통권 75호 pp. 237-271 (35 pages)

DOI : 10.35221/tamla.2024..75.007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연구분야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 국문학
이행선 /LEE, HAENG-SEON 1
1국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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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한국에 출간되었다. 1990년대 중반은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과 WTO 가입 등으로 한국이 세계 경제질서에 깊이 편입하며 세계화를 지향하는 한편, 전후 50년의 전후란 말이 함의하듯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개된 한⋅일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일본 유력인사의 망언으로 인해 반일감정이 강하게 발동했던 시기였다. 세계화 추진과 과거사 극복을 동시대적으로 진행하는 한국은 어떤 나라이며 국민인가. 세계화를 위해 국제적 표준에 비추어 한국의 위치와 성격에 대한 점검이 요청되고 보다 나은 나라를 위한 국민의식과 문화의 발전이 요청되었다. 당시는 정치적 민주화를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극복해야 하는 군부독재의 유산도 있었다. 

이처럼 세계인식과 자기인식이 동시에 요청되는 국면에 홍세화가 경제⋅문화적으로 선진국인 프랑스, 똘레랑스와 함께 갑작스럽게 한국에 현현했다. 한국사회는 홍세화와 프랑스를 매개로 자국의 문화를 일부 상대화하고 똘레랑 스의 정신을 알게 되었다. 또한 홍세화의 자기변호의 자기서사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한국사회에 재인식하게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책의 베스트셀러화와 함께 새로운 진보적 지식인의 탄생과 출현을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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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221/tamla.2024..75.007
1990년대 중후반 세계화와 과거사 그리고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이 행 선*27)
Ⅰ. 들어가며: 1995년 무렵의 한국
Ⅱ.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출간과 한국 그리고 프랑스
Ⅲ. 베스트셀러의 영향과 진보적 지식인의 탄생 
Ⅳ. 나가며 


Ⅰ. 들어가며: 1995년 무렵의 한국

1994년 11월 17일 오스트레일리아 방문 중이던 김영삼 대통령이 수행기 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앞으로 정부의 국정 목표를 세계화에 두겠다는 ‘세계화 장기구상’을 밝혔다. )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중심국가를 이루기 위한 발전 전 략은 모든 부문의 세계화”라고 강조하고 앞으로의 정국 운영이 세계화를 기본 이념으로 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재확인했다. 21세기 세계화시대라는 혁명적 변화에 대응하는 생존전략은, 바로 ‘세계화’라는 것이다. 정부는 21세기 세계 화시대의 국가목표는 통일된 세계중심국가라고 선언했다. 대외적으로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되어 가보고 싶고, 투자하고 싶고, 살아보고 싶은, 모두가 동경 하는 나라가 되고 대내적으로 국민 개개인이 풍요롭고 편안한 부민안국(富民安國)의 나라를 목표로 하는 게 청사진이었다. 국제화는 국가가 중심이 되어 교류를 확대하는 주로 경제에서의 변화를 뜻하고, 세계화는 국가뿐 아니라 지방 간⋅기업 간⋅국민 간의 교류로 모든 부문이 세계 제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김 대통령은 이러한 세계화 추진의 각론이랄 수 있는 구체 전략으로 서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교육개혁 △법질서, 경제질서의 세계화 △정치와 언론의 세계화 △행정과 지방의 세계화 △환경의 세계화 △문화와 의식의 세 계화 등을 들었다. 한국 전통문화의 가치를 세계문화와 접목시키는 노력과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과 윤리를 갖는 개방적⋅합리적인 의식의 필요성도 제 시했다. 김 대통령은 세계화에 담긴 의미를 일류화⋅합리화⋅일체화⋅한국화 ⋅인류화라고 밝혔다. 세계화는 “옛 껍질을 깨고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결단 이며 차세대를 위한 개혁이라고 밝히면서, 모든 역량을 세계화에 결집시켜 나가자고 호소했다. ) 실제로 김영삼 정부는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추진해 1994년 타결했고 1995년 WTO 회원국으로 가입했으며 1996년 OECD에 가입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냉전체 제의 와해에 따른 냉전 질서의 붕괴로 인해 경제의 세계화  )와 1994년 1월 유럽연합 출범 등 세계 각 지역에서의 지역경제 통합 경향이 강화되는 새로운 질서를 맞이해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기 위한 움직임으로써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이 이루어지고 세계화가 당대 한국의 국가 목표로까지 승격되어 논의되는 상황일 때, 1995년 3월 홍세화(1947∼)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 사가 출간되었다. 
홍세화는 1966년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1977년 졸업했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민주투 위, 남민전 조직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대봉 무역회사에 입사한지 1년만인 1979년 3월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남민전 사건이 일어나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 정착했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출간 한 1995년까지 그는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94년 4월 택시운전을 그만둔 홍세화는 패션디자이너 진태옥 씨가 파리 시내에 차린 ‘진태옥 파리’에서 지점관리 업무를 맡아 일하고 있었 다. ) 국가폭력에 희생되어 망명자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15년 간 이방인 생활 을 한 그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출간하며 몸 대신에 목소리로 한국 에 도착했다.

한국인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통해 국가폭력 피해자 및 난민이자 
프랑스 거주민 홍세화뿐만 아니라 홍세화가 소개하는 선진국 프랑스를 대면 하게 되었다. 정부가 기업 경쟁력 강화를 축으로 하는 세계화 노선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세계화의 구체적 전략으로써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과 윤리를 갖는 개방적⋅합리적 의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문화와 의식의 세계화를 강조하는 시대에 홍세화를 매개로 갑작스럽게 프랑스가 현현한 것이다. 세계화는 한국 이 국제적 표준에 미달하다는 것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프랑스는 서방의 대표 적 선진국으로서 국제적 표준이 될 만한 국제정치적 위상을 갖춘 강대국이었 다. 또한 오랫동안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세계 정치체제 하에서 한국은 이 념⋅체제 대결적 분단국가였기 때문에 미⋅소가 아닌 유럽의 선진국이자 세 계적으로 유명한 문화강국인 프랑스는 다수 한국인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1995년 3월 말 출간된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동년 5월 초부터 베스 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 9월 초까지 베스트셀러 명단에 있었다. ) 그 이후에 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되어 35만 부가 넘게 팔렸다. 그런데 1995년 홍세화의 책이 화제가 되었을 때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 2(1995)도 팔리고 있었다. ) 1994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일본은 없다(1993)는 1995년 나온 속편 일본은 없다 2와 함께 꾸준히 팔리고 있었다. ) 1995년은 패전 50년, 해방 50년, 핵투하 50년이자 승전 50년이었다. 이 호명의 차이가 보여 주듯 전쟁과 종전을 둘러싼 여러 주체의 입장이 각기 다르다. 이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방식을 둘러싼 전쟁 당사국의 갈등이 가장 첨예한 해 중 하나가 1995년이었다. 또한 일본은 형식적으로는 부전결의를 하고 무라야마 담화가 있었지만 1995년은 일본 지도자의 ‘망언의 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일부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발언이 많아 한국인의 대 일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이 해는 해방 50년이었지만 ‘명성 황후 시해 100년’이기도 했다. 12월 17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 추모대회’가 개최되었다. ) 해방 5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빚어지는 
와 해당 출판사의 출판 의도가 가장 한국 독자의 공분을 샀다. 왜냐하면 박태혁은 가명이 었다. 이 같은 행태에 크게 반응을 보인 한국인은 재일 저널리스트 황민기, 작가 임영춘, 한양대 김용운 교수, 주일특파원 전여옥 등이었다. 황민기가 1993년 8월 월간 조선에 「추한 한국인의 저자는 가세 히데아키다」라는 기사를 썼고 1993년 9월 추한 한국인 번역본에서도 황민기와 김용운은 저자가 가세 히데아키임을 논증하고 책의 내용을 신랄하 게 반박했다. 작가 임영춘 역시 저자를 가세 히데아키로 상정하고 추한 한국인이 일본에 게 답한다(1994.7.30)와 추한 한국인가 추한 일본인가(1996)를 써서 비판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100만 부를 돌파하게 되는데 그녀는 일본은 없다 2에서 가세 히데아키의 출판을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1994년 11월 27일에는 전여옥 의 일본은 없다 일본판 번역출판(11.25) 기념으로 도쿄 메구로문화회관에서 추한 일본 인의 가세 히데아키와 전여옥의 토론회가 3시간 동안 열린다. 여기서 가세는 경제발전을 시켜준 은혜도 모르냐고 발언했다. 양국 출판계가 나서도 저자 문제가 명확히 해명되지 않자 한국의 서울방송과, 다큐 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를 했다. 이에 따르면 박태혁이란 필명을 쓴 장본인은 10여 년 전 한국에서 문필활동과 사업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장 모씨(60대 중반)로 일 극우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여기서 장 모 씨는 장세순이었다. 그는 1995년 5월 3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설명회를 열고 자신 은 자료를 넘겨 줬을 뿐인데 가세가 마음대로 왜곡했다고 폭로했다. 그런데 그가 이 회견 을 자청한 이유는 “책이 많이 팔렸는데 인세를 적게 준” 불만 때문이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추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이 다. 이행선⋅양아람, 「추악한 미국인(1958)의 번역과 동아시아의 추악한 일본인, 중국 인, 한국인(1993): 혐오와 민족성, 민족문화론」, 한국학연구 48, 2018, 315-350쪽 참조. 

일본의 역사적 책임과 한일 역사청산의 문제, 그리고 반일감정의 재확인은 한국이 식민 콤플렉스와 (핵)전쟁 위협에서 벗어나고 일본과 미국 등 외부 강대국의 간섭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이 요청되고 있었다. ) 

이처럼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 이듬해인 1995년은 한국이 WTO 회
원국 가입과 함께 세계 경제질서에 더욱 깊이 편입하며 세계화를 지향하는 한편, 전후 50년의 전후란 말이 함의하듯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 면서 재개된 한⋅일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연속된 일본 유력인 사의 망언으로 인해 반일감정이 강하게 발동했던 시기였다. 이와 같이 당시 한국인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 이후 세계화의 미래를 지향하는 한편 식 민지 유산의 과거의 굴레에 얽매여 이중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세계화가 선진국화라면 선진국에 비추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정체성
에 대한 인식이 촉발한다. 세계화를 추진하는 한국은 어떤 나라이며 국민인가. 세계화를 위해 국제적 표준에 비추어 한국의 위치와 성격에 대한 점검이 요청 될 수밖에 없다. 1994년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100만 부 넘게 팔린 것처 럼 한일관계와 과거사 문제도 혐오와 민족감정을 자극하면서 한국을 강대국 인 일본에 비추는 계기가 되어 민족성과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이 무/의식적으 로 요청되었다. 게다가 극복해야 하는 군부독재의 유산이라는 과거도 있었다. 이처럼 세계화 추진과 과거사 극복이 동시대적으로 진행되면서 세계 인식과 자기 인식이 동시에 요청되는 국면에 출현한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한국 독자가 ‘경제⋅정치⋅문화적으로 선진국인 프랑스’와 ‘한국정부가 사실 상 국외에서 정주하게 한 정치적 망명객 홍세화’를 매개로 프랑스 인식과 자국 에 대한 자기 인식을 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본고는 1990년대 중반 세계사와 과거사의 문제가 한국에서 사회적
으로 주목을 받는 시기에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1995)에 나타난 프랑스 망명자 홍세화의 자기 인식과 프랑스 인식이 갖는 의미, 그리고 책의 성격을 고찰한다. 이후 이 책의 베스트셀러 현상이 1990년대 중후반 한국과 홍세화 에 미친 문화적 영향과 그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출간과 한국 그리고 프랑스

빠리에 오세요. 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오세요. 내가 갈 수 없으니 당신이 오세요. 나를 찾지 않아도 돼요. 아니, 찾지 마세요.11) 
그래도 미련이 남으셨어요?
뭐라구요?
아! 나를 만나고 싶으시다구요? 정말이세요? 진정 정말이죠? 후회 안 하시겠지요? 좋아요. 그럼 만나지요. 어디서 만날까요? … 아,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고 싶었지요. 날 이해하시겠어요? 그리고 나는 당 신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 얘긴 바로 내 얘기예요. 시장의 법칙 같은 그런 골치 아픈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요. 들으 시겠어요? 정말이죠?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당신에게 달려갈게
요.12)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서장과 본문(제1부 빠리의 어느 이방인, 제2
 
11)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작과비평사, 1995, 9쪽. 
12) 위의 책, 31쪽. 
부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용문은 서장의 첫 단락 과 마지막 단락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서장은 프랑스에서 관광안내와 택시운 전을 했던 홍세화가 프랑스 여행을 오는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프랑스의 유명 명소를 소개하는 글이다. 프랑스 여행 계획이 있든 없든 한국 독자가 프랑스의 주요 관광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관광가이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장의 내용 구성은 15년 넘게 프랑스에서 살아온 홍세화가 프 랑스와 프랑스문화를 잘 아는 존재라는 인식을 한국 독자에게 심어주는 효과 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당신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 얘긴 바로 내 얘기예요.”라고 한 것처럼, 이어지는 본문에는 파리에 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 자신의 내력과 프랑스 정착 과정, 프랑스 생활 등 자전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한국독자에게 프랑스를 보여 준 다음 자기를 드러내는 서사전략이다. 그래서 이 에세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15년 전 한국 그리고 망명자 홍세화의 삶에 대한 인식으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의 출간으로 한국 독자가 대면한 것은 홍세화의 인식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추방 된 홍세화의 의미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번 장에서 홍세화가 바라본 자기 인식 과 프랑스 인식에 주목하고 한국사회에 그것의 출현이 갖는 의미를 고찰하고 자 한다. 
먼저 전자인 홍세화의 자기 인식과 관련해 이 책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첫째 한국에서 빨갱이 간첩으로 규정된 자신에 대한 자기변호의 노력이
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로 인해 책이 출간된 1995년은 이미 외양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지만 빨갱이와 간첩을 여전히 경원시하 는 사회였다. 공안사건 연루자이자 망명자가 분단-정전체제의 반공사회의 독 자를 향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공안사건의 피해자임을 호소하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홍세화가 망명의 직접적 사유가 된 1979년 11월 남민전(남 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은 그가 무역회사 입사 1년, 해외지사 발령 
6개월 만에 발생한 1970년대 유신 말기 대표적 공안사건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그의 자기변호는 프랑스 망명 담당관리와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그 조직 안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에 홍세화는 “곰곰이 돌이 켜보아도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망명을 신청한 자로서 더욱 그러했다. 한국 내에 있었으면 실로 엄청난 일을 당했을 테고 또 실제 다른 동료들이 겪었고 또 겪고 있는데도 말이다. 몇 차례에 걸쳐 박정희 군사독재정 권을 무너뜨리자는 삐라를 뿌렸다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는데, 그 정도의 행위는 프랑스에서는 경범죄에도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처구 니없지만 엄연히 사실이었다.” )라고 토로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 하는 한국에서 대단치 않은 일로 자신이 핍박을 받았다며 홍세화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정부가 억압적 군부정권이라는 점이 부각된다. 홍세화는 이 책에서 남민전이 조직체계상에서 다른 민주화운 동조직과 달리 무력부와 대외연락부를 뒀으며 무장 혁명을 목표했고 조선민 주주의인민공화국 측과 연락을 시도했다는 등의 내용은 말하지 않고 오로지 군사파쇼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만 기술했다. 이 단계에서 홍세화는 빨갱이, 간첩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아내와 자녀를 부양하는 30대 초반의 가장이었고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깨어 있는 양심적 시민으로서의 증표가 된다.
이러한 자기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홍세화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대
학 생활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서사전략으로 군사파쇼독재에 저항했던 내력이 애초에 어린 시절부터 20대 후반 그리고 30대 초반 남민전으로까지 이어지며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가령,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 한 그는 학과에 적응하지 못하고 1969년 같은 대학 외교학과에 다시 입학하 게 되지만 대학 강의와 외무고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외교관이 목표였던 대학동기와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린 시절 겪은 한국전쟁의 영향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상하게 들으시겠지만 별로 한 일도 없어요. 다만 저항했을 뿐이지 요. 남한의 국시는 반공이랍니다.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처럼 적극 적인 가치를 이루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반대의 이데올로기였지요, 내 나이 스무살 때, 나는 이 반대이념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살찌 운다는 것을 알아야 했어요. 나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벌써 공산주의자를 철저히 증오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무서운 발견이었 지요. 인간을 알기도 전에 이미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니. 그 충격이 있은 뒤에 남한의 권력 이 모두 이 증오의 이데올로기만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지요. 나는 저항하여 나에게 강요된 증오를 거부했지요. 그 결과가 이렇게 된 셈이지요. … 프랑스 외무부 관리를 만났을 때에도 확인되었다. 그 경험 은 역으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증오에 차 있는가를 다시금 돌이키게 했을 뿐이다.14)
한국전쟁 때 동생이 못 먹고 병들어 죽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정신이 
이상해졌으며 아버지는 사는 곳에서 일어난 인민재판의 영향으로 도망쳐 다 녀야 했다. 그래서 홍세화는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고 외조부모 슬하에서 성장 했다. 전쟁과 가족해체를 직접 겪고 반공을 국시로 내건 한국에서 반공과 증오 를 내면화하면서 성장한 홍세화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를 철저히 증오했었고 대학에 가서야 반공과 증오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일부 공 명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홍세화는 대학 입학 후 한국전쟁과 군부정권의 실체 를 깨닫고 반군사파쇼독재의 입장을 취하게 된 예이다. 직접 전쟁의 참화와 전후의 참상을 누구보다 비극적으로 경험하고 반공 체제에서 성장한 개인이 반성적 자각을 통해 저항적인 ‘골수 평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이 한국 독자에 게 제시되고 있다.  
 
14) 위의 책, 54-55쪽. 
특히 대학생 홍세화를 반유신 민주화 운동으로 이끈 대표적 사건은 고등학 교 3년 후배이자 학과 동기인 임진택의 권유에 의한 문리대 연극반 활동, 전태 일의 죽음, 선배 김지하와의 만남이었다. 문리대 연극반과 선배 김지하를 통해 군부정권을 비판하는 연극 공연을 했는데 당시 핍박받는 시인 김지하는 선배 이자 그들 세대의 영웅적 존재였다. 게다가 1970년 11월 중순 전태일의 죽음 은 홍세화와 선후배들의 사회적 각성을 이끌었다. 그는 3선 개헌반대 운동 등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대학에서 제적당하기도 했고 교련반 대운동을 하다가 34개월의 군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면서 1977년 간신히 졸업을 한 후에도 그는 남민전 조직에 가담했다. 30대 초반 그는 아내와 두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대봉 무역회사에 취업한 후에도 반군사파쇼독재의 운 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민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는 해외에 있어서 체포를 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홍세화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자신은 한국전쟁 피해
자이며 서울대에 두 번이나 입학한 엘리트이고 1969년 대학입학생의 저항적 대학생활기를 통해 군부⋅유신정권 하 반군사파쇼독재 투쟁을 한 청년세대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자기서사를 구축했다. 이로 인해 그는 오직 일신의 영달을 위해 외무고시에 전념한 동기나 북한에 맹종한 공산주의자와 달리 박정희 군 부정권에 저항하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신을 바친 희생적 투사가 된다. 그는 한국전쟁과 군부정권의 근저에 있는 증오 기반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꿰 뚫은 존재였다. 이처럼 자신의 30여 년의 생의 내러티브를 구축한 홍세화는 마지막으로 망명자인 자신이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홍세화는 베트남 보트피플인 뉴옌이 프랑스 국적 신청을 하여 법적으로 프랑스인이 된 것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은 그와 같은 난민의 처지이지만 프랑스 국적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밝히며 현재 자신은 프 랑스 정부가 보증하는 증명서로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조국인 한국만 못 간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홍세화는 자신의 망명 이전 삶과 국적을 통해 사상적으로 결벽함과 
조국애를 강하게 드러내는 한편 공안사건과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로서 민주화 가 된 이후인 1995년 한국의 독자에게 전쟁과 반독재의 현대사를 환기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한국전쟁과 1969년도 대학 입학생 의 반독재투쟁의 후일담의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의 역사 적 증언기록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이 비극적인 글을 빨갱이, 간첩, 공산주의 자의 기록으로 매도하지 말고 기억하고 지지해 달라는 부탁의 의미도 있다. 
지금까지 홍세화의 자기 인식을 살펴봤다면, 이제 후자인 홍세화의 프랑스 
인식을 살펴보자.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했었는데 그 이전에 관광 안내를 했고 논문을 쓰지 못하고 중퇴를 하기는 했지만 파리 제7대학 역사학 부의 동남아시아과 대학원을 무료로 잠시 다니기도 했다. 장모님과 아내, 두 자녀와 함께 월세 아파트에서 살았고 두 자녀는 프랑스의 한국인학교와 프랑 스학교를 다녔으며 아내는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일을 했다. 그는 망명자였지 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엘리트이고 유학생이자 일종의 이민자였고 택시 운전 자격을 취득한 노동자였으며 프랑스학교에서 두 자녀를 교육시키는 학 부모이자 생활인으로서 15년 넘게 파리에 체류한 인물로서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목격자였다.  
분단-정전체제에서 반공국가인 한국은 섬처럼 고립되어 외국은 주로 미국, 일본, 소련/러시아 정도만을 인지해 왔는데 동유럽 공산권 국가가 와해되면서 1992년 8월 14일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게 되고 1990년대 초중반 세계화의 바람이 부는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홍세화가 프랑스문화를 한국에 알려 왔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공간적⋅정신적⋅역사적으로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던 프랑스의 갑작스런 출현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게다 가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유럽의 선진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세 계 최고의 문화국가를 자부한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은 충격 과 호기심은 컸다.
똘레랑스는 정치 종교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프랑스인들의 사
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프랑스 사회에 이처럼 똘레랑스가 흐르게 된 것을 ‘나는 무엇을 아는
가?’로 표현되는 프랑스의 철학전통인 회의론에서 출발한 이성주의와 대혁명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똘레랑스란 합리적 이성이 역사를 관철하여 행동 하고 반추함으로써 얻어낸 결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회의에 의하여, 나의 사상과 
행동만이 옳다는 아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똘레랑스의 개념이 형 성되었고, 그 개념은 18세기 초에 이미 똘레랑스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는 몽떼스끼외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사회운동의 실천과정을 통하여 보편적 가치로 다져져 사회 안에 정착되 었다고 보는 것입니다.15)
홍세화는 한국과 견주는 방식으로 프랑스문화를 소개하는 서술 방식을 택 했는데, 그가 한국에 가장 첫 번째로 전하고 싶은 프랑스문화는 똘레랑스였 다.16) 홍세화는 똘레랑스를 보편적 가치라고 규정하고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한
다. 첫 번째, 똘레랑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그래서 똘레랑스 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기를 요
 
15) 위의 책, 306-307쪽. 
16) 똘레랑스 외에도 프랑스 시스템의 우월성이 언급된다. 가령 택시기사가 택시비를 속일 수 없다. 또한 세입자를 위한 프랑스의 법적 장치가 우월하여 한국처럼 남의집살이의 서글 픔을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대학제도가 훌륭해서 망명자는 등록금이 무료이 고 등록 수수료도 면제되어 홍세화는 1프랑도 내지 않고 파리 제7대학 역사학부 석사과정 에 등록할 수 있었다. 
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 한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는 강요나 강제 대신 설득을 위한 토론을 한
다. 사상⋅의견의 차이에 대해 앙심을 품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으며 감옥에 넣지도 죽이지도 않는다. 프랑스처럼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나라를 찾기 어려운 것도 바로 똘레랑스 때문이다. 극우파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똘레랑스 는 외국인 차별이나 편견에 반대하기 때문에 당시 프랑스는 독일이나 여타의 나라에 비해 외국인차별이 약한 편이다. 두 번째, 똘레랑스는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이다. 똘레랑스의 첫 번째 말뜻이 ‘나와 남 사이의 관계’ 또는 ‘다수와 소수 사이의 관계’에서 나와 남을 동시에 존중하고 다수가 소수를 포 용하기 위한 내용을 품고 있다면, 두 번째 말뜻은 권력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 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다. 공권력의 간섭 및 남용, 부정부패를 싫어하는 프랑스 국민은 공권력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약자로서 강자인 국가 에게 똘레랑스를 요구한다. 그들은 공권력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면 자율의 폭이 줄어들고 똘레랑스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에 기초해 홍세화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 번째는 
한국 권력과 관련된다. “똘레랑스는 개인이 권력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지 권 력이 개인이나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에겐 역사에 대한 책임만이 철저히 요구될 뿐이지요. 바로 이것이 한국과 프랑스가 다른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즉 프랑스의 개인은 권력에 대하여 똘레랑스를 갖고 있음에 반하여 한국의 개인은 똘레랑스는 없이 다만 권력에 의해 강제되고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권력은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에 반하여 한국의 권력은 그 현대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역사에 대해서 나 사회에 대하여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 또한 두 번째는 한국사회 와 관련된다. 홍세화는 한국을 정이 흐르는 사회라면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진단했다. “정은 감성의 표현인 것에 비하여 똘레랑스는 이 성의 소리” )였다. 정의 사회인 한국과 관련해 “그런데 그 정이 지나쳐서일까 요? 참견을 잘하고 강요하는 사회인 것도 같습니다. 나와 다른 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와 똑같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나와 똑같은 이념을 갖기를 강요하며 나와 똑같은 신앙을 갖기를 강권합니다. 그리하여 그 요구에 순응하 면 한편이 되고 또 이른바 ‘정’을 주기도 하지만 따라오지 않으면 바로 적대관 계로 돌변합니다. 이와 같은 강요의 논리가 권력수단과 함께 펼쳐질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한편 이것도 정이 지나 쳐서일까요? 권력의 남용과 비리에 대하여는 오히려 잘 용납하고 또 잘 잊는 사회이기도 합니다.”19) 
홍세화는 파리에서 노동조합연맹의 거대한 데모대의 여유 있는 움직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서울의 데모현장의 모습과 겹쳐져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 다. 또한 그는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운전사끼리의 사회적 연대를 경험했
다. 이런 맥락에서 홍세화에게 똘레랑스는 프랑스 국민의 시민적 역량 다시 말해 시민의식과 권력⋅사회의 도덕성을 의미했으며 프랑스라는 일국을 넘어 한국인도 갖춰야할 보편적 가치에 다름없었다. 이는 똘레랑스 습득을 통한 일종의 문화개조론인 셈이다.  
15년 넘게 한국 땅을 밟아 보지 못한 홍세화가 거침없이 한국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경제는 급속도로 빠르게 성장하여 한국은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하나가 되었지만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가 1987 년에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비극적인 것은 홍세화를 옥죄였던 분단체 제의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1994년 6월 23일 전국 철도파업에 이어 24일 기본급 14.5% 인상을 요구한 서울지하철 노조와 
3%를 마지노선으로 제시한 지하철공사 및 정부의 임금협상이 결렬되면서 연 대 파업이 시작되었다.20) 이 연대파업의 중심에 있었던 전국노동조합대표자 회의(전노대)의 공동대표 양규헌은 김영삼 정부의 반노동정책을 비판하면서 노동자의 열악한 근로 조건을 외면한 정부의 ‘국가 경쟁력 강화’ 구호에 불신 을 갖고 있었고 임금인상을 원했다. 문제는 언론과 지하철공사, 철도청, 정부, 공안 당국이 연대파업의 배후에 북한의 사주를 받은 좌경폭력세력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특히 언론은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할 시점이라며 노조의 파업을 비난했고,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했으며 국가보안법이 파업 노동자와 시위에 동참한 대학생들에게 적용되었다. 이와 같이 1994년은 정치적 민주화 가 이루어지고 문민정부가 출범했지만 정부는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 고 노동권 존중, 경제적 민주화는 여전히 요원했으며 오히려 국가보안법이 노동운동 탄압과 정권 안보 유지 및 정치적 반대자 탄압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다.21) 
이런 맥락에서 홍세화의 똘레랑스 소개와 한국 비판은 시의성이 있었고 유 효했다. 홍세화도 서구추종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인지 미리 자 신의 똘레랑스 이야기는 친불적인 것도 사대주의도 아니라고 적고 있다. 이 단계에서 홍세화는 더 이상 빨갱이, 간첩, 공산주의 혐의자나 이방인이 아니라 15년 넘게 문화선진국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똘레랑스라는 프랑스의 정신과 문화를 체화한 정체성을 가진 선진시민이었다. 
1995년 한국에 출현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기본적으로 망명자의 고생담을 다룬 자전적 에세이이자 체류기, 관광가이드 책이다. 또한 망명자에 게 덧씌워진 빨갱이 낙인을 벗기 위한 자기변호의 글쓰기였는데, 그 서사는 한국전쟁에서 나아가 1969년 대학 입학 세대의 반군사파쇼독재의 투쟁사였 다는 점에서 빨갱이가 아니라 오히려 군부정권에 저항한 대학생 투사의 후일
 
20) 「정회 거듭…6시간 협상 한밤 결렬」, 조선일보(1994.6.24), 조간 30쪽. 
21) 이행선, 「1990년대 초중반 인공위성 개발과 민주화, 과학도의 지향: 김도현, 로그인
(1996, 후일담 소설)」, 민주주의와 인권 22(4), 2022b, 151-152쪽. 
담의 성격도 갖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그는 똘레랑스를 보편적 가치로 내세 우며 국경 넘어서 조국과 공유하고자 했다. 15년 간 이국땅에서의 외로움과 고생도 묻어나기는 하지만 경제적⋅문화적으로 선진국이라 평가받는 프랑스 에서 생활하며 똘레랑스라는 정신문화를 배우고 그에 기반한 사회적 연대와 인간 존중, 정치적 다양성을 통해 프랑스 국민의 역량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 를 확인하면서 한국에 프랑스의 장점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역설적으 로 망명자의 슬픈 외국생활의 효능감의 표현이자 세계화와 국제적 표준을 지 향하는 시대에 부합하는 문화비평서이기도 했다. 

Ⅲ. 베스트셀러의 영향과 진보적 지식인의 탄생

(광고)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조국의 상큼한 대지 위를 한없이 걷고 싶다……” 자유와 예술의 도시 빠리그 도시 한 켠에서 20년 가까이 조국과 절연된 채 정지된 세월을 살고 있는 남자 홍세화. 그 애환의 어제 오늘이 한 편의 소설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누구든 아프게 살아온 사람의 증언에 우리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더욱이 그 아픔이 사회적인 경우, 그 증언이 진솔한 경우 우리는 한 인간의 고뇌와 상처를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공유하게 된다. 홍세화의 자전적 고백이라 할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그런 의미에서 감동적인 르뽀문학이기 이전에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명암을 극명하게 드러내놓은 사회사적 증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평론가)22)
(새로 나온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세화 지음)=무역회사의 파리지사에 근무하던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그 후 17년 동안 망 명생활을 해오고 있는 지은이가 자신의 가족사, 성장과정, 학생운동, 남민 전 사건, 택시운전사 등으로 살아가는 망명생활 등을 담담히 적었다.23)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1995년 3월 25일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 었을 때 책 광고에 유홍준 교수는 이 자전적 고백이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명암을 극명하게 드러내놓은 사회사적 증언”이라고 했다. 이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한겨레신문의 파리 주재기자가 17년째 망명 중인 48세의 홍세화를 인터 뷰했다. 그때 홍세화가 한 말인 “조국의 상큼한 대지 위를 한없이 걷고 싶다” 가 책 광고의 헤드라인이 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홍세화는 자신이 사회주의 자24)라고 했다. “한 사람의 자유와 재산을 보장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유 와 재산을 희생하는 것을 옳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자유주 의적 자본주의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보다는 미움을, 연대보 다는 경쟁을, 단합보다는 분열을 고취하는 체제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22)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한겨레(1995.3.24), 2쪽. 
23) 「새로나온 책」, 조선일보(1995.3.31), 24쪽. 
24) 참고로 1999년 홍세화는 자신이 전태일 열사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주의에 이끌렸다고 고백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99년 자신은 “이론적인 밑 바탕이 부족한, 다만 느낌으로서의 사회주의자, 즉 감성적인 사회주의자”라고 말했다. 그 러면서도 그는 우리가 인간성에 대한 폭넓은 신뢰를 가져야 하고 고귀한 인간성이 사회주 의를 낳았다고 지적하며 20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대화와 사회정의 건설에 공헌한 프랑스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의 글을 다음과 같이 가져왔다.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 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다. …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 한쪽 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궁핍이, 또 한쪽엔 견딜 수 없는 노동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對比)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장 천한 인간의 동기인 시샘의 산물 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인 것이다.” 홍세화, 「사회주의 에 대하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한겨레신문사, 1999, 
272-277쪽. 
“한국사람들이 잘 단합하지 못하고 곧잘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 결국은 분단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시대 때까지만 해도 만주와 연해주까지 뻗어 있었던 한국인의 생활공간을 분단이 오래도록 국토의 반쪽만으로 제한 하면서부터 사람들이 작아지고 옛날의 선비 기상이나 호연지기를 없애 버렸 다는 것이다.”  ) 이와 같이 1995년 홍세화는 빨갱이, 간첩, 공산주의자가 아 니라 프랑스 망명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한국에 출현했다. 
이 책은 동년 5월 초부터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9월 초까지 베스트셀러 
명단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꾸준히 팔려 35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다. 1995 년은 출판시장이 불황이었고 소설이 잘 팔리지 않았지만 자서전은 상대적으 로 잘 팔리고 있었다. ) 홍세화는 이 책에서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 맥락에서 한국인은 홍세화의 시선을 통해 프랑스와 그 문화를 접하고 한국을 반추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영향의 결과 나타난 현상으로 첫 번째는 1995년 6월 17일 
광주에서 택시노조연맹 광주시지부 소속 운전사들이 시장 후보를 초청해 정 책토론회를 가졌을 때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운전사들은 시장후보에게 “요즘 베스트셀러 가운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이 있다. 택시문제를 이 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한다고 보는데 읽었는가.”27)라고 질문했다. 홍세 화가 책에 프랑스 택시 사정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자신의 친구였던 택시운전 사를 예로 들어 한국과 비교를 많이 해 기술했기 때문에 한국 택시운전사도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영화화가 추진되었다. 책 출간 5개월 
만에 신씨네, 기획시대와 함께 한국의 영화를 이끌고 있는 영화세상(대표 안동
규)이 제작을 맡아 당시 파리에 체류 중인 젊은 감독 황규덕(36)에게 연출을 맡겼다. 홍세화를 만난 황규덕 감독은 “박정희 시대에 거세된 사람이 아직까 지도 파리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를 테면 의식화된 독자들로부터, 이 책을 요령 있는 관광안내서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이르기까 지 원작의 독자층은 아주 널리 퍼져 있다. 내가 이 영화에서 그리고 싶은 것은 버려진 존재의 고독감이다. 분명히 백인문명권에 들어와 있는 주인공이 만나 고 스치는 사람들도 그래서 주로 동양계 사람들로 설정될 것이다” )라고 말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제작이 무산되어 영화화되지는 못했다.  
세 번째, 이 책은 권장도서로 선정이 된다. 1995년 10월 교보문고가 유치 원생부터 일반인까지 7개 부문에 걸쳐 권장도서를 선정해 발표했는데 홍세화 의 책은 일반 부문에 포함되어 선정되었다. ) 또한 1995년 12월 서울지역 출판노동조합이 출판사, 서점, 일간지 및 전문지 출판담당기자, 출판관련 연구 단체 종사자 등에 의뢰해 선정한 ‘95 올해의 좋은 책’ 20종에도 홍세화의 책이 포함되었다.  ) 그리고 1999년 12월 교보문고가 각 분야의 전문가 100인의 추천을 받아 ‘90년대 최고의 책 100권’을 선정했는데 여기에도 홍세화의 책이 포함되었다.31)  
네 번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내용 중 고등학생의 공부 내용과 똘 레랑스가 한국 독자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홍세화는 고등학생 자녀를 매개 로 프랑스 학교는 암기 위주가 아니라 표현 및 작문 능력과 사물에 대한 판단 능력 위주의 교육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논술과 작문의 내용은 프랑스어, 역 사, 지리, 사회, 경제 그리고 영어, 독일어까지 포함되었다. 이를 테면, 딸은 고2학년 때 「18세기 프랑스의 종교와 철학」이란 제목으로 논술문을 썼다. 또한 홍세화는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실제로 루쏘의 사회계약론, 인간 불 평등 기원론 그리고 볼떼르의 깡디드, 몽떼스끼외의 페르시아의 편지 등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괴테,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헤겔, 맑스, 레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철학 및 사상의 흐름에 대하여 이미 대충이나마 점검을 하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가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철학과목을 포함시키는 세 계 유일한 나라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내용은 나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 지” )라고 기술했다. 홍세화 책의 서평을 쓴 한국의 역사학도도 이 점을 충격 적으로 받아들였다. ) 그 무렵 한국은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1982∼1993년) 에서 이제 수능으로 전환을 하던 시점(1994년 정식)이었다. 
또한 이 서평자는 홍세화가 똘레랑스를 이용해 프랑스와 한국을 비교하고 평가한 것을 주관적이라고 하지 않고 객관적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방식, 정치적⋅종교적 의견을 존중하 는 것을 뜻하는 똘레랑스가 ‘관용’이나 ‘상호존중’으로 해석되었는데, 경향신문 사회정책팀장은 한국 대선풍토를 보면서 상호존중으로 사회가 살찌는 프랑스 와 달리 우린 아직도 헐뜯어 반사이익 얻기를 통해 서로 상처만 남기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한없이 엄격 한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어떤 경우든 경쟁자는 인정할 수 없다는 오만이 여기저기 몸에 배어 있다. 홍세화 씨 식으로 말하자면 모두 똘레랑스가 없는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이다. 집권철학이나 정책논리를 앞세 우기보다는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반사이익을 얻는 네거티브 방식이 예나 지 금이나 변하지 않은 우리 선거풍토의 현주소다.” ) 또한 도정일 교수는 홍세 화의 책을 거론하며 “국제사회적 의미의 관용은 무엇보다도 타자, 타자성, 차 이에 대한 존중과 서로 다른 가치, 믿음, 생각을 가진 개인 및 집단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이 타인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존중하는 태도인 관용 점수가 대단히 낮다며 관용의 문화를 적극적 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프랑스 사회의 관용은 특징적으 로 프랑스적 공화주의와 프랑스적인 것에의 동화를 전제한 개인적 자유이기 때문에 프랑스 역시 아주 이상적인 똘레랑스의 사회는 아니다”라고 지적했 다.35) 이런 식으로 똘레랑스는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사회를 평가하는 가치기 준으로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의 역사와 후유증을 감안하 면36) 프랑스의 가치인 똘레랑스에 대한 반박의 여지가 없지는 않았지만37) 
 
35) 「‘관용의 체제’로서의 문화」, 경향신문(1998.12.2), 7쪽. 
36)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제국주의와 독재의 사슬에서 신음했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 복음이었다. 하지만 무신경하고 오만한 서구 급진적 자유주 의를 의미하는 ‘오만한 자유’는 폭력을 낳고 오히려 근본주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지난 2세기 이상 프랑스를 비롯해 서방이 누린 자유와 풍요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 통치의 대가로 얻어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주류 백인들의 인종주의와 자국 내 제3세계 이주노동자에 대한 멸시와 차별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김동춘, 대한민국 은 어디로?, 북인더갭, 2019, 192-193쪽. 
37) 가령, 최진우는 관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관용(tolerance 또는 toleration)은 동화 정책에 비해서는 타자에 대해 관대하다. ‘우리’의 공간 안에서 타자가 자신의 고유 정체성 을 유지하면서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관용은 언제라도 베푸는 자에 의해 철회될 수 있다. 관용은 힘의 비대칭성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며 시혜 자의 자의적 처분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타자의 인격과 인간 성에 대한 위협이 잠재된 상태다. 관용의 윤리는 철저하게 주체중심적 윤리이다.” 최진우, 
「환대의 윤리와 평화」, OUGHTOPIA 32(1), 2017, 13쪽; 아마르티아 센(인도의 경제학 자)은 관용에 기초한 기존의 ‘다문화주의’가 사실은 ‘다원적 단일문화주의’이며, 관용은 사 회적으로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작가 피에르 테바니앙은 더 극단적으로 관용이 반인종주의의 덕목이 아니라 인종주의에 속하는 덕목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관용이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차 이를 과도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 인식되게 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이 인종주의와 닮아 있다는 의미다. 물론 관용이 인종주의의 덕목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 로 인정되어야 하고 나아가 인종주의 극복의 필요조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며 완곡한 태 도를 보이기는 한다. 보다 본격적으로 관용담론을 비판한 것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이다. 그에 따르면 관용은 권력을 가진 이들의 담론이다. 그리고 권력 작용으로서의 관용담론의 주된 기능은 탈정치화이다. 이때 탈정치화란 불평등, 종속, 주변화, 사회갈등과 같이 정치적 분석과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종교적⋅문화적인 문제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관용담론은 사 회적 갈등을 정치 영역과 분리시킴으로써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에 한정시킨다고 한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작동하고 이념 갈등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똘레랑스는 참조할 만한 외국의 문화적 정신문화라고 할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유명해지면서 홍세화는 한국에서 보다 
더 알려지고 미디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1996 년 4월 20일 SBS <송지나의 취재파일- 세상속으로>에서 「빠리 택시운전사 홍세화」 편을 제작하여 방영했다.38) 이 방송은 홍세화의 17년간 망명생활이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추적하고 이를 통해 이 땅의 한 지성 인의 자화상을 조명하는 휴먼다큐멘터리였다. 이후 한겨레신문은 홍세화에게 연재 기고를 부탁했다. 그래서 1996년 6월 25일부터 10월 25일까지 「내가본 프랑스⋅프랑스인」이라는 제목으로 39회가 연재되었다.39) 1997년에는 나 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코리언 드라이버는 파리에서 잠자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번역되어 그가 11월 출판기념회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 도 했다. 또한 1997년 12월 12일부터 1998년 1월 25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리랑 소극장에서 연극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공연되었다. 연출은 책 의 부록에 글을 남긴 임진택이 맡았다. 임진택은 “세화 형이 가슴 저리게 부러 워하던 톨레랑스, 다른 사상과 생각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그 관용의 철학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40) 
1998년 3월 13일 정부의 특별사면 발표에 홍세화가 제외되어 충격을 받기
 
집단 간의 갈등을 종교적⋅종족적⋅문화적 차이에 대한 각 집단의 태생적 적개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또한 관용담론은 차이를 가진 집단을 향한 적대 행위를 줄이고 모든 차이를 존중하지만, 이와 동시에 기존의 지배와 위계질서를 안전하게 보존하 려는 시도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관용과 차이에 대한 존중을 주장 하는 담론을 주도하는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들의 태도는 인종 주의적인 극우파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역시 까다로운 조건이 충족된다는 전제 하에서만 타자와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엄한진, 증오를 품은 이를 위한 변명,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3, 324-327쪽. 
38)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탐구」, 조선일보(1996.4.20), 17쪽. 
39) 「내가본 프랑스⋅프랑스인1 5천8백만 ‘개성’이 빚은 나라」, 한겨레(1996.6.25), 6쪽. 40) 「‘빠리의 택시운전사’ 연극무대에」, 한겨레(1997.12.5), 15쪽.
는 했지만, ) 동년 9월 6일 홍세화의 딸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녀는 다음해 봄부터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한국정치사를 전공할 예 정이라고 밝혔다. ) 또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출간을 계기로 홍세화는 1979년 남민전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난 것을 확인하 고 홍세화 귀국추진모임(대표 유홍준)의 권유로 1999년 6월 14일부터 3주 일정으로 부인 박일순 씨와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17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22일 서울대에서 ‘젊은이의 자아실현과 사회적 책무’란 제목의 강연회가 있었다. ) 19일에는 방송에 출연해 <정수복의 세상읽기: 파 리 택시운전사 - 홍세화 씨>(K2 밤11시 15분)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 새로 출간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베스트셀러의 명 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홍세화는 2002년 1월 한국에 영 구귀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고자 한다. 나는 학자도 저널리스트도 문필가도 아니다. 그 렇지만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들, 남들이 외면하고 지나친 것들에 대하여 쓸 것이다. 타고난 예민한 감수 성과 분석력으로, 아직 삭지 않은, 아니 삭을 수 없는 나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45)
홍세화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자신이 택시운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책을 읽고 싶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데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화제가 되면서 기회를 얻게 되고 한국에 귀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90년대 중후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출간은 ‘프랑스와 똘레랑스’의 현현이자 한국전쟁과 69학번을 경험한 ‘홍세화의 과거’의 역사적 등장이자 ‘홍세화의 현재’의 등장이었다. 여 기서 ‘홍세화의 현재’란 20년 간 프랑스를 경험한 진보적 지식인의 한국 출현 을 의미한다. 
영구귀국 이전, 홍세화는 1997년 5월 13일 칼럼을 통해 박정희 찬양과 
박정희 시대에 대한 동경의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이 현상 이 “수구세력과 이에 편승하는 일군의 문사 프로피퇴르(이익을 챙기는 자)들, 그리고 불만스런 현실을 미래 지향으로 개선시키려는 의지도 전망도 없는 회 고파들의 합동작품”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알고 있다. 약자의 고통과 탄식에 연대하는 대신 그것들을 짓밟고 찬양가를 부를 수 있게 된 인간 성의 실추, 그 뻔뻔스러움, 염치없음 역시 박정희와 그 시대의 강자의 논리에 서 비롯됐다는 것을”이라고 비판했다. ) 또한 1997년 출판사 당대의 의뢰로 1996년 8월 하순부터 9월 초까지 르몽드에 실린 글을 모은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했을 때, 홍세화는 진보라는 화두는 “특히 오늘의 한국 상황 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제기되는 담론”이며 질문을 해야 답을 찾을 수 있 다고 말했다. 이때 그는 물질적/기술적 진보와 다른 윤리적 진보와 반성적 진보를 언급했다. ) 이후 홍세화는 문화비평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 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1999년 발간했다. 이 책에서 홍세화는 똘레랑스의 대상은 남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며 자기 자신을 ‘봐주는’ 한국 사회지도층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사회에서 줄곧 주도권을 갖고 있고 극단 주의인 극우세력에게는 똘레랑스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48) 이러한 활동 속에 홍세화는 동년 아웃사이더를 위하여의 공동저자의 한 명이 된다. 그러면서 그는 2000년 잡지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이 잡지는 당시의 언론 개혁 및 안티조선 운동을 배경으로 나온 잡지이다. 창간사는 “한 국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극우 집단주의와 싸우는 일”이라 주장하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극우 집단주의의 “본산이자 결정체”인 조선일보와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홍세화의 등장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의 책 으로 등장한 독일 유학생 진중권이나 귀화한 러시아인 박노자가 1990년대 말에 지식계의 새로운 대표처럼 등장한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 
홍세화가 택시운전사가 아니라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 한국에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 학벌과 사회의 중추세력이 된 대학 선후배의 조력 외에도 ‘선진국 등 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외국과 한국을 비교하며 지식 인을 자처하는 지식인사회’의 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국가폭력에 의한 망명자이자 20년이나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생활했다는 점에서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어도 문화자본을 획득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 하는 사회주의자이자 똘레랑스의 전파자라는 정체성도 극단의 이념 갈등으로 점철된 분단국가에서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호칭을 획득하기에 부합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은 사회비평을 시작했다. 지식사회의 논쟁과 비판문
화를 개혁하는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에서 홍세화는 「프랑스에서 본 제3의 길」이란 글에서 블레어 영국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에 열광하는 국내 학계를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대처리즘’에 불과한 제3의 길에 대해 “개혁의 에너지를 모아 주는 희망의 담론”이라거나 “21세기 한국을 위한 이념적 패러다임 모색에 대한 중요한 함의” 등과 같은 학자들의 찬사는 한국사회의 혼돈을 부채질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한 동년 4월 서울지하철 노조의 파업투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민의 발을 볼모 로 파업을 벌인다”고 떠들어댄 보수언론 때문이라고 말했다.50) 
이처럼 그 당시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출간 이후 프랑스 노동자의 사회적 연대와 존중과 관용의 똘레랑스를 내세운 홍세화’가 당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극우집단주의를 꼬집고 2002년 귀국하여 2월부터 한겨레 기획위원을 맡고 3월부터 민주노동당에 가입하며 진보적 지식인으로 부상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과거사 청산뿐만 아니라 세계 화를 위한 한국의 현재적 사회개혁을 외친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사실상 추방되어 잊힌 이방인이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진보의 가치를 전파하고자 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현현하게 되는 과정이자 그 탄생의 일면이었다. 
 
Ⅳ. 나가며

1990년대 중반 사회학자 김동춘은 소련의 붕괴로 강제로 연방에 편입되었 던 동유럽 민족들의 분리⋅독립의 기운이 일어나고 이들 간 분쟁이 계속되면 서 억제되었던 민족분리주의와 인종주의가 급작스럽게 부활하는 한편, 국민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초국가적 제도와 질서가 구축되면서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을 중심으로 변화된 세계 질서를 바라볼 수 없다는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후자의 한 현상이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이다. 세계화 논 자들은 한국인의 지나친 폐쇄성과 과도한 자국 중심주의를 비판했다. 김동춘 은 세계화론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문명개화론이나 1950 년대 근대화론과 닮은 점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서구 선진국의 표준을 추종하 는 것이 곧 민족의 발전으로 간주된다는 점, 둘째 보편주의적 정서에 경도되면 서 실제로는 특정 외세에 의존하는 경향을 띤다는 점, 셋째 민중의 역량을 
 
50) 홍세화, 「프랑스에서 본 <제3의 길>」, 김정란⋅진중권⋅김규항⋅홍세화,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아웃사이더, 1999, 144-155쪽; 홍세화, 「피자헛과 포스트모더니즘」, 위의 책, 
156-168쪽. 
동원하기보다는 민중을 배제하면서 엘리트의 자각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 등이다. 그래서 그는 문명개화론이나 근대화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면 세계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민중적 에너지를 바탕으로 전진적⋅개방적 민 족주의를 확고히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민족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인 세계화를 마주하는 시점에서 국제적 표준에 맞추면서 도 실질적으로 민족의 이익을 도모하고 범세계화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세계화 노선과 전진적⋅개방적 민족주의 노선을 함께 견지해야 하며 엘리트 주도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주체적 역량의 강화가 요청된다고 말했다.51) 기업 경쟁력 강화의 세계화가 국제적 표준으로의 지향의 한 축이라면 민주주의 훈 련이 부족한 내부의 개혁과 민주화는 또 다른 국제적 표준으로의 지향인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 전체의 주체적 역량의 강화와 민주주의 훈련이 부족한 내부 의 개혁과 민주화를 위한 국제적 표준은 무엇이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자 기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와 같이 민족문화와 개인의 근대성⋅합 리성⋅민주성의 재인식 및 개선을 통한 선진국화가 모색될 때, 프랑스에서 정치적 망명자인 홍세화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1995년 한국에서 출간된 것이다. 이는 슬픈 망명생활의 역설적인 효능감의 긍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한국인과 한국사회가 갖춰야 할 정신문 화이자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하며 한국과 프랑스를 비교했다. 
마침 1995년은 유엔창설 50주년이자 마하트마 간디 탄생 125주년을 맞아 유네스코가 11월 16일을 ‘국제 관용의 날(International Day for Tolerance)’로 제정했다. 1995년은 한국 입장에서도 해방 50주년이었고, 일 본은 패전 50주년, 원폭 50주년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일본은 원폭 문제로 충돌했고 일본과 한국은 일본의 역사적 사죄 문제로 갈등이 심했던 해였고 일본 유력인사의 망언이 가장 극심했던 해이기도 했다. 이처럼 1995년은 한
 
51) 김동춘, 「세계화와 한국의 민족주의」(1994), 사회학자 시대에 응답하다, 돌베개, 2017, 
91-105쪽. 
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며 ‘세계화’를 지향했고 ‘똘레랑스의 해’이 자 해방 50주년, 패전 50주년, 종전 50주년, 원폭 50주년의 ‘과거사’의 해였다. 
국내외로 국제관계 변화와 국제적 표준의 변동, 한국(인)의 정체성 재인식 및 발전 모색이 요청될 때 프랑스 이방인 홍세화가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는 한국인에게 정신적⋅공간적⋅역사적으로 너무나 거리감이 있고 거의 알려지 지 않은 낯선 나라였다. 하지만 프랑스혁명과 자유⋅평등⋅박애의 정신, 고등 학교 철학 논술 등은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본 이야기였다. 프랑스는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인 문화국가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오랫 동안 미⋅소 의 대결하에 짓눌렸던 한국에서 프랑스는 반공의 잣대에서 벗어 나 국제적 표준으로 삼고 한국과 비교해 볼 만한 모델이었다. 홍세화는 자신의 똘레랑스 강조가 서구중심주의나 강대국 콤플렉스를 기반한 선진국 담론이 아니라고 변호했다. 홍세화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겠고 그에 대한 비판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한국사회에 똘레랑스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소개했다는 점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을 대단히 강조한 홍세화는 한국이 이념 대립의 
반공국가이자 분단국가이고 오랫동안 군부독재정권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 에 사상의 차이와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진단하며 똘레랑스를 강 조했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작동하는 현 실에서 홍세화의 지적은 타당했다. 홍세화에 의한 똘레랑스의 한국 유입이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소수 엘리트만의 향유로 한정되지 않고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미디어 노출이 많 아지면서 한국인은 어린 학생부터 장년층까지 누구나 한 번은 똘레랑스라는 말을 접할 수 있었다. 똘레랑스가 체화되지 않았더라도 똘레랑스를 매개로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반추하며 성찰해 보는 경험이 공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동춘이 지적한 내부의 민주화를 위한 자기인식을 하는데 똘레랑스가 하나 의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홍세화는 한국전쟁, 69학번 대학생의 반군사파쇼독재 투쟁, 남민전 
사건에 이르는 자신의 과거사를 드러냈다. 한국전쟁으로 가족해체를 당한 전 쟁피해자이자 반정부 투쟁을 한 69학번의 저항적이고 희생적인 삶, 그리고 국가보안법과 남민전 사건에 의한 망명은 일종의 후일담의 성격을 띠며 한국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비극적 자기인식이기도 하다. 이는 자신이 빨갱이, 간첩,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자기변호의 서사이기도 했다. 나는 빠 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왔을 때 같은 해 2월 김남주의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나와 읽히고 있었다. ) 김남주는 홍세화와 마찬가지로 69학 번으로서 3선개헌 반대와 교련반대운동, 지하신문 제작 등을 하다가 제적당하 고 감옥을 갔으며 남민전 사건과 연루되어 15년형을 받았고 1988년 풀려났 다가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은 김남주의 유고시집이었다. 한국인은 1986년 민주화로 인해 형식적 민주주의 를 획득했지만 이를 위해 많은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있었고 김남주와 홍세화 역시 비극적 시대의 희생자의 한 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은 홍세화를 통해 한국의 과거사를 다시 대면해야 했다. 
이처럼 한국인은 프랑스와 똘레랑스, 홍세화의 과거를 마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망명자 홍세화가 진보적 지식인, 언론인으로서 한국에 등장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1999년 서울대학교에서 ‘젊은이의 자아실현과 사회적 책무’ 에 대해 강연을 한 것처럼,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앙가주망을 강조한 그는 한국에 도움이 되는 참여적 지식인이 되고 싶어 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 사가 베스트셀러가 되며 유명세를 얻었고 홍세화의 선후배들이 사회의 중추 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국가폭력의 피해자이자 망명자, 선진문화 의 프랑스를 20여 년이나 경험한 ‘프랑스인’으로서의 홍세화의 정체성이 한국 문화계 및 지식인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마침 외국 유학을 한 진중권이나 박노자 등도 기존 지식사회의 비판적 갱신을 주장하며 한국에 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등장하는 시국이었기 때문에 한국과 비교하는 국제 적 표준으로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다양한 비교군이 등장하는 국면이었
다. 당대 한국인은 이제 맑스 등의 이념서적이 아니라 이러한 유형의 진보적 지식인의 탄생과 이들이 지닌 ‘사회의 눈’을 매개로 하여 진보와 한국사회의 면모를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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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Globalization, Past History in the Mid to Late 1990s and Hong Se-hwa’s I’m a Taxi Driver in Paris
 53)
Lee, Haeng-seon*
In 1995, Hong Se-hwa’s I’m a Taxi Driver in Paris was published in Korea. In the mid-1990s, President Kim Young-sam’s announcement of globalization and WTO accession deeply integrated Korea into the global economic order, and as the word "post-war 50 years" implies, it was a time when anti-Japanese sentiment was strongly triggered by the absurd remarks of influential Japanese people, and the Korea-Japan history issue, which resumed with the Roh Tae-woo administration in the late 1980s, was not properly resolved. Korea’s position and character were asked to be checked in international standards for globalization and the development of national consciousness and culture for a better country. At that time, there were remnants of military dictatorship that had to be overcome because it had not been long since political democratization was acquired. As such, Hong Se-hwa suddenly appeared in Korea along with France and Tolerance, which are economically and culturally advanced countries, at a time when world awareness and self-awareness are requested at the same time. Korean society relativized some of its culture 
 
 * Assistant Professor of Kookmin University, Liberal Arts College
through Hong Se-hwa and France and learned the spirit of Tolerance. In addition, Hong Se-hwa’s epic of self to self-defense made Korean society realize the tragic modern history of Korea compressedly. At the same time, Koreans see the birth and emergence of new progressive intellectuals along with the best-selling book.
Key-words: France, Tolerance, Progress, National Culture, Globalization
논문투고일 2024. 01. 08. 심사완료일 2024. 02. 13. 게재확정일 2024.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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