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경향신문 창간70년 기획 - 공화국을 묻다, 최갑수 교수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 경향신문

공화국의 핵심은 국가가 공공재고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것.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혼자 너무 부자로 잘 살면 부담을 느끼고 심지어 부끄러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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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70년 기획 - 공화국을 묻다, 최갑수 교수

“공화국 시민이라면 빈부 격차를 부끄럽게 느껴야 합니다. ”
2016년 10월 18일

김형규 기자

최갑수 교수
최갑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최갑수 서울대 교수는 서양 혁명사를 전공한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다. 안식년을 맞아 제주도에서 연구 중인 최 교수가 잠시 서울에 들른 지난 8월 10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민주공화국을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 교수는 지금 우리가 지키고 보듬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법에는 인간의 기본권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권력구조 두 가지만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기본권과 관련해 오늘의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가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어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살린다고 하면 기본권 중에서도 사회권이 강조돼야 합니다

―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우리가 60살을 환갑이라고 하지요. 한 사람의 인생만이 아니라 국가도 그런 사이클이 있다고 봅니다. 60년쯤 되면 한 번 혁신을 해야 하거든요. 사실 우리 사회가 해방이 되고 60년쯤 됐을 때 점검을 했어야 됩니다. 그건 일종의 국민적 합의를 모으는 과정이 될 텐데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말했듯이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국 정치사회적 의미에서 최고의 가치를 담는 헌법을 고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헌법에는 크게 보면 딱 두 가지 내용이 들어갑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헌법에는 인간의 기본적 가치, 즉 기본권이 무엇이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반영됩니다. 그리고 그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이 어떻게 구성돼야 하느냐, 즉 권력구조에 대한 내용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본권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아시다시피 미국과 유럽은 견해 차이가 있죠. 미국은 지금도 기본권으로 자유권만 인정합니다. 자유권을 우리가 1세대 인권이라고 하는데요. 2세대 인권은 사회권입니다. 3세대 인권으로 가면 소수자 보호 같은 주제가 등장하면서 이렇게 세대별로 인권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본권은 자유권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권은 굉장히 약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어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살린다고 하면 기본권 중에서도 사회권이 강조돼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복지 강화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겠죠. 그다음에 거기 맞춰서 대통령제가 좋은지 내각책임제가 좋은지 권력구조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헌법은 이미 국회가 국민적 정당성의 가장 원천이 되는 기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헌법 조문에도 국회가 대통령보다 앞에 나옵니다. 그런데 현실에선 대통령이 국회의 힘을 압도하고 있죠. 대한민국이 진정 민주공화국인가를 묻기 위해선 이런 긴장관계를 잘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가 발간한 대한독립선언서. 경향신문 자료사진.
상해 임시정부가 발간한 대한독립선언서. 경향신문 자료사진.

― 헌법이 왜 중요한가요.

“저는 혁명사를 전공한 학자다 보니 그쪽으로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혁명은 그 효과로 볼 때 크게 입헌혁명과 사회혁명으로 나뉩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기본적으로 모든 혁명이 입헌혁명이었습니다. 입헌혁명을 한 중요한 나라들을 보면 17세기 영국혁명, 18세기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있죠. 이 세 나라들은 혁명하고 나서 최강대국이 됐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뒤처진 독일이라든가 이런 나라들에서 야 이거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헌법이 있어야 되는거 아니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전까지 유럽은 대부분 입헌군주제도 아니고 절대군주제였으니까요. 그래서 헌법을 갖는다는 게 무슨 의미냐, 이런 걸 논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도 군주제를 청산하기 위해 일어난 혁명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임금님을 모시고 입헌군주제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헌법을 만든 거죠. 프랑스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만든 1793년 헌법은 큰 나라들 중에선 최초의 진짜 민주공화국 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후로 19세기 말이 되면 정치적 근대성의 경로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영국식 입헌군주제 경로와 프랑스식 민주공화국의 경로가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실 고종은 입헌군주제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요. 우리는 결국 고종이 죽고 3·1운동의 여파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건 세계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19세기 후반에 이미 유럽이 전 지구를 석권하게 되는데, 비유럽 가운데 유럽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당당하게 독립국가를 유지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도 명치유신이라는 입헌혁명을 했죠. 입헌혁명이라는 건 기존 국가권력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권력층과 개혁층이 타협을 해서 헌법을 만드는 겁니다. 왜냐. 헌법이 생기면 나라가 강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여기서 흥미로운 게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유럽의 직접 지배에 떨어지지 않은 나라들은 과거 제국이었던 나라들뿐입니다. 러시아, 이란, 오스만투르크, 중국, 멕시코 이런 나라들이거든요. 그 나라들에서 개혁세력이 들고 일어나서 샤나 짜르나 황제나 이런 기존의 권력자들과 함께 헌법 만드는 운동을 합니다. 그걸 입헌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들이 일종의 벨트를 형성하게 되죠.

그러다가 1917년 러시아혁명이 터지고 나서 혁명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이때부턴 사회혁명입니다. 사회혁명은 기존의 권력을 타도하고 그 토대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혁명의 전술도 바뀌죠. 그 사회혁명의 전술은 소련이 해체되는 1991년까지 이어지고요. 이제 와서 제가 이런 혁명사를 재해석해보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의 입헌혁명이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존 정치질서 내에서 개선을 한다는 점에서 위로부터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직접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의 호소력이 너무 커, 본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권리와 가치를 보듬을 것인가를 깊게 논의하지 못했다

― 지금 헌법도 그런 혁명적 민주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인데요.

“우리 사회가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헌법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때 충분한 합의를 못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개헌은 단순히 권력구조를 바꾸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우리가 지켜야 할 권리와 가치가 뭐냐, 이걸 먼저 치열하게 토론하고 합의를 이뤄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권력구조를 바꿔나가야 됩니다. 물론 당시에는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컸고 그것이 가지는 가치가 나름대로 있었죠. 다만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의 호소력이 너무 커서 본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권리와 가치를 보듬을 것인가를 깊게 논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도 개헌 논의가 나오고 있는데, 이걸 단순히 권력구조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세우고 그것을 국민의 권리라는 방식으로 어떻게 구체화할지 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위로부터의 입헌혁명이 필요한게 아닌가, 이게 요즘 제가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 저희의 기획 취지도 그렇게 새로운 사회계약을 쓰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제가 넓어져야 합니다. 청원의 정의도 확대돼야 하고 의회에서의 의원 소환도 훨씬 더 쉽게 이뤄져야 합니다. 물론 이런 바탕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공통의 가치가 자리잡아야겠죠.참여와 소통, 민주주의 같은… 또 이것들은 권리와 의무라는 법률적 용어로도 해석이 돼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헌법에 들어가면 바로 헌법적 가치가 되는 겁니다. 헌법적 가치는 우리 사회가 합의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개헌 과정에선 이런 원칙과 가치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죠. 방식은 국회가 나서 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 진행하면 됩니다. 전국적으로 공청회도 열고 포럼도 열고 많은 국민이 자유롭게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72학번인데 제가 대학 다닐 땐 아무도 헌법책을 보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든 헌법을 하루아침에 쓰레기로 만들고 유신헌법이란 걸 만들어 맘대로 독재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헌법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거든요. 헌법적 가치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근데 지금은 다르잖아요. 지금 헌법은 우리 국민들이 1987년 민주화 항쟁을 통해 다시 헌법을 살아있는 문서로 만들어낸 겁니다. 70여년 전의 제헌헌법도 제법 잘 만들었습니다. 제헌헌법을 그 정도로 모양 있게 만든 것은 새로운 나라로서 국제적으로 헌법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바꿔 말하면 그 당시의 세계사적 시대정신이 우리 헌법에 반영돼 있는 겁니다. 바로 그런 헌법을 지금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헌법을 한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개헌이 아니라 제2의 제헌에 해당하는, 지금의 시대정신을 담은 그런 헌법을 만들자는 겁니다.”

1974년 서울 당사 앞에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신민당 의원과 당직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4년 서울 당사 앞에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신민당 의원과 당직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말씀하신 그런 시대정신과 가치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야 할까요.

소극적 자유, 소유권, 사회권…
그리고 환경권과 인간의 유적 정체성을 아우르는 미래의 인권

“우리가 인권이나 기본권이란 말을 흔히 쓰지만 간단한 개념이 아닙니다. 1948년 UN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는데 그때 인권의 핵심내용을 놓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간 견해가 엇갈렸습니다.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세력은 자유권을 강조했는데, 이들은 자유를 ‘강제의 부재’로 해석합니다. 소극적 자유라고도 하죠. 재밌는 건 자본주의에선 자유권에 소유권을 집어넣습니다. 이걸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굉장한 논쟁거리인데요. 소유권이 절대화되면 평등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는 소유권을 상대화하자는 건데 이게 바로 사회권입니다. 사회권은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권리를 인정하는 겁니다. 만약 일자리 제공이 안 되면 당연히 실업수당이 제공돼야겠죠. 이걸 2세대 인권이라고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국제인권규약은 A와 B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가 사회권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자유권에 관한 것입니다. 미국은 아직도 A 회원국이 아니고, 우리라나는 A에 들어가긴 했지만 유보 단서를 달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사회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인 겁니다. 이것도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겠죠.

3세대 인권은 환경권이 대표적입니다. 4세대 인권은 인간의 유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유전자 조작 문제가 대표적이고요. 최근 화제가 된 인공지능(AI)도 여기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런 가치관에 관한 문제들은 곧 우리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나중에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례도 줄줄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까지 논의가 돼야 합니다".

올해 3월 벌어진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 천재 이세돌의 대결은 우리 사회에도 인간의 정체성과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올해 3월 벌어진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 천재 이세돌의 대결은 우리 사회에도 인간의 정체성과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우리 모두의 공공성의 총합

"물론 이런 논의를 모두가 처음부터 같이 할 수는 없고 전문가 집단이 쟁점을 정리하면 국민들이 결정을 해야 합니다. 특히 이 결정을 사법기관이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국회가 결정한 걸 어떻게 헌법재판소가 뒤집습니까. 국회는 국민의 신임을 받은 대의기관이지만 헌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건 정치의 사법화가 되는 겁니다. 해서 전문가 집단이 치밀한 논의를 거쳐 보고서를 내면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가치가 존중받아야 하고 하는 것들을 새롭게 규정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고 거기에 맞춰서 어떤 권력구조가 적절한가를 따져 결정하면 됩니다. 이건 국회가 논의를 주도해서 4년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제들이고 상당 부분 타협이 필요할 겁니다.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지금 자유권조차 제대로 반영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만약 헌법을 만드는 게 힘이 든다면, 그 유명한 프랑스 인권선언처럼 추상적이더라도 어떤 원칙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헌법의 전문(前文)인데, 정식 명칭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입니다. 그런 형태로 새로운 기본권과 권력구조에 대한 내용을 담는 것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가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가가 아닙니다. 대통령과 행정부는 그 시점의 국가를 대표할 뿐입니다.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우리 모두의 공공성의 총합입니다. 이게 국가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바로 국가인 겁니다. 군림하는 대통령한테는 우리가 국가고, 너는 우리의 대리인이고 하수인일 뿐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옛날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 스스로가 나랏님이라는 것, 이게 민주공화국의 핵심 원리가 돼야 합니다.”"

―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최근의 사건을 꼽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라가 있고 국가가 존재하는 것. 안전은 개인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저는 외교에서 많이 느낍니다. 외국 나가보면 거기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이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프랑스 니스 테러 때도 그래서 한바탕 문제가 됐죠. 파리 외곽에 가면 ‘시떼 앵떼르나시오날’이란 게 있습니다. 영어로 인터내셔널 시티, 국제도시란 뜻인데 실제 도시는 아니고 대학교 기숙사입니다. 프랑스는 대학이 다 국가 소유니까 학생들 기숙사를 파리 근교에 한 데 모아놓은 겁니다. 그 안에는 국제적 친선을 도모한다고 유학생 출신국마다 미국관, 영국관, 독일관 이렇게 꾸며놓고 절반씩은 타국 학생들이 섞여서 지내고 도서관은 24시간 돌아가고 그런 근사한 체제입니다. 1980년대 초반에 삼성이 돈을 대서 여기에 한국관을 짓기로 했는데 정부에서 막았습니다. 왜냐. 학생들이 모여서 데모할까봐 그랬습니다. 이런 게 단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당시 외교관들은 외국 나가면 교민 감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행태가 아직도 안 바뀌고 그대롭니다. 우리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거는 외국에 나가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외교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자국민 보호인데 제대로 안 하는 거죠. 오히려 짜증을 부리고 고압적으로 나오는 행태가 요즘도 그대로지 않습니까.

제가 인권선언 분석을 한 게 있습니다. 인권선언은 공식 문건만 4개인데 거기에 기본권에 관한 20~30개 조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자유와 안전, 그리고 소유권입니다. 이건 그 당시에 인간이 기본권이 무엇이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부터 모든 혁명의 인권선언에는 전부 안전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라가 있고 국가가 존재하는 겁니다. 안전은 개인이 책임질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가습기 살균제 문제도 그렇고 우리는 국가가 완전히 임무를 방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묻게 되는 겁니다. 우리 헌법에 보면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죽 나열돼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과 자유… 그런데 우리 사회에 양심의 자유가 진짜 있습니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여전히 처벌받고 대체복무가 안되고 있잖아요. 문제가 심각합니다. 헌법 조문에는 들어가 있어도 실제 지켜지지 않는 게 태반이고 또 헌법적 권리가 실현되게끔 권력구조가 되어있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 법정에서 재판관들을 기다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 서성일 기자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 법정에서 재판관들을 기다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 서성일 기자

국회 주도하에 정당, 중요한 시민단체들 모두 모여서 논의를 이어가야

"그러니까 이런 논의를 할수록 결국 새로운 사회계약에 대한 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보듬어야 할 중요한 가치와 덕목이 무엇인지 합의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정치적 덕목의 총체가 사실은 민주주의가 되는 겁니다. 예전처럼 왕권신수설이라든가 귀족의 피는 다르다든가 이건 아니잖아요. 인민의 의지 외에는 권력의 정당성을 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경우 국가가 곧 민주주의고 공화국이 되는 겁니다. 다른 게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실제로 우리가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냐 하면 그건 별개의 문제겠지요. 아니라고 하면 그렇게 갈 수 있도록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 작업은 국회가 해야 합니다. 국회가 주도해서 정당만이 아니라 중요한 시민단체들 다 모여서 연석회의 형태로 논의를 이어가야 합니다. 다같이 하는 게 힘들면 대표자 뽑아서 전문위원 지정하고 문건 만들고 토론하고 합의 만들어내고… 그 토대 위에서 권력구조를 어떻게 가져갈 건가 고민해야 합니다. 다음 대선에서도 대권주자들이 이걸 공약으로 내걸고 치열하게 토론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임기 안에 국민의 뜻을 모아 제2의 제헌에 준하는 새로운 형태의 헌법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정부 재조직이 아니라 국가 재조직을 해야 합니다.”

―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더 무너졌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헌법이 바뀐 건 아니지만 그 정신은 엄청 후퇴했다고 봅니다. 특히 이번 정부는 전임 이명박 정부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인데 지금 하는 것을 보면 꼭 군주제 같습니다. 대통령 자신이 민주공화국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 같고… 총선에 그렇게 참패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일방통행 하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권력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요.”

― 공화국이 뭔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공화국의 핵심은 국가가 공공재고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나만 혼자 너무 부자로 잘 살면 부담을 느끼고 심지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공화주의 원리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소수만 너무 잘 살면 공화국의 수치가 되는 겁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강윤중 기자
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강윤중 기자

루소가 꿈꿨던 이상사회, 민주공화국의 정신은 노동력을 팔더라도 자기몸의 주인은 자신이 되는 노예되지 않는 것

“프랑스혁명 당시 산악파의 인권선언을 보면 노동과 인격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근대 세계의 지배 원리를 밝힌 것인데, 요약하면 먹고 살기 위해 한쪽은 고용하고 한쪽은 노동력을 파는 것이 당연해도 자신의 인격까지 팔 수는 없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대신 그러려면 빈부의 차가 커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당시 프랑스는 빈부 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게 루소가 꿈꿨던 이상사회고 민주공화국의 정신이죠. 이것이 유지되려면 자기 몸의 주인은 자신이되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팔 수 있고 그러면서도 남의 머슴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사적인 영역에선 자본주의, 공적인 영역에선 민주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거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누가 연봉으로 5000만원을 준다고 하면 내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버는 계약관계라고 생각하겠지만, 10억원을 주고 100억원을 준다면 어떨까요. 그때도 과연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만 파는 거라고 생각할까요. 내 자신이 돈을 주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요즘 보면 재벌들이 ‘너희는 다 내 머슴들 아니야’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래서 민주공화국이 건강하게 돌아가기 위해선 빈부 격차를 줄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사회권이 적극적으로 보장돼야 합니다.”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 특별취재팀은 지난 7~9월 지식인 40여명과 기획 자문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움 주신 분들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게재 전 보완 과정을 거쳤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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